제 8강
지난 시간에 ‘왕은 다윗 언약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라고 했어요. 마치 여호수아가 모세가 했던 언약을 그냥 수행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역할이고, 솔로몬 같은 경우에 솔로몬이 받은 지혜는 그 출처가 고정되어 있어요. 솔로몬의 언약이란 말은 없습니다. 다윗 언약이죠.
다윗이 받은 언약이 솔로몬에게 어떻게 구체화되느냐? 그걸 증거하는 것이 솔로몬의 존재 의민데, 이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더니만 응답을 받았어요. 일천번제라는 것은 일천 번의 번제의 양을 한꺼번에 드리는 걸 말합니다. 그렇게 엄청나고 성대한 번제를 드렸는데 거기에 기도의 응답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지혜를 얻는 거예요.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받았다는 말은, 곧 ‘솔로몬이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잠언 21:1절에 보면,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했어요. 25:2절은 아주 결정적인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둘이 다 해 먹는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하고 왕 둘이서 다 해 먹는 거예요. 왜냐하면 왕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통로를 백성에게 제시하지 않아요. 일방통행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왕, 다윗 언약은 왕 중심이니까.
왜 왕 중심입니까? 지난 시간에 했지요. 다윗이 왕의 입장에서 죄인임을 드러냈으니까. 제사법의 완성, 죄와 피가 만나야 되니까 다른 계통은 안 돼요. 모든 것이 왕을 통해서 주어지고, 올라가는 것도 왕을 통해서 올라가기 때문에, 백성들 입장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왕만 보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왕과 백성이 같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글에 그렇게 썼어요. 사람이 인생의 길을 가는데 천국 가는 길을 가게 되면 천국이 보이지 않고 십자가부터 먼저 보이지요. 그 십자가 속에 천국이 있는 겁니다. 천국부터 먼저 보이는 것은 이단이죠. 십자가 속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든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간다.’(빌2:10-11) 말이 이상하지요?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로 간데요. 십자가의 길을 가야 거기에 영생이 있고 다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왕이 세상 전체를 다 해 먹어요. 그 왕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뒤에 뭐가 붙어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지정하신 왕은 오직 예수 당신뿐입니다. 부처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마음은 왕 당신에게 있고, 예수님 당신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잠언 16: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다.”고 합니다. 결정적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다.’ 이것이 다윗 언약의 특징입니다. ‘나는 왕을 앞장세워 내 백성들과 상대하겠다. 정말 네가 여호와께 오려면, 내가 보낸 왕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걸 통과해서 오너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라는 말로 ‘예수님 당신은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다른 통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로이드존스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예수를 믿으면 지옥가고, 주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지요. 예수 앞에 ‘주’가 붙어야 합니다. 나의 주님.
로이드존스가 이것까지는 알았는데, 그 주님으로부터 쏟아지는 게 있다는 것까지 해야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된 거지요. 주님이 하시는 몫이 있어야 되는데, ‘주 예수’ 부르고 그 다음 나머지 몫은 자기가 채우려는 것은 ‘주’ 개념과 안 맞지요.
자, 그렇다면 이 지혜가 주어졌을 때,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통로는 안 됩니다. 누구한테만 옵니까? 왕을 통해서 내려옵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에 고정되었고, 그 다윗 언약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소경을 낫게 할 때 소경이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마20:30) 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지정된 통로를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다른데 눈 돌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 왕에게만 고정시키겠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지혜를 줬는데, 솔로몬이 갖고 있는 지혜 가운데 제일 특징을 나타내는, ‘솔로몬이 받은 지혜가 진짜 하나님의 지혜 맞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재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
솔로몬의 지판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런 지혜를 대변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솔로몬의 재판 진행과정을 다 알고 난 뒤에는 ‘그것은 사법 연수원생도 다 아는 건데’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이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겁니다.
‘솔로몬의 판결정도는 나도 하겠다.’ 라고 생각하신다면 솔로몬 재판의 진수를 빼먹은 거예요. 솔로몬의 지혜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 중요한 것을 캐치해 낼 수가 없습니다.
두 창기가 각자 나은 아이를 옆에 두고 잠을 잤는데, A라는 창기가 몸부림을 치고 B도 몸부림 쳤어요. 아침에 보니까 한 아기는 압사해서 죽고 한 아기는 살아남았단 말이지요. 일찍 눈뜬 A창기가 보니까 자기 아이가 죽었거든요. 그래서 B의 아기를 자기 옆에 눕히고 죽은 아기는 B 쪽으로 눕히고 모른 척하고 자고 있었어요. B가 눈을 떠보니까 자기 아이가 A 옆에 누워 있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그 아기를 자기 옆으로 누이려고 하니까 왜 내 아기를 가지고 가느냐고 다툼이 일어났어요.
자, 산 아기가 누구의 아기냐? 나중 판결을 받고 보니 A는 어리석은 자로 판명 났습니다. 어쨌든 두 창기는 그 아이가 누구의 아기인줄 알아요.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내막에 제 3자가 끼어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은 산자의 입장에서 등장해서 이 사람들의 내막을 들춰낸다는 데서 핵심이 있어요. 제 3자가 개입한다는 겁니다. 과학수사 한 게 아닙니다.
A도 B도 아닌 제 3자가 개입해서 진실을 밝혀요. 그렇다면 제 3자 C라는 사람, 여기서는 누구냐 하면 솔로몬이죠. 제 3자 솔로몬은 그야말로 제 3자가 되면 안 되고, 이 어리석은 A라는 여자가 아기를 죽이는 그것까지, 또 B라는 여자가 자기 아이를 잃어버리게 되는 그 아픔까지 몽땅 위의 차원, 즉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실을 하나님이 지정한 왕도 같이 공유할 때만 왕이 지혜자로서 관여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되는 겁니다.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성전세를 안 냈다”고 다그칠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마17:27)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기 입 속에 동전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고기 입속에서 동전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예수님은 고기가 움직이는 것까지 다 아십니다. 문제는 고기가 동전을 물고 있었는데 그것을 주님이 아셨는지, 아니면 고기 속에 동전이 없었는데 주님께서 동전을 있게 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고기 잡아서 입을 벌여보니까 동전이 나왔고, 그 돈으로 성전세를 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연보 궤에 헌금을 할 때 다른 사람은 얼마를 헌금 했는지 몰랐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 과부가 전 제산(두 렙돈)을 헌금했다는 것을 압니다(막12:43-44). 또 주님은 자기가 탈 나귀가 어느 집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냥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막11:1-2). 가룟 유다 속에 이미 사단이 들어간 것도 아셨습니다(눅22:3). 모든 것을 아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솔로몬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남들 보기에는 제 3자지만, 그래서 제 3자가 관여할 자격도 없지만, 이 불가능성,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유일한 지혜자는 주님께서 지정한 왕이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재판을 어떻게 진행 했을까요? 잠언 29:14절에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왕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가난한 자의 입장을 성실히 들어주는 그런 위치에 있다면 너는 왕 계속해.’ 그런 뜻이거든요.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도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부르짖는 게 있고, 결핍을 느끼면서 하나님 외에 달리 의지할 데가 없는 거예요.
가슴 아픈 한 맺힌 B라는 여인은 바로 솔로몬 왕에게 호소를 한 겁니다. 그러나 A는 호소할 리가 없지요.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고 챙겼으니까. 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는 이러한 느낌이 계속해서 뭘 유도하는가 하면 지혜의 노선을 주목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 어리석은 자, 건방진 자를 슬기로운 자로 모으기 위해서 그들의 꿈이 깨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난데없이 자기 자신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구원 받는 것도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어느 시점에서 확연히 깨닫게 해서,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져야 되지 내가 스스로 나를 격려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러한 사태들을 일으키지요.
사도바울이 사울 시절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행22:8) 이게 말이 안 돼요. 호칭이 ‘주여’라고 했는데, 주는 주에요. 그런데 사울은 ‘주’라고 했지만 실제적으로 ‘주’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괄호를 친 상태입니다. 모르는 거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주님이란 말이죠.
내가 알지 못하는 주님으로 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최고의 학벌을 가진 자기로서는 ‘주’라는 내용은 괄호(비어있음)입니다. 이 빈 칸을 누가 채워줍니까? 주님은 “나는 나사렛 예수다.”(행22:8)라고 했어요. 그 당시 나사렛 예수는 이단이었습니다.
이게 뭐와 같은고 하면, 내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주님이 나타났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문선명이다.” 이런 식이에요. 나사렛 예수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단이었어요. 이것은 바로 주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사울의 관념이 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핍을 느껴야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도 엉터리고 내가 믿는 것도 다 허상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제 3자가 개입한 요소가 우리 신앙의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은사라고 하는데, 은사는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기존에 있던 것은 뭐냐 하면 허공이에요. 조용필 노래에 나오지요.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 허공이에요.
잠언이 우리 속에 들어가면 잠언 속에 있는 말씀끼리 마치 테니스장의 공처럼,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허공이 되어버리고 허공 속의 말씀이 저희들끼리 왔다 갔다 하고 난리입니다.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 속은 말씀이 노니는 운동장입니다. 뭘 지킬 것도 없어요. 그 말씀 중에 보니까 “웅이 아빠는 죽었고 ~” 해서 보니까 죽었어요.
제가 그 [웃찾사] 코미디를 보면서 얼마나 큰 힌트를 얻었는지, 무대에 선 본인은 전혀 죽을 마음이 없는데 갑자기 변사(성우)가 “웅이 아빠는 죽었고 ~” 하면 죽어야 돼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황전도사님 큰아들 이름이 웅이데요(김세웅).
나에게 누적된 것들은 다 허구이며 망상인줄 아시고, 이 허공 속에 말씀이 자기들끼리 놀도록 방치하세요.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말씀이 너희 속에 역사하느니라.’ 지키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지혜가 들어온 겁니다. 그렇다면 창녀 A, B는 아직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서로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해요. B는 억울하다고 하고, A는 모른 척하고 있을 때 지혜가 들어오지요. 그런데 이 지혜의 내용이 뭔가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하실 일이거든요.
메시아가 왕으로서 할 일이 뭐냐 하면, 가난한 자를 신원해 주시는, 자기 태만이나 방탕 때문이 아니라, 그야말로 어떤 사회적 조건이나 타고난 조건 때문에 억울하게 ‘너는 저주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그 인식이 사실은 저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지혜의 노선을 개입시키려는 그분의 작용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지혜가 내려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무엘상 1장에 보면,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입니다.
한나가 아들 없다고 브닌나한테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브닌나는 아들 있다고 큰소리 쳤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너를 젖히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으니까 내가 복 받은 것 맞잖아.’ 구약에 보면 자식이 없는 것은 저주 받은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너는 저주 받아 지옥 간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한나가 얼마나 한이 맺혔든지 성전에서 막 울고 고함치면서 기도를 하니까 엘리 제사장은 술 취한 여인인줄 알았어요.
한나가 얼마나 한이 맺혔든지 그 한 맺힌 기도가 사무엘상 2장에 나와요. 그 내용을 보면 ‘교만한 자를 치시고,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 이렇게 쭉 나옵니다. 그 한나의 찬양을 그대로 복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잉태할 때 불렀던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지요. 그 찬양대로 마리아의 뱃속에 있던 어떤 분이 엄마가 불렀던 그 찬양의 내용대로 이 세상에서 그대로 일을 합니다.
이게 뭐냐? 오늘 잠언의 말씀,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네가 나쁜 짓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고 방탕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가난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명기에서는 ‘이웃 환대법’이라고 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세상에서 자기 소유의 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 되는데 그 딛을 땅이 없을 때, 이걸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라고 합니다. 떠돌아 다녀야 돼요.
땅이 없다는 것은 자기 소유의 재산이 없다는 것이고, 땅이 없으면 자기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되니까 어디를 가도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이들이 떠돌아다니므로 사람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가 구분 됩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제가 한번 시험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제가 잠자리채를 들고 헌금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하고 똑같아요. 넣는 사람이 있고 안 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잠언에 나오는 구제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쪽이 그야말로 긍휼을 이해하는가?
긍휼은 그저 주시는 거죠. 어느 쪽이 긍휼을 이해하느냐? 이것은 바꿔 말하면 어느 쪽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느냐?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긍휼이 있을 수 없거든요. 만약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뭘 달라고 하면 이것은 긍휼이 아니고 당연히 받을 권리가 되어버리죠.
진정한 기도는 포기입니다. 무능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주님께서 왕으로써, 지혜자로써 보시기에 어느 쪽이 의미 있는 기도를 했습니까? 포기한 사람이잖아요. 이 사람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라고 하면서 자기 의를 포기한 거예요.
그런데 다른 한쪽은 상당히 대비적이지요.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물론 노숙자가 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노선은 지옥 가는 노선이죠.
그러니까 복음적인 안목으로 보면, 교회가 지옥 가는 것을 아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집단 같아요. ‘목사님, 이번 주는 바빠서 교회 못가겠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장사가 잘 되는지’ 꼭 지옥 가는 것을 자랑하는 것 같아요.
구조적, 사회적 소외자. 강제로 떠밀려서 가난하게 된 사람. 이것을 가지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꼬박꼬박 교회 나와요. 딴 데는 놀 곳도 없고 딴 데는 점심을 안 주니까. 별 볼일 있는 사람들은 교회 못 나오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여깁니다. “얼마나 바쁜지. 성수기 한 달 간은 교회 못가겠습니다.”
긍휼이 필요 없는, 이제 자기 힘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그런 자랑스런 한국인. 이게 심각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말합니다. “어미야, 그 아기 포기해라.” 진짜 엄마를 향한 무언의 말이죠. 진짜 엄마가 ‘예, 포기합니다.’ “아기를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세요. 내가 아기 포기합니다.” 포기하는 것과 포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저 주심 이 3자가 만날 때 구원 받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방탕하고 게으르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서 또는 어떤 환경 때문에,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안 계신다든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든지 그럴 때, 결국 그들에게는 이 사회가 결코 살만한 사회가 못 된다는 것을, 부자들은 살만한 사회지만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그 사회에 정붙일 곳이 없어요.
집나간 탕자가 재벌이 되었으면 절대 아버지 집으로 안 돌아오지요. 미쳤다고 돌아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감사한지, 재산 다 날려버렸어요. 그 탕자가 재산 날릴 때 설마 탕자는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자기는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너는 원래 망해야 돼.” 탕자가 망해봐야 자기 손에 있는 가락지가 은혜인줄 알고, 자기가 입은 옷이 은혜인줄 알고, 자기가 먹는 쇠고기가 아버지 은혜인줄 알지요.
자기 돈으로 가락지 사고, 자기 소득으로 옷 사고 했으면, 아버지 은혜는 모르고 명절에 고향에 한 번씩 와서 가락지 자랑하고 다닐 거예요. ‘이건 내가 벌었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것은 포기가 아니잖아요. 긍휼이 아니에요. 몽땅 다 잃고 집에 돌아오니까 결국 자기는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도 황공합니다(눅15:21).’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야구 중계를 봐도 은혜로 봐야 돼요. 어떻게 은혜로 보느냐? ‘2번 타자 이형규 삼진 아웃!’다음에 또 나와서 삼진 아웃! 다음에 또 삼진 아웃. 군중들은 “빼라. 내 보내라.” 하고 난리를 칩니다. 감독은 그래도 빼지 않고 계속 뛰게 합니다. 이럴 경우 이형규 선수는 얼마나 감독에게 감사하겠습니까?
강제로 가난하게 되었다면 주께서 강제로 구원시켜 줍니다. 내가 가난하게 된 것이 불가항력인 것처럼, 가난한 내가 구원 받는 것 역시 불가능하죠. 그것이 주님의 개입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 왕이 해야 될 역할입니다.
또 하나의 역할은 뭐냐? B라는 여인의 아기를 죽이려 해서, 자기 아기를 포기하게 하고, 하나님께 호소했더니만 하나님의 지혜가 등장하는 기회로 삼는 동시에, 자기만 생각해서 남의 아기를 빼앗으려는 A라는 여인의 어리석음을 처벌하는 그 일도 왕이 해요.
제가 둘째시간에 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 아들이 아닌 자를 완전히 저주하는 일도 같이 동반해서 일어난다고 했지요. 그것이 바로 잠언에 나옵니다. 잠언 20:2절에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왕은, 그리스도는 바보 병신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중인격자라고 해요. ‘자비를 말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해놓고 지옥은 왜 만들었느냐? 이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다. 자비의 하나님이라면 아예 지옥을 없애버려야 그것이 자비지, 어떻게 자기가 만든 인간을 영원한 형벌에 집어넣느냐?’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지혜 중심이지 사람 중심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오해를 한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지혜를 사랑하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만 사랑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그분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거예요. 개개인 사정 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속성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하나의 배치물,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자비의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있으면 있을수록 자비의 가치는 점점 더 빛이 나지요. ‘나도 진노 받아야 마땅한데 주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자비의 가치가 점점 더 빛이 난단 말이지요.
지옥이 있으매 거지 나사로가 간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알고, 지옥이 있어야 천국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최종 도착 지점인가를 확연하게 느낍니다. 이것은 완전히 고정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을 가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 위주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왕에 대해서 설명했어요. 이제 왕의 지혜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이것이 우리 교재 8페이지에 나오는데, “하나님에 대한 의지함이 자신을 공의와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한다.”
잠언 24:11절에 “너는 사람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그렇게 되어 있고, 22:9절에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그 다음 3:27- 28절에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이건 왜냐 하면, 우리는 지혜를 운반하는 운반체거든요. 운반체이기에 제가 잠자리채 들고 헌금 거두듯이 쭉 돌리는 거예요. ‘이것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라고 돌리는 겁니다. ‘이것은 거저 주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라고 돌리는 거예요.
이 자비가 신약 성경에는 뭐로 되느냐 하면, 거저 주시는 복음이 돼요. 구제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백날 해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지금 구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자랑 할 수밖에 없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선을 베풀 때 ‘자선의 주체자가 지혜이냐, 아니면 너냐?’를 따지는 겁니다. 신약 시대에.
아까 조용필 노래에 뭐라고 했지요?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 허공이지요. 자신이 허공 같으면 허공 속에서 뭔가 이뤄질 때는 주체가 누가 되지요? 지혜가 들어와서 자선을 베풀어야 되지요.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돈 몇 푼 받는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잖아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내가 받은 상을 너희에게 나눠주는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사도바울 아닙니까. 지금 상을 나눠준다는 자체가 나는 이미 상을 받았다는 뜻이지요.
‘복음을 나눠주는 이것이 내 상이다.’ 그래서 ‘나는 값없이 전한다.’고 했어요. 금이나 은을 탐하는 것 없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해서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주 준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선이나 자비를 베풀 그런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내 손에 들어오면 내 것이지 다른 사람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구제를 해도 내가 구제한다.’ 그런 고집이 있어요.
그래서 뭔가 통과하듯이 통과해서 전달할 때에(운반체니까) 순수하게 복음으로 전달하려면 그 와중에서 우리 자체에 어떤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 자체에.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남들은 결과를 봐요. ‘야, 너는 고아원에 뭘 도와줬구나. 이웃 사랑했네.’ 결과를 보지만, 정작 복음을 아는 사람은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자존심이 깨어지느냐, 주님께서 남을 손대시는 것이 아니고, 남을 손대는 그것을 통해서 주께서 나를 손질한다는 것. 나로 하여금 자기부인하게 하고 낮추는 개기로서 주위에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 거예요. 어떤 사건을 자꾸 일으키는 겁니다.
여기 잠언에 있는 구제에 대해서 몇 구절을 봅시다. 11:25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어느 인간도 이 구절 보면서 그 뒷부분의 말씀 ‘풍족해 진다. 윤택하여 진다.’ 그것 놓치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헤헤거리면서 구제를 한단 말이지요. ‘구제를 통해서 부자 되자.’ 뭐 이런 마음으로. 또 그런 간증들도 많고.
19: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완전 돈 놓고 돈 먹기 아닙니까. 구제해서 칭찬 받고 자기는 돈 벌고. 이런 장사 누가 안 하겠냔 말이지요.
28:27절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3:27절에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잠언을 스케너가 지나가듯 지나가요. 쭉 지나가다가 이 구제 대목에 와서는 사람들이 백이면 백 다 구제에는 관심이 없고, 뒷부분에 ‘주께서 갚아 주신다. 윤택해 지고 풍족해 진다.’ 여기에 전부 눈독을 드린단 말이지요. 그렇게 되기 마련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두 번째 보게 되면, 말씀대로 한 번 해 봤는데 영 실적이 안 좋아. 뭔가 하나님께 속았다는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문제는 구제의 주체가, 쉽게 합시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 뒤에 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보지 않고 가난한 자만 봐서 결과를 챙기려고 하는, 반사되어서 다시 나한테 와버리는 거예요. ‘주여, 저 구제했습니다. 약속대로 복 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자를 누가 가난하게 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가난케 해서 가난한 자 속에 가난하게 만든 그 당사자, 주체자가 거기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 말씀에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소자를 뚫고 예수님까지 가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고 ‘내가 주체니까 저한테 왔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몽땅 사기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를 뚫어서 예수님께 도달되는 구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 곁에 주님 오셔서 주님이 시키는 구제는 이것을 뚫고 지나가서 주님이 주님에게 하는 것으로 가고 나는 그냥 운반자, 매개체 역할만 해요. 이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요셉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형제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형들은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복수할까봐 겁을 내고 있을 때 요셉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하고 안심 시키지요. 요셉 자신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하나의 운반자, 매개체 역할을 한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요셉의 모든 꿈은 깨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 꿈을 꾼 주체자는 누구입니까? 요셉 본인이니까. 그래서 그 꿈이 깨어질 때, 사실은 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깨어지는데, 이렇게 될 때 요셉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보인다 이 말입니다. 잠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야 돼요. 주체를 깨는 해석을 해야 돼요.
신약시대의 구제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놀랍게도 가져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구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노동한 것을 남이 가져가도록 주께서 조치하는 그런 구제를 하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누가 구제를 많이 했느냐? 억울하게 가난한 자가 가장 희생을 많이 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놈이 자기의 것을 내 놓겠습니까? 만약 자기의 것을 내 놓으면 그것은 동냥이 되지요. 구제가 아니라 동냥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타의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쫄지에 노동은 자기가 했는데 영 부자 되지를 않아. 그러면 그것을 누가 가져갔다? 다른 사람이 가져간 거예요. 그 예가 바로 신약의 잠언이라 할 수 있는 야고보서에요.
이번 시간 끝나고 난 후에 남은 두 시간 동안 잠언을 1장부터 31장까지 이야기를 만들어서 쭉 잇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떠나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할 수 없어요. 잠언 1장부터 31장까지 한 줄거리로 다 떼버리겠습니다. 시속 100Km로 달립니다. 이미 기초가 다 되어 있으니까. 녹음되니까 못 들은 사람은 나중에 또 들으면 됩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야고보서 5장에 보면 본인이 자선을 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을 했어요. 노동을 했는데 그 품삯을 못 받았습니다. 부자가 다 가져갔어요. 자기가 노동한 정당한 품삯을 받지 못하고 누가 다 가져가 버렸어요. 그럴 때 이 가난한 자는 누구를 기다리느냐 하면 바로 오실 심판주를 기다리죠. 마치 아까 이야기 한 아기 빼앗긴 여인 같아요. 심판주를 기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서를 계속 보면, 부자에게 저주를 퍼붓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에게는 ‘걱정하지 마라. 주의 강림이 가까웠다. 그분이 다 갚아 주신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갚아 줍니까, 안 갚아 줍니까? 갚아줄 게 없어요. 막상 주님 만나면 ‘억울합니다.’라는 말이 쑥 들어가 버려요.
지혜자 중 최고의 지혜자가 누구냐 하면 욥 아닙니까. 욥이 자기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다가 막상 폭풍 가운데서 주님 만나니까 뭐라고 합니까?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4) 라고 하지요.
‘염소가 새기 낳을 때 너 있었나? 하늘의 별을 만들 때 네가 있었나?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뭐가 억울하다고 떠들어? 내가 너에게 고난 준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준 것인데 네가 왜 말이 많아.’
‘뭐? 억울하다고. 품삯을 빼앗겼다고?’ 장차 누릴 천국에 가면 그런 것은 푼돈입니다. 주님 주시는 사랑에 비하면 세상에서 품삯 빼앗긴 것은 푼돈도 안 됩니다.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부자가 임금한테 큰 부채(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아놓고, 자기는 자기 종들이 100데나리온 빌려간 것을 안 갚는다고 옥에 가뒀어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가 나서 당장 그놈을 하옥하라고 해서 옥에 가두지요.
‘억울하다’는 말은 아직 주체가 살아 있다는 말이고, 주체가 살아있는 이상은 아무리 구제를 해도 그 구제는 노림수(내가 구제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를 가지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 안 합니다.
그럼 뭐냐? 우리 몸뚱이자체가 주님만의 구제를 운반하는 운반체에 불과합니다. ‘자, 여기 억울하게 당한 사람 간다.’ 이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운반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제나 자선이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주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사람들이 제일 이상하게 여기는 대목을 보고 이번 시간은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2:17) 그러면 수학에서 두 항 방정식에서 ‘죽은 믿음’ = ‘행함 없는 믿음’이잖아요. 같은 것 삭제하면 남은 것은 뭡니까? 행함이죠.
이 행함이 어떤 행함이냐 하면, 다른 말로 하면 ‘구원 받을 행함이 없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을 행함이 있어야 구원 받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 받을 행함이 없을 경우에 뭘 내세우느냐 하면 꼭 믿음을 내세워요. 그러니까 야고보가 하는 말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 받을 행함이 뭐냐? 이게 미친 행함이에요.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한 것과 아비가 자기 자식 죽이는 것.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인간으로는 있을 수 없는 행함을 하나의, 그러니까 죽지 않는 믿음의 대변인으로써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에요.
모세 법에 있어서는 ‘믿으라’ 하면 돼요. 그러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야고보서가 지혜의 관점이니까, 지혜의 관점에서는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고, 구원 받을 행함을 내 놓으면 구원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 행함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지요.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 의존하는 그 행함, 자기가 깨어지는 행함.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식 바치면서 자기를 포기했고,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주면서 자기 조국과 백성을 배신한 거예요. 자기 포기에요. 그런 행함이 야고보서의 전체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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