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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86강 / 계20장 5-6 (첫째 부활)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86강 / 계20장 5-6 (첫째 부활)

정인순 2010. 12. 3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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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첫 째 부활

 

2007년 11월 1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0:5-6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세상은 교회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마음대로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친히 말씀을 가지고 현실을 만들어 내십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째 부활이라는 아이디어는 우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식으로 보지를 않지요. 우리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 살아남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아야 될 정도로 부활이란 엄청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죽게 되어 있는데, 그 죽음조차 벗겨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오랫동안 지니고 온 우리의 현실관을 무용지물로 만들 이야기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은지 오래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우리들 우루루 몰려가서 그 사람에게 ‘다시 살아날 비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릴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부활로 이어지는 경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어찌어찌 하니까 반드시 부활되게 되어있다’라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자는 그냥 아무런 능력없이 죽음,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활되는 방법이 아니라 도리어 왜 우리는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있는 자’로 인정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생각이나 행동을 우리 자신부터 출발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던져진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만의 세상을 따로 건설하기 위해서 분투노력입니다. 그 안목에서 세상을 보니 세상 전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계 건설에 필요한 노선만 동원하는데 급급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실들과 다른 현상들은 모두 배제하고 제거해 버린다는 겁니다. 즉 진리라는 것은 전체를 다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경우만 선별해서 골아잡아 묶어놓고서는 마치 바르게 사는 것처럼 오해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착각이요 환상이요 허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을 모릅니다. 오로지 진보만 생각합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진보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노선만 고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활을 우리에게 들이댑니다. 부활이란 이미 죽음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성립된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죽어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그냥 던져진 존재입니다. 던져진 처지에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던져진 존재들이 설쳐대는 것은 자기가 놓인 그 자리에서 자신을 살려내는 일과 노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고는 목적을 실제로 쥐었다 할지라도 쉽게 허무로 마감됩니다. 거기서 일어서 허무하지 않는 단일 노선을 또 궁리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자기에게 관련없는 것은 다 제켜 놓고서는 말입니다.

 

 

근본을 모르면 이런 오류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끝 지점에서 서서 세상을 본 안목에서 나온 상황입니다. 재개발 지역에 가보세요. 길에 지붕 기왓장들이 늘려서 사람들의 발에 와그작거리면서 밟히고 있습니다. 기왓장이란 원래 높은 지붕 위에 놓여있는 것이라는 언제 그 기왓장을 밟을 수가 없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집들이 와해되고 나니 높은 자리에만 있었던 그 기왓장이 사람들 발 밑에서 부서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끝이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자하는 실적과 결과들이 끝이 되면 다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로부터 출발시킨 원인과 결과의 그물로서 일시적으로 대단한 성과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실은 다 허구로서 등장된 것들입니다.

 

부서지고 또 부서져야 합니다. 아니, 부활에 관점에서 보면 모두 죽음 안에 갇혀있는 것들로서 실은 죽은 것들입니다. 부활의 새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숲에서는 모든 나무가 일어서는 것처럼, 부활권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동원됩니다. 일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끝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다 들추어지고 그 진리 여부다 다 판정됩니다.

 

가상의 세계요 그러니까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개인적은 목적들만 난무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이 마치 축복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이 찾아오게 되면 그것은 다 허구들로 드러납니다. 말씀이 이 세상을 그냥 가만두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까지’라는 말은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역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방향을 뜻합니다. 보통 인간 세상에서의 ‘~까지’라는 강조점이 도착지점을 두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전 10시까지’라는 말은 ‘오전 10시가 표준점으로서 거기에 신경써서 맞추어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1000년의 하늘 시간에 대해서는 달리 사용하게 됩니다.

 

즉 시간조차 직접 만들어내시는 분이 따로 계시는데 그 분의 활동하셔서 반드시 이 세상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즉 오전 10시까지 오게 되는 나를 반드시 그 시간에 맞추어 오게 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분이 누구냐 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내가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라는 분이 누구십니까’와 관련됩니다. 그 분에 의해서 우리는 던져진 자들입니다. 그 분이 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주도하면서 전체를 장악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현실은 오로지 그 분의 흘린 피로서만 말해서 되고 우리는 부활의 세계에 살게 되는 겁니다.

 

부활의 세계는 잃어버린 자를 그분이 되찾는 세계이며 그 되찾음을 당한 우리는 그분의 지시를 받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계획이 우리를 덮칠 때, 그 덮쳐진 계획이 곧 우리로 하여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옳겨지게 된 것입니다.

 

자책하면 안됩니다. 자책한다는 것은 또다시 사태를 나에게 원인을 두고 변경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자책하지 마시고 ‘누구십니까’를 되풀이하면서 그 분을 알아보고 지시받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기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우리가 주님에 의해 던져져서 부활이 세계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20-09-11 (십자가 마을 질문/답변)

이근호 목사

죄악된 육신의 세계에서 영광의 영의 세계로 이동하신 예수님의 변형과 관련지어서 정립된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첫째 사망입니다. 그 육신이 성령이 임하므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기능이 작용하면서 첫째 부활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영원한 저주를 맛보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합니다. 모든 게 평정되고 영원한 천국의 상태가 되는 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특히 오늘날 인간들이 유념해야 하는 것이 이 땅에 몸을 지니고 사는 것 자체가 사망한 상태라는 점입니다. 출생 자체가 첫째 사망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출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