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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85강 / 계20장 4 (천년 동안)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85강 / 계20장 4 (천년 동안)

정인순 2010. 12. 30.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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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0년 동안

 

2007년 11월 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0:4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성경은 사람을 어떻게 볼까요? 로마서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로 나눕니다. 당연히 참감람나무만 구원될 나무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분류시켜 버립니다. 또 알곡과 가라지로 구분짓십니다. 알곡은 모아 천국 창고에 들이우고 가라지는 모아다가 사정없이 불에 태워버리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양과 염소로 나누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양으로 분류된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빛에 속한 자와 어두움에 속한 자로 분류시켜 버립니다. 그 밖에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와 행위책이 명단이 있는 자를 분류시켜 버립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와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를 분류하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십자가 안에 있는 자와 십자가 밖에 있는 자들로 분류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로 가름하고, 또한 성경 전체에서는 메시야의 희생에 기대를 거는 자와 자기 소유에 기대를 거는 어리석은 자를 수분짓입니다.

 

이러한 구분법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구별작업에 있어 인간의 의견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나눌 때에 그 기준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의사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독자적인 가치를 일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분류법 말고 또 다른 분류법으로 무장한채 세상에 나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분류법입니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자는 좋은 고기로 보고, 내 마음에 안드는 자를 나쁜 고기로 봐서 배척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러한 분류법을 시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묵사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000년’이라는 개념의 등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1000년이란 인간들의 긴긴 수명 밖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할지라도 1000년이라는 턱을 넘지를 못합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무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1000년의 지혜에 접근할 세월은 못됩니다.

 

즉 하늘의 지혜, 약속된 지혜에 꺾입니다. 이 말은 곧 1천년의 지혜가 이 땅에 다가오면 그 어느 인간도 그 앞에서 박살나야 될 자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들은 각자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장소에 같이 서있어도 어떤 사람은 지루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신속하게 느끼는 것은 시간 의식이란 각자의 몸이 지닌 기억에 의해서 결정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데이트할 시간은 더디가는 것처럼 느껴진 반면에, 어려운 수학 시험을 치는 시간은 신속하게 빨리 가버립니다. 시간 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공간을 따로 갖습니다. 한국에 살 때는 대한민국을 두둔하는 애국자였다가 미국 시민권을 따서는 미국편에 서서 한국을 핍박하는 자리에 가버리기 일수입니다. 이것은 현재 자기 몸에게 필요한 공간을 수시로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을 따로 간직하고 있다면 말은 그 안에서 자신을 절대적인 신으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악마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이 세상의 존재 배경으로 이미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인간들은 어느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기는커녕 늘 새롭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챙겨서 살게 됩니다.

 

그 안에는 인간은 절대신으로 행세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 뭔가 이 일이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서 절대신으로 간주해서 살고 싶은 궁극적인 욕망은 발휘되는데 현실적으로 자신이 생각해 놓은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자기 나름대로 순전히 자신의 아이디어서 자기 만족을 위해 어떤 미래를 구상해 놓지만 난데없는 주변 환경의 엄습으로 인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은 망가집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신으로 행세하는 것이 어설픈 짓거리가 되어버립니다. 본심은 절대신이 되고 싶은데 환경이 안따라주니 여기에서 인간들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종교를 갖고 싶어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근본 욕망은 절대신으로 행세하는 것인데 요동치는 세상 변화가 쉽사리 허락지 않고 방해를 놓으니 그 어떠한 세상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신의 소망을 달성해준 어떤 대상자는 자신이 만들어내어서 신봉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쉽게 베트맨 만화를 보게 되면, 어두운 밤 창공에 베트맨의 영상이 떠있습니다. 그것은 건물 옥상에서 작은 몸체인 베트맨을 강력한 조명발로 쏘아대니 그 영상이 밤하늘에 떠있게 되어서 생긴 광경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아 속에 담겨 있는 전능한 포부를 확대시켜 밤하늘에 비쳐보면, 그것이 곧 내가 신봉하는 ‘신’이 되는 겁니다. 그 신은 내가 미처 해내지 못하는 것을 다 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이 되는 겁니다. 내가 정성을 주면 그 신은 내 성의와 정성을 보고서는 나에게 미흡한 것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 신이 곧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의 얼굴입니다. 악마는 인간성에 부합하는 신들을 만들기를 부축입니다. 각자가 절대신으로 웅성대는 그런 세상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참된 신은 이 모든 우상들은 진멸해버리는 신이십니다. 신명기 3:6에 보면,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진멸하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진멸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모든 자들을 진멸해버립니다. 하나도 남겨두지 아니하고 다 싹쓸이 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중심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따로 챙겨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간성과 공간성은 악마의 노리개감으로 전락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멸의 근거를 이미 완려된 약속이라는 것에다 둡니다.

 

즉 약속 안에서 더 이상 사적인 시간과 공간이 불필요합니다. 순전히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로서 만들어낸 약속입니다. 인간에게 물어보지 않고 결정된 구원상황입니다. 따라서 그 약속 앞에서 인간은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당연히 진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다니엘 9장에 보면, 다니엘 선지자에게 약속된 시간대가 주어집니다. 70이레라고 하는 겁니다. 즉 이미 완료된 상황이 머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다니엘을 덮쳐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안 중요함에서 오는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님의 약속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인해 박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1000년 안의 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가가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이 덮쳐진 믿음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