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82강 / 계19장 11-16 (신랑이 하신 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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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신랑이 하신 일
2007년 10월 2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9:11-16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계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 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신랑과 신부의 만남으로서 더 이상 역사는 진척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말입니다. 그 신랑이 본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와있습니다. 어떤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신랑입니다. 신부될 자만 신랑을 알아봅니다. 이 신랑은 이미 일을 벌리고 계십니다. 무슨 일까요?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들과 하나님께 대드는 자들을 정리하는 일을 벌리십니다. 심판이죠, 맹렬한 심판입니다. 용서없는 심판입니다. 가차없는 저주입니다.
신랑되시는 분이 이토록 무서운 분일 줄을 신부되는 자들만은 알게 됩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분으로 등장되는 걸까요? 그것은 이 세대가 참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신랑되시는 분의 모습은 눈에서 불꽃이 튑니다. 입에서는 쉴새없이 칼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분의 하얀 옷은 온통 붉은 피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힘들게 심판을 수행하시다 보니 세상의 죄로 인해 묻은 겁니다. 이것을 마치 포도송이를 으깨서 포도즙을 내는 추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3:2-3에 보면, 저주받은 백성들인 에돔 지역으로부터 어떤 분이 빠져나오고 계십니다.
그 분은 방금 에돔 지역에서 큰 일을 한바탕 치르고 나오시는 중이십니다. 어떤 일을 했을까요?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명하고 신선한 피들이 온통 심판주의 의복을 젖게 했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심판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이 세상은 우리 신랑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혹독하게 당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온통 아담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곧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이미 절대신으로 행세하는 우상들의 세계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기 자신을 절대신으로 신봉하게 됩니다. 아담으로부터 받은 사는 버릇이 이러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 모릅니다. 뭘해도 자기를 신봉하기 위한 노동일 뿐입니다. 최종적 가치와 의미는 오직 자기에게만 두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아가 발생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아담에게 여자가 생기자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다”라고 했습니다. 결코 여인을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없다는 말은 곧 자아의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담이 변명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어라고 해서 따 먹었다고 말합니다.
타인의식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객체가 생긴 겁니다. 이로 인해 주체의식이 발생되고 자아의식도 생겨났습니다. 한 번 생겨버린 자아는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가인에게서 나타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 받지 않고 타인이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버리자, 그 동생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자아의 절대신됨을 방해하는 그 무엇이든 다 죽여버리려고 하게 됩니다.
이러한 습성이 우리들에게 고스라니 전수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 나오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은 실은 ‘나’라는 자아를 더욱더 단단히 섬기고자 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뿐입니다. 신의 힘까지 동원시켜 자기를 키워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애완용 고양이를 고이 키워내듯이 우리들은 자아를 고이 키워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참된 신이 이것을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심판 날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심판이 10개의 산 너머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10개의 산을 넘어면서도 결코 그것에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코 앞에 우리의 인생을 턱하니 가로 막고 있는 산들이 놓여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눈치 채 자라면 그런 산들로 인해 좌절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예상한 바이며 그 어떤 산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 날짜를 취소시키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에 결혼식이 있는 새색시라면 그리스도의 심판보다 코 앞에 다가온 결혼식 걱정에 밤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심판이 실제 상황이라면 자신의 결혼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담담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위인도 예수님을 대신할 위인은 없습니다. 심판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사시는 분이라면 주간에 주말에 어떤 고위직에 있는 사람을 대해서 기죽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의 사건을 해결했다고 우쭐 대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이란 하나 지나가면 그것보다 더 큰 산과 파도가 밀려드는 것이 인생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터팬처럼 세상을 날아다닐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어떤 사태나, 그 어떤 위인에게도 심판으로서 선제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일을 존중하는 제대로된 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당당하고 무서운 심판주의 모습을 왜 예수님께서는 애초부터 지상에 그대로 내비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 대신 한 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 임을 증명해 줄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겠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뿐이다”고 말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을까요? 고래 뱃속에서 3일처럼 갇혀서 초죽음을 체험했던 그 기적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된 빛은 이 땅에서 수치스럽고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다는데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평소에 시대한 메시야는 영웅적인 메시야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은 자신이 키워내는 자아라는 절대신에게 봉사하고 복무시키기 위한 신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저주받을 자임을 알려주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실망스러운 자태입니다. 비참한 최후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수치와 좌절의 과정을 역순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수치와 좌절을 겪게 하는 겁니다. 즉 자칭 절대신으로 살아온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큰 실망과 수치를 겪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자기 식으로 커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 허술한 종교라는 껍데기를 벗기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벗겨지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만 신봉해온 천하의 타락한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 수치와 실망의 코스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죄가 많은 곳은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자신에게 실망해야 자아 섬기기가 죄인 줄 알고 오로지 예수님의 의만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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