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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222a디모데전서1장1절
녹취 : 서경수
강주 강의(08. 2.22) 34-1
오늘부터 디모데전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신약성경 337페이지입니다.
1장 1-2절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상당히 초반부터 일방적입니다. 원래 편지가 그래요. 일방적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가 편지할 때 “가정은 평안하십니까? 별 일 없으신지요?”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배려하잖아요. 그런데 사도의 편지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안부 편지가 아니고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한다.’는 하나님 일의 계획서이기 때문에 안부 같은 것은 없지요.
직장에서 상관이 부하 직원에게 지시할 때 “그동안 별고 없었습니까? 잘 계셨습니까?” 이런 소리 안 하지요. 타이어를 만드는 공장 같으면 “오늘 업무는 타이어 몇 개 생산해야 되고, 언제까지 출하해야 되고, 시간 내에 제품 완성하십시오.” 이렇게 하지, “안녕하십니까? 식사는 했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안 하잖아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사항을 이야기 하지요.
그러니까 이 디모데전서 편지를 이렇게, 그 당시 바울이 관여한 여러 교회가 이 편지를 받을 때에 “하나님, 제 사정 좀 생각해서 말씀하시지요.” 이런 소리를 할 수 없고, “야, 오늘도 명령 떨어졌다.” 그런 마음으로 이 편지를 받는 거예요. 이 명령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 하신데’ 라는 명령서가 떨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각자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각자 열심히 하는 자기 일이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 ‘딩동’해서 문 열고 나가보면, 편지 한 장 툭 던지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거예요. 마치 택배회사 직원처럼. 편지를 뜯어보면 ‘미션 투. 귀하가 해야 될 일은 --’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은 귀하가 해야 될 일이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미션 쓰리. 하나님께서 당신 가정에 이렇게 일합니다.’ 라는 편지를 던지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편지 받고 설거지 하고 우리 할 일 해요. 하면서 디모데전서 편지를 뜯어보면, 우리가 평소에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관계없이 우리를 향하여 디모데전서대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 하면 구원해 줄 게’가 아니라, 네가 무슨 일을 하던 너는 네 할 일 해라는 것이지요. 네 할 일 하는 거기에다 우리 주님이 하실 일이 덮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성경 안 봐도 내 할 일에 지장 없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편지 받을 자격이 안 되지요. 그렇잖아요. 그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니까. ‘성경이 내보고 뭘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며. 그러면 성경이 내게 뭐가 필요 있어.’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것이 아니고 뭔가 기다려지는 거예요. 어떤 농부가 있다면 농사짓는 일을 해서 천국에 가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농사짓는 것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농사를 지으면서 뭘 기다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농사꾼에 불과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어떻게 건져내실까 하는데 ‘딩동’하고 디모데전서가 날아올 때, 그 사람은 그걸 반갑게 기다리겠어요, 안 기다리겠어요? 기다리지요. 그래서 성경을 부담 없이 기쁘게 보시라는 겁니다.
택시 기사가 택시 몰았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요소로 구원 받지요. 그러면 그 다른 요소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딩동’하고 온 편지 아닙니까. 그러니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세상의 도인(혹은 종교인)들은 ‘딩동’이고 뭐고 없고, 자기가 해야 돼요. 자기가 자기관리 해야 되고, 영성훈련 해야 되고, 자기가 나쁜 일 줄이고 착한 일 더 늘여야 하고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구원할 자가 자기 자신 뿐이에요. 다른 구원자가 없어요.
초반부터 철학이야기 해서 좀 그렇지만, 알랑 바디우의 철학에 이런 것이 있어요. “인간은 선택함으로 살아간다.” 이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이 뭐냐 하면, ‘절대 진리는 없다.’ 그러면 뭐가 자신에게 진리입니까? 자기가 입맛에 맞게 고르면 그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고기 잡다가 농사가 짓고 싶다. 그러면 농사일을 하면 돼요. 그것이 진리가 됩니다. 왜?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믿는다. 그래서 구원 받는다.” 이것은 가짜 신자입니다. 뉘앙스가 자기가 예수를 선택했어요. 이것은 매사에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가 살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가 됩니다. 여기에 예수도 걸려들었고, 하나님도 걸려 든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한국교회 아닙니까. 이것은 전부 이단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누이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를 선택했다.”고 분명히 나오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것을 사람들이 안 믿어요. 평소 습관이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양육 받았고 교육받았고 배웠어요. 내가 선택하지 않는 한 내가 누구에게 선택 당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를 선택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너는 예정되었다.” 이 한마디가 짜릿하게 들려야 됩니다. 평생을 살면서 인생이 고민하는 것이 이 한 마디에 전부 날아가야 됩니다. 인생의 모든 고민, 앞으로 해야 될 모든 고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 이것은 새삼스럽게 네가 나를 선택하려고 애쓴다든지 노력하는 것조차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그 선택이 며칠 가겠어요?
지난 수요일 그런 설교하니까 교인들이 웃었습니다. 수요일 참석하신 분이 연세가 드신 분인데 예를 들다 보니까 딱 자기에게 맞다 떨어진 모양이에요. 60대 넘은 할머니가 산책을 하면서 계속 자기 남편 욕을 하는데, 저는 남편 되시는 분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식사하고 나가면서 불을 끄고 나가는 것 때문에 남편 욕을 하는 거예요. 본인은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남편이 자기 식사 끝났다고 전기 아낀다고 불을 끄고 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긴 산책길에 육두문자를 쓰면서 남편 욕을 하는 거예요.
제가 듣기에는 그동안 지루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불러도 같은 행위를 되풀이 하면 이젠 다른 것을 선택하고 싶어요. 찬송가 405장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Amazing grace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은혜 되지요. 세 번 연달아 불러보세요. 별 느낌 없습니다. 식상하고 지루합니다. [땡 벌]처음 나올 때 노래 10번씩 불러요.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그 노래 듣기도 싫어요. “미안해요 땡 벌, 땡 벌, 땡 벌 ~”
제가 청년 때 한 자리에서 그 노래가 좋아서 50번 정도 반복해도 들은 적이 있었어요. [Beautiful Sunday]라는 노래를. 크리스마스 전날 친구들하고 [Beautiful Sunday]를 밤새도록 들었어요. 뭐든지 착한 일도, 교회 가는 일도 되풀이하면 그 다음부터는 지루하고 짜증나요. 다른 것을 선택하고 싶어요.
그러니 예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믿는 것도 지루해요. 재미없어. 주께서 이미 이런 우리를 아십니다. 이런 우리를 알고 구원하시는 거예요. 우리한테 예수 믿어서 천당 가라고 하면 갈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5년 믿고, 길게는 10년 믿다가 나중에는 다 떠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성경 아닙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 그냥 섬긴 줄 아세요. 여호와 이름으로 섬겨요. 여호와는 형식이니까. 요새로 하면 예수이름 붙이면서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사는 거예요. 껍데기는 여호와를 믿었어요. 이거 하나님 앞에 안 통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네 마음속까지는 파고들지 못하고 자꾸 어떤 법률 조항으로 남아있으니까, 처음 홍해 갈라지고 할 때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좋다고 까불다가 금방 반항하잖아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TV를 켤 때 왜 리모컨이 필요합니까? TV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신체 바깥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켤 때만 켜지는 거예요. 그런데 TV가 내 안에 들어있다면 이는 시도 때도 없이 TV가 저 혼자 켜지겠지요.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이 뭐냐? 구약 성도들은 제 마음 끌릴 때만 하나님 믿고 안 그러면 하나님 잊어버려요. 이것이 좀 더 나아가면 이렇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사사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자기가 어려울 때, 힘들 때, (이건 중요한 거라 적어놓아야겠다. 갑자기 생각나네) 사사기에 보면 사람이 편할 때는 건성으로 여호와 믿고 제 마음대로 살다가 갑자기 주위에서 일제시대 압박처럼 압박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또 누구한테 빕니까? 또 여호와께 빌어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나온다고.
그러면 구약 성도보다 우리가 더 낫습니까? 똑같지요. 낫기는 뭘 나아. 똑같아요. 똑같은 줄 아시고 주님께서는 아예 신약에서는 우리보고 뭘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지키도록 하는 요소를 우리 안에서 발생시키죠. 그러니 우리는 “주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감사가 나오도록, “나는 두 개 지켰다. 세 개 지켰다.”가 아니라 감사가 나오도록 한다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쉽지요? 이제부터 어렵게 나갑니다. 어렵기 때문에 옷을 벗고 상당히 신경을 써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해 못하면 안 되니까.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영속적으로(‘연속적으로’ 라는 말도 되는데, 영속적으로 -계속 이어가는 것) 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여러분, 사다리에 어린아이가 올라가 있는 포스코 빌딩 광고에 보면 어린애가 사다리위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는 광고가 있어요. 그런다고 하늘이 가까워 졌습니까? 아니죠. 올라가보세요. 사다리 끝에 선하고 해서 하늘이 더 가까워지지는 않지요. 그런데 광고에 나오는 그 아이는 하늘을 향하여 꿈과 희망을 펼친다는 의미로 그렇게 합니다.
인간이 바로 그렇습니다. 자꾸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은 채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에서 뭐가 내려왔는가 하면 율법이 내려왔어요. 율법이니까 ‘율’을 괄호를 한 번 쳐 봅시다. ‘율’을 괄호 안에 넣으면 뭐가 남습니까? ‘법’이죠. 하늘에서 통용되는 법이 내려왔어요. 법이 내려오니까,
자, 여기서 한 번 들어보세요. 인간은 신에게 영속적, 끊어지지 않는, 단절이 없이 이어가고 싶은데 하나님으로부터 법이 오니까 법은 모든 것이 하나하나 끊어져 있어요.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것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있을 때, 살인 안 했으면 간음 안 한 것도 쳐줍니까, 안 쳐줍니까? ‘당신은 살인 안했으니까 자동적으로 간음 안했다.’ 이렇게 쳐주지는 않지요? 아무리 살인을 안 했어도 간음 안했다는 소리는 못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둘 다 지켜야 둘 다 지키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10계명 마지막에 뭡니까? “탐내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것 다 지켰으면 자동적으로 탐 안냅니까? 안 되지요. 왜? 법이 주어지면 법은 영속, 이어진 것이 아니고 딱딱 끊어져 있지요. 그러기에 A라는 법을 지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B라는 법을 지킨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살인은 안 했어요. 그래서 자기를 살인 안한 의인으로 보다가, 갑자기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죄인이 되고 기가 팍 죽지요. 왜? 비록 살인은 안 했지만 백화점 물건을 보고 갑자기 탐이 나고 옆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보석을 보고 “나도 저 보석 갖고 싶다. 일생에 한 번인데” 라고 핑계를 대면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보석을 사야 탐심이 아니고, 탐 내는 것 자체가 탐심이잖아요.
탐심을 가졌는데 마침 그날 목사님이 설교에서 ‘십계명을 못 지키면 지옥 간다.’고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짝도 소용이 없지요. 왜? 탐심을 가졌으니까. 그러면 탐심을 내는 나는 뭐며, 살인하지 않은 나는 뭡니까? 둘 중 어느 것을 하겠어요? 어느 것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이 둘이 다 들어 있잖아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은, 사람은 영속적으로 이어져서 천당까지 이르기를 원하는데, 하늘에서 뭐가 왔다고요? 율법이 오니까 이 법은 딱딱 끊어져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지상에서 고정을 시키는 거예요. 신앙 간증 안 많습니까? 교회 시간이 늦어서 급하게 차를 몰고 오는데, 이상하게 신호가 잘 맞아서 지각하지 않고 교회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는데, 주차를 하다가 남의 차를 박았어요. 그렇게 되니 갑자기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면서 원망을 하고, 도대체 어느 자아가 진짜 나의 자아인지? 감사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불평하는 것인가요?
그러면 이 자아가 어떻게 되겠어요? 율법이 주어지면 자아가 어떻게 돼요? 본인의 자아가 순간순간 조각이 나버리지요. 그럴 때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것은, 이것은 철학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진리가 성경에 나와요. 사람이 행동할 때 어떤 관점에서 행동하는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수치를 모면하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내부는 갈기갈기 찢어졌어요. 그래도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기의 더러운 것은 감추지요. 창세기 3장으로 하면 수치를 가리는 방향으로. 이것을 로마서 3장에서는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는 여러분이 많이 들었지요? 그런데 자기 의가 왜 자기 의로 나오는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여기서 유리하다는 말은 자기가 들 수치스러운 쪽으로 이것을 골라서, 자기의 수치스러운 부분은 감추고 자기의 장점은 내세울 때, 그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주님이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셨다고 했습니까? 율법을 주셨지요. 율법이 온 이후부터 우리 속에 대 변란이 요동을 칩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내 속에 악이 더 우세해서 날마다 이 두 마음이 싸운다.” 이것은 남에게 알리기보다도 자기 자신이 정리가 안 돼요. 정리가 안 되는데 누가 들이닥칠 때는 그때 순간적으로 어떻게 정리한다? 덜 수치스럽고 자기가 더 자랑스러운 쪽으로 드러냅니다.
자식이 만약에 3명 있으면 못난 자식 둘 빼고 잘난 자식 이야기만 하지요. 제가 지난주일 이런 예화를 들었는데, 그 때 새로 오신 중년 부부가 크게 웃었어요. 그분이 철학을 많이 공부하고 교회 나온 지는 얼마 안 되는데, “철학, 철학 이야기해도 시골 할머니 이야기가 철학 중의 철학이다.” 그러면 그 할머니 이야기는 뭐냐? “올 2008년 소원이 뭡니까?” 라고 기자가 물으니까 할머니 하는 말이 “못난 자식 잘 되고, 잘난 자식 더 잘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오는 목적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전부 이런 꿍꿍이, 이런 마음으로 신을 찾고 예수를 찾고 부처를 찾고 한단 말이지요. 이것이 창세기 3장에 있는 수치를 가리는 식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오면 거꾸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감추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이방 민족을 동원해서 유다를 칩니다. ‘내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 말입니다. 아까 TV예를 다시 들면, 요즘 여러 채널이 있는데 만약에 [Play Bos]가 케이벌 TV에서 나온다고 하면 KBS나 MBC보다가 얼른 채널을 옮깁니다. 그러다가 남들이 들어오면 채널을 바꿉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리모컨을 사용할 때 ‘네가 이렇게 살았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Play Boy] 그것만 켜놓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구약이고, 신약에 오면 그 TV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Play Boy] 그것을 계속 켜놓고 그 수치를 누가 덮어준다? 예수의 살과 피로 그 수치를 덮어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그게 “네가 나를, 케이블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창세전부터 예정하사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이 너에게 주어졌다.”
그러니까 구약처럼 아닌 척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이 말이죠. 구약에서는 해놓고 안 했다고 버티면 되지만(물론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신약에서는 뻔히 알기 때문에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눅7:29).” 네 자신이 누군 줄 아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볼 때, 내가 어떤 자인 것을 다 아시는 분으로서 더 이상 주님 앞에서 내가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을 아는 여자. 그러니 “저는 개 같은 자입니다. 하지만 상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원합니다.”
이 여인의 고백, 아 정말, 이 여인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이런 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더러움을 완전히 까밝히고 그러면서 그것마저 전부 용서하시고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주께서 덮어주심으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율법이 들어오면 단절이 된다고 했습니다. 끊어지니까 도대체 어느 것이 내 자아냐? 그런데 율법 외에 예수님의 의가 들어오면, 예수님의 의는 예수님 한 분의 의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분은 단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용서에 무슨 단절이 있어요. 용서는 단절이 없어요.
스가랴 3장 잠깐 봅시다. 1,315페이지. 제가 방금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서 이야기했지요. 구약의 TV가 우리 밖에 있어서 내가 선택해서 리모컨을 조정한다. 이것이 구약이고, 신약은 내가 얼마나 죄가 많은지 아예 그 TV가 내 몸에 들어와서 24시간 그 장면이 켜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죄 많은 인간을 주께서 용서하는 것이 신약입니다.
누가 묻거든 그 차이점을 잘 아셔야 됩니다. 여기 스가랴 3장 1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지요. 악한 사단이 또 그 앞에 섰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야기합니다. 사단을 보고 책망하지요. 3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분명히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지요.
4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이것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것입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딩동’하고 편지가 왔지요. 우리는 우리 일을 하고 있는데 편지가 한 통 날아오지요. 편지를 뜯어보니까 뭐가 들어있다? 우리가 뭘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일을 하십니다.’ 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요. 그 내용 중 하나 스가랴 3장 3, 4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더러운 옷을 여호와 앞에서 벗겨, 여호와 앞에서 죄 없다 했기 때문에. 제가 강조하는 것을 잘 들어보세요. 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좌우에 있는 악마의 말을 듣지 않고 천사의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보고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했으면, 세상 어느 인간이 우리에게 죄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에게 일어났던 이 사건을 신약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수아가 경험했던 일을 지금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 예수시기 때문에, 구약의 여호와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 그대로 이루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데 신앙생활 왜 못하느냐 하면 사람을 의식해서 그래요. 그리고 나를 의식해서 그래요. 나를 의식하지 마세요. 내가 나에게 정죄하더라도 그것은 반칙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도 나를 정죄 못하고 남도 나를 정죄 못하고 목사도 나를 정죄 못해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현됩니다. 적용됩니다. 그 약속에 포함된 것이 뭡니까? 이 스가랴 3장입니다.
사도가 사람을 겁내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높은 분(하나님)이 먼저 왔다 갔다니까요. 사람 만나고 지위 높은 대통령 만나고 하나님 만난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부터 만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만나니 사람들은 하찮지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님 만났잖아요. 높은 분부터 만났잖아요. 높은 분 만나서 죄 용서 받았는데 아랫동네 사람들이 협박 공갈한다고 겁내겠습니까?
“너희들은 하늘의 일을 몰라.” 이러면 돼요. “이것들이 어디서 협박 공갈이야. 목사 말 안 들으면 저주 받는다고? 예 이놈. 네가 저주 받을 놈이야!” 이러면 된다고.
저는 교인들이 목사 눈치를 안 보고 교회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주 심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보다 더 심한 곳이 화평교회입니다. 목사 눈치 안 봐요.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목사가 봉사할 마음이 생겨요. 그래야 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 말씀인줄 알고 권위 있게 봅니다. 그래야 성령 앞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봉사할 맛이 나지요.
자꾸 목사 눈치 보면 목사 자신도 행동이 변변치 못한데 목사가 얼마나 부담 되겠습니까? “나는 목사님을 믿었더니만 목사가 저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이런다고요. “언제 저를 믿으라고 했습니까? 예수 믿어야지요.” “그래도 목사님이 그러면 안 되지요.” “아이 씨. 예수님께는 관심도 없고 ---”
사도가 편지한 것은 그 당시 교인들에게는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서입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계획서입니다. 남아 있는 하나님의 계획서를 사도의 편지로서 이렇게 준 것입니다. 물론 사도 편지가 다 성경은 아니지만. 특별히 성경으로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 편지를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기 전에 ‘딩동’이라는 벨 소리를 제발 부담으로 느끼지 마시고 반가운 편지로 보시기 바랍니다. ‘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하셨구나!’ 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자기 의’ 그것도 자기가 수치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것을 안 그런 척, 이런 수치가 없는 척 장점만 드러내는 그 단절성. 일부러 단절케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전적 죄인인 것을,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율법으로 지킬 수 있다면 아브라함이 왜 등장했겠는가? 아브라함이 등장한 것을 보니까 율법을 준 것은 지켜서 구원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성경 말씀 다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상당히 비난을 해요. “성경은 지켜야지 왜 안 지켜?” 라고 하는데, 성경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의미가 없어요.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성경을 누가 대신 지켰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약속이 와서 그 약속이 희생 제물이 되어 그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 내가 아무 한 것도 없이 졸지에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의미인데, 말이 좀 어렵다.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말을 아브라함은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삭을 통해서 보니까 이삭에서 뭐가 나오느냐? 믿음으로 의인 된다는 이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서 알려줄 때에 ‘그 때 그 약속이 이 약속이구나.’를 아는 겁니다.
말이 너무 어려운데 다시 합시다. 아브라함은 그냥 무조건 인정했어요.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 땅을 주리라.” “예, 저 인정합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니까 “네가 믿음으로 의인 되리라.” “이건 생소합니다.” 나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믿었는데 갑자기 “믿음으로 의인 된다.”는 새로운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의 의미가 뭔지를 몰랐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삭이 희생제물 되어서 아브라함이 구원 받을 때, 아브라함은 모든 말씀을 자기가 지키지는 않았잖아요.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했잖아요. 이삭이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면서 농담으로 여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은 자기가 잘나서 믿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의인 된다는 이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덮친 거예요. 언제 뭐 “나는 잘 했을까? 법이 있는데,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켰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못 지켰고” 이렇게 내가 나에 대해서 점검하고 할 새가 없어요. 뭔가 퍽 하고 덮쳐왔는데 보니까 그것이 피라. 예수님의 피가 바켓스 채로 날아와서 뒤집어썼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피가 온 것이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중 하나 포함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 받아야 돼.’ 이것이 하나님 약속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다시 해 봅시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텍사스에 농장이 있습니다. 허허벌판인데 울타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3m 정도 길이의 나무막대기를 많이 가져와서 하나, 둘, 셋, 넷 -- 막대기를 꽂았어요. 갑자기 여기서 뭐가 생겼습니까? 공간이 생겼죠.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공간이 생겼지요.
이 경계선이 우리의 행함입니다. 안에는 뭐가 있습니까? 공백이죠. 이것이 우리 행함이니까 모든 행함은 율법 아래서 뭐가 됩니까? 죄가 되지요. 단절 되지요. “이것은 지켰는데 저것은 못 지켰다. 오늘은 착한 일 더 많이 하자.” 이것이 뭡니까? 단절되어 있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런 죄를 지었고 또 이런 죄를 지었고 쭉 나열해 보니까 이 안에 뭡니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가 나오더란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평소에 이근호 목사는 만날 죄만 짓는다고 하니까, “예수 믿고 착하게 살아야지 왜 만날 죄만 지으라고 하느냐?” 라고 하는데, 그 인간들은 뭘 모릅니까? 이 공백을 몰라요.
주께서 주신 약속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평소에 이것은 우리가 알면서도, 관념상 알면서도 실제 기쁨으로는 안 오잖아요. 그런데 죄를 짓다 보니까 탐심의 죄, 간음한 죄, 남을 미워하는 살인 죄,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산상설교에 어긋났지요? 분명히 염려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염려했으니까 죄 지었잖아요.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루 수십 번 맹세하잖아요.
이런 경계선을 처 보니까 여기 뭐가 나와요? 우리의 행함, 죄라는 울타리만 생기고 그럼에도 구원 받은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하박국의 말씀이 예정된 자에게만 선물로 그냥 덮칩니다.
“주여, 우리가 행한 것은 죄밖에 없는데 이런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주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 안 되면 진짜 돌이다.
이런 울타리의 공백을 모르고, 예수 믿는데 항상 죄 짓는다고 하니까, 죄 지으란 말은 안 했어요. 죄 짓게 된다는 말을 했지요. 예수 믿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자꾸 우리 죄를 들추는 것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많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자기 단점은 감추고 “주여, 그래도 저는 십일조 했잖아요.” 하고 장점을 자랑하는데, 이것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자기의 수치를 모면하기 위한 수법인데, 이것은 사람한테나 통하고 목사에게나 통하지 하나님께는 안 통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여호수아처럼 먼저 하나님 만납시다. 하나님 앞에 서면 “참, 꼬라지 보니까 새까마네. 니 어디서 그렇게 묻었노?” “예,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묻었습니다.” “어이, 천사야! 옷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라. 네 죄가 사해졌다.”
스가랴에서는 옆에 있는 것이 천사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인인줄 아시고 피 흘려서 대신 저주받는 그 피로 우리 죽은 목숨을 산 목숨으로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에도 봤던 주님만 자랑하는 성도입니다. 교회가 이런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 성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것이 무슨 행동입니까. 교회가 작으면 이상스럽게 수치를 느껴요. “저 교회는 교인이 100명인데 우리는 10명. 부끄럽다.” 왜 부끄럽습니까?
사람들이 신에게 나아갈 때 자기가 선악과 따 먹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악은 죽이고 선을 행하면 선이 연결되어(영속성), 인간의 아이디어는 단절이 없습니다. 율법이 주어지면 단절이 생기지만 율법 말고 인간의 상상력에서는 단절이 없습니다. “신이시여, 이렇게 착한 일을 하는 나에게 복 주시옵소서.” 복 주신다는 것이 뭐냐? 내가 착한 만큼 복 받는 거예요. 이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착한 일하면 죽어서 좋은 나라 갑니다.” 이것이 연결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만약 교회가 안 크고 성장 안 한다면 “너는 복 받을 자격이 없어.” 라는 판정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 수도 줄고 수치를 느끼지요.
아까 집사님하고 이야기하면서 요즘 교육계가 양심이고 정직이고 없고 전부 돈 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것은 교육계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문화센터 열어서 아이들 값싸게 과외 시키고 사람 끌어 모으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많이 모여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기고.
사도바울은 교인 몇 명이었습니까? 수천 명 됐습니까? 안 됐지요. 그러면 바울이 지옥 갔습니까? 사도바울은 자기 안에 주님의 계시의 TV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자기 바깥에 소지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더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내가 힘들여 얻은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알았어요. 사람이 천하를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없지요.
라이프니찌의 철학에 보면 이런 게 나와요. 사람의 존재는, 존재를 자아라고 볼 수 있죠. 자아라는 것은 프랑스 빵에 보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 있는데, 인간의 존재는 겹겹이 쌓여 있어요. 이게 죽을 때가 되면 한 겹 한 겹 날아갑니다. 나중에는 다 날아가 버리겠지요. 죽음의 세력이 우리 껍질을 벗기면 시력 나빠지고 머리털 빠지고, 이것을 라이프니찌는 아주 잘 봤는데, 사람이 죽음이 와서 하나 둘 철거하고 뜯어가는 그것을 통해서 평소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누적되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답니다.
평소에는 한 덩어리로 태어난 것 같지만 한 덩어리가 아니라 커면서 자꾸 뭔가 쌓여요. 예를 들어 어떤 두 친구가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 보러 갔는데 A라는 친구가 “이 영화 보지 말고 저 영화 보자.” “왜?” “오드리 헵번 나오잖아.” 그러니까 갑자기 B라는 친구가 화를 냅니다. “내가 오드리 헵번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러는 거예요. 이것은 평소에 축구 볼 줄 몰랐던 거예요. 그냥 어떤 경우를 당하니까 그 사람 존재 층에 뭐가 쌓여 있어요? “나는 오드리 헵번이 참 좋더라.”는 것이 쌓여 있었던 것을 다른 친구는 몰랐었지요. 그래서 오드리 햅번 때문에 친구가 헤어지는 거예요.
존재는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외부에 있던 경험들이 하나의 껍질처럼 누적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아이들은 뭐가 누적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같이 6개월 정도 살아보고 결혼한다고 안 합니까. 왜? 결혼하고 난 뒤에 나중에 뜯어보니까 온갖 싫어하는 존재 층이 상대에게 쌓여 있다면 기가 막힐 일이 아니냔 말이지요. 그래서 같이 좀 살아보고 (결혼)결정을 한다고 하지요.
좀 살아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다 달라요. 그런데 감사할 것은 무엇이 쌓여 있든 간에 죽으면 다 날아가 버려요.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나하나 뜯어내서 “네 속에 이런 것이 들어 있어.”
디모데전서 ‘딩동’하고 도착한 이 편지가 우리 생각에는 그냥 보면 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제 복음이란 게 주님께서 자기 사명으로, 자기 숙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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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222b 디모데전서1장4절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은 내가 누군 줄 몰라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시고 율법을 줬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율법이 만들어낸 인간이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이 만들어내는 인간. 법이 만들어내는 인간. 사람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법 위주. 법이 있고 그 법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후차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물론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율법으로 만들어 낸 율법 속의 인간이 있고, 또 한 인간은 약속 아래 있는 인간. 율법 아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은 이스마엘이죠. 약속 아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은 이삭이죠.
하나님께서 사람 모아놓고 두 종류로 가르는 것이 아니고, 아예 율법 아래 있을 사람과 약속 아래 있을 사람을 정해놓고 거기에 합당하게 맞춰서 인간을 창조한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의 권한입니다.
우연히 태어났는데, 여기서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설명하기 힘들어요. 어려운 것 해 볼까요?
아담 안에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다 있어요. 아담 안에서는 아버지가 아무리 부모지만 자식하고 아버지하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지금 속이 아픈데 아들 속 아픕니까? 안 아프잖아요. 단절되어 있는 것 맞잖아요.
에스겔에 보면 아버지가 죄를 지어도 그 아들한테는 그 죄를 물리지 않고 각자 자기 죄에 의해서 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서로 단절되어 있단 말이지요. 분명히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도 그것이 단절되어 있어요.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전체가, 모든 인간이 다 한 사람이에요. 뭐로 삽니까? 그 때 그 아담으로 사는 거예요. 아담이 아닌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모두가 아담이에요. 합치면 아담들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이에요. 연속성, 이어지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분명히 불연속적인데, 부모 자식 간에도 각자고 부부간에도 동상이몽이에요. 같은 곳에서 똑같이 잤는데 꿈은 달라요. 여기서 과학이 문제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는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과학인데, 꿈은 해당이 안 됩니다. 똑같은 온도에 똑같은 침대에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꿈이 달라요. 과학자들은 설명이 안 됩니다.
프로이드는 이것은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 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게 불연속성이 맞아요. 다 각자인데 그게 연속되는 경우가 딱 두 가지가 있다고 봐요. 하나는 죽음입니다. 죽으니까 어디로 갑니까? 흙으로 가는 거예요. 목표 지점이 A라면 출발점은 다 달라요. 그러나 결국 도착해 보니까 100년을 살든 900년을 살든 도착해보니 한 곳에 다 모입니다. 어디냐? 아담의 운명 속에 다 모여요.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렇게 아담을 수 천 명, 수 만 명을 한 아담의 운명 속에 집어넣는 그 지점에 누가 서 있느냐? 한 분 예수님이 서 있어요. 왜? 심판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수 천, 수 만의 인구라도 그걸 한 아담으로 봐서 첫 번째 아담 말고 자기 자신을 두 번째 아담(혹은 마지막 아담)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그냥 건성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내가 두 번째 아담 이야기하면 지어낸 이야기인줄 아는데,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도 성경을 안 보니 “왜 평소에 우리가 못 듣던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는데,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빼고 늘 복 받으라는 이야기만 했기에 두 번째 아담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것은 전체 배출된 이 모든 아담이 누구를 겨냥해서? 이것이 철학과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겨냥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창조된 겁니다. 그러면 두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는 율법 주신 분이고, 또 한 분은 약속을 주신 분이죠. 달리 표현하면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고 하나는 사랑 받기로 예정된 자. 이렇게 나누지요.
모든 인간은 결국 예수님의 속성, 율법과 약속을 다 알고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의 비밀을 아시는 그분의 속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피조물은 피조 되어야 하고 창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율법 때문에 태어나야 될 사람과 약속으로 태어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태어난 사람은 육체라고 하고, 약속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빨리 했기 때문에 이것이 맞는지 갈라디아서 4장 21절을 봅시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면서, 22절 이하에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고’ 율법에 해당되지 않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법으로부터 벗어났데요. “여호수아야, 네 더러운 옷을 벗어라.” 율법에서부터 벗어났지요. “네 죄를 사하노라” 하나님의 생명나무, 사랑의 약속을 받은 사람, 이것이 약속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쪽은 율법 그대로 있는 사람이고, 한 쪽은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 행함이 없어도 구원 되는 사람. 한쪽은 죽도록 행해도 지옥 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두 언약이란 말입니다.
두 언약인데, 29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 율법에 해당되는 사람을 뭐라고 봅니까? 육체에 해당된다. 믿을 것은 육체뿐이고, 자기 자신밖에 없고, 한 쪽은 성령을 따라 난 사람. 성령께서 도와주고, 성령께서 인도하고, 성령께서 다스리는 그런 성령에 속한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 항상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하는데, 어떤 인간도 우리하고 똑같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봐요. 정말 육과 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면, ‘아, 이런 것이 육이고 이런 것이 영이구나.’ 하고 성경 하나하나 보면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따로 구분되어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크를 열면 쫙 갈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보면서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이 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나눠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오래 봐도 그게 안 나오는 사람은 육체로 성경을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여튼 제가 지금 이야기 한 것의 요지는, 율법으로 난 사람이, 이것은 자기가 나고 싶어서 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율법에 속한 사람이 있고 약속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그 이야기 한 겁니다.
그런데 약속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아담 안에서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죽어도 마땅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약속을 증거하지만, 율법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놀랍게도 자신이 뭔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믿을 사람이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완벽한 신학, 철저한 신학 이런 것을 구비해야 그걸 무기로 삼아 끝까지 밀어붙여서 하늘나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보다 좀 더 높이,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완벽하게’ 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위계질서, 점점 높이 있는 단계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이건 잘못 된 거란 말이지요. 차라리 이런 사다리에서 떨어져 버리세요. 그래야 사람은 사다리로 올라가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안 올라가도 주께서 주신 약속, 믿음이라는 선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안단 말이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더 높은 사다리로 올라가려고 낑낑거리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애처롭고 가짢고 우습지요. “아이코,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디모데전서 편지를 보내게 된 에베소 교회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1장 4절에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이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거든요. 율법이라는 것은 선한 것인데, 선한 것이란 말은 항상 선해요. 율법은 항상 선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율법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에요.
율법에 속한 사람들이 미치고 환장하는 것은, 제발 따라잡아야 되면서도 완전하게 내가 지켰다고 할 수 없게 미끄러져 간단 말이지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더 높은 하늘이 있는 것처럼, 뭐든지 내가 시도해서 하려고 한다면 자기 몸을 피곤케 하는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보면, ‘끝없는 논쟁’ 끝도 없이 갈 때까지 가는 거지요. 이 사람들은 율법이 바로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9절에 보면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이런 항목들.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이런 경우를 당하잖아요. 이런 경우를 볼 때에,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내부를 완전히 해체하는 용도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말이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합시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말은, 쉽게 예를 듭니다. 제가 지금 안경을 씁니다. 이 안경은 희한한 안경이어서 사람의 죄를 아는 율법적인 안경이라 합시다. 안경을 쓰면 인간의 모든 죄가 보이지요. 그런데 이 안경은 누가 쓰는가? 심판 주. 예수님만 쓸 수 있는데, 에덴동산에서 “안경 쓰지 마라. 이 안경은 너희들이 쓰는 것이 아니고 심판 주가 쓰는 거야.” 라고 했는데, 마귀가 와서 하는 말이 “안경 너도 써. 안경 쓰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는 거야. 너를 심판하는 기준을 네가 빼앗아가 버리면 누가 너를 심판해?” 이렇게 나왔단 말이지요.
심판하는 그 자리를 내가 점령해 버리면 누가 더 이상 심판할 자가 없잖아요. 이게 마귀가 노리는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고 하니까 “나는 예수 안 믿으면 그만이지.”라고 해요. ‘예수님이 심판 주다.’ 라고 믿기 보다는, ‘나는 예수 모른다.’고 하면 아예 심판도 없을 것이 아니냐는 거지요.
이처럼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을 심판할 권한도 없고 자기가 누구한테 심판 받을 이유도 없이 되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죄냐 하면, 그것이 생명나무와 같이 못 있는 이유가 되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영원히 살 권리를 박탈당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이에요. 생명나무를 못 먹는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것은 결국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심판해?”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넌 죽어 마땅해!”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런 성질을 아담 안에서 계속 이어받으니까 그 다음에 율법을 주면, 이 율법을 사람들은 몽땅 그 내막을 알아서 다 떼면 더 이상 누가 나를 지적할 사항이 없게 된다고 생각해요.
다시 합시다. 율법 말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 받는 사람은, 율법 말고 의로 구원 받아서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는데, 계속 율법에 미련을 가지고 율법을 완전히 다 알아서 소지하려는 사람은 “내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데, 내가 뭐가 잘못 됐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자랑할 게 율법 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정도 하면 완벽하지. 더 이상 내가 천사도 하나님도 아니고 이정도면 됐지.” 하고 자기 변명에 나선단 말이지요. 누가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그래서 성화론이 이단입니다.
성화론의 관심은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이만큼 성화되었다. 나도 성경 안다.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만날 안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을 내 소유용으로 만들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어떤 것도 나를 지적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수치를 줄이고 당당해 보려는, 그러니까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바로 성화론이란 말이지요.
‘율법 외’인데, 그것이 아니고 사다리타고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목사는 로마서 8장을 설교하면서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율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온전히 이루려 하심이다. 예전에는 성령을 못 받아서 율법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 받아서 제대로 한번 지켜봅시다.”
다 지켰다 합시다. 그러면 남는 게 뭡니까? ‘다 이루었다.’는 거지요. 그럼 “네가 뭔데?” 자기가 예수가 돼 버려요. 다른 차를 타야 되는데 다른 차는 안타고 그 차(율법) 속에서 완벽한 신이 되고자 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오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기쁨보다도 “너는 참 훌륭하다.”는 소리가 더 기분 좋은 거예요. “너는 죄 없다.”하는 소리가 더 기분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필요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필요 있느냐? 미리 봅시다. 1장 15절 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전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는 자”라고 했어요. 율법을 내가 제대로 몰라서 율법을 내 구미에 맞게 선택해서 내 잘남을, 내 의로움을 확인시켜주는 변명거리로 율법을 사용하니까 ‘율법에 대해서 내가 완전한 자’라고 했지만, 실은 ‘율법 아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 죄인이다.’
그래서 이 성경을, 예수 믿었다고 이 성경을 덮지 말라는 거지요. 성경은 율법적 기능으로써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지적하고 또 지적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다른 차를 탔다는 기쁨이 오지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기쁨이 있지요. 성경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이런 기쁨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당신만 죄인 중에 괴수냐? 우리도 죄인 중의 괴수다. 그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끊임없는 변론’을 왜 합니까? 다 너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평소에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 아닙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자기의 수치를 줄이는 쪽으로 행동한다고.
왜 여자아이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난 후에 피부 관리하고 쌍꺼풀 수술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완전하게. 내가 원하는 진선미가 있잖아요. 진은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으니 됐고, 선은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이고, 제일 쉬운 게 미가 당긴단 말이지요. 그래서 완벽한 아름다움 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제가 박사교회 있을 때 형님이 헐값으로 중고 프라이드(기아 자동차)를 줘서 처음 승용차를 타게 되었는데, 그 때 소원이 뭐냐 하면 프라이드 베타를 타게 된다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정말 했습니다. 프라이드와 프라이드 베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차 뒷부분이 베타는 툭 튀어나왔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프라이드 베타가 옆에 지나가면 공연히 주눅이 들고, 약간 시기심도 있었어요.
프라이드까지 오니까 프라이드 베타가 얼마나 좋은지 보인단 말이지요. 지금은 리오(기아 자동차)를 타는데, 프라이드 베타는 차도 아닙니다. 그 차 생산 중단 되었을 걸.
사람이 24시간 하는 일이 그거예요. 보다 완벽하고 좀 더 높게, 좀 더 우수하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내 속의 욕망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엘런 포우의 단편소설에 [어셔가의 몰락]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이 귀족은 가장 맛있는 것, 보다 아름다운 옷, 보다 감미로운 음악 이런 것들을 찾다보니까 나중에는 망했어요. 더 찾을 것이 없어서. 뭘 먹어도 맛있는 것이 없어요. 완벽하게 맛있는 것을 찾다보니까 그런 게 없어요. 어지간한 것은 다 먹어봤는데 맛이 없어요. 웬만한 명품은 다 입어봤는데 이제 그건 것도 싫증이 나요.
이것을 ‘욕망 체감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욕망을 원하면 원할수록 자기가 선택할 폭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것이 부자의 딜레마입니다. 부자의 고민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칠 지경에 까지 갑니다. 거꾸로 돌아가기도 해요. 일부러 보리밥 먹어 보기도 하고.
보석 귀한 줄 알았지 밥한 끼 귀한 줄 몰라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아프리카 난민들 도와주고 착한 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런 일도 두 세 번 하면 재미없어요. 자극이 없어요.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나를 어떻게 고치면 됩니까? 어떻게 발전하면 됩니까?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이런 식으로 구원해 줄게.’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방주는 임시적인 종말입니다. 그렇지요? 방주에 들어갈 때 세상 끝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방주에서 나와요. 이것이 뭐냐 하면, 구약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구약은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가 아니고 뭔가 예만 보여줘요.
구약에는 TV가 우리 바깥에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가 불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롯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항상 우리는 구약적 관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좀 더 완벽했으면 하지만 항상 이런 것은 일시적으로 해서 끝납니다. ‘아, 은혜되더라.’ 은혜 되도 몇 분 못갑니다. 그것을 아예 인정해 주세요. ‘아, 지난 주 설교 은혜로웠는데 그 은혜가 좀 오래 갔으면 좋겠다.’ 그 은혜 오래 안 갑니다. 또 오래 안 가게 해요. 하나님이.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차 시동이 안 걸려 은혜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려요.
성경을 깊이 보면, ‘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주셔야 하는가?’ 이것을 알게 됩니다. ‘왜 나는 나에게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존재인가?’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인간은 율법을 알리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얼마나 무섭고, 율법은 우리를 아예 죄인으로 간주하고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아래 있게 한단 말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약속 안에 있잖아요.” 라고 하는데, 약속 안에 있어도 율법 아래 있으면서 약속 안에 있습니다. 아까 했잖아요. TV가 들어와서 TV는 항상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면서 그 위에 예수님의 피를 묻히고, 그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는 거예요. 죄 빼고 은혜만 달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단 말이지요.
‘감자탕에 왜 감자가 없냐?’ 고 하는데, 한 날은 버스에서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그 감자가 식물성 감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돼지 등뼈를 감자뼈라고 한답니다. 감자탕에 감자가 많은데 내가 생각한 감자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이 어떤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고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은 사라져도 말씀은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그 약속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이런 것은 우리가 우리를 더 높은데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다리로 올라가지 말로 다른 차로 바꿔 탑시다. 사다리 있는 소방차 타지 말고. 이번에 알았어요. 소방차 있다고 불 안 나는 것이 아니라고. 인간은 대비책이 없습니다. 소방차 있다고 해서 불 안 나는 게 아니에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다른 차를 타고 있습니다. 다른 차를 타고 있으면서 뭘 본다? 소방차의 사다리로 올라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사니 주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하셔야 하는구나!’ 그걸 발견하는 겁니다.
9절에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를 위해 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세상에 존재해야 주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대목을 보면서,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도 선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 그래서 율법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나쁜 사람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은,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너, 율법으로 구원 받을래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을래’ 그러니까 자기 구원하려고 뭔가 따로 내려온 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속성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자기 살기 위해서 ‘율법으로 할까, 예수 믿을까?’ 이런 식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선하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율법은 율법대로 체험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율법을 보면서도 ‘아, 나는 율법으로 보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으니까 율법만 놓고 보니까, 이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자기가 삼켜서, 율법을 다 떼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런 인간적인 행함으로 바꾸려고 하지 마라.’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4절 초반에 나옵니다.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족보라는 것은 전통, 역사 아닙니까. 그 다음 “신화”도 마찬가지고.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행함이죠. 그것이 적혀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이지요.
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네가 사랑을 보여주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뭐예요? 사랑은 단절이 아니고 연결입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 이 말은 ‘너와 내가 남남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연결되어 있어요. 끊어짐 없이 한 덩어리로 연결된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바티유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아주 잘 표현했어요. 사람이 죽을 때 우는 사람과 안 우는 사람이 있는데, 우는 사람은 평소에 죽은 사람과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이고, 안 우는 사람은 사랑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꾸 딴 몸으로 느껴지지 않고 내 손가락, 내 발가락처럼 나에게 붙어있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처럼 느껴질 때 그 때 비로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사랑이죠.
진짜 성도 같으면 이런 사랑의 모습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 몸이죠. 한 몸이기에 자연스럽게 사랑이 나오죠. 누구를 바라볼 때? 끝없는 족보, 내 잘남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 쳐다보면 이제 한 몸인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한 몸일 때는 왼쪽 손과 오른쪽 손이 경쟁합니까? 안 하잖아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끝없는 논쟁은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논쟁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자는, 주님의 사랑과 한 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잘났다. 그러니까 나에게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라.’는 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에베소 교회 내에 많이 퍼졌던 모양이에요.
12-13절 봅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할 때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 누구한테 자랑할 때 ‘나는 이만한 자격이 된다.’ 이렇게 자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이 죽이려고 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됩니다.’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죠.
‘나는 당신들을 잡아 죽일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 주님이 맡겨준 이 일을 할 자격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나는 예수 믿는 놈 다 죽인다.’ 라는 말을 실제로 했고,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 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내가 사도 직분을 감당할 사람이 맞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입장에서 참 적합하다고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바울의 이런 말을 듣고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죠. 우리교회 그런 사람 한 분이 오셨어요. 그분은 서울대학 나오신 굉장히 똑똑한 분인데, 말을 할 때 앞뒤 다 끊어버리고 결론만 던지니까 듣는 사람이 다 놀라요. 예를 들어서, 친구가 교회 가면, “우리 교회 가서 죄짓자.”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듣는 사람은.
교회 가는 친구에게 “너 미쳤다.” 이렇게 해요. 이것은 “네가 다니는 교회는 교회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 “왜 교회 가서 왜 죄짓나? 교회 가서 착하게 살아야지.” 교회 가서 죄 짓자는 말을 알아야 복음을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앞뒤 다 끊어버리고 결론만 던져버려요. 그래서 듣는 사람이 시비는 거는(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이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설명을 좀 붙이시기 바랍니다.’ 라고 부탁을 합니다만, 사도바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동안 예수 믿는 사람을 폭행했고, 예수님의 면상을 때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내가 예수님을 증거할 적임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나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줄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나는 반대편 쪽 사람인데 반대자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에 이런 놀라운 보너스가 어디 있냐는 말이지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디모데후서에 나오는데 한 번 봅시다.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계획 잡힌 대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대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나 같은 인간도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을 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여기 한 번 적어볼게요. 앞에 괄호하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 앞에 괄호를 했는데 뭐가 들어갑니까?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여기에 ‘죄인’이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 아닙니까. 이 공식이 성립되려면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은 어디에 다 들어가야 돼요? ‘나 잘났다. 똑똑하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신학 했다. 나 목사다.’ 이것 다 때려치우고 어디에 집어넣어야 돼요? ‘죄인’에 집어넣어져야 그 사람의 입에서 제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임했다’가 증거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공식을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자기 자신부터 우선 적용합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 되어야 비로소 죄인 된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임하신 이유를 이 공식대로 자기를 앞장세워서 공식대로 증거할 수 있단 말이지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임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즐겁습니까? 자기가 죄인이라서 절망한 사람. ‘야,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나는 죽으면 지옥 갈 거야.’ 라고 하는 사람에게 이 공식을 들이대면 효과 만점입니다. 그렇겠지요?
이 사실을 성령이 임해서 그 사람이 믿으면 그 사람은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오늘날 우리에게 좀 시들한 것은 우리가 사다리를 타서 죄에 대해서 자꾸 완벽하려고, 죄인의 공식에서 벗어나서 다른 공식, 내가 하나님의 법대로 위대한 나를 자꾸 생각하니까, 이 공식이 안 들어오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임한 것이 별로 안 들어와. 왜? 자신이 너무 잘났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기 위해서 지하 퇴패 이발소에 갈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나쁜 짓 안 해도 살아가면서 시기와 질투와 미움 이런 것이 우리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계속 나와요. 온갖 더러운 것이.
우리나라 이명박 내각의 평균 재산이 얼마입니까? 46억.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저것들은 뭘 해서 저렇게 많이 가졌나?’ 하는 시기심과 질투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눈에 보일 때마다 시기와 질투. 뭘 봐도 시기와 질투. 한 시도 시기와 질투가 안 나올 때가 없어요. 24시간 시기와 질투가 나와요. 하루 중 단 1초라도 ‘나는 죄인이다.’ 가 나오면 다행입니다.
15절 끝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 다음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방정식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압니다. 약속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약속이 힘으로 약속 속에 담아놓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해도 우리에게는 죄가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가 나오고. 그러다가 누가 좀 잘 해주면 ‘해 해’ 거리면서 좋아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는, 평소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기쁨이 얼마나 없었으면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을 주셨다가 그것을 도로 빼앗아가요.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요. 그러니까 이것은 평소에 공짜로 구원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해야 되는데 자꾸 우리는 뭔가 더 소유하면 기뻐하고 내 것이 줄어들면 짜증내는 이런 것이 죄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오게 되고, 또 시들해 지고 그런 일이 반복됩니다. 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죄인도 구원했다는 이 기쁨이 우리가 소유한 기쁨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많이 하지요.
이번에 헬기 추락해서 7명이 죽었어요. 유족들 난리 났잖아요. 나이 90 되어서 노망해서 죽기를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 아니잖아요. 잘 죽었다고 하면서 기쁨의 장례식을 치른 것이 아니지요. 가장들이고 평소에 자식들이 기대하고 의지했던 아버지입니다. 군의관은 그 아내가 임신한 상태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아이는 아빠 없는 아이지요.
사람의 평소 모든 행동은 수치를 감추는 식으로 움직이는데,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수치라. 왜? 아버지가 없으니까. 이걸 누가 책임집니까? 이 자존심 상함을 누가 책임지겠어요.
공지영이라는 작가가 아프리카에 가서는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항의를 했답니다. “신이시여, 진짜 당신이 살아 있다면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반항을 하려면 처음부터 반항하지 꼭 그런 장면을 봐야 반항합니까. 인간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지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다 욕할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어디 나를 건드려. 내가 얼마나 사다리로 올라가서 천당 가려고,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내 사다리를 걷어차서 땅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떨어져서 수치스럽게 하고, 왜 헬기가 추락해서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아야 하고, 왜 하필이면 그 때 눈이 와서 시야가 흐리게 했으며 ---
“왜 하필이면 ---”하고 1장에서 20몇 장까지 계속 원망하는 것이 욥기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 할 때는 이미 도를 텄어요. ‘인간아, 내가 있고 하나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차후에 만들어졌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 아래 있는 사람은 이런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좋은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는 아담과의 연속성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그 성질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이렇게 화내고 죄만 지어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긍휼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행위를 고치라는 말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심지어 환란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딩동’하고 전해지는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 안 봐도 굶어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죄인 노릇하면서 살아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한 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는 인내심이 택한 백성 구원 받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쳐 보세요. 우리 돌아올 때까지 주님 재림 안 하십니다. 모든 것을 올 스톱하고 기어이 우리에게 긍휼을 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어이 우리를 낚아채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믿노? “날 봐라.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체포하고 잡아 죽였다. 하지만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날 구원했어.”
아직도 주님이 재림하지 않는 이유는 구원 받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 숙제를 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혼자서 완벽하고 완전을 기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하나님이 구원할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긍휼 때문에 우리가 거저 구원 받은 겁니다.
그래서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인간은 자기 행위로 의인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서 그 다음에 긍휼이 더해져서 구원하시는 이 공식, 죄인 되게 하고, 그 다음에 긍휼을 알게 하시고, 오직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이 방정식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여기서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방정식대로 매일같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 방정식대로 진행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지 여러분이 울며 기도해서 이 방정식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죄인 되게 하시기에 여러분들은 매일 시기 나고 질투 생기고 그렇습니다. 장사하면서 옷 사러온 손님이 30분 기웃거리다가 ‘맞는 것 없네.’ 하고 갔을 때, 가까운 곳에 벽돌이라도 있으면 던지고 싶습니다. 이것이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지 말고 방정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있어요. 주께서 세상에 임하신 이유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나 같은 인간 건지시려고 오셨구나. 그런데 또 손님이 오게 되면, 아예 죄인이기 때문에 각오를 해요. ‘30분쯤 뒤지다가 그냥 가세요. 그것도 극복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꾸 뭔가 하려고 하고 뭔가 안 하면 미진한 것 같고, 괜히 수치스러운 것 같고 이 모든 것이 아담의 죄 때문에 온 버릇이고 속성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이며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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