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하 7:1-2 / 하늘과 땅의 대립 본문
하늘과 땅의 대립
이근호
2026년 5월 27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7:1-2
(7: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7: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현실, 인간들로서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현실입니다. 좋든 싫든 현실에 적응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이 지금 북이스라엘에서는 절망적입니다. 아람 나라가 성을 포위하므로서 양식은 바닥이 났습니다. 성 안에서는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으니 자신들이 낳은 아기를 양식으로 여겨 먹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여호와람은 이런 비극에서 온 충격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분노의 양대로 폭발합니다. 이판사판입니다. 그 누구를 향하여 분풀이를 할 수밖에 없는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 열왕기하 6:3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 분풀이는 엘리사 선지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결정내려집니다. 하나님을 살해하는 심정으로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때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7:1)
이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곤궁에 빠진 인간들을 더욱 약 올리는 이야기로만 들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몇 달 후도 아닙니다. 당장 내일, 이 사마리아 도성에 돈에 넘치고 먹을 것이 넘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믿을 위인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어느 정도로 극심하게 양식이 바닥이 났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절감하고 실감하고 있는 그 현실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심정을 유력한 장관 하나가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괴롭힌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고마움으로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이 대세가 된 지경에서 장관은 도리어 하나님에게 욕하듯이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선지자의 약속에 대응합니다.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 7:2) 그렇습니다. 하늘에 창이 열려서 하늘에게 소낙비 쏟아지듯이 양식과 돈이 쏟아져야 엘리사가 말한 다음날의 상황에 일치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같찮은 말을 했다는 겁니다. 정도를 넘어서 무모한 발언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늘에서 비 내리듯이 한꺼번에 양식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 계신다면 오늘에 이를 데까지 이토록 철저하게 이스라엘 자신들을 괴롭힐 리가 없다는 겁니다. 즉 갑자기 마음을 바뀌실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르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 구성’이 어떤 식으로 조성되어지는 가를 모르고 그저 적응하면서 자신네들 목숨 부지하는데 열중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 경영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소원성취를 틀어지게 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상상한 자아상을 그리면서 일방적으로 자신이 자기가 상상한 자태를 유지해야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평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대립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기에도 남들이 보기에 의젓하게 사는 모습을 갖추고 싶은 겁니다. 그것을 충족시켜 생활이 바로 직장 생활입니다. 인간이 직장을 가짐으로서 대외적으로 자신의 자긍심을 갖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장관의 직장은 장관입니다. 그는 자신의 맡은 일을 잘 수행해서 장관으로서 자기 위상을 지켜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이라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는 이런 자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균열된 자아상’이라는 점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찾으시는 이상적인 자아성이 어떤 것인지 신약 시대를 통해서 알아봅니다. 마가복음 7:26-28에 보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방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균열되어 있음을 자인합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어느 집에 개가 있다면 주인은 결코 자녀를 놔두고 개를 키우고 먹이기 위해 돈을 벌고 양식을 사고 음식을 만들지는 아니할 겁니다. 즉 자녀와 개 사이에 분명한 균열을 갖추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거론했을 때,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말합니다. 자녀들이 배불리 먹고 더는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남은 음식은 비록 자녀는 아니지만 개는 고맙다하고 먹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 원하신 믿음입니다. 피아노 건반을 열고 의지에 앉아 손가락으로 건반을 칠 때 소리가 납니다.
이것은 바로 행함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피아노 근처에 가지도 않았음에도 피아노가 저절로 두껑이 열리고 건반이 움직여 음악 소리를 내면서 연주가 되면 이것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이 일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 관계에 놓여 있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럴려면 자신들의 먹어야 될 양식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신란하게 욕을 다 얻어먹는 하나님의 고통에서만 주어짐을 알아야 했습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상대로 내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기를 해도 악마와 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자랑스러워하시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등장은 인간들의 솜씨나 행함의 결실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결핏하면 욕을 먹으시는 그 하나님의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저 주신 신앙은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균일된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께서 신약에 열쇠를 마려하셨습니다. 악마의 힘으로도 손탈 수 없는 열쇠입니다.
그 열쇠는 오로지 예수님의 죽으시는 행위만이 본질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악마의 권세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전부, 곧 영생을 주셨사오니 나의 전부를 잃는다 할지라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17강-열왕기하 7장 1-2절(하늘과 땅의 대립) 26052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7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7:1-2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아람 나라한테 포위된 이스라엘이 얼마나 양식이 없었는지, 이제 마지막 남아 있는 양식은 자기 배에서 낳은 어린아이들밖에 없었다.’ 이게 실제로, 현실로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어야, 아이를 잡아먹어야 어른이 사는 처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여호람 왕이 그걸 목격했습니다. 자기 아들은 내놨는데, 상대방이 자기 아들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으로 다투는, 애를 양식으로 삼는 그 현장을 왕이 대하면서 ‘이 모든 일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해서 된 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순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고 대놓고는 욕을 못 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죽여버리겠다’라고, 화가 단단히 난 여호람 왕이 엘리사를 살해하기 위해서 자기 부하들을 보냅니다. 그때 엘리사 선지자가 여호람 왕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왕하 6:32)라고 하지요.
‘살인한 사람의 자식이다.’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 조상의 살인 충동을 네가 그대로 받았구나”라고 하면서 엘리사 있는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열왕기하 6장 33절에서 왕이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까 모든 책임은 우리한테 없고 하나님 잘못이다’라는 것을 선언하지요. 어쨌든 현실은 그 지경이 되었으니까요. 먹을 게 없어서 사람 고기 삶아 먹어야 될 그런 입장이 되었으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마지막 인간이 긁어낸 솔직한 마음은 하나님께 발악하듯이 대드는 거 외에는 없지요.
이게 그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아람 나라한테 포위된 이스라엘의 현실이에요. 그리고 그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다른가? 다르지 않습니다. 같습니다. 여호람 왕이 엘리사 선지자를 공격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공격한 거예요.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니까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왔다면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내가 생활하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장애가 되는지’ 인간은 절실하게 느끼고 거기에 대해서 항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현실이란 뭐냐? 현실은 인간들이 걸핏하면 하나님께 항거하고, 대들고, 하나님을 욕보이는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양식 좀 있고 먹고 살 만하니까 우리는 ‘하나님, 하나님!’ 찾지만 오늘 본문같이 극단적으로…, 인간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사람 고기를 어떻게 먹습니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그 상황, ‘내가 이렇게 불행하고 힘든 것은 다 하나님 탓’이라는 그 발언을 쏟아내는 그 순간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털어놓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과 하나님이 유도해 나가는 현실과 차이가 나지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안정된 현실 속에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우리를 인간답게 해 줘야 한다는 그것이 당연한 거고 마땅한 것처럼 그렇게 여깁니다.
‘현실을 현실답게 그냥 질서 있게 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줄 것을 줘. 우리는 그 안에서 행복을 만끽할 테니까. 그게 현실이 해야 할 일이야. 그게 자연이 해야 할 일이야.’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평소에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현실 속에서 현실을 비틀어버리니까 인간은 바락바락 하나님께 대들고 싶은 본심을 결국은 감추지 못하고 털어놓게 돼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가 약을 올리듯이 툭 던집니다. 어떻게 약을 올리느냐 하면, 엘리사가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두 달이나 석 달 뒤가 아니고 내일 이맘때입니다. 24시간 남았어요. 24시간 이후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7:1).
보리가 어디 있으며 고운 가루가 어디 있어요? 지금 먹을 가루가 있었으면 애를 잡아먹겠습니까? 그게 없는 거예요. 없는데 엘리사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24시간 이후에, 내일 고운 가루도 있고 보리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들이 풍족하게 남아 있어서 배급제가 아니라 시장에서 상거래가 형성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지금 모두 한마음으로 일치되어서 하나님께 욕하고 있는 그 현실이라는 것, 비참한 현실 속에서 엘리사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인간을 향하여 엘리사가 약을 올리는 발언이에요. 누가 들어도 약을 올리는 발언입니다. “두 달쯤 뒤에 너희들이 회개 기도하면 들어준다.” 이게 아니고 24시간 이후에, 내일 당장 준다는 거예요. 아무리 눈 닦고 봐도 없는데, 양식 자체가 없어요.
이 대목에서 성경 그 뒷부분을 우리가 모른다 친다면 우리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냐?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엘리사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하도 대드니까 그에 대한 반박으로 인간을 부정하기 위해서 했던 발언이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금 엘리사가 한 이야기가 무슨 내용으로 했는지, 제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설명해 드릴게요. 잘 들어보세요. 어떤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립니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 연주가 된다.’ 이것은 보통 인간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이 다 알아요.
그런데 엘리사가 이런 이야기 합니다. “어떤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는데 거기서 피아노에 손댄 사람 아무도 없었다. 피아노가 저절로 뚜껑 열고, 저절로 건반이 움직여서 소리가 났다. 믿어라.” 엘리사가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 이것은 욕이에요. 우리 인간들 싸잡아 욕하는 겁니다. 앞에 예를 든 것, 피아노 손을 대서 치는 것을 ‘행함’이라 하고, 손도 안 댔는데 저절로 피아노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로마서 4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냥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이야기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거예요. 그러나 로마서 4장에서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기 이전에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가 전제가 돼 있어요. 이게 완전히 인간을 엿 먹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현실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인간의 소원 성취가 있고, 주님께서 인간의 소원 성취를 의도적으로 기피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절망에 대놓고 하나님께 욕하고, 그렇게 욕하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다고 꾸짖는 현장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현실로 구성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문장이 많이 길었습니다마는 이걸 어떻게 달리 쉽게 할 수가 없어요. 현실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 관계가 어떻게 심각하냐?’를 들춰내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소원 성취를 기피해요. 인간에게는 어떤 소원 성취의 기대가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소원 성취의 기대를 나오게 유도해서 의도적으로 그 소원 성취를 피해 가요.
그러면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악밖에 안 나오죠. 그게 바로 현실이에요. 그게 현실이에요! 하나님께 욕할 수밖에 없고, 그 욕을 얻어먹은 하나님은 이 현실을 뭐로 가득 채우는가? 하나님의 고통으로 가득 채우는 현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고통으로. 그게 십자가 사건이죠. 이 현실의 중심은 십자가 사건이었는데 그게 하나님의 피 흘림이고, 고통이고, 아픔이에요.
그런데 인간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신음소리, 아픈 소리,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게 들려오지 않아요. 반대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뭔데 내 소원을 그때그때 마다 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간의 소원이 뭐냐? 인간의 소원은 본문의 장관이 우리들 인간들을 대표해서 말해줬어요.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 7:2).
뭐냐 하면, ‘하늘의 문이 창을 열어서 그야말로 하늘에서 뭐가 쏟아지느냐 하면, 고운 가루, 보릿가루, 돈 같은 게 막 쏟아져서 인간으로 하여금 배고프지 않게, 배터지게 먹도록 해 주시는 것’ 이게 지금 양식이 없는 이 지경에서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소원이에요. 이게 인간의 소원입니다.
이스라엘의 장관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엘리사가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터무니없는 이유는, 인간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위한 소원 성취의 기대가 있는데 그걸 아예 하나님이 비켜 가니까 속에서 악에 받쳐서 ‘하나님이라면 이 정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분노에 섞인 본심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을 들춰내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그 뜻에 반발하는 그 요소로서 이 현실을 꾸려 나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어떤 현실이죠? 나 잘났다는 것을 만끽하고 자랑질 할 수 있는 공간 그걸 현실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의 여파로 현실이 지금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현실을 빈 공간으로 생각하고, 인간들이 설치면 마음대로 설칠 수 있는 어떤 운동장 같은 걸 생각합니다.
어린아이가 학교 끝나고 난 뒤에 운동장에서 혼자 신나게 놀잖아요. 우리는 공간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런 거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평소에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보면, 그것이 바로 현실관과 전혀 맞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현실관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쯤에서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신앙이 무엇이냐?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게 해 주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이렇게 성급하게 나오지 마시고, 먼저 ‘불신앙이 무엇인가?’부터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엘리사 편에 서지 말고 여러분이 장관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양식이 전혀 없는 이 현실에서 여러분이 내무부 장관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의 이 장관은 왕이 의지할 정도의 실권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여러분이 이 장관 입장, 장관이라고 생각한다면 양식이 다 떨어진 이 백성들에게 어떤 정책을 내놓겠습니까? 5초 드립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장관 자꾸 욕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장관이라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장관이 제대로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 같으면 하늘에 창을 내서 양식이 하늘에서 쏟아지게 되면 우리는 고맙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밖에 못 하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장관은 본인이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을 본인이 너무 잘 알죠.
이것은 뭐냐? 하나님을 엿 먹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욕하고 엿 먹이겠다는 것, 그게 바로 현실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꾸려 나가는 현실이라는 거예요. 아닌 척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존경한다. 하나님을 좋아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작은 하지 말라, 그런 위선은 떨지 말라는 거예요.
살 만하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지 어려워 보세요. 하나님 욕하죠. 그렇다면 신앙이 뭐냐? 신앙이 뭐냐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발길을 어디로 둬야 하느냐? 친절하게도 오늘 장관 나왔잖아요. 장관의 마음에 내 마음을 합쳐 봅시다. 합치면 이렇게 돼요. 장관은 지금 직장인입니다. 장관은 백성들의 살림,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직장인이에요.
자 직장이 뭡니까? 직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자긍심을 채워주는, 사는 보람을 주는, 나의 나 됨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직장이에요. 직장에 있음으로써 대외적으로 사람 구실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우리는 그러한 좋은 평가에 기분이 좋아지죠. 그래서 그 힘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 인간 세계에서 떳떳한 존재로서 사는 보람을 갖는 게 직장입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하는 장관이 자기 직장에 걸맞은 정책을 못 세우고 있어요. 난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이상형을 항상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청소년 때 서로 좋아했던 첫사랑이 있다고 합시다. 나이 60이 넘어도 그 첫사랑을 보고 싶어요. 그런데 50년이 지난 그 사람을 보고 싶은 게 아니고, 그 첫사랑의 그때 그 사람을 보고 싶은 거예요. 50년 동안 늙어 온 것은 나타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첫사랑이든 둘째 사랑이든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상상으로 꾸며낸 그 상황을 자기가 갖고 싶은 거예요. 자신이 타인을 통해서 뭔가 상정해서 그것과 일치될 때 사람은 즐거움을 느낍니다. 직장이라는 게 얼마나 인간의 기분을 높여주는지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서울의 어떤 경찰서에서 여경이 로스쿨 가겠다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근무에 태만할 수밖에 없지요. 팀장이 결재할 서류를 보니 성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팀장 같으면 보통 경감이나 경정 정도 되겠죠. 팀장이, 서류에 뭐가 잘못됐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니까 여자 경찰관이 “그렇게 잘하면 본인이 직접 하세요!” 자기는 로스쿨 준비한다고 힘들고 바쁘다는 식이지요. 이것은 하극상이죠. 그런데 부하직원 입장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에요.
그래서 서장이 그 여경을 감봉 처리하니까 국가를 상대로 행정법원에 감봉 처리 취소하라고 소송을 냈는데 패소했어요. 직장이 뭐냐? 직장은 나의 나 됨의 주체를 살려주는 게 직장이에요. 직장이 없다 하면 나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졸업하고 취직하려고 하잖아요. 어엿한 직장, 어엿한 명함이 있을 때 사람 대접을 받아요.
그런데 이 장관의 입장에서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동안 양식을 준 것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 준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참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균열이 없으면 금고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균열이 없으면 금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일부만 맞고 나머지 모든 것은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
자물쇠 열 때 이래도 안되고 저렇게 해 봐도 안되다가 어떻게 하면 찰칵, 열리잖아요. 여는 쪽과 열리는 쪽이 그 지점에서만 맞닥뜨렸기 때문에, 딱 통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가 균열이 돼 있는 겁니다. 균열이 돼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뒀지요.
그 균열 된 세계 - 이방 민족은 아예 균열 돼 있고요 - 이스라엘에게 균열된 이 현실을 준 것은 균열 속에서도 딱 맞아떨어질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고마워하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예요. 그런데 인간은, 오늘 본문의 장관도 마찬가지지만 왜 균열 됐는지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왜 균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신약 성경 마가복음 7장 26-28절을 보겠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막 7:26).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들려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집안에 자녀가 있고 개도 기르고 있는데, 부모에게 있는 양식은 개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개를 굶기는 건 아니지만, 이 양식은 개 주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뭐냐? 자기 자식에게 주기 위해서 양식을 있다는 거예요. 자기 자녀들이 떡을 먹었으면 먹고 남은 것이 있을 거 아닙니까?
에이 버리자, 하고 버리니까 그 주인이 버린 떡을 누가 딱 기다리고 있다가 먹는가? 개가 와서 ‘반갑다, 양식! 고맙습니다’ 하고 그걸 먹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은 뭐냐 하면요, 인간이 어떤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없어도 그만인데 남이 다 먹고 난 뒤에 혹시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고맙다, 하고 먹어야 할 그 양식, 그런 자가 과연 인간 중에서 나타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일하고 월급 받았다. 내가 번 내 돈이니까 내가 알아서 먹는다.’ 이런 인간들밖에 없어요. 현실이 어떻게 대립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현실이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져 있는 현실인 것도 모르고, ‘내가 직장 생활해서 월급 타고, 밥 먹고, 나만 번듯한 인간처럼 행세하게 만들고, 그러면 그것이 나의 행복이다. 이게 바로 현실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냐?’ 이런 식으로 살아가더란 말이죠.
하나님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현실을 운영하고 현실에 관여한다는 것을 인간치고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저 주님한테 당당하게 도와달라고 온 게 아니고요,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왜? 제가 바로 감히 사람들이 먹는 양식을 넘볼 수 없는 개 같은 존재거든요.’
지금 욕하는 거 아닙니다. 욕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개같은 존재거든요!’ 그게 바로 피아노앞에 아무도 없는데 피아노 소리 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이 믿음을 위해서 주께서 오신 거예요, 이 믿음을 위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삽입시켜 놓고, 그 고통이……, 균열 된 이 현실 세계에서, 땅이 하늘과 떨어진 사이에서 어떻게 하늘이 열리겠습니까?
장관이 이야기했어요. “하늘의 문이 열려서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창을 낼 수가 있습니까?” “너 말 잘했어.” 네가 ‘하늘에 창을 낼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늘의 창을 낼게”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이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해서 ‘창(窓)’ 이야기를 했는데,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창을 내버렸어요.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늘과 땅이 균열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요. 열쇠가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균열 돼 있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인간들이 땅에서 호소해도 하늘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열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인간 자체가 열쇠가 아니니까요. 인간 자체가 열쇠가 되지 못하니까, 음부의 권세를 인간들이 이기지 못하니까, 악마의 힘을 인간들이 이기지 못하니까 인간에게서 열쇠가 나올 턱이 없죠.
빌고, 또 빌고 뭐 어떻게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하늘은 끄떡도 없고 문을 안 열어줍니다. 끊어져 있어요. 끊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도대체 이 열쇠가 뭡니까?” 이게 궁금하겠죠.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을 ‘꼼짝 마라’ 하고 있는 이 악마, 악마의 힘이 손 탈 수 없는 그 열쇠가 뭐냐, 그 열쇠가?
그 열쇠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1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열쇠 이야기하고, 그 열쇠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인간들은 열쇠가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해서 궁금할 수밖에 없어요. 그때 예수님이 열쇠로 끼어듭니다. 예수님의 열쇠로 끼어들어요. 예수님이 교회의 반석이에요. 그러면 베드로는 뭐냐? 베드로는 베드로가 아니고 시몬이죠. “바요나 시몬아.”
시몬인데 아무것도 아닌 시몬이 베드로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 현실…, 아까 현실을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죠. 현실은 뭐라고요?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인간 됨, 자기의 자긍심, 마지막 남은 앙금처럼 자존심 세우는 거,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현실과 자기 자신이잖아요. 살면서 사는 보람, 남한테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 그게 사는 보람이잖아요.
그것은 악마의 힘 안에서, 악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서 이 고통 많은 세상에서 나름대로 버티기 위해서 자기가 의견을 제시하는 거예요, 버티기 위해서. 따라서 이 열쇠는 인간이 아니고, 열쇠는 예수님 자신이 천국의 열쇠가 돼요. 악마가 딴 사람은 다 건드려도 예수님은 못 건드리니까요. 악마가 예수님을 건드려 죽였잖아요. 그렇게 죽여서 악마는 게임 끝났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써 주님은 악마 보고 빠이빠이, 한 거예요. ‘바이 바이~’ 끝났어요. 악마가 손 못 대요. 이제 열쇠가 꽂히는 사람은 전부 다 악마가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손을 탈 수가 없어요. 왜? 그 사람 자체가 열쇠가 되었으니까.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으니까요. 성령을 받아서.
이렇게 성령 받아 반석이 된, 열쇠를 받은 이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취지로 복음을 설명했어요. “복음을 받게 되면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로선 그 복음을 받았을 때 할 말을 잃는다.”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 대목이에요.
온 천하보다 귀한 걸 받았으면, 그걸 받은 사람의 남은 생활은 이제 뭐냐? ‘온 천하를 잃는 순서’가 남아 있겠죠. 왜? 감산, 빼기(-), 온 천하를 빼기. 온 천하보다 더 귀한 복음을, 생명을 받았으니까 이 온 천하와 같은 내 것이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쁨은 소실되거나 소멸되지 않겠죠. 그래야 말이 되잖아요, 말이. 온 천하보다 귀한 복음을 받았으면, 예수님의 영생을 받았으면 이제는 ‘온 천하 되는 게’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염려하거나 걱정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욥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욥한테 묻지도 않고 악마와 내기했어요(욥 1:6-12). “욥을 봐라.” 내기를 누구하고 하느냐? 하나님은 악마 보고 내기했어요. “욥을 쳐라.” 악마가 말하기를, “욥을 치면 욥은 하나님께 항의할 것입니다.” “내기할까?” “내기합시다.” 그래서 욥기 1장에서 내기를 했어요.
그 내기는 인간의 의견이 개진되지 않는 내기예요. 그 말은 이 세상의 현실은, 이 세상의 현실은 인간이 ‘슬프다, 걱정된다, 염려된다’ 할 그러한 권리가 일체 없는 식으로 현실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하고 내기한 게 아니니까. 나를 지배하는 악마와 내기했거든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상대하지, 우리 인간 보고 상대한 게 아니잖아요.
뱀은 주님하고 상대하지, 우리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이미 뱀한테 굴복되어서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게임도 안 되고요. 하나님께서 현실을 이끄실 때 그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그런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복음을 받고 입을 다물 뿐이죠, 너무 놀래가지고.
어떻게 피아노 치는 사람도 없이 피아노 소리가 들리냐, 어떻게 복음의 소리가 들리냐? 이거 분명히 내가 친 게 아닌데. ‘내가 친 건 아닌데…’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아니고’를 반드시 거쳐야 돼요.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를 거쳐야 그다음에 ‘믿음’이 나와요. 나의 행함은 ‘불신’의 모습, 불신에 대한 고백이에요. ‘하나님이 좀 창을 열어서 내일 이맘쯤에 곡식 팍 내려주면 좋겠다.’ 그걸 인간들이 미리 건의했습니까? 건의 안 했거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구절이 있어요. 그게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는 이것은 뭐냐? 인간의 정, 감정과 욕심에서 나왔잖아요. 이걸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은 욕심, 죽은 감정’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고맙다는 이야기, 고맙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죠.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장례식장에 갔는데요. 그 돌아가시는 분이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는 거예요. 그 호실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돌아가실 때 몸이 아프니까 다들 고함을 지른다는 거예요. 고함을, 왜 고함을 칠까요? 아파서, 아파서 고함을 치죠. 그 이야기 듣고, 제가 요한복음 11장 41절이 생각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었을 때 주님께서 사람들을 나사로 무덤에 딱 데려갔어요. 죽은 나사로 무덤에 사람들을 데려갔습니다. “돌문을 치워라.” 했습니다. 치우고 난 뒤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이거 중요하죠. 하나님은 누구 말 듣습니까? 사람 말 듣습니까? ‘열쇠’ 말만 들어요. 사람 말 안 듣습니다. 현실은 예수님의 고통, 십자가 고통 중심입니다. 우리 말 안 듣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41:42). 믿는다는 것, 치는 사람도 없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거죠. 그리고 난 뒤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요 41:43).
“나사로야, 나오너라.” 큰 소리로 이야기해요. 큰 소리로! 이 세상에 큰소리치실 분은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에게 이렇게 영생을 주신 분 외에, 아무도 우리에게 큰소리칠 사람 없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큰소리칠 자격 없어요. 아무도 큰소리칠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교인 보고 큰소리칠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개 같은 존재입니다. 하루하루 양식 안 줘도 되는데 그냥 은혜로 주신 거예요.
부스러기 주시고 그게 은혜인데, 부스러기인데 긍휼의 부스러기, 사랑의 부스러기를 우리가 얻어먹을 때 이 대립된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아, 내가 사는 것이 이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정말 하나님께서 창을 냈구나.’ 창을 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창을 내시고, 뭘 얼마나 준다는 겁니까?
열왕기하 오늘 본문 7장에 보면, 창을 여시고 “고운 가루 한 스아”, ‘한 스아’라 하는 것은 리터로 약 7.3리터쯤 되고요. 무게로는 약 4kg 정도 됩니다. 은 한 세겔, 한 세겔은 ‘은 10g’ 정도로 돼 있는데 은 1g이 11,100원 정도, 그러니까 은 한 세겔은 110,000원 정도입니다. 별로 뭐 헐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곡식이 없는 입장에서는 대단한 양이죠. 그리고 보리 두 스아, 두 스아니까 약 14리터에 은 한 세겔, 우리 돈으로 110,000원 정도인데 이걸 주신다.
우리는 믿음이 좋아서 그런지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급하게 나서지 마시고요, 성경에서 장관의 의견을 왜 거론했겠습니까? 우리가 장관 자리부터 출발을 하자는 거예요, 장관 자리부터. 자신의 행복 추구, 자기의 직장의 권위, ‘모든 것은 내 의미가 있어야 나는 산다’라는 그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에서 잘린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이렇게 했어요.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 7:2).
인간이 개가 돼야 하는데 개가 안 되고 ‘자기가 인간이다’ 우기고 있으니, 하나님이 개한테 거저 주시는 그 ‘믿음의 선물’을 이 장관이 맛볼 수가 없죠. 오늘 이야기가 이걸로 본문이 끝나거든요. 끝내면서 우리는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장관 말이 이것은 진짜 터무니없는 데, 우리는 장관 말에 동의하고 싶은데, 그러면 24시간 내에 어떻게 그 많은 곡식과 돈을 얻을 수 있느냐? To be continued, 그거는 다음 시간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우리들. 사실은 우리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다는 우리의 속셈이 이 현실 자체로 인하여 마구마구 들쑤셔지고 들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십자가가 보일 때 이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생을 거저 다 얻었다는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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