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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열왕기하 5:20-27 / 저주 보존의 법칙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열왕기하 5:20-27 / 저주 보존의 법칙

정인순 2026. 4. 23. 09:32

음성 동영상 Youtube

저주 보존의 법칙 

 

이근호
2026년 4월 22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5:20-27

(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5: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5: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

나아만 장군에게 일어난 변화는 인간들의 개인적 인식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느냐를 말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 경우, 창세가 3:17의 원칙이나 노아 홍수의 취지와 맞지 않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즉 인간의 팔자는 이미 고정되어 있습니다. 저주 속에 지내다가 결국 죽습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자기를 특별한 개인적 존재로 생각할 근거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노아 홍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땅 위에서 호흡하는 자들은 다 죽습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 7:23)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의 운영 방식에는 원칙이 수립되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해도 악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기대하시면서 세상을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피를 상대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즉 물 심판 이후에 하늘에 피어나는 무지개는 엄연히 있습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6) 하지만 지상의 모든 인간은 이미 악한 자로 태어납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인간의 죄를 없애고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죄의 자리에 들어설 하늘의 분이 언약에 따로 오실 겁니다. 즉 무지개 나라에게 오셔서 땅에 도달될 자리는 죄로 인해 피흘리는 지점이 될 것입니다. 이 죄없는 분이 죄짐을 지시는 업무를 위해서 인간들의 더러운 죄(피)는 지상에 흘려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 인간의 개별적 사고 방식은 거부됩니다. 깨끗한 물이 더러운 문둥병을 씻어낸다는 것은 개인적인 의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서 병이 낫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흙을 요구합니다. 개인적인 의식이 곧 죄였고 병이었던 겁니다. 그 의식과 죄를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흙으로 덮으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할 것 같은 인간에게 배출되는 모든 것은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요소가 되고 저주를 유발한다는 겁니다. 언약으로 인해 ‘저주는 인간의 사는 환경에 늘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주 보존의 법칙’입니다.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레 12:5)

인간에게 나오는 대변도 예외가 아닙니다.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신 23:13) 이러한 구약적 말씀이 신약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이렇게 적용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6-8)

여기에 반해서 평소에 늘 선지자 엘리사를 따라 다니면서 보필했다고 자부하는 게하시는 당연히 이스라엘의 집단에 합류되어 저주대신 늘 복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자인했습니다. 나아만 장군과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형성된 집단에 소속되어있다는 의식으로 살지만 게하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자인가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도로 가져가려는 예물이 탐이 나서는 그는 선지 생도에게 줄 예물을 스승님이 원한다고 핑계대면서 그는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자기에게 넘기기를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나아만 장군은 도리어 그 제안을 고마워하면서 은 한 달란트가 아니라 두 달란트를 자신의 사환 두 사람에게 시켜서 예물이 무사히 선지자 엘리사에게 전달되도록 조치합니다.

게하시는 이런 행동은 개인적인 행복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왔을 때, 각 개인들의 눈에 보이는대로 라면 그들은 두 발로 걸어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19:4에서는 달리 이야기하십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주님께서 이런 식으로 집단화하시는 이유는, 개인들의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 속에 들어오셔서 죄없으신 분의 대신 저주받으신(피흘리심) 분의 개인성만이 무지개가 핀 하늘나라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빙자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개인적 의식을 견지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게하시가 단독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몰래 만나고 들어왔을 때, 게하시는 스승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이란 아직도 자신이 지킬 자기 것에 대해서 방어적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쁨은 나라는 것 자체에서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도리어 기뻐하는 겁니다.

죄라는 배설물만 배출하는 것이 인간의 용도입니다. 엘리사는 선지자는 게하시에게 저주의 집단을 알려주십니다.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에게 임했던 저주가 임하게 하십니다. 이로서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통해서 자신의 진짜 모습과 대면 하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이 자연스럽게 자기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저주가 임한 모습인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이지 않는 언약의 힘을 매개로 해서 세상이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현상을 기쁨으로 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강-열왕기하 5장 20-27절(저주보존의 법칙) 2604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5장 20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5:20-27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후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나음으로써 문둥병 자체가 사라졌다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문둥병이 사라진 게 아니고 그대로 떠돌고 있었어요. 문둥병은 저주잖아요. 문둥병의 바로 뒤편이 죽음이니까 삶과 죽음, 저주받은 삶의 마지막 모습이 문둥병입니다.

이것을 달리 이해하면 ‘저주 보존의 법칙’ 또는 ‘저주 이전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죠. 떠도는 저주입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환경 자체가 저주가 떠돌고 있고, 문둥병이 떠돌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떠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눈을 떠야 해요.

나아만 장군도 문둥병 걸려 있을 때는 그걸 몰랐어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려서 이스라엘의 엘리사에게 오기까지 항상 그는 개인적이었습니다. ‘내가 문둥병 걸렸다. 나는 문둥병 걸렸는데 저 사람들은 안 걸렸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문둥병이 나아만 장군에게만 왔고 다른 사람은 안 걸렸다 할지라도 문둥병이 없는 게 아니고, 항상 문둥병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 속에 걸린 자나 안 걸린 자나 다 같이 노출돼 있고, 거기에 놓여 살고 있었던 겁니다.

나아만 장군보고 요단강에 들어가라고 했을 때 또 개인적인 견해를 갖고 요단강에 안 들어가려고 했어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문둥병은 더러운 것이니까 ‘깨끗한 것이 있으면 이 더러움이 깨끗함에 의해서 씻겨 내려간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 인식을 갖고 요단강에 막상 가보니까 물이 별로 뭐 깨끗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 나아만 장군은 자기의 견해를 밝힙니다. ‘내가 이 먼 데까지 왔는데 이스라엘 강물보다 우리나라 강물이 더 깨끗하다. 물이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 여기서 깨끗한 것이 치료 효과가 더 낫다’(왕하 5:12).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라고 여기는데, 그 인식 자체가 누구를 위해서, 자기 개인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 개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보내는데,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을 개인적으로 안 만나요. 요단강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만난다고요. 안 만나고 그냥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무조건 요단강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9-10).

이 말은, 요단강이 단순히 깨끗한 물이라서 그 더러운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개별적 의식, 개인주의 생각 자체가 더러운 거였던 거예요. 그게 더러운 겁니다. 그 시범으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 걸린 거예요. 그냥 자기만 생각하면 된다는 거예요. ‘나 병 낳아야 해, 나 병 낳아야 해.’ 다른 말로 하면 ‘나 행복해야 해, 나는 행복해야 해. 나는 쓰러지면 안 돼, 쓰러지면 절대 안 돼. 나는 반드시 일어서야 해.’

사람들이 무심코 내뱉는 이런 이야기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이 환경 자체의 속성, 원칙하고 전혀 맞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8장에 노아 홍수 있죠.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노아 홍수 때 물이 주어졌던 공간은요, 남자, 여자, 교도소에 있는 자, 교도관 바깥에 있는 자 어떤 구분도 없이 그 땅에 호흡하고 있는 것은 다 죽였어요(창 7:22).

노아 홍수 앞에서 개인이라는 것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사고방식이었던 겁니다. 심지어 노아 가족마저 텃밭 가꾸며 살았던 자기의 고향을 버려야 했어요. 고향을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그냥 방주 안에서 동동 떠다녔어요.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를 통해서 분명히 알려준 것이 있어요. 아담의 후손들이 에덴동산을 떠나서 땅에서 농사지어 소산물을 먹을 때 아담뿐만 아니고 아담의 후손 모두에게 공유, 공통적으로,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태어나거든 저주받은 땅에서 저주스럽게 살아라.”

이게 창세기 3장 17절 아닙니까?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까지 살아보려고, 또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땀은 땀대로 흐르고 애 쓰기는 애썼는데 결국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 3:19). 하나님의 원칙은 일관성 있죠. “저는 농사지으면서 바르게 살았습니다.” 그런 것은 소용없어요. “땅을 갈면서 그래도 남들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그런 것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것은 너의 개별적 생각, 나만은 행복하겠다는 네 개인적 사고방식인데, 나만은 행복하겠다는 그 개인적 사고방식이 바로 마귀의 마음이 되는 겁니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상담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상담해 주는 사람의 상담목적이 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사시면 행복하실 겁니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은 ‘나 어떻게 하면 행복합니까?’ 상담하러 오는 사람도 마귀 들렸고, 상담해 주는 사람도 마귀 들린 상담가고, 그걸 시청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를 통해서 창세기 8장 21절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원칙으로 홍수 이후의 세계를 다스리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8장 2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흠 없는 제물을 태운)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인간이 악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어떤 계획을 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 자체가 악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저주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자체가 악하기에 물어볼 것도 없다’라는 거예요. 사람이 선할 것 같으면 노아 홍수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노아 홍수를 일으켰다는 말은, 어떤 인간이 태어나도 족족 아담의 후손들은 노아 홍수를 세 번 네 번이라도 일으킬 만한 그런 악을 계속 뿜어내는 그런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계획을 했는데, 땅과 하늘이 마주 보는 어떤 계획을 했어요.

하늘에는 무지개가 나옵니다. 창세기 9장 13절,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둬서 그 무지개를 숨겨두는 방식으로 딱 놔뒀어요. 땅에 노아 홍수가 일어났고, 인간은 태어나는 족족 악한 자고, 그들에게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가 없다는 그것을 분명히 하는 지상의 어떤 요소, 그리고 하늘의 무지개죠, 내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는 약속의 무지개가 끈처럼 연결되어 있는 그것을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무지개와 통하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원칙은 뭐냐? 창세기 9장 4-5절에 보면, 그것은 피에 관한 거예요.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죄를 물로 씻어주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죄는 씻어주기 위한 용도가 아니에요. 죄는 심판받을 대상이죠. 씻음이 아니고, 물로서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가 피가 되고 그 피에 대해서 피로 씻어줘요. 피가 다르죠. 이사야 1장에서 ‘죄는 피처럼 붉다’(18절)고 했습니다. 그 붉은 피는 하나님의 거룩을 모독합니다.

그래서 거룩을 모독하는 그 피에 대해서 주께서는 하늘에서 씻어주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분이, 죄도 없으신 분이 깨끗한 목숨으로 이 땅에 와서 피를 흘립니다. 죄지었을 때는 반드시 찾아낸다는 그 저주의 피를, 죄 없는 피가 죄 있는 피를 바꿔치기 하는데 그것을 신약에서 ‘피로 죄 사함, 피로 죄 사해진다, 피로 죄를 없앤다’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십자가가 율법의 모든 죄를 다 없앤다고 해요.

골로새서 2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3-15).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노아 홍수 뒤에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잖아요.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노아 홍수 뒤의 환경은 개인적일까요, 환경적일까요? 환경적이에요. 개인에 대해서는, 이미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개인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이미 버린 자식이기 때문에요. 환경이 집단적인 환경이라고요.

그러면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가서 죄를 씻은 것이 아니고, 요단강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self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요단강에 빠뜨린 거죠. 요단강에 자신을 빠뜨리고 여호와의 날개, 여호와의 용서의 날개, 그 집단에 합류되어서 그 새로운 집단의 부분이 된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나아만 장군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딱 부탁한 게 있어요. 이스라엘 흙을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 5:17).

나아만 장군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스라엘에 가져왔던 예물은 엘리사가 안 받아요. 왜? 개인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은 안 받습니다.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왕하 5:16).

개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것은 저주의 대상이기 때문에 저주를 요단강에 빠뜨리고,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의 그 체험 과정에 나아만 장군은 참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그 집단을 펄럭이는 깃발이나 어떤 천으로 생각합시다. 집단을 펄럭이는 천으로 본다면 나아만 장군은 그 천에 새겨진 무늬로 등록이 된 거죠.

이게 신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아서 “야, 내가 예수 이름으로 외치니까 귀신들도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자랑하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귀신이 너한테 굴복하는 그걸 가지고 기뻐하지 말고,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라고 합니다.

‘너의 이름이 그 집단의 소속에 등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 집단의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거든요. 로마서 10장에 나오고 사도행전 2장에도 나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행 2:21)라고 할 때 개인은 탈락해요. 개인은 없애버리는 거예요. 고정된, 고유한 내 이름은 주께서 인정도 안 해요.

이게 복음입니다. 주의 이름에 합류한다니까요, 등록된다니까요! 펄럭이는 그 천에 하나의 무늬로서 들어가는 겁니다. 복음을 이렇게 전하고, 강의해도 끝나고 난 뒤에 나오는 이야기 보면 전부 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또 나와요. 개인은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떤 소속된 집단, 성도를 한 묶음으로 묶는 집단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서 “그 집단에서 주님은 어떤 활동을 합니까?”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할 텐데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까요?” 갑자기 개인 문제, 개별 문제가 또 나와요.

참, 인간이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지고,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이 점점 더해요. 아무리 문화가 발달하고 소득이 높아져도 악마한테 받치는 게 있어요. ‘나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내 힘으로 산다.’ 점점 전염병처럼,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병처럼 퍼지고 있는 겁니다.

전소연이라고 해서 뮤지컬 배우가 있는데 그분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세요. 97세입니다. 자기 동네 6.25 참전 용사회 회장까지 지내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의 친구가 94세인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분이 젊은 시절 장가들 때 이야기예요. 6.25 당시에 자기는 군대에 있었는데 그때 집에서 “야, 네 색싯감 내가 정했으니 결혼식 해야 한다.” 그래서 상사한테 가니까 결혼식 하면 군대에서 일주일 휴가 준답니다.

휴가받아서 집에 와서 전통 혼례를 할 때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는 거예요. 짜자자짠! 얼굴을 가렸던 그 천을 조금씩 올리는데 얼굴을 딱 보고 지금 94살 된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신부가 너무 예뻐서가 아니고 신부를 보좌하는 두 아주머니가 신부보다 더 예뻐서. 그럼에도 끽소리 못 하죠. “나 안 할래” 못한 이유가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거든요.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에요. 집안에서 정해주면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결혼을 했어야 하는 겁니다.

노아 언약이거든요. 노아 언약으로 말미암아 집단적인 저주와 집단적인 복이 이 세계 환경 속에 언약으로 서로 중첩돼 있어요. 두 개의 집단으로 중첩되어 있어서 ‘어느 집단에 분류되어 거기에 소속될 것인가?’의 작업을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십니다. 노아는 천국으로, 샘과 야벳도 천국으로. 그런데 함과 그 손자 가나안은 지옥으로. 이게 창세기 9장에 나오잖아요.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이렇게 ‘저주받아라. 너는 복 받아라.’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저주가 떠도는 거예요. 저주도 떠돌고, 그리고 구원도, 복도 같이 떠돌고. 그게 언약의 속성입니다. 언약의 본질이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어보면 “걸어서 나왔다”고 하겠잖아요.

맞아요. 걸어서 나왔는데, 우리 보기에는 걸어서 나왔는데 걸어서 나왔다고 하면 상당히 개인적인 경향이 많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분명히 걸어서 나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택시 타고 나왔겠습니까, 뻔히 알면서도 출애굽기 19장 4절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독수리 날개로! 그들은 걸어서 나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나왔다고 했는가? 굳이 독수리 날개로 집단화시켜서 탈출한 것으로 나오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싸워야 할 대상, 마귀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방금 본 출애굽기 19장 4절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3-14절에,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여기서 ‘여자’는 집단적 개념입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개인적으로서는 마귀와 못 싸워요. 개인은 그런 역량이 없고 힘이 없어요. 그러나 어떤 소속에 등록되어서…, 제가 어떤 펄럭이는 천에 무늬로 등록됐다는 비유를 드는 이유가, 무늬로 그렇게 들어갔다 하면 자기 힘으로 못 빠져나와요. 무늬니까! 색깔로 들어가 버리면 못 빠져나오잖아요.

마귀에게 들어간 사람이 자력으로 마귀의 품을 못 빠져나오듯이, 하나님의 천국 처지도 똑같은 처지로 만들어버려요. 주의 이름에 집단으로 해서 들어가 버리면 자기 힘으로 그 집단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의 흙을 달라고 합니다. 자기 고향 땅에도 흙이 있지만 그 땅에다가 뭘 덮느냐? 요단강 건너고 난 뒤에 만났던 선지자 엘리사가 살던 그 이스라엘의 흙을 부대에 담아와서 자기의 땅을 덮어버리면 땅이 두 층이 되겠죠.

아래쪽은 옛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내 행복만 추구하면서 신을 믿었던 그것이 밑에 있고, 그 위에 이미 여호와의 은혜와 사랑,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복 안에, 그 흙 속에, 나는 그 집단의 일부로서 산다는 뜻입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아람 나라에서 림몬 신에게 제사해야만 하지만, 언제나 여호와만 섬기는 걸로 간주해 주시옵소서.’ 그게 내 마음이라는 거예요.

요단강에서 문둥병 낫고 난 뒤에 나아만 장군은, 자기 몸이 이스라엘에서 떠난다 해도 이스라엘에 같이 동참 돼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지난 이야기의 핵심이라면, 오늘 본문에 누가 불쑥 등장하는가? 게하시가 불쑥 등장해요.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통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대면하게 됩니다.

지금 게하시는 개인적으로 엘리사의 비서예요. 선지자의 매니저입니다. 선지자는 누굽니까? 하늘과 땅을 통하는 사람이잖아요. 하늘과 땅을 통하는 사람의 비서실장으로 일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복에 하나의 일원으로서 참여돼 있으니까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문제예요. 외부적이고 형식적으로 봐서 ‘나는 누가 봐도 이스라엘 사람이고, 엘리사가 전하는 그 설교와 기적에 참여했고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가 구원받는 것처럼 나도 구원받는다’라고 장담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러나 마태복음 7장에 22-23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대목을 제가 여러 번 설교해 드렸어요. 이 설교를 듣고 이 본문을 보는 사람들이 걱정이 늘어져요. ‘어디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실컷 목사님 말씀대로 다 했는데 그 목사도 제끼고 주님께서,

“나 너 모른다.”
“저, 이근호 목사님 설교 들었는데요?”
“이근호가 누군데? 나 너 모른다니까!”

이거 뭐 본문 보기도 전에, 설교 듣기도 전에 걱정부터 늘어져요.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했잖아요.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라고 이야기해도 나중에 질문하는 것 보면, 개인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나 어떻게 하면 안 잘립니까?’ 그 자체가 개인 문제 아니에요? 그 자체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내가 기억할 때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면, ‘제가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낸 것이 맞고, 복음 전한 것도 맞는데 그것도 죄였습니다’라고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하고 설교한 것도, 목회한 것도 죄였습니다’라고 기억하면 돼요.

왜냐하면 이렇게 뭔가 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기억이잖아요. 개인적인 기억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개인적인 기억을 유지하면 안 받아줘요. 왜? ‘날 때부터 악하다’는 그 일관성 있는 원칙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나 같은 죄인, 날 때부터 죄인을 통해서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가 돼버리면 이것은 내 이름으로 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나는 설교하는 죄, 강의하는 죄, 선지자 노릇을 하는 죄가 나온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면 되잖아요, 즐거워하면.

인간의 이 개인적인 환경에 대해서 주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었단 말이죠. 독수리 날개라 하는 것, 그렇게 집단화시켜 놓고 그다음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줬어요. 그 율법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위기 12장 5절에,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당연히 여자가 아기를 낳을 수가 있지요. 아기 낳는 것이 또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아기 낳을 때 거기서 뭐가 흐른다? 아기 놓을 때 거기에 피가 같이 흘러요. 피가 흘러서 약속의 땅, 그 지면에 닿게 되겠죠. 주께서는 그게 더럽다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경도할 때처럼 더럽다.

‘경도’에 대해서는 레위기 15장 19절부터 보면 쭉 나와 있어요.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이것은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남자가 몽정한다든지의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는 일체 더러운 것들이 닿으면 티가 나고 표가 난다는 거예요.

‘네가 딛고 있는 땅은 약속의 땅이다’라는 말이죠. 무지개와 연관되어 있는, 천국과 연관되어 있는 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네가 감히 더러운 피를 여기에 흘려?’ 땀, 기침 가래, 그게 흐른단 말입니까? 흘려야 되겠어요? 신명기 23장 12-13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

휴대용 삽이죠. 어디 뭐 군대 야전 훈련합니까? “사람의 생리 작용이잖아요. 그것도 죄입니까?” “죄입니다.” “감기 들려서 기침했는데요?” “죄입니다.” “침 나왔는데?” “죄입니다.” “그러면 죄 아닌 게 뭡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뭡니까? 인간은 더러운 것 배출 용도, 그게 인간이에요. 더러운 배출물을 배출하는 용도가 인간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사람들이 휴대용 삽을 들고 시킨 대로 다 하고, 지금 그래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성경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아, 이것은 개인을 지적하는 거구나.’ 개인에게는 뭐가 있다? ‘나는 무조건, 아무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는 행복해야 해. 난 남한테 인정받아야 해. 나는 인생을 편하고 잘 살아야 해.’ 이것은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이것은 창세기 3장 17절에 위배 됩니다. 이 땅에서 저주받으라, 하는 그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 돼요.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 ‘배출의 문제’를 이렇게 받아들여서 회수해 버립니다. 빌립보서 3장 6절에 보면,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해놓고, 빌립보서 3장 7-8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누구 때문에? 주님의 의로, 집단화된 주님의 의로 이미 천국을 갔다면 기쁨은, ‘주님의 의’ 자체로서 기뻐해야 하지 그 외에 다른 기쁨, 나의 사적인 기쁨을 따로 가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공로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복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죠.

그래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똥이나 오줌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 소속이 어디냐, 어떤 곳에 있느냐? 집단이에요. 그 집단은 예수님의 피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습니다. 다른 것은 안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열왕기하 5장 끝에 보면, 지금 나아만 장군하고 엘리사는 집단에 같이 있어요. 그런데 그 비서 게하시는 그 집단에 참여하지 못하고 개인주의적 행복과 자기 개인적인 것을 얻고자 하는 그 의식에 그대로 있어요.

나아만 장군은 가지고 왔던 예물을 도로 가져가고 있었거든요. 게하시가 자기의 선지 생도 중에 2명을 차출해서 3명이 같이 갑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고, 이게 웬 일이십니까? 스승님한테 무슨 전갈 받았어요?” “예, 전갈받았습니다.” “뭔데요?” “그 예물들 중에서 다는 가져가지 말고,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남기고 가라고 제가 추가적으로 명을 받았습니다”(왕하 5:22).

이렇게 하니까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자기도 돌아가면서 참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얼마나 좋은 찬스예요? “예”하고, 은을 담는 전대가 있는데 두 달란트죠, 곱빼기를 주면서, ‘아이고, 이렇게 선지자에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 하면서 준겁니다.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왕하 5:23).

애초에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에게 핑계 대기를, ‘스승님이 그 물건들 달라고 한 이유가 선지 생도들을 도와주라고 했다’라고 한 거예요.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왕하 5:22).

그리고 24절에 보면, 선지 생도들에게 “그거 다 내놔!” 합니다.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저희를 그냥 돌려보낸 겁니다. 여기서 이제 굉장히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5절에 엘리사가, “야, 어디 갔다 오냐?” 하고 물었어요. 물으니까 게하시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세요.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했습니다. 가기는 어디를 가요? 안 갔습니다, 안 갔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스승 같으면 어떻게 꾸중하고 나무라겠습니까? “너 갔잖아.” 이렇게 이야기할 거잖아요. “너, 갔잖아. 너 가는 거, 내가 저 멀리서 가는 거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하고 있어!” 이렇게 나무랄 거잖아요. “제대로 이야기해!” 뭐 그렇게 할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나는 어디 갔지?” 지금 이 말이 뭐냐? 26절입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나아만 장군이 가다가 서서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 그때 나 혼자 갔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엘리사가 거기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엘리사는 거기 안 갔어요. 게하시는 엘리사가 물을 때 자기는 아무 데도 안 갔다고 하는 거예요. 게하시가 개인적으로 자기가 방어하려고 한 겁니다, 방어를.

자기방어, 도둑질은 자기방어잖아요. 당당하게 달라고 할 것이지 몰래 했잖아요. 몰래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방어할 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의식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소유가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방어할 게 있어요, 없어요? 방어할 것이 없어요. 개인주의가 그래서 나쁜 거예요. 방어할 게 있어서 그래요, 방어할 것이. ‘남은 모르겠고, 나만 잘 되면 되잖아.’ 이런 식이에요.

‘The Zone of Interest’, 관심 구역(2024)이라는 영화가 몇 년 전에 있었어요. 아우슈비츠수용소, 유대인 수용소인데 벽이 있고 벽 너머에서는 신음소리가 들리는데 수용소 이쪽에서는 수용소 소장,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의 단란한 가정이 나옵니다. 자녀 교육 너무 잘하고요, 정원에서 “이 꽃 이름이 뭔 줄 알아?” 자기가 타는 말한테도 “우리의 정이 얼마나 따뜻한 줄 알아?” 이렇게 장모님 모시고 사는 아주 단란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뭡니까? 유대인 100만 명 죽인 사람이에요. 100만 명이 죽든 말든 자기 가정만 행복하면 안 됩니까? 우리가 평소에, 일상적인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게하시도 똑같아요. 게하시는 그냥 보통 사람인데, 선지자 하나님의 종이 와서 푹 쑤시니까 대박 반응 보이는 것이 뭐냐? 방어 작용이에요. 거짓말을 한 거예요.

왜 거짓말하는데? 지킬 게 있기 때문에, 나한테 지킬 게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는 그렇게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네가 나아만 장군 만날 때 내가 없었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 몰래 만나러 나갈 때 누가 따라 나갔단 말입니까? 엘리사는 움직이지도 않은 채, 마음이 게하시하고 같이 따라 나간 거예요. 그래서 게하시가 무슨 짓을 하는지를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알면서 이렇게 물었어요.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이게 뭐냐? 엘리사가 그 당시의 예수님이라고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아직도 네가 방어할 게 남아 있느냐?” 예수님은 ‘네가 잘했다, 못했다’를 문제 삼지 않아요. 왜? 인간은 뭘 해도 죄가 되니까.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개인적인 행복과 개인적인 자기 위신과 체면과 자기 자리보전에 연연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적이 되는 악마가 계속해서 그 인간을 힘들게 만들어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요, 게하시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사태 파악, 이 세상 자체가 이렇게 집단화돼 있다는 것, ‘저주 보존의 법칙’, 저주가 떠돌고 있다는 것을 지금 게하시는 개인주의 때문에 그걸 모르는 거예요. 교회 와서 복음 들어도 몰라요. 복음 듣는 이유가 나 하나 행복 하려고, 내 문제 해결하려고…. 그것은 복음이 아니죠.

자기 이름을 버리고 예수 이름으로 교체가 됐으면, 주께서 허락하신 대로 주께서 살려줘서, 살게 하셔서 우리가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이렇게 돼요. 게하시를 이제 사랑해야 될 거 아닙니까? 게하시 개인을 ‘개인주의에서 집단’으로 바꿔줄 때 게하시가 구원받겠죠.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왕하 5:27).

문둥병 걸렸다고 지옥 가고 그런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 자체가 하나의 비유이고 인간을 가지고 하나의 증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게하시도 단순하게 비서가 아니잖아요. 엘리사가 저주를 저주케 하는 능력을 주께 받았고, 그리고 복을 복이 되게 하는 능력도 엘리사가 받았어요. ‘대머리여 대머리여’ 하다가 애들 42명이 죽었잖아요. 암곰 두 마리 나와서. 열왕기하 2장에 나오죠(왕하 2:24).

엘리사 선지자가 보통 분이 아니죠. 장차 오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방어하지 말고 ‘주님이 거저 주신 은혜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저 주신 천국의, 영생의 복을 네가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느냐?’ 그리고 그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오늘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참 세상을 닮아도 너무 닮아서, 나만 챙기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혹은 오해해서, 나도 행복하지만 남들도 행복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것도 죄인 줄 모르고 착한 일로 여겼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이미 일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