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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9강 / 권력관계 / 260525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39강 / 권력관계 / 260525

정인순 2026. 5. 25. 17:47

음성1

녹취:김혜근

대전-신명기(39강) 신명기18:5(권력관계) 20260525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하겠습니다. 오늘은 18장입니다. 18장 1절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제사장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나오는데 제사장 나오기 전에, 지금 여기가 18장이잖아요. 그런데 신명기 16장에 누가 나왔느냐 하면 재판장이 나왔어요.

16장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해서 재판장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제3자가 개입되어야 하는 거예요.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니까 제3자가 재판을 해야 되는데, 재판할 때 뭐가 필요하냐 하면, 권위가 필요해요. ‘재판하는 너나 나나 똑같다.’고 해버리면 재판 하나마나예요. ‘나, 그 재판 거부한다.’ 하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는데 ‘내가 잘났다, 난 손해 안 보련다.’ 이러면 관계성이 다 해체됩니다.

그래서 이 관계의 끈을 끊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권위를 집어넣어요. 권위라는 말을 더 쉽게 이야기하면, 권력입니다. 권력을 집어넣어요. 위에서 주어진 권력의 거미망 속에 인간은 하나의 점으로, 연결되는 매듭으로, 매듭이 적당하네요, 매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집에 남매 아이들이 있다 합시다. 남매간에 싸운다 할 때, 그 조정을 누가 합니까? 아빠나 엄마 중에서 하죠. 그러면 아빠, 엄마가 ‘이것은 동생이 잘못했네, 누나가 옳다.’ 할 때, 동생이 ‘나는 그 조정을 안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면, 아빠, 엄마는 어떻게 합니까? “짐 싸서 집 나가!” 이러죠.

그러면 집은 뭐예요? 보통 ‘집이 있다, 가옥이 있다.’ 그래서 그 안에 네 사람이 살면 그게 가족입니까? 그거는 동거인이죠. 그것은 하숙집이고, 세 들어 사는 거죠. 그러면 가족이 뭐예요? 그냥 산다고 식구가 아닙니다. 가족이라 하는 것은 초월적인 권력이 들어가야 가족이 돼요.

“아빠, 엄마 말 안 들으려면 집 나가!” 그러면 아이가 “싫어!” 이렇게 나오겠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빠, 엄마가 짜 놓은 권력망이 잘 통할 수 있는 매듭에 네가 있어라.’ 이 말이죠. 배관공사 할 때, 관이 있잖아요. 관과 관이 교차하는 접점지점이 있잖아요. 거기에 식구 하나가 놓여있다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권력이라는 것은 제가 어느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참 설명하기 힘들어요. 권력은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 권력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나 몰라라.’ 하고 팽개칠 것인지, 그것이 매순간 정해져야 되는 겁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혼자 사는데, 이웃집에서 층간소음을 일으켰다. 그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자기 혼자 살면 돼요. 혼자 산다는 말은 자기 고유의 권력망을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생활권을 본인이 만들어나가면 되거든요. 그런데 층간소음 때문에 결국 여기에 누가 동원되어야 되느냐? 경찰권이 동원되어야 돼요.

경찰권이란 것은 권력인데, 평소에 경찰 보고 싶어서 그리워한 거 아니잖아요. 사태가 일어나니까 경찰이 왔고, 경찰의 제일 위의 권력은 어디서 옵니까? 대통령에게서 오죠. 그런데 헌법은 뭐라고 거짓말 하느냐 하면, 모든 권력은 어디서 난다고 합니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이 세상에는 민주주의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개인은 보이지 않는 어떤 권력에 복종하고 예속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 권력을 뭐라고 하느냐, 짐승의 권력, 그리고 어두움의 권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에 ‘너희가 그 때에는 어둠의 권세에 복종하였더니..(엡2:2)라고 나옵니다.

거기서 뭐가 나와요? 새로운 권력이 너를 납치했다, 그 새로운 권력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장입니다. 초월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나와요. 신명기 17장 14절에서 왕이 나옵니다. 신명기 17장 14절에서 20절인데, 왕은 옆에 뭐를 두어야 되느냐 하면, 17장 18절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18)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19)” 라고 되어 있어요.

신명기에서는 왕 그리고 제사장 위의 권력이 어디서 나온다? 율법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율법은 말씀이고, 그 말씀이 인간들이 지어낸 게 아니고 어디서 등장했지요. 말씀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신명기 4장에 보면, 시내산 불 속에서 나왔어요. 누구라도 들어가면 타 죽는 불속에서 나왔다고요.

타 죽는다는 것은 있는 것도 없어진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화산 속에 들어갔다가 40일 만에 내려오면서 그냥 내려온 게 아니고, 머릿속으로는 율법 외웠고, 양 손에는 돌판을 들고 내려왔잖아요. 그러면, 모세가 40일 동안 사라졌을 때, 그 때 모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어디 있었어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아니죠. 사람들이 없는 곳에, 가지 못하는 곳에, 사람이 가면 반드시 죽는 곳에 모세가 튀어나온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여기서 한 문장을 적어보겠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을 해야 돼요. 천국 가는 것은 어렵다? 아니지요, 아니지요. 북한 말로 ‘아니디요, 아니디요.’ <천국 가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고,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죽으니까. 천국은 말씀 완성의 세계잖아요. 말씀이라는 것은 불 속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씀의 세계에 간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서는 못 가지요. 살아서는 못 간다는 그 말을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에서 이렇게 표현해요. 살아서 못 간다는 말은, ‘더러워서 못 간다.’는 뜻입니다. 부정스러워서 못 간다. 더러운 것은 천사의 깨끗함에 합류가 안 돼요. 천사 파티에 더러운 게 끼면 안 넣어줍니다.

벌써 두루 도는 천사가 커트시키죠. 더러워서 못 들어가요. 그러면 천국 백성이 되려면, 처음이고 끝이고 딱 하나만 해결하면 돼요. 더러운 죄가 죄 사함을 받으면 천국 갑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이 스스로 행함으로 죄 사함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예요.

이게 가능하면 천국 가지요.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살아있는 공간에서 내가 말씀에 의해서 죽는 공간으로 옮겨지게 되면, 죄 사함의 권력이 작용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게 바로 로마서 8장 1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공간에서는 뭐가 없느니라? 결코, ‘결코’라는 말이 들어가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했을까요? 인간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관심사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돈이 있을 것이다.’ 이거잖아요. ‘주 안에 있으면 사업이 잘 될 것이다.’ 이런 거요. 어제 낮에 ‘제자 국제 크리스천 학교’처럼. 그 학교가 다른 국제 학교보다는 좀 저렴하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어쨌든 사업은 돈이 있어야 일을 벌이니까.

그러나 그 공간 말고, 그건 인간이 벌이는 공간이고, 주님 안의 공간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죄 사함, 죄를 씻는 것, 그게 있어요. 정죄함이 없어요. 그만큼 뭡니까? 더러웠다는 거예요. 더러움을 받아들여서 ‘정죄함이 없다.’를 거쳐서 예수 안에서, 그것이 바로 그 자체가 깨끗함이 되면서 천사가 사는 세계에 같이 합류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두 사람 간에 재판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재판의 판결의 조항은 어디서 흘러나와야 돼요? 율법에서 흘러나와야 되죠. 이 말은 ‘이번 일에 내가 이익이냐 손해냐?’ 이거는 일체 접어야 돼요. 율법이 나를 어떤 식으로 덮칠 것인가가 그 재판의 제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앞집이랑 뒷집이 재판한다. 자기 땅이라 하더라. 뭐 이런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재판이죠. ‘측량 해 볼까?’ 그런데 측량 자체가 골치 아파요. 돈도 들고 골치 아프단 말이죠. 만약 그 문제 가지고 재판장이나 또는 제사장도 재판해요. 제사장, 유사, 소소한 일은 유사, 유사는 공무원이에요. 그런 자들에게 재판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재판할 때,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재판 결과는 간단해요. 이스라엘을 거쳐서 신약에 오게 되면 재판 결과는 이겁니다. ‘정죄함이 없나니’로 마감이 되죠. 이걸 사랑이라 하고, 긍휼이라 하는 겁니다. 긍휼, 사랑.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덮쳐지는 것으로 판결문이 종결돼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모세가 청년 때에 자기 백성이 압제당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마음이 괴로웠지요. 그런데 그 히브리인들을 어떤 애굽 사람이 학대할 때, 정의에 가득 찬 청년 모세가 나와서 그 사람을 죽였잖아요. 그리고 자기 백성을 건졌단 말이죠. 이로써 자기는 정의를 구현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그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까? 아니었죠. 출애굽기 2장 11절에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하고 난 뒤에 감췄는데 이걸 까발린 자는 누굽니까? 애굽 사람입니까, 같은 동포입니까?

같은 동포가 까발렸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누구 마음대로 너를 우리의 법관으로 세웠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뭐가 없어요? 권위라는 게 없지요. 이거는 모세의 개인적인 권위는 이스라엘에게 전혀 통할 수 없다는 거. 그래서 모세는 삐져 가지고 도망치고, 삐지기도 삐졌지만 이제 애굽 사람을 죽였으니까, 자기가 잡히면 죽으니까 도망을 쳤고, 그 모세에게 주께서 찾아왔습니다.

찾아왔는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라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4장 27절과 31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4장 27절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그 앞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다가 부인되는 십보라가 얼른 할례를 행해 가지고 죽은 데서 살아났습니다.

그 이야기 다음에 하나님께서 누굴 찾아갔다 했어요? 모세입니까? 아론입니까? 아론에게 찾아갔지요. 그러면 모세와 아론 두 형제의 권위는 어디서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요. 따라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갈 때, 율법에 의한 제사장은 누구 담당이냐 하면 모세 담당이 아니고, 아론 담당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권위를 줬으니까요.

그래서 제사장은 출애굽기 40장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 복잡한 것에서 제가 권력망을 지금 이렇게 정돈해 드리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12절에 보면,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12)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13)” 이렇게 돼 있죠.

그러니까 모세가 제사장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제사장이냐? 아론이 제사장이에요. 그럼 여기서 사람들이 뭘 또 따지길 좋아하냐 하면, 제사장이 높아요, 선지자가 높아요? 왕이 높아요? 이렇게 따진다고요. 그런데 왕과 제사장, 선지자, 공통적으로 다 기름 부은 자예요.

성경에서 기름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말고 우월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상의 기름을 바름으로써 표식을 하는 거예요. 거룩한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러니까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전체를 한꺼번에 인식하려면 이렇게 겹겹이 쌓인 샌드위치처럼 위쪽과 아래쪽으로 일단은 나눕시다.

그래야 복잡한 것이 정리가 돼요. 위와 아래를 나누고, 그 위에서부터 뭐냐? 거룩한 권력이 와요. 그 권력이 말씀의 권력입니다. 말씀을 모세가 독점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말씀이 인간의 기능과 직능별로 분산되어 있다고 보면 돼요. 한쪽은 왕, 한쪽은 제사장, 한쪽은 선지자로.

그러면 모세는 셋 중에 어디에 속합니까? 선지자에 속하지요. ‘나중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나타난다.’(신34:10) 이렇게 돼 있으니까 선지자에 속한단 말이죠. 삼인 과두정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세 명의 기름부음 밑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제일 위가 말씀의 층, 말씀과 인간의 기능과 결합된 층(레벨), 그 밑에는 뭐냐? 일반 백성. 일반 백성은 농사짓는 일반 백성, 일단은 수직적으로 그렇게 세 단계로 구분하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이 사람들은 전부 다 기름부음을 받았고, 말씀의 세 가지 기능을 분산해서 이 사람들이 역할로 보여 줍니다. 그 역할은 뭐냐 하면, 말씀이 적용하는 역할, 더 정확하게는 말씀의 힘, 또는 권력, 말씀의 힘과 권력을 적용하는 역할이 되겠죠.

그리고 그 밑에는 법을 다루는 재판관, 유사들(공무원) 같은 문과, 그 밑에는 일반적인 백성들, 농사짓는 백성들, 목축하는 백성들. 옛날에는 직업이 가축 치거나 농사짓는 거 외에는 별로 없기 때문에. 바다가 있으면 어부도 있겠고.. 이런 구조로 돼 있습니다.

이 구조를 장악하는 것은 말씀의 힘이에요. 말씀의 힘. 말씀의 힘인데, 그런데 성경에서 이 셋이 나란히 되어 있지만, 셋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꾸 왕을, 장차 이스라엘이 왕을 원한다는 걸 미리 알고 왕은 율법 쪽에 있으라 했는데, 초반에는 왕이 없어요.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은 왕과 선지자의 기능을 같이 결합시킨 지도자가 있어요. 그게 바로 모세고, 그리고 그다음에 나온 여호수아입니다.

모세 죽고,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 지휘 체제는 누구와 누구에게 독점되었겠습니까? 왕과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 지휘 체제는 누구한테 옵니까? 제사장한테 오겠죠. 그래서 너희들은 제사장 나라가 돼 버렸어요. 출애굽기 19장에 있는 말씀(출19:6), 제사장에는 뭐가 없어야 된다? 왕이 없어야 되고, 제사장은 선지자도 없어야 되죠.

왜냐하면 율법을 압축해 보니까 제사장은 제사 기능으로 움직이죠. 제사 기능은 특정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레위지파가 아니면, 그리고 제사장이 아니면 들어가지를 못하죠. 제사장은 뭐고 레위지파는 뭐냐? 아론이 레위 지파인데,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이 되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은 레위 지파가 되는 거예요. 대충 아시겠죠? 자, 신명기 18장 오늘 본문을 봅시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렇다 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건 뭐냐? 서로 재판하고 송사할 때 마지막 도착지점은 제사 드리는 효능과 효과 덕분에 너희가 남 하고 싸울 수 있는 그러한 존재나 힘이라도 생겨난다. 이거는 ‘내가 옳다 네가 옳다’ 할 것이 아니고 거기에 누가 들어가는가? 제사장이 들어가는 거예요.

제사장이 들어가기 전에 재판장이 들어가겠죠. 재판장은 모세 율법 가지고 재판하겠죠. 재판 결과, 재판에 이긴 사람이 있다. 이긴 사람은 좋다고 어디 가느냐? 제물 들고 제사장한테 찾아가고, 진 사람은 ‘잘못됐습니다. 내가 율법을 잘 이해 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 해 가지고 제물 들고 어디 갑니까? 제사장한테 가는 거예요.

제사장은 뭐 합니까? 제사하죠. 제사하는 장소는 성막이죠. 언약계가 있는 곳, 거기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과 레위 지파가 밥 먹고 사는 방법은 뭐냐? 이게 신명기 18장에 나옵니다. 18장 1절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찌니 그들은 여호와의” 그다음에 뭡니까? “여호와의 화제물” 불에 태우는 제물을 드리고 나머지 불에 태울 수 없는 제물은 제사장과 레위 지파의 식량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이 말은 자기 기업이 없고, 농사지을 시간도 없고, 제사하느라 바쁜데 그럼 누가 가져오느냐? 불에 드릴 제물 말고 또 여분이 있잖아요. 그런 제물들이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18장 2절에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 그들의 상속분은 뭐라고요? 무슨 땅이 아니고, 어떤 땅이 기업이 아니고, 어떤 분이 기업이에요.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라.

3절에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마땅히 얻을 권리 같은 음식이란 말이죠.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이건 동물성이잖아요. 너무 동물만 먹으면 뱃살 나오잖아요. 식물도 먹어야죠.

4절 “또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5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이러한 취지가 민수기 3장 12절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다른 지파는 뭡니까? 하나님의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렇게 되잖아요.

‘레위 지파는 내 것이다. 다른 지파 다 놓쳐도 레위지파는 내가 놓을 마음이 없다.’ 그럼 다른 지파는 내놓은 자식이냐? 아니지요. 그래서 뭐냐? ‘대신’이란 말을 썼어요. 모든 다른 지파의 처음 난 것을 대신해서 일대일 대응으로 레위 지파의 숫자와 처음 난 자의 숫자를 대응해서 일대일로 대신했다는 말은, 레위 지파가 있음에 온 지파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모든 내용이, 호적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를 대신하기 때문에, 대신한 것만 있다면 다른 지파는 덤으로 레위 지파에게 종속되는 식으로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말을 ‘그렇다.’ 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다른 지파들은 토지가 있잖아요. 상속받는 토지에서 농사지은 것 가운데서 십일조를 누구한테 바치느냐? 레위 지파한테 바쳐야 됩니다. 십일조를.

그것이 민수기 18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8장 21절부터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그들의 일을 계속하게 하라. 그 다음에 십일조 이야기 쭉 나와요. 30절까지 쭉 나옵니다.

30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같이 되리니(30) 너희와 너희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31)” 상급이다, 이 말입니다.

자, 다시 신명기 18장 봅시다. 그러면 이 레위지파가 거주하는 곳이 어디냐? 신명기 18장 6절과 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온 땅 어느 성읍에든지 거하는 레위인이 간절한 소원이 있어 그 거한 곳을 떠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 이르면, 여호와 앞에 선 그 형제 모든 레위인과 일반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나니”

예를 들면, 서울에 조계종 있잖아요. 조계종이 있는데 거기에 식당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의 암자나 절에 있던 승려가 서울에 와서 조계종 본사에 와 가지고 ‘비빔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습니까?’하면 줍니까, 안 줍니까? 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총 본사니까.

지방에 근무하는 레위지파 사람이 왔을 때 중앙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박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근무지가 다르다 뿐이지, 중앙에 있다고 해서 권세 부리거나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민수기 35장, 또 레위기 25장 같은데 보면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이 중앙으로 이사를 왔을 때, 자신이 소유한 가옥이나 다른 소유를 처분하는 게 가능하다고 되어 있어요.

레위기 25장 32절에서 33절 보면, 그리고 또 지방, 촌에 있다가 자기 집을 안 팔고 있는데 다시 돌아갔을 때는 또 팔았다 할지라도 32절 “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 기업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 내가 판 거 다시 무른다 하면 무를 수 있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복잡하니까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말씀은 불속에서 나왔어요. 불속에는 못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는 데서 말씀이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그 말씀 안에 어떤 조치가 있어야 돼요. 조치가 없으면 불속에서 나온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다 죽습니다.

그 조치가 뭐냐 하면, 그 말씀에 대해서 제사법이 같이 있어 가지고, 이 제사법은 말씀 자체가 인간이 더럽다는 것을 겨냥해서 준 말씀인데 더러운 것을 정죄함이 없고,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기능이 또 주어지느냐, 제사에 관한 말씀이 중간에 말씀 속에 끼어들어요.

그러면 말씀의 기능이 두 종류가 되겠죠. 하나는,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기능, 또 하나는 ‘네가 그 죄를 알렸다.’ 아는데 이 죄에서 네가 의가 되는, 죄가 사함이 되는 그 기능을 하는 율법이 또 있겠죠. 그 두 가지가 짝을 이루어야 돼요. 짝을 이루어야 된다고요.

자, 십자가 봅시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신 분이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거죠. 그럼 십자가는 무엇을 한다? 모든 인간은 뭐 받아야 합당하다?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주일날 설교의 본문 같으면, ‘네가 심판받을 자로 여기면서 말하고 행동하라.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을 기뻐하라.’

왜? 자기가 누군지를 그동안 몰랐으니까.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강도가 그랬듯이, 강도가 예수님 십자가 보고 저게 자기 모습인 걸 알았잖아요. 그거 땡잡은 거예요. 강도질을 반복한다고 내가 누구냐를 몰라요. 나의 미래를 앞당겨서 내 미래가 코 앞에 딱 들이닥쳐야, 바로 지금 미래를 내 쪽에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아코디언 기능이 있어서 쫙 벌렸다가 접으면 좁아지잖아요. 나의 마지막이 아직 마지막에 가지도 않은 현재 내 코앞에 도달했을 때, 나의 마지막에서 나온 위력이 뭐냐? 저주다 이 말이에요. 저주. ‘아, 내가 저주받을 자였구나.’ 하는 거를, 나의 마지막 모습이 내 모습이거든요. 내 마지막 모습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자아의 모습 또는 자아의 발생은 거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했어요. 거울을 보고 거울 앞에 있는 모습이 ‘저게 나네.’라고 안다면, 아이는 이미 거기서 자아가 발생됐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육신으로 사는 게 아니고 뭐로 산다? 자아로 사는 거예요. 그때부터 자아로.

맨날 ‘내가, 내가, 내가, 내가’, 그러면 나는 어디에서 어디까지 끼었어요? 저 거울에 뭐가 있다, 이 말이죠. 강남 강의에서 했어요. “저 거울에 있는 쟤 누구야? 저거 나잖아.” 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생각은, 자아는 어디서 어디까지 갇혀 있습니까? 나와 내 이미지로 떠오르는 나 사이에 갇혀 있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나이가 60이 돼도, 꿈속이나 평소에 자기 생각은 본인을 60으로 느끼지 않고 한 32살? 27살 정도로....이걸 어제 설교에서 항구성, 동질성이라고 했지요. 비록 내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하나같이 그때 그 마음이다, 이렇게 주장하죠. 나의 이미지, 나의 착각이죠. 나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거예요.

샌드위치처럼 갇혀 있어요. 갇혀 있는데 이렇게 갇혀 있어서는 세상에 나가서 못 살아요. 세상에 나가서 타인의 시선이 끼면 그 갇혀 있는 것이 수정이 됩니다. “아,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 아, 내가 겸손할 때는 겸손해야 되겠구나. 잘난 체 하면 안 되겠구나.”

막 시집온 새댁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기 집에서 밤 2시에 자고 아침 10시에 고양이 껴안고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시집을 와서 보니 시어머니는 아침 6시부터 주방에서 부스럭부스럭 뭘 하고 있단 말이죠. 시어머니는 주방에서 아침을 하든 말든 나는 10시에 일어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시집 식구가, 가족에 뭐가 있다 했죠? 권력이 있다 했죠. 권력이 있어 가지고 교육을 시키는 거예요. ‘네가 시집을 왔으면 아침 6시가 되면 네 손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 위해서 그전에 일어나서 쌀 씻고 해야 된다.’ 그게 누굽니까? 타인이잖아요. 타인의 힘이죠. ‘싫어.’ 그러면, 헤어지라고 나오죠. 그러면 눈치 보게 되죠.

그 다음부터는 친정이 소환되죠. 친정 들먹이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할게요.’가 되죠. 그래서 수정에 들어갑니다. 내 이미지에 합당한 나로 개선되는 겁니다. 이 버릇이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예요. 성경 말씀의 이미지에 십자가는 안 보여요, 없어요. 십자가는 없고, 그냥 성경에서 목사님이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어디 간다? 천국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천국이고 뭐고 가 봐야 아는데, 미리 준비는 단단히 하자. 단디 하자.’ 이런 생각으로 교회 간다, 이 말이죠. 시키는 대로 다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근데 마지막 모습은 뭐냐? 끝났어요. 마지막 모습은 뭡니까? 우리는 저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이미 출생할 때부터 오메가가 알파예요. 오메가가 저주받은 자는 알파도, 처음도, 시작도 동일한 거예요. 저주받아 합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긍휼이 나오죠. 긍휼과 사랑이 나오죠. 죄 사함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가 뭐라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안에 그 강도가 들어가기를 원했을 때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왜? 왜 구원해 줍니까? 십자가의 효과 때문에.

십자가에서 나오는 사랑의 권력 때문에. 사랑의 힘. 사랑의 힘이 모든 이 세상의 시험을 박살냈던 거예요. 내가 시험 받기 위해서 환장한 세상적인 모든 것, 남한테 좋은 이미지를 얻겠다는 이 유혹, 악마의 유혹을 긍휼 하나로 완전히 작살을 내버리는 거예요, 작살을.

그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은 뭐 중심이냐 하면, 제사 기능이 왜 있느냐? 제사 기능, 다른 말로 하면 희생이죠. 나는 농사짓기 바쁜데 왜 레위인들은 애꿎은 어린 양, 소, 염소로 저 제단 앞에서 왜 자꾸 희생 제물을 드리느냐, 이 말이죠. 저 희생 제물과 내가 농사지어서 곡식 이루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연관성.

죄인이 제사를 잘 드리면 농사지을 때 농사의 열매가 맺히도록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는 거예요. 힘을 실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나온 제일 좋은 첫 열매, 십일조는 누구에게 드려야 돼요? 레위인을 통해서 제사장, 제사장을 통해서 누구한테 드려야 됩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되는 거예요.

그 덕에 레위인들과 제사장은 밥 먹고 산다. 뭐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정리가 됐지요. 모든 율법은 뭐라고요? 지적받기 위해서. 우리가 지적받기 위해서 모든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럼 지적받을 때마다 성도는 아주 신이 나죠. 신바람 이박사예요.

내가 잊어버렸던 주님의 긍휼과 사랑, 처음 사랑, 첫사랑을 다시 한 번 회복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어제 낮에 좀 강조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한 번 따라 해볼까요? <매사에 엄살떨지 말라.> 뭐 벌레 물렸느니, 위가 좋지 않다느니, 검사를 해 봐야 된다느니, 좀 덥다느니, 땀 난다느니..

엄살떤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눈을 돌려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엄살이 돼요. “뭐 어쩌란 말이냐, 할 도리 다 했는데 더는 못 한다.” 십자가에서 눈 돌아가 버리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자기 이미지 관리예요. 내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내가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놈의 이미지 안고 지옥이나 가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레위 지파가 했던 제사 기능 중심으로 대신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 그게 바로 히브리서 5장 1절부터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5장 1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 뭐예요?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1)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뭐 할 수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2)”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해서, 남보다 자질이 뛰어나서, 영특해서, 아이큐가 높아서 제사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율법의 제사 기능이 제사하는 제사장마저 짐이 힘으로, 그 제사 기능이 짐으로 힘으로 하는 거예요.

자기도 연약하고 누구도 연약하고? 남들도 연약하고. 연약하다는 말은 인간이 세운 제사장 가운데서 영원한 제사장은 있다, 없다? 영원한 제사장은 없다. 다만 영원한 제사장은 인간의 연약을 아주 개무시하고 ‘이것도 못했지?’ 이게 아니라, 인간의 연약한 육신에 참여했어요.

인간의 연약함을 통과해서 연약함을 초월해 버린 분이 이제는 ‘하나님의 제사 기능이 미흡하다는 소리를 하지마라. 입 다물어라.’ 인간이 연약한데, 연약함을 이미 알고 연약함마저 뛰어넘은 분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연약해서 어떻다, 저떻다 소리는 적어도 예수님의 속죄 기능에 흠집이 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자기도 뭐 인간이면서 어떻게 자기 속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단 말인가?’ 이런 구시렁대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제사장은 한 분 제사장, 영원한 제사장을 향하여 질주하고 달려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노선은 뭐냐? 인간의 육의 노선으로 온 게 아니죠. 인간의 육 말고, 말씀의 노선이 인간의 육과 더불어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걸 히브리서 5장 6절에서는 이렇게 돼 있어요.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댁의 반차(반열)를 좇는 제사장이라.”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갑자기 멜기세댁이 툭 튀어 나오죠. 멜기세댁이 어떤 사람이냐? 히브리서 7장 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비도 어미도 없으니까 그 다음에 뭐가 없어요? 족보, 땅의 육의 족보 자체가 없어요.

그러면 육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수직적으로 꽂아 넣었다는 거죠. 시간에 적용받지 않는 영원한 속성이 시간에 적용받는 이 연약한 인간 속에 꽂혀 버린 그 사건을 히브리서는 그걸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사장 되시고, 제물 되시고, 그래서 제사를 이루었다, 스스로 속죄가 되시고, 스스로 제사 드리는 분이 되시고, 그리고 이제 소나 양의 피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다. 히브리서 9장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단번에 실체가 되는 성소, 하늘나라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면 하늘나라에 들어간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뭐 단번에 드린 뭐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피죠. 피가 권력이다, 이 말이죠.

신명기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율법의 최종 권력이 바로 신약에 가서 나타나서 지금도 그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왕이고, 우리는 백성이죠. 그럼 우리의 왕은 누굽니까? 이재명 대통령이에요? 김정은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 대통령이 누구든, 우리의 지도자는 영원한 지도자, 선지자, 제사장, 왕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그 분의 소유고, 우리는 그 분에게 순종함으로써 섬기는 그런 권력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나라에서 돈 주거든 받고, 누구든 인간이 인간을 섬기지는 마세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