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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8강 / 신명기 17:2(하나님의 앞마당) / 260427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38강 / 신명기 17:2(하나님의 앞마당) / 260427

정인순 2026. 4. 2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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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김혜근

대전-신명기(38강) 신명기17:19(하나님의 앞마당)20260427a(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16장 16절부터 하겠습니다.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空手)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그렇게 나오죠.

이걸 아주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시간을 통해서 공간을 만드는데, 이 공간은 뭐냐 하면, ‘여호와 앞에’라는 공간이 만들어져요. 여호와 앞에. 아, 이게 성립됩니까? ‘여호와 앞에’라는 것은 공간에 관한 단어죠. 누구누구 앞에, 신약에 ‘예수 안’ 그건 뭡니까? 공간 개념이잖아요. 공간 개념.

이런 ‘여호와 앞에’라는 공간 개념이라든지 이런 것은, 여호와 앞에 가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해요. 인간이 이민을 간다든지 이사를 갈 때는 그냥 옮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앞은 몇 번지입니까? 몇 번지예요? 3번지입니까? 이건 어떻게 옮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걸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에는 인간의 의미가 섞이면 안 된다.” 율법에는 인간의 의미가 섞이면 안 된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율법의 이야기가 사람의 이야기가 되면 안 된다.” 율법 이야기가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준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 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방 민족은 어떻게 돼요? 이방 민족은 율법 안의 이야기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이방 민족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 이야기하겠어요? 자기들 이야기하겠죠. 이게 잘리는 거예요. 이게 배제되는 겁니다.

너희들 생각이, 의미나 이야기도 생각이잖아요, 너희들의 스토리, 너희들 생각이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 왜? 율법은 모세로 인하여 이 땅에 없는 거였어요. 없는 거. 이게 신앙의 근본 토대 아닙니까?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고, 사람의 철학이나 노력이나 지식으로 생겨날 수 없는 그 구조에 속할 때, 이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내밀 수 있는 모든 의미와 이야기를 초과하는, 초월하는 세계의 등장이죠.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안에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러한 개념들이 그 안에 주어졌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한테 당한 겁니다. 하나님 앞에 당했어요. 이 당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이걸 ‘복’이라고 이야기하죠. 이걸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창12:3) 이런 이야기를 심지어 아브라함 본인도 못 믿었어요. 내가 아브라함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나를 인정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것은 아브라함 본인도 인정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저 인간 대 인간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비멜렉 추장 만날 때 알아서 기고 들어갔지요. ‘이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창26:7) 그게 요즘 말로 하면 뭐냐? 텃세라는 거예요. 텃세. 전원생활을 하겠다고 갔을 때는 일차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부페 한번 쏘고 들어가야지요. 그냥 들어가면 나중에 자기 텃밭에 식초를 뿌리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나이 많은 모친 이사 왔다고 노인정 그냥 갔다가는 요구르트 먹는 수가 있어요. 독(毒)든 요구르트요. 처음 끝발이 나중 끝발까지 되려면 잘 보여야 된다, 이 말이죠. 굽신거려야 돼요. 이게 나그네 설움이죠. 외지 사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시비를 못 거는 이유가, 공간이라 하는 것은요 그냥 ‘어, 자리 좋네.’ 그러면서 들어가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공간에 선조들, 선배들의 정성이 이만큼 쌓여 있어요. 얼마나 많은 투쟁과 희생과 그리고 돈들이 들어갔는데, “이 동네 느티나무 좋다.” 느티나무는 본인이 키우지도 않았는데 가서 느티나무 좋다고 즐길 때, 얼마나 그 토박이들이 안 좋은 시선을 보내겠어요? 그래서 나온 게 주민 발달기금, ‘100만 내라.’

뭐 이렇게 텃세 부리는데, 아브라함은 근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본인이 그걸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쯤 하고 다시 근원적으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요거는 약간 빨리 하겠습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율법은 모세로부터 시내산에서 주어졌지요. 그러면 율법 앞에서 율법이 주는 시간, 아까 신명기 16장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거쳐서 그 다음에 공간, 여호와 앞에 나올 때, 여호와 앞에 나올 때는 이건 반드시 그냥 못 나와요. 율법이라는 기계 속에 들어가서 납작한 쥐포나 오징어포가 돼야 돼요. 율법 속에 들어가서.

율법 속에 들어갈 때 납작하게 되는 이유가, 그냥 들어가 버리면 나의 이야기, 나의 의미가 그대로 산채로 율법 세계에 들어가는, 진짜 이거는 뭣도 모르고 그냥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더 합쳐서 이야기하게 되면 “율법 안에 존재는 못 들어온다.” 율법 안에 존재는 못 들어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존재 말고 다른 일이 벌어졌는데, 우리에게 존재 말고 다른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 네가 있다. 존재뿐인 세계에서 존재 말고 다른 방식으로 율법 세계에 들어간다면 그거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사건. 지겹도록 했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존재에서 뭐로 바뀌어야 된다? 사건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존재는? 네 존재는 유월절 어린 양이 대체하지요. 그게 출애굽 사건 아닙니까? 하나님이 보낸 무서운 천사가 와서 그날 밤에 맏아들 다 죽일 때, 그 맏아들은 존재잖아요. 우리 집에 큰아들 있다. 예, 그건 뭐 인정하죠. 있는데 그 존재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 존재가 죽어요, 없어져요. 없어진다고요.

“우리 맏아들 하나님 앞에서 없애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 아들 존재 대신에 무슨 존재가 앞으로 네 집안을 새로 이끌 장자노릇 할래?” 하면, “우리 집에 키우는 어린 양이 있습니다.” 여기 ‘어린 양이 내 아들 대신해서 죽었다.’ 하고 어린 양의 피를 어디에 바릅니까? 문설주에 발라버립니다.

발라버리면 그다음부터 율법은 어린 양의 피를 향하여 달리는, 그걸 이제 ‘질주한다’ 또는 목적을 가지고 그쪽으로 달리는 function, 그 기능이 ‘어린 양’부터 시작해서 그다음 신약에 누가 나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 끈이 이어져 가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은 그냥 당한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존재가 있어서 당한 것이 아니고, 당하도록 사건이 만들어낸 존재 집단, 그게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 속에는 존재보다 사건이 우선되는 겁니다. 존재보다 사건이. 그러면 사건에 들어왔다, 납작하게 되었다. 그게 뭔데?

납작하게 되어야 율법 안에 있는 새로운 시간과, 율법 안에 있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주께 허락받습니다. 그걸 그 공간에 수용하죠. 시간이라는 출입구를 통해서, 절기라는 출입구를 통해서 딱 들어가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앞마당’, 아, 이거 제목으로 적절한 것 같네요. ‘하나님의 앞마당’ 그래야 ‘하나님 앞에’가 성립되니까, 하나님 앞에 도착됩니다.

‘이리오너라’ 또는 ‘어서오너라’ 나는 하나님이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너희를 위해서 사는 것은 이미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이제 없어졌어요. 그냥 없어지지 않죠. 그래서 율법이라는 기계를 가지고 쫙 짜버리죠. 쥐포는 뭐 기계가 짠다고 치고요, 오징어포도 기계가 넓게 펼 수 있는데, 어떻게 물질도 아닌 사람을 납작하게 한다는 게 성립되느냐?

그게 된다고 보여주는 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제사장의 특징은 땅을 소유하지 않는 자, 제사장이 사는 번지수는 여호와 앞이에요. 주소지가 3번지가 아니에요. 이 땅에 주소지가 없어요.

그 주소지 없는 특수한 땅을 이스라엘 레위 지파에게 줬는데, 그 레위 지파에게 준 48 군데 중에서 여섯 군데 특수한 장소가 공개됩니다. 그걸 세 자로 하면, ‘도피성’. 도피성에 누가 살고 있는가? 그 지역의 제사장이 살고 있죠. 그 지역의 제사장이.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도하에 살인하게 된 사람, 본의 아니게 하나님에 의해 살인하게 된 사람이 이 세상에 살지 못하고, 왜 살지 못하냐 하면은 가족들,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혈육 중심이거든요. 철두철미한 혈육 중심이기 때문에 내 혈육을 건드렸다 하면 이제는 ‘네가 죽어야 내 성이 풀린다.’ 이게 부모의 심정 아닙니까?

엄마는 누구 힘으로 살지요? 엄마의 특징은요.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자슥(자식) 때문에 살아요. 특히 남편이 있는 여자 말고, 남편이 돌아가셨거나 또는 이혼을 한 분에게 있어서 여자의 사는 힘, 추진력은 자식이에요. 자식 하나 보고 산다. 딸도 딸이지만 아들 같은 경우는 더 애틋하지요.

이 아들 장가가기 힘듭니다. 이 아들하고 결혼하려 하면, 상대방 여자 쪽에서 상견례 할 때 말조심해야 돼요. “아이고 혼자서 애 키운다고 고생했습니다.” 이러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요. ‘남편 있다고 자랑하나?’ 이러면서 기분 더럽다고 결혼 파토 내버리죠. 그만큼 인간에게는 지독한 혈육 중심이 있어요.

연약한 여인이지만 아들만큼은 내 목숨 바쳐 지킨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자세에 대한 이 정당성, 이게 무슨 세계? 존재 세계예요. 이게 존재 세계예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이고, 아담에서 내려오는 그러한 충동들이죠.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고의든 아니든 간에 내 혈육을 죽였다면 그냥 살려두지 않죠. 그러면 그 남을 죽인 사람은 이 땅에서 뭐냐 하면, 살아 있어도 복수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가 되죠. 이미 죽은 자. “네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너 가만두지 않겠다. 너 죽고, 나 죽자.”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조치를 합니다.

이미 죽은 자로 하여금 도피성에 피신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도피성에는 누가 있느냐? 제사장이 있죠. 제사장은 땅에 소유권이 없어요. 자기 땅이 없어요. 그냥 기거할 땅은 있지만, 대대로 소유되는 땅은 없어요. 땅 대신에 주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안’이에요. ‘여호와 앞’이라는 공간이 주어져요.

여호와 앞이라는 그 공간, 땅과 기존의 인간들이 혈육 중심으로 살아가는 땅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역할이에요. 제사장들은 땅은 없어도 뭐는 이야기할 수 있는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 신명기 17장 9절 봅시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재판장들이 있는데, 이 재판장 제도는 구약 때부터 조금씩 그 제도가 발전한 거예요. 옛날에 각 성읍마다 일곱 명의 재판장들이 있었는데, 그 재판장의 머리는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후대에 와서 120가구 이상의 재판에서는 23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법정이 임시적으로 설치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산헤드린이 있어서 그때는 전국 지역의 80명의 국회의원, 장로들이라 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그런 모임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바로 대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누가 돌아가셨죠? 그 공회의 결정에 의해서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죠.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결정한 것이 그 당시 로마 군병들만이 아니고, 거기에 형성되어 있는 배후의 산헤드린 80명의 장로들이 있죠. 그 당시의 국회의원들이 있지요. 그런데 80명의 장로들이 어디서 뽑힌 겁니까? 그 지역에서 뽑힌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는 가담 안 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습니다.

이걸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기획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발을 뺄 수 없는 그러한 체계를,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적으로 그걸 형성시킨 겁니다. 이것을 현재 우리가 아는 식으로 하면 뭐냐? 권력 구조예요. 권력 구조. 이 권력 구조에서 예수님보다 앞서서 살해당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이었어요.

촘촘하게 어떤 인간도 혈육을 바탕으로 한 권력 구조에 의해서 ‘나 거기에 해당 안 된다.’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이 현실 세계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 가도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의 헌법에 대해서 통치를 받게 돼 있어요. 벌써 거기에 대한 증명서까지 마련돼 있습니다. 그 증명서가 뭐겠습니까? 주민등록증이죠. 일종의 통행증 같은 거죠.

심지어 차 사고 나도, 접촉 사고 나도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게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입니다. 외국 사람인지, 아니면 말소된 사람인지, 안 그러면 중국인이 범죄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건지.. 하여튼 모든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당신의 주민등록을 보겠다.’ 그 발급을 누가 하죠? 국가에서 하죠. 그게 사람의 이야기잖아요.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죠.

그러니까 이 율법이 의외로 어려워요. 왜냐하면 율법도 천천히 따져보게 되면, 세상 권력을 닮았어요. 여기 17장에 보면 재판하는 거 나오잖아요.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이렇게 돼 있고, 그 뒤에도 보면 여러 가지 재판거리가 될 만한, 시비 거리가 될 만한 여러 가지 조항이 촘촘히 그물 같은 구조가 있는데, 그 거미줄을 율법이라 했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그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의 정신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사람과 사람의 상식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안일하게 봐 버리니까, 율법을 대하면서 이미 없어진 자기의 존재감이, 율법을 지켜서 나라를 만들게 돼 버리면 어떻게 돼요? 없던 존재감이 새로 생기면서 뭐가 뒤로 빠져 버립니까? 출애굽 사건의 의미가 퇴색돼 버리고,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누구한테 재판받지 말라? 세상 법정에 가지 말라 했다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세상 법정에다가 고소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아주 화를 내는 겁니다. 세상 법정, 그들이 뭘 안다고 그들에게 호소하느냐? 세상 법정의 판사들은 엘리트 아닙니까? 서울법대, 연대법대, 고대법대, 수능 최상급에 속하는 문과 출신들이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뭘 안다고!”

그들이 모르면 더 똑똑한 사람은 누가 있느냐? 세상 지혜라는 그 차단막을 돌파하고 뚫고 나온 지혜로 너희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찮은 인간들이 머리 굴리면 나올 수 있는 인간 지혜, 인간 이야기, 인간 의미들, 그런 것들한테 네가 참조를 해서 재판받으려고 하느냐? 그거는 말이 안 되지, 이런 뜻이에요.

더 중요한 것은 자, 세상 법장에서 재판을 받는다고 칩시다. 집사끼리 고소해가지고 땅덩이, 내 땅 돌려받았다고 칩시다. 그렇게 했다 칩시다. 그래서 뭐? 그래서 천국 가는데 그 속도가 더 빨라집니까? ‘나는 이제 재판 이겨서 땅 받았으니 빨리 죽어야지.’ 뭐 이런 투입니까? 아니면 ‘오래오래 살아야지. 재판이긴 보람을 느끼고 오래 살아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분명히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뭐가 있는 것은 다 쓰지 못한 줄 알고 가라. 심지어 부부도 아내 있는 자는 뭐 같이 하라? 없는 자 같이 하라.(29절) 이건 진짜 어떤 사람한테는 복음이다. 남편 있는 자는 남편 없는 것 같이 하고. 그 이유가 뭐냐? 오래 자유를 누리라는 말이 아니고요. “떠나버려. 빨리 떠나버려” 후쳐서 나가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도피거든요. 이거는 하나님에 의해 강제로 도피당하면 그때는 누굴 만나느냐 하면, 제사장을 만나는 거예요. 땅 없는데 율법에 의해 재판하는 것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 세상 법률이 아닙니다. 헌법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사람 아니에요. 그거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하는 거고, 이거는 율법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재판이죠. 그런데 거기서 율법이 멈추는 게 아니에요. “아, 나는 이제 율법한테 재판받으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옳았대. 아유, 기분 좋아. 나 이제 이 땅에서 오래 살래.” 뭐 이렇게 되잖아요. “아우 나 억울해. 재판에서 졌어. 또 하면 이겨야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17장 12절 봅시다.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천자라는 것은 경솔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네모, 그 사람을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갑니까? “그냥 죽여 버려!” 이 말이거든요. 야, 이거 뭐 여기서 이게 딱 나오면요, 그 다음에 우리의 울컥하는 본심이 나오죠.

네 글자.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죽여 버려라.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민중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죽였잖아요. 결정은 대제사장하고 장로들이 내렸고요. 그 실행은 본디오 빌라도의 군사들이 했고. 예수님에게만 그렇게 했습니까? 이 권력 체제가 있는 한, 스데반 집사도 그렇게 해서 죽었잖아요.

율법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이 납득되는 율법으로 잘못 해석된 법에 의해서 죽지 말아야 될, 율법을 이미 통과해서 율법에 저촉이 안 되는 사람을 그들은 엉터리 율법의 이름에 저촉된다고 짱돌 들고 쳐 죽였고, 거기에 맞아죽은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같이 그 편에 서서 잘했다고 동의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사울.

도대체 주께서 세상일을 어떻게 끌고 가시는지 스데반 집사님을 죽게 한 그 주동자 중에 한 사람을 주께서는 13번째 사도, 사실은 13번째가 아니라 통합된 사도, 12사도를 대표해서 단 한 명의 사도로 정해 놓고, 12사도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담당자라면, 한 사도, 사도 바울은 누구 담당자냐면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세움을 입었다,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등장이 왜 이렇게 화려하냐, 이 말이죠. 사울이 공부 열심히 했더니만 뭐 밤중에 천사가 와서 창문 두드리면서 ‘이제부터 너는 사도라.’ 이렇게 할 수도 있잖아요. 왜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가담된 그 자에게 주께서 찾아가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도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에서 뭘 통과했는가? 존재에서 십자가 사건을 맞이하여 존재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건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절차를 주님이 이 땅에 와서 떠났던 그 절차를 사울에게 그대로 카피(copy)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입니다. 지금 다시 어디로 돌아가야 하냐 하면, 이 공간 문제, 하나님의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제사장이 시범이 되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자, 모세는 어디서 나왔다? 출애굽 사건. 모세는 출애굽 사건에서 나왔다. 모세가 둘로 갈라지죠. 모세와 뭐가 갈라지는가? 아론이 나왔다. 아론은 뭐냐 하면은 대제사장이 되죠. 모세는 뭐가 됐냐 하면 선지자가 됩니다. 선지자.

율법이 자기가 불렀던 인간들을 통해서 율법 내용의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 내용의 다양화. 율법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내용? 선지자 내용도 있고, 제사장 내용이 있다. 여기서 더 나가요. 제사장과 선지자, 이 율법이 계속 나오면 뒤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왕이 등장해요. 이런 게 좀 어려워요.

신명기 17장 15절.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 다음 16절 “왕이 된 자는 말(horse)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에 돌아가게 말 것이니..”

왕 자체에서 주께서는 그 왕의 무늬를 뭐로 이렇게 조명발 세웁니까? 보통 무대 보면 디지털 화면 막 띄우잖아요. 그러면 제사장이라는 이 육체에다가 화면을 띄우는 거예요. 조명발 세워서. 그러면 여기서 왕은 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을 조명발로 받는 자가 왕이다, 이 말입니다. 출애굽 사건.

본인이 분명히 신체가 있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뭐가 덮쳐진다? 사건, 사건의 전말이 그 왕에게 덮쳐지게 되면 그 왕은 율법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 전에는 선지자 모양으로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다가, 그다음에 제사장으로 드러내다가, 그다음에 유다 지파에 와서는 왕이라는 직분을 통해서 율법이 품고 있던, 잠복돼 있던 내재적인 내용이 왕의 행동들을 따라서 그 진위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왕의 그 행동이 드러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등장하냐 하면, 잘된 왕은 뭐 주고? 복 주고, 못된 왕은 뭐 주고? 저주 주고. 이렇게 되죠. 율법이 왕에게로 중력이 한곳에 모이듯 모이게 되면, 나머지 백성들은 왕의 활동의 여파가 되고, 왕의 활동을 보완하는 또는 보완이 아니고 이걸 배경으로 깔고 있는 환경, 율법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무슨 언약? 왕 단독자로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슨 언약이라 하냐 하면, 다 알죠? 무슨 언약? 다윗 언약.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란 말은 하나님은 직접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께서 물으십니다.

“너 어떻게 살았어, 어떻게 행동했어?”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네 왕이 있어? 없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묻죠. “네 왕이 있다는 자세로 평생을 살았나?” 나에게는 나의 모든 것을 대신할 왕이 있다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평소에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았느냐를 물어요. 답변은 ‘예’ 혹은 ‘아니요.’

“저는 왕만 쳐다보고 살았어요.” “그래. 그렇다면 네 왕이 너한테 뭘 해 주었니?” 이렇게 묻죠.. 여기서 하나님의 그 언약의 율법에 인간의 의미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을 계속해서 지금까지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대단한 단어가 좀 전에 나왔어요. 그 단어가 뭐냐 하면, 나는 왕의 뭡니까? ‘배설물’ 이게 신앙인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비슷한 단어가 ‘지옥 장려금’. 나라에서 공짜로 준 거 아니고, 꽁으로 준다고 했죠. 공이 아니고 꽁. 네가 지옥 같은 세상에 더 살라고 주는 거예요. 세상을 보는 의미를 나의 스토리, 나의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그 율법의 완성,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내 입에서 나오는 그 의미가 주님이 나한테 안겨 준 안목을 가지고 보는 거예요. 그 까짓 공것, 약간 사투리로 하면 꽁것.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16장 1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그다음에 뭐라 되어 있어요?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 빈손으로. 자,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한번 답변해 보세요. 한 번 구분 지어 보세요. ‘뇌물과 제물의 차이점’, 뇌물과 제물의 차이점은 뭐냐? 5초 드립니다. 1 빨리빨리. 1 2 3 4 5 끝났어요.

뇌물은 주고 난 뒤에 내가 멀쩡해지는 것, 내가 알던 내가 ‘휴우~’하고 다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 내가 멀쩡한, 이게 뇌물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많이 하죠. 하나님께 뇌물 바치죠.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우리 아들 장가만 보내면 기꺼이 헌금 드리겠습니다.” 이거 뭐예요? 뇌물이죠, 뇌물.

제물은 뭐냐 하면, 나는 죄이기 때문에 나를 하나의 배설물로, 이 죄만 받으시는 분에게 처리해 달라고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제물과 예물을 같은 말로 보면 되고요. 이 예물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기존 교회 목사들은 내심 흐뭇해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뇌물을 받는 자는 바로 교회에서 받아요. 교회가 운영되니까. 그런데 제물을 받는 수용자가 없어요. 수용자가 없다고요. 이거 좋아할 입장이 아니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뇌물일까요? 제물일까요? 뇌물이죠. 그러니까 교회는 좋아하는데, 마태복음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런 말씀은 참 어려워요.

6장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19)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20)”라고 돼 있습니다. 자 다시 5초 드립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은? 1초 2초 3초 4초 5초,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방법은?

땅에는 쌓아둘 수 있어요. 확인이 가능하거든요. 금융거래, 통장 내역을 휴대폰으로 볼 수 있잖아요. 확인이 돼요. 그러나 하늘에 쌓아두면 이게 하늘에 얼마나 쌓았는지 적금 얼마나 부었는지, 이자 얼마나 되는지 전혀 확인이 안 됩니다. 확인이 안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쌓느냐? 그 뒤에 나온 말씀이 그걸 정리해 줍니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늘에 쌓아둘 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사는 방향이 지옥이 아니고, 그 벡터 방향이 하늘로 가도록 보게 하는데, 하늘에 누가 먼저 가 있느냐 하면, 바로 모든 율법을 아까 마태복음 6장을 다 이루신 주님이 이 땅을 거쳐서 승천하여 하늘로 갔잖아요.

그 하늘에 누가 있느냐? 나를 몽땅 가져가신 나의 보물이 주님 품 안에 있다. 그러면 이 죄를, 새로운 죄 없는 인간으로 바꾸어진 그게 보물이거든요. 천국에서는 반짝반짝 빛난다고 돼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천국 건물의 특징이 뭐냐? 빛나요. 영광스러워요. 반짝반짝 눈부시도록.. 그걸 달리 표현 못 해가지고 지상에 있는 보석이란 보석은 전부 다 끌어당겨서 그렇게 표현했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너무 눈부셔서 못 볼 정도로 빛나요. 그 빛난 곳에 우리 주님이 가 계시니까, 이 아무것도 아닌 시시하기 짝이 없는 명품 샤넬, 외제차 포르쉐, 그런 모든 것은 마음을 어디다 두게 합니까? 땅에 둔다고 하지만 그걸 또 강조해 봅시다. 하늘을 못 보게 만들어요. 하늘을 못 보게 합니다.

오늘 첫째 강의하면서 이거는 여러분 한 번 적어 놓으세요. 이거 뭐 강의들은 보람이 있어야지요.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위험하다.”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위험해요. 왜냐하면 마귀가 자꾸 이거 목에 디스크 걸리게 만들어가지고 마귀가 땅에 좋은 것을 보게 하고, 혈육만 쳐다보게 하고, ‘주님보다 네 자식이 낫지.’ 뭐 이렇게..

취직했다고 기세 올리는 자식이 내 죄 사해주신 주님보다 더 세게 들어오지요. 다 같이 배설물의 입장에서...내가 하늘을 쳐다보게 되면,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어요? 하늘에 가 있기 때문에 누구의 공격 표적이 되냐 하면, 땅을 쳐다보는 자에게 우리가 위험인물이 됩니다. ‘너는 같은 인간인데, 왜 말이 안 통해?’ 이런 거요. ‘말이 안 통해.’

그게 이스라엘 내에서는 율법으로 장려돼요. 참 재밌는 게 신명기 16장 18절에서 누가 지금 우대되는 걸로 보입니까? 일반인보다 누가 우대된다? 제사장과 재판하는 자가 우대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몇 장 넘겨서 사사기에 가 보세요. 누가 가장 천시 받습니까? 제사장, 레위인들 사람 취급 못 받습니다. 십일조 안 해요.

땅도 없는데다 십일조도 안 내니까 자기도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사사기 17장에 보면 미가 집에 가서 아무에게나 복 빌어주는, 그냥 복 빌어주는 그런 일을 하는 거예요. 교목, 원목, 이런 거 있잖아요. 군목, 회목, 교회 목사, 신학교 나왔으니까 거기서 배운 지식 가지고 밥 빌어먹고, 애들 피아노 레슨은 또 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 사모님이 뭐 보고 결혼 하겠어요? “나 안 굶게 해 달라.” 마찬가지잖아요, 마찬가지. “우리 애 교육시켜야지. 난 당신만 쳐다본다. 난 당신 믿습니다.” 아내가 남편 보고 당신 믿는다고 하면 그다음부터 남편은 기절해요. 뭐 어쩌라고? 내가 내 한 몸도 건사 못하는데, 뭐 어쩌라고? 왜 짐을 그렇게 지워요? 그게 혈육적 관계 아닙니까?

바로 율법은 이런 현실의 난맥상을 통과하면서 율법이 욕 얻어먹고, 율법이 신음소리 내고 고통 받아요. 왜?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버림받고 천대 받는 게 뭡니까? 율법 그 자체죠. 그러면 누가 그 율법을 아주 정치적으로 핍박하느냐? 그게 열왕기 상하에 누가 나옵니까? 왕이 나오죠, 왕이.

이제 슬슬 이스라엘 역사가 눈에 들어옵니까? 17장 다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17장 18절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18)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서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19)” 20절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했잖아요.

끝없이 끝까지 왕위를 유지할 수 있는 왕은 누굽니까? 이 율법에 의하면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왕들을 세운 것은 뭐냐 하면, 그 장차 오실 마지막에 진짜 겸손하고 겸손한 예수님과 그 앞선 왕들과 비교해 보라, 이 말이죠. 단순히 비교해 보고 끝나는 게 아니고 ,비교해 본 결과는 뭡니까? 이스라엘 폭망했죠. 망했죠.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언약이 이 세상에 다 퍼졌잖아요. 그럼 누구의 폭망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율법이, 출애굽 때 율법이 애초부터 예언한 내용이에요. “모든 세상은 망한다. 필히 망한다. 이유 알려 줘? 이스라엘 역사를 봐.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어떻게 됐어? 망했잖아. 그다음 차례는 이방인 너야.” 이러한 사실을 흔쾌히 기쁨으로 받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빠져 있는 보궐로 들어가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게 로마서 11장에 나와요. 이게 인류의 역사예요. 아담의 자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율법을 줘버렸다. 율법을 줬는데 율법의 무늬가 특정 인간 모세와 아론에게 무늬가 입혀지는 거예요. 조명발을 받는 거예요. 그걸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무늬’라 했죠. 펄럭이는 천, 율법의 천의 무늬로 들어갔지요.

율법의 정신은 이렇게 들어간 것을 모세 아론에 멈추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대로 율법이 통치하고 지배하기를 원했지요. 광야에 있을 때는 얼추 비슷하게 가다가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는 꼭 애들 놀이동산에 풀어놓은 거 같아요. “와~ 좋네. 율법 없이 사는 게 이렇게 편한 걸..”

율법의 부담을 안 느낀다는 것은, 이방 민족은 율법이 없지요. 그러면 그들은 뭡니까? 마귀 들려가지고 각자 내가 신이잖아요. 내가 신이 되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뭘 필히 버려야 돼요? 이 두꺼운 성경책을 버려야 돼요. 안 봐요. 보지를 않아요. 교인들도 성경을 안 봐요. 왜? 부담되니까.

부담되니까 성경책 대신 빈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세상의 철학과 선행학습으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선행학습으로 그걸 다 집어넣는 거예요. ‘출세해야 돈 번다.’ 뭐 이런 걸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는? 교회는 다니죠. 왜 다니냐?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교회는 뭐 합니까? 빈손으로 안 오죠. 공수로 안 오죠. 뭘로 공수를 채운다? 예물이 아니고, 제물이 아니고 뇌물을 바치는 거예요.

이것은 로마서 12장에 어긋나요. 네가 이 세대에서 네가 산 제사를 드려라. 우리 자체가 제물이 돼야 돼요. (롬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되지요. 성령께서 하십니다.

첫째 시간 끝나면서 아직 찝찝하게 남아 있는 미진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데, 그걸 받을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땅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하늘에 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제가 이거는 지난 강남 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전에는 ‘내 돈은 내 돈이다.’ 어렵지 않죠?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음 안에서 기계가 돼요. 기계가 되면, 주인이 바뀌어요. 누가 주인이냐? 내 돈은 누구 돈이냐? 주님의 돈이 돼요.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자기 돈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이게 그 나라 의인데, 뭐 여러분 꿈속에 주께서 나타나셔서 ‘한 달 동안 네가 지중해 크루즈여행 다녀와라.’ 하면,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랄라라~하면서 산토리니 구경하는 거예요. 그건 무슨 일입니까? 주의 일, 그 나라 의가 되는 겁니다. “네 사촌이 와서 돈 빌려 달라고 하지? 빌려주지마.” 왜? “네 돈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자유(부담)로부터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