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허무의 심화학습(전도서 8:7) / 260514 본문
[전도서 강의 요약] (2026년 5월 14일: 안양 강의)
“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전 8:7)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간은 허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붙잡고 구원되려고 시도하는가?
전도서에서는 다음 열 가지가 없다.
1. 하나님의 지시
2. 만남
3. 눈물
4. 약속이나 보상
5. 신앙
6. 기적
7. 진리
8. 도덕
9. 이상(理想) 국가, 이상(理想) 사회가 없다.
10. 모델이 될 인물이 따로 없다.(사람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전도서에서 있는 것은 다음의 여덟 가지다.
1. 허무
2. 죽음
3. 심판
4. 끝
5. 흔적
6. 차이
7. 육신
8. 왕
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이 같이 결합하면 무엇이 되는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2-3)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1. 나의 동질성
“A와 B 사이와 C와 D 사이는 늘 동일화가 진행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자아, 혹은 자아 정체성으로 잡게 됩니다. 즉 자아란 필히 동일성이 지속되는 그 간격을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낯설고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면, 자아 정체성은 다시 재조립을 시도하면서 또 나름대로의 동일화를 이끌어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체감의 법칙’입니다.
A와 B 사이에 질이 동일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양은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즉 옛날에는 월수입이 20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300만원이라고 하면, 그러면 이제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양이 늘어났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양이 늘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나' 라는 인간은 동일한데, 즉 질은 동일한데 그런데 수입은 200만원에서 300만원이 되었으니, 그렇게 수입은 늘어났으니 어떻게 됩니까? "나는 성공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지적하는고 하니, 내가 300만원을 버는 순간 스스로 질이 다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점점 더 천국과는 멀어지고, 또한 이 세상에서 실패할까 싶어서 점점 더 심하게 떨게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300만원에서 250만원으로 내려갔다고 하면, 즉 C에서 D로 말이죠. 겨우 50만원이 내려갔는데도, 그만 낙담을 하고 난리가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200만원에서 300만원이 될 때의 기쁨보다도, 300만원에서 250만원이 될 때의 그 슬픔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실제로는 20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그런데 느끼는 것은 그 2배가 됩니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체감의 법칙' 이라고 해서 따지는데, 인간의 쾌락이라는 것이 잘될 때는 모든 것이 자기 탓이고, 못될 때는 남의 탓이라는 겁니다. 그 행복을 수치로 정하면, 잘될 때를 '20' 이라고 한다면, 못될 때 조금만 못해도 그 '20'을 다 까먹고 '-30'으로 내려간다는 겁니다.
동질성이라는 것은 과거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서 '나'라는 것을 정하다보니 이런 착각에 빠집니다.”
2. ‘때’를 통해 빠져나옴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헛된 존재'와 '때'의 구분됨
3. 새로운 중심이 등장함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4. 최종 지점
반면에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3-4,10)
성령으로 짓는 성전은 '완료'가 된다. 즉 종료다. 이것이 절대 중심, 절대 공간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녹취:김혜근
수요설교(260513) 요약 열왕기하 6장 18-23절(놀라운 묘기)
어제 수요설교 요약을 해서 같이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수요 설교에 어떤 루틴,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그걸 증명했다고 해서 거기 살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이스라엘의 큰 오산이었던 겁니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인데,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가 거기 원주민을 쫓아내고 산다고 해서 자기 이름으로 등기라도 친 양, 이제는 우리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관심사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여기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하나님 덕을 봐서,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안정되게 우리 땅이 생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든 관심사가 내 땅, 내 인생, 내 것을 내가 지키는 식으로 모든 생각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사사기도 그렇고요. 잘 되면 하나님 잊어버리고, 내 것이 좀 손해난다 싶으면 그때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살려주나 안 살려주나 뭐가 누락이 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빠져 있고, 하나님의 뜻은 ‘나 몰라라’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한 천국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일관되게 지키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원칙이 원칙대로 살아있을 때에나 성립돼요. 그러니까 원칙이 뭐냐를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 거예요. 그 원칙을 어디서 갖고 오느냐?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 이방나라를, 죽었던 이방나라를 어떻게 살려내서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그 절차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관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건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는 집단으로 했지만, 열왕기하 5장에서는 개인을 했죠. 나아만 장군을 그렇게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수입을 할 수밖에 없죠. 오염된 몸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들어왔잖아요. 나갈 때는 어떻게 되었어요? 깨끗한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잖아요.
갈 때 나아만 장군이 뭐를 캐치했냐하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했던 그 요단강의 원칙이 몸에 장착되니까, 그 저주받은 문둥병도 소위 산, 생명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살려줬다는 사실을 품고 자기 집으로 가서, 림몬당에 하든지, 아니면 갓바위에 가든지, 불교를 하든 전혀 상관없어요.
그 품속에는 요단강의 혜택이 거기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사라진 게 아니고, 나아만 개인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이 문둥병이 떠돌아다니면서 누구한테 왔어요? 하나님의 요단강의 은혜를 모르는 바로 옆의 최측근,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한테 문둥병이 덤터기 씌워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아만 장군하고 게하시하고 둘을 비교를 해보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비교해봐라. 이러이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혈육적으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전에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아서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네 안에 뭐가 있는데?” “뭐, 구원 받았는데 굳이 그걸요.” “아니야, 네 안에 뭐가 계속 그 언약이 살아있어.” 언약이 나보다 더 중요하고,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언약은 생명이니까. 우리는 죽을 목숨이니까 죽는 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언약이 살아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 용서가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그 원칙을 열왕기하 6장에서는 집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아람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하나 보고 찾아오듯이, 어떻게 저떻게 되어가지고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군하고 싸울 생각 안하고 어디를 쳐들어오느냐 하면, ‘엘리사, 너 죽었다.’ 하고 찾아오는 거예요.
억지로라도 엘리사를 만나죠. 만났을 때 엘리사가 그들로 하여금 전부다 눈을 일시적으로 감기게 만들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7절에 인간이 눈을 뜬 게 이게 사단 난 거예요, (창3:7-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눈을 뜨게 되면 인간은 모든 생각을 누구부터 하느냐? 눈 떠서 발견한 것은 자기의 수치며, 결핍이죠. 모든 세상의 의미를 어디서 출발하느냐? ‘나 잘되어야 돼.’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나 잘 되기 위해서는 전쟁해서 남의 것을 뺏어야 되고, 영토도 넓혀야 되고, 노동할 수 있는 노예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해야 돼. 우리는 힘을 길러서” 여기서 또 힘이 나오네요, “힘을 길러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내가 보기에 이 나라, 이 집단적인 우리 아람 나라가 부끄럽지 않은, 수치스럽지 않은 나라가 되게 하겠다.”
그 시도를 하는데, 그것을 몽땅 장님 되게 했죠. 그 원칙이 바로 사도행전 9장의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에게 그 원칙이 그대로 주어졌습니다. 눈을 뜨면서 자기는 장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딱 만났을 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나 핍박한다고 많이 바쁘지?” 이렇게 된 거예요.
핍박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원인이, 출발점이 잘난 나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히려 눈이 밝아서 설쳐대기 이전의 선악과 따 먹었다는 치명적인 ‘정녕 죽으리라.’는 그 사건이 나의 존재의 출발, 나의 존재가 잉태한 원래 자리였던 거죠.
“죽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죽으라고 하십니다. 살아있을 때는 제 맘대로 하다가 죽었으니까 끌려가잖아요, 야곱처럼. 그냥 힘이 없어서 끌려가요. 아나니아한테 가서 안수 받고 눈 떴을 때, ‘이야, 다시 힘 생겼다.’ 아니죠. ‘나는 안다.’아니죠. 그때부터는 뭐냐, 핍박하는 자로서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단단히, 제대로 하게 된 겁니다.
따라서 아람군대도 엘리사한테 패배했고, 북이스라엘도 엘리사 앞에 패배했어요. 그때 여호람이 하는 말이 “저 사람들 다 죽여 버릴까요?”너부터 죽어! 여호람은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지는 눈을 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눈 떴으니까 좀 만만하게 보이는 저 소경된 자들 단칼에 다 죽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눈 뜬 자는 엘리사밖에 없습니다. 엘리사밖에 없어요. 그걸 통해서 눈이 감기고 다시 떴을 때, 전쟁에서 진 자는 다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되는데, 살아서 고향에 가잖아요. 전쟁에서는 졌는데, 물 먹이고 양식 먹여서 살이 포동포동 쪘어. 50킬로가 60킬로 될 정도로 살이 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않게 했다.
뭐가 다녀갔다. 눈 감겨서 그냥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당해도 저항할 수 없는, 뭐가 보여야 저항을 하죠. 그 정도로 전적으로 패배한 인간인데, 주께서 눈 뜨게 하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뭐 달라, 저거 달라, 기도했다 할 수 없는 전적인 강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파악한 그것을 장착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과 강도를 살려주는 생명의 관계가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살아 약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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