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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13:1-5 / 중심부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상

열왕기상 13:1-5 / 중심부

정인순 2025. 6. 19. 09:05

음성 동영상 Youtube

 

중심부

 

이근호
2025년 6월 1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3:1-5

(13: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13: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13: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13: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13: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화입니다. 들뜬 상태에서 바닥상태로 내려와 늘 평온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되려면 스스로 지켜 낼 수 있는 권력, 곧 힘, 곧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과학은 인간을 설명하는 데 있는 하나의 물질(=질점)으로 간주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연 변화의 일부로서 인간을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 현상은 굳이 몰라도 되고 중요한 것은 인간 대 인간 관계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만이 주변을 움직이고 변화하는 주인공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즉 이 대자연을 형성하는 바탕인 시간과 공간은 지극히 당연히 그대로 있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을 구성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즉 인간들의 일상은 자기 인생 형성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의 물질로 간주된다면 ‘자기 형성’에 쏟아부은 모든 것은 다 허망한 일이 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쪽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의 인간의 자격으로 북쪽 이스라엘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이끌려서, 말씀을 싣고 남쪽 유다에서 북쪽 벧엘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 본인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 선지자는 사람 만날려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린 이상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도 아니요 물체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물체와 상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단’입니다. 선지자는 제단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단아, 단아” 그런데 이 제단은 인간들 본인들이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공간적으로 제단 위에 특이 현상이 일어납니다.

제단이 둘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그 제단은 300년 후에 희생제물의 재가 아니라 사람의 해골 재, 곧 산당 제사장의 뼈가 이 제단에서 불살라진다는 겁니다. 언제 말입니까? 바로 요시아라고 이름하는 왕이 등장할 때라는 겁니다. 열왕기하 23:15-20에 보면, 제단을 향한 말씀의 성취가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전에 이스라엘 열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단은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을 따로 장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단을 향하여 선포될 때, 인간이 빠져야 합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이 제단에서 행하는 자기 행사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권력의 안정함에 도모되는 바를 벌리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남쪽에서 올라온 선지자가 방해하니까 체포를 명하기 위해 팔을 내밀었지만 기 내민 팔은 원래의 위치대로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즉 인간은 졸지에 물체가 되고 만 겁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전혀 말씀 해석에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도리어 훼방하고 방해가 될 뿐입니다. 도데체 인간은 어떤 식으로 자기 안정화를 시도하는 겁니까? 그것은 기존의 권력에서 분리되어 자기만의 안정화를 획득하려고 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안정화를 기대하기에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무시해 버린 겁니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시 122:4-5)

즉 하늘나라 유일하게 통하는 것은 다윗에게 준 언약입니다. 이 중심부가 빠지면 이스라엘이 아닌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중심부를 애써 거부하고 같은 인간들의 힘과 의견에 치중해서 자기네들의 안정화를 따로 획책한 겁니다. 사는 데 필요한 힘만 있다면 이 시간과 공간에서 생활의 안정화에 지장이 없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말씀을 가지고 인간들의 안정화를 파괴하려 북쪽으로 온 겁니다. 기존 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예언을 구체적으로 해버립니다.

고린도전서 11:19에 보면,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시공간 속에서 참된 이스라엘과 거짓된 이스라엘을 분리시키려 하십니다. 마치 북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권력 안정화를 위하여 일방적으로 나라를 둘로 분리시킨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인간이 이해될 수 없는 시공간의 세계를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 세계를 공격하고 거기서 방출된 권력, 곧 힘은 언약의 중심부에서 주어진 힘, 말씀의 힘에서 나온 겁니다. 참으로 언약의 시간과 공간을 안다면 기존의 자기 안정화를 획책하는 우리 자신의 모든 활동이 말씀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이기에 마땅히 파괴되어야 될 세계인 것을 기꺼이 감사하면서 받아주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란 말씀과 예언의 힘으로 성립하기에 따로 자기 일상에 빠져 예언과 멀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연해 보이는 시간과 공간이 인간 중심의 이해에 불과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5강-열왕기상 13장 1-5절(중심부) 25061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3장 1-5절입니다.

열왕기상 13:1-5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가 갑자기 초대받지 않은 사람으로서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남쪽에 있는 사람인데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북쪽으로 왔습니다. 북쪽으로 와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제단에서 제사드리는 그 현장에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첫째는, 든든한 제단이 갈라지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태우면 남는 재가 그 갈라진 틈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현상입니다. 두 번째로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서 지금 백성들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제단이 빠개지니까 얼마나 수치스럽고 당황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제단이 갈라지게 된 것은 초대받지 않은 저 선지자가 등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저 사람 잡아라!” 하고 손을 쫙 내밀었어요. 팔을 내밀 때는 쭉 내밀었는데 도로 회수가 안 되네요. 근육통이 생겼는지 팔을 내밀기는 했는데 원위치로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왕상 13:4)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뭐냐? 제단은 그냥 물체잖아요. 나무로 만들고 놋으로 씌운 거니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제단과의 사이에 있는 그 관계에 감히 인간이 끼어들다가 이런 사달이 난 겁니다. 특히 남쪽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이 왕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누구 보고 이야기를 했느냐? 제단을 보고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왕상 13:2).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제단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에 이끌려 와서 하나님이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누구 보고 하느냐 하면, 제단을 향하여 이야기하니까 말씀에 의해서 제단이 쫙 갈라진 거예요.

갈라지면서 그 제단에서 장차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그 현상이 뭐냐? 열왕기상 13장 2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제단 보고 이야기하는데 여로보암이라는 그 인간, 왕이 “너 뭐야? 그 언사를 멈춰라!” 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하여 팔을 내밀었는데 그 팔을 거두지를 못했어요. 제단은 물체잖아요. 인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물체와의 차이점인데 말도 못 알아듣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그 물체 덩어리인 제단을 상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그 말이지요.

자칭 뭔가 할 수 있다고 우기는 인간이, 자기가 하면 한다는 그 인간이 끼어드니까 인간이 뭐가 되느냐 하면 물체가 되고 말았어요. ‘얼음땡’이 된 거예요, 얼음땡! “그대로 멈춰라!” 그대로 멈춰버렸어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 말씀에서 인간을 인간 취급도 안 해준다는 뜻이에요.

여로보암은 선지자 보고 “너 뭐야?” 이런 쪽인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인간보고 “너, 너 뭐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 모든 행동하는 것이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지역, 공간이라 합시다, 어떤 장소, 그 장소를 전제해서 염두에 두지요. 그리고 자기가 제사하고 싶을 때 제단에서 제사하고 싶다는 그 시간, 시각, 자기가 정한 그 타이밍, 인간이 생각하는 그 공간과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서 뭔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존재, 내가 뭘 해 낼 수 있는 존재라고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물체고, 인간 보기에 물체, 딱딱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제단 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인간이 갖고 있는 시공간은 소용없는 시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물체라는, 물건이라는 그 제단, 그냥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제단 보고 하나님의 예언을 지시했다는 말은 그 제단이 속해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그 제단이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바꿔치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뒤바꾸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면 그 제단에 예언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날이 되면 그 시간에 그 제단에서 어떤 완성을 보겠는가?’ 그게 바로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단아, 단아! 너는 그냥 거죽만 펴라. 단이라는 이 공간아, 이 물체야! 너는 가만히 있어도 돼. 하지만 네가 속해 있는 인간들이 모르는 시간, 하나님만 아는 말씀의 시간으로 인하여 시간이 완성되는 날이 된다면 그 제단 위에서 요시아라는 왕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의 사이비 제사장들, 산당 제사장들의 죽은 해골 가루를 이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현상이 시간적으로 완성된다’라는 겁니다. 장소는 그 제단에서.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상대해서 예언한 것이 아니고 제단이라는 물체를 보고 이야기한다는 이것은 뭐냐? 완전히 인간을 배제하는 거예요. 인간 같지도 않은 것. 인간들이 하나님의 예언의 시공간을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 잘남을 증거하는 시공간이 방해하고 있고, 훼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뭐냐? 인간들은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해요. 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거부당하고 파괴당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뭔가 파괴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뭘 파괴시키느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인간들이 하고자 하는 그 계획을, 그리고 그 업적들을 주께서는 파괴시키는 거예요. 제단이 갈라졌다. 이거 파괴잖아요. 거기서 인간이 불태워진다. 희생제물이 불태워져서 재가 되어야 할 그 제단, 희생제물을 얹어야 할 그 자리에 사람이 하나의 재가 되었다는 그 말은, 인간에 대한 전적인 공격과 파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시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파괴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보지요. 이 말씀은 나에 대한 파괴를 노리고 주신 거예요. 제단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장소가 쪼개졌다는 말이지요. 훼손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진정성 있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서, 내 편 말고, 나를 변호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서 나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다시 물어야 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나를 훼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파괴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진정 그것이 너의 소원이냐?” “예, 저의 소원입니다. 제가 훼손당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고 제가 파괴당하는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내 뜻대로, 내 욕망대로, 내 원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것 박살 내고 쪼개야 하지 않습니까, 제단 쪼개듯이. 그 제단 위에 내가 한 줌의 재가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이 말씀을 보셔야 해요.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러면 오늘 설교 본문에 들어가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은 어떤 일을 시도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기 안정화 작업이에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안정성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 미혼보다는 결혼한 사람, 이렇게 뭔가 안정성을 추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땅에 있는 공, 그냥 가만두면 땅에 그대로 있잖아요. 그런데 그 공에 힘, 에너지를 가해서 공중에 붕 띄웠다고 합시다. 공중에 띄우면 그 공이 “아, 오랜만에 바람 쐬네” 하고 공중에 그냥 붕 떠 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불 안정해서 싫어.’ 그래서 도로 어디로 떨어지느냐 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지요. 땅에 떨어진 그것을 ‘바닥 상태’라 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들뜸 상태’라 합니다. 인간뿐만 아니고 세상 모든 만물은 안정된 상태, 바닥 상태에서 에너지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물리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위로 쏘아 올린 공은 반드시 아래로 떨어져서 안착하기를 원하는 거지요. 17세기 이후로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것을 발견했어요. 대한민국에서는 발견 못 했고 저 영국에서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발견했어요. 그때 조선은 뭐 했는지 몰라요.

뉴턴은 이렇게 봤습니다. “지구하고 달하고 서로 당기고 있다.” 만유인력, 중력이지요. 그렇게 서로 당기고 있는데 이걸 생각해 보세요. 만약 지구와 달이 아주 멀어져서 서로 당기고 있던 중력이 아예 끊어졌다고, 지구와 달이 아예 끊어졌다,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이 따로 논다고 생각하고 그때의 무게를 달면 지구와 달의 무게는 어떻게 변하겠는가?

‘그런 것을 왜 생각해요?’ 그러나 생각하지요. 생각을 해보니 질량이 늘어났어요. 질량이 왜 늘어났는가? 그동안 서로 당기던 에너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서로 당기던 에너지가 자체적인 질량에 보태져서 질량이 늘어난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공이 땅에 붙어 있을 때 보통 동양의 시인이라든지 학자들은 ‘돌멩이가 거기에 있다’라고 보잖아요. 그러나 서양의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거기에 에너지가 꽉 담겨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렇게 에너지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만약 그 돌이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그 돌이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지금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을 들고 남쪽 유다에서 북쪽 벧엘에 온 이유가 이겁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남쪽이니 북쪽이니 이런 식으로 나라가 없어요. 나라가 두 나라가 아닙니다. 한 나라였어요. 한 나라였는데 북쪽 10지파가 ‘우리는 남쪽 유다 지파하고는 같이 안 논다. 우리는 남쪽의 다윗 왕의 후손이 싫고 솔로몬도 싫어. 우리 독립한다.’ 이것은 일종의 내란입니다.

그렇게 내란이 일어나서 ‘우리 따로 살림 차리자.’ 해서 남쪽은 유다 나라가 되고 북쪽은 10지파가 모여서 북이스라엘이 된 거예요. 이름도 ‘정통 이스라엘’, 원조 떡볶이나 신당동 떡볶이처럼 ‘우리가 진짜 이스라엘이고 저쪽 저것들은 유다 지파밖에 없다.’ 해서 그 이름이 유다가 된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에너지를 10개를 가져간 거예요. 잠재된 에너지를. 그런데 유다 지파는 베냐민 지파 포함해서 그것밖에 안 가져갔다는 말이지요. 비율이 거의 80퍼센트 대 20퍼센트니까 어느 쪽이 진리다운가, 어느 쪽이 정말 이스라엘다운가? 다수가 이미 북이스라엘이니까 그들은 이미 으쌰으쌰, 하고 어떤 자부심을 갖게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 중심으로, 다윗에게 준 약속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적인 생각으로 나라를 두 조각 냈잖아요. 이것이 분열이잖아요. 분열되지 말아야 할 것이 인간적인 요소로 분열되었으니까 그것을 문제 삼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인데 왜 네 나라처럼 해서 따로 나라를 세웠느냐?”

따로 나라를 세운 이유가 뭐냐? 에너지, 그러니까 권력, 힘, 그 큰 힘을 갖지 아니하면 한 나라가 이뤄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 언약에 주신 그 힘 말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힘 말고, 자신들이 스스로 자립하고자 하는, 자족하고자 하는 그러한 힘을 구성해서 북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뭐냐? 사이비한 거예요. 가짜 이스라엘, 가짜인 겁니다. 북쪽의 그 여로보암 왕이 자기가 가짜면서도 진짜인 척하면서 제단에다 하나님께 제사를 하는 행세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는 남쪽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북쪽에서 “우리도 여호와 있어! 우리도 여호와 종교 있단 말이야!” 하는 그 제단에 초대받지 않은 하나님의 선지자, 말씀을 등장시킨 거지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제단이 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왜 제단이 깨져야 하고 또 난데없이 요시야왕이라는 자가 등장하도록 말씀을 전했느냐? 요시야왕은 300년 후에 태어날 남쪽 왕의 이름이에요. 직접 예언된 그 대목을 한번 읽어보면 여러분이 실감이 날 겁니다.

열왕기하 23장 15-19절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전에 이스라엘 열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무슨 말이냐? 요시야왕 때는 벧엘이 북쪽에 속하지 않고 남쪽에 속했단 말이죠. 남쪽에 속하니까 벧엘이라는 유명한 제단이 있던 그 장소에 선지자의 무덤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뼈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요시야왕의 점령지역이어서 그 묘실들을 파내니까 거기서 주목할 만한 두 시체가 나왔어요.

하나는 오늘 본문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뼈가 거기에 있고, 그리고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산당 제사장들의 뼈도 같이 있었던 거예요. 이게 몇 년 후라고요? 300년 후에 일어나는 겁니다. 300년 후에 일어날 그 일, 요시야라는 그 이름에 해당되는 그 왕이 이제 어떤 일을 하는 겁니다.

구별하는 일을 해요. 하나님 선지자의 묘실은 그냥 두고 우상 섬기던 벧엘의 산당, 그러니까 우상 섬기는 제사장들의 뼈를 추려서 그걸 제단에다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해요. 그렇게 명령한 것에 대한 열왕기상의 오늘 본문, 바로 300년 전에 예언된 것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그 제단이라는 것이 인간이 아는 300년 전과 300년 후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은 제단 거기에 함께 있는 거예요. 말씀하는 순간 그 말씀 안에 시간이 몇백 년이 흘러가든 거기 함께 들어있어서 기어이 성취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한 예가 바로 십자가죠. 사도 바울은 십자가 구경도 못 했어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십자가 현장에 사도 바울은 없었어요.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예수님과 양쪽에 있는 강도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주께서 십자가 달릴 그때 나는 죽고, 나는 이제 죽었으니 내 안에 사는 것은 십자가 달린 예수님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 십자가가 너희에게도 보이지 않느냐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이야기해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이 아는 시간과 공간 말고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 시간과 공간을 못 느껴? 느껴야 해. 그게 성령 받은 자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보통 일상생활이라는 것은 자기 형성에 온 에너지를 다 쏟아요. 되고 싶은 내가 되는 데에 자신이 평생의 땀과 노력을 다하고 수단을 부리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이 시공간 안에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멀어요. 하나님의 예언은 멀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국 갈 백성을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일상생활에 바빠서 멀리하던 그 말씀이 초대받지 않은 말씀으로 우리한테 침입해요. 하나님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우리가 나 살리기 위해 애쓰는 현재 눈코 앞에 있는 시간과 공간에 침입하는 겁니다.

침입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위에 덮어버려요. “지금 너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일상생활에 빠져 말씀을 멀리하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되는 것을 훼손하고 있고, 네가 방해하고 있다.”라고 말씀이, 예언이 우리를 매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변명을 늘어놓죠. 우리가 일상생활 하다 보니까 자기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말씀을 보면 말씀의 중심부가 따로 있어요. 우리는 말씀의 중심부는 생각 안 하고 나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일의 중심부가 자기 권력에 도취 되어서 ‘에너지만 잘 모으면 나는 왕이다.’ 하고 까부는 여로보암에게 침범을 한 거예요, 침입한 거예요.

그래서 여로보암은요, “너 누구야!” 하고 손 내밀 게 아니고 곱게 “예, 난 나만 생각했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여로보암이 그럴 위인이 아니잖아요. “저 인간 뭐야? 당장 쫓아라!” 했는데 자기가 그만 ‘얼음땡’이 된 거예요. 물체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요시야왕에 의해서 두 분류로 구분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산 사람과 그리고 사이비, 자기 권력 중심으로 산 사람 사이를 구분했어요. 인간의 시공간으로는 이미 죽었으니까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끝난 게 끝난 게 아니고, 그 죽은 사람의 재를 들고나와서 둘로 구분 짓는 그것이 또 예언 안에 이미 삽입되어 있고 예언이 그걸 성취할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 죽어서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무덤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래서 다 소환시켜요. “이 세상 살면서 네가 중심이었어, 아니면 하나님의 예언이, 말씀이 중심이었어?” 이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너는 영생의 나라에, 그리고 너는 지옥 불에나 들어가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아셔야 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에요. 우리는 일상에 빠져 있지만.

자 그러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냈고 또 예언대로 제단에 요시야를 보내서 결국 이렇게 둘로 분류시키는 작업을 어떤 식으로 하는가? 인간에게 스스로 회개하고 반성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한테 반해서 푹 빠져 있는 거예요. ‘나를 훼손시켜 주시고 나를 파괴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말할 사람은 없어요.

그럼 그걸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했듯이 인간은 안정화를 원하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네 중심의 안정화 말고 하나님의 중심부 중심의 안정화를 하나님께서 들고 우리에게 침입해서 중심부 바꿔치기를 시도하시는’ 겁니다.

시편 122편 4-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 판단(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다윗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부였어요. 그 중심부가 유지될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 다윗의 중심부라는 것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문익점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밀수꾼인데 그 사람이 중국에서 목화를 밀수할 때 어디에 숨겨서 밀수했느냐 하면 붓 대롱 안에 목화씨를 넣어 온 거예요. 아마 나중에 그걸 중국 사람이 알고 고려 사람 붓 대롱은 다 압수했을 겁니다. 대롱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거예요.

다윗 언약이라는 것은 일종의 대롱인데 다른 말로 하면 터널이거든요. 터널 안에 목화씨를 담듯이 하나님의 시온은 뭐냐? 하늘과 땅에 유일하게 통하는 하나의 대롱이에요, 감춰진 붓 대롱. 그 안에 하나님의 중심부가, 하나님의 언약, 예언이 감춰져 있습니다. 감춰진 게 진짜예요.

그런데 지금 북쪽 여로보암은 숨어있는 이 대롱, 하나님의 하늘과 땅이 소통이 가능하고 그 생명과 연결되는 것 말고 가짜로 제단을 쌓고 가짜로 제사를 드리고 있단 말이죠. 그 힘을 모아놓고 안정화를 원하니까 인간들의 안정화에서 다윗 언약의 안정화로 바꿔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갔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안정화는 어떻게 되느냐? 깨어져야 하죠. 깨지는 그 방법은 물리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지구에 원소가 118가지인데 그중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원소가 철(Fe)이에요. 철(Fe)은 결합에너지가 가장 안정되어 있습니다.

철(Fe)보다 질량이 작은 원소들은 어떻게든 결합해서 안정화를 얻으려고 하고, 결합해서 안정화를 얻으면 거기서 질량이 커지고 에너지가 방출돼요. 예를 들어 수소(H) 같은 경우는 융합되면서, 그다음에 철보다 질량이 큰 것은 분열되면서 안정화를 원해요.

질량이 증가하고 에너지는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빠져나온 게 방사능이에요. 우라늄(U) 같은 경우에. 우라늄의 경우 235, 238 두 가지가 있는데 원자핵에 양성자의 수가 92개고 중성자 수가 146개, 이렇게 됩니다. 그 우라늄의 원자핵은 양자와 중성자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어요.

그게 강력인데 우주에서 이것보다 강한 것은 없어요. 전자기력보다 100배나 더 세요. 전자기는 중력보다 훨씬 더 세고요. 양자와 중성자로 강하게 결합해 있는 여기에 중성자를 하나 딱 주게 되면 핵이 요동을 쳐요. 들뜸 상태가 되고 분열이 되면 중성자들이 빠져나옵니다. 중성자들이 빠져나오면서 안정화를 원하는 거예요.

여로보암이 북쪽에 제단을 세우는데 성전은 남쪽 유다에 있잖아요. 진짜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북쪽에 살면서도 진짜 정통 성전이 남쪽 유다에, 예루살렘에 있으니까 그리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빠져나오니까 여로보암은 “갈 테면 가라. 우리는 제사장 없는 줄 아느냐?” 해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중성자로 세워서 안정화를 꾀하는 겁니다. “우리 편 안 될 사람은 갈 테면 가.” 그래서 다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게 인간 세계에서는 정치판이죠.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죠. 인간 나라에서도 이렇게 마음에 맞는, 곧 힘이 엮인 상태에서 자체적인 안정화를 꾀하는 겁니다. 편당이 있는 건 할 수 없다는 거예요. 편당이 있을 때 자기들이 보다 순수해지니까요.

우라늄에서 빠져나온 중성자가 속도를 가지고 다른 우라늄을 쳐버리면 또 분열되면서 에너지가 나오죠. 원래 질량에서 빠져나온 질량이 에너지 될 때 ‘E=mc²’(에너지=질량×광속의 제곱) 이게 원자폭탄 되는 거예요. 중성자가 중성자를 치는 연쇄 작용을 하게 되면 빠져나온 그 에너지에 의해서 원자 폭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농축이라고 하는 것은 우라늄 235가 자연 현상에서 0.7%밖에 안 되는데 이걸 4-5%로 농축시키고 농축시킨 것을 펠릿(Pellet)이라고 하고 펠릿을 세라믹에 담아서 봉으로 만들어 봉을 연결한 것을 ‘원자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이 자연 세계가 안정화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만물이 똑같고,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남쪽에 있는 유다, 다윗 언약에 속한 그 말씀이 북쪽의 인간 위주의 그 시간, 그 공간에 가짜면서도 진짜라고 우기는 그 시대의 권력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침입해서 쳐버리는 거예요.

쳐버리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가 뭔데 우리 권력의 안정화를 훼방 놓느냐? 저놈 잡아라!’ 하고 팔을 내밀었는데 그 팔을 다시 거둘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예언의 말씀이 오는 그 순간에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날아가 버리고 말씀이 말씀 자체적으로 유지하는 하늘나라의 시간과 공간이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은혜받았다, 선물 받았다, 또는 성령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긁어모은 돈, 내가 긁어모은 명성이나 명예와 자존심, 위신, 체면 이것 가지고 내 남은 인생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식으로 살아왔다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에게 침입해서 “넌 네 중심이야. 그건 중심일 수가 없어. 진짜 중심은 하나님의 약속이야.”라고 들어오게 되면 “제가 제 중심으로 살았던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의 예언자로 바뀌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죄인일 경우에만 ‘이거 못 합니다. 저거 못 합니다. 나 저거 안 합니다.’ 이게 아니라 “주의 말씀이 말씀대로 된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왜? 그게 새로운 나의 안정화이기 때문에. 옛날 내가 나를 추스르고 내가 나를 살리는 그 안정화 말고, 말씀이 중심이 된, 그 목화씨, 하나님의 생명에 근거한 새로운 내가 된다면 우리는 말씀의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느 시대든 자기 역할을 다할 수가 있는 거예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뭐든지 하면서도 고맙고 감사함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뭘 해도 이것은 내가 한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의 시공간이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난 인간도 아니고 하나의 제단이고 하나의 물체라도 좋습니다. 시켜만 주세요.”

시켜만 주이소, 할 것도 없어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늘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짜로, 사이비죠, 그걸 동위원소라 하는데 가짜,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 이만큼 복 주세요.’ 이것은 백 프로 가짜입니다, 사이비입니다.

그런데 내 중심이 아니고 ‘주를 위해서 나라는 인생이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고마움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사람이죠. 이제 아시겠죠?

롬 828, 이제 아시겠지요? 로마서 8장 28절에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없어요. 그러나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요.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내가 내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그 생활이 아니라 ‘중심은 따로 있습니다’라고 고마워하는 그 사랑받은 자는, 곧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들이 이 시공간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경우에 있더라도…, 우연히 봤는데 맛있는 찹쌀 모치가 있더라. ‘사고 싶다.’ 이것도 주의 일이거든요. 어떤 일을 당해도 그건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합력하여 주신 주의 일이니까 항상 감사만 터져 나오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중심인데 우리는 남들처럼 각자 자기가 중심인 줄 알았습니다. 여로보암이 그 팔을 도로 거둬들이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책임질 수 없는 일,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살았던 인생,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