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12:27-33 / 제사장 없애기 본문
제사장 없애기
이근호
2025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2:27-33
(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12:32)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내가 있음’은 그냥 가만히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있음’으로 발달합니다. ‘네가 온전하면’ 할수록 ‘지독한 자기 동정’은 강화됩니다. 덩달아 내가 나에게 협박하는 정도로 심해집니다. 이게 바로 ‘자기 처분권 행사’입니다. 세상 사는 것이 힘든 이유는, 자신이 자기를 협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인과는 달리 특이한 삶을 보여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지정받은 신분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은 ‘죽음’을 다루는 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도 죽음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제물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늘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발휘하려는 ‘자기 처분권’도 같이 날아가버리게 됩니다. 인간들의 ‘자기 처분권’의 발휘는, ‘내 것은 내 소유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연한 사실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보편적 민족과 나라가 바로 ‘이방민족’입니다.
이방민족들의 특징은 자신들에 대해 하등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도 못하고 문제점도 없다고 여깁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은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 문제점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 일반 백성들의 종교생활에 편의를 도모하는 정책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구별되는 점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두고서 상대하시는 소위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아예 하나님과 전혀 관계도 모르는 이방민족은 그냥 개같은 짐승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지면서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상대가 되는 사람이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그 인간됨으로 ‘하나님을 파괴’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남쪽 유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쪽 유다나라에서는 끝까지 긍휼과 죄사함을 행사할 메시야가 등장과 관련있다는 점에서 차이납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파괴’하는 이유는 이미 백성들 사이에 우상숭배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이나 아주 여호와 하나님 백성임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니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들과 이견이 없어야 나라에 대해 왕으로서 ‘자기 처분권’을 호응 속에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의 제안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형상”이다고 하면서 송아지 형상으로 제단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단과 벧엘에 이 두 송아지 제단을 설치하는 것은 오늘날 백두산과 한라산에 각기 제단을 세워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반 백성들이 자신에 대한 ‘인생 처분권’에 전혀 방해받지 않아서 불만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사장 존재’를 굳이 없애려는 것과 백성이나 왕들의 자기 처분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은 제사장은 유월절 사건의 반복입니다. 제사장은 송아지 형상으로 여호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제물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시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이란 무의미의 극치입니다. 즉 인간은 ‘있음’은 유월절 양 앞에서 무의미 형상입니다. 이사야 40: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형상으로서 자신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식물에 있어 열매나 꽃은 외부로 보이는 영광처럼 여기지만 그 모든 힘은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바탕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모든 인간다움과 의미있어 보이는 형광은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일은 ‘자기 처분권’을 발휘해서 계속 온전함의 강도를 높이는 겁니다. 즉 날마다 하나님 집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에 보람과 보상과 기쁨을 갖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계속 향상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은 ‘네가 있나 제사장이 있나’를 묻습니다. 내가 있으면 나의 일이 되고 제사장이 있으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인간이 출생하고 성장하고 자기 삶에 충실한 것은 실은 다 주의 일, 곧 제사장의 일, 곧 희생제물의 죽음의 들추기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쪼개시고 시간을 반드로 쪼개서 마주하게 하십니다. ‘반새대칭성’입입니다.
그러면 ½+½은 온전한 1이 될 것 같지만 그 틈, 간격, 간극을 통한 새로운 범위의 세계를 출현합니다. 이 세계가 곧 ‘제사장의 세계’입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세계의 의미를 죽음으로 덮어버립니다. 이미 출애굽부터 이 제사장의 나라를 목표로 잡혀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
이 목표에 대해서 과연 예수님이 제사장 되어 신약에 성취시켰습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또한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자기 차가 없다면 차에 대한 모든 것으로 걱정될 리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걱정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자기 것이라고 있다고 여기니 죽을 때까지 걱정을 따라 다니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제사장 삶으로 사심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제사장의 그림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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