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율법의 지배(룻기 2:20) / 250515 본문
수요설교(250514)요약 열왕기상 11장 26-33절(솔로몬 속의 타자) - 녹취:김혜근
수요일 설교 요약, 그 때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역시 본문이죠, 여로보암의 등장. 여로보암은 자기가 미래를 예시(豫示)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그런데 누가 오느냐? 선지자가 옵니다. 선지자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어떤 행동도 안했으면, 여로보암은 그냥 착실하게 자기 맡은 업무가 자기 팔자다 생각하고 감사하고, 감내했을 거예요.
괜히 바람을 넣었어요. 괜히...가만있으면 되는데 선지자가 와서 “당신은 나중에 나라가 둘로 쪼개질 때 당신이 많은 부분을 가져가고, 저 솔로몬은 조금 가져가게 될 거” 라니까 갑자기 뭔가 바람이 확 들어가는 거예요. “야, 이거 대선에 나서도 되겠다. 요번에 대선에 한 번 나가볼까?” 이런 생각이 훅 들어오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예언의 효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지니고 있는 그 바탕이 되는 다윗언약을 솔로몬이 잘 하는 것으로 내는 것은 축복만, 축복 면만 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뭐가 가려져요? 언약대로 하자면 저주받는다는 면이 가려지잖아요. 그러면 저주가 뭐냐? 솔로몬이 나쁘게 되는 게 저주라 하잖아요? 그러면 저주의 폭이 좁아져요. 다 안 밝혀진다고요.
저주라 하는 것은 뭐냐? 복 받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적이에요. 그런데 저주는 뭐냐? 내가 누구에게 의존적일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노력하고 얻은 것을 내 소유로 삼을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여로보암의 생각이 사람들 앞에서는 정상적인 거예요. 그걸 제가 뭐라 했냐 하면 ‘밥값’이라고 했어요.
내가 열심히 해서 밥벌이하는 거, 이게 정상이에요. 이 세상은 밥벌이로 충족되고, 그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반역하고 난 뒤에 다시 솔로몬이 ‘나의 자리가 뭐냐?’ 하니까, 밥값 말고 ‘자릿값’이 있었어요. 그 자릿값이 다윗언약이었습니다.
다윗언약을 받은 때가 어떤 때냐? 다윗언약을 받고 난 뒤에 다윗은 바로 허물, ‘내가 태어날 때부터 허물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고장 났다.’ 이 말이죠. ‘나는 오류 있는 존재다.’ 그걸 자기는 몰랐죠. 그런데 죄 짓고 난 뒤에 보니까, 내가 그 때 죄 지은 게 아니고, 품고 있던 죄가 언젠가는 죄로 나타나야 될 것을 그때 나타난 걸로 된 거예요.
그러면 이미 내가 허물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났죠. 그러면 이 허물은 내 선에서, 이미 허물 받은 자가 자기 허물을 처리하지 못하죠. 이게 바로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그런데 그 딜레마에 빠진 동시에 감사해요. 왜냐하면, 딜레마에 빠졌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내 손으로 내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나로부터의 결별이고, 자유가 되는 겁니다.
아아, 이것이 바로 뭐냐? 그 자리가 왕의 자리에요. 하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왕으로 오실 때,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을 만한 모습이 아니고,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으로 왔어요. 망가진 모습으로... 그래서 어느 누구도 저 분이 잘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허물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증명해내는 겁니다.
허물을 다른 말로 하면, 불법이 되죠. 이 불법이 로마서 4장에서는 ‘불법을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해서 사도바울은 불법 있고, 가리움을 받는 이 두 가지의 사건을 이사야 53장에서 속죄 제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인데, 그 양의 특징이 입을 다물었어요. 말을 안 해요. 말이라는 것은 남을 설득하려고 하는 건데, 아무도 설득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 되어 있구요,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내 허물 때문에 그 분이 돌아가셨다.’라고 이야기할 자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이미 허물의 가리움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재정립해요.
“나는 모든 게 허물이었는데, 어느 정도로 허물이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허물이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나중에 고백한 것처럼 ‘나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맞죠. 맞는 거예요.
헛된 것을 다윗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헛된 것을 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다 끝나고 난 뒤에, 일이 다 마감되고 난 뒤에 “아, 이게 주의 일이구나. 나의 일이 아니고”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게 뭐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 지고 난 뒤에 날갯짓 한다는 거. 사람들에겐 끝난 이야기인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진리가 날갯짓해요, 진리가. 그 이야기입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로보암이 가만히 있는데 괜히 아히야가 와서 바람을 넣으니까 그때부터 여로보암이 “그렇지, 내가 여기서 남의 종노릇만 할 입장이 못 되지.”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어제 제가 영화 대사를 이야기 했잖아요. ‘개는 기르지만, 종은 부리는 거’라고.
그게 한국영화 <전.란>(2024년)에서 선조 시대에 ‘정여립의 난’이라 해서 머슴이 난을 일으켜서 나라를 구하게 해놓고, 나라에서는 그 머슴을 다 죽여 버리죠. 양반들의 공을 빼앗아갔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뭡니까? 성경은 정여립이 잘했단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종이 된다는 것은 바로, 종이 되신 예수님의 일에, 그 분이 가신 길에, 이미 그 노선에 들어섰다는 이야기예요, 우리도. 종의 특징은 부림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부림을 받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알아야 돼요.
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약에서는 ‘옳다, 그르다’로 이야기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령과 악령’으로 이야기하죠. 자, 악령의 노림수는 뭐냐? 사람을 다룬다? 사람은 다룰 필요 없어요. 왜? 자기 종이니까. 약령이 노리는 것은 뭐냐? 왕을 제거하는 거예요, 왕. 다윗언약에 의하면 모든 것이 왕으로부터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왕을 막아버리려는 거예요.
왕이 없으면 우리는 자유자가 되고, 독자적인, 절대적인 신이 되니까 고개 숙일 필요 없고, 누구의 종이 될 필요 없잖아요. 이걸 누가 하느냐? 나중에 여로보암이 해요. 여로보암이 그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저 왕가와 이제는 더 이상 엮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다수가 가짜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이 솔로몬을 통해서 폭로되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흘러가는 겁니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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