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6:4-8 / 징계 사유 본문
징계 사유
이근호
2025년 4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6:4-8
(36: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36:5) 예레미야가 바룩을 명하여 가로되 나는 감금을 당한지라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은즉
(36:6) 너는 들어가서 나의 구전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36:7)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듯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와 분이 크니라
(36:8)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무릇 선지자 예레미야의 자기에게 명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니라
예레미야나 바룩이나 둘 다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말씀을 담았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굳이 아무 것도 아닌 미약한 존재를 채용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천지만물을 동원해서 처벌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사람에게 따로 특별히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늘 나라에 초대한 자기 백성 건지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하시면서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주시는 겁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경우도, 스스로 도저히 이 일을 감당 못하겠다고 사표내려는 것이 한 두 경우가 아닙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왜 예레미야가 이런 수모를 당하느냐하면 누가 봐도 예레미야는 그냥 인간이면서도 감히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굴복할 의사가 있지만 같은 인간에게 굴복하기는 죽어도 싫은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이 인간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난을 받는 사례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와 결심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감금 상태에 놓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 전하는 자가 감금 당했다고 해서 말씀마저 감금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비서 바룩을 통해서 두루마리 책을 쓰게 하여 금식일에 성전 문에서 발표 하도록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룩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말씀은 어떻게 전달되는 겁니까? 구약 못지 않는 딜레마에 놓이게 됩니다. 성도 개인의 딜레마가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가 난처한 입장에 놓입니다. 따라서 사회를 예전처럼 질서잡기 위해 당연히 말씀 전하는 자를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 전하는 자가 자신의 말하기를 철회하게 되면 신상에 해가 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신약에서 자기 마음대로 철회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씀에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분명 사람이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또 한가지는 그 말씀이 그냥 지식으로 자기 머리에 담아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이 그 사람 전부에 휘젖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본인도 본인을 말릴 수 없다면 주변 사람이나 공동체도 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또한 이런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눈치코치도 없이 말씀을 전했더니만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사울 바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처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그곳 공동체에서 징계 당하는 징계 사유가 뭐지요?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과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적이 있는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오셨다면 그 하나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지요? 하늘로 올라갔다고요? 그렇다면 깜끔하게 마무리 된 거잖아요.
하나님이 오셨지만 사람들이 죽여 없앴기에 더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활동 못하게 된 것이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로 가신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십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이나 많은 성도들이 징계를 받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23에 보면, 사도 바울이 징계당한 이유를 스스로 밝힙니다.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 즉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의 성격이 인간들을 라이벌로 여기시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1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즉 사람들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당시 사람들에게 고소당해 죽으신 것처럼 그런 대우 받을 징계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바로 이점을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목숨 바칠 곳을 비로소 찾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자신이 자랑거리를 말하는 것에 삶의 활력소를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타인에게 보여줄 자랑거리를 제작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6:33의 말씀처럼, 성도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이제는 오직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주님의 의가 못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서 인간들의 자랑거리로 전환되지 않는 차별화된 해석을 말씀하십니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는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아서 주셨지만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도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금식에 대해서는, 주님에 대한 고마움이 내부에서 치고 올라와서 금식하는 것과 자신의 신앙 과시를 위해 행하는 금식을 구분해주십니다. 따라서 이런 말씀이 내부에 작용하는 자는 사도 바울처럼 그 어느 시대든 징계 대상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주님 햇빛과 공기와 물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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