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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94강/495강) 내일 일 / 칼 / 250318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94강/495강) 내일 일 / 칼 / 250318

정인순 2025. 3. 19. 16:06

 

49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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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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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하림

494강-YouTube강의(내일 일 잠언 27:1)20250318-이 근호 목사


제494강, ‘내일 일’. 내일이라는 것은 저절로 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내일’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만들어냅니다. 그 이유는, 옆 사람의 시간과 내 시간이 달라요. 왜 다르냐 하면, 인간이 하는 일이 그 사람 고유의 자기만의 시간 계열을 연장시키고 내용을 채우는 거예요. 그 내용을 채우면 자기가 채운 그 시간의 계열은 그건 자기의 기억이 되고요. 그 기억이 자기 자아의 구성요소가 돼요.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내 기억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건 남의 시간이지, 나의 시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어때요? 굉장히 이기주의가 돼요. 이기적이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고.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 되는 겁니다.

같은 학교에서 시험 칠 때, 어떤 애들은 “아, 시간이 왜 이리 안 가지?” 이렇게 하는데 어떤 쪽은 “아, 이번 수학 시험은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다.” 그만큼 내가 집중했다 이 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시간이라는 그러한 형식을 가지고 꾸준히 나의 과거죠, 남의 과거가 아니고, 나의 과거를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아나가면 그게 내 인생이 되고 내 자아가 되고 내 시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시간이라고 할 때는 너무나 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우리의 시간을 공격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시간이라는 게.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시간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 시간은 이 땅에 와서 만들어내시는데, 그게 바로 출생이고 성장이고 그리고 복음 전파고 십자가 죽으심이고 부활이고 승천이고. 그건 예수님 고유의 자기 시간이에요. 예수님의 자기 기억이고 자기 행한 일의 업적이고 실적이고 성과란 말이죠.

그럼 구원받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네가 쌓아놓은 네 시간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건 하나님 앞에 아무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나름대로는 심각하면서 내 인생 이렇게 살았다고 꾸준히 만들어놓은 자기 시간인 겁니다.

그 시간을 인간이 곱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내일은, 제발 하나님이여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내일이 오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럴 때 우리가 잠언서 27장 1절을 봐야 될 그러한 맥락에 와 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서론을 이렇게 길게 했는데, 서론을 길게 하지 않고 이 말씀을 딱 대하면 이렇게 잘못되게 이해해요. ‘그래,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 일에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나는 그냥 기다리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잘못되게 이 본문을 보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미 자기 시간대는 따로 딱 확보해서 ‘손대지 마세요.’ 해놓고 내일 일이 일어나게 되면 내일 일어나는 일을 지금껏 과거부터 쌓아놓은 내 일에다가 덧붙일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덧붙여서 ‘내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이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다. 왜? 하나님이 일으킨 일을 내가 생각한 과거에다가 덧붙였으니까 이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내 인생 아니냐?’ 이런 고집을 피우는 겁니다.

그러나 잠언서 27장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다는 이 말은 시간 교체에 관한 이야기에요. 네가 애써서 일구어낸 너의 과거, 곧 자아죠, 기억 속에 있는 자아, 자기 추억, 그 추억이 한 방에 훅 간다는 겁니다. 뭐가? 내일 일어나는 일로.

‘여태껏 내가 애지중지하면서 일궈온 내 인생 내가 못 버리지. 그동안 얼마나 귀하게 애써서 쌓아놓은 탑인데 어떻게 내가 이걸 부정을 해? 안돼. 안돼.’ 하지만 내일 일이, 내 힘으로는 무너지지 않는 그것을, 그 바벨탑을 오늘까지 일어난 일을 무너뜨리게 된다는 겁니다.

망했다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교체했다. ‘내 인생과 주님의 인생이 나란히 노선을 가지고 달리는데, 주님 보시기에 내 인생은 추잡하고 더럽고 부정적인 요소의 인생이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보통 만화 같은 데 보면, 자전거 대회할 때 착한 주인공은 열심히 자전거타고 가는데 꼭 나쁜 악당이 자전거 대회 나가서 자기가 1등 하려고, 막 결승점에 도달할 때 자기 열심히 달리면 될 것을 괜히 옆에 가는 자전거를 발로 차서 노선 이탈시켜가지고 길 밖으로 처박히게 하는 그런 대목이 있죠. 그럼 그거 보고 독자들은 “아휴, 안타깝다. 아이고, 저 악당을 처리해야 돼. 어떻게 이 착한 사람이 2등이 될 수 있어?” 이렇게 하잖아요.

주님께서 그 악당 역할을 잘하십니다. “이게 어디 자기 이름으로 천국에 골인하려고. 내가 분명히 했어, 안 했어?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했어, 안 했어?” 왜 지금껏 페달을 밟았느냔 말이죠. 내 이름은 어떻고 내가 이렇게 수고했고 이렇게 애썼고. 왜 자기 이름의 경주를 여태껏 하고 있느냐 말이죠. 발로 차이는 것이 천만다행이죠. 발로 차이는 것이.

전도서 8장 7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이건 더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이 대목도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배제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 8장 7절을 보면 ‘그래, 기다리자. 주께서 아마 좋은 것을 주실 거야. 우리는 뭐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주께서 해주시면 거기다 더 보태면 되겠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고요.

또 학교에서 배운 교훈 같은 거 있잖아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발소 안 가고 자기가 혼자서 머리 한번 깎아보죠. 제대로 머리가 됩니까? 남이 깎아줘야 돼요. 남이 깎아줘야 된다고요. 내가 깎는 나는 나라는 나의 인식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이발 누가 해주든가요? 본인이 거울보고 깎았어요? 아니죠.

바로 타인의 시간이 우리를 마중 나옵니다. 우리에게 마중 나오죠. 마치 바나나 먹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아이스크림 먹을 때 바깥에서 안쪽으로 먹잖아요. 바나나를 바깥에서 안쪽으로 먹죠. 밑에서 쳐올리면서 먹는 사람 없죠. 그걸 깎는다고 해요, 깎는다.

옷 파는데 “8만원. 이건 8만원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럼 옷가게 주인이 자기가 깎아줍니까? 저쪽에서 “에이, 뭐 옷이 가짜 아닌가?” 이래가지고 “7만 5천원 주세요.” 이렇게 하죠.

주의 나라에 갈 사람은 흥정을 주님이 흥정하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왜? 천국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어요. 나는 나에 대해서 몰두했지, 막상 내가 들어가야 될 천국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따라서 주께서 장래가 마중 나오면서 우리의 시간을 아이스크림 먹듯이 바나나 먹듯이 깎아주죠.

마지막까지 깎여야 돼요. 깎이면 남는 것은, 아이스크림 다 녹아 버렸어요. 컵으로 생긴 과자 그것만 덜렁 있어요. 그것을 그릇이라고 합니다. 자비가 실렸는지, 주님의 진노가 실렸는지. 이렇게 주께서 담아주는 그대로 우리는 주님의 쓰임 받아서 자비가 실리면, 깎아주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하고 사랑이라고 느끼면 자비가 듬뿍 담긴 채 주님의 것으로만 담겨서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친절하신 주님, 오늘도 내일 일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깎아주십니다. “7만 5천원.”, “6만원.”, 나중에는 “그냥 내놔. 그냥 다 내놔.” 그것이 얼마나 성도의 기쁨입니까.


495강-YouTube강의(칼 창세기 27:40)20250318-이 근호 목사


제495강, ‘칼’. 보통 사람이 요리사나 또는 미용사나 사람이 칼을 들고 있죠. 그런데 칼이 사람을 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칼이 사람을 들게 하는 사람이 창세기 16장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 누가 나오느냐 하면 이삭보다 열세 살 형이 되어있는 사람,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버지가 같아요. 아브람으로 같습니다. 같은데 그건 이스마엘 생각이고, 이삭의 경우는 아브람이 아버지는 맞아요. 그러나 자기 출생에 더 근원에 접근해보면, 자기 아버지는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낳았다.’를 하지 못하도록 아들이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를 낳는 그러한 현상을 하나님이 지상에서 발생시켰어요.

다윗의 후손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죠? 다윗의 조상은 예수님이고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그럼 그 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될 구조냐?

이 땅에서는 다 육이니까, 육의 구조에서는 아버지가 없으면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언약 구조에서는 후손이 없으면 아버지가 없어요. ‘아들이 아버지를 낳았다’는 말은 못하지만, ‘그 아들이 되기 위해서 준비된 아버지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초점이, 아버지 있고 그다음에 아버지의 아들, 또 아들이 아버지 되고 그다음 자식 낳고 이렇게 쭉 내려오는 거예요. 내려오는 그것을 쳐 올라가게 만들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내려오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똑같다’가 돼요. 내려오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똑같다.

아담에서부터 예수님까지 내려왔을 때 예수님은 아담의 표상이다. 나를 위해서 아담이 있었다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아담이 있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족보도 그렇고 누가복음의 족보가 내려옴, 올라감 방향이 반대죠.

예수님 족보를 소개하면서 두 가지 족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먼저고 자식은 나중이거든요. 그러면 그 자식은 자기의 소속과 존재 자리가 아버지에게 종속돼요. ‘아버지 없으면 내가 없다’가 돼요. 아버지 없으면 내가 없다,가 된다고요. 그걸 지금 하나님께서 엎으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칼을 쥐고 사용한다. 칼은 도구니까. 그런데 창세기 16장 12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이스마엘의 경우도 그렇고요. 창세기 27장 40절, 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는 거예요.

에서가,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그러면 보통은 뭘 믿어야 되느냐? 아버지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계의 기본인데 뭐가 빠졌어요? 아버지가 자기한테 저주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자식은 믿을 아버지가 없어요. 믿을 아버지가 없고 자기 자신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러한 삶의 환경을 누가 제공했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에서한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고 할 때, 에서에게 있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고 칼이니까 자기 힘으로 이제 버티고 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에게는? 반대로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죠.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지옥 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는 거고,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 가기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간으로 간다. 하나님의 복이 만들어져있는 복의 하나의 결론으로 만들어지는 대상이 바로 축복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더 확대해봅시다. 이사야 보겠습니다. 이사야 보면 이방나라가 있는데 10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이 말은 ‘앗수르가 몽둥이 들고 이스라엘을 팬다.’ 그렇게 보통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앗수르 자체를 몽둥이로 삼아서 하나님의 야구 방망이로 앗수르를 삼아서 하나님이 자기 이스라엘을 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여기 도끼 예를 들어서 나와요, 이사야에. 그 점에 대해서 앗수르나 바벨론이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이사야 10장 15절에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연관성 없이 관계없이 스스로 자기가 쌓아놓은 자기 힘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든 보편적인 인간들을 앗수르나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주를 받은 자,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어요. 아까 에서도 그렇고 이스마엘도 또한 그렇죠. 복에서 잘렸으니까. “나가! 우리 집에서 나가. 약속의 집에서 나가!” 밀어냈단 말이죠.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했겠어요? 제자들 본성은 어땠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51-5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많이 들어봤던 말씀인데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사실 이 말씀은 이렇게 해야 돼요. 망하는 사람이 의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고, 자기가 들고 있는 도구로서의 칼. 자기는 주인이 되고 칼은 도구가 되는 거예요. 시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이방민족은 말을 의지하고 마차를 의지하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뿐이다.(시 20:7) 전쟁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름뿐이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보여주는 그러한 매개체로 하나의 작품으로 살아가셔야 돼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식으로.

내가 지키는 무기들을 집안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뭐 올림픽 금메달 딴다든지 이런 거 있잖아요. 남 앞에 힘이 될 만한 것들, 그걸 자랑하면 안돼요. 그건 마치 몽둥이가 주인을 드는 것처럼, 도끼가 자기 주인을 들려고 하는 것처럼 그것은 망하는 사람들이 하는 모습이죠.

주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께서 사용하면 사용하는 대로 주의 손에 들린 하나의 도구가 되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자신의 판단은 완전히 제로가 되어야 돼요. 아이큐가 영(0)이 될지언정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개시점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