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88강/489강) 창년 / 공부 / 241119 본문
녹취:이하림
488강-YouTube강의(청년 잠언 20:29)20241119-이 근호 목사
제488강, ‘청년’. 어린 아이들은 청년의 때를 지나가게 되어 있고, 연세가 좀 드신 분은 청년의 때를 지나왔어요. 나이 육십 되어서도 ‘청년이다’ 하는 것은 일방적 주장이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보죠. “당신은 중년입니다. 곧 늙은이 됩니다.” 그럴 때 청년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아직도 내 생각은 팔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성경에서는 인생을 어린아이, 그리고 청년, 노년 대체로 세 등분으로 나눕니다. 나누어서 한쪽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먹을수록 줄어들게 되어 있고 한쪽은 늘어난다고 그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무엇이 줄어들고 무엇이 늘어나는가?
어릴 때부터 젊은 사람 될 때까지 그들이 인생을 사는 것은 그들의 몸에서 뿜어 나올 수 있는 힘을 믿고 살아가요. 자기가 갖고 있는 발휘할 수 있는 힘이라면 자기 모든 꿈과 희망을 달성할 수 있는 밑천이 된다고 그렇게 장담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힘으로 내가 갖고 있는 목표를 내가 달성하고야 말리라.’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힘을 믿는 겁니다.
잠언서 20장 29절에 보면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젊은 사람이 내세울 것은 힘뿐이고, 이런 뜻이고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자, 늙은이도 젊을 때가 있었을 거 아니겠습니까. 젊은 때를 안 거치고 늙은이 되는 방법은 없죠.
그럼 그 사람이 젊었을 때에 ‘아휴, 나 백발 빨리 되고 싶어. 머리 허옇게 새고 싶어. 허옇게 샌 게 멋있어 보일 거 같아.’ 그걸 목표로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지 않아요. 오히려 새카만 머리가 자랑스럽고 때로는 ‘내가 나이 들어도 난 이 머리 갈 거야, 새카만 머리로. 죽을 때까지 새카만 머리로 갈 거야.’라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는, 오기죠, 그런 오기도 품어보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잠언서에 보면 ‘젊은 사람은 힘을 갖고 있고 늙은 사람은 백발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젊은 사람의 영화는 그 힘이요”. 다시 말해서 젊은 사람들이 ‘나 여기 있어. 잘난 나가 여기 있단 말이야.’라고 외칠 때 그렇게 주장하는 그 바탕에는 힘자랑하는 게 들어있다는 겁니다.
힘이 뭘까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밑에서 저절로 솟구쳐 올라오는 게 힘입니다. 생각 안 해도. 그걸 요즘 식으로 하면 ‘충동’ 또는 ‘본능’ 그렇게 생각합니다. 충동, 본능은 연세 많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걸 함부로 사회에서 터트려선 안 되는 것인데, 젊은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모르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왜?’ 그럼 이게 힘자랑이 되는 거예요.
힘자랑의 특징, 젊은 사람의 특징은 항상 노골적으로 자기 위주라는 겁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이게 아주 노골적이고 그게 뭐가 잘못되었냐는 식으로 반문하죠.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젊은 사람은 ‘힘의 뭉치’, ‘힘의 덩어리’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내가 곧 힘이고 나는 힘으로 만들어졌기에 나는 힘을 나의 영광으로 만들고 싶지, 이걸 숨기거나 양보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식으로 젊은 사람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사회에 나가게 됩니다. 그럼 사회에 나가면 그 힘 가지고 자기의 뜻을 이루어보겠다고 설쳐대는데 어디에 막히느냐 하면 백발에 막혀요.
백발이라 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도 한때 젊을 때는 너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나 많이 깨졌다. 나 많이 작살났다. 내 힘 믿고 설치다가 원수도 참 많이 만들고 착오도 많이 일으켰다.’ 사람은 힘으로 밀어붙여서 내 것 만드는 것을 용납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이제 나이 들면서 알게 됩니다.
나이 들면서 알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는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지혜란, 힘 믿고 까불다가 많이 깨진 그것이 지혜의 재료가 돼요. 힘의 특징은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다른 사람 앞에 그럴싸하게 잘나 보이느냐에 집중되어서 그것에 충동질되어서 마구 힘을 휘두르죠.
그런데 노인네들이 갖고 있다는 지혜, 이 지혜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태어나서 철딱서니 없이 젊은 시기를 보내다가 이제는 내가 알겠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게 백발의 면류관이에요. 잠언서 16장 31절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충동으로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자기밖에 모른 채 이리저리 설치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잘라내고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자빠지고 하는 그걸 통해서 공의로운 길을 이제는 나이 들면서 발견토록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두니까요.
따라서 청년은 자기 힘으로 했던 것의 산등성이, 그러니까 산의 제일 봉우리에 와있다고 보면 돼요. 청년은 산등성이에 와 있고 그다음부터는 힘 빼기하면서 그에 비례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다는 사실과 ‘내가 부족하고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르쳐준다. 내가 세상에서 내 존재를 확보할 생각할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나가서 하나라도 배울 생각을 해야 된다.’ 그걸 알면서 힘이 빠지고 이성과 지혜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시기가 서른 즈음에서 서서히 미끌어지죠. 몇 번 깨졌다 해서 단박에 인간되는 건 아니고 갈수록 점점 더 이 세상은 나 좋으라고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내가 이 땅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것도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우리는 남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전에는 청년 때의 검은 머리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허연 백발을 아름다움으로 봤잖아요.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완성이 아름다움이에요. 머리 색깔이 백발이 되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나는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이 마음가짐. 이 마음가짐이 노인네들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489강-YouTube강의(공부 전도서 12:12)20241119-이 근호 목사
제489강, ‘공부’. 나이 칠십이 된 어떤 사람이 고백하기를, 자기가 결혼하기 전 젊었을 때 자기는 꿈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자기가 은행장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젊을 때 철딱서니가 없어서 나쁜 친구하고 어울리면서 부모 말 안 듣고 기분에 빠져서 기분에 휩싸여서 ‘공부 뭐 나중에 하지. 지금은 즐길 때야.’해서 뭐 원 없이 신나게 즐겼다는 거예요.
이 고백을 누가 하느냐 하면 한적한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어떤 농사꾼, 나이 칠십 된 농사꾼이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은행장, 은행 지점장 이야기하는 거겠죠, 은행 지점장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 자기는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산골에서 농사짓는 것은 내 꿈이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그럼 내 꿈과 ‘꿈이 아니었다’라는 현실 사이에 뭐가 누락되었는가? ‘공부해야 될 시기에 공부 안했다’가 되어버려요. 공부할 시기에 공부를 안 해버리면 그 당시엔 ‘나중에 공부해야지.’ 이렇게 되지만 이 공부라는 게 뭐냐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함축해서 내가 실용성 있게 써먹기 위해서 그 정보를 내 머리에 지식으로 담는 게 공부에요.
따라서 공부라 하는 것은 옛날 그때 일어난 것을 공부하는 게 아니고, 공부라 하는 것은 오늘도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들을 매일같이 그 정보를 흡수해서 나한테 실용적이라고 느낀 것을 써먹을 수 있는 그 바탕이 바로 공부잖아요. 실용성 있는 지식 또는 기술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데 공부할 시기에 공부는 내일, 한 달 뒤, 일 년 뒤, 십년 뒤에 그때 공부할 기초가 돼요. 기초가 쌓일 시간에 기초가 안 쌓여버렸으니까 그다음부터는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짜증나는 거예요.
그러면 공부를 못할 경우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공부 잘하는 사람을 찾질 않아요. 자신이 무식하다는 수치가 드러날까 싶어서 누구를 찾아가고 누구하고 대화하고 누구하고 놀고 누구하고 전화하고 누구하고 어울리느냐? 자기와 말이 통하고 아니면 자기보다 공부를 더 안 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는 그 현장을 더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공부 안했다. 내 친구도 공부 안했다. 자, 공부는 안 해도 이 육신은 밥 내놔라, 옷 내놔라, 편안한 잠자리 내놔라, 남들처럼 고급차 타고 다닐란다 하죠. 공부 안한다고 해서 이 욕심이 싹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죠. 남 갖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하고 갖고 싶고, 남 풍성하면 나도 풍성하고 싶고.
욕심은 있는데 현실적으로 공부를 안 해서 남들로부터 돈값 할 만한 남들이 원하는 그런 고급 정보를 제시할 건덕지가 나한테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갖고 싶으면 갖고 싶고 남이 살고 싶은 대로 나도 살고 싶은데. 그럴싸해 보이니까. 공부하나 안 하나 욕망은 똑같으니까요. 더 깨끗한 환경, 더 말끔한 환경, 더 풍성하고 편리하고 모든 것이 빨리빨리 잘 돌아가는 그런 환경에 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모아야 그게 되겠어요.
그래서 공부를 못했다. 그다음에 뭐하느냐? 공부 못한 사람을 구하는 직장이 있을 거예요. 몸으로 때우는 직장. 그런데 거기에는 나처럼 공부 안한 사람들의 쪽수가 너무 많이 모여들어요. 많이 모여드니까 자기 쪽에서 많이 양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남보다 돈 적게 줘도 괜찮아요. 일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살던지, 아니면 지름길로 사기를 치든지 아니면 도박을 하든지.
사기와 도박은 다른 겁니다. 사기는 남을 속이는 것이고 도박은 운에 맡기는 게 도박이에요. 도박과 사기 둘 다 공부했냐 안 했냐가 상관없는 방식이거든요. 공부와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내가 원하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처럼 느껴지는 게 사기와 도박입니다.
사기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교도소에서 죄수 되어서 범죄자가 되죠. 단순히 범죄 해서 감옥 가는 게 문제가 아니죠. 전과자가 되는 거예요. 사회에서 전과자 안 받아주죠. 점점 더 질이 떨어지는 직종으로 쓸려갈 수밖에 없죠.
그다음에 도박은 사기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사기는 내가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게 사기잖아요. 도박은 덫이에요. 남이 쳐놓은 것에 자기가 빠져서 내 의지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는데, 도박은 들어갔다 하면 못 빠져나와요. 마약 같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자기가 너무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에 그 바보짓을 만회하고서 나오고 싶은 더 추가적인 바보생각이 또 들기 때문에 그래요. 나오면 되는데 패배하기 싫거든요.
자, 제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하고 농땡이 부린 사람 이야기를 방금 했죠. 그러면 성경은 그 사람 이야기를 아예 제쳐두고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결과가 똑같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안 가르쳐요. 공부한 만큼 행복하고 공부한 것만큼 인생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상 자체가 덫이에요. 세상 자체가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도서 12장 12절,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자, 일의 결국이 어떤 것이냐는 것은 13절, 14절에 나옵니다. 12절까지 솔로몬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너 공부 왜 열심히 했어? 왜 죽자고 열심히 한 거야?” “공부가 재밌어서 합니다.” “그게 다가 아닐 걸? 너 공부한 목적은 은근히 노리고 기대한 게 있어서잖아. 장래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내가 출세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이야기하고 그럼 많은 다른 사람의 돈이 내 쪽으로 내 지갑에 들어오고. 나는 그럼 부자 됩니다.” 그럼 제가 묻고 싶어요. “부자 돼서 뭐할 건데?” “부자 되면 좋지요.” 그런데 성경은 네 욕망, 공부할 때에 처음 공부하겠다는 그 의도가 부자가 되도 그게 스톱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부자 돼서 얼추 이 정도로 만족하면 좋겠는데 그건 인간이 아무리 공부해도 본인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공부하면서도 결코 공부로서 내 만족이나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악마가 만든 이 세상의 덫에 인간이 빠진 결과입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은 코앞에 있는 거 자기의 뜻대로 안된다고 분통내면서 하루하루 하나님 저주하며 살아가고 있고, 공부한 사람은 공부해서 막상 남보다 높은 자리에 부유한 자리에 왔는데 ‘이거 아닌데. 이게 이게 아닌데. 이게 인생 행복이 아닌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뭐냐?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면서 내가 공부 잘한 것도 소용없고 공부 못한 것은 더더구나 소용없고. 잘하나 못하나 인간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예수님의 판정 앞에. 인간은 공부한 것이 주님의 판정에 전혀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부하고 싶거든 공부하면서 내가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공부하라 할 수 없어요. 한다고 머리에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공부 못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별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분은 바로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바로 그 마음 자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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