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482강 / 483강) 오류발생 / 기초 / 241008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82강 / 483강) 오류발생 / 기초 / 241008

정인순 2024. 10. 9. 09:26

482강 음성
동영상
483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82강-YouTube강의(오류 발생 요나 3:8)20241008-이 근호 목사


제482강, ‘오류 발생’. 인간은 오류에 대해서 ‘오류가 발생했다’, ‘이것은 진실이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 것도 아니고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 본인들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오류’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 인생은 뭐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그냥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겁니다. 참 편하죠? 생긴 대로 사는 거예요. ‘저를 남자로 만든 건 실수입니다.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이런 생각은 하면 안돼요. ‘저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야지, 제가 쪼들리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저한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류라는 것, 잘못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규정해주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야 돼요. 인간은 오류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분명히 방금 이야기했죠. 오류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이 본문이 좀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뭐든지 완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또는 하나님을 상대로 욕되게 하는 그런 피조물이 생겨나도록 하나님이 왜 방치했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그러한 자들이 등장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생각을 인간들 수준으로서는 이해하기가 곤란하죠. ‘하나님은 조금도 하자가 없는데 어떻게 만들다보니 이상한 악인을 만들었구나. 이건 하나님에게 오류 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악인들을 만듦으로써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빛이 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 풍성해지고 악인을 통해서 그 본질을 도리어 드러내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악마, 악인, 죄인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숨어있는 본질이 그들이 있음으로써 활짝 다 공개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오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거짓 맹세가 거짓 맹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을 욕되게 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욕먹는 경우를 하나님 스스로 자처한 셈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했다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뽑아내버리든지 못 따먹도록 강제조치를 해야 되는데, 뭐 얼른 따먹을 수 있도록 항상 공개된, 노출된 상태에서 그냥 말씀만 “따먹지 말라.” 이렇게 해놓으니까 인간들에게 따먹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셈이 되죠, 결과적으로.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이 오류가 발생되도록 분위기를 몰아가놓고 거기서 인간에게는 ‘제가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 오류입니다.’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 입장에서는 둘 사이가 잘 연결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바르기를 정말 원한다면, 오류 요소를 다 사전에 빼줘야 되고 그런 가능성을 다 없애야 되는데, 가능성은 널널하게 해놓고 “너 왜 범죄했느냐?”하고 닦달내시면 하나님 쪽에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절로 막 나죠. 이 처벌은 나 혼자 감당하기 억울하다, 이런 식으로.

그 비밀,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요나서에 보면 나옵니다. 요나 4장 1절에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노를 발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왜 기도했냐 하면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기가 고국에 있을 때에 자기는 분명히 ‘큰 성 니느웨 사람들한테 가서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으니까 너는 그 악독을 전하고 심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라’라는 언질을 받아서 전했는데, 그럴 때 그 언질을 받은 요나는 악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처벌하고 징벌하고 심판하겠다, 저주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는 이해했단 말이죠.

그래서 요나가 큰 성 니느웨에 가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전했어요. 전할 때 전한 내용이 뭐냐? ‘니느웨 성은 무너진다.’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 그렇게 전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전할 때에 요나 입장에서는 자기는 충실하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 뜻과 자기가 전한 뜻이 일치된다고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문제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6절부터 보면 망한다는 소문이 들어왔을 때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 뿐 아니고 3장 7절에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돌이켜서 재앙을 안 내렸어요, 10절에. 요나가 거기에 대해서 화를 벌컥 냈단 말이죠. 요나가 오류를 범한 거예요. 요나가.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뭐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면 오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바르게 하면 오류가 없는 겁니까?

아니에요. 뭐가 오류가 없는 것이냐 하면 바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진노가 혹시 돌이킬 줄을 어떻게 알겠느냐?”하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 우리는 죄를 너무나 넉넉하게 지었기 때문에 이제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밖에 없다, 하고 납작 엎드리는 것, 그게 바로 오류가 없는 거예요.

지식으로 성경을 뭐 어떻게 다 외우고 신학적으로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고 앞뒤 논리가 맞고 이게 오류가 없는 게 아니고, 진노의 대상인 것을 알고 엎드리는 게 오류가 없는 거예요. ‘난 뭐 많이 아니까 죄인은 아니잖아.’ 이게 바로 오류라고요, 이게. 이게 하나님 뜻이 틀어지는 거예요.

요나가 오류를 발생시켰습니다. 하나님, 고국에 있을 때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전하나 안 전하나 니느웨는 망하게 되어 있기에 굳이 내가 니느웨 가서 전할 필요 뭐 있느냐 해서 다시스로 도망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고 요나는 하나님과 자기와 잘 통하기 때문에 자기는 오류 없이 그동안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안일함. 이 안일함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 속에서 매일 올라옵니다. “하나님, 이 정도 복음 아니까 내 생각에는 오류가 없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매 사건을 통해서 “엎드려. 납작 엎드려! 뭐 이거는 네가 하고 저거는 하나님이 하시고? 네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이 진노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만이 오류가 없는 겁니다.


483강-YouTube강의(기초 예레미야애가 3:26)20241008-이 근호 목사


제483강, ‘기초’. 보통 기초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거기서 여러 가지 기초가 등장해요. 흑암이 기초가 되어서 빛이 나오고, 빛이 기초가 되어 그다음에 하늘의 궁창이 나오고, 그 뒤에 궁창이 기초가 돼서 땅이 나오고, 땅이 기초가 되면 셋째 날에 식물이 나오고,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이 나오고 그래서 시간이 나오고요. 다섯 째 날에는 물고기 나오죠. 여섯 째 날은 땅의 짐승과 인간이 나옵니다.

모든 기초는 창조에 대한 기초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 그 기초가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우리가 창조세계에서 알 수 없었던 다른 기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 동안의 그 기초는 환경 만드시고 그곳에 식물, 해와 달, 하늘의 새, 5일째는 물속의 고기, 6일째는 짐승, 인간. 기초가 있고 기초를 채우는 식으로 창대케 한다 해서 복을 선포하게 되면 창대케 돼요.

그런데 그 기초가 전부냐 이 말이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의 창조가 기초가 아니고 신약 골로새서, 에베소서에 보면 기초가 누구냐? 예수님이 기초에요. 예수님이. 왜냐하면 구약은 전체가 창조될 때 기초를 언급했잖아요. 그런데 신약은 창세가 아니라 창세 전의 기초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 전에.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의 과학은 구약적이에요.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의 기초, 그것부터 출발하려 해요. 그 기초 중에 또 하나가 인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인간의 학문, 그걸 기초학문이라 하는데 기초철학, 성경에서는 초보에 해당되는 게 뭐냐 하면 있는 것부터 출발하는 게 초보에 해당돼요. 있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는 생각 못하고 ‘있으니까 우리 하여튼 연구해보자’ 이게 초보에요. 뭐 초보해놓고는 노벨상은 왜 그리 많이 가져가는지… 기껏 초보인데. 인간부터 출발하는 게 초보에요.

그럼 신약 성경에 와서 기초는 뭐냐?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언약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학문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지혜를 다 안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에베소서 1장에서.

신약에 있는 오늘날 기초가 뭐냐? 예수님이 기초입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 이것이 뭐 그냥 구약, 그다음부터는 신약 이렇게 딱 잘라서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게 아니고, 구약 속에서 신약과 연결되는 노선이 또 깔려있어요. 깔려있다는 말은 구약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난 것은 하나님 은혜다. 따라서 우리가 할 것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식으로 열심히 노동하는 거다. 열심히 일하면 잘 먹고 잘살게 해주신다.’ 이게 구약적 안목이죠.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기초가 만약에 제대로 된 기초가 아니고 기초의 전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잘 살았다 볼 수 없죠. 더 깊은 기초의 바닥을 두고 진짜 잘 사는지 못 사는지 봐야 돼요.

전도서 끝에 보면 인간은 늙으면서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구약 전도서만 해도 기초가 지상의 자연세계가 기초가 아니고 말씀이 기초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구약에서도. 인간의 모든 것은 풀 같지만 영원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말씀이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는 너 자신을 가지고 왜 그렇게 애정을 두고 집착을 하고 마치 나 없어지면 세상도 같이 없어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평생 시간을 거기다 다 소비하고 결국 소비한 것은 허비가 되어 버렸죠. 망하려고 작정한 것 같아요. 내가 기초가 될 수 없는데 24시간 신경 쓰는 것은 자기의 자존감과 자기의 위신과 자기의 소유, 재산 증식, 건강. 특히 연세 많은 분은 건강에 신경을 얼마나 많이 씁니까. 그거 다 우리 자신이잖아요.

해결점이 뭐냐? ‘어떻게 건강합니까?’ ‘어떻게 부자 됩니까?’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도대체 내가 모르는 더 깊은 기초가 뭡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죠. 기초를 더 깊이 박아야죠. 기초를. 다니엘 세 친구는 불속에 들어가서도 네 번째 분, 예수님께 기초를 두고 불속에서 다니엘 세 친구는 살아났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구약에서 신약 넘어오면서 서서히 그 기초에 대해 구약에서 소개하게 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로 예레미야애가 3장 1절부터 6절까지 보게 되면,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떤 분인데 고생이 굉장히 깊죠. 고생이 많이 심하죠. 그렇게 이 분은 얻어맞아가면서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실컷 얻어맞아가면서도 뭐를 기다립니까? 여호와의 구원은 내가 얻어맞고 고생한다고 취소된 건 아니다. 심지어 3장 12절에 보면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꼭 욥 같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겨냥해서 활시위를 자꾸 당기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의도적으로 고생하라고 해서 고생 당하시는 그분. 예레미야애가, 사실은 예레미야에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고, 그 예레미야 안에 있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게 주어졌다고 둘 다 보셔야 돼요. 선지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 영이 있기 때문에 둘 다 해당됩니다.

이게 바로 그동안 인간들이 미처 몰랐던 기초가 되는 거예요. 구약은 자연세계가 기초지만 땅이 기초지만 신약은 예수님이 기초다, 끝. 이러면 안 되고, 어떤 예수? 어떤 메시야? ‘메시야가 기초다. 창세 전에 메시야하고 하나님이 계셨다.’ 그럼 그게 기초 아는 겁니까? 어떤 메시야?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준 기초가 뭐냐?

방금 예레미야애가를 통해서 보여줬어요, 기초에 대해. 죄 없는 분이 애꿎게 매를 맞고 있는 게 이게 기초가 되는 거예요. 구원의 기초. 죄도 없어요. 죄도 없는데 하나님의 고난과 저주가 자기한테 흠뻑 지금 찾아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삐쳐가지고 갔겠는데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에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인내라 합니다(히12:1-13). 인내. 내가 매 맞고 어려운 이것조차 하나님의 약속 안에 포함이 된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기초에요. 따라서 오늘날 성도가 주님과 기초를 함께한다면 이 땅에 사는 게 고생이에요.

인간은 사는 게 고생이거든요. 젊을 때는 남이 괴롭혔지만 나이 들면 내 몸이 나를 괴롭히잖아요. 안 아프고 싶은데 아프잖아요. 잠잠히 기다리세요. 그 기초. 주님이 그것보다 더 심한 고난을 받았다는, 주의 고난과 합세하는 그게 바로 기초가 된다면 주님의 구원이 주님께 온 것처럼 동일하게 그 사람에게 올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기초가 아니고 주님의 기초.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