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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78강,479강) 놀이문화, 불평등 / 240716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78강,479강) 놀이문화, 불평등 / 240716

정인순 2024. 7. 17. 10:30

478강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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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강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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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하림

478-2강-YouTube강의(놀이문화-2 이사야 11:6)20240903-이 근호 목사


제478강, ‘놀이문화’. 요즘 들어서 취미 가운데 현대인들의 여가 활동 중 하나가 교회 다니기입니다. 교회에 재미를 찾아서 왔다가 떠날 때도 재미없다 하고 그냥 가버리죠. 그만큼 자유롭다 이 말이죠.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것을 교회 와서도 확인하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법보다 내가 정한 법이 우세하다’, 그걸 교회 다니면서 점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 나왔다가 안 나온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하나님 약 올리기 심보가 있어요. ‘나 교회 안 나올 테니까 때리려면 때려봐. 나 십일조 안낼 테니까 때리려면 때려봐.’ 이런 식으로. 그리고 아무 일 없잖아요. 거 봐. 하나님 없잖아. 하나님 없으니까 내가 교회 다녀도 대충 다닌다든지 건성건성 다녀도 ‘그 정도 해도 나는 성의를 표하는 거다’ 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새삼 점검되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하는 사실이에요.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교회 와서 활동하면서 그걸 확인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목사님들이 하시는 설교를 의도적으로 위반해보는 거예요. ‘아무 일 없잖아, 봐. 아무 일 없어. 괜히 하는 소리지. 실용성 없어. 역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 속의 신의 음성 또는 내 양심의 소리 듣고 바르게 살면 돼.’ 그렇게 되죠.

교회에서 그런 사람을 붙들기 위해서 ‘그냥 쉬었다 가세요’ 하는 정도의 장치들, 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재밌습니다. 우리 교회에 노인회도 있고 청년회도 있는데 뭐 솔로 그런 데 가지 마시고 교회 아가씨들 많으니까 마음 맞으면 좋은 아가씨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놔요.

노는 것도 교회 와서 놀아라. 특히 주일학교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교회에서 놀다 보면 믿음 있어가지고 나중에 커서 어른 되면 교회 나올 생각이 있겠지. 적어도 모태 신앙이니까. 태어나면서 유아세례 받았으니까. 그런 식의 제도를 성당에서 꾸준히 해왔고 교회도 그것을 본받아서 그렇게 해왔습니다.

오늘 제목이 ‘놀이문화’인데 인간은 왜 자유롭게 놀고 싶냐?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만들어진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덴동산 출신이에요. 노는 출신이. 에덴동산에서 만끽했던 그 의식이 무의식으로 계속 후손들에게 남겨지겠죠. 육신이 그 의식을 따른다 이 말이죠.

그럼 에덴동산에서 잘 놀면 되는데 이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놀기는 놀되 지가 대장질하면서 놀게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놀기는 놀되 내가 대장질하고 놀기까지는 놀이가 재미가 없어요. 자기가 최고가 되는 놀이, 그것은 뭐 사회에서 ‘출세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출세했다, 승진했다, 성공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최고 있으면 나와. 최고, 나하고 붙자. 나는 네 자리 뺏을 거야.’ 이러한 의욕이 그 지루한 인생에 더 추진력을 가하는 에너지 동기가 되겠죠. 그게 바로 놀이문화에요.

그냥 놀면 되는데 최고까지 되겠다는 것은 내가 신처럼 되겠다는 그러한 무의식이 인간을 가만 놔두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가 시달려서 자기 야망에 본인이 피곤해요. 피곤에 절어가지고 집에 오면서도 그래도 죽지 않는 것이 몸은 피곤한데 야망, 욕망은 도무지 피곤할 줄을 몰라요. 인간의 야망이라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미끼로 던집니다. 하나님 말씀, 예언에. 그 미끼가 이사야 11장에 나옵니다. 그 미끼를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6절에서 9절까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스트레스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스트레스가 없는 세계. 경쟁이 없죠. 그 자체로 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족하기 때문에 목표나 목적이라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죠. 그냥 누리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주인공이 누구냐? 젖 먹는 아이고 어린 아이에요.

어린 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냥 가정에서 허락한 대로 노는데 도사, 노는데 스물 네 시간을… 스물 네 시간까지 아니다, 노는데 한 여덟 시간 보내고 나머지는 잠자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이 어린 아이 아닙니까. 아무도 자기를 해코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말씀을 미끼로 던졌다는 말은, 이 세상은 여기 이사야에서 예언한 천국과는 꼭 반대라는 뜻입니다. 온 천지가 행함이고 온 천지가 나를 노리고 나를 잡아먹으려 하니까 거기에 대해 방어를 해야 되죠. 잡아먹히지 않더라도 힘들어요, 벌써. 방어한다고 힘들어요.

처음에 에덴동산에서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었거든요. 맞죠? 그런데 여기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이 세계도 죽음이라는 게 없는 정경을 보여줍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해결책이 나와야 되겠죠. 어떻게? 어떻게 하면 여기 미끼처럼 던진 아름다운 낙원, 이런 세계에 살 수 있는가?

이사야 29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신나게 한번 놀았으면 좋겠는데 영원토록 신나게 놀 수 있는, 제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놀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욕망과 야심, 야망이 모조리 다 박살나야 됩니다. 그게 이사야 29장 4절에 나옵니다.

3절부터 읽어보면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그러니까 나보다 더 센 게 나타나서 비굴해지거나 어처구니없이 일방적으로 때리는 대로 맞아야 될 그러한 황당한 처지에 가게 됩니다. 우리는 야망이 있기 때문에 뭐든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강제로 그걸 못하게 되면서 찌질하게 되는 거예요. 진짜 죽기보다 더 마이너스가 찌질한 거잖아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이 짓은 못한다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일반 사회생활이 그렇잖아요. 참, 내가 죽는 게 낫지, 하면서도 헤헤거리고 다 하잖아요.

4절에 보면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티끌, 낮다, 땅에 긴다, 이거 뱀에게 준 저주입니다. 뱀의 말을 들으니 뱀이 받은 저주를 네가 공히 같이 누리게 되는 거야. 그 저주에 내려가야 그다음에 뭐가 보이는가? 낙원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아, 지금 네가 좀 살만하니까 뭐 설쳐대는데 너보다 센 게 와서 전쟁해서 너는 참혹하게 패배할 거야. 다시 말해서, 네가 나다운 걸 건질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들 거야. 높아질래야 높아질 건덕지가 없게 만들어서 땅에 발발 기는 거, 목소리도 큰소리 못 내서 마치 티끌에서 나는 목소리처럼 될 거야. 지렁이 같은 그러한 비굴함의 극치. 이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과 은혜가 내 노력함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실컷 놀 천국의 그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고 힘들지만 오히려 그것조차도 주의 일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479-2강-YouTube강의(불평등-2 마가복음 2:5)20240903-이 근호 목사


제479-2강, ‘불평등’. 불평등이라 하면 많이 기분 나쁘죠. 왜 사람을 차별하느냐. 이게 바로 불평등이잖아요. 그래서 현대 사회는 왕정제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을 단두대에 모가지 날리고 생긴 국가가 이 근대국가에요. 민주주의라고 하죠.

민주주의의 특징은 절대적인 특정인에게 모든 정권, 권력을 주지 않는 사회, 그걸 민주주의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평등이죠. 프랑스 배경이기도 한 평등, 박애, 자유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그 평등사상을 이제는 인간 손으로 사람 손으로 정치적으로 제도 만들어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기치 아래 등장한 것이 오늘날 이 사회입니다.

그런데 평등합니까, 평등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까? 평등하려고 애를 쓰죠. 어떤 사람에게? 중간 이하의 평등치 못한 자들이 평등을 외칩니다. 그런데 중간 이상이 되면 평등을 용납하지 않아요. 네가 감히 나하고 맞먹으려고? 용서가 안 되죠.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평등이 되어버리면 삶의 재미가 없어요. 평등이 되면. 서열화 되어 있어야 되고 불평등 되어야 사람은 목표가 의미 있게 되는 겁니다.

자식보고 “너 이번에 성적 얼마야?” “참 평등했어요, 엄마.” “말해. 스무 명 중에 몇 등이야?” “10등 했어요.” 오~ 너 참 평등하게 했구나. 장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까? 학교에서 시험 칠 때 평등하려면, 쉬워요. 평균 100점. 모든 인간이 평균 100점을 하든지 모든 인간이 0점을 하든지 그러면 기분이 덜 나빠요. 올림픽 나와서 메달 하나도 못 딴 나라가 100개국 넘잖아요. 그러니까 그들끼리는 얼마나 평등합니까. “당신 나라 몇 개 땄는데?” “하나도 못 땄어.” “우리나라도 하나도 못 땄어.” 기분좋게 올림픽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과연 평등이냐, 불평등이냐? 세상에서는 평등을 외치지만, 현실적으로서는 불평등을 목표로 하면서 평등이라는 걸 미끼로 던지고, 될 사람들은 불평등의 여유를 누릴 사람들이 평등을 그런 식으로 외치면서 억눌러버리죠. 권력으로. 우리가 주는 이러한 혜택으로 입 다물고 가만있어. 봐라, 너희들 다 못 살지만 평등하게 내가 50만원씩 주잖아. 청년들 25만원씩 내가 주잖아. 그렇게 되죠.

그러면 성경에서는 평등일까요, 불평등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완벽하게 불평등이에요. 왜냐하면 지옥 갈 사람은 지옥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가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요한일서에 보면 나옵니다, 3장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악마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악마의 일은 뭐냐? 모든 게 평등하게 되는 거예요. 왜? 악마가 제안했으니까. 네가 신처럼 되니까.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게 아니에요. 독재도 이런 독재 없습니다. 독재도 오직 예수님만 주가 되고 나머지는 주가 안돼요. 주의 자리에 예수님만 있어요. 주의 자리에.

아까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해서 세상을 좋게 보질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주님을 밀어냈잖아요.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없는 세계에요. 지양한다는 그러한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되 특정하게 누가 주(主)가 되는 것은 허용하지 말자고 마음을 하나로 뭉친 것이 바로 세상이고 그것이 확장되면 지옥이고 그런 겁니다. 지옥 자체는 굉장히 평등해요. 다 같이 저주받으니까 그렇게 평등합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게 되면 세상에 그런 불평등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그와 같은 취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완벽한 불평등을 만들기 위해 오셨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모든 하시는 일이. 그러면 이 불평등에 대해서 예수님 하시는 일이 그런 예가 있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3절에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절에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이거 번호표 뽑은 평등입니까, 도발적인 불평등입니까? 이건 반칙이죠. 아니, 예수님께 병 고침 받으러 온 사람이 줄을 섰는데 자기가 왜 새치기를 합니까? 멀쩡한 지붕 다 뜯어가지고 손해배상 많이 나올 거예요. 지붕 뜯어서 예수님께 바로 내릴 때에, 그럼 기다리는 사람은 뭐가 돼요? 저런 불평등! 저런 불평등이! 저런 싸가지가 있나. 저런 불평등이…. 왜 새치기를 하냐 이 말이죠. 왜?

이건 뭘 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정말 정상적인 분이라면 이런 반칙성 행위에 대해서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지 않아야 예수님의 정의로움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겠죠. 지붕 뚫고 올 때, “이리 와. 이리 와. 저 뒤에 가서 서. 아니, 너희들 오늘 예매 끝났어. 내일 와.” 다른 사람 보란 듯이. “자, 봤죠? 이 예수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봤죠? 여러분들도 똑바로 보세요. 내가 이런 불평등을 제일 싫어하는 거 아시죠? 저리 가. 집에 가! 중풍병? 여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다 아파. 저리 가. 병원 지붕을 뚫어놨으니… 다 물어 내.”

그런데 이 불평등을 주님께서 오히려 조장해요. 주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의 불평등이 여기서 스톱되는 게 아니에요. 더 큰 불평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들은 병 고치러 온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 오기 전에 병 많이 고쳐놨어요. “아이고, 예수님, 고맙습니다. 아휴, 역시 예수님은 병 고치는 능력이 있군요. 동네방네 내가 소문내야지. 우리 예수님 짱! 병 고치는 데에 짱이다.” 전부다 병 고치는 데 대단한 분 오셨다고 내 친구, 친척 다 불러와야지, 하고 기쁨으로 감사를 늘어지게 하고 다 동네,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 지붕 뚫고 온 사람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현장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바로 서기관들이 있었어요. 서기관들이 있다는 말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예수님 아니라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병 고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공무원들이거든요, 과연 미신이 아니고 제대로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지 늘 감시하러 파견 받아 온 사람들이 서기관들이에요. 왜냐하면 바리새인, 사두개인 체제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그들의 하수인으로서 민중들, 백성들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서 경찰서 정보계에서 오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걸렸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 병 고치는 사람은 병까지 고쳐야 되는데 병 고치는 사람 중 어떤 사람도 죄 사함을 언급하지 않았거든요. 이것은 당장 사형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 고유권한이에요. 그건 건드리면 안돼요. 만약에 죄 사함을 해줘버리면 그 사람이 메시아가 돼요. 하나님이 된다고요. 성경에 보면 죄 사함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에요.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일반은 뭐냐? 그냥 열심히 기도해서 기도의 능력으로 병 고치는 그 정도 선에서 머물러야 돼요. 죄 사함은 기대하지도 않고요. 죄 사함 받으려고 온 사람도 없고요. 죄 사함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시기 때문에 그냥 병만 고쳐도 고맙습니다, 하고 갈 사람들이 여기 모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예수님이 아시고 이걸 뛰어넘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예상한 것을 뛰어넘어서 “네가 죄 사함 받았느니라.” 이렇게 해버렸어요. 중풍병자도 예수님이 누군지 못 알아봤어요. 죄 사함 받아야지, 이렇게 해서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죄 사함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사함이란 뭐냐? 일방적으로 주고 시작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주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죄 사함 받은 사람은 동네에 가서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겠어요? “좋겠다, 너는 죄 사함 받아서!”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말이죠. 오늘날 죄 사함 받은, 성령 받은 성도도 똑같은 대우 받습니다. “바르게나 살아. 교회 가서 말씀대로 살아. 죄 사함까지 거론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네 죄를 사해? 논리적으로 네가 하나 하나 따져서 순서 맞춰서 설명해봐!”

설명이 됩니까? 안되죠. “거봐. 설명 안 되잖아. 그러니까 주님 은혜로 잘 먹고 잘 살고 병 고치고 가정 화평하고 그 정도, 그 정도로 머물자. 착하게 살면 용서해주시겠지.” 이게 교회에서도 이 정도밖에 못할 지경이 되었어요.

진짜 여러분 죄 사함 받는다면 하늘을 날아서 하늘 구멍을 뚫을 정도로 ‘야호!’를 외칠 겁니다. 얼마나 이게 불평등입니까. 세상에 이런 기분 좋은 불평등,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