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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가랴 3:1-5 / 현실과 구원론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3:1-5 / 현실과 구원론

정인순 2023. 10. 5. 18:03

음성 동영상 Youtube

현실과 구원론 

 

이근호
2023년 9월 6일                      

 

본문 말씀: 스가랴 3:1-5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3: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자기 구원욕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의 소리를 듣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메시야의 구원입니다.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 대해서는 오직 휩쓸림의 대상일 뿐입니다. 노아 홍수가 그러합니다. 노아 훙수 때 사람 가려가면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사가 인정사정 없이 모든 애굽에 있는 가정의 장자는 다 죽여버렸습니다. 히브리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단지 집에서 키운 어린양이 대신 죽었을 뿐입니다. 각 사람의 인격과 장단점 같은 것은 일체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죽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는 지옥보내십니다. 지옥 보내시는 기준에 대해서 인간의 의견을 청중하거나 감안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이 십자가가 마지막 언약입니다. 다른 언약은 더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를 불로서 싸질러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을 생각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애초부터 인간 구원은 없으니까요? 창세기 3:22에서 인간으로부터 생명나무를 격리시키신 그 취지를 변경시킬 의향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은근히 자기 구원을 노릴 게 아닙니다.

무엇을 봐야하느냐 하며는 악마(사단)의 존재를 집어넣은 현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말고 ‘현실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단이 실제로 현실 요소로 들어가 있다는 말은 이 사단과 인간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도 현실을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악마를 닮았습니다.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었기에 모든 경우에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챙기려듭니다. 인간이 관심두는 현실관은 자신존재의 영원함입니다. 본인이 행한 일에 결실이 맺어지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의 움직임을 대립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립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주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려가며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특성이 악마의 심보가 이미 인간을 장악했기에 나오는 심보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가치를 주장합니다. 인간은 원래 더럽지 않고 깨끗한 존재인데 험한 세상을 살다보니 더러움이 묻혔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바로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은 깨끗한데서 더러움이 묻힌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더러우면 한 번도 깨끗해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나타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여러 나라 중에 한 나라가 아니라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 이스라엘 나라에게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나머지의 모든 나라들은 악마의 뜻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은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시내산 위에 부름을 받고 간 뒤로, 산 아래에서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조치가 출애굽기 32:27-28에 나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철저하게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구원론은 깨어지고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는 현실이 충분하게 이스라엘을 덮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인간의 의미성과 존재감을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불에서 꺼낸 나무’로 간주하십니다. 즉 많은 나라를 도외시하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불심판을 얻어맞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간 배후에 악마가 있고 그 악마로 사주받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뜻을 들추어내기 위해 여호수아를 세워둡니다. 악마는 주장합니다. 더러운 것은 그냥 지옥으로, 깨끗한 것은 천국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할 그 어떤 명분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악마의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악마의 뜻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동안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인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누가 자신에게 자신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손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말씀만 하시고 그 말씀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은 본인에게 맡겨달라는 식으로 인간들은 자기 구원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판단에는 배후에 있는 악마의 본성이 주도적으로 작용합니다. 자기 구원에 자기 기여성이 필히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건전하게 보였던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진 예수님의 참된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습니다. 모든 사람에 의해서 싫어버린 바 되고 흠모할 그 어떤 건덕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겼습니다. 이는 악마가 모든 인간에게 집어넣은 일관된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서 진짜 예수님은 인간 구원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구원을 위해 동원된 자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구원에 몰입하지 말고 악마와 결탁된 현실 자체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