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가랴 1:4-6 / 열조 본문
열조
이근호
2023년 7월 26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6
(1: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1: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열조라는 것은 언약과 직접적으로 관련있으면서 역사적 생성된 집단을 말합니다. 창세기 15:4-5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주신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 등장되는 후손의 계열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 열조들에게 지속적으로 후(後)-언약 조치가 계속 주어집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을 경우에는 확실하게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점을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렘 25:7-9)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겁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인생 경험과 체험을 준해서 판단하고 측정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44:17-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즉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을 그냥 흘러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신중하게 숙고하고 실천을 옮겨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 여신 섬기는 일을 철폐하고 난 뒤에 삶이 더 핍절하고 피폐해져 버린 겁니다. 즉 자기 삶이 불행하고 불편해진 겁니다. 전에 하늘의 여신 섬길 때는 살 맛이 났던 겁니다.
이는 곧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체험에 입각한 판단으로는 결코 자신의 악과 죄를 알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풍선 표면 위에 기어다니는 개미가 풍선 전체를 알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풍선 전체란 풍선 내부까지 다 아우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마치 이 세상을 개미 기어가는 것처럼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언급하시는 죄와 악은 세상 전부를 다 아시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봤자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세상에 대한 범주가 늘 편협하고 협소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신약의 복음에 대해서 대부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너무 나를 몰아 세우지는 마세요”라는 태도를 유지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내가 죄인이다’고 자백했으니 지금보다 더 나쁜 존재로 악화시키지는 말아 달라는 부탁 같은 것을 하나님에게 하게 마련입니다.
옛날 찬송가 211장 2절 가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없으신 주 예수를 구조로 믿었네” 여기서 과연 죄가 내용을 두고 말하는 걸까요? 강도짓 한 것을 죄라고 알았을까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까? 아닙니다. 강도는 자신의 강도짓 하나 아니하나 상관없이 태어나면서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유일하게 죄 없으신 분이라는 점과 자신이 대조되어야 ‘죄씻음’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강도짓 한 것을 가지고 죄라고 한다면 이는 여전히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이 강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6:15-17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오직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알려주셔야만 성립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언약 안에 들어온 인간에 대해서 언약이 발휘하는 주도권을 결코 인간에게 양도하신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자기 죄를 알까요? 하나님의 언약은 자기 사람들은 그들이 아는 과거말고, 그들이 전혀 몰랐던 과거로 뒤에서 끌어당겨버립니다. 그러다면 그들이 만나는 사실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시작되는 두 노선의 개시점입니다. 즉 언약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줄기차게 ‘분류작업’을 행하시는 겁니다.
분류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경우를 사용하십니다. 분류작업에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양과 염소, 알고 가라지를 구분짓는 기준이 중요합니다. 이 기준을 정립하는데 있어 개입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모집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기준점에 준해서 그들은 철저하게 망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망함을 통해서 인간의 세상 보는 범주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더는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 따로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류작업을 하신다면 성도는 철저히 망해야 마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분류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천국은 기준이란 예수님의 희생뿐입니다. 따라서 더는 자신을 실패 인생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극렬하게 반발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의 열조가 분류작업의 기준으로 미흡했는가를 알고 자신이 죄인됨을 도리어 즐기고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더는 자신의 가치를 찾지 말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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