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봉사의 삶 230101 본문
봉사의 삶 230101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우리 아기의 첫 성경 이야기 오늘로 끝납니다. 드디어 끝납니다. 마음 같으면 처음부터 다 하고 싶어. 처음부터 빨리 다 하고 싶은데 마지막이 뭐로 끝나느냐, 성경에.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라고 끝내요. 여기 제목이 아주 적절해요. 여기에 다시 오는, 다시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뜻이죠. 다시. 예수님은 늘 다시 늘 반복해서 같이 시작하시는 분, 오신다. 인간들은 다시는 당신같이 눈에 띄게 하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근데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들 생각을 의식해서 이야기해요. 너희 나 밀어냈지? 그렇다면 내가 다시 갈게. 이리 된 거예요.
그리고 이런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꼴보기 싫어 싫어했던 이유가 있어요. 인간 세상 인간들이 ‘당신 같은 사람은 다시 안 와도 돼.’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어요. 인간 속에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내가 살고 내가 누구로부터 종이 된다든지 누구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인생 나는 싫다는 겁니다.
원래 악마가 원래 용감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악마가 왜 용감하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벌써 당부를 했어요. 이걸 마귀도 다 뱀도 그걸 듣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어요. 뻔히 알고 뻔해요. 뻔히 알고 있는데 일부러 따먹으라고 한 거예요. 그 악마의 용감함이 오늘날 인간 속에 용감함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용감하게 거부해요. 당당하고 얼굴 쳐들고 왜 따 먹으면 어떤데 선악과 심은 사람이 나쁘지 사람이 아니지, 그 존재가 나쁘지 이런 식이에요. 대단히 당당해요. 내가 안 믿겠다는데 그건 터무니없지. 안 믿었다고 지옥 보내? 그거는 말도 안 되지. 잘하는 사람은 천국 보내줘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의 당당함 그걸 내세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은 그런 아예 불신자들 말고 어디를 주목해야 되는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당당함이 그대로 유지돼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누구냐?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하늘로 올라가니까 올라갈 때 천사들이 그랬거든요. 다시 오신다고. 할 때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자들은 누구 생각하냐 하면 자기의 신상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의 인생을 생각하고 내가 얼마나 잘 풀릴까? 잘 풀릴 거야. 이제 잘 풀릴까 그것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날 놔두고 가시면 안 되지요. 저 우리 어쩌라고? 저 어쩌라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서요. 우리를 지켜준다면서요. 이래 그냥 가기 있기, 없기?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그러니까 제자들로서는 자기가 평생에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그 결정적 프로세스, 프로세스가 작업이 업적이 완전히 하루아침에 날아갈 판이 되었어요. 이 제자들의 그 모습,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되고 겪어야 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계시로서 그들을 미리 보여준 거예요. 주님 믿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야 돼요. 군에 가서 한번 찍혀 봐요. 전혀 주님이 안 도와주지요. 발등 아주 심하게 찍혀봐야 돼요. 발등 찍히고 주님에 대해서 섭섭한 감정을 가질 정도까지 지금까지 나가야 돼요. 주님하고 좋은 관계 유지하기 위해서 했는데 이렇게 제자들은 헤어질 그때 얼마나 섭섭한 마음이었겠어요.
이렇게 헤어지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은 헤어질 때부터 시작이 된다니. 헤어지면서 사랑이냐 아니냐가 그때 판가름 나는 거예요. 일단은 붙어 있을 때는 사랑인 줄 알았죠. 떨어져 있을 때 내가 사랑, 내가 누굴 사랑했다는 것이 사랑했느냐 안 했느냐가 비로소 등장하는 겁니다. 갈라서기 위한 거예요. 이게 어려운 말로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주께 나는 길 인간 쪽에서 천국 가는 길 없습니다. 이걸 제자들이 없어도 혹시 있겠지 뭐, 한쪽 문 닫기면 창문 열어주시겠지. 자꾸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러한 인간적인 생각을 다 거덜 내는 거예요. 다 걷어서 다 거덜 내는 거예요. 믿음은 주님이 직접 와서 우리에게 입에다가 마음속에 담아야 되지 우리가 믿는 행위가 믿음을 유발하고 발생시키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행하면 이 역사가 바뀐다, 그게 바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이에요. 이게 유물론적 역사관. 하나 배우세요. 양적인 축적이 되면 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뭔가 학을 천 번을 학을 접으면 진짜 학이 된다. 전영록이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이 사연을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은 받은 게 없을 때는 내놓을 게 열성 밖에 없어. 열성. 열심 열성. 이거 이 오해, 이 오해 안 없어지면 누구도 구원 못 받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한번 된통 실패를 겪어봐야 돼요. 이 세상은 열심히 하면 칭찬 받고 열심히 하면 성적 오르고 열심히 하면 좋은 취직하고 열심히 하면 결혼은 곤란하다, 이거는 열심히 솔로 프로에 나가도 열심히 해도 안 돼. 서로 서로 이용하기 바빴지 이거 안 돼. 하여튼 사랑 이런 문제는 사랑 믿음 소망 이거는 선물이기 때문에 열심과 관계없어요.
그러면 뭘 알아야 되는가? 열심히 해도 안 되는데 왜 생겼습니까, 라는 그게 기쁨이고 감사해야 돼요. 다시 오신다 하기 전에 먼저 주시는 것이 뭐냐,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뭘 주셨는가? 성령을 주셨거든요.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그게 파리 잡는 식물에서 나오는 혓바닥 긴 그 안에서 혓바닥처럼 나오는 게 있잖아요. 빨리 싹 가가지고 지 풀잎에 붙어 있는 파리 딱 낚아채고 쏙 집어넣는, 일종의 낚시 같은 거. 쏙 나와서 잡아서 다시 잡아들이는 그런 기능, 성령이 왔다가 아니라 낚아챈다는 기능이에요. 왔다가 아니라 딱 똘똘 말아서 예수님 속으로 다시 집어넣는 거예요. 고래 속으로. 다시 집에 들어가듯이. 고래 속에 한번 들어가 본 적 있어요? 고래 속에, 그것도 입체로 들어가 본 적 있어요. 입체로. 아바타 투 보세요. 그 고래 속에다가 들어가 입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깜깜한데 막 반짝반짝 빛나고 이런 게 있어요.
주님께 성령에 휘감기면 주님의 세계 속에 들어가요. 세계 속에 들어가면 반복이 돼요. 주께서 가셨던 그 길을 우리 환경을 조성해서 똑같이 반복합니다. 그 길이 뭐냐? 성령 받은 제자들의 길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먼저 오시기 전에 성령부터 먼저 주시고 그리고 나중에 때가 되면 주와 함께 합하게 돼요. 그래서 재림할 때 합한 사람도 있지만 재림하기 전에 먼저 육신의 목숨이 다 되어서 육신의 기계가 다 고장이 나서 죽고 죽을 때 함께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소원이 뭐냐? 어서 이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하는 그것이라 했어요. 그런데 지금 자기의 육신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에게 도와주라고 봉사하라고, 봉사하라고 떠나지 말라고 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제 그것이 오늘날 여러분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왜 열심히 공부해야 되고 힘들게 공부해야 되고 왜 어렵게 공부해야 되고 왜 그냥 그 베짱이처럼 노는데 하지 말고 왜 그 일을 하게 하는가? 돈 벌기 위해서? 아닙니다.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에게 도와줄 수 있는 봉사의 기능을 갖추라고 각자 이 땅에서 다른 은사들을 주신 거예요.
왜? 성령에 휘감겼으니까. 그 이름이 그 식물 이름이 파리잡인가, 하여튼 파리 지옥인가 뭐 하여튼 있어요. 그 주께서 성령 주셔서 우리로 주님 안에서 계속 이미 구원받았어요. 이미 구원받고 육신이 떠날 때까지 하게 하신 것은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그런 마음,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남하고 일체 경쟁하지 마라. 그들은 경쟁 대상이 아니다. 내 실력 같으면 의미가 있으면 경쟁이 되는데 내 실력 없이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 실력 없음을 남들에게 그냥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것도 가진 거 없기 때문에 내 공로 그런 것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요.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마세요. 그냥 봉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봉사한다고 더운데 아프리카 가고 좀 이러지 마세요. 국경 없는 의사회, 제발 좀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거기 가게 되면 역시 어디에도 돈 없이는 안 된다는 거, 다시 한번 자기 죄를 깨닫는 거 외에는 의미 없습니다.
있는 자리 현재 그게 아프리카든 미국에 있든, 있는 자리. 뉴욕의 매너튼 같으면 거기 있는 자리 월세 삼천 이천삼백만 원 하는 게 있어요. 연필 빌딩들이 있어요. 연필 빌딩 뾰쭉하게 최근에 많이 들어섰는데 거기에 뭐 한 채가 월세 3300만 원 정도. 거기에 살든 안 그러면 아프리카에서 천막 속에 살든 간에 어디에 가더라도 주님의 성령이 휘감겨서 남에게 어떤 도움 되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영생을 얻은 입장, 사망해서 생명으로 옮긴 입장에서 아직 우리 몸이 이 피곤한 세상에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처럼 주님의 희생과 주님의 봉사를 증거하기 위함인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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