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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박국 1:14-17 / 다른 구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하박국

하박국 1:14-17 / 다른 구조

정인순 2022. 11. 10. 11:58

음성 동영상 Youtube

다른 구조 

 

이근호
2022년 11월 9일                

 

본문 말씀: 하박국 1:14-17

(1: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1:15)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16)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구약 시대의 생각은 여전히 육적입니다. 세상의 일반적 생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힘이 가진 자가 승리하고 많은 수의 군사력이 적은 수의 수의 군사력을 이긴다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 당시 유다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면서 강한 나라인 갈대인들에게 유다나라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바벨론 나라와의 전쟁은 ‘싸웠다’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가두리 양식장에 물고기들을 양식업자가 마음껏 챙기는 식으로 유다 나라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게 된다는 사실을 선지자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이유는, 왜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이 그런 수모를 굳이 당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선지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선과 악을 구별하셔서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 적용해보면 불일치되는 면이 보인다는 겁니다. 지금 선지자는 자신의 이러한 의식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갈대인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멸망당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이방민족들이 자신의 신에게 기대거는 기대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도 그런 식으로 신의 전지전능에서 한 몫 보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장기가 교회 출석하는 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온갖 거룩한 형식과 지식을 갖고 있지만 세상에서 힘주어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여기는 의식에는 전혀 바뀐 것이 없이 불신자들의 노림수와 동일합니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바벨론이나 공격당하는 이스라엘이나 모두 같은 의식으로 살아가며 이로서 그들은 같은 구조 안으로 조정당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말입니다.

인간 세계는 가장 힘이 월등하게 소지한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재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는 ‘주권자없는 고기떼’라고 유다나라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고기 때가 자기를 강제로 폭력으로 낚는 어부들에게 함부로 대들거나 반항할 수 없는 입장에 있지 아니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유다나라가 왜 이런 가련한 처지로 전락되었는지, 하나님의 후속조치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2-4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의 구조의 한계가 누가 정했으며 어디까지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경계선이 얼마나 성스러운 경계선인지는 직접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야 알 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모세와 만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 누구도 이 떨어나무 불 속, 혹은 불 너머로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즉 인간은 좋든 싫든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신성한 경계(境界)’ 세상을 끝까지 밀어붙이십니다. 세상은 일종의 가두리 양식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양식장에서는 자기네들 끼리 힘 겨루기를 합니다. 자체적으로 최고 힘을 가진 자가 주권자가 됩니다. 

주권이란, 자신의 내부화 시킬 수 있는 것들만 통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으로 힘을 키워서 이 세상을 단일주권체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단일 구조’로 정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 안에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바벨론 주권자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위상과 본질은, 불붙은 떨기나무라는 점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어느 인간이 불길 너머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인간 구조의 한계임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주시고자 하십니다. 신명기 7:7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어느 민족보다 숫자를 작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내에 다른 원리가 흐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비록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내부성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건드리고 괴롭히고 공격하는 바는 곧 세상 구조보다 더 큰 구조 안에 세상 전부가 포획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개인적으로 구원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가 아니라 이스라엘 존재를 미끼로 해서 인간 세계 전부를 아우르는 더 큰 구조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한 나라와 그렇게 못한 나머지 세상을 구조적으로 정립하시려는 겁니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상식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의식에서 나온 말을 듣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듣고자 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이런 신앙은 결코 기존의 인간들의 세계에서 유용한 원칙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구조가 엄연히 있음을 보이는 영적 고백입니다.

실제로 삭개오는 자기 집에 구원이 이르렀을 때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8-9)

누가복음 23:39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강도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본심을 드러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런데 다른 한 강도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 세상 구조 너머의 구조에 속한 자나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눅 23:42)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지옥의 구조로 도로 떨어지는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셨던 이 세상을 다시 오시는 이유는 이 인간 세계 전체를 더 큰 구조로 포획하시여 영원한 주권자로 지배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음이 찾아주시어 다른 세계의 고백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하박국 1장 14-17절(다른 구조)2211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14-17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14-17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적절한 답변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그 답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여기 14절 끝에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주권자가 없는 게 아니고 있지요. 누가 주권자냐? 갈대아 사람들이 주권자입니다.

갈대아 사람은 아주 잔인하고요, 무섭고, 그리고 잔혹하고, 사정 봐주지 않고, 그리고 마치 독수리가 먹잇감을 발견한 즉시 여지없이 달려들어서 낚아채는 것처럼 이 시대가, 앞으로 올 이스라엘에게 들이닥칠 시대가 갈대아 사람들의 시대, 바벨론 나라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시대가 오게 되는데 그것은 나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 그것을 분명히 6-11절까지 하나님께서 분명히 언급을 해줬습니다.

언급을 해주셨으면 하박국 선지자가 ‘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구나.’ 이렇게 하면 될 텐데 12절에 와서 선지자가 또 똑같은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정의로운 분인 것을 내가 알기는 알겠는데 그것은 하나님 생각이고 우리 이스라엘 유대나라는 어떻게 주권자 없이 곤충같이 되어버렸다고 항의하는 겁니다.

14절에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여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포함하고 갈대아사람 외에 침략당하고 있는 모든 민족들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물론 포함되고요,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권자가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주권자가 뭐냐? 갈대아 사람 느부갓네살 왕이지요. 주권자가 있거든요. 있는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주권자가 없는 거예요. 왕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이 바벨론 나라하고 이스라엘 나라하고 전쟁을 했는데 이 전쟁이 비접촉 전쟁이에요.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일방적으로 밀린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건 전쟁했다고 보기 보다는 노획 당했다, 강탈당했다, 마치 도둑이 와서 몽땅 다 가져가는 것처럼 이건 전쟁했다고도 볼 수가 없어요. 다 빼앗긴 거예요. 다 멸망당하고 거의 다 죽고 그랬어요. 다 잡혀가고. 쓸 만한 인간들은 다 잡혀가고요. 바벨론에.

그런데 하박국은 예언을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다의 어족 같아서 고기를 잡는 쪽과 잡히는 고기의 형편과 같은 형편이라.”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고기가 낚시꾼을 낚아채려고 막 공격하고 그런 것은 없지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들은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방적으로 고기를 잡아 노획하는, 낚아채는 사람이 되었고 잡히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주권자 없는 그러한 사람같이 그렇게 취급하셨습니다.”라고 하박국이 이렇게 형편을 이야기하는데 자, 여기서 생각해야 돼요.

지금 하박국이 어떤 말을 끄집어낼 때는, 그 말이 하박국이 뭐 생각이 없어서 ‘자기 민족을 생각해서라고’ 그렇게 자기생각을 했든 말든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현실역사가 되어버립니다. 하박국이 표현한대로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그러한 때가 곧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빈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 씨가 된다고 할까요, 그게 그대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는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이 구조를 언급한 거예요, 구조. 주권자 없는 바다의 어장, 하나의 구조거든요. 뭐 더 쉽게 하면 ‘가두리양식장’ 가두리 양식장, 거기서 키워지는 고기들은 잡히기 위해서, 먹히기 위해서 키워지는 거예요. 고기의 품위, 고기의 체면 없습니다. 횟감으로 다 처리하고 말지요. 잡아먹히는 거지요. 그 구조에요.

그 구조의 주권자가 있습니다. 누구냐? 바로 갈대아 사람이 주권자에요. 그런데 하박국에게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에게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유다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왜 주권자가 없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갈대아 사람들의 심정과 그리고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심정, 마음이, 의식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친다, 할 때는 그 시선과 안목이 육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보다 저 위해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러한 관점이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나 선지자나 여기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치고 있는 갈대아 사람들의 안목과 별반 다르지를 않아요. “내가 너희들 다 잡아간다. 너희들 다 죽인다. 겁나지?” 이렇게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는 거야. 두렵지 않다.” 이렇게 나오면 ‘아하,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적인 안목을 뛰어넘어 영적인 안목을 갖췄구나.’ 이게 되겠지요.

그런데 “너희들 내가 쳐들어간다. 한번 붙어볼까? 너희들 다 죽는다!” 그렇게 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하박국 선지자나 “아이고, 이거 우리 다 망했다. 어쩌지, 어쩌지……?” 할 때 이것은 인간의 육적인 인식이 육적인 그 경계선, 구조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영적으로 도달하려고 애쓰다가 도로 뚝 원위치, 떨어지는 거예요. 육적인 인식으로 도로 떨어져버린 거예요.

이런 경우는 교회 교인들, 정말 교회 오랫동안 다닌 교인들 있잖아요, 정말 많습니다. 성경도 공부하고, 복음도 들어보고, 물론 복음은 들려줘야 듣지만, 하여튼 복음도 알고 교회 생활 열심히 했는데 막상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겨버리면 이 안목이 세상적인 안목을 넘어서지 못하고 올라간다 하다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하는 식으로 하염없이 다시 원위치로 떨어져버려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발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도로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고, 우짜노? 어떻게 하지? 하나님께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데, 열심히 빌었는데, 그저 윤 석열 대통령 정치 잘 하라고 기도 많이 했는데 아이고, 이태원에서 젊은 애들 백 몇 십 명 죽어버리면 어쩌지? 지지율 안 오르면 어쩌지?’

이게 뭐냐 하면, 육적인 구조, 육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하고 차이점이 하나도 없어요. 교회 다니는 게 소용이 없어요. 벽을 기어 올라갔는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 불러가면서 올라갔는데 웽~, 하고 모기 한 마리가 와서 툭 치니까 도로 다 떨어져버렸어요. 우르르, 다 떨어졌어요.

‘영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무슨 영적인 것은 고대했지요. 영적인 것을 사모했지요. 사모하고 고대한다고 그게 영적 안목입니까? ‘어쩌지? 안 되면 어쩌지? 내 인생 망치면 어쩌지? 우리 아들 우리 딸 죽으면 어쩌지?’ 맨날 매일 삶이 ‘어쩌지?’에요. 그 ‘어쩌지?’가 세자인데 두자로 줄이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맨날 이런 식으로 벌벌 떨면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주여, 도와달라고 그렇게도 하고, 뭐 ‘성경 볼 까요, 헌금 할까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이 위기에서, 이 인생의 난관에서 벗어날 길이 없겠습니까? 위기가 올 때는 다른 창문이 있다는데 어떤 창문 혹 열린 창문 없습니까?’ 창문은 컴퓨터 윈도우, 윈도우나 열릴 뿐이지요. 아이고, 괜히 이런 이야기를…….

이 세상에 무슨 창문이 있습니까? 갇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억압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개인구원에 있거나 개인 행복과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전부를 구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구조? 이 세상의 구조,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사람도 자기 구조에서 이 탈해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이스라엘마저도 이 세상구조와 한통속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같게 만들어버렸어요.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똑같은 발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믿고, 율법 믿고 이렇게 산 것은 뭐냐? 폼이지요, 폼. 그냥 형식이었지요. 그게 잘 나와 있는 게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 “옛날에 하나님이 우리로 홍해를 건너게 했고, 요단강을 건너게 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때 해까지 멈춰가면서 이 약속의 땅에서 이민족을 쫓아내고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줬다.”라고 할 때 “하나님, 참 고맙습니다. 역시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했지요.

아무리 하나님이 과거에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오게 했다 할지라도 막상 그 땅에 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넘어서지를 못했어요. 어려울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도와주니까 그 때 잠시 뿐이었어요. 다시 뭔가 살만하니까 도로 기존의 옛날 그 땅에 살았던 이방민족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언제 돌아갔는지 쑥 도로 돌아가 있어요. 똑같아요.

신명기 7장 7절에서, 육의 인식에서 영의 인식으로 넘어설 때 하나님의 관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여기 택했다, ‘선택’이 나와요. 선택하시는 분의 기준이 뭐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다, 그 말이에요. 왜 주님께서 이스라엘 숫자를 적게 했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많은 숫자가 힘이 되고 적은 숫자는 힘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돈이 많은 것은 큰소리 치고 돈 없는 것들은 비리비리 해서 큰소리치면 안 된다, 라는 인식으로 갖추어진 것이 인간의 모든 인식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신명기 율법을 통해서 너무나 대비되고 대조가 되는 다른 하나님의 영적인, 영적이라는 것은 신약적으로는 영적이지만 구약에서는 언약적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딱 이스라엘이라는 특화된, 특수한 민족의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특수한 주님의 안목이 그들에게 작용을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의도적으로 그들을 이스라엘 숫자를 적게 해버린 겁니다. 그럴 때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을 만만하게 보지요. 우습게보지요. 그러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만만하게 보고 쳐들어와서 삼키려고 삼키겠지요. 삼킬 때에 그들은 올무에 빠진 거예요. 미끼에 빠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악마의 세계, 인간세계 전체를 포획하는, 그걸 포획해서 하나의 거대한 구조 안에 가두어서 분류를 하겠다는 그 계획이 하나님에게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구조적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구조가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구조, 인간은 구조적으로 힘센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삼킴으로서 구조적으로 재편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그 구조 외에 바깥으로 인식이 못 벗어나요. 오늘 하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쳐요. 우리는 힘도 약한데 하나님 뭐하십니까? 그 강한 나라가 우리를 칠 때 우리는 어찌 살라고,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데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자체가 지금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무서워라. 어찌할꼬! 저 무서운 갈대아사람 어찌할꼬!’

거기에 대해서, 이런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5절에 보면, 5절, 지금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다, 5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놀랄 일을 주께서 벌이시고 믿지 아니할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누가요? 하나님께서 누구보라고? 이스라엘 보라고요. 참, 이게 오늘날 교회 온 성도들이나 교인들에게 대단한 중요합니다. ‘20년, 30년 믿었는데 뭐 내가 하나님에게 얻어먹은 것 뭐 있노? 파김치나 얻어먹었지 뭐 하나님께 얻어먹은 게 없다.’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간들이 예상해요. 본인들이 예상한 것을 하나님이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인식을 못 벗어난 채 자꾸 자기가 꾸며낸 어떤 영적인 것, 대단한 것, 놀라운 기적을 그걸 자기가 시나리오 짜놓고 그것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주면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놀랄만한 일을 일으키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네가 갇혀 있는 구조, 그 구조 바깥에서 그 구조를 더 큰 구조로 노획, 포획해버리는 그러한 일이 바로 주의 일입니다.

인간이 자기 아는 그 세상, 힘이 있는 자가 큰 소리 친다는 그게 제 말이 아니고 오늘 하박국에 갈대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억압할 때 이스라엘은 “어찌할꼬! 이제 죽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어떻게 우리가 가두리 양식장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당하게 하십니까? 전쟁 해보지도 못하고 다 빼앗깁니까?”라고 불평, 구시렁구시렁 이런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지금 갈대아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똑같이 동일한 인식의 그 세상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믿었는데 왜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느냐, 이런 발언자체가요, 이러한 마음 자체가 지금 이 세상 구조 그 너머에 있는 그 구조의 인식을 전혀 모르고, 영적 인식을 전혀 모르고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고 문제를 제기하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으로 생각해요. 이런 문제가 아니라도 미처 모르는 정말 낯선 문제가 저 인간의 세계 구조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와 줘서 새겨질 때 이게 비로소 참된 이스라엘이고 이게 참된 성도 아닙니까? 남들이 하지 않을 질문을 본인의 입에서 그 질문을 한다는 게 이게 놀라운, 우리가 예상 못한 놀라운 거잖아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은, 불신자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교회 50년 충성했는데 왜 내 몸이 아파서, 말기 암이 되어서 왜 이렇게 죽어갑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연하게 보여주실 요량으로 제가 기도할 테니까, 금식할 테니 살려주세요. 이 일만 성사 잘 된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갖다 바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 문제 해결하는 것은 이방사람들,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똑같이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그거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특이성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왜 이제 죽이십니까? 어제부로 안 죽이시고 왜 질질 끄십니까?” 이것은 이 세상 구조에 갇힌 사람에게서 나올 말이 아니에요. 다른 안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른 안목이!

제가 그랬다고 ‘다음에 기도할 때는 저거 써먹어야지.’ 하지 마시고 평소에 생활태도가 자꾸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게 아니고 주님만 할 수 있는 질문이 내 안에서 고백되어 튀어나오는 것, 이게 아주 기이한 일, 놀랄만한 일이에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러시아에 어떤 바보가 있었답니다. 러시아 바보가 ‘장’인데 러시아 바보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어떤 바보냐 하면, 엄마가 “아버지 일하시는데 도시락 주고 오너라.” ‘네가 바보라도 그건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바보가 엄마가 싸준 아버지 도시락을 들고 길을 가는데 자꾸 자기 그림자가 따라오는 거예요. 이 바보가 누가 자기를 계속 따라오니 그게 짜증이 나니까 점심밥을 떼 주면서 “그림자야, 이제 가라. 그림자야 가라.” 자꾸 떼 주니까 나중에 아버지한테 도착할 때 보니 밥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 그림자한테 다 떼어주고. 이게 바보잖아요. 이게 바보지요.

오늘날 교회 나오면서 “귀신아, 좀 떨어져 나가라. 귀신 좀 떨어져라.” 이게 귀신이 떨어져 나갑니까? 귀신 사고방식이나 자기 사고방식이나 똑같은데요. 내게 비친 것이 귀신인데요. 그림자가, 같은 존재가 귀신인데요. 나 잘 되기 위해서, 내 인생 편하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유쾌하게 살기 위해서, 건강하고 안 아프고 남한테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그런 삶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 그 삶이나 그런 이스라엘을 치는 갈대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똑같은 사고방식이 똑같은 사고방식을 공격한다. 이것은, 너희는 둘 다 똑같은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모두 다 가두리양식장에서 큰 고기가 작은 고기 먹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마땅한 겁니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가 못 빠져나가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갈대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게 했는데 왜 멸망당하게 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일부였습니다. 그게 약속의 일부거든요. 이스라엘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4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직접 모세와 만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사자, 또는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떨기나무의 불로서 나타났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이스, 목소리, 음성이 떨기나무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면 모세 입장에서는 불붙는 떨기나무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게 육을 지닌 인간의 구조의 한계입니다. 불 속으로, 불 너머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불로써 인간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신성한 경계가 돼요, 신성한 경계.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선, 신성한 경계선에 뭐가 있느냐? 불이 있어요. 그런데 상당히 인간적으로서는 절망적이지요. 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이 불 가운데서 막았으니까 그 불속으로 또는 불 넘어서서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상당히 절망적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불에 있는 그러한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을 가지고 인간에게, 모세에게 나타났다는 그 사실 자체는 이것은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해내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호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리거든요.

모세를 통해서 만든다는 말은, 불이 붙은 떨기나무의 그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체를 뭘 로 보느냐 하면, 이 인간의 구조와 하나님의 구조……, 하나님의 구조라는 말은 그냥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경계선 역할을 이스라엘이 감당하도록, 그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일을 벌였다는 거예요. 일을 벌인 거예요. 일을 벌였으니까 계속 이스라엘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이지요.

그 때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에게 밀리고 밀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인간세계 전부가 하나님의 더 큰 구조 안에 포획되도록, 그런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그 전체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가두리 양식장처럼 되게 하는 전략에 나섰습니다.

지금 나 혼자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 이스라엘이요, 갈대아 사람한테 완전히 잡아먹히잖아요. 그렇지요? 잡아먹히지요. 그때 가두리 양식장은 누가 하느냐? 갈대아 사람이 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횟감으로, 고깃감으로 일방적으로 먹히고 있어요. 구조적이라는 말은 뭐냐? 대결하는 게 아니고 경쟁하는 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그냥 포획당하는 거예요. 전체가 힘 있는 갈대아 사람으로 완전히 구조가 정리되고 이 세상 구조가 정리된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들이 물려고 했던 미끼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갈대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만만하게 보고 이걸 물어버린 거예요. 이스라엘을 물으니까 그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부터 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만든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방적으로 포획당하는, 노획당하는 대상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버린 거예요. “네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으니까 합당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박국 1장 11절에 보면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그들은 신을 믿는 게 자기 힘을 신으로 믿어요. 자기 힘을! 자기 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 믿는 나라가 패배당해서 삼킴을 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힘을 믿고 있는 그들이 자기 세계에서는 최고에요. 현재 갈대아 사람이 최고입니다.

최고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그들은 이 세상 주권을 갖고 있다. 주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내부화 시킬 수 있는 것만 통치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내부화시킬 수 있는 것만 통치한다.” 다시 할 게요. “주권이란 자신이 내부화 시킬 수 있는 것, 자신이 속속들이 자기 내부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만 통치한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통치하는 그 내부 안에서는 어떤 것도 자기의 권력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그 말이에요. 그게 주권이에요. 현재 갈대아 사람은, 이 인간세계에서는 주권자에요. 인간세계의 주권자 된 구조가 딱 갖춰진다면 그 다음에는 그 너머에 있는, 그 너머에 있는 그 전체, 인간세계의 구조를 또 둘러싸서 구조화시키는 그 너머에 있는 구조에서는 그들을 빼도 박도 못하게 저주받아야 될 대상이 되어버리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말을 어렵게 해도 소용없고요. 쉽게 하겠습니다. 이 말이 더 어려운지는 모르겠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지시고 돌아가셨잖아요.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승천하셨잖아요. 맞지요? 승천하셨지요? 왜 오십니까? 승천하셨으면 되었지 왜 오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이 땅에 왔다.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부활하셨다. 하늘로 구름타고 올라가셨다. 그러면 끝났네요. 성령으로 낚시하듯이 자기 백성 뽑아내면 될 텐데 왜, 다시 영광스런 모습으로 이 땅에 왜 오십니까? 이걸 사람들이 자기 개인구원 구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오실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 거예요.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봐도 몰라요, 이 사실을. 왜 주님 다시 오시는지 몰라요.

그 이유가 뭐냐? 구조화 때문에 그래요, 구조화.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구조화에요, 구조화!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인간은 배제됩니다. 예수님과 악마의 대결로 모든 것이 되거든요. 그랬을 때 이미 악마는 인간을 유혹함으로서 악마의 세계가 구조와 되어 있어요. 구조화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완성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최종 완성된 세계는 뭐냐? 구조입니다.

지옥 갈 자의 구조, 천국 갈 자의 구조, 그 구조로 완전히 확정짓고 정립해버리는 것, 그 구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획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가두리 양식장으로 여겨가지고 그걸 더 큰 것으로 포획하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큰 박스 안에 작은 박스를 담아버리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오시는 거예요. 누구 구원받고, 누구 구원받고, 이런 개인적인 구원은 주님생각에는 안중에도 없어요. 구조적으로 너는 천국 안에 들어가고, 너는 지옥 안에 들어가고, 구조적으로 곽을 짜서 구조적으로 완전히 정립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 때문에 오시는 거예요. 마치 갈대아가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것처럼.

다시 이야기할까요? 갈대아는 힘이 있다. 이스라엘은 힘이 없다. 따라서 이 세상은 힘으로써 누가, 힘 가진 자가 주권자가 되어야 된다. 주권자는 뭐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나라를 자기 내부화시켜서 어느 누구도 통치의 누수가 없게 만들고 구조화 시키는 것. 구조화 시킬 때 비로소 느부갓네살은 왕 중의 왕이 되는 거예요.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오늘 본문 16절에 나옵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갈대아 사람들이 자기들 마르둑 신에게, 자기 군사력을 두고서 자기 신에게 제사하고 예배하는데 그 목적이 뭐냐?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7절에 “그가 그물을 떨고는”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만 점령하는 그것으로 자신의 전쟁을 멈추는 게 아니고 또 다른 민족까지 “연하여” 계속해서 이어서, “늘 열국을”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열국까지 전부 다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즉 “하나님이여, 이 행위를, 왜 갈대아 사람에게 모든 것을 몽땅 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라고 하박국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할 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은 뭐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스라엘을 왜 망하게 합니까? 너무 원통합니다.’라는 말을 했던 그런 심정으로 했지만 그 말 가운데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을 한 나라에 다 맡겨서 완전히 곽 지우는 것, 가두리 양식장 주인은 하나잖아요.’ 하나의 주인 앞에 모든 것을 곽 지우고 구조화 시키는 그 구조화적 표현이 등장했고요, 주께서는 하박국의 예언대로 그냥 이 구조화를 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구조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어떻게 교회를 몇 년 다니든, 예수를 안다 하든, 어떻게 영적인 이 세상의 구조, 힘 가진 자, 돈 가진 자가 최고다, 하는 이 구조, 이 구조 말고 어떻게 다른 구조가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셨잖아요.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명령하면 뽕나무가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빠진다.”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지요.

이걸 예수님이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지만 이걸 성령 받은 인간도 평소에 자주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다른 구조에 속한, 이 세상 구조 너머에 있는 구조의 발상과 의식을 가진 사람이 출현된다는 거예요.

‘아, 이거 못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말은 우리보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의 구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 구조바깥에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능히 이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말을 누가 해요?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빠져라, 나 한 열 두 번은 했겠는데 진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이냐?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어서 8절에 보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삭개오는 돈을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아까 하박국에 의하면 힘이 있는 자에요. 힘이 있는 구조 안에서 자기는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벗어날 마음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 보고 “내가 너희 집에 감으로써 나의 나라가, 나의 구원이 너희 집에 이르렀다.” 하는 그 순간 삭개오가 놀라운 이 세상구조, 돈이 지배하는 구조 바깥의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제가 네 배가 갚겠나이다.” 그냥 그 사람보고 원금 돌려주겠습니다, 가 아니라 “네 배나 갚겠나이다.”

또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 보니 여기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두 강도가 있거든요. 마태복음 27장 44절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십자가가 세 개 있었는데 한분은 중앙에 있는 예수님이고 양쪽에 강도 둘이에요. 강도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에요. 둘이기 때문에 ‘강도들’ 강도들이 중간에 있는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서.

그랬던 강도가 누가복음 23장 39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되어 있어요. ‘네가 그리스도라면 우리를 구원하라. 그래서 구원자임을 드러내라.’라는 어떤 강도 생각, 이게 세상 구조 안에서 상식으로 통용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라면.

‘하나님, 우리 애가 유치장에 있는데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빼내주세요. 하나님이 그리스도여든, 구원자라면, 내 기도 응답한다면 빼내주세요.’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50년 다녔는데 무슨 혜택이라도 봐야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고 누가 이상하냐 하면, 42절에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이것은 이 세상 구조에서는 나올려야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 고백이 여러분에게 지금 나오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교회 다녀서 잘되고, 교회 나와서 복 받고, 몸 건강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돈 가지면 행복하고, 힘 가지면 출세한 것이고……, 그거 말고요, 돈이고 힘이고 상관없이 나올 수 있는 다른 고백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구조를 내려다보는 거예요. 내려다보면서 이 세상의 미끼, 주님의 미끼로서, 이 세상을 지옥보내기 위한 미끼로서 주께서 활용하고 있는 주님의 성도입니다.

그 고백을 위해서 주께서 성령주신 거예요. 하박국은 아직 모르고 있지요. 나중에 2장을 보면 알아요. ‘야……’ 2장을 보게 되면 ‘지금 이 세상,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는 이스라엘 대비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의도적으로 미끼로 이 세상 구조에 함몰되게 하셨구나. 그래서 뱀의 머리를 치고 새로운 천국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이방나라한테 철저하게 유린당하도록 해주셨구나.’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보고 이스라엘이 억울하다, 하면 안 돼요.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유린당하고 욕 얻어먹음 당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 구조에 있는 악마의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주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요. 강림하셔서 자기를 쳤던, 자기를 찌른 자를 전부다 하나의 곽으로, 지옥으로 만들어서 곽으로, 구조적으로 확정짓는 그 계획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 때문에 떨기나무 불꽃으로 그 경계선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새로움이 찾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찾아오게 하옵소서. 주님의 죽으심이 찾아왔다는 그 고백, 그것이 모든 것을 완성시켰고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그 고백, 이 특이한 고백이 날마다 터져 나오고 고백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