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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박국 1:12-13 / 선지자의 두 갈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하박국

하박국 1:12-13 / 선지자의 두 갈래

정인순 2022. 11. 2. 23:48

음성            동영상

선지자의 두 갈래

 

이근호
2022년 11월 2일                        

 

본문 말씀: 하박국 1:12-13

(1:12)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자신의 시도로 인해서 챙길 것을 챙기는 상대로 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악이라고 생각할 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현 유다나라의 형편을 두고 나름대로 걱정을 합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은 그 악인들에게 구박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의 보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한 조치를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강대국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나라 전체를 사정없이 황폐화시키는 겁니다. 이런 조치에 대해서 선지자는 납득할 수 없어서 재차 하나님께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기에 당연히 악에 대한 심판을 마땅함을 본인은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외부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유다나라를 공격케 하는 일 말고 유다나라 내부에서 악인들을 척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를 묻습니다. 즉 악인도 도리어 많은 의인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정의로운 유다나라가 만들어 줄 수 없느냐고 묻는 겁니다.

이러한 요청은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바와 같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창 18:23-24)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자기 견해를 피력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제안한 인간으로서 한계성을 집어넣어 그런 요구마저 충족되는 심판을 실시하십니다. 그것은 롯의 가정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나머지 전체 소돔과 고모라성에 불심판 내리시는 방식입니다. 오늘 하박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양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감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없는 의인’ 생산에 ‘악인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의인이냐 아니냐는 것은 인간의 판단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모두 악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시도가 개입된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니께 감사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행함이 의미있게 됩니다.

인간의 의미가 살아있는 감사는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가 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일체 인간의 의미가 배제된 채 생겨나는 감사와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시게 됩니다. 즉 ‘유일하게 제대로 악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로서의 메시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죽게 되십니다.

이로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은 악인으로 규정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로부터 싫어버린 바되시는 분의, 행위로서 생애를 이어오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악마로부터 시험받기’입니다. 성령께서 주선하셨는데 이 시험받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금식하셔야 했습니다.

금식이란 자기로부터 자기 결별입니다. ‘나 아닌 나 ’로 사는 겁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시험은 ‘육신을 입은 자’로서 받는 시험입니다. 즉 모든 인간들의 육신은 도대체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를 밝혀지는 계기가 됩니다. 악마가 와서 예수님에게 하는 이야기들은 육신을 입은 예수님의 육신 내부를 자극합니다.

즉 그동안 인간은 자신의 내부의 소리에 충실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동안 나는 잘못된 종교에 빠졌다”고 말들하지만, 실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의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속임수에 빠진 것은 제대로 된 속임수에 빠져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진정 인간들 못 빠져나오는 것은 자기 내부의 소리입니다. 곧 악마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실은 버려져야 될 존재인 것을 인정치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비로소 예수님과 일반인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일반인들은 ‘자기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주의 이름’만 지켜지는 곳으로 갑니다.

요한복음 8:1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즉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것은 일체 인간들이 따라 올 수 없는 곳, ‘인간의 이름’이 없는 곳으로 가십니다.

악마는 인간의 육신을 갖고 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의 육신 뒤쪽을 경유해서 아버지께서 갑니다. 인간의 뒤편에는 악마가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구역입니다. 그곳을 경유하므로서 예수님만이 의인이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죄임이 확정됩니다. 즉 악인의 악인됨을 유일한 의인께서 등장해야 규정되는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같은 인간들 끼리라도 악인 따로, 의인 따로 있으니 의인이 악인에게 공격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선지자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육신은 악마에게 철저하게 패배당합니다. 그럼으로서 악은 악으로서 제대로 규명된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뒤편을 바라볼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가지 못하는 인간의 배후의 세력 속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악마의 세계를 통과하십니다. 요한복음 8:48-49에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예수님의 일생을 자신을 지키는 기간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드러내는 기간이었습니다. 이 취지에 따라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의 뜻’ 곧 보편적 인간들의 육신이 갖고 있는 ‘인간의 뜻’을 아버지에 의해서 거부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 스스로 자기와의 결별을 뜻합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이 아버지의 도움받는 것을 원치 않고 포기하십니다. 내 뜻이 좌절되는 바로 그 일을 통해서 하박국 선지자가 규정해 놓은 원칙, 즉 ‘의인이란 악인에게 삼킴을 당하는 자’라는 진리는 성취된 겁니다. 성령받은 성도는 이로서 자신의 무의미함을 토대로 해서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악인임을 아는 바로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의인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강-하박국 1장 12-13절(선지자의 두 갈래)2211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12-13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12-13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하고 선지자하고 대화중에 있습니다. 선지자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제대로된 이스라엘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는 갈대아 사람, 바벨론이지요, 갈대아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 심판하겠다, 그렇게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선지자는 외부에서 이스라엘을 작살 내고 심판하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지금 우기고 있습니다. 하박국 1장 4절에서도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그러니까 이 선지자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악인들이 의인을 못살게 굴고 또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니까 이 문제부터 좀 해결을 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생각이에요.

외부군대가 와서 이스라엘 전체 다를 멸망시키면 그것은 빈대 잡기 위해서 초가삼간 다 태우는 식인데 너무 낭비가 심하지 않느냐, 의인의 희생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시킨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12절-13절에 보면 하박국이 일단 ‘하나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을 징벌하기 위해서 그런 자들을 두신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그런데 바벨론이 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하박국은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공격을 할 때는 우리 이스라엘을 아주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지는 않으실 줄로 저희들은 그렇게 알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셔서 우리에게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그렇게 해주실 줄로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게 12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바벨론을 통해서 징벌은 하는 것은 되는데……” 13절에서는, “……외부군대가 와서 징벌을 하기 전에 내부적으로 이스라엘이 새롭게 바뀌면 외부징벌도 불필요한 게 되지 않습니까? 외국군대가 와서 이스라엘 치는 것, 그것도 하나님 쪽에서 준비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우상을 섬긴다든지 하나님께 모독하는 악인들이 기를 못 펴는,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 번창해서 악인들이 의인들에게 꼼짝 마라, 이렇게 하는 방법이 더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그런데 실제로 돌아가는 광경은 오히려 악인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고 공격하는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악인들이 득세하는 여기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 손을 놓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외국군대를 동원하는 정도로 심판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나라 내부에서 의인들이 큰소리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게 하는 것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그 대목입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뭔가 선지자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이반되었다, 불일치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지금 선지자가 의인들이 구박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에 의인이 있습니까? 지금 선지자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의인이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의인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인이 없다고 여겨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먼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기준점으로 해서 그 앞서 있는 이스라엘을 멸망하겠다는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먼 미래에 메시아가 어떤 식의 어떤 분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바르게 사는 사람끼리 이스라엘의 명맥을 유지하면 그게 이스라엘 되지 않습니까, 라는 쪽으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을 악인들에게 준다.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선지자는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금 눈치를, 감을 못 잡고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인이 되는 이유가 뭐냐? 선지자는 율법을 어기고, 나쁜 짓을 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 존재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을 악이라고 하는데 지금 그 정도 수준 가지고 악이라고 되지 않습니다. 그 수준은 오실 메시아 예수님 수준으로 더 명확하게 확립되어야 돼요.

그렇게 되면 뭐가 악인이냐? 나의 시도로 인하여 내가 얻고자 하는 바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악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어떤 시도를 해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내게 필요한 것, 내가 참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괜찮은 분으로 여겨서 하나님 쪽에서 괜찮은 것이 내게로 들어올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이게 악인입니다.

이게 왜 악이 되느냐? 그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전부 다를 심판하겠다는, 의인이 없으되 하나도 없다, 해서 전부 다를 심판하는 그 심판취지가 가려져 버리잖아요. “저 사람은 나쁘고 나는 저 사람같이 되지 않고, 저 사람 때려도 나는 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훈계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질문자의 위치선정이 잘못됐어요. 자기가 원하는 위치를 딱 잡아놓고 거기서 질문을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원하고 있습니다. 들어주세요.’ 이런 식으로요. ‘내게 납득되게 해달라. 하나님이여.’ 이런 식이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수능시험 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학부모가 도시락을 들고 수능시험장에까지 들어왔어요. 그래서 감독이 “아이 도시락 들고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아주머니 답변이 자기 애가 아침밥을 못 먹었다는 거예요. 지금 질문자 위치선정이 잘못됐어요. 자기가 들어오면 안 되는 자리에 들어왔어요. 그 애 도시락 딱 여니까 거기서 예상문제 질문지 나올지 어떻게 알아요?

“아주머니,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가세요.” 이렇게 하니까 우리 애는 내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안정을 취한다는 거예요. 참 이거 들어보면 같잖지요.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의 심정을 솔직하게, 진솔하게 이야기한 게 잘못이 아니고 질문하는 자의 위치, 수험생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에서 질문할 수 없는 자가 거기 들어왔다는 게 문제잖아요.

지금 성경을 보면서 신앙생활 우리가 제대로 못 하고 이해 못 하는 이유가, 아버지에게 질문할 질문자는요, 아들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질문하면 안 돼요. 인간은 주는 대로 먹어야 돼요. 밀리면 죽어야 돼요. 그래야 돼요. 그래야, 나의 의미가 잽싸게 사라져 줘야 내가 모르는 감사, 내가 할 줄 모르는 감사가 나오는 거거든요.

그것은 내가 하는 감사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나오는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 감사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근본적으로, 참 수십 년 교회 다니고 복음 수십 년 알았다 해도 참 이건 꼭 알아야 돼요.

주님이 가시는 길은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길에 가십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거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그게 다 아는 이야기십니까? 사람들을 피해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피해서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 따라올 수 없는 곳에 주님께서는 가십니다. 유일하게 질문할 수 있는 자가 유일하게 질문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사람 이름이 아니고 그 자리가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주의 이름, 자기 자리를 찾아가시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하는 모든 질문과 인간의 모든 것은 주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위치선정이 잘못됐어요. 아버지한테 저거 달라, 이거 달라, 할 수 있는 위치가 안 되면서 납득되는 상황을 나한테 이해케 해달라, 이런 식이에요. 이런 잘못은 이미 아브라함도 그런 잘못을 했어요.

창세기 18장 23, 24절에 보면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어디까지나 아브라함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위치를 그대로 기도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뜻이에요.

‘내가 알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사람 수가 많은데 그 많은 사람중에 의인 50명은 없겠습니까? 그러면 의인 50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하나님께서 일괄 몽땅 심판해 버리면 악인이 심판받는 것은 이해되는데, 의인이 같이 섞여서 심판받는 일이 되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자를 심판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 생각에 ‘제 생각에는 심판을 유보시켜 주시고 심판 안 하시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많은 악인을 치는 것은 좋은데 하나의 의인이라도 다치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는 것이 아브라함 본인 생각이에요.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 생각이 잘못된 거지요. 인간이 뭘 알겠어요? 잘못된 겁니다.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려한 심판을 하시는데 아예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거기서 빼내 놓고 나머지 다 쳐버리는 거예요. “됐냐? 네 방식대로 됐지?” 그 방식은 생각도 못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빼내 주는 사람, 인간이 보기에, 자기 보기에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되시는 분을 빼내시고 나머지 다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주의 이름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 사람들에게 찾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나가시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8장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어디서 오는 것도 모를뿐더러요,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제자들 비롯해서 아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 곳에 가셔요. 주님이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바로 그곳에 가는 겁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인간들 다 합쳐도 알 수 없는 곳에 내가 간다.” 그런 뜻이에요. 왜 그럽니까? 못 따라오도록, 따라올 수가 없도록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 5절에도 비슷한 말씀 나와요.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다. “주님, 날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신자라는 거예요. 나를 버리고!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가야 주의 이름 돼요. 인간의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주의 이름 아닙니다. 인간이 섞일 수 없는 곳에 가셔야 주의 이름이고 그것이 유일하게 질문자의 자격을 얻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나한테 괜찮은 것, 돌아오는 그것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어떤 시도, 기도라든지 헌신하든지 어떤 시도를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줄 수 있습니까?’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받아놓으면 그게 감사겠습니까?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감사하는 거지요. 자기의 노력에 감사하는 거지요.

그래서 지금 하박국 선지자의 이러한 따지는 것, 하나님께서 분명히 다 심판하신다고 하니까 하박국 선지자도 아브라함하고 똑같은 생각이에요. 의인이 있는데 의인까지 몰살시키면 이것은 제가 아는 하나님의 뜻과는 모순됩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하박국 선지자, 선지자는 선지자거든요, 하박국 선지자가 하는 말 가운데서 뭘 빼내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잘못된 기도를 두고서 그걸 뽑아내서, 아브라함의 기도도 합당할 수 있도록 뽑아내서 조카 롯만 뽑아내고 나머지는 다 전멸시키듯이 하박국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뭔가 잘 모르지만 선지자가 한 이야기 가운데서 빼내 가지고 처리합니다. 그게 뭐냐? 13절에 “어찌하여 궤휼한 자(악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이렇게 했을 때에 궤휼한 자, 악한 자가 의인을 이기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십니까, 라는 요 대목, 요 대목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고 그걸 빼내요.

빼내 가지고, 악한 자가 승리하게 되면 의인은 악한 자한테 패배당하지요, 악한 자가 승리하고 그 악한 자에게 패배당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의인의 원천으로, 의인이 처음 등장하는 그러한 계기로 삼아서 앞으로의 일을 진행 시켜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이를 궤휼, 악한 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기도내용을 참조로 하듯이 하박국의 내용도 참조해서 누가 악하냐? 여기에 진짜 의인을 삽입시켜요. 이 땅에 보내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만들어버립니다. 못 알아보니까 예수님을 무시하겠지요.

무시하니까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뭐가 되느냐? 궤휼한 자, 악한 자가 되어버려요. 악한 자가 되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모조리, 이 세상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정당성이 주님의 심판이라는 정당성과 합치되지요.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제가 위치선정이 잘못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악한 자에게 유일하게 구박받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음, 다른 인간은 악한 자와 한통속이지 구박받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그걸 증명하느냐? 인간들은요, 본인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 속임수만 체험을 해놓고 그 속임수에 빠졌다고 하나님 앞에 위로받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흔히 이러잖아요. “악마가 우릴 속였습니다. 그동안 나는 세상에서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제대로 안 속아봐서 그런 거예요. 본인의 힘으로 빠져나왔다면 이것은 속은 것 아닙니다. 제대로 속은 게 아니에요. 종교에 빠진 적도 없으면서 “나는 한때 종교에 빠졌습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너는, 당신은 아직 종교에 빠진 게 뭔지를 몰라. “거기서 겨우 나왔네.” 겨우 나온 게 아니고 아예 빠진 적이 없어요. 뭔가 해본 적도 없이 미혹에 빠졌다고 지레 세상 탓하고 있어요.

어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상당히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오는데요. 예쁜 아가씨가 차가 고장 나서 서 있으니까 그 동네 놈팡이 둘이 와서 뭐라고 하느냐? “도와줄까요?” 아가씨가 하는 말이 “아니 도움 필요 없습니다.” 그 놈팡이가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왜 내 호의를 무시합니까?” 아가씨가 이야기합니다. “내가 싫다잖아.” 내가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놈팡이 둘이서 여자를 공격했고 여자는 죽어라 내빼는, 영화의 시작이 그렇게 돼요. 살려면 무조건 내빼라. 그 대목에서 우리는 그 아가씨가 피해자고 공격자는 놈팡이 둘이 공격자라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지금 그 아가씨는 내뺐잖아요. 이건 뭐냐 하면, ‘저건 악인이야.’ 악인이 등장하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악인의 피해자로 코스프레가 돼요. 위장이 되어가지고 나는 내빼면서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저 악인과 같이 아니하는 의인’이라고 자부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놈팡이 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와줄까요?”라고 했어요. 도와줄까요. 도를 아십니까, 비슷한 거지요. 구원받았습니까, 이렇게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도와줄까요. 도와줄까요, 이 말은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그 말을 저 두 놈팡이가 왜 하느냐? 모든 인간은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누가 와서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모든 인간은 공통적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든, 예수님이 도와주든, 누가 도와주든 착한 분이 오셔서 도와주면 좋겠다. 그러면 왜 그 아가씨는 놈팡이의 호의를 거부했는가? 놈팡이거든. 딱 봐도 놈팡이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괜찮은 사람이 와서 뷰티가 팍팍, beauty, 뷰티가 나면서 자기 차보다 더 고급 차 타고, 너무나 친절한, 인격적이고 어질게 생긴, 품성이 뿜뿜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 그것도 남자가 아니고 더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와서 “도와줄까요?” 하면 도와달라 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남한테 도움받을 자격 됩니까? 우리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 안 하기 때문에 자꾸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게 돼요. 인간은 인간을 도와줄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죄인이에요. 그걸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는가, 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그저 내가 하는 시도로 인하여 좋은 효과, 결과가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성경 보고 교회 참석하는데 “하나님, 나 절대로 도와주지 마세요.” 감히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듭니까?

바로 마태복음 4장에서 인간의 본체가 다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는데 어떤 인간도 시험받을 위치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표로 시험받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악마로부터 시험받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한통속이기 때문에. 마귀하고 같은 편인데 뭘 시험해요? 마귀가 웃겠습니다. ‘너 내 편이야.’ 같은 편끼리 무슨 시험을 합니까? 뻔한데요. 뻔하잖아요.

내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놨는데요. ‘주여, 도와주소서.’ 내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놨다고요.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인간은, 자기가 도와달라는 질문자의 위치선정이 옳은가, 그것을 안 따져요. 무조건 도와주면 고맙고 안 도와주면 화나고 그런 거예요.

그러나 마태복음 4장에서 성령께서 유일하게 악마와 대결하고 악마에게 시험받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시험이 나오는데 돌이 떡 되게 하는 것, 말씀대로 뛰어내리면 천사가 우르르 몰려와 가지고 안 다치게 받쳐주는 것, 그리고 세상 부귀영화를 가지는 것,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내부가 예수님에게 도와주겠다고 제의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육신으로 왔다 하는 것은, 그 인간의 육신이 어떤 식으로 악마한테 회유당해서 이미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인지를 그걸 그대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 갖다 안긴 거예요. 맡긴 거예요. 악마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내부에서 예수님 본인의 이야기로서 예수님은 그걸 받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시험이 끝나고 나서 천사가 와서 수종 드는데요. 천사들이 예수님을. 그 당시 유대 나라가 로마의 압제를 당하고 모든 백성들이 압제를 당해요. 세금도 많이 내고 인간의 존엄성, 가치, 전부 다 짓밟히고 2등 국가, 2등이 뭡니까, 3등, 4등 국민으로서 노예 생활 하듯이 그렇게 보면 돼요.

자유는 있지만 그냥 종노릇하는 거예요. 애굽의 종노릇 하듯이. 따라서 천사들이 도와주는 것은 이 국가, 이 국가 로마를 정복시켜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데 천사가 예수님이 선봉장 되라고 수종 들지 않습니다. 시험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천사들이 와서 수종들 때 힘내세요, 하고 수종 드는데 이 천사들이 예수님을 어느 곳으로 모시느냐 하면, 사람이 올 수 없는 곳으로 모시고 가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악마의 소리, 자기 내부의 소리, 자기 내부의 소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내부를, 육신을 악마가 쥐고 있으니까 그 내부의 소리를 어떤 인간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가신 곳에 인간은 갈 수가 없고 갈 생각도 없는 거지요.

예수님의 시험은 이겁니다. 예수님의 자기 생각에 대해서 본인이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시험받기 전에 뭘 했느냐? 금식을 하셨거든요. 40일 동안 금식의 취지가 뭐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거부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와의 결별입니다. 이거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합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어느 쪽이냐?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겨서 자기 앞에 하나님을 세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자기 메시아를 인간이 보이는 앞면에 세우는 것이 아니고 뒤쪽에 세워요. 인간 뒤쪽에. 인간 뒤쪽에 세워버리면 인간들은 늘 눈이 앞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던지는 시선이 앞에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도 같이 앞에 있어요. 뒤쪽으로는 가리고 자기 뒤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뒤쪽으로 가 있어요. 뒤쪽에 누가 있느냐? 인간들 앞장세우는 악마가 있는 곳이지요. 그 악마를 경유해야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갈 수 있어요. 악마를 경유 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악함의 원천, 궤휼의 원천, 악함의 원천을 경유해서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지금 하박국은 갈대아,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죽이니까 죽여서 멸망하는 그 조치보다도 내부적으로 먼저 정화시키면 낫지 않습니까, 물론 심판은 있겠지만 그중에서 택한 백성은, 아주 택한 백성은 따로 남겨서 구원해줘야 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하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만세 전부터 우리와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기에 우리 이스라엘이 아주 망하지는 않는다는 하나님의 원칙과 합치됩니다, 이런 제안을 한 거예요.

하박국은 계속해서 육적인 이스라엘에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는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어요. 육신이 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육신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육신 속에서 제대로 말씀대로 인간의 육신은 인간 전체가 제대로 악마에 속한 악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들춰내고, 그래서 그 죄인과 결별 되는 상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의, 하나님의 의인 그게 바로 의인이 되는 거거든요. 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자기로부터 빠져나온 사람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엄마가 딱 보니까 형제간에, 자식들 간에 막 싸우잖아요. 싸우니까 엄마가 최후통첩을 합니다. “너희들 싸우든지 말든지 나는 내일 아침에 보따리 싸서 이 집 떠날 거야.” 그러니까 하박국 같은 아들이 있다가 하는 말이 “엄마,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판정을 해주고, 가려주고 떠나야지요.” 이렇게 된 거예요.

이게 뭐냐하면요, 아직도 자기 육신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의미는, 내가 의미를 내세울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것,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야 나오는 의미에요. 이게 내가 무의미할 때에 나오는 의미라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지요. 자꾸 예를 드는 이유가, 말이 자꾸 어렵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러분 한번 물어볼 테니 속으로 답변하세요. 여러분 강물이 본질입니까, 수력발전소가 본질입니까? 인간이 강물을 그냥 가만두지 않지요. 인간에게는 수력발전 에너지 만들어낼 때 강물이 강물로서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 의미를 없애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의미를 없앤다는 말은, 수력발전 한번 해 볼까, 우리한테 유용되게 해볼까, 라고 생각하는 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뜻이에요. 조금 어렵습니까? 그러면 방금 한 문제도 둘 중 하나지만 또 이야기해 볼게요. 망망대해, 넓은 바다에 외롭게 배 타고 갈 때 아무것도 안 보이고 바다만 보일 때 바다가 있다는 게 신기합니까, 육지가 있다는 게 신기합니까? 이것은 쉽지요.

육지가 있다는 게 신기해요. 왜? 바다가 넓어도 너~무 넓어. 배 타고 한번 가보세요. 배 타고 가보면 ‘육지가 왜 있지?’ 바닷물 보면 저 깊은 바닷물밖에 없어요. 가다 보면 간혹 육지가 보여요. 간혹 가파도, 마라도, 제주도, 가끔 보이지 대부분은 뭐냐? 바다입니다. 너무나 우리는 우리 입장만 생각해요. 우리 위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있을 곳에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우리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지금 있어요. 우리가 살다 보면 죽는다고요? 아닙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아니고 삶이 죽음의 일부에요. 산다는 게 죽음의 바다에 가끔 보이는 섬같은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안개 같은 겁니다. 야고보서 4장에 의해서.

선지자의 답변 가운데 악인 나오고 의인 나왔어요. 하나님께서는 이걸 선지자의 두 갈래로 나눠버립니다. 오늘 제목은 ‘선지자의 두 갈래’에요 선지자로 하여금 궤휼, 악인이지요, 악인이라는 말을 끄집어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선지자 계통에서 메시아를 보내가지고 선지자가 언급했던 그 악인, 선지자가 언급했던 그 의인이 메시아를 통해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예수님의 악마와의 직접 대결로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악마와의 대결에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즉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시험받는 그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에요,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만 산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만 산다, 를 자기 육신에서 분리시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리된 육신은 악마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악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요. 악에게 죽임을 당해요.

그럴 때 하박국을 생각해 보세요. 악인이 의인을 이긴 거예요. 악인이 의인의 육신을 이긴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악인이 의인, 진짜 의인, 예수님이지요, 진짜 의인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그때 악이, 악의 정체가 그때 비로소 최후로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악마를 몰라요. 인간들이 귀신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어떤 인간도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때 비로소 악은 자기 정체를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48, 4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이렇게 했어요.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귀신들린 것이 맞다, “너는 귀신들렸다. 맞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바리새인 저희 아비는 악마입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으니까 바리새인 애비가 악마에요, 예수님께서 악마 쪽에 속한 사람을 만날 때 악마 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귀신들렸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예수님에 대해서 그 발언을 했으면 우리가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세상 불신자들로부터 너는 귀신들렸다는 것을 경유 하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잉. 예수님보고 귀신들렸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답변하느냐 하면, “네 말이 옳다.” 네 말이 옳다는 거예요. “내가 귀신들린 육신으로 태어난 것, 당신 말이 맞다.”

귀신들린 육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주께서 나로 성령 주셔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육신의 의미를 두고 감사했던 그 감사 말고, 도와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감사 말고 내가 무의미하다는 것, 진정으로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감사, 그것은 주님과 똑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고백입니다.

“그래. 내가 귀신들렸다. 됐냐! 나는 아버지를 공경하는데 너는 나보고 귀신들렸다 하는구나.” 이럴 때 우리는 내가 속을뻔해서 속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옴팍 속아야 돼요. 옴팍 속아서 절대로 그 속임수에서 내 힘으로 빠져나오면 안 돼요. 그것은 내가 나를 지금……,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조작하지 마세요. 진짜 인간은 본인한테 속아야 돼요. 본인한테 속아야 본인한테서 못 빠져나오고 주님께서, 성령께서 거기서 뽑아내 주십니다. 나한테 옴팍 속아요.

성령께서 빼줄 때 비로소 우리는 나의 뒤쪽 면을 봐요. 달의 뒷면 보듯이 우리는 나의 뒤쪽 면을 보면서 ‘아, 옛날에 저렇게 육신이었구나. 의미도 없으면서 의미 있는체했구나. 주여, 매일의 삶 속에서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마시옵소서.’ 이게 진정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얻을 것 얻으려고, 챙기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 이것이 나한테 기어이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이 주신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그동안 내가 나를 속여왔음을 이제는 알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