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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08강, 409강) 대화, 돈 221018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08강, 409강) 대화, 돈 221018

정인순 2022. 10. 19. 11:02

408강                    음성                    동영상

409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08강-YouTube강의(대화 아가 6:3)20221018-이 근호 목사


제408강, ‘대화’.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는 인생길에 동행하고 싶은 사람을 찾는 작업,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은 인생이라 할 수 없고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서 같이 가고 싶을 때. 마음 맞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대화가 되는 사람, 대화가 이어지는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상대를 찾는 거죠, 내 인생이라는 게. 자기가 가는 길의 동행자. 옆에 붙어있다고 동행자가 아니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행자와 함께 하는 게 어떤 의미에서 우리네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내 말과 상대의 말이 만나서 거기서 의미체계가 형성됩니다. 아름다운 의미가 만들어져요. 혼자 있으면 내가 왜 사는지 모르는데 상대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아,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너가 있으매 네가 있는데 내가 필요한 사람이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살아야 되겠구나.’ 또 상대도 마찬가지고 ‘너가 있으매 내가 있게 되었다. 너가 있으매 내가 있다는 뜻을 알겠다.’ 그래서 서로가 만나서 의미 있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게 인생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한 사람만 하면 또 그 밑천 다 바닥나잖아요. 그럴 땐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또 대화가 이어지고 그것도 바닥나고 별로 들을 게 없으면 또 새로운 사람 만나고 이게 인생살이 같아요. 사람 사는 것.

그러면 그렇게 누구 말 통하는 사람 만나는 게 잘못인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혼자 뭐 도 닦듯이 산 속에 살아야 되는가. 그렇게 반박이 들어올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홀로 살지 못하고 이야기 통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것을 훤히 잘 아십니다. 아시는데 이야기가 제대로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해야 된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게 아가서 6장을 보면 나오는데 구약 아가서 6장 1절에서 3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여자의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가 거기에 대해서 화답을 하죠.

그러니까 아가에 나오는 이 여자 주인공은 솔로몬 만나기 전에 이미 자기들끼리 이야기가 나름대로 통하는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현재 있는 그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어디를 바라보게 하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이제 사랑의 레벨, 사랑의 위층, 사랑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현재 친구와 대화하고 인생 그걸로 끝나는 걸로 마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랑의 세계가 또 기다리고 있으니까.

2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이 사랑하는 사람, 아가에서는 여자 같으면 남자, 남자 같으면 여자 서로 짝을 이루어서 하나는 신랑이 되고 하나는 신부가 되는 그런 짝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 짝을 구성하면서 우리가 무엇에 유념해야 되느냐 하면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화가 된다는 겁니다. 서로 대화가 돼요. 왜 찾는가? 말을 섞고 싶어서 찾는 거예요. 말이 통하니까 찾는 겁니다.

말이 통하지도 않는데 찾는 사람 봤어요? 없죠.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걸 평할 수 있는 사람을 기어이 찾고야 말리라. 찾아다니는 그 세월이 인생살이에요. 인생살이입니다. 이걸 탓할 수는 없어요. 모든 인간이 타고났으니까. 혼자 못 사니까. 그런데 그렇게 대화를 하더라도 어디까지 격상되어야 되느냐 하면 완전한 사랑의 세계, 사랑의 나라까지 이 대화가 격상되어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랑의 나라에 같이 가자는데 장소가 어디냐? 동산인가? 백합화 핀 곳인가?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 곳인가? 향기로운 꽃밭이고 푸른 언덕인가? 여기 아가서 내용 전체를 보게 되면 아가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대화하는 대화 무대 전체가 완전히 다채로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요.

물론 결혼식장에 가면 화사하고 단아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죠. 결혼식은 그렇게 아름답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결혼식장의 주인공이 꽃입니까? 동산입니까? 백합이 주인공이에요? 아니죠. 주인공은 따로 있죠.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남자와 여자가 대화가 되고 이야기가 되면서 그 이야기 내용이 무엇인가. 이야기 내용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러니 동산에 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예루살렘 궁전에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나는 너에게 도달하고 너는 나에게 도달하는 것. 나는 나를 버리고 너에게 소속되고 너는 너를 버리고 나에게 소속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 상실이 되겠죠. 내가 상실되겠죠.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쥐고 있지 않을 거죠. 진실한 사랑의 대화는 여기 있는 나 좀 잡아 잡수세요. 잡아가세요. 당신 품 안에 나를 품어주세요. 거기에 화답해서 저쪽도 마찬가지이고. 나를 가져가라는 거예요.

이 사랑의 자리에서는 특징이 뭐냐 하면 본인의 자아 주장이 날라가버렸다는 거예요. 상대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고 일임하는 거죠. 맡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는 나의 대행자가 되는 겁니다. 대행자는 성경에서 유명한 말이 중보자에요.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을 만나서 나를 그에게 인계해버리는, 그럴 때 필요한 그 대화. 그 대화가 통한다는 겁니다. 나 이런 게 있는데 이것 좀 당신이 가져가주면 안되겠어요? 나한테 이런 게 있는데 당신이 맡아주세요.

오천만 땡겨주세요, 가 아니라 내 것을 당신이 가져가세요.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아가에 나오는 사랑의 장소입니다. 사랑의 장소를 못 만나면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행복해질 자리를 찾아요. 아, 천국 가고 싶다. 왜? 천국은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으니까 내가 살기에 얼마나 편한가. 이게 인간들이 노리고 있는 잘못된 천국이에요.

천국에서는 나를 상실해버리는 겁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니고 내 것을 다 가져간 그분이 사는 곳. 나는 그분의 곳에 내 것 가져갔다는 그 조건 하에 나는 거기에 합류하는 세계.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달라고 달라고 하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가져가세요 주님, 가져가세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져가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나한테 소속된 것을 나는 그대에게 소속될까. 소속되고 싶습니다.’ 하는 그 대화. 그 대화가 사랑으로 격상된 성도만이 아는 천국 속의 사랑의 대화입니다.


409강-YouTube강의(돈 누가복음 16:13)20221018-이 근호 목사


제409강, ‘돈’. 돈에 대해서 역시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언급하는가.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여기 돈에 대해서 재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편을 뭐라고 이렇게 돈과 결부시키느냐 하면 섬기고 있다는 거예요. 돈을 섬기고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간들은 섬긴다 할 때 돈을 섬긴다는 말을 사람들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섬긴다는 말을 어디와 결부시키느냐 하면 하나님과 결부시켜서 하죠. 저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돈은 사용하고 활용하지, 돈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가 그렇다고 여기면서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섬김의 라이벌로 섬기는 대상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딱 지정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너 하나님 섬기나, 안 섬기나?” “섬깁니다.” “오케이” 이게 아니라, “돈과 하나님이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걸 섬길래?” 라는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 섬김의 판단을 내리겠다는 거예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돈은 내 관리 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 13절 초반부터 보게 되면 그걸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그 주장을 거부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둘 다를 사랑할 수 없는 그 대상이에요. 나는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돈도 사랑합니다, 는 네가 돈을 몰랐기 때문에 마치 둘 다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나?” “사랑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돈을 미워할래? 돈을 미워하는 조건 하에 하나님 사랑한다는 걸 내가 받아줄게.” 이게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입니다. 주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그 주변에 뭐가 있느냐 하면 돈 사랑이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주시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13절의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해도 돼요. “너는 어느 것을 잃어버렸을 때 네 정신이 나갔더냐?”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정신이 나갔더냐, 돈을 잃어버릴 때 정신이 나갔더냐?”

“저 하나님 생각이 안나요. 나 이거 더 살 가치도 없어요. 콱 죽을 거야.” 뭐 이런 거. 마포대교에 가서 뛰어내릴 때 “왜 자살합니까?” “나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아요. 지금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이래서 뛰어내리는 사람, 자살하는 가운데 몇 명 있어요?

그런데 마포대교에 가서, 그것도 대교에요 작은 다리가 아니고 큰 다리, 뛰어내릴 때 “왜 그렇습니까?” “돈을 잃었습니다. 돈을 잃으면 나의 전부를 잃은 겁니다. 그게 마지막 쌈짓돈인데 그것마저 날아갔어요.” 그렇게 뛰어내리면서 마음속으로 외치는 게 있어요, 공통적으로. 하나님 미워! 그것 봐요. 하나님 밉다잖아요. 누가복음 16장 13절 딱 그대로잖아요. 내가 원하는 돈을 내가 귀하게 여기는 돈을 계속해서 공급하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미워할 거야! 미워할 거야.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돈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고만고만하게 생활비도 겨우 되는 사람한테는 이런 이야기 안 하셨어요. 왜? 생활비만 겨우 벌고 한 달에 별로 저축도 못 하는 사람한테는 섬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본인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냐 돈이냐 뭔가 나 빼놓고 적체하고 쌓아서 대상으로 버젓이 가치가 있는 대상이 뭔가 뚜렷하게 이렇게 있을 때 ‘나 누구를 섬길까?’ 이런 게 되는데 뭐 하나님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돈도 좀 있다 싶으면 생활비로 다 나가버리고 기름값으로 다 나가버리고 없을 때는 누구를 섬기느냐가 성립 안돼요.

그럼 누가복음 16장에서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느냐?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거예요. 이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생활비 벌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빙자해서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축복된 증거물을 크게 크게 확장시켜서 자기 눈앞에 버젓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에게, 너 어느 것 섬길래? 뭐 섬길 여유가 있어야지. 뭐 있어야죠. 벌었다 하면 다 나가버리는데 섬길 대상이 없잖아요. 복 받았다는 확증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 너 가치 있다. 너 참 대단한 의인이야. 넌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나님께서 말로 하시지 말고 돈이 계속 쌓이는 돈의 분량이 늘어나는 것으로 저한테 실제적인 현상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런 식으로 가르쳤어요.

바리새인들은 그걸 율법 핑계대요.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율법대로 사는 사람, 우리 바리새인같이 서기관같이 이렇게 율법대로 사는 사람들은 부자 되는 게 마땅하기 때문에 세금 내. 너는 세금 내. 우리 귀한 줄 알고 율법 지키는 게 귀한 줄 알면 세금 내.

그러면 그들은 돈을 얻고 동시에 뭐를 얻느냐? 누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돈이 많다는 것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제가 남들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옳게 살고 있다는 그 증거를 돈이 계속 들어오는 것으로 확정지어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나는 옳게 되고 옳으면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높임을 받는 것이 됩니다. 라는 그런 노림수를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딱 정확히 알아야 될 것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차이나는 정도가 아니고 정반대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욕망에 따라서 욕망에 부응해서 본인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처신하느냐, 와 똑같은 거예요. 내가 부자 된다는 것은 내가 옳게 살았다는 뜻이고 옳게 살았다는 것은 하늘의 복을 받았다는 뜻이고 하늘의 복을 받았으니까 나보다 복이 적은 사람, 돈이 적은 사람은 하늘나라 가는 길목에 내가 버젓이 하나의 모델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처럼 살게 되면 하나님께 사랑받아서 부자 되고 천국갈 수 있습니다, 라고 자부심을 가질 때 어느 인간이 그 인간을 부러워하지 않겠어요? 높임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세상을 사는 목표요 목적이었던 겁니다.

이게 바리새인만 그럴까요? 평생을 그날 벌어 그날 다 써버리는 그런 인생을 목표로 해서 누가 살아갑니까? 나도 재놓고 쓰고 싶다. 나도 쌓아놓고 빼서 쓰는 좀 그런 재미 누리고 싶다. 누구도 그런 생각 들 거예요. 집에 한 백억 정도 해놓고...... 입생 로랑, 샤넬, 루이비통 하여튼 철마다...... 그리고 프랑스에 유명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 그런 사람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들.

나도 즐겁고 내가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에서 우리는 벌써 돈을 섬기는 것이 나를 섬기는 수단이 되고 방법이 된다는 사실이 은연 중에 우리 몸에 배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주십니다. 돈을 주시고 진짜 네가 하나님을 섬기는지. 그것도 푼돈 주는 게 아니고 재어놓고 주시고 어느 것을 섬기는지를 늘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측정케 하는 그 기쁜 날이 올 겁니다.

글쎄 그게 기쁜 날이 되는지 아니면 말씀이 말씀되고 현실이라는 그 자체를 아는 게 기쁜 날인지, 그것은 그 사람의 속성에 달려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