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04강, 405강) 꿈. 상처 220920 본문
녹취:이한례
404강-YouTube강의(꿈)20220920-이 근호 목사
제 404강 꿈, 꿈은 인간치고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꿈은 꾸이는 거죠. 어떤 인간도 꿈에 대해서 자기가 의도한 대로 꿈을 꿀 수는 없어요. 피동적입니다. 꿈의 내용을 자기가 조작할 수도 없어요. 나타나는 그대로 자기는 그냥 방관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옛날부터 꿈은 인간의 권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살아계신 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암시나 미래 계획을 미리 알려주려고 꿈을 동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뭔가 붙잡고 싶은 마음 뭐라도 신기한 거 잡아서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고 초월해보려는 이 난관을 이겨보려는 그런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요셉이 꿈 꾼 거 너무나 유명하지 않습니까? 요셉이 꿈을 꿨다. 그리고 야곱이 꿈을 꿨다. 그렇다면 나도 같은 인간인데 신의 계시를 꿈을 통해서 안 받을 리가 없다. 나도 꿈 가운데서 그럴싸한 꿈, 신기한 꿈, 하나님의 계시 용도로 대체할만한 그런 꿈은 내가 좀 이렇게 기억해 놨다가 붙잡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그런 식으로라도 억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꿈은 다시 말씀드리면 꿈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권한 바깥으로 나가 있으면서 나에게 무슨 정형화된 내용을 전한다는 점에서 마치 꿈은 계시처럼 자기 확인을 바라고 있죠. 내가 다룰 수 없는데 또 일방적으로 나한테 부여한 거니까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계시 성격과 유사하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신기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고 싶은 거예요. 꿈을 통해서. 그런데 인간들이 하는 꿈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떤 종류의 꿈이냐 하면 알 수 없는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꿈, 꿈이 나를 지배해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꿈속에 있을 때 그게 현실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그런 꿈이 있어요. 이건 뭐 모든 인간이 다 꿈 꿀 때 그렇죠. 꿈꾸면서 빨리 꿈에서 벗어나서 빨리 내가 깨야 되겠다. 그건 꿈이 아니겠죠. 자기가 의식하는 거니까. 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그게 꿈이 되는 겁니다. 상당히 수동적인 방식이고, 보통 생각하는 꿈은 그런 꿈들 이예요. 일방적으로 수동적으로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서 식구들에게 ‘난 어떤 꿈꿨다. 신기하더라. 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지?’ 이렇게 묻는 거 보통 꿈이죠.
그런데 또 어떤 꿈이 있느냐 하면 깨어나지 않으려고 꿈을 꾸는 게 있어요. 꿈의 내용이 너무 맘에 드는 거예요. 그래서 꿈속에서 ‘제발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 계속 꿈속에 있고 싶은 거예요. 혹시 꿈에서 깨어 날까봐 꿈속에서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방어적인 방식 이예요.
평소에 이런 꿈들을 사람들이 꿈인지 아닌지 경계가 모호한 가운데 이런 꿈들을 꿔요.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평소에 살아가면서 방어적인 방식으로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방어적인 방식. 방어적인 방식이라 하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는 어떤 것으로 대비가 철저해야 된다. 그 단단하게 외부 내 세계를 깨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단단하게 조치가 잘 돼 있어야 된다. 라는 그 열망, 그 소망이 얼마나 강력했으면 어떤 괜찮은 꿈이 나왔을 때는 그 꿈에서 안 깨려고 하죠.
그래서 어떤 노래 가사에 “깨지 말았으면 ‘ 하는 노래도 있어요. 이게 너무 좋아서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가사도 있어요. 그만큼 인간은 독자적인 욕망을 스스로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꿈을 꾸는 겁니다. 둘 다를 이렇게 결합해서 꿈을 설명하면, 꿈의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본인의 삶을 본인이 다 주을 수 없다는 것, 이게 제가 첫 번째 말씀드리는 내용 이예요. 인간은 자기가 들었던 감각이나 이런 모든 것을 자기화 시킬 수 있는 영향이 되질 못해요. 어떤 것은 흘려보내고 이래요. 자기 것이 되지 못한 것이 잠 잘 때 마귀가 자기 맘대로 막 쏟아 나오는 겁니다. ‘내가 이런 일이 있었어? 내가 이런 것을 생각했었어?’ 이게 나오는 거죠. 이건 수동적이죠.
그런데 평소에 ‘난 이렇게 되고 싶어’ 라고 자기 욕망을 달성할 때는 그게 꿈의 내용일 때는 그걸 강력하게 그 사실을 지키려고 합니다. 왜 꿈속에서 너무 멋있게 되었으니까. 이것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강력한 자기 의지를 또 표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둘을 합쳐 버리면 인간은 세상 돌아가는 것은 다 모른다. 동시에 일단 내 것 괜찮다 싶으면 이건 무작정 이걸 지키려고 한다. 방어적인 방식. 그래서 이 꿈의 내용을 통해서 평소에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가 꿈을 통해서 다 들통이 난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꿈은 어떻게 보느냐. 성경에서는 꿈에 대해서 요만큼도 기대하는 거, 그거 용서하지 마라.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신명기 13장에 나옵니다. 13장 1절과 3절과 5절에 보면 나오는데요. 성경 읽기 전에 먼저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꿈꾼다는 거 다 알아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열망과 희망을 꿈을 통해서 신의 계시처럼 계시라고 자부하기를 원하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겠죠.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비치겠죠. 그게 자기잖아요. 꿈은 누굴 두려워하는가. 꿈은 의식의 거울에 비친 자기의 야심이고 야망이고 자기의 희구고 희망 이예요. 그러니까 잘 때도 깰 때도 인간은 자기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내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알아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같은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봐요. 저 내용을 위해서. 남의 꿈을 내가 이해 못하잖아요. 그처럼 내 속에서 나왔기에 은근히 친밀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밤이나 낮이나 자기 범위에서 못 벗어난다. 그 이야기 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범위에서 못 벗어나는 걸 가지고 거짓 선지자들은 이 꿈 꾼 걸 가지고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신명기 13장 1절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5절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뭐 무시하라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죽여 버려라. 선지자나 꿈꾸는 자를 죽인다는 말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일단 죽이라 하는 말과 같은 말 이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장래에 어떤 큰 일 앞두고 궁금해서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을 찾아가서 무당한테 ‘내가 앞으로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되십니까?’ 물어보려는데 신이 계시해서 “죽여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무당을 죽인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무당한테 묻고자 하는 나를 죽인다는 뜻 예요. 그게. 그 율법은 꿈 꾼 자나 선지자 속의 꿈 꾼 자를 죽이란 말은 율법이 날마다 우리 자신의 드러나는 야심과 야망을 ‘니가 죽이라.’ 하는 말과 같은 말 이예요. 주님은 우리의 야심과 뜻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거 죽이고 다 죽이면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남느냐. 율법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우리가 해석해야 되지 않겠는가. 율법은 우리를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죽일 이유를, 상황을 만들어서 우리를 죽입니다. 그러니 꿈꾸는 자를 따라가도 죽고 꿈꾸는 선지자도 죽고 율법으로 죽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율법을 대하고 죽어야 될 이유가 율법은 우리가 죽어야 될 이유를 알려주고 꿈꾸는 선지자 이런 자들과 함께 해버리면 ‘나는 죽어서는 안 돼. 난 더 오래 살아야 돼. 난 성공해야 돼. 멀쩡한 나는 계속 멀쩡해야 돼.’ 자기 자신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매일 밤만 되면 꿈꿉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의하면 우리 자신을 내가 선지자로 옹위하고 옹립하고 싶어요. 독자적으로. 율법에 의하면 십자가로 다 됐다. 고만해라. 니가 따로 계시 만들지 마라. 십자가 앞에서 니가 죄인인걸로, 그걸로 모든 계시는 끝! 종결된 겁니다.
녹취:이하림
405강-YouTube강의(상처 스가랴 13:6)20220920-이 근호 목사
제405강, ‘상처’. 상처라 하는 것은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느냐 하면, 아파서는 안 될 사람이 억울하게 육체에 손상 입었다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상처 그 자체는 그런 의미가 아니지만 이상하게 누가 상처 받았다 하면 안 아파야 될 사람이 아팠어, 라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해요.
‘나 당신 때문에 마음에 상처 입었어.’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원래 깔끔하고 깨끗하게 한평생을 보내야 마땅한 그런 건전한 사람인데 네가 들어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다, 라 할 때 상처라고 하죠.
그런데 이 상처라는 말보다 더 심화시키는, 상처를 더 키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게 있어요. 그냥 마음의 상처 같으면 한때 지나가는 감기 정도가 되는데 트라우마 같으면 이건 못 고친다 라는 뉘앙스가 강하죠. 이건 못 고친다. 틈만 나면 발작을 일으킬 요인이다. 이건 내 운명처럼 같이 간다. 트라우마.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말을 하면서 너무 깊숙이 박혀서 이 트라우마 뽑아내려하면 내가 죽어야 뽑아내지, 그 전에는 트라우마 못 뽑아낸다, 그런 뉘앙스가 커요.
성경에서도 상처는 두 가지의 의미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누구로부터 억울하게 공격당했다는 느낌이 하나 있어요. 또 하나는 공격당한만큼 공격한 자의 실체, 정체, 본질 이런 것을 철저하게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내 상처를 지우지 않겠노라 하는 뉘앙스가 있어요.
너 때문에 당한 상처를 내가 계속 안 지우고 그 흔적을 남겨두는 거예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냥 너는 몰라. 네가 나한테 한 짓으로 인하여 내게 생긴 상처와 서로 연결지어보면 비로소 네가 누구인지를 알 거야. 할 때 그 때 상처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스가랴 13장 6절에 보면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가랴는 마지막 때 예언이잖아요. 성경에서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중심으로 설명되는 겁니다.
좀 더 설명해드리면 세상 끝 날이 마지막 때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언약 상대자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는 그때가 마지막 때에요. 이스라엘 망하면 나머지는 원래부터 망해져 있으니까 망하든 말든 그건 신경 안 쓰고 내 백성이 망하면 그게 마지막 때에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 망하면 그게 마지막 때에요.
역시 이 세상에는 인간 같은 인간 없구나, 그것이 판정받는 데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면 그걸로 내 백성 하나도 없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만큼은 내 백성이라 했으니까, 내 백성이라 했는데 내 백성이 전부다 배신했으니까 그건 뭐 세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죠.
이스라엘을 택한 백성 만들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과 모든 자연 질서들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돌아가거든요. 여호수아 전쟁할 때 해가 멈췄잖아요. 해가 멈췄어요. 하나님께서 해를 멈춘 것은 이스라엘 전쟁에 보탬 되라고 지시내린 거죠. 대자연도 이스라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깔끔하게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뭐가 남느냐? 그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에 가짜 선지자들이 설쳐대요. 가짜 선지자들이 설쳐대게 되면 누구의 존재가 희미해지느냐 하면 진짜 선지자가 소멸되어버려요. 가짜 선지자에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전략은 뭐냐? 진짜 선지자로 하여금 상처가 나게 해버리는 겁니다, 두 팔 사이에. 그것도 친구네 집에서. 아니, 친구네 집에서 상처받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친구네 집인데. 이것은 친구라고 여겼는데, 아하, 이게 원수였다는 것으로 드러날 때.
친구 사이 같으면 서로 상처 줄 일이 없어요. 서로 보듬어주고 위로하죠. 상처는 어떤 경우에 생깁니까? 저 인간을 죽여 마땅할 때 원수지간에 생기잖아요. 그런데 친구로 모였는데 친구인줄 알았는데 그 친구가 얼마나 불만이 크고 분노가 심했으면 친구가 친구에게 두 팔 사이에 상처를 남기겠습니까.
제가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성경에서 상처란 분명히 억울한 면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보존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치료되면 안돼요. 계속 유지되어줘야 상처에 근거한 처벌과 심판이 성립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좋은 사람끼리 모여서 하하호호 웃으며 자기들끼리 상처 없는 깔끔한 삶이 되기를 원해요. 마치 저쪽에서 하얀 옷을 입고 왔으면 이쪽도 하얀 옷을 입어줘야...... 둘 다 하얀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때 묻히지 말자, 라는 뜻이거든요. 우리 흙탕물 튀기며 그런 장난치지 말자는 뜻이죠. 둘다 깔끔 떨자.
그런데 인간들의 희망은 인간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지혜롭고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서로가 합의하에 단결해서 그걸 증명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인간들 사회는. 심지어 깡패 사회에도 의리가 있는 이유가 그거에요. 남들은 깡패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우리끼리는 절대로 의리, 의리 하나로 뭉치자. 그렇게 양아치들 모여서 짜장면 먹으면서 형님 하나 드세요, 그래 들자. 이러다가 마 형사 나타나면 얻어맞고 그렇게 되죠. 마동석 나타나면 한 대씩 맞고 하잖아요.
인간들끼리는, 상처받는 것은 그들이 어쩔 수 없는 경우는 모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상처는 안 남기고 싶어요. 그걸 누가 아시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의도적으로 상처받는 일을 벌이신 거예요. 그럼 진리는 뭐냐? 그 상처가 진리에요.
상처가 진리입니다. 내 옆구리의 창자국과 내 손의 못자국이 진리에요. 멀쩡한 인간들이 강연하는 게 진리가 아니고! 필즈상 받고 노벨상 받은 사람이 서울대학에서 외친다고 그게 진리가 아니고, 인공지능 발명한 게 진리가 아니라 상처가 진리에요.
시편 38편 5절에 보면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11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스가랴하고 비슷한 말씀이죠.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종 진리는 너나할 것 없이 다 그래요. 우리가 얼마나 멀쩡하고 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고 인간이 어느 정도로 깨끗하게 살 수 있냐는 쪽으로 그 최종적인 것, 진리가 그쪽 방향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점점 더 향상되어가는 거요.
이런 것은 우리가 꼭 말 안 해도 여러분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에게서의 자녀다움, 역시 나는 네가 될 줄 알았어, 이건 뭡니까? 자기 아들보고 “역시 나는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어디 싸워서 상처받고 오면 그런 소리합니까? 아니잖아요. 상처받는 게 아니고 상처와는 너무나 저 반대쪽에 있어서 노벨상 탄다든지...... 노벨상은 너무 거창하다. 개근상 하나 타더라도 우수상이라든지 성적 우수상 그것만 타도 속으로 엄마가 시상식한다고 학교 강당에 가면 속으로 뭐라 하겠습니까. 내 그럴 줄 알았어, 하잖아요.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저게 바로 진리지. 뭐가 진리겠어, 하잖아요. 그런데 상 받고 내려오다 엎어져가지고 트로피 다 깨지고 상처 나보세요. 주님, 왜 하필이면 이 좋은 날에...... 이렇게 하죠.
진리는 모든 인간의 진리성을 피해갑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내 자식 잘되고 내가 잘되고 이게 아니라 어떤 특정 분의 손과 옆구리에 상처 난 것, 그게 all입니다. 상처의 all입니다.
그 때 도마가 뭐라 했습니까?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다. 진리를 처음 안 거예요, 진리를. 뭐보고? 내가 행했던, 나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주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를 염두에 둘 때 이 죄 많은 나를 염두에 둘 때 주께 일어나는 일이 뭔가?
그것은 새 언약입니다. 내 피와 내 살을 마시라. 이것이 유일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계약이고 그것이 바로 상처입니다. 십자가가 상처이고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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