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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나훔 2:11-13 / 옮기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나훔

나훔 2:11-13 / 옮기심

정인순 2022. 9. 14. 23:03

음성 동영상 Youtube

  수요설교정리

 

옮기심  

 

이근호
2022년 9월 14일               

 

본문 말씀: 나훔 2:11-13

(2: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2: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용맹스러운 앗수르 군사들, 그래서 천사의 모든 종족들이 다 두려워 떠는 압도적인 위엄을 갖는 제국 앗수르,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대단히 흐뭇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 될 나라를 건드린 겁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재물을 빼앗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이들 앗수르 군대는 그냥 ‘사자’라는 짐승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새끼를 먹여서 차기 또 사나운 사자로 키우기 위해 주변 국가를 거침없이 침노하여 양식과 재물을 강탈해 왔던 겁니다. 하지만 짐승은 어디까지나 짐승일 뿐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짐승 취급받아 그들의 근거지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 이들 앗수르의 교만과 거기에 대처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오늘날 성도가 익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앗수르의 통치자들과 그 수하의 군대들이 짐승으로 보이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거대 제국을 합리적으로 통치하고 운영하는 현명한 지혜자처럼 존경스러지기 마련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이나 유다 나라에서 앗수르에게 흔쾌히 조공을 바치면서 흠모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제국의 종교와 통치 방식을 모방하지 하려고 했습니다. (왕하 16:10) 앗수르 제국의 전쟁방식이나 정치형태는 인간의 두려움을 극도로 이용했습니다. 인간은 자꾸 무서워합니다. 뭐가 무섭고 왜 무서워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는 채 무서워합니다. 그것은 바로 본인들이 ‘무의미’하게 될까봐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주변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통용되는 의미들을 끌어모으게 됩니다. 즉 인간 세계는 나름대로 의미의 바다를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국가란 인간들이 친근하게 지니고 있는 그 의미가 중심부를 가지면서 안정적으로 갖추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국가의 지도자는 기껏 ‘사자’라는 짐승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짐승으로 그 본색을 드러내시는데 이는 인간들의 의미체제를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에게는 죽는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겁니다. 주변에서 들어오는 의미들을 자기쪽으로 끌어당시고 모으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 자아를 확정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다른 의미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새롭게 의미가 획정적으로 제공된다는 겁니다. 마치 이삭이 맏이에게 축복을 하려고 할 때에 야곱이 새치기 해서 아버지를 복을 본인이 받는 경우와 같습니다. 창세기 27:34에 보면,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에서는 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싫어 소리한다고 해서 마치 인생이 끝장 다 난 것처럼 절망적으로 크게 소리내어 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모님이 자신의 미래를 좋게 보지 않는다 손치더라도 본인이 이러한 자극에 분발하여 열심히 세상을 살게 되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에서는 자기 운명에 자기로서는 더는 할 게 남아 있지 않다는 식으로 크게 웁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9:13의 말씀처럼, 에서와 야곱의 운명과 팔자는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확정나 버렸습니다. 즉 인간들의 의미는 인간들이 개척해서 새로이 변경시키고 조성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선에서 결정 나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마음 속에 있는 이런 결정된 의미체계 대신,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로 정해지는 선악체계에 준한 의미체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2에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죄 안에’ 이미 갇혀 있는 꼴입니다. 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자폐증 환자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우선 자기 의미부터 챙기려고 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인간들의 선악체계에 의해서 등장된 신이 ‘도덕 신’입니다. ‘도덕 신’이란 신께서 악인에 대해서 벌을 내리시고 선한 자에게는 보상을 해주신다는 신입니다. 즉 신께서 악에게만 심판을 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 하나님께서는 선인이고 악인이고 다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두 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게 된 성도는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 세계 자체가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그 의미로 갖추어진 세상이 아니라 오직 성경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세계라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 의미체계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졌으며’ 확정되어짐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에게는 죽음보다 더 확실한 사실을 준비해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지옥을 대행하는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성도를 옮겨주시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아브라함은 이 땅을 살면서 이 땅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히 11:8)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다음과 같은 늘 물어오십니다.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까지, 어디까지 잃어버린 작정인가?” 즉 “너는 너 자체가 벌써 무의미한 것을 알고 있나?”입니다.

그 어떤 것도, 특히 우리 자신의 목숨값도 예수님의 목숨값과 족히 비교되지 않습니다. 모든 의미는 오로지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에게로만 귀결될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의미체제 자체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8강-나훔 2장 11-13절(옮기심)2209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2장 11-13절까지입니다.

나훔 2:11-13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뇨 젊은 사자의 먹는 곳이 어디뇨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식물을 충분히 찢고 그 암사자를 위하여 무엇을 움켜서는 취한 것으로 그 굴에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에 채웠었도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니느웨, 그러니까 앗수르의 그 용맹스럽고 강포하고 기계적인, 살벌한,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인정사정없는, 무시무시한 그 군대를 오늘 본문에서 사자(lion)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자들이 주변 나라에 흩어져서 열심히 용감하게, 맹렬하게 전쟁해서 얻은 것을 자기 집에 있는 새끼 사자들에게 또 먹이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 귀한 것들을 빼앗아와서 자기 나라에 있는 자식들을 자기들과 같이 또 무지막지한 짐승으로 키워내는 에너지로 그런 식으로 니느웨, 앗수르라는 국가가 지탱해 왔고 계속 지속해 왔습니다.

이 사자들의 흉포, 흉악스럽고 잔인한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곳이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를 입은 중에 이스라엘도 해당이 돼요. 그런데 그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을 힘이 없고 나라가 아주 작다고 해서 아주 무시했는데 그들은 잘못 건드린 겁니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들은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어느 민족치고 하나님 안 믿는 민족 어디 있느냐, 이런 식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그래서 나훔 선지자를 보내서 뭐라고 하느냐? 13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젊은 군대지요, 징집된 군인들, 젊은 하급군인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힘으로 강탈한 것, 사실 도둑질 한 거지요,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이 파견자라 하는 것은 대국이니까 자기가 예속되어 있는, 자기가 종속되어 있는 국가의 총독 또는 거기에 파견되어 있는 대사들, 이제 그들의 명령과 지시가 다시는 들려오지 않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지요. 어떻게 일하느냐? 이 땅에 있는 난폭하고 맹렬한 짐승들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황무지로 만드는, 다 없애버리는, 그들의 노력의 성과를 다 싸그리 사라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그러면 그 앗수르 나라에 대해서 그 전에 뭘 했는가? 이스라엘은 뭘 했겠어요? 그냥 굴복했지요. 조공 바쳤습니다. 왜? 그 앗수르 힘이 센 나라가 부러웠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언제 저렇게 막강한 군사력과 강한 군대 강한 병사들을 많이 확보해서, 많은 전차들을 확보해서 우리도 큰 나라 대국이 될 수 있는가? 부럽다. 방법은 있다. 여호와 버리고 그들이 믿는 신을 그들을 강대국으로 만든 그 신을 새로운 신으로 수입해서 섬기면 우리도 그 신의 혜택으로 큰 나라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일들을 이스라엘이 했지요.(왕하 16:10) 북쪽도 했고 남쪽 유다 나라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나훔, 예언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딱 둘이에요. 하나는 멸망되어야 될 앗수르 그 당국자들, 권력자들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딱 두 분만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자랑하는 군대를 다 멸하시고 그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다. 그 내용입니다.

자, 이런 내용을 나훔선지자가 예언을 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그 기본태도부터 다시 한번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같이 정립해도 우리가 모자라요. 정말 늘 정립해야 되는데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예를, 창세기 27장 34절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에서고 한 사람은 야곱, 쌍둥이지요. 아버지가 눈이 어둡고 이제 돌아갈 날이 되어서 두 아들에게 유언을 하는데 유언을 할 때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먼저 복을 내렸지요.

그다음에 허겁지겁 아버지가 준비하라는 사냥한 고기를 준비해서 아버지 마음을 흐뭇하게 하려고 뒤늦게 에서가 들어와서 상황을 보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요. 복은 동생이 인터셉트해서 다 가져가 버렸고 이제 자기에게 줄 복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33절에서 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시에 아버지 눈은 완전히 갔으니까요. 32절 먼저 보면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곧 “누구냐 너!” 이렇게 된 거예요. “너 누구지?” “제가 맏이잖아요.”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가 ‘아차 속았구나. 네 동생에게 내가 속았다’ 33절에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이 대목을 언급한 이유가 있어요. 성경을 대하는 태도, 성도는 매일같이 한결같이 이 자세 이 태도를 유지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예를 드는 거예요. 그럴 때 34절 보게 되면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크게 소리 지르며 통곡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대목에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사고방식하고는 너무나 판이하지요. 예를 들어서요. 오늘날 현대 21세기에 있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동생하고 두 아들이 있는데 동생한테 “너는 앞으로 잘 되거라.” 했는데 뒤늦게 형이 왔어요. 형을 보고 “형이냐?” “예” “내가 눈이 어두워서 안 보인다만 네가 형이구나. 너는 앞으로 빌어먹어라.” 이렇게 할 때 아버지한테 빌어먹으라는 그 소리 듣고 큰아들이 방성대곡합니까? ‘참 노인네가 벌써 치매기가 와서……’ 기분은 좀 나쁘겠지요. 동생을 편애하니까 기분은 좀 나쁘겠지만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아버지, 연세 많아서 노망기가 좀 왔는데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아버지가 나한테 저주스러운 이야기를 한들 그것은 현실에 안 먹힙니다. 앞으로 내가 하기 나름, 내가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동생보다 더 잘 먹고 더 잘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언제 철 날래요?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아버지는 예언을 믿습니까? 아버지는 아직도 운명이라는 것을 믿어요? 인간은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자기 팔자도 자기 운명도 다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고 본인이 개척해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입니다. 아들 되어서 늙으신 아버지한테 한 수 주제넘게 가르쳐야 되겠습니까? 아버지, 아버지! 좀 정신 차리세요. 그따위 예언이라든지 그런 것, 팔자타령 이 현대사회에서 안 통합니다. 아버지 그 말 듣고 나니 오히려 분발이 일어나네요. 오히려 더 열심히 살고 싶네요.”

그 뒤 이야기를 만약 드라마로 만든다면 “그렇게 하고 나서 아버지한테 미움받았던 형은 도리어 그 미움을 계기로 분발해서 더욱더 성실하게 살아가지고 아버지의 복을 믿었던 동생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끝. 뭐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창세기 27장에 보면, 에서는 그 소리 듣고 방성대곡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성경의 내용은, 성경의 세계는, 운명과 팔자는 지시에 따라서 확정되어 버립니다. 이게 여러분에 기쁜 소식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듣고 열심히 살면 앞으로 잘되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내가 말씀 듣고 실천에 옮기고 열심히 사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말씀 자체가 우리의 미래의 모습까지 이미 한꺼번에 단번에 확정 지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단번’이에요. 인간이 추가적으로 노력하고 애씀, 다 잘라냅니다. 그것 다 치워버립니다. 주의 말씀에 의해서 끝났어요. 천국에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그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와 전혀 무관합니다.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주님의 의지에 의해서 이미 확정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는 저주받으라”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에서가 대성통곡하고 있다는 것은, 에서가 믿음이, 정말 현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믿음 댓방이에요. 진짜 믿음 좋은 거예요. ‘나 끝났구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아버지를 통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확정된 신분에서 나는 요지부동 그걸 변경시킬 경우는 내 인생에는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대성통곡한 겁니다.

에서는 창세 전부터 영원히 저주받기로 하나님 사이에 이미 협의가 되어 있어요. 딱 마감되어 있습니다. 원서 마감, 합격통지서, 다 끝났어요. 바로 이 마음 자세, 이 태도, 성도라면 단 하루도, 하루도 빠트리지 말고 이걸 유지해 줘야 돼요. 이걸 유지하지 아니하면 우리 짐승 됩니다. 짐승 되어 버려요.

이걸 유지하지 아니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성도는 성경 안의 세계가 현실이지 성경 바깥의 세계는 전혀 현실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이 진짜 세계는요, 성경적 의미로만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거예요. 성경적 의미로만! 이런 것이 믿어진다는 것, 이게 수용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천국에 갈 수 없도록 운명과 팔자를 가진 인간들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마음 자세에요.

세상에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이 땅에서 얻어 챙긴, 어릴 때부터 할당받고 부여받고 계속해서 자기에게 쏟아지도록 끌어모은 그 의미는 이 세상에서 발굴한 것이고, 세상에서 날아다니는 것이고 통용되는 거예요. 그 의미만 계속 끌어모으는 겁니다. 그 의미만!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앗수르의 그 지도자 통치자가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사자에요. 건방진 사자, 교만한 사자, 난폭한 사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아무리 그 사람들 봐도 그게 난폭한 사자, 곧 멸망 당할 사자, 찢겨죽어야 될, 다른 사자들이나 짐승들에게 또 찢겨죽어야 될 사자로 우리 눈에는, 인간의 눈에는 확인이 안 됩니다.

도리어 확인보다도 그들이 하는 그 통치방법이 너무나 현명하고 생각이 깊고 멀쩡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더 와 닿지요. 그들의 통치하는 게. 그걸 지난 설교에도 했지만 굉장히 그게 친숙한 거예요. 그 의미체계가 낯설지 아니하고 저절로 동조하고 싶어요.

회사 다니는데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결정 내리면 ‘저건 짐승이야.’ 이런 생각이 듭니까? ‘아, 참 생각이 깊어. 역시 하나의 회사의 오너된 사람이 이것저것 다 생각하는 것이 일반 평사원과 달라도 너무 달라. 아, 존경스러워라.’ 이렇게 되지요. ‘짐승이야!’ 이런 생각 안 들지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요, 이게 앗수르의 통치자가 앗수르 제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합리적이고 생각이 깊고 거기에 똑똑한 사람, 아이큐 높은 사람, 앗수르에 서울대학 나온 사람 한두 명이 아니에요, 많다 그 말이지요. 일류대학 나온 사람이. 그 앗수르가 그대로 이스라엘 안 건드리면 그들은 멀쩡하고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다 유지가 돼요.

그런데 그 앗수르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나훔선지자로 하여금 멸망의 예언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건드리는 순간 그들은 멸망되어야 될 짐승이라는 새로운 의미체계로 인하여 그들은 지적받게 되고 그 팔자, 운명을 부여받게 된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하게 너희는 이 사자로서 찢겨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건진 것은 다 멸망할 것이다.” 괜히 건드려가지고 괜히 파멸의 예언을 그들은 사서 받아버렸던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이 앗수르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날 보통 인간들,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이 그 바탕에는 무서움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종교계도 그렇고 심리학, 철학, 생물학 총동원해서 인간은 왜 무서워하느냐, 인간이 무서워하는 이유를 아직도 인간들은 우왕좌왕하고 해답을 못 내려요. 인간이 무서워하는 이유를요.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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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오감도 중에서).

그런 시도 있잖아요. 일제 때 이상(1910-1937)의 시죠. 첫째 아이도 막다른 골목에서 무섭다고 그래요. 두 번째 애도 무섭다고 그래요. 어린애만 무서운 거예요? 어른은 안 무섭습니까? 어른도 무서워요. 그 어린애가 커서 어른이 된다는 말이지요. 인간들, 어른들은 안 무서운 척하면서 매 순간 늘 무서움을 밑에 깔고, 존재의 바닥에 무서움을 깔고 행동할 때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무서우니까 안 무서운 척하고, 무서움이 왔으니까 무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에 대해서 화를 내고, 분노 퍼붓고, 공격하고. 왜 공격합니까? 무서워서. 왜 무서운데? 모르겠어요. 왜 무서운지. 그거 성경이 밝혀줍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지혜를 짜내도 인간이 왜 무서워하느냐 모르는 것을 성경에는 나옵니다.

인간이 왜 무서워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은 짐승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이 땅에서, 이 짐승의 세계에서 긁어모은 그 의미가 소실될까 봐 의미에서 무의미로 넘어가면서 무서워하게 되어 있어요.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거 잃어버리면 나 아무 의미 없잖아.’ 그 의미 평소에 무심코 등장하지요. 내가 보이스피싱 당해서 한 2천만 원 날렸다. ‘아, 무서워라.’ 왜? ‘돈이 어떻게 번 돈인데 이걸 다 날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 돈 벌었는데 나는 그 돈에다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내 목적의식에 의해서, 투철한 정신에 의해서 노력했는데 그 돈 속에서 내가 갖고자 하는 의미를 거기에 다 집어넣었거든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창고에 곡식 채워놨다.’는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처럼 인간은 자기 존재의미가 살아 있으면 그걸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인간이 목숨 끊어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에요. 인간이 무서운 것은 내 의미가 사라지는 게 무서워요. 내가 왜 사는지 사는 의미가 없어질 때 인간은 가장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앗수르는 주님 보시기에 의미도 없는 찢겨 죽을 사자이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복해놓고 이겼다고 좋~다고 “봐! 앗수르 제국을 한 번 봐. 이 의미 있는 거대제국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큰소리칠 때 여호와께서 “그 의미 내가 다 없애줄 게.” 다 없애줬잖아요. 황폐하게 만들었어요. 의미도 없는 것들이, 짐승인 것들이, 이런 것들이 의미를 떡 찾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조선 시대 16세기, 1천 5백몇 년도, 명종에서 인조 사이에서 벼슬했던 송강 정철(1536-1593)이라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의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제가 아직도 외우고 있어요. 그 시조 내용이 이렇습니다.

짐승이 날 낳으시고 짐승이 나를 기르시니
두 분 아니시면 어떻게 짐승이 생겼을까
이 하늘 같은 가없는 은혜
이 짐승이 어이 다 갚으리오, 하는 시조예요.

아바님 날 낳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살아시랴
하날 같은 은덕을 어디다혀 갚사올고. (정철, 훈민가, 1580)

자, 송강 정철. 그 사람은 조선 시대 사람입니다. 조선 시대는 조선 시대 모든 사람을 조선 시대의 의미체계 하나로 묶어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조선이라는 것은 대대로 어지신 부모 잘 만나서 우리가 자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모를 공대하는 아름다운 풍토를 후손에 남길 의무와 책임이 있을 때 이 이 씨 조선이 이 씨 조선답게 의미 있는 나라다. 그거 앗수르입니다. 그건 니느웨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일상으로 평범하게 살고 말 던지는데 그 말 던질 때 실려 있는 그 의미가 어디서 온 의미냐 이 말이지요. 그들은 성경 속으로 못 들어왔어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역시 성경이지요, 갈라디아서니까, 하나님의 계시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죄에 갇혀 있어요. 죄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조선 시대건 앗수르건 간에 그들은 폐쇄구조 안에 있어요. 폐쇄구조 안에 있는 사람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자폐증 환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폐증 환자. 자폐증 환자에 있어서의 모든 의미는 자기 안에서만 나와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를 계속 만드는데 그 만드는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 계시라 하는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내 의미를 살려주는 하나님, 내 의미를 살려주는 약속, 예언, 그런 식으로 본인이 그런 것을 자꾸 제조해내요. 자기 안에서.

차트 가슴팍에 딱 대고, 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이렇게 자기를 가려요. 가리고 어떤 공간에 들어갈 때는 하나, 둘, 셋, 3초 기다렸다 들어가고. 나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왜? 의미가 나한테서 나오기 때문에, 의미가! 사람들은 이게 죄 아래 갇힌 형국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백 독해도 그걸 못 찾아내요.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성경 보는 내가 이 짐승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을 안 하고 어떤 중립지역에 있는 것처럼,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에서가 방성대곡한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 입장을 우리가 견지해야 돼요. 그게 뭐냐? 창세기, 다시 성경 이야기입니다. 먼저 말씀드리면요, 성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의미는 성경적 의미로만 꽉 차 있고 그 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도예요. 성경적 의미에요. 이 땅에서 나오는 의미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것은 엉터리고 성경적 의미만 꽉 차 있어요. 그냥 어떤 것도 말씀 바깥으로 안 나가요. 성경적 의미에 그냥 녹아져 있어요. 성경적 의미의 바다가 이 현실 세계예요.

세상은 주께서 확정된 대로 갈 뿐이에요. 요지부동이에요. 인간이 변경 못 합니다. 그 변경 못한 그 스토리, 내러티브(narrative), 서사구조, 이게 성경 내용이에요. 성경 내용은 선악체계,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되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신은 있다. 신은 있는데 어떤 신이냐? 도덕적인 신이다. 악인은 심판하고 선인은 복을 주신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악인들은 심판받아 마땅하고 선인은 복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고 선인은 상을 주고 심판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다 심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심판도 없으면 사람들은 성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왜 필요하냐? 자꾸 이상하게 늙어가는 게 무섭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심판이 무서우니까 성경을 봐서 사전에 어떤 해결을 보자는 거예요. 보험 들어놓듯이.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무섭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있던 나, 존재의 의미가 삭제되고 없어지는 것이 무섭다는 거예요. 원래 나한테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딴 사람은 지옥 가도 나는 지옥가서는 안되는 이유가, ‘저 사람이 의미가 있든 나는 모르겠는데 내가 확실히 하는 것은 나는 절대로 지옥가서는 안 되는 그런 의미가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입장에 의하면, 주님 입장에 의하면 인간이 늙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고 심판이 있더라도 성경은 필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게 어려워서. 인간은 늙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심판도 없고, 그런 것은 모를 것 같으면 사람들 대부분은 성경 안 봅니다. 교회 나오지도 않아요. 뭐 살다 늙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심판은 뭐 가본 사람이 있나 그런 것은 없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그러니까 교회 오겠어요? 성경 볼 마음이 있겠어요? 안 보지요. 그런데 ‘왜 늙지? 왜 죽지? 혹시 심판이 있으면 나만 손해인데. 그러면 교회 가야지.’ 이런 사람들이 교회 오는데 ‘그래, 인간은 늙고 죽고 심판이 있어.’라고 그렇게 생각해도 그 사람한테는 성경과 무관하다 그 말입니다.

왜? 성경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성경은 해석 불가입니다. 해석이 안 돼요. 왜 그런가? ‘왜?’가 지금 다섯 번째 나오는가? 성경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하고는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뭐냐? 도덕적인 신이에요. 그런데 도덕적인 신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왜? 도덕적인 신은 선악체계에서 양성되기 때문에. 선악체계에서 구성된 신이 도덕적인 신이에요. 선과 악의 신, 주님께서는, 선과 악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신을 하나님이 심판해 버립니다.

도덕적인 신은 뭐냐? ‘도덕적인 신은 도덕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도덕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 생각과 일치되고 동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인간을 처벌하지 않는다.’ 이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양심껏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바르게 사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하나님이 바르게 사는 인간을 처벌한다는 것은 하나님한테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모순된다. 불합리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르게 살면 처벌하지 않는다.’ 이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양심의 신입니다. 이게 마귀에요, 이게!

에서 야곱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야곱이 구원받은 것이 로마서 9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운명을 ‘단번에’ 이 ‘단번에’를 잊으면 안 돼요, ‘단번에’ 확정해 버렸어요. 확정했어요! 결정 나버렸어요! 마감, 원서 마감해 버렸어요. 끝났어요.

이걸 성령이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아, 내가 노력하는 것은 내 운명하고 상관이 없구나.’ 이게 성령이 와야 알아요. 주님의 십자가의 영이 와야 이걸 안다고요, 이걸! 정말 이거, 정말 너무너무 이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어떻게 천국으로 이동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5절에 옮긴다는 말이 세 번 나오거든요.

옮긴다는 말이에요. 이왕 하는 것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진짜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을까 봐 무섭지요. 그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안 옮겨지는 거예요. 그러나 에녹은 옮겨졌어요. 인간은 죽으면 내가 의미가 없다, 없음이 되잖아요. 없음보다 더 센 걸 주께서 준비했습니다. 그건 뭐냐? 옮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준비하신 것이 다른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한테 이렇게 물을 수가 있어요. “실례지만 신자이십니까?” “예, 신자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무엇까지, 어디까지 잃어버릴 작정이십니까?”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이 주님한테 받았다면 여러분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신자이십니까?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서 어디까지 잃어버릴 작정이십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나)의 목숨값에 견줄 수 있는 값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정답을 합니까? “없나이다”라고 해야지요. 내 목숨조차도 주의 목숨값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겠지요.

바로 방금 했던 이 내용, 이 내용으로 성경 안의 내용으로 현실이 꽉 차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성도에요. 이게 바로 신자입니다. 지금 내 의미 찾을 군번이 아니에요. 내 의미를 찾을 군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느냐? 갈 바를 알지 못하게 만들어요.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둘에게 돌아가면서 유언을 남기는데 평소에 아버지 심기를 건드리고 아주 못되게 군 둘째 아들한테 “둘째 아들아!” “예!” 아버지가 죽을 때 되니 애먹이다가 그때는 또 연기를 하지요. “아버지! 가시면 안 됩니다.” “둘째 아들아! 내가 너에게 줄 게 있다.” “아버지, 뭐 저에게 줄 게 있어요. 아버지 살아계시면 그것으로 족하지 원하는 것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 부인이 막 꼬집고 찔러서 퍼렇게 멍이 막 들어요. “말 함부로 하지 말고 가려서 해라. 주의해라. 진짜 아무것도 안 주면 우리만 손해다.” 해가지고 “집에 가서 보자.” 이런 식이지요.

“네가 이 살던 집, 아버지가 살던 집 있지? 그거 네가 다 가져가라.” 이게 바로 저주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긁어모은 그 의미, 나는 이렇게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그 의미, 너는 그것과 함께 지옥 가라 그 말입니다. 옮겨짐이 없어요.

그런데 진짜 사랑하는 그 아들, “아들아! 너는 이 집, 땅, 다 포기하고 나랑 같이 이 땅에서 옮겨지자.” 이게 바로 축복인 거예요. 이게 바로 축복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가 평소에 살던 대로 살아가 버리면 이 땅의 삶이요, 그렇게 편해요. 편하고 그리고 친근하고.

친근하다는 말을 요즘 몇 번 이야기하는지, 부산강의에서도 했는데 굉장히 친근하고, 친화적이고, 서로 호환이 되고, 말이 통하고, 너도 네 의미 찾고 나도 내 의미 찾으니까 옮겨질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낯설지가 않은 거예요, 낯설지가! 살던 대로 살면 되니까. 내 인간 자체가,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꾸어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나훔선지자부터 해서 성도들은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던 모든 의미는 나훔선지자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 박살 내버리고 전부 다 불태워버리고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앗수르에게 시범으로 보여줬듯이.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옥을 대행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의미라는 것은 사라질 의미고, 성경은 나타날 의미가 성경책입니다. 사라질 이 인간 세상의 뉴스, 뭐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고, 기름값이 오르고 내리고, 주식이 어쩌고, 전부 다 우리 인간의 의미를 붙잡고자 유통되는 의미들, 의미체계에요. 어쨌든 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인생길을 내가 아는 방법으로 한번 살겠다고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나오는 의미들이에요. 이거 없으면 나는 자살한다, 이거 없으면 나는 못산다, 이런 거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땅에서 아무런 의미를 얻을 필요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옮겨지기로 창세 전에 이미 마감되었기 때문에, 운명과 팔자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것이, 설교시간 내내 이야기한 이것이 어떤 근거가 있느냐? 있어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가 예수님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계시록 8장도 그렇고 7장도 그렇고요, 계속 요한계시록의 내용 전체가 이렇습니다. 어린양과 더불어서 같이 따라가는 사람이 등장해요.

이게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데요. 14장 3, 4절에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지요. 옛날 국민학교 때, 요새 초등학교는 소풍도 잘 안 가니까, 옛날 그때 선생님께서 소풍 함께 가잖아요. 유치원도 그렇고요. 선생님이 앞서가면서 애들이 뒤에 잘 따라오고 있는지 늘 돌아보게 되면 목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참새!” 하고 외치면 애들이 “짹짹!”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다 걸어갔으니까요. 우리도 다 걸어갔지 않습니까? 70 이상 된 사람들 알잖아요.

“참새!” “짹짹!” 하고 가는데 가만 들어보니 주님께서 “참새!” 하는데 “짹짹!” 그 소리가 자꾸 작아지는 거예요. 뒤돌아보니까 많이 따라오다가 자기 집으로 다 갔어요. 다 갔고 한 두세 명 따라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집의 의미체계,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온 그 의미체계가 편한 의미체계, 내가 납득이 되는 의미체계가 자기 집에 있기 때문에 주님 따라가려니, 그 의미체계를 버리고 가려고 하니까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에이, 내가 예수 따라가 뭐하나. 그냥 살던 대로 살래.’ 자기 집으로 다 돌아가 버려요. “복음!” “짹짹!”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복음!” 하니까 조용해요. 다 자기 집으로 가버렸어요. 개척교회 한다고, 이런 복음 어디 있느냐고 왔던 사람들, 복음 전하는 목사님이 “참새!” 하니 “짹짹!” 했는데 갈수록 점점 더 소리가……. 전부 다 자기 집에 다 갔어요.

교회는 놀러 오고, 오자마자 후딱 자기 집으로 다 가고. 왜? 편하니까. 내 의미, 내 존재의미를 계속 유지해서, 그렇게 해서 이 의미를 유지한 채 천국 들어가려고 시도한 거예요. 천국은 내 하기 나름에 달렸다는 이것은 뭐 창세 전에 예정된 적도 없는데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낸 계시에 농락당하는 거예요. 짐승의 계시에.

그래서 그들이 믿는 신은 뭐냐? 도덕신, ‘주를 위해서 열심히 했잖아. 주님을 섬긴다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이게 도덕신이에요. 선악체계를 갖고, 이것은 나쁜 것이고 이것은 좋은 것이니까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취득하면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니까 이 착한 마음을 가진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일방적인 자기 생각, 그거 짐승입니다. 짐승의 의미입니다. 그런 신은 없습니다.

진짜 신은 뭐냐?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되었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영을 통해서 통보받은 겁니다. “네 운명, 팔자,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너는 손쓸 것도 없다.” 바로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이 두꺼운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 현실 세계에 꽉 차 있는 것을 주님 따라가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이 성도의 앞으로 남은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할 때 그 의미가 어디서 들어온 의미체계인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인지 아니면 죽기 싫고 지옥 가기 싫은 무서움에서 나오는 의미인지 우리 자체의 의미를 계속 챙기려고 하는 그런 짐승적인 의미인지를 따져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고, 창세 전에 주께서 이미 확정 지은 그 사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그것을 우리의 목숨보다 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공은주

수요설교 정리(20220914:옮기심)

수요설교 중에 제가 핵심으로 잡은 것은 인간은 왜 무서워하느냐, 그 대목이었어요. 인간은 왜 무서워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해답을 제시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왜냐하면 오는 고객들에게 뭐 보여줄 게 없으면 손님이 안 오잖아요. 힘들게 오고 돈 들여서 왔는데 뭐 맹탕이다,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철학박사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철학적인 결론을 내놨는데 그래서? 이게 어디에 필요한데?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데? 이러면 그건 철학적 논문 가치가 없잖아요. 남한테 도움이 되고 남한테 보탬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것 때문에 철학자들도 고민하면서 갖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해요.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왜 무서워 하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이 죽는 것이 무섭다고 알고 있어가지고 이미 BC4세기부터 인간은 죽음은 무엇인가, 이것만 정복하면 없어질 줄 알았어요. 인간들이.

철학자를 분류하면 자연주의적 철학자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이렇게 학파가 나와요. 그건 뭐 여러분들이 들을 필요 없고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죽기 전에는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겁낼 필요 없고 죽고 난 이후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겁나지 않는다. 요게 해결책이었어요. 그게 이천년동안 이어오고 있어요.

왜 무서우냐를 설명을 안 하고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죽음을 정복했다. 그 이론을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을, 이론을, 그대로 가져온 게 뭐냐, 불교에요. 그 비슷한 시기는 불교나 그리스철학이나 비슷한 시기들이에요. 유교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은 자꾸 죽음에 대해서 겁을 내니까 죽음만 정복하면 무서움도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 공자의 제자가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됩니까?” 물으니까,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는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이거 신경 쓸 필요 없다! 죽었을 때 그 때 생각하면 되지. 미리 당겨서 생각하느냐. 이게 인간들이 하는 해결책이었습니다.

공자 말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이지요. 집의 어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여보, 우리가 죽기 전에 심판이 있단다. 빨리 교회에 갑시다.” “아이고, 죽을 때 되면 알아서 갈게.” 이리 하지요.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는데 죽음은 아직 멀었어. 내 봐라. 나 운동 잘하는 거 봤지? 나 아직 멀었다.” 이게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와요. 안 죽었다는 거예요. 그럼 미리 죽음을 당겨서 하게 되면 쓸데없는 걱정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생명보험이나 들어놔라. 그게 대책이에요. 생명보험.

뭐냐 하면 사람은 어떤 체험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죽음 직전에도 대책이 안 돼요. 왜 들 죽었으니까. 죽음을 앞두고 2.5초 남았으니까 아직까지는 안 죽은 거예요. 그래서 요양병원에 가면 노인네들이 죽을 때 약간 의식이 있을 때, 내 장례할 때 절대로 화장하면 안된데이. 내 돈 일부러 했지. 내 수의복 좋은 거로 하고. 너는 너무 아끼더라. 이런 거. 죽을 때까지 잔소리야.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학문은 어떤 수학자가 필드상 받아가지고 강의할 때 내가 만약 수학자인데 수학자의 노벨상 필드상을 받았다. 학생들 있다. 강의할 때, 여러분! 죽음이 뭡니까? 이리 이야기합니까. 아니지요. 그게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요. 내 하고 싶은 대로 못 살아요. 뭐든지. 인생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만들어요.

철들은 청춘남녀가 우리 좋으면 우리 따로 살자. 아니에요. 그 둘 양가집 자식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준비된 부모들의 바람, 희망이 모여서 결혼식이 되는 거예요. 우린 결혼식하지 말고 우리끼리 안돼요. 해야 돼요. 보람이 그게 보람이거든요. 그래야 애 낳으면 애 키워주고 다해요. 저희들끼리 살면 애를 안 봐준다고요.

이 세상은 내가 혼자 안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 말은 좋게 들리면 안돼요. 내가 이 세상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뜻이에요.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갈라디아서3장22절,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졌어요. 자폐증처럼 살아갑니다. 있는 추천 없이 다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걸 뭐로 보느냐 수요일날 그걸 뭐로 보느냐 그걸 바로 의미의 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의미의 세계에요.

짐승이 나를 낳아주고 짐승이 나를 기르시니 두 짐승이 아니면 이런 짐승이 어디서 생겼을까, 정철의 시조 내가 개사했어요. 제가 고쳤습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두 분에게 어떻게 이 은혜를 어디 되어 갚아오리. 갚을 길이 없다. 너무 귀하다. 그게 뭐냐 조선시대에 유교풍토 가운데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그 이데올로기가 있어요. 그러한 종교지요. 종교. 그게 종교거든요. 부모한테 잘해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 가 종교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제사가 반드시 그렇게 중요했던 거예요. 종교가. 그게 의미의 장이에요. 예수님은 모든 의미의 장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 의미의 장에서 우리가 추방당하는 거예요. 추방당하는 것. 그게 수요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인간은 못하지요. 의미의 장인데.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빠져나오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보다 더 센 걸 준비했어요. 그게 뭐냐, 옮김입니다. 옮김. 죽음보다 더 센 것.

이쪽 의미의 장이 있잖아요. 이쪽 의미의 장. 지금 음성 듣는 사람은 이쪽이 뭔지 모르겠다만. 이쪽 의미의 장 꽂아가지고 이쪽 케이크로 옮겨요. 미운 오리새끼 되던 말든 간에 옮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옮기면서 뭘 바꾸느냐 하면 배를 케이크로 바꿔줬는데 옛날 관성에 의해서 자기가 배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늘 강의에 의하면 순환구조로 해가지고 늘 패버려야지요. “저 열심히 케이크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니는 다 이루었다. 케이크야.” “아닙니다. 저는 아직 죄인이고 멀었습니다.” “니는 죄인 되려하지 말고 이미 죄인이야. 그래서 의인이야.” 라고 한 거예요. 이 공간 안에서. 이게 옮김이에요. 옮김.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아브라함이 졸지에 멍청한 사람이 됐어요. 그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사람이 됐는데, 가는 곳마다 이쁜 자기 아내 때문에 목숨에 위협을 받아요. 목숨 위협을 받는다고요. 이것도 자기가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께서 무슨 게임을 벌이는지 그 게임 속에 있는 아브라함 본인이 몰라요. 이게 오징어게임인지 뭔지 지가 노력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이쪽 의미의 장, 천사와 주님과 하나님과 같이 사는 천국의 백성으로서 이미 삼아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배가 케이크가 되게 하는 거예요.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아무리 지금 배를 뚫어 봐도 될 가능성이 제로에요. 이건 밀가루로 되어있지요. 이건 배즙이잖아요. 안되잖아요.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내부에서 케이크의 씨앗이 자라나서 이게 배가 케이크 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옮겨놓기. 옮겨놓기 때문에 죽음보다 더 세잖아요. 그러니까 주를 위해서 죽는 게 그것조차도 심각한 일이 아니고 그냥 하나의 과정이고 은혜고 절차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철학자들이 그렇게 고민하는 것. 죽음만 해결하면 무슨 일이 없겠다는 것. 이미 성령 안에서 이미 죽음 문제해결 다해버렸어요. 죽는 게 아니고 상이한 다른 기준으로 따로 본향을 향하여 가는 거예요. 본향이니까 이쪽 고향은 가짜지요. 그리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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