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가 7:18-20 / 세 번째 인물 본문
세 번째 인물
이근호
2022년 7월 20일
본문 말씀: 미가 7:18-20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7: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예언은 기적으로만 성취됩니다. 이는 곧 인간은 예언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언을 주신 하나님 자신만이 이 예언을 이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의 혜택을 입은 자들은, 자기가 자기 식으로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과의 어떤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남의 나라를 위한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여기서 ‘우리 열조’라는 언급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샘플로 삼아서 그들에게 집중해서 알리십니다. 그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긍휼로 인해 생겨난 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계속 이스라엘답게 유지되려면 긍휼이 유지되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과는 반대되는 일을 했다는 게 됩니다.
긍휼을 긍휼답지 못하고 만든 요소가 죄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은 바탕에 깔려 있는 긍휼을 제대로 드러내시려는 겁니다. 긍휼을 덮고 있는 죄를 걷어내야지만 그 밑에 깔린 긍휼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죄는 어디서 온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그 최종성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중도에 멈춰있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 33: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즉 기존에 있던 예언을 기준삼아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새롭게 등장되는 예언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죄인이 되어 죽는다는 겁니다.
예언은 인간이 수행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이유는 예언은 하나님만이 성취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예언의 해석을 내어놓는다면 얼마든지 그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즉 불신자는 시대의 최종점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확정되는가를 미리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인류의 역사 안에서 어떤 식으로 본 모습을 드러내는가는 이삭에게 내려진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2-23)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두 명의 자식은 여전한 한 부모의 운명권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쌍둥이는 서로 싸우는데 이 싸움은 결국 두 부류의 국민과 두 부류의 민족의 싸움으로 확대된다는 겁니다. 곧 전 인류의 전쟁의 압축판으로 야곱과 에서가 보여주는 겁니다.
이들 쌍둥이는 자신이 복받은 자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게 됩니다. 복을 따내는 승자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싸워봤자 그들은 동일한 한 아담의 운명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최종적인 예언 노선을 유지하게 됩니다. 최종적인 예언 노선 끝에 제 3의 인물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이스라엘(야곱)과 그 외의 민족과의 싸움이었다면 예언이 최종 끝난 시점에서는 예수님의 나라와 그 외의 나라와의 싸움으로 마감됩니다. 그 중간과정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죄사함을 위해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께서 시키신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레위기 4:20에 보면,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죄사함’이란 인간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희생제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산됩니다. 구약에서 이 죄사함을 성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하지만 신약, 즉 예언이 최종성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죄사함을 해놓으시고 그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죄사함이 성사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곧 ‘나의 유용성을 기반으로 죄사함을 확보하려는 바로 그것이 죄였습니다’고 자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구원받고자 시도한 이 자체를 버리지 못한 것이 죄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구약 때에 줄곧 이스라엘이 해왔던 모든 바가 바로 죄사함 받기 위해 율법에 준한 제사가 유용함을 그들은 인정해왔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0:4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리고 히브리서 10:17-18에는,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것은 새로운 죄사함 방식을 위해 전에 있던 죄사함 방식을 폐기한 일이 일어납니다.(히 10:1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일이었던 겁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야곱이 받은 복이라는 것은 제 3의 인물인 예수님으로부터 버려둠을 당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 예언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즉 인간은 죄사함받아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성도 안에 주님의 죄사함이 들어오게 되면 성도는 제 3의 인물과 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게 되는 식구가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8강-미가 7장 18-20절(세번째 인물)2207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7장 18-20절까지입니다.
미가 7:18-20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방금 읽었던 말씀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은 인간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 하나하나가 기적에 해당됩니다. 사람으로서 이 예언을 지킬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언을 주신 그분이 오셔야 이 예언이 그분 손에 의해서 실현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해내는 일과 예언을 하나님께 실제로 실현하시는 그분과의 대조가 빛이 나야 됩니다. 우리 안에서.
만약에 우리 안에 예언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왔다면 내가 일구어놓은 내 인생 그것과 주님이 친히 일구어나가는 예언의 인생과 어떤 차이성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우리 인생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인류의 하나의 샘플로 삼았는데요, 그 이유가 여기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우리 열조”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중점으로,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 그것이 구약입니다. 이 구약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야곱과 그리고 아브라함, 하나님의 맹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맹세할 때 아브라함이 맹세를 이룬 것도 아니고 야곱이 이룬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맹세는 아브라함이 해내지 못한 것, 야곱이 해내지 못한 것을 성실하게 언약이 나서서 그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와같은 취지로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어떤 혜택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19절에 나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긍휼, 자비, 용서를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걸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한 이스라엘, 여기 “다시”라는 말이 나와요, “다시” again, “다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이 말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긍휼에 의해서 나타나야될 하나님의 나라였다, 라는 그 점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긍휼이 빠졌는데 이제 긍휼 집어넣어 줄게.” 그런 뜻이에요. 긍휼을 베푸시는데 그 긍휼이 우리 내부에서 어떤 작용을 하느냐?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발로 밟아버리면 그 죄는 밟힌 채로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그다음 말씀, “우리의 모든 죄를” 밟는 정도, 박살 내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의 죄를 그냥 바다에 던지는 것이 아니고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두 번 다시 내 죄를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깊은 바다에, 그냥 바다 얕은 바다도 아닙니다, 10센티 바다가 아니고 깊은 바다에, ‘어디 갔지?’ 아무리 찾아 헤매도, 평생을 찾아 헤매도 나의 죄를 발견 못 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예언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아브라함과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18절에 다시 보게 되면, 이와 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이 대목이 상당히, 굉장히, 아마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대목입니다. 주와 같은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자신밖에 없어요. 하나님 자신밖에 없는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칭송하면서 나와 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 자기를 대상으로 자기가 고백을 해버리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은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하나님 아는 만큼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아는 게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을 알고 있지요. 그게 바로 불신자들의 특징입니다. 이 불신자의 특징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옳다는 점을 성경을 통해서 자꾸 증명할 수 있는 해석을 내놓아 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옳다는 것을 성경이 나에게 증명해 달라는 식으로 그들은 “믿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본인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생각을 절대로 안 가지고 나는 나에 대해서 지금 제대로 알고 있고 옳게 알고 있다, 이점을 기어이 못 버립니다. 이것은 고질병 같아서 버릴 수가 없어요. ‘나는 내가 하는 것이 옳고 나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알고 싶은데 내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하나님 같으면 나는 진짜 하나님이라고 내가 받아들일게. 그런 해석을 성경에서 좀 줘 좀 주세요.’ 이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중 하나의 예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죄사함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래, 나는 죄사함 받아야 돼.’라고 우기는 것, 이게 전형적인 불신자들의 태도입니다. 불신자들의 태도가 이런 거예요. ‘성경에 죄사함 있으니까 나 죄사함 받아야 돼.’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사함은 인간에게는 없고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의 기억에만 죄사함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알고 있는, 그 기억 속에 담겨 있는 죄사함은 하나님이 하나님과만 알고 있는 죄사함과 달라요.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우리의 죄를 밟로 밟으시고 그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진다,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노리고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목표 같은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아신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연결된 전선 같은 것, 연락라인이 있는데 그게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언약, 그게 언약인데 연락하고 있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연락된 그 언약, 그 언약이 구약 때는 이스라엘을 샘플로 삼아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고 다른 나라 이방 민족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좀 어렵게 들린다면 쉽게 설명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의 죄라는 것은 시편 32편 5절에 보면 회개한다는 조건 하에 죄사함이 주어집니다. 구약에서는. 시편 32편 5절 읽어보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사했다. 죄사함이지요. 용서했다. 구약에서는 회개하는 조건 하에 죄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죄사함부터 먼저 주시고 그 죄 사했다는 것을 통보할 때 그 통보받는 것을 가지고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죄사함이 다 성립되고 난 뒤에 “너 합격이야. 너 죄사함 받았어.” 통지서 날라오는 것 있잖아요. 그게 회개에요.
신약의 회개는 내가 죄사함 받아야 되겠다는 그 세계, 나의 중심이 확장되는 나의 세계 자체를 포기하는 걸 회개라 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아야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해서 구원받아야지, 라는 그 체계 자체가 이게 버려야 될, 이걸 깊은 바다에 빠트려야 될 버려야 될 나 중심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죄사함은 인간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고 죄사함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핫라인, 연락라인에서만 제대로 거기에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한꺼번에 말하면 “죄사함은 인간세계에는 없다.”가 돼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없는 죄사함이 성경에는 나오니까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주고받는 그 내용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성경에 계시로 나오니까 인간은 거기에 눈독을 들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죄사함이라는 것,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죄사함 받고 싶어요. 내가 죄사함 받고 싶다는 것이 옳은 판단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해석을 나한테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죄사함을 얻고 싶은데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저에게, 어떤 식으로 제공해 주실 겁니까? 그걸 증명한다면 나는 그 하나님을 옳은 하나님으로 믿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면 내가 회개할게요.’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항상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가 등장하니까 다른 나라나 우리 인간적인 본성 같은 것은 제끼고요, 이스라엘만 생각해야 돼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항상 상대되는 두 명이 등장해요. 상대되는 두 명. 두 명 사이에 찌릿찌릿, 해서 그사이에 N극과 S극, 양극과 음극, 마이너스(-) 플러스(+) 전기처럼 찌릿찌릿, 하면서 두 개를 동시에 해놓고 그 두 개가 갈라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찌릿찌릿, 두 사람이 아니에요. 여기 찌릿찌릿,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리브가가 계시받는 대목인데요, 아기 못 낳는 리브가가 계시 줄 때까지 아기 못 낳습니다. 아기 낳는 것 스톱 돼요.
그다음에 아기를 갖기 위한 아기를 주지 않고 계시를 듬뿍 담은 아기가 리브가 몸에서 태어납니다. 영어로 레베카(Rebecca)라 하는 거예요, 리브가, 그 리브가의 계시가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그리고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전체 인류를 대표하는 최종결승선에 있는 두 민족, 한꺼번에 레베카, 리브가 뱃속에 있는데 그 두 민족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22절에 보면,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이게 중요합니다! 쌍둥이라는 말은 공통의 부모를 갖고 있고요. 공통의 부모를 갖고 있다는 말은 부모의 운명에서 자식은 벗어날 수 없는 원칙 때문에 두 사람 누구도 하나의 부모의 운명 안에 다 같이 놓여 있다. 이걸 쌍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쌍둥이. 똑같이.
쌍둥이의 특징은 둘이 아무리 싸워봤자 하나의 공통된 부모의 운명에서 그 바깥으로 안 벗어나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뭐냐?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이스라엘 외의 민족이냐?’ 이것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신약에 한 분이 더 붙는다고 했지요. 예수님.
예수님이 붙어버리면,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것은 공통된 부모 아담의 후손이라는 공통된 부모 아래서 싸우는 것이라면 옆에 붙어 있는 세 번째 붙어 있는 이 분 예수님은 공통된 부모 그 자체로부터 싸워서 빠져나간 새로운 종족의 등장, 새로운 언약적인 민족의 등장을 말해주는 겁니다.
첫 번째 있는 이 야곱과 에서의 싸움에서 아담이 갖고 있는, 아담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성질상에서 ‘하나님이 내 편일까, 네 편일까? 내 편이야 네 편이야?’ 그러한 ‘하나님은 내 편이야.’ ‘아니야, 하나님은 네 편이 되면 안 돼.’ 전부 다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오기를 고대하면서 서로 싸우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아담이라는 속성 안에서 벌어지는 그렇고 그런 싸움에 불과해요. 아무리 싸워봤자, 아무리 승리해 봐야 아담의 속성 자체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쌍둥이끼리 싸울 수도 있고 사이좋을 수도 있지만 이 쌍둥이 원리가 지어낸 게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출발점이에요. 하나님 계시의 보다 구체화된 출발점. 그게 뭐냐? 하나가 아니고 공통된 부모 밑에 쌍둥이라는 것. 쌍둥이란 똑같다는 것 아닙니까? 한날 한 시에 태어났으니 똑같잖아요. 똑같은데 “너희들 보기에 똑같이 보이지? 하나님 보기에 똑같은 게 아니야.” 이게 쌍둥이에요.
허각의 형이 허공이에요. 허각 아십니까? 가수. 허훈의 동생이 허웅, 아십니까? 허재의 두 아들. 전부 다 허 씨 집안사람들이에요. 어떤 사람이, 가수 허각이 등장하니까 “각이야, 공이야?” 이렇게 묻는 거예요. 가수 허각이냐 아니면 그 형 허공이냐, 이렇게 묻는 일이 있었어요. 많이 닮아서 똑같습니다. 왜?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싸워봤자 거기서 거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복은 나에게 와야 된다는 것, 그걸 고집하는 역사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게 세 번째의, 예수님 올 때까지는 그게 옳은 줄 알았지요. 그게 종교적으로 진리인 줄 알았지요.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서 누가 회개해서 하나님의 복을 따내는가, 죄사함 받는가, 그 따내는 자가 구원된 자라는 인식이 같은 아담의 속성 안에서, 그 범위 안에서 못 벗어나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왜냐? 예수님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원래 죄사함이라는 것은요, 인간이 행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레위기 4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것 같이 할찌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죄사함이라는게 인간 제끼고, 인간은 완전히 배제하고 수송아지를 희생물로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사함이 착하게 산다고 사함받는 게 아니고 “인간은 나가 있어, 나가 있어!” 인간 치워버리고 하나님과 수송아지, 약속된 희생제물과 관계에서 발생 되는 것이 죄사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걸 제시하면서 그 죄사함을 누가 따낼 것인가의 싸움이 벌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줄기차게 이 제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죄사함 받기 위해서. 그리고 솔로몬 시대 때는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의 취지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떠한 죄를 지어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그 성전에서 죄 사해주는 효과가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 효과의 발생에 대해서는 이번 수련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그 구체적인 것은요. 은근히 독려하지요? 성전에 무슨 장치가 있어가지고 어떤 죄도 죄사함이 됩니까? 그것은 아주 복잡한, 너무너무 복잡한 이야기가 있어요. 인간은 상상도 못 할 복잡한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어떻든 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고수합니다. 이게 유대인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까지 성전고수에 그렇게도 집착을 하고 거기에 완전히 꽁꽁 매였어요. 왜냐하면 죄사함 받아야 그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런데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거예요. 어떤 것을 몰랐느냐 하면 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이 다가 아니고 야곱 언약이 다가 아니에요. 언약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점점 더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에스겔 33장 13절에 보면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어떤 바르게 살았던 의인이 있는데 그 의인은 하나님의 죄사함도 믿는 그런 의인이겠지요. 그렇게 있는데 그 의인이, 죄사함도 받고 다 아는 그런 의인이 죄를 짓는다면 그 전에 의롭게 한 것은 다 무효가 되면서 “너는 죄악 중에 의인 되지 못하고 네 죄악 중에 죽으리라.”라고 에스겔 33장 13절에 나옵니다.
이것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하면, 언약이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확정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 최종성을 향하여, 언약의 최종성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 때 그 전의 계약, 그 전의 언약, 그 전의 율법과 말씀에 의해서 의인이라고 자부된다 할지라도 그 이후에 새로운 계약에 의해서 죄 지어버리면 앞의 계약에서 의인 된 것은 의인이 아니고 무효가 된다 그 말입니다.
와~, 이것은 다단계보다 더 심한 거예요. 돈 얼마 넣으면 10프로 이자로 돌려줍니다, 했는데 다음에 말 다 바꿔버렸어요. 2천만 원 더 넣어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2천만 원 더 넣게 되면 그다음에 또 5천만 원 더 넣으면 이자 20프로 드리겠습니다, 그다음에 1억 넣으면 드리겠습니다, 이래가지고 나중에 몇조씩 해 먹고 중국으로 도망가고요.
왜 그렇게 하는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죄사함 받아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회개하고 말씀을 지키는 이것이 바로 이게 불신앙이라는 거예요. 세 번째 분을 감안하지 못하고 ‘이방 민족과는 달리 거룩한 민족이 되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살 수 있다.’라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존의 율법이 표준이 되어서 과거의 언약이 나를 살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최종적 언약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한다는 거예요.
최종적인 언약은 뭐냐? 인간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이게 최종적인 언약이에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개 코도 모르면서 자기 의와, 자기 구원과, 자기 죄사함을 위해서 부지런 떤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말씀이 시키는 대로,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부지런 떤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에서는 안 될래. 야곱 될래.’ 이런 의식인 거예요. 싸움의 대상이 같은 인간을 향하여 싸웠던 거예요. 그러나 언약의 마지막은, 세 번째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이 이미 예수님을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최종에 가야 다 들통이 나요. 구원받고자 애쓰는 이 자체가 예수님이 하시는 공로를 모독하는 원수 짓이라는 것을 마지막 언약에 가서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죄사함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예수님은 인간으로 쌍둥이였어요. 인간이 아담이라면 예수님은 같은 아담 쌍둥이, 아담, 그리고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오신 거예요.
첫 번째 아담들이, 이스라엘 포함해서 첫 번째 아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것을 두 번째 아담은 비로소 하나님의 제대로 된 이스라엘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연락체계가 원활하게 작용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 행동 하나하나가 모든 것이 언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긍휼, 이스라엘의 기본은 바로 오신 예수님이 품고 있어요. 예수님이 품고 예수님 하신 일이 긍휼을 생산하고 진리를 생산하는 그런 분이에요. 그러니 예수님 빼놓고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 빼놓고 그렇게 성경 천 독, 만 독해서 하나님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
그 말씀이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나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레위기 4장 20절에서 송아지 잡아서 사함을 얻는다고 그렇게 옛날 율법에, 옛날 언약에 그렇게 기록되어서 거기에 준해서 부지런히 빠짐없이 제사 드렸던 이스라엘 붕 떴지요. 붕 떠버렸어요.
예. 그 제사가 소용없었어요.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10장에 잘 나옵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에 보면,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제사 드리는 것, 율법에 준해서.
그런데 “황소의 피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못 한다.” 그렇게 나온다고요.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진작 이야기해야지.”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그걸 진작 너에게 이야기해야 될 이유가 뭐냐?” 그러면 “내가 그 진작 알게 된 그것 가지고 내가 구원받을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서와 야곱아!” 첫째, 둘째지요, 너희들은 최종성을 모른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끝을 몰라요. 최종성에 이르기 전에 최종성을 모르는 가운데서 그들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런 오해를, 나의 가치가 완전히 쫑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인간들은 최종성이 올 때까지는 계속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올 때까지는 모두 다 불신자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불신자는 불신자 티를 내야 되겠지요. 불신자 티가 뭐냐?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것, 이게 불신자지요. 나를 위해서. 제가 오늘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예언은 기적이라 했지요. 그리고 이 기적이 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지막에 이 예언을 주신 분이, 당사자가 성취하기 때문에 기적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 인생이 내가 일구어가는 내 인생과 예언을 주신 그 주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일군 인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시라고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은, 또 다른 말로 인간은 왜 하나님의 예언에 동원되는가?
무엇이 불신자인가? 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고 모르는 것인가? 인간들을 동원해서 바로 그걸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결국 에서와 야곱의 결승전에서 야곱이 거짓말을 하든 어떻든 간에 마지막 아버지의 복은 야곱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뻔히 보잖아요.
나중에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속고 난 뒤에도 이삭이 화를 내지 않고 이것은 정녕 하나님의 뜻이다, 해서 이미 게임이, ‘심판은 문제 있었지만 게임의 승패는 변경될 수 없다.’ 뭐 이런 원칙에 의해서 야곱에게 몽땅 다 복을 줬잖아요.
그러면 에서는 왜 등장합니까? 들러리지요. 야곱의 승리와 대비시키기 위해서 에서가 등장하는 겁니다. 똑같은 쌍둥이 구조에 의해서 인간은, 이 아담에 속한 인간은 왜 등장합니까? 아담의 속성과 DNA를 받은 우리는 왜 등장해야 됩니까? 모든 승리는 예수님에게 간다는 것, 우리에게 오는 승리는 없다는 것,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은 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계속해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에서 두 번째 야곱, 그게 언약이지만 그것 말고 그 외에 세 번째 인물 예수님을 거기다 두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아버지를 알고 죄사함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자신의 고유권한으로 담겨 있게 되거든요.
그게 히브리서 10장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렇게 분명히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히브리서 10장 18절에 보면,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4절과 18절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히브리서 10장 9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인간이 이스라엘이 인간을 대표해서 했던 그 제사를 주님께서 폐하러 오신 거예요.
왜냐? 그것은 인간이 성사시킬 예언이 아니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행하면 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닌 거예요. 인간이 못 하는 일이 되어야 예언이 기적이 되는 겁니다. 오늘 미가 본문에서 긍휼, 우리 죄를 바다에 빠뜨리는 것, 절대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어야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옛날 구약 제사로 죄씻음 가능하다는 말 밖에 안 돼요. 그런 것은 하나님이 하는 최종성을 모르고 중간에서 이미 다 온줄 알고 ‘이걸로 되었습니다. 이걸로 적당히 정리합시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실제로 교회 교인을 보게 되면,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만, ‘아이고, 목사님! 저도 이렇게 바쁜데 교회 와서 할 만큼 했습니다. 그만 요걸로 얼추 역량대로 다 했다 취급하고 요걸로 더 할 것 없이 줄곧 가는 걸로, 천당 가는 걸로 우리 합의 봅시다.’
목사를 상대로 합의 본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중간에서 힘들다고 스톱 하느냐는 말이지요. 어제 제가 강남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의 피로감이라, 신앙생활의 피로감이 아니지요, 교회 생활의 피로감이겠지요, 교회 생활 오래 하다 보니까 피로감이 생겨가지고 “아이고, 대충 합시다, 대충. 하나님, 대충 합시다. 이만큼 하는 것도 많이 제가 애쓰고 있는 겁니다. 이걸로 그만 눈 질끈 감아주시고, ‘아이고, 그 정도나 했나? 되었다. 내가 천당 넣어줄 게.’ 그만 이걸로 합의 봅시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끝을 안 보고 중간에서 왜 자기 맘대로 스톱 합니까? 아직 도착을 안 했는데요. 마지막 끝점은요, 마지막 끝점은, 끝점, 궁금해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게 끝이에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성령께서 오신다는 거예요. 이게 끝이에요. 그러면 그 전에 우리는 뭐냐? 고아지요, 뭐, 고아. 고아는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돌보지 아니하면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죽은 자에요. 우리 자신의 끝은 이미 우리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그저 하나님이 말씀 가지고 지키려고 애쓰는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 그것이 끝 지점에 나타나야 돼요. 에서와 야곱의 차이점이 뭐냐? 둘 다 애써봤자 아담의 속성에서 설치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에서와 달리 야곱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 겁니다. 하나의 가족이 되는 거예요. 돌봐주겠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긍휼이에요. 그러니까 “고립적인 생활을 하지 않도록 내가 너희에게 찾아올 게. 너 혼자 홀로 살아가는 고립적인 것, 나 하나만 있는 것 그런 것을 하지 않겠다.” 하는 겁니다. 따라서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구약에서는 회개해야 죄사함을 준다는 조건을 걸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최종적인 언약이 아니고 중간과정이었어요. 최종점에 가게 되면 어떤 누구도 회개해도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지를 못합니다.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끼리 누가 누가 잘하나, 끼리끼리의 회개, 너는 회개하지 않았지만 나는 회개했다, 이 둘 사이의 비교로서 회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최종적인 의미가 되어버리면 인간이 아무리 회개한들 하나님께서 그걸 안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이 최종적입니다. 나의 회개조차도 주께서는 받지를 않습니다.
이제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바로 이사야 43장 25절에 나오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사야 43장 25절이 왜 충격적이냐? 얼마나 충격적인지 이사야 43장 25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다시 한번 읽습니다. 나는 하나님이지요,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한다.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게 왜 충격적이냐 하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인간 편이 아니고 누구 편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인간에게 죄를 사해준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의 죄사함을 노리면 안 돼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 됩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죄 사하시는 이유, 죄가 없는 것을 의라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사하시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의인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우리가 의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걸 의의 종이라고 이야기해요.
로마서 6장에서는 의의 종,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다. 한 번도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내가 내 인생을 자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경우는 없었다. 악마가 시키지 아니하면 주님이 시키든지. 그것도 주님이 시키는 것은 최종적이고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찾아와야 가능한 것이고 성령이 와야 가능한 거예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까 본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자를 욕해도 좋은데 마지막 때 오는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 최종 마지막 시대까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회개라는 것은 내가 나 반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사태파악을 하는 거예요. 도대체 이 시대가 예수님 시대지 내가 앞으로 잘 하면 잘 하겠다는 뭔가 아직 내 시간이 남아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이미 끝나버린 시대에요. 주님께서 모두 접수한 시대입니다.
이 접수한 시대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자기 의를, 죄사함의 그 공로, 능력을 우리에게 퍼부어서 주님에게 있는 죄사함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제3의 인물, 예수님을 위한 하나님의 백성, 진짜배기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께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주님 자신의 일인데 우리가 참 단단히 오해해서 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하나님이 곧 불신자가 알고 있는 우상적인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의 일에 말려드는 이 큰 복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을 고집하는 그러한 괴로움이 남아 있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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