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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가 7:7-9 / 선지자의 자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7:7-9 / 선지자의 자리

정인순 2022. 6. 30. 07:19

음성 동영상 Youtube

 

선지자의 자리

 

이근호
2022년 6월 29일                      

 

본문 말씀: 미가 7:7-9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7: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이스라엘이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입장에서 하나님의 계시(뜻)는 선지자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선지자 개인이 보여주는 인생과정이 곧 하나님께서 꾸준히 이어져 나가는 자기 백성 만들기 절차입니다.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바에 의하면, 일단 자신이 하나님에게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변호해주시면서 분노를 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고 하나님의 의가 기다리는 곳에 합류하게 됩니다. 시편 32:1-2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복이란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는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선지자가 받는 혜택을 자신을 받고 싶어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께 범죄했습니다’라는 고백을 내뱉고 싶은데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죄 지은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버릇처럼 하나님에게 “내 죄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선지자 차원에서 나올 질문입니다. 일반인들은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를 물을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진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1-2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아예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자들은 단호하게 진멸되어야 될 자들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그들을 진멸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진멸당합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케 하시는 이유는, 죄와 구원의 차원을 이스라엘 위상에서 비로소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체로서 나타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체 안에서도 선지자는 특별난 존재입니다. 신명기 18:15-16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안에서는 일반 이스라엘인들은 강력한 하나님의 거룩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하나를 하나님께서 뽑으십니다. 즉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는 자가 이스라엘 속에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감격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체를 다른 민족에 비해서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기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해내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도 당당하게 버텨내는 민족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이를 경험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미리 정탐꾼을 12명 보내게 되는데 그들은 가나안 땅을 선점한 민족들의 강함을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들 이방민족의 강대함은 언약적 요건에 합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약 달성은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즉 갈렙과 여호수아는 언약의 안목으로 세상을 봤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다른 정탐꾼들은 백성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들이 언약의 땅에 버티고 있는 것을 절망적으로 여겼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지 그들은 뒤늦게 자력으로 그 적들을 물리쳐보겠노라고 쳐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패하고 통곡합니다.(신 1:45) 민수기 14:4에서는 백성들이 더 비언약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모세를 제키고 따로 지도자를 뽑아서 애굽으로 되돌아가지고 들고 나옵니다.

바로 이런 행동이 그들이 나름대로 ‘역사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결코 언약적 차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이 속죄를 받기보다는 아예 용서받지 않고자 하는 본색이 터져 나온 겁니다. 보다 완벽하게 행동해서 근사한 인생을 만들어보겠다는 겁니다.

이로서 난데없이 갈렙과 여호수아는 천하에 억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언약적 생각을 가진 갈렙과 여호수아에 대해서 돌로 치려고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납니다.(민 14:10) 이처럼 언약의 등장은 인간이 진멸받아 마땅한 본색을 드러내면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매일 세상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이는 본인이 벌써 무너질 대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자리를 선지자와 제사장 자리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로서 성도는 이 세상이 진멸 대상으로 넘쳐남을 당연하고 마땅하게 여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면서 도리어 그것에 절망하는 것이 즐기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6:8-10에 보면,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살던 자기 백성들을 어른이고 어린아이 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의 개인이 예수님이 대신하셨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자신을 대신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앞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갈길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유감없이, 이 세상에 미련없이 가볍게 떠나는 그 모습이 바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챙겨주는 주님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해주게 되는 선지자 기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위상이 언약 안에 들어와 있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5강-미가 7장 7-9절(선지자의 자리)2206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7장 7-9절까지입니다.

미가 7:7-9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여기 이스라엘에 대해서 비난하고 공격하다가 오늘 이 본문에 와서는 선지자, 사적이고 개인적인 선지자 자신을 통해서 드러난, 자신과 관련해서 주께서 계시하고 있는 그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오직 나는” 대담하게 ‘나’라는 말을 했어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이렇게 ‘나’ 언급이 대담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남들은 모르겠고 하나님께서 나를 관련지어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와 뜻과 구원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남들은 모르겠고 어쨌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나에게 계시를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계시가, 하나님의 뜻이 특정 개인에 집중해서 거기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전파된다는 그 원리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되었으면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믿어라,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부른다고 오실 분이 아니고 만나잔다고 만나줄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하나님이 특정 사람을 이 땅에 남겨주셨고, 이 미가 시대에 미가를 남겨두셨고 그 미가의 고백을 통해서 거기에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이 계시를 왜 안 주느냐, 섭섭해하지 마시고 도리어 기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특정사람, 대화가 가능한, 선지자죠,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두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없는 분이 아니고 살아계신 분이고 지금 활동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고 기뻐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 삶을 통해서 제일 슬픈 것은, 절망적인 것은 하나님 쪽에서 모든 것을 닫아버린 상태, 그러면 이 세상에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건강하다 할지라도, 세상이 내 뜻대로 잘 굴러간다 할지라도 하나님 쪽에서의 연락사항이 끊어져 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지요.

그런데 이 미가를 통해서, 미가는 말합니다. “나한테 하나님의 계시가 알려졌어.” 거기에 뒷말 붙인다면 “나와 같이, 너희들도 같이 기뻐하지 않겠느냐?” 이런 식인 거예요. 우리는 당연히 기뻐하지요. 계시가 뭐였던가요? 물으면 7-9절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개인적으로 일어났던 사항을 미가가 언급하는데 미가가 비록 자기가 죄를 지었지만……, 미가의 특징은, 사적 특징은 7절에 나오거든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죄지은 것은 맞지만, 그러나 이 내가 죄지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사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말은, 곧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야기에요. 이게 시편 32편 1-5절에도 같은 취지로 나와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딱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에 대해서 용서함을 얻고,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죄가 없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적하고, 지적했으면 응당한 심판이 있겠지요. 심판이 있든 죄를 지적하든 관계없이 시편 32편에 나오는 이 다윗과 미가에 나오는 미가선지자의 공통점은, 죄 지적 자체가 이미 구원에 해당된다, 구원절차, 순서에 필수적으로 해당이 되는 사항이라는 거예요.

2절,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니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내 허물이 있는데 용서함을 얻고, 죄가 있는데 가리움을 받는자가 이게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시면서 죄 용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택한,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그것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러니까 개인적 입장에서 시편 32편은 다윗이 되겠지요, 다윗의 입장에서는 정말 기분 좋은 것이고, 그 당시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시고 일하고 있다는 그런 증거를 그 시대 사람이 그걸 받고 있다는 그것만 해도 세상 더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면 뭐 천리만리라도 하나님 일하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어디서 공연한다 싶으면 뭐 아껴놓은 적금 다 털어서 부산 공연장으로 달려가지요. “김호중! 김호중! 제대하기만 기다렸다, 김호중!” 이런 식으로요. “손편지 정동원” 해서 써 붙인 버스 세워 놓았어요. 팔공산 가는데 대형 버스, 창문 다 가려졌어요. “손편지 정동원” 정동원이 웃으면서 포즈 취한 사진 있고요.

그게 뭐냐? 팬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사는 행복이고, 기쁨이고, 보람이고, 유일한 희망이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증거를 주셨다는 것, 성도로서는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미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9절에,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심판한다 그 말이지요. 하지만 주께서 나를 인도하여 심판하는 절차를 필히, 절차니까 필히 경과해야 돼요. 심판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주께 진노를 당하는 것은 필연적인 절차고요, 이것은 빠지면 안 돼요, 그다음에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이지만 죄를 용서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의니까, 그 주님의 의를 실시한 그 자리까지 주님께서는 나를 이끌어가신다, 하고 개인적으로 언급을 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언급한다는 이 사실, ‘왜 하나님께서 집단적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지자에게 오시는가?’

신명기 18장 15-18절에 보면 그 내막이 나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호렙산에서 만날 때에 큰불이 일어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그들이 불에 타서 죽습니다. 그게 16절에 나와 있어요.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래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대하면 모든 백성이 죽으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 모세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워가지고 그 선지자에 하나님의 뜻을 담고 그 선지자는 그것을 말로,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그때 그 말을 듣는 자는 하나님께 용서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미가를 다시 보겠습니다. 미가 7장 9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이렇게 나오지요. 자, 이것을 불신자 일반인들이 봤다고 칩시다. 이 대목을 7장 9절을,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하고 미가가 고백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백프로 이렇게 합니다. “우리가,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무슨 큰 죄를 지었습니까?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습니까?” 이런 반발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본능적으로. 그리고 신자라 할지라도, 교인이라 할지라도 그 불신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심사숙고 해 볼 필요가 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에 용서받았습니다, 상투적으로 그렇게 고백들 하지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교회 오는 것도 죄예요? 이 수요일에, 다른 사람 아무도 안 오는데 혼자 교회 오는 게 이게 죄입니까? 물론 모르는 죄도 있지만, 그러나 죄 안 지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것도 죄입니까?

또 ‘이것은 죄니까 짓지 말고, 이것은 죄가 아니겠지.’라고 조심스럽게 아주 신경 써가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도 죄입니까? 도대체 자꾸 죄, 죄, 하는데 구체적으로 주님은 죄라고 규정하지만 본인이 이게 죄라는 느낌이 안 왔을때에 죄용서의 기쁨도 같이 날아가 버리고요. 뭐 죄를 알아야 기쁨도 오는데 내가 죄인 것을 모르는데 “죄인은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어봐야 죄인이 아닌데 뭘 어떻게 합니까?

“네 죄를 용서한다. 기쁘냐?” 하나도 안 기쁘지요. 내가 죄인이 아닌데 왜 기뻐해야 돼요? 여기서 9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나” 미가는 술술 이게 고백이 잘되는데 왜 그렇게 고백이 잘되느냐 하면, 그 자리가 선지자의 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무슨 말씀을 드리고 하냐면, 이런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라는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모든 개인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말할 위치, 하나님의 택한 선지자나 택한 메시아 아니면 그런 질문할 자격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7장 1-3절을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이렇게 죽 나와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 그들은 진멸 받아야 된다.” 방금 그 족속들 이름들 나오는데 그 족속들은 대다수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빼놓고는 대다수를 말해요. 그 이스라엘 빼놓고 대다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죄를 지으면 내가 알고 그다음에 용서받겠습니다.” 말할 수 있는 그런 위상, 그런 위치에 있지를 못해요. 그냥 진멸의 대상이에요, 진멸의 대상.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그들을 시키는 대로 진멸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진멸 당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는데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3, 4세 어린아이)와 젖먹는 아이(한 살에서 두 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그런데 이 명령을 듣고 사울이 9절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멸하라, 했는데 진멸 안 했지요. 사무엘상 15장 15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사무엘이 물었지요. “이게 무슨 소리냐? 진멸하라 했는데 왜 소리가 나느냐?” 하니까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좋은 것을 남겨서 그것은 진멸 안 했습니다.” 한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존의 민족과는 다른 메시아위치에 이동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죄가 나타나는 지점은 진멸된 자리에서는 죄가 안 나타나요. 그래서 내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물을 자격조차 안 돼요. 알려주면 알겠어요? 자기 죄를?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면 죄를 아는 자리는 따로 그것보다 높은 자리,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 선지자의 자리에 올라가야 ‘네 죄는 이렇다.’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면서 거기에서 알려지는 거예요. 아주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우리의 죄는요, 예수님 자리, 십자가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의 죄는 나타납니다.

그 죄는 뭐냐? 진멸 받아 마땅한 죄를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발견한다 그 말이지요.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는, 십자가 위의 자리는 바로 율법이 완성된 자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차원, 거룩의 차원, 율법완성의 차원은 어느 인간도 거기에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거룩과 온전한 의가 없으면 그것은 진멸의 대상이에요. 그 입 다물어야 돼요. 진멸의 대상이 뭘 입을 벌립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지금 그런 고백만 있을 뿐이지 “제가 뭐가 그렇게 밉습니까? 제가 뭐 그리 잘못되었습니까? 애 낳고 애 키우는 게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주의 뜻은 “그러니까 진멸의 대상이지, 그러니까!”

네가 지금 너의 자리가 죄를 알 수 있는 자리까지 이동을 못 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가 “나에게 죄가 있어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하는 것은 미가는 선지자기 때문에 선지자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은 합당한 심판인 것을 본인은 알고요, 그리고 그 심판받는 것이 그다음에 준비된 하나님의 의와 광명의 자리에 가는 여정인 것을, 하나의 절차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아는 거예요.

왜? 선지자의 자리니까. 일반인들 자리가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한 자리고 하나님과 통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그때 이스라엘은 뭐 했느냐? 전체 이스라엘은 멸망이지요. 진멸의 대상 되어버렸지요. 왜 이렇게 하나님의 특정 자리, 선지자 자리에 가야 죄를 아느냐? 왜 일반적인 보통 사람의 자리는 안 되는가?

그것은 언약 자체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그 사실이 선지자 자리에 가야 비로소 밝혀집니다. 따라서 선지자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들은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개인적으로 나 좋아라고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리, 일반 자리가 아니고 선택받은 특수한 나라 전체가 영원한 왕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나라가 되는 자리 특정 자리를 특화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약을 위해서 살지 못하면 천국에 못 가도록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성경은 천국 문이 그 누구에게도 닫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책이 있습니다. 천국 문이 누구에게도 닫혀 있다. 그래서 개인의 자리에서는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말은, 개인은 진멸하라. 다른 말로 하면, 주저 말고 조져라, 주저하지 말고.

이렇게 되면 이방인들은 논의대상 자체가 안되지요. 이스라엘 자체도 멸망할 판인데 이방인들이야 이것은 걱정할 대상조차 안되지요. 제껴버리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선지자 노릇을 해야 될 왕 같은 제사장 노릇을 해야될 그 나라가 왜 그렇게 망해버렸는가?

그게 그들이 언약을 받았잖아요. 그들 속에 세상에 속한 육적인 요소가 그대로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육적인 요소가 한마디로 뭐냐 하면, 역사에 대해서 역사적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죄였던 겁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책임을 다하겠다는 것, 참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신자로서 신자 책임을 다하겠다는 게 신자의 죄가 된다는 뜻이에요. 집사가 집사 노릇 하려고 다 하는 그게 집사의 죄가 돼요. 역사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 보기에 그렇게 거룩한, 그야말로 종교적으로 최고의 성품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최고의 범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신명기 1장 42절에 나옵니다. 신명기 1장 내용에서 어처구니없이 굉장히 억울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난데없이 생뚱맞게 시련과 환란을 당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열두 정탐꾼을 하나님께서 보내게 했어요. 민수기에서는 보내게 했고, 신명기에서는 자기들이 가겠다고 이야기했고요.

어쨌든 열두 정탐꾼이 갔어요. 열두지파니까 열두 명이 갔는데 두 명 빼놓고 열 명은 거기서 큰 절망을 해서 옵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절망하는 내용이 죽 나와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맞지요. 강하지요. 당연히 강하지요. 32절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맞지요. 메뚜기같지요. 33절에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지금 여기 정탐꾼 열 명은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기가 살아가는 수준에서는 그 언약 자체를, 그 내용을,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선지자 반열에 올라가야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선지자 반열에 올라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요, 언약이 언약답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으로는 해내지 못하는 그런 식으로 상황이 갖춰지는 것이 가장 언약다운 겁니다.

비가 오고 우산 준비하는 것 누가 못합니까? 그런데 비가 오기 전에 배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아가 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언약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구비요건 중 하나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 삭제하는 요소가 언약이 언약다운 조건 중에 하나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으라.”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십자가를 믿으세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 피로 용서해줍니다.” “예, 믿습니다.” 이게 믿음 같지요?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뭐냐? 그런 속죄, 십자가 속죄를 아무리 풀 발라서 내 마음에 붙여놔도, 붙여놔도 떨어지고, 붙여놔도 떨어지고, 밀가루로 풀 쒀서 붙여놔도 속죄의 기쁨은 돌아서면 다 떨어져요. 냉장고 고장 나면 다 녹아내리는 식으로 사고 일어나면 속죄의 기쁨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타이어 빵꾸 난다든지 하면.

인간의 마음은 속죄를 붙여놔도 자꾸 떨어지는 이유가, 본인이 용서받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래요. 용서받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이 말은 “내가 죄인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말 하기보다도 아예 죄 안지은 근사한 사람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좀 근사하고 멋있는 인생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에게 천국 문은 아예 닫혀 있는 겁니다.

근사한 인간, 다시 말해서 “주님 앞에서 죄 지었습니다.” 하는 꼬락서니, 그 내 모습 자체가 내가 나한테 용서가 안 되니까 주님한테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 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죄짓고 용서받기 보다는 아예 죄 안 짓고 용서 안 받아도 되는 사람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신명기 1장에 보면 그들에게 안된다, 하니까 그제야 자기 역사의 책임을 다하여 “자, 힘내라! 우리끼리라도 쳐들어가자.” 모세가 말렸습니다. “쳐들어가도 안돼.” 안 되는데 그들은 쳐들어갔다가 그야말로 그들 말대로 상대방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뽑은 셈이 되었지요.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패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함부로 들어갔다가 신명기 1장 44절에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아주 대패를 당했어요. 그래서 크게 통곡했습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그냥 통곡했잖아요. 민수기 14장에 보면 통곡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더 나갔어요. 뭐냐 하면, 여기서 죽기 전에 우리가 모세 대신 우리를 대표할 새로운 대통령을 뽑자 뽑아서 뭘 하느냐? 도로 빠꾸(back) 하는 겁니다. 유턴하는 겁니다.

그게 민수기 14장 3, 4절에 나와요.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러니까 5절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고요. 6절에,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그리고 그들이 말합니다. “그들은 언약의 밥이다. 너희들 보기에 장대하고 힘센 그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밥이다. 거역하지 말라.”

이 말이 민수기 14장 9절에 나와요.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그럴 때 온 회중이 그 갈렙과 여호수아를 보고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 들었지요. 그 때에 동시에……, 진짜 이건 드라마 같아요. 그때 늦게 들어왔으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짱돌 맞아 죽었습니다. 10절에,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그 순간 안 나타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막 찌르려고 할 그 때에 스톱! 해가지고 수풀의 양으로 대신 한 것처럼. 바로 그때가 있어야 그 갈렙과 여호수아는 선지자 반열에 올라가는 거예요. 언약이 대기하는 그 장소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천하에 억울한 사람이 갈렙과 여호수아였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언약적 안목에서 세상을 다른 사람과 달리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해 곱하기 오해, 오해의 제곱을 받아서 돌에 맞아죽을뻔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체험, 그 체험을 통해서 그게 절차가 되어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바로 계시의 사람으로 등극되는 거예요. 올라가는 겁니다. 비로소 그 자리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라는, 또는 모세라는, 또는 미가라는 선지자들,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는 뭐가 보이느냐? 왜 하나님께서 진멸하라는 것, 심지어 젖먹이 아이까지,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버리라 한 이유가 비로소 그때 밝혀집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언약을 건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을 달성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필요하지 피조물을 위해서 언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거예요. 이게 일반적인 종교적 차원에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해서 신앙인이 될 때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말도 안 되는 그런 모욕과 죽임을 당하는 그런 경우를 당할 때 ‘아, 나의 역사, 나의 인생, 이 세상 역사라 하는 것은 내가 책임질 내용이 포함되면 안 되는구나.’ 책임질 수가 없다, 그 정도가 아니고요, 내가 거기에 내 책임감을 집어넣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집사는 집사의 책임을 져서는 절대로 집사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원리에요. 목사는 목사다워서는 안 되는 겁니다. 장로는 장로다워서는 안 되는 거고요. 듣는 장로 기분 좋아서 난리도 아닐 거예요. 우리는 나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라는 그 질문을 할. 그 질문조차 할 자격이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자리를 선지자의 자리로 이동시켜서 그다음에 하나님의 언약의 절차를 보여주는데 그 절차가 그다음에 심판받는 자에게는 그다음에 하나님의 광명이 기다리고 하나님의 의가 기다린다. 이러한 선지자의 처한 난처한 입장에 대해서는 시편에 보면 아주 많은 구절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 42편 3절에 보면,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여기 ‘나’지요. 또 여기 개인적 나, 선지적인 경우에만 ‘나’라는 표현을 해요, 나!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아까 여러분 갈렙과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세요. 진짜 생뚱맞게 언약 위주로 생각하다 보니까 이렇게 개인적인 구원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비난받고 공격을 당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 이런 복음을 왜 모를까요? 언약을 왜 모릅니까?

그것은 매일매일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기 바빠서 그래요. 하나님의 분노로 자기가 무너지는 대상인 것은 모르고 모든 것은 세상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세상이, 세상이 날 힘들게 한다는 거예요. 날씨 덥지요. 비가 그냥 오든지, 비는 오지 않으면서 꿉꿉하지요, 기온은 높지요, 이거 다 누구 탓입니까? 세상 탓이잖아요.

우리는 마땅히 습기 찬 이불 덮듯이 그렇게 덮어서 축축하게 죽어 마땅한데 내가 무너져야 될 대상인 것을 모르고 매일 자기가 완벽하지 않음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완벽하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세상 보고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돼요. 물론 구약에는 선지자지요. 신약에는 누구겠어요? 예수님입니다. 나를 대신하는 분은 내가 아니에요. 내가 나의 인생을 대신하는 분이 아닙니다. 따로 계시고 그분이, 그분이 자기 자리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그분 자리에서 그분이 이야기할 이야기에요. 그분이 드릴 기도라는 말이지요.

“저들은 죄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우리가 할 잽이 못 되지요. 우리가 할 자리가 아니라니까요! 신약에 와서 성도의 모습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난리 치듯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사도 자체가 선지자 반열이기 때문에 아주 넉넉하게 이야기했어요.

8-10절,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게, 이걸 한마디로 뭐라 하느냐 하면, 이 땅에 살면서 허무를 실컷 즐기라는 거예요. 다시는 이런 시절이 안 오니까, 허무를 즐길 시절이 자꾸 지나가니까 실컷 허무를 즐기라는 말이지요. 속이는 자라는 모독을 받고, 이름도 없다고 비난도 받고, 징계받는 자 같다는 욕도 받고, 날마다 죽임도 당하고, 꼭 날마다 근심할 만하고, 항상 가난한자답게 지지리 궁상으로 산다는 그런 욕을 실컷 즐겨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즐기고 있지요? 한 달 수입이 1500만 원 밖에 안되고……, 뭐 그런 거요. 자꾸 부동산값이 오르고, 주식 던져 놨는데 주식값이 자꾸 올라 가지고……, 이런 식으로. 사도가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세상을 자신만만하게 살아갑니까?

자, 신약의 사도 입장에서, 선지자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봅시다. 세상의 죄는 무엇인가? 자, 어떤 사람이 사도인가? “내 죄가 무엇인데 내가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야 됩니까? 도대체 그 죄라는 게 뭡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고 죄를 지었습니까?” 딱 물으면 사도는 아마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이 세상을 떠나버려라. 이 세상에서 살려는 게 그게 죄다.”

고아와 나그네, 과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약 때 이들의 언약적 특징이 뭐냐 하면, “떠나라. 너 있을 자리 따로 마련했으니까. 남자도 떠나고, 여자도 떠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 어린아이도 떠나고, 떠나라. 떠나면서 남들이 보고, 갈렙과 여호수아의 경우처럼 공격을 하듯이 ‘네가 뭐 내세울 것 없다’고 공격하듯이 남들이 내가 떠나는 것을 보고 욕하는 것을 실컷 즐기는 인생이 되어라.”

하나둘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잖아요. 빠져나오는 것, 그 빠져나오는 모습 자체가, 즐겁게 빠져나오는 모습 자체가 곧 선지자요 왕 같은, 제사장 같은, 오늘날 성도의 지위입니다, 위상입니다, 자리에요. “미련 없이 슬슬 빠져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즐겁지 아니하냐!” 즐겁지요.

구약에서 약속의 땅이라는 게, 대전강의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그게 하나님 땅이에요. 원래 사람들이 사는 땅인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동산 등록을 해서 자기 땅으로 만들어놓고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 그 땅에 들어오게 하면서 애굽에서 빠져나오라, 하는 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빠져나오는데 그들이 안 빠져나오고 그들이 뭘 했지요? “우리도 장관 세워서 뒤로 빠꾸(back)를 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러니까 기가 찬 거예요.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뭐냐? “아니, 우리 집 놔두고 왜 딴 데 도로 들어가려고 하느냐?” 이게 갈렙과 여호수아고요. 참 억울한 거예요.

제가 어제 새벽이 꿈을 꿨는데 참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이니까 계시는 아닌 것을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내 집에 혼자 있는데 탈북자들이 자기 집같이 방마다 다 차지하고 있어요. 헤아려 보니 남자가 한 여덟 명, 애도 한 일곱 명, 그들 모습이 <모가디슈> 영화에 나오는 한국 대사관에 갔던 북한 대사관 직원들 모습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다른 방에는 그들이 장사하려고 가져온 것 같은 미제술병까지 가득 채워놨어요. 화가 나서 나가라고 고함질렀어요. 허락도 안 맡고 내 집인데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깨서 가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자기 집이 없으니까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집주인이 화를 내면서 나가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의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그래 맞아. 이 세상에는 내 집이 없지.’ 나가면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살아라, 나가면 되거든요.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바로 오늘날 우리 성도의 처지와 입장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했으니까. 내가 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하는 분이 예수님이니까. 나의 운명은 이 코스대로 밟아야 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미리 보여줘서 나그네처럼 오셔가지고 나가버렸다는 말이지요.

떠나는 즐거움, 떠나는 기쁨, 가벼움, 지금 미가가 오늘 본문에서 그걸 언급하는 겁니다. 메시아입장에서, 선지자입장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멸 받아야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주께서 심판하시고 심판할 때, 하나님이 신원한다는 말은 헤아린다, 변론해주신다, 변증해주신다, 내 대신 다 ‘전혀 이야기하지 마. 내가 이야기할 게.’ 주님께서 친히 변호사 되셔서 다 이야기해 주셔가지고 걱정 없이 우리로 하여금 광명에 이르게 하고 의에 이르게 하신다는 그 코스를 선지자위치에서, 장차 앞선 성도의 입장에서 미가는 이렇게 우리에게 우리 앞날을 이야기해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언약 자체의 능력과 언약의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뽑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자체가 알지 못하는, 진멸받아야 되는 대상인 것을 기뻐하고 이 세상의 허무성을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