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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엘 2:15-17 / 하나님 증명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엘

요엘 2:15-17 / 하나님 증명

정인순 2021. 11. 18. 10:08

음성 동영상 Youtube

하나님 증명

 

이근호
2021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요엘 2:15-17

(2: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2:16)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2:17)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은 모든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들어있는 어휘들입니다. 즉 율법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단어들로 예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율법은 율법 자체적인 능력으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겁니다. 즉 율법에서 제시된 어휘들은 율법이 스스로 책임지고 성취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을 듣는 이스라엘은 어떤 입장에 있을까요?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에 휘말린 자들입니다. 율법에 근거해서 저주가 떨어지면 그 저주를 고스란히 받아야 될 처지에 있고, 율법이 주는 복을 받으면 그 복을 고스란히 누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요엘서에 들어와서 율법은 ‘여호와의 날’로서 그 완성을 보겠다는 앞날을 제시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께서 직접 이 세상에 나타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 날이 되면 온 땅에 저주가 덮치게 됩니다. 마치 메뚜기가 모든 농사지은 땅을 두꼅게 뎦어서 정신없이  인간이 먹을 양식을 다 처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인간에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날입니다. 즉 율이 완성되는 그날은 창세기 3:24에 취지를 그대로 이어가서 최종 완성시키는 날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즉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 없는 곳으로 뱀과 함께 추방당했습니다. 이는 곧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곳에 하나님 없다”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의 평소에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은 결코 하나님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음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관에는 ‘하나님 없음’은 상식이나 마땅하고 다들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냐하며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함을 증명하는 태도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상상하고 그 상상한 신을 믿는 것은 신보다 내가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인 앗수르 민족의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은 접수케 하시는 이유는, 이방민족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민족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민족의 태도는 ‘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을 만들고 믿고 그 신이 자신들과 함께 있음을’ 자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듯 이방민족이 신을 믿는 태도로 변질되어있습니다. 뭐든지 자기를 위하여 신을 믿고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신에게 제사하고 기도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에 해당되는 짓인 겁니다. 미가 선지자의 글 3: 10-12에 보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성을 보여줍니다. 두령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리 이스라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신을 믿을 때는 이런 보상을 얻기 위함이라는 점이 인간들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음’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여호와와의 날에 멸망당하고 저주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집결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회개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그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민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가 없다는 사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이방화되어 있습니다. 이방화가 된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란, 미가 선지자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으매 우리에게는 다른 니라에게 망하는 일은 없다”라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방나라적 사고를 바뀌게 되려면 이스라엘이 자기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저주받는 일 뿐입니다.

즉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나라는, 자기 나라가 이방나라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철저하게 멸망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는 겁니다. 율법은 율법이 스스로 작동하여 완성에 이릅니다. 율법을 받은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밖에 없기에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바로 그 모습이 여호와께서 참으로 이스라엘 중에 계시는 것이 증명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욕조 바닥에 있는 물빠지는 배수구 같습니다. 그들이 저주받아 빠지는 그 지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민족에서 ‘저주 분출쇼’를 벌리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이런 식으로 자기 변화를 꾀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변화란, ‘자기’라는 그 틀은 그대로 두고 내용을 바꿈으로써 마치 자신이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감상합니다. 관찰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이제 회개라는 방식으로 새 사람된 거야”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평가를 내리는 큰 틀로서의 나는 전혀 달라지지 않고 예전에 나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엘 본문에서 지시한 내용은 누가 성취하십니까? 요한복음 8:21-24에 보면, 예수님 홀로 분투노력하며 그당시 하나님 믿는 종교가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즉 하나님 있다고 여기는 자들로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로 낙인찍혀 살해를 당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 너희들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하시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아버지께서 직접 살리시므로서 참으로 인간세계에 하나님은 없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은 예수님 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믿는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 속에 하나님 없음을 증명해보라’고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요구하셨던 겁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비로소 자신이 생각해놓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 내가 있으매 하나님은 저에게 없었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이 성도가 할 수 있는 하나님 증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저주받는 것이 참으로 정당한 조치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9강-요엘 2장 15-17절(하나님증명)211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15-17절입니다.

요엘 2:15-17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찌어다.”

방금 읽은 15절에서 17절까지 보면 거기 나오는 ‘시온’이라는 것, 그리고 ‘나팔’ ‘거룩’ ‘금식’ ‘성회’ ‘백성’ ‘회’라는 것, 모임이죠, ‘장로’ 그다음에 ‘신랑이 방에서 나오는 것’ ‘신부도 골방에서 나오게 하는 명령’ 그다음에 ‘제사장’ ‘낭실’ 낭실이라는 것은 성전의 동쪽 현관을 낭실이라 합니다, ‘단’ 단은 성전에 있는 제단이지요, ‘제단’ 그다음에 나오는 ‘주의 기업’, 그다음에 ‘열국’ 그다음에 ‘이방’이라는 표현,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있는 거냐 하면, 율법안에 있는 거예요. 율법안에 들어 있는 개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지시를 한다는 것은 율법을 전부 다 총집결시키는 작용이에요.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스스로가 진행하고 스스로가 완성해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에 딸려 있는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하게. 율법이 준 그 구조 안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구조 자체가 작동을 하고 움직인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딸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말씀은 말씀 자체가 스스로 말씀을 완성케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냐? 그 말씀이 하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그들이 지금 빨려 들어간 거예요. 율법이 한 장소에 집결했다 하는 것은 여기에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거룩한 특정한 날에 그들을 모으게 하는 겁니다. 특히 이 이스라엘 모든 움직임이 율법 내에 있다는 것이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이 대목이 어떤 취지에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그것은 신명기 24장 5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

막 결혼한 신랑과 신부는 둘이 자기들만의 둘만의 은밀하고 포근한 시간을 갖도록 허락하라는 겁니다. 사적인 것을 잠시 허락하는 거예요. 율법에서. 왜냐하면 결혼해 놓고 전쟁터에 나가면 전쟁이 안 되니까. 자기 부인이 그리워서 거기에 몰두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신랑 신부, 여기서 신랑 신부라 하는 것은 결혼한 지 27년 되었는데 신랑 신부라고 하지 않거든요.

신랑 신부는 아직까지 따뜻하게 신랑 신부의 그 순수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걸 율법에서 1년으로 보는데 1년 동안 새신랑 새신부로 간주해서 둘만의 아늑한 시간을 갖게 허용을 한 겁니다. 그런데 율법이 허용한 그 신랑과 신부마저 골방에서, 사적인 공간에서 나와서 공적 공간으로 나오게 하라는 겁니다. 그만큼 이 사태가 급한 거예요.

왜 급하냐 하면, 율법의 지시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한곳에 집결하게 합니다.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회개의 집회를 가져야 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2장 11절에 보면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전부 다 여호와의 날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의 날은 이게 무서운 날이거든요. 메뚜기가 하늘에 그만한 두께를 가지고 지상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그것을 도중에 전부 다 강탈하듯이 인간으로 하여금 ‘너희들은 이 땅에 더 이상 양식을 먹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라는 것을 통고하는 최후의 심판의 날처럼 메뚜기가 인간의 먹을 양식을 다 먹어치우는 거예요.

그 메뚜기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앗수르 군대가 메뚜기같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완전히, 싸그리 황폐하게 만드는 군대가 메뚜기같이 덮칠 것이다. 그런데 그 메뚜기가 오는 것,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쳐들어오는 것, 그게 다 어떤 목적이 있는데 그게 뭐냐? 여호와의 날은 이렇게 참담하고 참혹하고 황폐하고 처참한 날이 되는 거예요. 일체 희망은 전혀 없는 절망을 그대로 다 보여주게 되는 날, 그게 여호와의 날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1, 2절에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천국이 가깝다. 천국이 오는 날이 회개하는 날, 또 여호와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들이닥치는 날, 그 들이닥치는 날에 사람들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 날이 처참하고 황폐하고 절망적이고 우리는 다 죽었다, 이제는 끝장났다, 끝났다, 나의 가치는 이제 찾을 것 없다, 이렇게 탄식하겠지만 여호와의 날이, 그렇게 자기 백성이 탄식함에도 불구하고 꼭 여호와의 날이 와야 될 이유가 그 여호와의 날에 모든 율법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완성을 향하여 말씀 스스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율법 스스로 자기완성을 이루어냅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적인 조건을 가지고 참여할 뿐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오는데 오면서 그들은 모여서 금식하면서 성회를 선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겠지요.

하는데 17절에 보면 그들이 금식기도 해야 될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할 도리는 없습니다 내가 뭘 해서 그것이 내 구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음이 들통났습니다. 그냥 불쌍히 여기소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불쌍히만 여겨주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라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라는 말이지요. 자기한테 희망 없고, 자기한테 기대와 의미 없다는 것을 다 같이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17절에 그게 나와요. “열국들(이방 민족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방 민족이 우리를 통치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뒤에 중요한데요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찌어다”

“‘너희들의 하나님은 없다. 여호와는 없는 거야. 있는 하나님은 너희들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침략해서 다 뺐는 우리, 우리 이방 민족이, 우리가 믿는 신은 있지만 너희가 믿는 여호와 신은 없다.’라는 식으로 쳐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 이것을 역전시켜 주옵소서. 너희들의 하나님은 없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있다, 로 바꿔지게 하옵소서.” 그 기도를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도가 오늘 본문에 의해서 율법적으로 시행이 되려면 그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망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돼요.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여호와께서 그렇게 싫어하는 이방신을 믿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의 심정으로 그들은 여호와를 거론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미가서 3장 10-12절까지, 약간 길지만 빨리 읽겠습니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다 그 말이지요.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이 말은 이스라엘이 이미 맛이 갔다는 거예요. 이방 민족들이 생각하기를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킨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방 민족이에요. 그 이방 민족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오늘 논리가 어려워요. 이미 이스라엘이 이방화 된 겁니다. 이방화 되었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아까 미가에 나오는 그 말씀처럼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그 재판하는 자들이……, 방금 읽었던 대목에서 나오지요.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뇌물은 돈이잖아요.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삯도 돈이고요,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전부 다 겉으로는 하나님이지만 속에는 돈이 함께 있어야 나는 산다는 거예요. 여호와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돈이 있어야 사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원하는 돈 좀 잘 벌게 해주세요. 이 여호와 하나님이여’라고 그렇게 평소에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돈 벌어서 부자 되게 해 줄 겁니다’라는 생각이 바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이방 민족이 그들의 민족의 신을 섬기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일한 그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늘 본문 요엘로 돌아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너희 하나님은 없다, 라는 말을 못하게 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진짜의 하나님의 본색을 드러내서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 믿은 것은 사실은 이방 민족들이 잡신을 믿는 것밖에 안 되었다, 라는 것이 들통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라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뭔 뜻인지 감은 오지요. 아, 무슨 취지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감은 오시는데 그것을 압축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너희들이 증명하라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너희들이 증명하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금 그걸 이스라엘에게 지시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없습니다. 굳이 말을 해야 돼요? 맘으로 양심으로 우리끼리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원래 아담이요 쫓겨났는데 어디로 쫓겨났느냐 하면,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쫓겨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곳은 굳이 증명할 필요 없어요.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 믿어도 맘속에는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믿어도 행동은 하나님 없는 식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이 내가 숨겨놓은 나의 본모습이에요. 아멘, 나와 줘야 돼요. 아멘, 나와 줘야 돼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고 인간밖에 없는데 왜 자꾸 이방 민족들은 또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자꾸 하나님을 믿느냐 하면, 그것은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차,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여기 멀쩡하게 엄연히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나님을 요청한 거예요. 하나님을 믿겠다고 자부한 거예요. 하나님을 상상하고 그 하나님이 있다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목적이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없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어도 나는 여기 없다, 를 증명하면 되는 거예요.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 못 합니다. 원래 창세기 24장에서 에덴에서 쫓겨난 이상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온 결과가 뭐냐 하면, 인간은 한 살, 두 살 ……, 백 살 살다가 결국 이 땅에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내가 없어지면 내가 믿던 하나님도 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증명됐잖아요. 간단하지요. 내가 있으면, 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없는 게 되고 있는 나를 하나님이 없애주시면 나를 없애주시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지금 하나님이 없으면서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여기 있어 장래가 불안하고,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일단 하나님을 동원하고 하나님의 말씀 두꺼운 성경책 동원해서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지시를 했으니까 나는 이거 믿으면 앞으로 나는 천국 갈 거야. 결국은 천국 갈 거야.’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여기 있는 나잖아요. 그런데 나는 없어진다고요. 없어질 인간이 성경 봐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없어질 인간이!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말씀은 말씀 자체적으로 작동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끼어드는 것 아닙니다. 내가 말씀 지켜서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에요.

갑자기 흥분하고 싶어지네요. 여호와의 날은 뭐냐 하면, 여호와만 있는 날이에요. 여호와만 있는 날. 여러분, 깊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회개라는 것은 나를 바꾸는 것이니까 ‘나를 바꿔서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정말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인간은 본인에 의해서 본인이 바뀌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뀌었다, 회개했다, 반성했다, 그 자체가 나라는 큰 틀은 그대로 있고 안의 내용을 내 힘으로 바꿔보는 거예요. 백날 바꿔도 뭡니까? 큰 틀 그 안에서만 노는 건데요. ‘나는 회개했다.’ 누가? 내가. 그 내가 그대로 있잖아요.

큰 틀, 프레임, 그 큰 틀은 그대로 있으면서 ‘나는 이제부터 교회 다닌다. 이제부터 하나님 믿기로 했다.’ 누가 아는데? 내가 아니까. 그 네가 아는 너는 바뀐 적이 없는 거예요. 점점 설명하기 힘든 이야기만 계속해서 죄송합니다만 인간은 인간 자체가 아무리 바뀌어도 안 바뀌어요.

왜냐? 바뀌었다고 우기는 것은 틀은 그대로 두고 내용을 내가 조작한 것뿐이거든요.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고 그걸 믿겠다고 하는 그 주인공이 뭐냐 하면, 내가 엄연히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도 있고 그렇게 그다음에 생기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내가 없어지라고 태어났거든요. 내가 없어지게 태어났고 지금도 내가 있고 싶어도 없애는 분이 계셔요. 그 없애는 분이 어떤 생각이냐 하면, 인간이 있는 이상은 하나님은 없고, 네가 있으면 나 없고 내가 있으면 너 없고,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은 창세기 3장 24절,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는 이 현장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같이 있을 함께 있을 그런 입장이 못 되는 거예요.

대구강의에서 제가 이야기했지만, 종교라는 것, 교회라는 이것이 오락이에요 오락. 오락이라니까요, 오락. 있는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잘 믿는다는, 전에 하나님 안 믿어서 매 많이 맞았는데 이제는 하나님 잘 믿어서 복 받았다, 라는 내용을 내 안의 내 허접한 것을 내쫓고 건전한 것으로 바꾸어서 괜찮은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 전의 나는 마음에 안 들어. 하나님 믿고 착하게 사는 그런 나가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걸 마음에 들어하는 나는 멀쩡하게 그대로 있는 거예요. 달라진 것 없어요. 뭐가 인간이 달라져요? 무슨 수로 달라집니까?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이야기할 때 회개하라, 하면서 결국 이 회개가 안된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하면 물세례라는 것은요, 율법 시대를 반영하는 겁니다.

율법 시대는 율법이 율법을 이루지 인간은 율법을 못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결국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작살나야 된다. 여호와의 날이 작살 나는 날이에요. 율법을 주신 여호와가 직접 우리 코앞에 나타나면 우리는 설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끼 끄집어냅니다. 도끼 끄집어 내고 도끼로 모자라서 아예 불에 던지우리라, 했어요. 세례요한이 그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3장에서.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찍어버리겠다. 너희에게 불 심판을 내릴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어느 차원이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고 오지 못하도록 네 동네하고 이 하나님 동네하고 차원이 다른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두루 도는 불 칼을 가진 천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동네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그 취지를 계속 율법안에 담아서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들어보니 뭐 감사가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갑자기 불안해지고 ‘내가 믿은 것이 전부 헛방인 것이 들통났네. 나 어쩌지? 이대로 살다 지옥에 가야 되나?’ 갑자기 염려가 밀려오고 어떤 분통과, 열불이라 하지요, 그런 분노 그런 게 막 밀려오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욕조에 물 빠지는 배수구와 같아요. 주님께서 율법을 작동시키고 그 안에 이스라엘을 집결시켰습니다. 신랑 신부까지 다 끄집어냈어요. 그게 하나의 하수구 역할을 해요. 하나의 맨홀 또는 블랙홀,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의 역사의 구멍, 그렇게 빠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옴팍 망해버려요. 망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참, 이거 끝났네.’ 그렇게 해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저주받게 함으로써 저주받는 하수구가 생기면, 그다음부터 여호와의 날이 되면 그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해서 거기서 저주의 분출쇼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작살 내고 그다음 차례는 이방 민족 작살 내요. 그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죽 나오는 내용들이에요. “이방 민족아, 기다려라. 내가 너희들 작살 낼게. 저주해줄게. 창세기 3장 24절의 취지에 의해서. 너희들에게 있는 신은 신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어? 뭘 함께 하고 있어?”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을, 어떤 식으로 율법을 완성 시키는가를 아시게 되면 행여나 절망적이고 ‘나는 끝났네, 끝났어. 집에 가자.’ 이런 생각이 들더라도 주께서 율법을 가지고 여호와의 날을 완성 시키는 방식을 들여다보게 되면 감사가 절로 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시고 너희들로 하여금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회개하라, 하고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너희 하나님은 원래 없었어”라는 그런 놀림을 받고 질타를 받는 이것을 이스라엘도 받지만 이스라엘 그 끝자락에 누가 받느냐 하면,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이, 성자 하나님께서 옴팍 이걸 홀로 다 받아버려요.

다 받음으로써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율법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요엘서의 이 말씀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완성이 되면 어떤 효과가 주어지느냐 하면, 정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 결과물로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기는 가짜라는 것이 그게 완전히 영원토록 완성이 되어버려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증명하지 못한, 여호와는 진짜 계시는 분이라는 증명하지 못한 그것. 증명 못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저주 아래 구멍으로 집어넣어 버리고,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이스라엘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드러내게 되면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성공을 하신 거예요.

이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라는 인간이 증명하지 못한 것. 진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지를 못하지요. 왜? 나는 내 위신과 체면을 고려해서 하나님을 믿으니까. 내 죽어서 천당 가기를 욕망하면서 예수고 하나님을 믿는 이런 것은 이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꼼수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결국 나를 지키고 내가 잘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영원히.

그러면 창세기 3장 24절의 취지를 완전히 개무시해버리고 ‘무조건 나는 잘 되어야 돼’라는 이 옹고집, 그것을 위해서 여호와를 믿었는데 그건 가만 보니까 이방 민족들이 우상 섬기는 방식하고 똑같은 거예요. 결국 이것은 내가 여기 있을 뿐이지, 그냥 하나님이 있다고 상상할 뿐이지 정말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지 않았어요.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을 부른다고 쪼르르 오는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내가 버티고 내가 여기 있음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은 거기 없다는 것이 오히려 증명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함으로써 진짜 하나님이 “너 같은 인간은 멸망해야 돼. 저주받아야 돼.”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해 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증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가 저주받음으로써 증명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 했느냐? 예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식으로 진짜 하나님은 여호와 뿐임을 증명해 낸 겁니다. 여러분 이게 신나지 않습니까? 이 ‘저주 쇼’가요.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우선 나부터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나는 무조건 챙겨야 돼.’ 이것은 뭐 창세기 3장 24절에 의해서 이미 마귀와 함께 추방된 입장이기 때문에, 뱀과 함께 낙원에서 추방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 속성이 뭐냐? 하나님보다 뭐가 중요하냐 하면, 내가 중요하거든요. 뭣이 중헌디? 내가 중요하지요, 뭐.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중요한 이상 진짜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왜? 내가 있으면 하나님은 없고 내가 없어지면 하나님은 계시니까요. 그래서 인간들은 내가 잘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실패로 끝나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참한 2층 양옥집 주택에서 비행기 소리 차 소리 등 소음이 들리지 않는 그런 한가하고 나른한 오후, 남자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여자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서 돋보기 쓰고 뜨개질할 때 참으로 평온해 보이지요. 그 내면은 복잡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어떤 행동도, 독서나 뜨개질 어떤 행동도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달래기 위해서 뜨개질하고 독서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의 내심의 불편함을 외부에 다스리기 위해서 뜨개질하고 독서하는 겁니다.

그러면 평화로운 뜨개질, 독서 하기가 뭐냐? 내가 불편함을 증명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는 이유가 뭐냐? 내가 심히 불편하기 때문에, 내가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걸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이걸 감추고 싶은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분출하는 ‘저주 쇼’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줘서 율법으로 하여금 전에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제는 율법 속에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율법이 갖고 있는 그 저주성에 이스라엘 전체가 이스라엘이 다 거기에 함몰되어서 율법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해내는 망한다는 것, 저주받는다는 것, 심판받는다는 것. 누구한테? 자기 하나님한테 심판받는 그러한 경우를 이스라엘이 당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고마워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네가 믿는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지적질 해주는 이 자체가 우리한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요.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되었잖아요. 어떤 외국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요. “현명한 사람은 말하기를, 바보들만 성급하게 설친다고. 그러나 당신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보라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뜻이지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이것이 비록 죄가 된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의 사랑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옛날 팝송이 있어요.

Wise men say(현명한 사람은 말하기를) only fools rush in(어리석은 자만 성급하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그러나 나는 당신 사랑을 멈출 수 없어요)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내가 당신에게 머무는 이것도 죄가 될까요)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 사랑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라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내 손을 잡아요. 내 인생 전부를 당신이 가져가세요)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왜냐하면 나는 당신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에요)

이 가사의 특징이 뭐냐? 사랑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빠져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빠져드는 거예요. 어디로? 저주로. 멸망으로. 여호와의 날 의 취지가 바로 그거예요. 창세기 3장 24절에서. “인간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낙원에서 쫓겨난 그것을 이스라엘아, 네가 지금 이 시대에 네가 보여주게 될 것이다. 네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너로 하여금 망하게 할 것이다. 율법이 스스로 율법을 드러내는데 네가 참여된 것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냐!”

지금 나 혼자 기쁩니까? 내가 멈출 수가 없어요.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당신 사랑이 중간에 스톱이 안된다니까요. 멈출 수가 없어요. 그냥 빠져들어 가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믿는 모든 하나님은 가짜라고 하는 그 놀라운 진실에 우리로 하여금 빠져들게 해서 그걸 알게 하시는 겁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그러면 누굴 위한 하나님밖에 없는가? 바로 요한복음 8장 19절, 뭐 8장뿐이겠습니까? 7장, 8장 다 마찬가지인데요.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치열하게 유대인들과 싸웁니다. 뭐라고 싸우냐 하면, 요한복음 8장 18절부터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은요, 혼자서 싸워요. 왜? 예수님 혼자서만 아버지가 계시고 나머지기는 아버지가 없기때문에 그래요. 이 예수님 이야기, 예수님 혼자만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2-24절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지금 이런 대화가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찐, 찐,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외에는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성취하시고 그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람만이 진짜 여호와를 아는 사람이에요. 성도지요. 주의 백성이 됩니다. 그 예수님이 치열하게 그 당시에 하나님 믿는 자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 하나님은 없음을 증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뭐라고 하느냐? 이방인들은 이스라엘보고 “너희들이 망했으니까……” 잘 들어보세요. “‘너희들이 망했으니까 거봐, 우리는 너희를 정복했고 우리는 멀쩡하니까 우리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고 너희들은 여호와, 여호와, 하면서 믿어도 우리한테 당했잖아. 그러니 너희 하나님은 없느니라.’라는 말을 너희들은 들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전복시키고 그걸 뒤집어버려라.” 뒤집을 수 있는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이스라엘에게는 없습니다.

누가 뒤집는가? 예수님께서 홀로 뒤집어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있다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살해당하고 살해당한지 사흘 만에 거기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없는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은 가짜인 것을 주님 혼자 증명해 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에요. 우리가 증명할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왜? 그들은 본인이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이사야 36장 10절에 보면 남쪽 유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대군을 끌고 왔습니다. 랍사게가 히브리어까지 능통해요. 진짜 머리 좋아요. 자기가 침략할 나라의 언어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통역 필요 없이 본인의 말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여호와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증명한다는 거예요.

36장 9절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장관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의뢰하여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잘 들어보세요, 10절을.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이게 여호와가 있으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신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는 거예요. “나 앗수르 군대장관이 여호와 믿는다고 우기는 너희들에게 너희들 사고방식으로 내가 설명해줄게. 너희들 여호와 믿지?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고 여호와의 주권을 이야기 하지. 그래, 그래. 내가 그 구조를 그대로 인용할 게. 너희 여호와의 지시에 의해서 너희들에게 쳐들어왔다. 됐냐?”

이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이방민족의 사고방식입니다. 교회 안 다니는 인간들이 “너 교회 다니면서 술 먹고 담배 피우나?” 이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 본인은 교회를 안 다녀요. 네가 믿는 여호와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 같은데 백날 존중해줘도 나는 너희들이 존중하는 여호와를 안 믿을 정도로 나는 자신만만하다는 뜻입니다. 네가 믿는 여호와는 내 밑에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어찌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만의 생각이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교회 만들고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뭐가 잘못되었는데요? 왜 내가 하는 일은 족족 이렇게 형편없게 만드십니까?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내 미래가 펴겠습니까?’

기도할 때 기도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말씀을 지키면 되고 성경에 날 쳐서 복종시키라 하니까 ‘예, 나를 쳐서 복종하겠습니다. 됐습니까? 이렇게 해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겠어요? 대학 수능 안 치고도 합격시켜 주시겠습니까?’ 이런 거요. ‘왜 하나님은 나의 중보기도를 안 듣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랍사게가 하나님 믿는 그 예루살렘을 포위해놓고 하는 그 말투에요. 그런 의식입니다.

이방 민족이나 하나님 믿는 거나 둘 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마찬가지예요. 내가 먼저 중요하고 그다음에 하나님이에요.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여기 있음에 있는 것 자체가 저절로 하나님 없다는 것을 크게 증명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형국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세월이라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어떻게 역전해서, 반전해서 어떻게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명하느냐? “나는 내 위주고 하나님 위주가 아닙니다, 라는 이것이, 이 내 생각이 내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라는 이 생각 자체가 이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죄가 뭐냐? 나 우선이 죄잖아요.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죄였잖아요. 나의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하나님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예수님의 아버지에요.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아버지에요. 나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게 아니고 나의 아버지는 없어요. 우상이에요.

예수님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었어요. 우리가. 여러분, 그 차이, 나의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했던,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리신 그 예수님의 하나님을 이제는 남이 아니라 주님의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된 거예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뭘 버리고요? 나를 위한 하나님을 버린 자에게만 주님은 이렇게 나의 죄의 고백 자체가 주님이 확실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빨려 들어가서 우리가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그렇게 죽을만한 당연한 죄인인 것을 늘 자백하는 그 기쁨과 감사함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죽였다 살린 그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증명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