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54강, 355강). 외침, 규칙 210608 본문
녹취:이하림
354강-YouTube강의(외침 여호수아 6:5)20210608-이 근호 목사
제354강, 제목은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동행할 때 원칙이 있어요. 어떤 원칙이냐 하면 장애를 줍니다. 장애물을 앞에다 딱 두죠. 이스라엘 앞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항상 장애가 있습니다.
그 장애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겁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장애가 만만한 장애 같으면 겁을 안 낼 텐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항상 자력으로 진격 또 진격하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행해서 갈 수 있는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다음에 거기에 부딪치게 만드는 겁니다. 차가 과속해서 절벽에 무모하게 충돌하는 것처럼 부딪치는 방식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손을 놓죠. 그것을 주님께선 의도했습니다. 그래서 ‘외침’이라 되어 있는데 이 외침은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그 집단을 이끄는 원칙이 됩니다. 그 원칙을 출애굽기 14장 13절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어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두려운 것을 줘놓고 호들갑떨지 말라는 거죠. 한번 가만히 지켜봐라. 지켜보게 되면 너희들은 너희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너희와 동행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가는 데에 있어 원칙은 뭐냐 하면 이 길 또 이 미래는 인간들이 예상할 수 있는 미래도 아니고 인간들이 찾아낼 수 있는 그러한 미래의 길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은 엉터리이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줄 때만 비로소 예상 밖의 구원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도와줄 때만 가능한 구원이 되어요. “나 미리 다 알았거든” 이것을 절대로 용납 안 해줘요. 그러니 ‘가만히 서서’라는 거예요, 가만히 서서. 그러면 가만히 서 있을 경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들에 대해서 또는 장애물에 대해서 아무 기여한 것이 없게 되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게 돼요.
이 원칙이 출애굽기 17장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아말렉 민족이 나왔을 때 10절-1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17장 10절, 11절에 나오는 이 이야기하고 아까 했던 출애굽기 14장 “가만히 있거라”하고 어떻게 계속해서 동질의 연속성을 유지하는가를 찾아봐야 됩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장애가 네가 원해서 또는 네가 예측 못한다고 해서 장애가 없거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장애를 줬으며 일방적으로 장애물을 줬다는 것은 장애물을 치워버리는 그것도 줬다가 없어지는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할만한 장애를 줬다는 말은 하나님은 적들과 싸우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물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뭐 하나 슬쩍 해놓고 본인이 해놓고 본인이 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하고 싸우는 겁니다. “겁나지, 겁나지? 내가 치워줄게.” “아이고,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뭐가 간담이 서늘해? 네가 뭐 예상했구나.” “아이고, 아무리 주께서 도와주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아찔한 일은 안 일어났으면 참 좋겠습니다. 큰일 날 뻔했잖아요. 그걸 경상도 말로 식겁했다 하거든요. 식겁했잖아요.” “식겁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데?” 그게 성립이 안돼요.
그 식겁한 것에 이제는 깊이를 더합니다. 이제는 즐겨 참여하는데 어떻게 참여하느냐 하면 도저히 인간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방식을 주님께서 이제는 네 쪽에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한번 해봐라. 전에는 관람객이었고 관찰자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관람객, 관찰자가 아니고 식겁하는 주의 일에 참여시킵니다.
참여시킬 때 여전히 인간이 예상 못한 방식을 동원하죠. 그것이 뭐냐 하면 지팡이 들고 올렸다가 힘 빠져서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내렸다가 해보라는 겁니다. 이건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받치고 있는 아론과 홀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전쟁하는 여호수아한테도 생뚱맞은 광경입니다. 뭐 이런 게 있냐는 말이죠.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을 이겼다면 이스라엘 백성 생각이 그 다음번 전쟁할 때 맨날 모세보고 지팡이 들고 오르락내리락 하래. 그 방식을 또 써먹을 거란 말이죠. 그러나 이미 어떤 방식을 줬다는 말은 이미 그 방식은 시효가 끝났다는 거예요. 두 번 다시 안 합니다.
홍해 건너갈 때 쫙 갈라지고 건너갔잖아요. 그 방식은 그 순간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건이라 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누구와 연계가 되느냐 하면 내가 얼추 안다는 나의 교만과 연계해서 십자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십자가 피, 말로만 반복해서 줄줄이 외워서 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피 맛의 다양성, 나의 태도와 나의 속셈과 연계되어 가지고 내 생각에서 나올 수 없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피의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피 바른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고요. 그 피라는 자체가 맨날 알던 피가, 피가 이런 거였어? 그 때 그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정황과 상황과 사건을 주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의도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맨날 장에 가면서도 혼자 못가고 엄마 손에 이끌려서 장보러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아이 같은 심정입니다.
엄마가 장보는 코스가 있을 때 ‘분명히 엄마는 오늘 이 코스 갈 거다’ 라고 생각했다면 주님께선, 엄마는 그 아이의 생각을 아시고 다른 코스를 가버려요. 다른 코스로 갔을 때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라는 말을 그러한 다른 변화 속에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팡이 하는 것도 다 써먹었습니다. 지팡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두 번 다시 안 써먹습니다. 그 다음에 써먹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의 제목처럼 여호수아 6장의 이야기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하는데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저 여리고성을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5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 하시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원칙은 출애굽기 14장 14절의 원칙, “가만히 있거라”의 원칙과 동질한 연속성을 유지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방식이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겁니다. 여리고성 앞에서는 가만히 있는 방식이, 나팔을 불 때 그 나팔 소리에 그들의 목소리를 같이 섞어버리는 거예요. 섞어버리면 그 양각나팔소리가 부각이 되면서 여리고성 무너짐은 더불어 따라오는 겁니다. 양각나팔 소리 안에 그들의 소리를 섞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양각나팔이라는 것은 민수기나 율법에 보면 모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부는 게 아니고 놀랍게도 모든 전쟁이 마감되었음을 빰빠바밤빰 빰 알렸을 때 부는 게 양각나팔이에요. 그러니까 산 위에 모든 걸 다 선별하고 깃대 옮기면서 ‘이 땅은 우리 땅이 되었습니다’ 라고 과거를 보면서 현재를 선포하는 그 나팔 소리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양각나팔 소리 속에 그들의 외침이 섞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지은 그 미래의 상황에 그들이 미리 거기에 참여토록 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하면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이 소리에요. 다 이루었다.
초대교회에서 사자가 와서 “무섭지? 예수 거부하면 살려주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 사자한테 뜯길 것이다” 하고 초대교회 고난 받을 때 초대교회에서 외쳐야할 것은 다섯 자에요. “다 이루었다.” 뜯어먹든 볶아먹든 삶아먹든. 구원은 끝났어. 끝났어. 다 끝난 거예요. 끝났음,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흘 동안 굶은 사자가 다가온 겁니다.
과정 생략이에요. 그들은 미래 오기 전에 과거의 사자가 오는 거고 이미 그것이 끝난 상태이기에 사자가 오든 바퀴벌레가 오든 상관없는 거예요. 끝나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참여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침. 세례요한한테는 이미 구원이 된 겁니다.
355강-YouTube강의(규칙 누가복음 12:15)20210608-이 근호 목사
제355강, 제목은 ‘규칙’. 목회하시는 분들에게 교인들이, 저한테도 마찬가지이지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많이 하는데 그 질문들을 압축하면 이렇게 돼요. “목사님,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성도의 삶은 무엇입니까? 규칙을 얘기해주세요. 딴 소리, 골치 아픈 소리하지 말고 딱 이 규칙, 규칙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이야기하죠.
그 말은, “이제 새 사람 되었으니까 어떤 규칙이라도 악바리처럼 신경 바짝 세워서 늘 순수한 신앙심을 유지, 견지하면서 이젠 새 사람답게 지켜드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 안 해서 망한 것을 우리가 교훈적으로 너무나 잘 아니까 그러한 과거 역사의 실패를 우리가 염두에 두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관리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식으로 실패 안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또 우리한테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리라고 저는 생각할 테니까. 문제는 규칙이 뭡니까?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이제 질문을 하죠.
그 규칙이 여기 누가복음 12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 규칙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사시면서 스스로 가졌던 규칙이었어요. 너한테 필요한 규칙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구주가 되고 주님이 되는데 필요한 그 규칙이 성도한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확장됩니다. 예수님 본인은 스스로 어떻게 자기 규칙을 세워나가면서 사셨는가.
13절에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이 14절에 이미 규칙이 나와 버렸어요.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이 땅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사람 속에 사시면서 변치 않는 규칙은 뭐냐 하면 절대로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결단코 들어주지 않아요. 여기 재판한다는 것, 물건 나누는 자,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justice, 정의로움, 인간은 하나님을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곡해를 해요.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제가 하나님보시기에 참 정의롭죠, 그쵸? 라고 자기의 정당성을 깔고 하나님 즉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어떤 동질성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동질성.
천주교 교리나 개혁주의 신학이 그걸 핵심 교리처럼 잡고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이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의와 거룩이고 정의감이다 이거잖아요. 그게 다 안 끊어졌다. 연결고리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다. justice, 정의롭다는 거죠. 정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은 재판장이죠 뭐.
재판장장이라는 것은 선과 악을 나누시는 분이에요. 선과 악을 나눌 때 그게 정의롭다는 그것을 아담이 따먹은 선악 체제 안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인식의 고리, 인식의 그 구조체계 자체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우리 행위의 모든 것에 양심이고 뭐고 이 밑에 다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겸손한 척 하면서 인간들은 선이 뭔지 알아도 못 지키고 무능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아서 지킬 겁니다.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그게 바로 욥기에 나오는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분배할 때 형이 몽땅 다 가져간 거예요. 그 때 동생은 이때다. 이게 justice,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실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일어났다고 사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 경우의 수가 발생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경우가.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억울하니까. 자기는 가해자가 아니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피해 입었으니까 정의감에 호소하는 거죠. 선생님 또는 랍비여 또는 주님 찾아와서는 자기가 너무 억울하게 형한테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메시아고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필히 저의 이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들의 규칙에 주님께서 숟가락 하나 놓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동의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진리체계에 이 땅에 오신 주님도 거기에 편들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 동생은 그게 탐심인 줄을 몰랐던 겁니다.
인간들의 정의로움 안에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생명 되시는 하나님이 그 안에 같이 들어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정의롭다고 생각할 때는 그 출발점은, 본인도 약간은 정의롭다는 그것을 빼기를 못했어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의한 인간이라는 것, 나는 뭘 생각해도 불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정의는 근처도 안 갔다는 사실을 인간 본인이 무슨 수로 그것을 깨닫습니까? 깨달을 수 없어요. 인간은 같은 인간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착하나 내가 착하나 배틀 한번 붙어봐? 이런 식이란 말이죠.
본인이 뭘 해도 불의하고 죄인이라 하는 것은 비교대상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얼추 자기는 착실하게 살아왔으니까 이것이 결코 무가치하다고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언제 화냅니까? 언제 분노하고 화를 냅니까? 본인만 착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절로 화가 나요. 본인만 너무 착해서 쪼다된 거 아닌가 생각할 때 절로 화가 난다고요. 남은 재해기금 10만원 다 받았는데 저는 딴 짓하고 못 받고 기간 지났을 때 스스로 머리 쥐어박으면서 이 바보야 바보야. 식당 주인한테 주차 이야기했으면 7천원 벌건데 딴 이야기하다가 복음 이야기하느라고 7천원 날렸어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이 형한테 유산 다 빼앗기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복인 줄 몰랐던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준 거예요. 만약에 본인이 형한테 정당하게 유산 받았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올 일도 없고 예수님 자체도 필요치 않아요. 멀찍이 예수님도 정의롭고 나도 얼추 정의롭다. 그것으로 예수님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께 꾸중들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어요. 예수님한테 묵사발 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겁니다. 너 인간도 아니야.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복 받은 줄 알아야 돼, 이 사람아. 예수님 이용해서 결국은 인간은 소유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15절에 너는 네 소유가 있으면 그걸 너는 생명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거예요. 소유가 많은 것은 생명이 많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네가 지금 해석하고 있는데 그 해석의 원천이 누구냐? 네 탐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탐심은 뭐냐? 일단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게 탐심이에요. 죄 지었으면 죽는 게 당연하지 죄는 죄대로 지어놓고 살아야 되겠다는 어디 이 본대 없는 싸가지 없는 생각이 왜 나와요? 죄인 같으면 지금껏 살아온 것도 덤으로 산 거예요. 내가 안 살아야 되는데 왜 살아있지? 이렇게 나와야죠.
예수님의 규칙은 뭐냐?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살고자 하는 거야, 소유로. 규칙은 뭐냐? 나랑 같이 내가 죽어야 생명이 있는 것처럼 너는 너 자신의 그 모습에서 이미 죽은 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 주시는 생명을 받은 사람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뭐 자살할 필요 없어요. 그냥 덤으로 사는 거니까 살면 돼요. 그 다음에 이 사람은 형한테, 놀부한테 흥부가 있는 재산 다 뺏기거든 또 예수님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 형한테 다 빼앗겼는데 그거 안 빼앗겼으면 이렇게 주님 찾아올 리가 없는데 주님, 다 빼앗겨서 감사합니다.” 옆에 사람이 미쳤다고 할 거예요. 바로 그런 사람,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새 사람 된 사람입니다. 이게 규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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