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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시편 22:20 / 다윗과 짐승들 / 210308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시편

시편 22:20 / 다윗과 짐승들 / 210308

정인순 2021. 3. 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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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210308a 부산강의 : [시편]36(22편)-다윗과 짐승들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2편 16절부터 보겠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여기 22편에 나오는 단어들 적어보겠습니다. 12절에 바산의 소, 그 다음에 사자, 그 다음에 16절에 개, 그 다음에 역시 20절에 개, 21절에 사자, 이러한 짐승들이 나오지요. 특징들이 공통점이 이들이 힘을 당해낼 수가 없다.

특히 바산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지리가 있다면 갈릴리, 사해, 요단강 흐르고 있고, 이쪽이 서쪽이고 동쪽이 요르단 있는데 이쪽에 바산이란 곳이 있어요. 길르앗,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 이걸 요단강 동쪽 편이라 하고 동쪽 편에 산이 있어요. 동쪽 산지에 바산이라는 약간 비탈진 평야 있는데 거기에 소들이 많이 있는 모양이죠.

소, 사자, 개, 사자, 감당할 수 없는 대상들이 다 인간들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을 개라고 소라고 사자라고 이야기하고 그걸 공격하는 나를 힘으로 압제하는 인간들로 본다는 것은 다윗 속에 있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재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으로 보이냐? 인간이 아니고 이게 짐승이고 그것도 힘센 짐승이다. 인간관계를 힘센 짐승의 관계로 전부 다 전환시켜라, 재정립해버리란 말이죠. 네가 사람으로 여겼다면 사람으로 간주하지 마.

그러니까 다윗이라는 자기 본성을 그동안 엮였던 많은 인간관계들이 있잖아요. 그 인간관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제부터 나를 괴롭히는 짐승들로 관계를 재정립하라 이 말입니다. 여기는 조카도 있을 수 있고 이모도 아버지 있고 자식 있고 모든 여러 가지 관계들, 심지어 여기에 내연관계까지 있더라도 이걸 사람으로 보지 말고 이걸 짐승으로 봐버리면 어떤 효과가 있냐 하면 이들로부터 엮여진 모든 윤리와 도덕관계는 일거에 철수할 수 있어요. 제거할 수 있어요. 타인의 눈을 제거할 수 있다고요.

그동안 사람들이 주눅 들고 살아가는 이유는 나도 인간인 것처럼 그들도 인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힘들게 살은 겁니다. 인간으로 주고받고 하는 게 인간관계인데 받을 땐 좋았는데 받은 건 줘야 된다는 게 힘든 거거든요. 안 주면 내 체면이 또 문제가 되고. 난 참 인간도 아니야. 받아놓고 입 다물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야, 라고 할 때 본인이 나는 사람이다, 라는 이 괄호, 나는 사람이라 할 때 이 사람 안에 이미 다른 인간들이 여기에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투입된 관계 속에서 사람이란 거죠.

사람과 사람이 엮여진 그 만나는 장소 때문에 나는 사람이라고 한 겁니다. 그냥 거울보고 사람이라고 하지 않아요. 내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 중에 하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짐승이라면 어떻게 돼요? 이 관계를 청산해야지요. 손자 키우는 게 짐승 키우는 것과 똑같아요. 짐승 하나 더 키우게 됐어요. 이게 관계 재정립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청산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요. 성경 볼 때 기본으로 봐야 될 것이 나옵니다. 다윗이란 인물이 있을 때 이 인물이 자기 나름대로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이뤄서 나는 인간이고 싶다, 사람이고 싶다, 인간다운 인간이고 싶다. 이렇게 되면 불신자가 되지요. 왜?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에 다윗에게 인물이 주어졌다는 말은 마치,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지진을 내가 소유하는 겁니까, 안 그러면 지진에 휘말리는 거예요? 휘말리지요. 내가 콩닥콩닥해서 지진 유발자 아니잖아요. 지진 일어나면 거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같이 흔들리게 돼있듯이 말씀의 진동이 오게 되면 내가 인간이고 싶다는 이런 소박한 꿈도 같이 다 깨져버리죠.

말씀이 다윗 인물을 분해한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분해해버리면 다윗은 말씀세계, 율법세계, 계시세계 속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공식 하나 만듭시다. 말씀은 인물을 통해서 진동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신약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원칙이 구약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은 인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진동한다.

진동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펼친다. 이건 다윗 본인의 질서가 아니에요. 내가 그러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냥 말씀에 휘둘리다보니까 주변이 달리 보이는 겁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 살다보니까 나한테 저 사람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해서 계속 내가 관계 맺을 사람, 관계를 정리할 사람 이렇게 구분했는데 말씀이 딱 오니까 내가 그럴 권한이 없어요. 저 사람은 배척하고 저 사람은 받아들이고 하는 권한이 나한테는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 자체도 본인이 원하는 새로운 절서에 합류가 되지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집중하란 이야기죠.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게 맞는지 보세요.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 두 번째,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겠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되는 겁니까?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어요, 아니면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겠다. 이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1번 같이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면 나의 인간관계, 나의 나다움, 나의 인물다움은 그냥 유지됩니다. 그러면 이건 말씀의 질서에 장애물이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도 잘났지만 나도 잘난 존재가 돼요. 하나의 왕관은 두 왕이 쓸 수가 없어요. 하나의 왕관은 두 왕 중에 하나의 왕만 써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꾸 자기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거든요. 뭐 어쩌겠다고? 죄를 안 짓겠다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나는 나로 즐거워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 안에 믿음, 소망, 사랑 뭘 집어넣고 하나님을 집어넣어도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천당 보내는 나를 위한 사랑.

이 모든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뭐냐?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려면 책망하세요. 책망할 게 별 것 없지요. 하나님이 날 인정해줘야 되지요. 이런 식이에요. 이렇게 되면 여기 악마적 나는 누구의 걸림돌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겠다는 말은, 나는 이미 죄가 돼버렸지요(나=죄).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걸림돌이 해소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난 하나님과 경쟁하지 않겠습니다. 내 인생을 놓고 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우기지 않겠습니다. 지나간 인생은 내가 공들여서 이뤄놓은 그러한 연대기가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나는 내 죄를 고백하겠다는 말은 모든 율법의 목적은 1번이 아니고 나는 죄 안 짓는 것, 그만두는 걸 목적이 아니고 2번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한 거예요. 1번, 나는 죄 짓는 걸 그만두겠다고 하면 나의 적들은 뭐냐 하면 나를 죄 짓게 하는 것이 나의 적이 되지요. 그런데 2번, 나는 죄 지은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겠다고 한다면 2번의 적들은 바로 1번이 2번의 적이 되는 거예요.

나는 죄 안 짓는다. 이게 나는 죄를 고백하는 사람 앞에서 적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는 두 종류로 나눠지게 됐습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은 인물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중심으로 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인물중심을 하나님께서 따로 챙겨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번 같은 경우에 나는 죄 지은 것을 고백하겠다는 것은 이미 나는 나에 대해서 포기했다가 됩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그러면 포기하는데 어떻게 포기하는지 그런 예가 율법에 나와 있어요. 왜 다윗을 중심한 주변인물들이 개가 되고 사자가 되고 소가 되고 다윗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해야 되는지는 이제 율법을 하나 보면서 우리가 그 내막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9절에 보면 인간 신체의 분비물 중에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여기에 ‘탁’자를 집어넣으면......)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사람 얼굴에다 침을 뱉고 신발을 벗긴다는 것은 너는 이 자리에 설 자격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여기 신명기 25장 5절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특이한 민족이에요. 특이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은 인간들 육체의 관계로서 계속 자식 낳으면 그걸로 민족이 되고 집안이 되는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거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중추신경으로 가서 그 자손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떤 남자가 결혼해서 아들이 없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중추신경의 단면을 끊어보는 겁니다. 단면에 뭐가 있는지를.

이게 오늘 강의에 첫 번째 나오는 제일 어려운 건데 단면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공백이 나와요. 제가 어릴 때 국민학교 때 길거리에서 어른들이 쓸데없는 짓하는 걸 봤어요. 엿장수 가니까 엿으로 내기하자. 엿 사서 뚝 분질러서 훅훅 부는 거예요. 왜 그 짓하지요? 나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딱딱한 엿을 분질러서 구멍이 큰 쪽이 엿 값을 물어주는 내기. 내기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그것도 구멍 크게 한다고 훅 분다고요.

중추신경, 천국과 이어지는 천국에서 내려오는 율법이죠. 율법에 의한 어떤 인물 또는 인물 군(집단) 형성에 관계된 중추신경에는 중간에 뭐가 있냐 하면 공백이 필수적이다. 비어있는 거예요. 바깥에는 혈육이죠. 혈육이라서 기존에 이방민족과 차이점이 안 보입니다. 왜? 둘 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해서 자식 낳으니까 그 자식이 그 자식이고 사람 결혼해서 애 낳는 게 당연하지 그게 뭐 이상하냐 하지만 안에는 반드시 그냥 자식이면 안 되고 공백을 둘러 싼 혈육이어야 돼요.

공백이란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거든요. 율법이 왜 공백, 빈자리가 되느냐 하면 인간의 율법으로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요. 왜 불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율법 지키는 데 내가 손을 뗐다는 거예요.

그 손 뗐음을 공백 주위에 감아버린단 말이죠. 안은 비워놓고. 안은 누가 채울 거예요. 장차 율법대로 오신 분이 채울 거예요. 그 빈자리가 나보다 더 소중해요. 나는 그냥 시다바리, 그 빈자리를 보호하는 시다바리인 동시에 그 빈자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율법 지킴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혈육 안의 빈자리를 율법으로 채우는데 아까 보셨잖아요. 신명기 25장 5절, 6절에 뭐냐 하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옛날에는 형제가 동거했어요. 아버지 재산을 맏이에게 다 줬기 때문에 농사짓는 집안에서 땅을 맏이에게 주면 둘째, 셋째는 혼인을 하던 독립이 안 돼요. 농사지을 때 많은 일꾼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대대로 주어지는 가업이거든요. 가업을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형 혼자로는 안 되고 여러 형제들이 달려들어 농사를 지어야 겨우 농사가 되는 농경시대 이야기입니다.

형이 결혼을 해서 형수와 사이에 아들이 없이 형이 그만 죽었어요. 그러면 땅 이름은 맏이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땅을 둘째 이름으로 갈 수 없어요. 셋째 이름으로 안 됩니다. 둘째, 셋째는 그냥 형이 망하던 안 망하던 같이 빌어먹어야 돼요. 그래서 그렇게 맏이 쟁탈전을 야곱과 에서가 죽으라고 싸우잖아요. 에서는 이미 내가 맏이니까 변동사항 없다고 여기고 야곱의 믿음은 아마 바뀔 수 있을 걸, 하고 기어이 달려들어서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다 차지해서 자기가 맏이 노릇을, 재산 가지면 최고지요.

그래서 지금도 늙으신 부모님들이 유산을 줄 때 제대로 유산 안 주게 되면 추석이나 명절에 아버지가 죽든 형이 죽든 동생이 죽든 죽는 수가 생겨요. 현대자본주의에서 ‘나’라는 개념은 무슨 개념이냐 하면 내 돈 개념이에요. 돈이 없으면 ‘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긴 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제가 어제 오후에 했지만 이미 인간에게는 믿음이 있어요. 내 걸 믿는 거예요. 내 걸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치고 들어올 자기가 없어요. 내 것 키워주는 하나님 같으면 내가 같이 상대할 용의가 돼있다는 그게 믿음이에요. 내 것 건드리면 신자든 오십 년 교회 다니든 육십 년 교회 다니든 목사, 장로 필요 없어요. 내 것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 자식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되잖아요.

은별이가, “엄마 나 조졌어. 자수할까?” 엄마가,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펜트하우스> 이야기입니다. 걱정하지 마. 염려하지 마. 드레스 다 불태워주고. 때려죽였던 트로피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는 내 것 지키는 거예요. 내 혈육 지키는 것이고 내 돈 지키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 예수 동원해서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이게 나중에 다 파토납니다.

이게 믿음, 소망, 사랑 다 소용없어요. 헌신, 기도, 철야 다 소용없어요. 이거에요. 그것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나온 거예요. 왜? 말씀을 지키게 되면 실제 정작 내가 지키려고 한 내 것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번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는 말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저주받아도 쌉니다. 이 말은 내 것 다 가져가세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의 신앙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 자신의 신앙에 현혹되지 마세요.

우리는 신앙이 없어야 돼요. 왜? 공백이 돼야 되니까. 공백 안에 장차올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있어줘야 되지 내 신앙이 가운데 차지해버리면 영원한 저주입니다. 죄를 즐거이 감사히 고백한다는 것은, 내 중앙지점에 주님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내가 더 이상 나를 안 기대고 안 믿어도 상관없는 그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그 기쁨이에요.

문제는 율법이, 형수가 애기가 없을 때에 둘째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어릴 때 형수와 한 집에 산 사람은 알겠지만 형수란 존재와 결혼하고 싶습니까? ‘형수=잔소리꾼’이에요. 형수를 시동생을 원수로 취급합니다. 시동생한테 아무리 잘해줘도 이건 본전밖에 안 되고 시동생을 형수를 보면서 내가 결혼한다면 절대로 저런 여자와 결혼 안 한다고 다짐을 하게 만드는 동기가 돼요.

첫째는 늙은 거예요. 남자에게 늙음은 용서가 안 됩니다. 아무리 돈 많아도 늙은 여자는 싫어요. 늙었다는 것이 첫째, 형수와 결혼할 수 없는 장애요소고요. 둘째, 늙었다. 셋째, 늙었다. 다른 말로 하면 첫째, 못 생겼다. 둘째, 못 생겼다. 세 번째, 못 생겼다. 예쁠 가능성 전혀 없다.

그래서 형수와 결혼하라는 율법은, 물론 동생이 죽으면 또 결혼 안 한 형이 처제와 결혼하는 그것도 포함되지만 그런 것은 대부분 없으니까 형수와 결혼할 때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율법은 건드립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싫은 거예요. 우리가 오난이라는 사람, 유다의 둘째 아들이죠. 그 오난의 심정을 우리는 동감하고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잖아요.

저주받아 죽었을 때 그걸 보면서 나도 오난 같으면 저주받을 일이 있더라도 결혼 안 한다. 왜냐하면 형수와 젊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하지요. 1+1이니까 하는데 그게 아니고 형수와 해버리면 이제는 아무리 자기 때에 맞는 여자, 딱 네 살 아래 정도 고분고분 할 수 있는 나이, 너무 철딱서니 없어도 안 되고 통계상 그 정도 네 살 정도의 그 희망은 끝났습니다. 무슨 팔자가 형 팔자에 내가 종속된다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그래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왜 사람이 율법에 대해서, 율법 보기 전에는 율법 지켜서 복 받아야지, 율법 지키면 복을 준다는데 그 경품권이 얼마나 대단한데 꼭 지켜서 복 따내야지, 라고 하면서 막상 율법적인 환경이 지진이 몰려오게 되면 내 것 지키려고 후딱 돌아서버려요. 곁눈질 안 할 수 없습니다. 율법 지킬 때 내 것은 어떻게 될까? 완전히 사달 나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지켜? 저주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걸 못 놓지요. 부자청년처럼 근심하면서 갈 수밖에 없어요. 원치 않는 거예요.

그래서 형수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이스라엘에서 퇴출시켜버려라. 그냥 퇴출시키지 말고 너는 저주받았다고 징표를 남기면서 퇴출시키는 것, 우선 신발을 벗기게 해요. 너는 이 땅에 살 권한 없어. 그 다음에 침을 탁 뱉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원수다 이 말이죠. 네가 원수의 표본이란 거죠.

율법에 신명기 25장 9절에 그러한 벌칙조항이 있다는 말은, 어떤 특징이 인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율법을 대할 때 위반하고 싶은 속성이 강하게 자극을 받아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지요. 율법이 오기 전까진 점잖았는데 율법이 오고 난 뒤에는 변명조로 지키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하나님 쪽을 지키지 않고 본성상 내 것부터 챙기는 본능, 본성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율법을 준 것은 자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율법세계에 들어올 수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율법 내의 해석은 이렇게 하면 돼요. 동어반복, 같은 말을 계속해서 돌려막기 하는 것, 반복시키는 이것이 율법해석입니다. 그 한 예를 요한일서 2장 19절 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 안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됩니까, 추가 안 됩니까? 전혀 추가된 게 없지요. 그들이 왜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느냐? 그들이 왜 나갔느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갔다. 그들은 왜 속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나간 것으로 알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미장원 옆에 애견센터 있다. 애견센터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미장원은 애견센터 옆에. 이게 뭐예요?

이것은 모든 인간의 해석에 있어서는 내 것을 중심으로 해서 해석하는 것을 율법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따위로 해석하지 마라. 너의 판단을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지 마라. 왜? 너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공백이기 때문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의 모든 내용은 내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내용들이에요.

이 말은 네 중심자리 내놓으란 뜻이에요. 현재 네가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은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결심이 약해서가 아니라 공백의 자리, 빈자리를 네가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을 도대체 네가 배후에 누구 사주를 받고 이건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 그렇게 되니까 율법을 지키나 뭘 지키나 이거는 그것 지켜서 내 것 더 확장시키고 내 것 더 키우겠다는 그런 욕심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은 왜 그렇게 인간을 못 살게 굴고 닦달내고 밀어붙이는가? 바로 자비는 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과 자비거든요. 자비의 속성은 어떠냐 하면 그냥 주는 거예요.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애초부터 대가가 없는 게 아니고 대가는 타인 어떤 미지의 인물이 대가를 치렀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은 나 구원받았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공백으로 인하여 구원받았다면 이 공백 된 자리를 차지하신 그분을 소개하고 증거 하는 기능으로서 자비를 베푼 겁니다. 사랑을 베푼 거예요.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율법의 공백기능을 모르고 오해해서 예수님 나오고 천사 나오고 하나님 나오니까 사람들은 주님이여 내 곁에 있어주세요, 하는데 이 말이 성경에선 용납이 안 돼요. 여기 나가 들어가잖아요. 주님 안에 꽂혀야지 내 곁에 있으면 안 됩니다. 내 곁에 있어줘~ 한 발짝 떨어지면 한 발짝 헤어지는, 그런 비슷한 노래 있어요. 내 곁에 있어달라는 거예요. 내 곁에 있는 것은 강아지만 있으면 돼요. 고양이나 강아지.

다윗이란 인물은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질서로 작용한다. 그 순간 다윗의 주변이 뭘 보냐 하면 죄의 세력으로 바뀝니다. 만약에 다윗이 말씀의 인물이 아니고 1번, 다윗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게 되면 주변 인물은 죄로 전환되지 않아요. 죄로 바뀐 게 아니고 고만고만한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 같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짐승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다윗 주변이 짐승으로 변했다는 말은, 다윗 안에 다윗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분이 있다는 뜻이에요. 다윗이 있지만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죠.

다윗에게 작열하는 말씀의 완성은 결국은 다윗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람 취급 못 받는 짐승으로 간주하는 그걸 목표로 해서 쭉 다윗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움직이는 말씀 자체로.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요나가 니느웨 가서 말씀 전할 때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사람들을 애타해서 어떻게 구원시키려고 애를 썼습니까, 아니면 그냥 질러버렸어요? 그걸 세 자로 ‘모질다’ 참 모질게 전했어요. 믿지 마. 누가 손핸데.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다니까요. 아쉬운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요나에서 우리가 배울 게 뭐냐 하면 요나는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에 대해서 회개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명백히 한 마음으로 전했어요. 이런 자세가 정말 얼마나 좋은 자세입니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을 믿을 위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자세로 전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전하는 게 내 뜻이 아니다. 내가 뭐 얻을 게 있어서 노릴 게 있어서 전하는 게 아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주시니까 전할 뿐이지 믿든 안 믿든 내 책임 아니야. 그러한 자유성, 그런 여유, 이것은 자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해당되지요.

그 다음에 그래서 신명기 25장 9절에서 형수와 결혼할 수 없는 자들의 발생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그런 자에 대한 처벌마저도 율법 안에 들어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만 율법을 준 것은 이걸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지키지 못했음을 자백하라고 준 겁니다. 그 다음에 더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자비가 죄에서 나온다. 죄에서 나올 때 자비는 빈자리, 공백, 그 공백의 자리는 전에 내가 또는 내 것이 있는 자리가 비어있을 때 거기에 자비가 담깁니다. 이 자비와 사랑을 못 받을 사람과의 차이 나는 삶을 보여줍니다. 이미 성경을 지키면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율법을 못 지킨 것을 계기로 해서 자비를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이 사람, 구원받은 사람 주위에서 어떤 사람이 포진돼 있느냐 하면 여전히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차별화 되면서 확연하게 등장하겠지요. 사람을 볼 때.

사람을 볼 때 그런 식으로 본다는 것은 내 중심이 아니고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자기중심이 아니고 말씀중심, 말씀 완성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이 열리는 겁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볼 수 있고.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어느 정도 이해됐는데 이 공백에 대해서 좀 더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이걸 이론상 알았습니다. 나한테 빈자리가 오는구나. 나는 죄를 고백하면 되고 그러면 내가 있던 자리를 비어놓으면 되고 빈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자비를 채워주면 나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함께 있는 자로 구원받는다, 라는 것은 이론으로 지식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식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이 공백이 그냥 우리는 빈자리라 했잖아요. 빈자리 아니고 누군가가 올 때 이런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당신이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유령으로 나타나겠습니까? 바로 이게 유령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에 보면 나와요.

누가복음 6장 5절에도 나오고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마태복음 14장 25절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유령인가? 유령이라고 본 거예요. 그냥 막연하게 아무 공포심이 없는 빈자리, 빈자리는 공포심이 없어요. 그냥 비어있으니까.

그런데 그 빈자리가 빈자리로 내가 유지한다고 되는데 정작 나타나신 분이 빈자리가 아니고 유령으로 나타나실 때 그럼 뭐가 부정되느냐 하면 이런 이론상, 나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이 자체가 상대를 못 알아보는 순간 이 자체가 허망하게 돼버려요. 이런 준비조차도 구원받는데 소용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이것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사전준비, 예비단계가 전혀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 유령이 하시는 결과로서 우리가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거지 결과물로 놓여야지 이렇게 딱 아귀 맞춰놓고 프레임 딱 맞춰놓고 구원해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한계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한계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한계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지만 정작 자기의 빈자리를 찾아오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브라함과 사라 둘 다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자식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예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복음적 프레임을 짜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납득이 되는 한계 내에서 짰기 때문에 인간은 그 한계 너머로 갈 수 없는 거예요. 부산 사람이니 잘 알겠지요. 연안. 연안이란 육지의 끝이에요. 성도는 연안으로 몰리는 겁니다. 내가 아는 데까지 계속 가요. 내가 공부를 하면 공부해서 아는 만큼 연안은 점점 더 늘어나겠지요. 길어지겠지요.

하지만 기껏 가봐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 경계선까지 갑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의 끝자락까지 가요. 그리고 그 옆에는 뭐냐? 이거는 무서운 바다지요. 경계선. 인간은 물에서 바다에서 살 수 없잖아요. 바다 속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다윗은 자기가 아는 경계선까지 늘 몰립니다. 그게 휘몰리게 돼있어요. 데려가게 돼있어요.

연안부두 말고 내륙 쪽에 있을 때는 주님 오면 영접해야지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다윗도 막상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경계선까지 가니까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가 쉴 틈이 없어요.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 제 하나님 맞잖아요. 그게 오늘 하고 있는 시편 22편의 내용이에요. 시편 22편 10절에 보면,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저와 아는 사이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인 것을 제가 고백하나이다, 하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21절에,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이유도 모른 채 저 인간들이 짐승으로 돌변해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거기에 대한 자기의 대처 능력이란 것은 결국은 자기 힘으론 이길 수 없지요. 왜냐하면 들소기 때문에 그리고 사자기 때문에 그리고 이성을 잃어버린 개기 때문에. 인간의 선을 넘어선 인간도 아니에요. 개기 때문에 이건 뭔가 나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맹목적으로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자기가 쫓기다, 쫓기다 계속 쫓기는 쪽으로 어디까지 쫓기느냐 하면 자기의 모든 기대나 예상한 것, 모든 것을 포기할 연안까지 해변까지 죽음 직전까지 몰리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그때 나온 시에요. 시편 22편 1절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렸다는 것은 자기가 아는 한계 내에 이건 완전 버린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이런 상태가 버림받은 거라, 라고 자기가 완전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버림받았어. 희망 없어. 내가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그 외에는 어떤 도움도 손에 쥐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그렇게 되지요.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다윗은 인물은 안에 말씀이 들어있지요. 말씀이 들어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짐승들로 휘몰리게 하고 쫓기게 하는 이유가, 말씀의 세계에서 이 땅에 펼치는 것은 바로 다윗의 체험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뭐냐? 죽음의 의미입니다.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첫째는 숨 끊어지는 죽음. 숨 끊어지는 죽음은 아무런 우리에게 무서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숨 좀 안 쉬면되지.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숨 안 쉬면되지 그게 뭐가 무서워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내 것을 기어이 다 버리는 데서 오는 죽음, 내 것을 일거에 상실시키는 데서 오는 그 아픔과 그 두려움, 이게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달릴 때 기도할 때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순간에 제자들은 지 뜻대로 잘 자고 있었지요. 예수님도 연안까지 마지막 해변, 육지의 끝까지 간 거예요. 여기서부터는 자기가 자기의 모든 것에 손을 떼야 되는 겁니다.

이것까지 주께서 몰아넣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죽음의 세계란 것을 인간은 기어이 자기에서 손을 떼야 될 그러한 존재인 것을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손을 떼라. 그게 죽음 상태에요. 그러니까 자기 것 많고 풍요하고 잘 나갔어도 그게 죽음 상태에요.


10분 쉬었다 합시다.


20210308b 부산강의 : [시편]36(22편)-다윗과 짐승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에 유령 이야기했는데 유령이란 단순히 유령과 인간의 비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유령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쌓아놨던 모든 문명, 그 토대 자체가 유령을 영접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너뜨리는 기능이 있어요. 유령이.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속한다, 이걸 인간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현실로 본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현실에 속하지 않는 유령이 등장해버리면 인간들이 둘러 친 현실의 테두리가 붕괴되는 겁니다. 유령을 영접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열어놓은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 열어놓은 게 아니에요. 인간 자체가 닫아놓았단 말이죠. 폐쇄구조, 닫아놔야 인간이 나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나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나 자체가 절대적인 나를 위해서는 내가 아는 그 안 쪽이 나를 위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알든 모르든 이야기 나갑니다.

나라는 것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내가 아는 것들과 교류하면서 이게 나란 안에 내용물이 차곡차곡 비축이 되고 쌓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아이큐가 낮은 사람들은 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똑똑하고 알면 알수록 나는 더욱 더 당구공처럼 응축이 되는 겁니다. 나 이 정도 아는데 날 무시하지 마라. 너 어느 대학 나왔어? 나 이 정도 공부했어.

이게 자기가 안다는 이 세상 우주 끝까지 안드로메다까지 아니까 안드로메다가 있는 이상은 날 무시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 현실이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지탱하는 조건 하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일곱 살 먹은 현실과 아홉 살 먹은 현실이 다 달라요. 그런데 그 안에는 이걸 자충, 자기 충족이라 하거든요. 일곱 살 먹은 애가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갖고 노는 게임 안에서 나는 충분한 나답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겁니다.

이모 집에 애를 맡겨놨더니만 이모가 무당이다. 아이 아프니까 귀신 들렸다고 팼는데 너무 패서 애가 죽어버렸어요. 그런데 이모 집에 맡긴 그 애 엄마도 동의했단 말이죠. 이 말은 맡긴 그 세계는 뭐냐 하면 나를 부정할 수 없는 그 현실의 전부를 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 동네에선 아프면 귀신 들린 거예요. 그게 자기 아는 것의 전부란 말이죠.

내가 진실에 대해서 아는데 아는 나를 어떻게 무슨 수로 부정합니까? 모르면 부정이 되는데 알만큼 안다 이 말이죠. 사실은 알만큼 아는 게 아니고 내가 아는 만큼 따로 뽑아서 그걸 나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나란 안에서는 나는 모르는 게 없어요.

베드로가 유령이라고 외친 것은 지금 자기들이 알고 있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올 때 유령에 대해서는 무지 상태가 된다면 내가 알던 아는 현실이 여기서 재조정돼야 됩니다. 유령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유령의 자리를 마련해줄 만한 인식의 변화, 해석의 변화가 주어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유령을 받아들이면 주인공이 내가 아니에요. 하나의 왕관을 두 왕이 쓸 수 없다고 했지요. 나를 포기해야 되는데 인간은 나를 포기하고, 이런 게 정말 어렵다. 나를 포기하고 유령의 자리를 마련해드리자. 그러면 유령까지 포함한 아 자리를 누구 자리가 됩니까? 유령의 자리가 안 되고 새로 발전된 나의 자리가 되기 때문에 결코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어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 했지만 정작 나는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다면 대책은 뭐냐? 성경은 내 쪽에서 끝까지 가봐야 돼요. 연안부두~ 하여튼 연안까지 끝까지 가야 돼요. 끝까지 가게 되면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당연시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아는 모든 현실, 나와 관련된 현실은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심판대상이란 것을 발견해야 돼요. 심판받아야 돼요. 누구로부터? 유령으로부터. 유령으로 오신 분으로부터 내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알지요.

십자가에 강도 있었잖아요. 한쪽 강도는 강도질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에 대해서 아직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예수 당신이 나를 십자가에서 나오게 해준다면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다고 해서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자기에게 미련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뭡니까? 아낌없이 주님 세계에 자기를 일부로 포함시켜버린 겁니다.

심판이란 뭐냐 하면 유령이 가져오는 이 세계 앞에서 나는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고 제거의 대상이고 망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유령의 새로운 체제로 나를 품어 달라, 나를 품어주소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제 나를 강간해주소서, 덮쳐주소서. 나의 반항기와 나의 저항을 개 무시하고 아예 나를 덮쳐버리소서.

이걸 제는 점잖게 이야기해서 탕수육 위에 붓는 소스라고 했지만. 돼지고기 튀김조각에 소스 붓듯이 아예 주님의 복음의 소스를 부어주소서. 왜? 소스는 이질적이고 외부적이고. 그 소스 앞에는 내 것이라곤 요만큼도 없다는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성령의 일은 항상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사와 고마움이 있으면 성령의 일이고,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불평이 있으면 그건 어디까지나 나와 관련된 일, 내가 포기 못한 일이 돼버려요.

내 곁에 있어줘. 나를 떠나지 말라고 간절히 노래하는 가사에 보면 너는 내게 참 좋은 사람이었잖아, 라는 가사가 나와요. 지금은 떠나버렸다는 거예요. 다시 내 곁에 돌아오게 되면 전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칭해줄게. 빨리 돌아오라. 지금 나를 떠나버리면 너는 더 이상 좋은 사람 아니고 나쁜 사람 되니까 그게 내가 싫다는 거예요.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다, 이런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기준이 나가 있는 이상은 이거는 끝까지 어느 누구도 나를 덮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것은 유령이 와서 나를 덮쳐서 나를 심판한다면 심판 이후, 심판된 상태가 어떤 상태냐, 어떤 상태에 돌입되느냐? 이것이 두 번째 시간에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시편 22편 25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여기 대회가 나오지요. 큰 집회, 집단.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시편은 예언이니까 다윗을 통해서 말씀이 과거, 현재, 미래 다 드러나거든요. 다윗이 어떤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 다윗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는 짐승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2절 이후부터는 완전히 분위기가 반전이 되고 바뀌게 됩니다. 22절에 보면 갑자기 찬송이 나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갑자기 찬송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지요.

제가 언제 강의할 땐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시편은 어떻게 됐는가? 시편의 내용은 각 편, 각 단락, 단락 또는 한 장, 한 장마다 대체적으로 하나님 찬송이 먼저 나와요. 감사합니다, 해놓고 중간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절망이 나옵니다. 절망이에요. 끝에는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나와요. 하나님을 찬송한다 해놓고 절망하고 하나님께 찬송이 나와요.

시작은 나는 하나님을 안다가 됩니다. ‘안다’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얼추 안다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그 성도를 현실 속에 밀어붙이지요. 밀어붙이면 난데없는 내가 해명할 수 없는 사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교류하는 세계가 아니고 말씀이 세계로 전환되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는 내가 아는 세계를 넘어서잖아요. 나는 그냥 내가 아는 연안까지니까 내가 모르는 그 바깥의 일을 내가 아는 것 더하기 모르는 걸 추가하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것이 안다고 여기는 것까지 전부 다 침몰시키는 거예요. 물이 넘치듯이 완전히 덮어서 나로 하여금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절망하는 것은 뭐냐? 쉽게 말해서 버티기에 들어간다, 발악하는 거예요. 몸부림치는 겁니다. 뭘 지키기 위한 몸부림? 그전에 내 것, 내가 아는 것 그래서 얻어지는 나, 나의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중간에 집어넣고 마지막에 어떻게 끝납니까? 드디어 주님이 이겼어. 나는 지고. 나는 주님 앞에 탕수육처럼 소스에 완전히 덮여버렸어요. 나를 던져버렸습니다.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여기 나는 없어지고 뭐가 바뀌느냐? 여기서 나가 우리로 바뀝니다. 이게 대회고 회중들이에요.

그러면 내가 없어지는 그것은 우리라는 것을 새롭게 조성하는 새로운 나에 해당되는 사람이 회중들 각자의 나의 자리에 전부 다 그것을 나의 자리를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그 나, 나를 대신하는 나, 여기 나는 다윗이죠. 다윗이란 이름이죠. 그 이름을 대신하는 이름이 뭐냐 하면 아까 22절에 나오듯이 내가, 거기 무슨 이름 나와요? 주의 이름 나오지요.

주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어려워요. 이제부터 주의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주의 이름은 내 이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내가 불리는 거예요. 적어보겠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게 지우개잖아요. 이 지우개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 지우개 이름을 누가 불러주는가? 지우개 만든 사람, 인간이 불렀지 지우개가 만든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의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본인이 지었다는 겁니다. 지 아버지 지었지 왜 본인이 지었다고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아버지는 인간 아닙니까. 인간들 이름을 인간들이 짓는 거예요. 광주강의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홀로 태어난다. 이런 야기한 적 있습니다.

부모가 나를 만들어줘도 이 갓난아기가 크면서는 부모 의존적이에요. 좀 크다보면 본인이 본인을 만들어가요. 엄마 아닌 나, 아빠 아닌 나, 동생 아닌 나, 형 아닌 나, 나는 내 안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갑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여러분 연세 많은 노인들 보세요. 평생 그 고집, 대다한 고집이죠. 갈수록 점점 나가 돼가요. 융통성이란 손톱만큼도 없는 나, 자기의 절대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나가 나의 이름에 농락당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원래 홀로 태어나기 때문에 처음에 갓난아기 때는 남이 키워주죠. 이름을 누가 불러줍니까? 부모가 지어주고 불러주지요. 그 다음부터는 부모가 불러주는 이름이 내 자아가 생기면 나를 위한 이름으로 전환이 돼버려요. 그 이름은 무조건 내 것이에요. 부모가 불러줘도 내가 책임질 내 이름이 되는 겁니다. 당신 누굽니까? 예를 들면 쉬울 거예요.

어떤 가게에서 물건 살 때 여러분들 혹시 성이 홍 씨 있습니까? 없지요.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홍 씨 성을 가진 분이 상인이나 장사하는 사람이, “홍 사장님 어서 오세요.” 가정주부라도 별로 기분 안 나쁘지요. 그런데 “홍 시다바리 어서 오세요.” 실제 이 사람 직업이 시다바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되게 나쁘지요.

이미 내가 나를 보는 관점에서 남이 나를 불러주길 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나의 이름에 대해서는 그 가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있습니다. 평생을 내 이름 지키는 데 내 이름이 나를 대신하는 이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내 이름이 멀쩡하게 있는데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볼 때 내 이름이 있는데 야곱아, 아브라함아 있는데 주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이건 내 이름을 포기하란 이야기입니다. 네가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남이 시다바리로 불러주든 사자로 불러주는 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너는 누구의 아내다. 이건 의미 없는 거예요. 너는 누구의 남편이다. 이것도 의미 없어요.

나는 누구의 아내가 돼버리면 나는 그 누구와 경쟁관계에 속합니다. 누구의 아내로 살 것인가, 나로 살 것인가? 완전히 페미니즘 이론으로 빠지지요. 그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있기 때문에 네가 결혼을 하던 주의 이름, 이혼을 해도 주의 이름, 애가 있어도 없어도 주의 이름, 모든 것이 이미 네가 생각한 너의 명예와 칭찬, 너의 자존감 모든 것은 탈락했습니다.

심판받고 탈락했고 나의 나 됨은 그 자체가 어떤 지경에 있든 간에 주의 이름에 합당하고 주의 영광을 돌리는데 하자가 없도록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른 거예요. 우리 보고 내 이름 있는데 내 이름 제쳐버리고 네가 나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대표자가 너라는 거예요.

물론 너란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고 회중을 말하고 집단, 이스라엘을 이야기하지만 야곱이란 이름이 있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란 이름 안 줬지요. 야곱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러면 기존 이름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이스라엘 이름을 위해서는 누구와 다퉈야 하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받은 자의 주의 이름과 다투는 관계에 있고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 과정이 꼭 필요한 거예요. 나는 내 이름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집어넣어야 돼요.

이스라엘 이름 속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야곱이란 이름은 깨졌다. 깨졌기 때문에 야곱은 지팡이 잡고 평생 절룩거리면 살아간 겁니다. 환도뼈가 날아갔으니까. 결국 야곱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은, 이름=새로운 현실. 단순히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니고 현실 자체가 이 이름을 위하여 현실이 자기 조정에 들어서는 거예요. 자기 변동에 들어가고 자기 변화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곧 내가 현실이 아니고 내 이름이 현실이에요. 주의 이름이 현실이에요. 내 이름이 현실이고 주의 이름으로 바꾸는 과정 자체가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성경해석은 인간의 저주받은 이름, 더러운 이름, 아담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될 그 이름 그걸 취소시키는 것이 주의 작업이죠. 택한 백성에게. 흙이기 흙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이제는 네가 다른 이름, 아담의 이름이 아니고 마지막 주의 이름으로 불러질 때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이미 확보된 부활의 찬란한 영광, 그 몸을 네가 입을 것이다.

아담 이름으로 불리어졌기 때문에 아담 이름이 주는 압박감에서 어떤 인간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아담 이름 자체가 저주받은 이름인데 따라서 인생은 고생하는 게 마땅해요. 사는 게 왜 힘듭니까?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아이 본다고. 교회 나오고 싶고 하고 싶은데 미치겠어, 정말. 내 마음대로 안 돼요.

그런데 미치려면 충분하게 미쳐야 돼요. 어설프게 미치지 말고. 세상에 미쳤다 하지 말고 내 자체가 죽음의 일부인 거예요. 내가 죽음의 일부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겁니다. 내 하루는 전체 역사 일부에요.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나의 삶의 일부는 곧 죽음의 일부로서 죽음이 이 땅에 진짜 세상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하루는 전체와 같고 그 전체는 죽음의 전체고 나는 죽음의 전체의 일부로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야곱이란 폐기된 이름을 버리지 마시고 꼭 챙겨야 돼요. 야곱이란 이름을 챙겨줘야 그 야곱과 대비되는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진짜 내 이름, 주의 이름이 그 안에서 부각이 되고 표현이 되는 돼요. 나타나요. 저주받을 내 이름을 잊어버리면 주의 이름도 같이 상실되고 마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한 것, 그건 베드로가 꼭 그렇게 해야 돼요. 왜? 베드로는 그냥 시몬이니까. 하지만 시몬이란 이름이 베드로로 바뀌지요. 베드로란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주의 이름이죠. 교회 기초는 시몬이 아니고 베드로가 되는 겁니다. 주님 자신이 교회라는 회중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 이름을 알고 살아가는 거예요. 저주받은 이름을 버리지 않고 그게 바로 내가 전의 내 모습이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에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죽어도 마땅하다는 거예요. 아니 이 세상에 죽음을 증거하는 용도로 주께서 하루하루를 죽음의 일부로 계속 지연시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묻지요. “목사님, 예수 믿는데 왜 이리 아픕니까?” 그게 주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아픈 거예요. 왜냐? 아픈 것이 죄 때문에 아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주님의 자비가 있는 사람이고 안에 공백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공백이 주님의 이름으로 채워진 사람 입에서 껍데기, 공백을 둘러싼 껍데기는 왜 주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껍데기로 밀려야 되는가, 그걸 감사함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뭘 해도 저주스럽고 뭘 해도 이게 무의미한 거예요.

그래서 뭘 하세요. 뭘 해도 되고 안 할 수 있는 없습니다. 내가 뭘 해도 의미 없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왜?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걸 윤리적 도덕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평가대상이 안 돼요. 주의 이름을 잉태하는 자리, 그 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주의 이름은 핍박당한 주의 이름이거든요. 핍박당한 주의 이름 아닙니까. 시편 22편에서 앞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 버리는 작업에 누굴 동원했습니까? 인간들 짐승이죠. 짐승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가 그 다음에 드디어 23절부터 찬양으로 바뀝니다. 다윗을 당하지만 주의 이름은, 다윗 이름 안에서 주의 이름이 피어나니까 당하는 절차마저도 필연적이에요. 반드시 그렇게 당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기뿐만 아니고 나란 이름이 날아가 버리면, 적어볼게요. 나란 이름을 누가 공격하느냐? 주의 이름, 완전한 개인, 최종적인 개인 또는 자아, 나가 나를 핍박을 해버리면 나는 여기서 허물어지겠지요. 핍박하는 방법은 언약의 적들, 하나님의 적들로 압력을 가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게 하나님의 의도적인 조치인 줄 모르고 누굴 지킵니까? 절대적으로 나를 지키려고 발악을 하지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이 나가 주의 이름으로 대체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주의 이름으로 하지요. 주의 이름으로 파생돼있는 이 집단의 회중들인데 무리들, 집단, 대회인데 이 사람들 특징은 한 결 같이 공통점이 있어요. 같은 탕수육 소스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의 찬양을 한다는 거죠. “고맙습니다, 주님.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분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진도 나갑시다. 이렇게 회중 대회란 자체가 누구 솜씨냐 하면 주의 이름이 찾아온 주의 솜씨잖아요. 그러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주의 이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자아들이 있겠지요. 자기 아담의 이름을 고집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주의 이름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을 때 그 주변은 짐승들이죠. 짐승들이니까 그들은 무슨 증거를 남기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인물을 핍박했다는 가해자적인 증거를 분명히 핍박받은 다윗을 통해서 버림받은 다윗을 통해서 증거가 확보된 거예요.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내려도 그들은 할 말이 없겠지요.

요한계시록 두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14장 20절요. 요한계시록 보기 전에 시편 61편 4절 먼저 봅시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아멘, 여기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피하지요. 주의 장막 다윗 지 혼자 사는 집입니까? 아니면 회중들, 이스라엘,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 있는 거죠.

그러면 야곱이 이스라엘 된 체험이 공동 체험이 되겠지요.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하나님 만나서 완전히 깨졌잖아요. 그와 동일한 공동 체험을 가진 자의 집단,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이 있고 주의 장막 안에 옹기종기 같이 모여 있는 거예요. 이거는 새로운 공간입니다. 새롭게 마련한 자리에요. 주의 이름의 공간, 지배받는 것.

여기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뭘 했다, 안 했다 이것을 내가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이미 나에게서는 없어요, 떠나버렸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의 평가만 그런 게 아니고 예수 믿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시편 22편 9절에 보면,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이미 주님을 모태에서 나오게 하신 소급해서 태어날 때부터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우리는 몰랐지요. 모르고 내 이름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름의 명예와 가치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나를 위한 투쟁을 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세상 살아가면서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억압이 되는 압박이 가해지는 그러한 사태 속에 우리가 휘말리고 만 거예요. 그게 율법의 세계, 말씀의 세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율법이 오게 되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돼요. 너, 형수와 결혼해라.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이건 내가 있음에 내가 하기 싫은 거예요. 나라고 구성된 요소에는 형수와 결혼하는 게 일체 없습니다.

왜냐? 나는 지키고 싶은 게 따로 있고 나의 순수함과 순결함과 잘남을 지키신 분은 따로 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충족시킬 수 없어요. 저주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짓은 못합니다. 내가 지키는 내 청춘이 늙은 여자와 결혼하려고 내 청춘을 지켜온 게 아니니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 압박이 더욱 심해져요. 심해져서 우리가 어디까지 몰렸습니까? 이 현실이란 세계 끝 지점까지 몰리는 거예요.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 그 경계선까지 몰리게 된 거예요. 여기서 나온 유명한 노래,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끝이라 했는데 또 끝이 있어. 그럼 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 끝의 끝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끝 지점에 서있는 인간의 자세, 태도는 이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이건 제가 다음 주일 설교 준비하고 있는데 설교제목이 <철학과 복음>이에요. 예상하기는 설교시간에 철학으로 가득 찰 겁니다. 철학과 복음이니까 철학을 알아야 복음을 알지요. 인간의 철학의 끝은 뭐냐? 광주강의에서 제가 적었어요.

인간은 관찰(보는 것), 인간이 보고 싶은 것은 보는 것을 보고 싶다. 인간은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싶은 겁니다. 인간의 끝은 자아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는 이게 인간의 철학의 끝이에요. 특별히 여러분에게 말해줍니다. 인간의 끝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마감이 돼요.

엄마와 아빠 사이좋고 아빠는 점잖고 복음은 모르지만 유교적이고 얼마나 인간처럼 살려고 백날 아버지는 점잖고 인자하고 품성이 곱고 참 배려심도 있고 그랬던 아버지, 같이 살면서 집에 창문 하나 갈아 넣자 하니까 싸웠어요. 왜냐하면 내 돈 내 거다. 인간이 아무리 점잖고 훌륭해도 돈 문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네가 왜? 이것 한 마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뭐냐? 이 돈은 내 돈이라는 것. 좋은 것 바른 소리할 때는 적어놓으세요. 이 돈은 내 돈이다. 부부사이고 자식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이걸로 게임오버. 이 돈은 내 돈이다. 나는 죽어도 내 이름을 위해서 이 돈은 사회에 기여하겠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죽으면 곱게 죽지. 죽고 난 뒤에 뭘 기여하고. 자식들은 미칠 지경이에요.

아버지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나한테 돌아올 돈으로 아버질 본단 말이죠. 그 돈을 아버지로 환원해버리면 남한테 주잖아요. 그럼 나는? 그동안 아버지 아프다고 요양병원 수고한 나는 보상비를 못 탔잖아요. 아무 것도 한 짓도 없는 사회가 왜 보상을 받아야 돼요. 내가 받아야 되지. 이거는 정의로움에 어긋나는 거예요. 인간의 정의,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내 중심이에요. 더 노골적으로 내 돈을 지켜주면 정의고 내 돈 날아가 버리면 이거는 악마고 사탄이고 그런 거예요. 내 돈 빼앗아 가면.

인간의 해안가, 그리고 연안 그것은 바로 결국 나의 가치보다 더 정확하게 내 이름의 가치에요. 나는 죽어도 내 이름을 위해서 자살할 용의가 돼있는 게 인간입니다. 자살까지 할 정도로 자기 몸, 육신을 내 이름의 제단에 바치는 거예요.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라, 이런 것. 계백 장군은 전쟁에 나갈 때 뭐 했습니까? 혼자 갑옷 입고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가만있는 마누라는 왜 죽입니까? 우울증 걸려서 지 애 던지고 지 아빠 던지고 왜 그런 짓합니까?

애가 아니고 내 이름에 속한 나만의 영역이라는 거예요. 인간 못 고칩니다. 타고난 거고요. 마귀 들린 인간의 모습은 고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이름을 심판 못합니다. 내가 손댈 수 없는 내 이름을 말씀을 통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율법 지키나?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아 마땅하나? 오케이. 오케이 했으니까 말씀으로 율법으로 우리를 심판해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손 못 대는 나를 말씀이 와서 죽여주는 거예요. 이건 뭐 사도 바울 편지 속에 다 들어있어요. 전부 다.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이게 어떻게 지켜집니까? 지켜질 수가 없지요. 세상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디 기계도 아니고. 기계야 기름 쳐주는 걸로 만족해라. 기계 같으면 동의 되는데 기름만 있으면 잘 돌아가니까요.

어제 오후 설교에 인간은 인간 두뇌 안에 저항체가 있어요. 신이고 뭐고 내 허락 받아야 된다는 이상한 저항체가 동식물에는 없는데 인간에게만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악마가 들어왔기 때문에 악마가 자꾸 날 앞장세워서 절대자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 자기의 요구사항을 우리를 앞장세워서 우리한테 계속해서 앵벌이 시키는 겁니다. 악마 자기 소원이에요. 신에게 꿀리지 마라.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도 나란 존재는 신에게 꿀리기 싫어하는 존재,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그게 여러분들이 세계명작문학 보세요. 내용이 한결 같아요. 신에게 지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이게 세계문학전집이고 노벨문학상 내용이에요. 노벨문학상을 그것 때문에 상 줘요. 이 땅에서 상 받는 자체가 이상해. 꼭 신에게 대들어야 상을 줘요. 신을 짓밟지 않으면 상을 안 주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주님 무슨 상 받았어요? 사도 바울이 무슨 상 받았어요? 이 세상이 주는 상은 못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열두 제자도 다 마찬가지에요.

요한계시록 14장 19절에 보게 되면 제단에서부터 심판이 주어지는데 요한계시록 14장을 보기 전에 11장 19절에 위상구조를 보세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성전이 하늘에 있지요. 성전 안에 언약궤가 보이지요. 밑으로 뭐가 떨어집니까?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방향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떨어지지요? 위, 위가 어디죠?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이 되게 되면 아래쪽은 오직 파괴와 심판과 파괴밖에 없어요.

대만에 춘절이 되게 되면 사람들의 복이 오라고 대문짝에 한자를 쓰는데 ‘福’자를 써요. 복 자를 쓰고 난 뒤에 복 자를 거꾸로 붙여놔요. 바르게 쓰고 거꾸로 붙인다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리포터가 물어보니까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라고 복 자 방향을 땅에서 그렇게 해놨어요.

하나님의 성전이 이미 완성이 됐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은 겁니다. 없어져야 마땅한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아까 우리가 보고자 한 14장 17절에 보게 되면, 또 다른 천사가 어디서 나옵니까? 성전에서 나오지요. 성전에서 뭘 들고 나옵니까? 칼 들고 나오지요. 낫 들고 나오는 겁니다. 낫은 조지는 겁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오지요.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18절) 포도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저주받을 내용이 들어있는 거예요. 왜냐? 성전은 주의 이름으로 회중이니까.

아까 시편 22편에서 성전에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 성전에 있는 사람은 누구 이름을 부른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럼 주의 이름 외에는 어떻게 돼야 돼요? 제거대상이 심판대상이 되겠지요. 왜? 각자 자기 이름을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말은,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주의 이름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짐승 취급 받는 겁니다. 그 사람 인간성 좋고 말조심하고. 그런 것 믿지 마세요. 주의 이름,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나를 박살냈다는 그 이름, 내 이름의 자존심과 명예와 그걸 완전히 뭉개버렸던 그 이름, 나의 이름을 대체한 그 이름이 없는 사람은 저주대상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새로운 관계에 돌입해야 돼요. 주의 이름에 의해서 재정렬 된 관계로 있어야 되지 그냥 자식이라고 부모라고 남편이라고 그냥 육적으로 좋은 게 좋은 그렇게 해서 지탱할 수 있는 명분도 우리한텐 없습니다. 주께서 주의 이름 증거 하라고 맺은 남편이고 아내에요. 생긴 자식이고 교우들이고 그래요. 주의 이름 때문에.

따라서 내가 내 주장을 내세울 하등에 이유가 나한텐 없습니다. 누가 빵 주면 받아 챙기면 되지 이것 줄 때 뭘 원하느냐? 그것 따지지 마. 골치 아픕니다. 주님께서 주의 이름 증거 하라고 저주받을 인간, 아까 했지요. 내 이름 버리지 말라고요. 망가진 내 이름 버리지 마세요. 걸뱅이도 그런 걸뱅이가 없어요. 주는 대로 먹고 살 때까지 살고 걸뱅이 노릇하면 돼요. 걸뱅이는 거지의 다른 말. 거지노릇하면 다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심판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심판받는 건 주께 달렸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나오지요. 심판은 주께 있으니 네가 심판하지 말라. 우린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께서 철저하게 낫을 휘둘러서 그냥 땅에 좋게 가만히 하는 게 아니라 휘둘러버려요.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19절) 이게 밟고 누르게 되면 그 피가 튀지요. 송이마다 다 터져버리면,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20절)

전체 사방을 숫자로 표시하거든요. 동서남북이니까. 동서남북 끝까지 연안부두 나올 때까지 인간의 한계 끝까지 나는 나로 말미암아 나의 의미로서 충족되는 현실 그것만 아는 끝까지 저주의 의미로 다 채워버려요. 그때 인간들은 말하기를, “누구에요, 누가 나를 함부로 밟았습니까?” “나다. 뭐 문제 있어? 너희들이 핍박한 나 예수가 너희들을 죽인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심판하는 근거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성전 이뤘지요. 이제 나머지는 주의 이름의 저주만 주어질 뿐이에요.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18장 24절,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주의 이름으로 먼저 이 땅에서 우리가 피 좀 봐야 됩니다. 왜?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가신 그 길을 우리가 답습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게 내 원대로 안 돼요. 난 한 달 수입 이백만원만 있으면 좋겠는데 한 달 수입이 주식 던져놨는데 주식 올라서 삼천만원이 막 들어와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돼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저주를 기대해도 저주는 안 오고요 내가 복을 기대해도 복이 안 와요. 이 말을 한 마디로 말해서 내 예상대로 되어지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니고 저주받을 일이다. 이게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주께서 무의미하게 보는 일은 다 내가 예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저주받은 이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아야 내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내가 확보한 현실의 범위가 살아가면서 계속 넓혀지고 그 연안 자리에서 내가 늘 깨지고 이게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그네를 탑니다. 최고점 올라갔다 최저점 내려가지요. 최고점 올라가도 나고 내려가도 그 나고. 나는 그네에 묶인 이상 어떤 변동이 없습니다. 나는 내 이름의 명예와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비록 내가 최저점 곧 자살이죠. 자살해도 역시 나는 저주고 나는 모든 걸 잊어버려도 역시 나. 주님께서 끝까지 나의 이름을 놓지 않고 나의 이름을 쥐고 주의 이름을 나의 이름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멈추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래야 한 때 말씀 은혜 받으면 안 되고 매일같이 말씀이 주도권을 줘야 되고 탕수육 소스가 작용돼야 돼요. 못난 나를 덮쳐줘야 돼요. 따라서 못난 나를 못난 나로 계속 어쩔 수 없이 목숨 붙어 있을 때까지 못난 나로 살아가야 됩니다. 조금 건드려도 화내고 조금 일 있어도 벌벌 떨고 이게 있어줘야 시편의 중간부분이 생성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가짜였던 거예요.

그게 이런 하나님이 옴으로써 시편 끝에 있는 하나님, 진짜 하나님, 진짜 감사가 되는 하나님, 앞쪽의 하나님은 감사해야 내가 벌 안 받는다고 내가 조작해낸 가짜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진짜 하나님으로 순환돼야 돼요. 무한루프,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매일매일. 그래서 아직까지 죽음이 세계에서 죽음이 어디서 오며 왜 나는 죽음의 아픔에 같이 겪게 하는가? 주께서 그 길을 가셨잖아요. 주님께서 주의 이름이 가셨다고요.

이미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고요 이제 있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 우릴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다윗의 운명이고 오늘날 우리의 운명입니다. 개인은 없고 집단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이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편을 통해서 주께서 하는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것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예상 못할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날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예사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오직 감사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