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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시편 22:9 / 형상싸움 / 210208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시편

시편 22:9 / 형상싸움 / 210208

정인순 2021. 2. 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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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210208a 부산강의 : [시편]35(22편)-형상싸움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2편 5절부터 보겠습니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여기 구원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원이란 말을 하는 것은, 그림을 하나 그릴게요. 화산이 있습니다. 화산에서 마그마가 분출하지요. 마그마가 폭발해서 흘러넘치는 겁니다. 마그마가 산 정상에서 밑으로 타고 내려오겠지요.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말하기를 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분출되는 지점이 왕입니다. 다윗은 왕이거든요. 기름 부은 자. 왕은 일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인은 불가능한 지점 또는 위치 이게 왕이에요. 그런데 왕의 입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서 왕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 위치가 왕의 위치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왕의 위치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이 나오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왕을 버린 거예요. 왕을 통해서 버림을 받았다 할 때 왕이 실제로 몸을 갖고 눈에 보입니다. 오늘 이것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 왕의 신체는 눈에 보이지요. 그런데 왕의 신체, 다윗이 누구한테 쫓기느냐 하면 사울 왕, 전임 왕에게 쫓기고 있는 겁니다. 목숨을 위협받고 있지요. 그러면 사울 탓을 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어요. 사울을 만나서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비새라는 부하는 당장 죽이라고 하지만 다윗은 두 번씩이나 살려주지요. 결정적 기회임에도 살려줍니다.

다윗은 살려주는 것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불가능한 지점과 위치가 단순히 왕의 신체가 일반인의 신체가 달라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관점이 불가능한 관점을 왕이 갖고 있어요. 자기를 해치면 원수를 갚아야 될 텐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걸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일반인들은 불가능한 거예요. 일반인들은 자아를 사수하거든요. 자기 자신을 사수하는 것이 급선무란 말이죠.

잘 알다시피 세상 사람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신자는 다른 말로 성도지요. 성도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신가?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무엇인가, 여기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불신자, 일반인들은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나한테 관심 있잖아요.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불신자에요. 관심사가 어딥니까? 나한테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곧 진리가 되고 주님은 최종 관심사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되어서 예수님에게 진리에 관심을 두려면 무슨 장벽을 돌파해야 됩니까? 나에게 모든 것을 몰입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올인하는 그 두꺼운 장벽을 통과하기 아니하면 예수님에게 관심 둘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중앙에 버티고 있는 한 예수님은 하나의 시다바리, 나의 종이 되는 거죠.

일반인, 불신자 입장에서 왜 본인 놔두고 엉뚱한 예수님한테 관심 있어? 오히려 의아해하는 겁니다. 교회 간다 하면 바쁜데 교회 왜 가냐 이러죠. 네 일 바쁜데 교회 왜 가냐 이러죠. 코로나 때문에 교회 못 오겠습니다. 코로나 걸릴까봐 교회 못 오겠습니다, 할 때 벌써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안전에 있고 자기 안위에 있지요.

그러나 성도는 자기 안전과 자기 안위는 없고 예수님에게 진리의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나 신약에 나오는 성도들이 예수님에게 관심 있으니까 자기도 자기한테 관심 두면서 플러스 예수님한테 관심 두려고 시도해보는데 이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백날 해봐야 나를 지키기 위한 지식 확보밖에 안 된다니까. 나를 영원히 모시기 위한 그러한 노림수 또는 꼼수, 장난질 또는 오락 그것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살림하고 시아버지까지 섬기려 하니까 짐이 배나 힘든 거예요. 무지무지 힘든 거예요. 신앙생활이 엄청나게 힘든 겁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너 참 고생이 심하겠다, 마음고생 참 힘들겠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께 관심두면 자유입니다. 왜? 나한테 관심 안 둬도 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지요. 네가 이 자유의 맛을 알아, 할 정도로 주님한테 관심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한테 관심이 없지요.

코로나가 오든 변종이 오든 그것 나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주님한테 꽂힌 사람이 코로나가 왜 거기에 걸림돌이 될 이유가 없지요. 자기 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다 챙기려고 하니까 바빠. 생각한 것이 바쁘고 항상 선택해야 돼. 이걸 선택할까, 저걸 선택할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맨 날 중국집 가면 자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맨 날 바쁜데 자기란 덩치를 해소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진리가 무엇이냐? 다윗 왕에게 진리는 뭐냐 하면 나를 버리는 것, 이게 진리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사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반드시 그 체험을 해야 되지요. 그 체험을 하게 되면 다윗은 사울 왕을 통해서 뭘 체험하느냐 하면 자기 자아의 죽음을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수련회 때 했거든요. 쫓겨서 열여섯 군데 돌아다녀요. 자기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전에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도는 숨 끊어지기 전에 자기 죽음을 목격한다고. 어제 오후설교 같은 경우에는 분명히 내가 죽었다는데 왜 나는 죽었다는 체험을 못 느끼고 있지? 그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있잖아요. 우리의 생애, 일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 우리 일상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몸 신체 안에서 죽음이 살아 있다는 걸 늘 느껴야 되는 거예요. 맛있는 걸 먹으면서 이걸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외국에 유학 가는 것은 살려고 가면 안 되고 내가 죽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유학 가야 된다고. 결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도는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버림받는 거구나. 자아가 내가 버림받아야 돼요. 그 역할이 무슨 역할이냐? 바로 성도의 자리에요. 이거는 일반인들은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에게 마그마가 덮쳐서 죽게 되면 이 죽음이 확장되는 이걸 가지고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은 교회가 되고 이 왕은 예수님이 되고 하나님과 다윗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대로 신약에 오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약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식을 만들어볼 수 있거든요. 성경이라는 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돼있다. 맞지요. 그러면 여기 구약이라 하는 것은 구약적이고 신약적 요소를 다 갖고 있어요. 구약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적 요소가 있고 구약이니까 구약적 요소가 있겠지요. 구약적이라 하는 것은 이방적 요소와 이스라엘적 요소를 다 갖고 있어요. 신약적 요소라 하는 것은 바로 지상적 요소와 초월적 요소를 다 갖고 있습니다. 이러면 다 나왔지요.

그래서 신약은 뭐냐? 천상과 지상, ‘적’이란 것이 떨어집니다. ‘적’이라 하는 것은 내다보지만 천상, 지상은 이미 확정된 거니까 실제니까 이게 떨어져요.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돼있다. 구약 다음에 신약이 오니까. 맞지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데 구약은 구약적 요소와 신약적 요소가 있다는 말은, 구약이니까 구약적 요소가 있는 건 마땅하고 신약적 요소라 하는 것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림자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의 그림자만 생각하지 말고 몸체와 끊어지지 않는다, 이어져있다는 이 이어짐이 중요해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구약은 하나님의 그림자라 할 때 이어져있다는 이게 강조점이에요. 구약과 신약이 끊어져있는 게 아니고 이어져있는 거예요.

신약적 요소가 뭐냐? 여기 나오지요. 초월적이고 지상적 요소를 어디에 품고 있느냐 하면 다윗 왕에게 포함돼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져있어야 시편 22편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쳤던 것과 이어져있는 거예요. 그래야 언약은 망하지 않는다. 언약은 끊어지지 않는다. 언약은 연속적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진리는 한결 같다는 거예요.

이걸 에베소서 3장이나 골로새서 1장에서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하면서 비밀을 박태환 수영선수가 스타트하고 잠수하지요. 한 25미터 정도 가게 되면 선수 어디 갔지? 선수 없어졌어요. 물속에 가는 거예요. 구약 쪽이죠. 구약 쪽에 신약의 요소가 있는 거예요. 드디어 구약 끝나고 여기 있지 하고 돌고래처럼 수면 위로 뛰어올라오잖아요. 이어져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자아는 내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끊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끊어져있는 자아를 진리의 세계와 연결되려면 자아가 살면 안 되고 끊어지게 된 이것을 구약적이든 신약적이든 이방적이든 이스라엘적이든 언약 쪽에 연결을 시켜줘야 돼요. 우리는 지금 구약을 보기 때문에 구약의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구약으로 끝나면 안 되고 신약 쪽으로 연결시켜줘야 이 자아는 끝이 아니고 연결된다 이 말이죠. 자아, 나는 연결이 되거든요.

연결될 때 나는 어떻게 나로 연결되는 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나는 형상으로 바뀌어요. 내가 나로 가면 안 돼요. 형상으로 바뀐다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든 적이 없어요.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지요.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내가 만들어졌지만 내가 만든 입장은, 내가 생각하는 나기 때문에 이것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아직 여러분들이 정신 차리고 있으니까 어려운 것 해버려야 돼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게 상당히 어려운 건데 인간의 마음, 내가 이 마음을 볼 때 이 마음은 스크린, 막 역할을 해요. 영화관의 막 역할을 해서 인간은 기껏 볼 수 있는 게 자기의 마음까지만 알아요. 그런데 이 마음이 뭐냐 하면 내가 만든 나르시시즘이거든요. 나르시시즘 알지요. 자기한테 도취되는 것. 내가 나한테 도취되어서 설치한 스크린이 마음이라는 겁니다.

마음을 호수, 또는 마음을 표현한 제일 유명한 것이 뭐냐? 거울, 동양철학에 나오는 거울. 유교에서 마음을 거울로 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네 마음에 티끌이 있으면 수시로 물티슈로 닦아야 네 마음을 안정되게 할 수 있다. 유교에서 이야기하죠. 그 유교시대와 같은 시대에 서양에서는 이 주장, 마음의 티끌을 닦아낼 때 늘 깨끗하게 자기 마음을 간수할 수 있고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이걸 스토아철학, 비슷한 게 에피쿠로스철학.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과 싸운다고요. 마음이 중요하대, 마음이. 사도 바울은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여야 된다. 저거들은 인간의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에 관심을 둬야 된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내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된다. 신을 믿는데 그것은 내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기 위해서 세상을 설명해야 되거든요. 하나로 구축해야 돼요. 세상이 자꾸 변화가 되잖아요. 그러면 내 마음도 흔들리면 내가 손해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를, 신께서 지배한다. 신의 주권사상인데 이슬람교의 알라신도 마찬가지고. 신이 모든 걸 관장하시고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된다 할 때 결국 그러한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는 그 의도가 뭘까요?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내 마음의 평정을 찾는 거예요. 애가 아프다, 코로나가 온다, 돈이 없다. 이 모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 이걸 형용사로 우리말에 이렇게 잘 표현돼있어요.

잔망스럽다. 잔망스럽다는 뜻이 뭘까요? 촐랑댄다는 말이죠. 잔망스럽다, 표면에 늘 요동이 친다. 내 마음의 표면이 늘 요동을 치는 거예요. 맨 날 문제 있으면 전화하고 계속 요동을 치는 거예요. 마치 드럼에 물 뿌려놓고 난타 공연하는 것 같아요. 다다닥 치면 물방울 튀니까 그 물방울 튀는 대로 세세하게 신경을 다 쓰는 겁니다. 내가 튀면 안 돼, 마음이 안정돼야 돼. 자아, 마음. 마음, 자아.

내가 조작한 허위가 마음이다. 잘못된 마음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허위에요. 스크린이거든요. 여러분들 <링>이라는 괴기스런 일본영화에 보면 티비 화면이 스크린, 이차원 평면이잖아요. 평면이 삼차원 돼버렸어요. 여자가 머리 풀고 거기서 기어 나온다고요.

지금 다윗은 내가, 라고 하지만 다윗은 나에서 뭐로 옮겨가는 중이냐 하면 형상으로 옮겨가요. 나는 형상으로 옮겨갈 때 뭘 뚫고 지나가느냐 하면 내가 쳐놓은 스크린이라는 가상스크린을 그냥 뚫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여기다가 사울 왕을 보내서 뚫어버리는 거예요. 그냥 도를 닦는 게 아니라 득도하는 게 아니에요. 지리산 들어가서 나는 온화하다, 나는 온화하다. 평정하다. 나는 세상 모든 걸 가졌다. 이러다가 아이가 돌멩이 던져서, “아저씨, 미안해요.” 그럼 “혹뿔 나서 미안하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절이고 성당에 가고 교회 가고 전부 다 마음의 스크린을 뚫어버리는 돈입니다. 주의 영광이고 복음이고 뭐 어떻게 해도 내 마음을 돈이 와서 찢어버린다니까요. 엄마 이혼하고 딸 둘과 사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셋이 하나님 말씀 생각하고 복음 생각하고 이렇게 사는데 어느 날 세 명이 투신자살했다? 말씀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복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리 만들었어요? 돈이죠. 돈보다 더 실제적인 게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은 돈이라는 협박을 겨우 견디기 위해서 가상적으로 내가 조작해낸 게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와 이야기하느냐? 내 마음과 이야기해요. 이게 얼마나 허상입니까. 세상은 돈으로 움직이는데, 돈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단백질로 움직이고 탄수화물, 지방질로 움직이고 어떤 곡식을 먹어야 배부르다. 이런 걸로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돈 없으니까 그냥 굶으면서 행복하다, 나는 복음을 안다. 이것으로 견디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가증한 겁니까.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거짓을 통해서 발견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거짓을 통해서. 왜냐하면 내 마음은 나르시시즘이거든. 나의 진실함과 의로움과 정당함과 옳음과 훌륭함을 그래도 반영해주는 스크린이, 나는 영사기고 반영이 내 마음이란 말이죠. 마음과 나는 한 편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마음은 섭섭하지 않고 나는 마음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진실에 반대해서 거짓이 마음을 뚫어버린 거예요.

그럴 때 내가 꿈을 꾸고 있었구나. 내가 착각에 있었고. 나르시시즘이란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걸 말합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있으면 복음을 안다? 그것은 사람한테 안 들켜도 주님한테 다 들킵니다. 나의 세계에 살면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결국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 마음 스크린에다가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를 적어놓은 거예요. 종이 쪼가리인데 아무것도, 내가 투사한 허상이거든요.

그래서 포이에르바하가 이걸 이야기한 거예요. 신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투사한 것이다. 내가 투사한 것이 신이다. 성경에도 나오지요.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그게 뭡니까? 우상이잖아요.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에요. 내가 내 마음에다가 이 세상의 변화가 너무 무서우니까 그걸 하나로 정답은 뭐냐? 신이 모든 걸 통치한다고 내 마음에다 적어놓은 거예요. 나와 내 마음이 일치되는 거예요.

자아는 실체가 없어요. 자아가 어디 있어요. 신체가 있지. 내 몸이 있지 자아는 없는 거예요. 없는 자아가 마음이란 것을 해서 맨 날 속닥속닥 불면증에 걸렸는지 밤새도록 자기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에서 나온 결론은 뭡니까? 신이 보기에 나는 정당하다, 나는 뭐든지 정당하다, 옳다. 그 이야기만 속닥속닥 주고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 왕이 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니까 다윗은 이 자체가 박살나는 거예요. 갑자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엉뚱한 하나님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내가 구상하지 않은 하나님. 다윗이 자길 죽이라고 사울 왕을 부추겼습니까? 아니지요. 내 계획에 없던 거잖아요. 계획에 없는데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거예요. 열여섯 번이나 쫓겨 다니면서.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고 내가 모르고 있는 하나님, 진실한 내 마음 입장에서는 어떤 하나님이에요? 거짓된 하나님이죠. 거짓된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누가 거짓돼요? 내가 거짓돼요. 버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려도 마땅한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결국 뭐냐? 누가 거짓되냐의 판정이에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짓이야, 아니면 하나님이 거짓이냔 말이죠.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짓이냐, 진짜 하나님이 거짓이냐, 어느 것이 거짓이냐? 누가 거짓이냐?

이 문제를 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형상이 뭐냐 하면 우리의 신체에요. 시편 22편 봅시다. 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10절에 보면,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12절에,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그 다음에 14절에,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그 다음에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18절에,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바로 신체에 관한 이야기에요. 주님은 우리의 신체를 주목한다고. 자아를 주목하는 게 아니고. 신체를 공격한다고요. 왜? 신체가 하나님 자기 것이니까. 신체가 하나님 것인데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에 기조한 선악에 근거한 새로운 뭘 만들어냈습니까? 자아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 자아가 누구와 늘 상대하느냐 하면 바로 자기 마음과 상대해요.

나르시시즘이니까 자기 마음과 상대해서 선악에 기초해서 뭐로 봅니까? 악 쪽에 붙이지 않고 선한 쪽에 붙이는 거예요.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이 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자아의 거짓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못 빠져나오지요. 사울 왕이 동원돼야 되고 적들이 쫓아와야 되고.

특히 여기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절) 내 손과 발이 찔렸다 할 때 아까 구약적 요소 중에서 위에는 이방민족이 있었고 밑에는 뭡니까? 이스라엘이 있었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민족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을 갈라내는 거예요. 이 진짜 이스라엘은 연속돼요. 신약으로 연속돼야 되니까.

갈라낼 때 지금 다윗을 누구 공격합니까? 사울 왕이 공격하지요. 사울 왕은 자기는 누구의 왕이라고 봅니까? 이스라엘 왕이죠. 이스라엘은 누굴 쳐요? 진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예요. 구약을 통해서 이렇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나가 되면 그들은 이 이스라엘이 전부인 줄 알지요. 전부가 아니고 나눠져야 돼요. 두 노선으로 두 구원으로. 버려져야 되는 거예요.

가짜 이스라엘, 이방민족적인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자아중심이죠. 자아중심의 대표자가 사울 왕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 달라 할 때 언질을 줬어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왕으로 달라고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의 인간 왕이 왕답게 되려면 부가되는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이걸 굳이 안 하고 싶지만 해야 되겠지요.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무엘상 8장 10절에 보면, 왕이 되게 되면 너희 자식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것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밭을 갈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집에 요리하게 만들고, 그들의 십일조를 다 가져가고, 너희 노비와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고.

자기 일, 자기 일, 자기 일 지금 뭡니까? 너희들이 찾고 있는 인간의 왕이라는 것은 인간의 요소 중에 집대성됐기 때문에 인간의 요소가 나밖에 몰라요. 이미 마귀로부터 선악과를 ...... 나밖에 모르는 요소 중에서 하나를 끄집어내보세요. 그게 어떤 왕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그걸 왕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됨과 지상에 인간의 왕 됨이 이미 여기서 갈라지고 있는 거예요. 차이 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된다고 할 때 이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왕 됨을 버림이라 한 뜻이에요. 우리가 언제 버렸습니까? 또 이렇게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등장한 왕이 바로 다윗이고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왕 됨은 나는 왕이다, 으르릉. 범이 내려오듯이 그렇게 왕 되는 게 아니고 인간 세계 속에서 신체적으로 학대를 받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이에요. 이게 구약적 요소 속에 신약적 요소가 따로 있지요.

신약적 요소에서 위에는 초월적이고 하나는 지상적이죠. 신약적 요소에 다윗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누구한테 하소연합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초월적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겁니다. 이게 마그마처럼 터져 나오는 거예요. 마그마가 터져서 후지 산 밑으로 내려오지요. 내려와서 마그마가 펴져버리면 그게 오늘날 교회고 오늘날 성도에요.

성도의 관심사는 자기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한테는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발라버렸으니까. 마그마가 와서 발라버렸다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발라버렸어요. 중국집에 가서 다른 사람 보기에 자장면 곱빼기를 맛있게 먹지만, “아저씨, 자장면 곱빼기 그렇게 맛있어요? 그렇게 맛있게 먹고 뭐하시렵니까?” “죽으려고요.” 맛있게 먹는 것도 죽음의 체험이에요.

이걸 먹음으로써 내가 자아가 얼마나 내 자아를 흡족하게 하는지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자기 죽음을 체험하는 거예요. “아아 자장면 한 그릇에 천국의 생활보다 더 기뻐하는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모든 걸 그렇게 느끼게 만들어요. 이 자장면, 짬뽕이 뭐라고요. 짬뽕 맛있다 해도 하루 세 끼 먹어보세요. 못 먹습니다.

관건은 사실은 제일 어려운 대목에서 관건을 주저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형상의 실체의 구분 때문에 주저하게 돼요.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형상이란 뭐다? 형상=신체. 신체가 실체가 아니고 형상에 속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아버지한테 고난 받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난이 아니고 실제로 유대지도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해서 실제로 수족을 찔러야 돼요. 그리고 실제로 가위바위보 해서 예수님 입었던 옷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장 23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게 바로 신약이에요. 신약적이 아니고 신약에서는 천상과 지상이에요. 지상 자체가 천상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그림자라 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어져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 했지요. 유일한 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입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이 세상에서 아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지상의 상태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에요.

말을 정리해보면, 이 땅에 있으면서 예수님께 일어난 일에 관심 두는 사람이 천상과 이어져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나에게 관심 두는 게 아니고. 나는 허풍선이라니까요. 나는 매일같이 착각의 연속이에요. 맨 날 나와 이야기하고 의논하고. 오늘 교회 갈까 말까, 맨 날 나하고 의논해. 왜 나한테 의논해? 내가 가게 되면 누가 욕을 할 거고, 욕하면 난 듣기 싫고. 듣기 싫은 주체가 내 신체가 아니고 자아가 듣기 싫은 거예요.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신체가 따로 자아가 따로 창조된 걸 몰라요. 자아는 악마로부터 만들어졌거든요. 신체는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자아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그냥 하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게 되면 조선시대 때 왕에게 대들면 왕에게 반역하면 죽여 버리잖아요. 제일 무서운 왕 체제기 때문에.

그런데 죽여야 될 반역자가 병으로 늙어죽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자손손에 치욕을 주기 위해서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를 난도질해서 말에 실어서 하나는 전라도로 하나는 경상도로 다시는 합쳐지지 못하도록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잔혹한 처벌을 추가적으로 또 하지요. 그러면 죽었던 반역자가 몸이 아픕니까, 자아가 아파요? “아이고,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경상도로 전라도로 흩어져서 아프구나.” 아픕니까?

그냥 살아 있는 인간들의 느낌적인 느낌이죠. 왠지 이상하게 자기 마음의 분노를 두둔하기 위해서 내 마음이 화남을 내가 응원하기 위해서 잔인한 복수를 함으로써 내 마음이 시원하기 위해서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는 겁니다. 바보가 바보를, 이 세상에 바보들끼리 모인 거예요.

형상 말 자체에 속아 넘어가요. 형상이란 것은 모호한 게 아니고 우리 신체가 형상이에요. 자아라 하는 것은 악마가 만든 거예요. 마음이나 자아라는 게 마귀가 만든 거라고요. 물론 하나님이 그걸 충분히 이용은 하지만. 영혼도 마찬가지 혼도 마찬가지고 마귀가 만든 거예요. 중요한 건 신체에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최후의 정당함이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의 형상은 예수님의 신체다. 끝. 그리고 그 신체를 다른 신체가 악마의 신체가 예수님의 수족을 찌르고 옷을 빼앗고 개 같이 달려들고 그리고 6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마그마에서 터져 나온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버림받고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생생해요. 이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에요. 실제 이야기에요.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다윗이 쫓겼던 그 바위까지 올라갔어요. 막게다인가 있어요. 바위까지 유적지로 돼있거든요. 실제로 쫓겨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 말고 부하들 입장에서는 다윗을 도대체 이해 못하는 거예요. “임금님 실제 맞잖아요. 그럼 사울 왕이 실제로 공격하면 사울 왕이 잠자고 있을 때 죽이면 되잖아요. 실제로 죽이면 더 이상 쫓기지 않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왜 안 죽이십니까?” 오히려 부하들이 다윗의 행동을 납득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윗은 바로 신약적이기 때문에 초월적, 초월이 있어요. 초월적의 반대말이 지상적이에요. 사울 왕뿐만 아니고 다윗의 신하들까지 지상적이고 다윗은 초월적이 되는 겁니다. 초월적이니까 부하들 보기에 다윗의 행동이 납득이 안 되니까 그들 입장에서 그들의 자아, 마음의 입장에서는 뭐냐? 다윗의 행동이 거짓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러면 내가 어떻게 거짓이라는 걸 아는가? 거짓을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뭐로 아느냐? 질문이 들어와서 알아요. 울산강의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성경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yes냐, no냐를 유도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묻지요. 내가 내 마음에 물으면 안 되고 주님이 나한테 물어야 되는 거예요.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지요. 이 목소리는 엘리 제사장 목소리기 때문에 어린 사무엘은 아주 순진하게 엘리한테 갔습니다.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불렀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어린 사무엘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마음을 부르고 그런 것 없어요. 그는 누가 부르면 그냥 조르르 쫓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성령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 질문은 yes와 no를 유도하거든요. 그 질문에 유도당하면서 질문자가 진실이고 질문당한 내가 졸지에 거짓으로 드러나는 환경이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제가 언제 핍박했습니까? 네 날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핍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자는 누구여야만 하는 겁니까? 나의 신체의 주인만 질문할 수 있지 질문당한 나한테 질문하면 안 돼요. 내가 나한테 질문하는 것은 자아가 내 마음에 대해서 다그치는 것밖에 안 돼요. 악마가 만든 자아가 나를 심문하는 겁니다. 고문하는 거예요. 너, 왜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자아한테는 그런 권리도 없으면서 자꾸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지켜야 되고 내 의로움과 정당함은 내가 간수해야 된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악마는 자꾸 독촉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당했어요. 광야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아들이면 아들답게 처신을 하라고. 이왕 기도하는 건 좋지만 기도에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식했으니까 배고프잖아. 그러니까 네가 아들답게 되려면 근본적으로 뭐가 필요합니까? 돌이 떡이 되어 먹으란 말이죠. 대외적으로 아들답게 되려면 말씀을 이뤄야 되고. 말씀 시편 91편에 보니까 뛰어내려라. 그러면 쪼르르 천사가 와서 지상 35센티미터 근방에서 받쳐서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고 이런 놀라운 일들이 말씀대로 이뤄져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하니까 악마가, “굿 아이디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와서 받드신다는 데 실제로 한 번 뛰어내려 보세요.”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실시하는 실험의 측정은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 너 납득되도록 내가 왜 시험을 해야 되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납득되도록 하는 시험을 내가 나한테 가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나한테 실시하면 안 돼요.

나는 진실하다. 선악을 아는 이 지식 자체가, 나는 진실이라고 확증이 된 상태에서 덩어리로 나온 게 나거든요. 자아란 말이죠. 선과 악을 알았으니까 선과 악을 아는 자체는 참으로 진실 되다. 누구한테 진실 되지요? 악마한테 진실 되지요. 주님한테 진실 된 게 아닌데. 이것 알면 안 된다 하는데 마귀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알아야 네가 자아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 자아는 절대자아로 네가 뭐가 됩니까? 네가 신으로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신이 되면 최고가 되지요.

최고 되는 방법은 뭐냐?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어서 신이 된다. 그러면 너는 어떤 경우라도 진실하다. 진실한 내가 나에게 재촉하고 독촉하고 심문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대로 사는지를 내가 누굴 시험한다? 내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놀이동산에 가서 침팬지 공연하고 있는 키 작은 부모가 아이 들고 있는 대목 이야기했지요. 자기 아이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알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복음을 알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자식은 자아니까. 자아를 끄집어내어 절대화시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자아가 있는 자리에서 십자가로 침팬지가 있으면 얼마나 기겁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내 안에 십자가 있었던 거예요. 내 형상은 없고 주님의 형상만 인정하는 거예요. 내 형상 인정 안 해요. 왜? 악마의 형상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하나의 도박자금으로 걸고 나를 판돈으로 삼아서 내가 어떤 승부를 보지 마세요. 이거는 악마의 도박입니다.


10분 쉽시다.


20210208b 부산강의 : [시편]35(22편)-형상싸움
(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내부에서 다윗 때문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것이 시편 22편이거든요. 교회가 괜찮은 교회, 수백 명 있는 교회 있는데 부교역자 잘못 들어와서 사달 났다.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란 말이죠. 당회장 목사가 있는데 조용하게 고요하게 은혜롭게 잘 지내던 교회가 부교역자 잘못 들여서 사달 나버렸다. 그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당회장 입장에서는 빨리 원상복귀가 급선무겠지요. 옛날처럼 평화롭게.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 평화로움을 끝났다는 거예요. 평화로워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평화롭게 돼버리면 그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종결되면서 구약적 이스라엘로 머물고 말아요. 신약적 교회로 이어지질 않아요. 구약적 이스라엘이 구약적 요소로서 완결돼버리면 이것은 현재 유대교 있잖아요. 현재 이스라엘 꼴이 된다고요. 현재 이스라엘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제3성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촛대도 금 촛대로 만들어놓고 한다고요.

그것뿐만 아니고 구약성경을 보는 세대주의자들이든지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자꾸 눈으로 보는 이스라엘이 보고 싶은 거예요. 구약성경 문자 하나하나가 실제로 다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게 거짓인데 그들은 자기가 지키는 것이 진실하기 때문에 그 진실 된 것을 공격하는 것을 거짓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기본은 이거에요.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지금까지 안 버렸잖아요. 이걸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중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나 자체가 거짓된 것이 이게 악마적인 사실을 아는 기회를 가져야 돼요. 내 자신이 악마적인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고 즐거워해야 된다 이 말이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성도가 나 자신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것은 적대적 관계거든요.

제가 첫째 시간에 스크린 이야기했습니다. 스크린 이야기할 때 요새 영화관 말고 옛날 영화관 생각합시다. 옛날에는 영화관이 아니고 극장이었잖아요. 극장에서 연극도 하고 쇼도 했단 말이죠. 그럼 무대 세트장 뒤에 들어가 보세요. 음울하고 음침하고 어둡고 서늘하고, 난방 할 필요 없기 때문에 춥고 그렇지요.

내 마음 뒤쪽으로 돌아가 봐야 돼요. 거기는 음침하고 황량하고 거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어두움이에요. 그 자체가. 어두움을 안 들키기 위해서 나의 거짓됨을 교묘하게 억지로 가리기 위해서 내 마음에 드는 마음이란 스크린을 짜놓은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 이걸 가지고 세상 인생이란 하나의 연출.

그럼 나는 뭐예요? 나는 연출가지요. 모든 인간은 자아는 이건 자동적이에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내 인생을 꾸며나가는 연출가에요. 다시 말해서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이에요. 전부 다 허구를 꾸미는 제작자에요. 자기 드라마, 자기 소설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꿈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가 우리한테 쳐들어오게 되면 마그마가 우리한테 쳐들어오게 되면 진짜 왕이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되면 나라는 가짜 왕은 작살나지요. 아작 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뭐로 들춰내는가? 진짜 왕, 진짜 십자가 지신 왕,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욕망의 자리가 되죠.

욕망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 결핍된 것을 추구하면서 욕망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욕망이 이뤄지면 안 돼요. 항상 결핍될 게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돼요. 마귀가 그렇게 인간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이미 다 만족하다 싶으면 결핍된 것을 또 만들어줘요. 이거는 네가 아직 안 가졌잖아. 이런 체험은 안 했잖아. 이런 즐거움은 네가 못 봤잖아. 계속 맛 집 찾아다니고, 끊임없이......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린다 하는데 욕망이 결핍이 차고 들어와 버리면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의 하수인이 내가 돼버리는 거예요. 욕망에 끌려 다니는 나. 그럼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가? 결핍에서 오지요. 결핍은 어디서 오는가? 내 눈에 보이는 타인들의 요구에서 욕망이 나온다. 나한테 요구하는 게 있어요.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있다고요. 그게 나의 욕망이 되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되지요.

이런 이야기는 전부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욕망, 결핍,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이게 의미라는 거죠. 이 세계는 악마의 세계에요. 악마의 세계는 무엇부터 출발한다 했습니까? 아까 배웠잖아요. 악마의 세계는 자아부터 시작해요. 선악체계를 갖고 있는 나. 이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선과 악을 알았다는 말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인공이 누구란 말입니까? 주인공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주인공이 나라고 만들어졌다 이 말이죠.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재판관으로서 내가 여기 끼어드는 겁니다. 사사기에 보면 사람들이 왕이 없음으로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왕이 없음으로 모든 판단을 어떻게 한다 하지요? 자기 소견이죠. 왕이 없으니 내 소견대로 한 거예요. 그럼 왕이 있다면? 왕이 있어도 자기 소견대로 하지요. 왜? 그 왕은 내가 요구했기 때문에.

이번 수련회 교재에 보면 어려운 대목 중에 하나가 그거에요. 지도자가 지도자 돼야 될 이유는 백성들이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는 조건 하에 지도자가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는 겸손을 반영한 게 지도자 세우는 거예요. 만약에 그 지도자가 나는 지도자 아니란 겸손을 훼손해버리면 그 지도자 끄집어 당기는 거예요. 왜 건방져 하고.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착각을 하게 만들어요. 백성들이. 내가 너를 세웠어가 항상 있는데 지도자는 그걸 모르고 깜빡하고 백성들이 존경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백성들의 존경하는 경우는, 백성들이 당신을 지도자로 선택한 그 선택행위가 참으로 정당하고 의롭다는 것을 계속 유지시키는 조건 하에만 지도자가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참 대통령 잘 뽑았다, 라는 백성들 자기에게 모든 칭찬과 찬미가 쏟아지는 조건 하에 그 지도자는 있는 겁니다. 당회장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당회장 목사가 교회 문제에서 제일 큰 문제인데 당회장 목사 돈 밝히고 딴 짓하게 되면 교인들이 회의해서 뭐합니까? 목사 갈아치우기 하잖아요. 목사 갈아치우지 말고 네 마음이나 갈라치우라. 왜 자기 마음은 안 갈라치우고 목사 갈아치워요. 목사를 갈아치운다는 말은 모든 실수를 목사한테 덤터기 씌우고 자기는 그 목사 뽑는데 하등 하자가 실수가 없었다, 나는 정당하다를 지금 갈아치우는 걸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참 못 됐지요, 교인들이.

이게 사무엘상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 뽑는 게. 사울 왕 잘못이 아니에요. 왕을 달라고 한 백성들의 잘못인데 백성들은 왕 바깥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당신 뽑을 때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뭘 몰랐어. 어떤 왕인가? 지도자를 세운 우리가 참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주기를 그런 왕을 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왕은 누구한테 핍박받아야 돼요? 백성들에게 핍박받는 왕이 진짜 왕입니다. 그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치고 아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불가능한 처소거든요. 이 불가능함이 유지돼야 돼요. 어떤 인간도 내가 뽑는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왕으로 뽑지 않아야 되는 그런 처신으로 예수님은 살았어요.

내가 메시아라면 저 예수는 절대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든 마음을 들춰내는 그러한 방편으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네 능력으로 네 힘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못 알아보게 해줘야 진짜 예수님이에요. 불가능한 처소거든요. 악마에 속한 인간이 어떻게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자,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을 아는데 우리와 함께 했다고 하니까 선악판단은 누가 한다? 하나님이 내리잖아요. 하나님이 내리는 자리에 인간이 들어갔으니까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자, 판단자가 나라고 한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볼게요. 난해하더라도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악을 판단해버리면 선이고 악이고 간에 선악을 통해서 선을 통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선과 악은 나의 절대성, 나의 신 됨을 증명해주는 선과 악이 되겠지요. 이게 바로 모든 의미의 출처입니다. 모든 의미의 출처는, 나의 판단은 옳았다는 쪽으로 돌아가게 돼있어요. 이걸 사자성어로 뭐라 하느냐 하면 ‘사필귀정’이다. 결국 모든 일은 정의로운 곳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언제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한 번 국회의원 떨어지고 그 다음 국회의원 될 때 역시 국민의 판단은 옳았다는 식으로.

의미란 나를 비껴가면 의미가 아니에요. 그건 니 의미지 내 의미는 아니라니까요. 어떤 경우라도 의미는 나에게 힘이 밑받침되고 실려야 돼요. 나를 잃어버린 의미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계속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격자로서 유지시켜주는 게 의미에요. 그런 실력이 있다는 것,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내가 계속해서 나는 그런 판단능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나르시시즘이니까,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걸 설명하는 정도에서 계속 사람들은 부지런히 뭔가 움직이는 거예요.

직장에 갔는데 마음에 안 들어 공무원시험에 합격해놓고 노랠 불러놓고 공무원생활 6개월도 안 돼서 사표내고 일인 유튜브 할래. 가만 집에서 놀면서 돈 버는 유튜브 한다고 뛰쳐나오는 이유가 공무원해서 뭐가 안 됐다는 뜻이에요? 공무원해서 나는 선과 악의 판단만큼은 하자가 없고 실수가 없다는 것을 그 직장이 나에게 증명을 안 해줬으니까 때려치운 거예요.

교도소 갔다 오고 난 뒤에 전과자 되어서 살 궁리 없을 때 신체에 에너지는 공급해야겠고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되겠고 그냥 아무데나 들어갈 수 있는 허드렛일을 한다고 들어갔다 칩시다. 일단 일하면 돈은 벌잖아요. 그러면 그걸로 행복합니까, 자아가 만족합니까? 그 허드렛일이 뭐냐 하면 천한 일이 딴 일이 아니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천한 거예요.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 사람 미쳐버립니다.

내 인생의 꿈을 여기다 걸었나하는 회의와 의심이 들면서 어떻게 나란 존재가 이것밖에 안 되냐 말이죠. 전에 그런 연극이 있답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집구석에만 앉아 있다가 세상이란 바다를 본 거에요, 나이 오십에. 내가 애 낳고 밥 해주고 남편 봉양하고 이 짓하려고 여자로 태어났냐 이 말이죠. 여자도 저 세상에 나가서 비상, 내 날개를 펴고 싶은 거예요. 임재범의 노래처럼. 그것도 그냥 펴는 게 아니라 활짝 펴고 싶은 거예요. 활짝 펴야 다 늙었는데 뭐.

성도의 특징은 갈수록 젊어진다는 겁니다. 여기 봅시다. 22편 9절에,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아무것도 무능한 자가 되고 엄마가 젖을 먹이지 아니하면 나는 살 수 없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나에 대해서 기대하거나 나에 대해서 희망을 걸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모든 것을 먹이고 입히고 하니까 할 필요가 없거든요.

아까 공장 이야기할 때 벌써 뽑는 사람이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남자는 택배회사 아닙니까. 뽑는 사람이 이야기하지요. “여기 며칠 있을 예정입니까?” 어떤 사람은 벤츠 타고 와서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퇴직한 사람 있습니다. 하도 다급하니까 주위 식구들이 닦달하니까 멀쩡한데 코로나 핑계대지 말고 돈이나 벌어 오라고 하니까 쉬운 데가 택배회사. 완전히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물건 내리는 거예요.

그것도 보다 좀 더 규모 있어 보이는 게 뭐냐? 파렛트 들고 운반하는 것. 어느 공장에 가도 파렛트 있잖아요. 물건, 원자재를 적체할 때 나무로 만든 거기다가 물건 실어 나르고 옮기고. 옮기는 그걸 운반 자키라 하는데 자키로 올리고 내리고 또 지게차 오면 실어주고 하는 것, 그걸 하루 종일 해보세요. 그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내가 꼭 이 짓해야 돈 버나. 이것 아니면 돈 못 버나.”

돈은 버는 것 맞아요. 그렇게 일하면 한 백오십 만원 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루 열 시간씩 일하는데 이백 만원은 주겠지요. 그게 나, 있지도 않은 자아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예요. 문제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꾸 의미 손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식들 30년 밥 해주고 나는 다 늙어버리고. 내 청춘 누가 보상해주냐 말이죠. 나도 희망 좀 갖자. 나도 꿈이란 걸 갖자.

사람이 대인관계가 없고 희망이 없으면 우울증 걸리는 이유가 사람의 두뇌에 있는 신경세포가 항상 새로운 자극에 의해서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게 돼있어요. 세포가 살아 있으니까. 만약에 외부 자극이 축소돼버리면 안에서 자폭해버려요. 스스로 함몰돼버립니다. 그러면 치매 걸린다는 거예요. 우울증 걸리고. 그래서 부지런히 만나서 새로운 자극들을 자꾸 만나야 뇌세포가 활성화되면서 건강해질 수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있는데,

바로 그 이야기가 성경이야기가 아니고 악마의 세계에서 나온 이야기에요. 악마의 세계는 나의 신체를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내 자아를 지키는 거예요. 내 신체를 관리하는 것은 악마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신체를 관리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수족을 찔렸으니까요. 실제로 유대인에게 체포당하고 실제로 옆에 있는 강도와 같이 처형됐잖아요. 신체에 대한 압박감이에요. 실제로 신체.

첫째 시간에 이 신체를 형상이라 했지요. 우린 이해가 안 돼요. 형상이란 이미지를 말하지 신체가 실체고 실체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형상이라고 보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형상을 신체로 보는 겁니다. 왜 그렇게 보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신체가. 고린도후서 5장 봅시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여기 집이 30평짜리 집을 말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형상, 새로운 몸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활이라는 것이 모호한 게 아니고 신체의 부활이에요.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계속해서 하나님이 강조하는 게 뭡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신체를 자기가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 신체의 원형이 누구 신체냐 하면 실제 부활이 누구지요? 예수님 전에 나사로의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 오기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있었잖아요. 그게 첫째가 아니고 첫째는 뭐냐 하면 초월적이니까 천상적이니까 예수님이 부활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모델이 되고 근거가 돼요. 하나님의 형상은 신체다. 어떻게, 어떤 신체?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해같이 빛나는 신체가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죠.

변화 산상에서 그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세 명 다 특징이 뭐냐 하면 해같이 빛났습니다. 해보다 더 빛났을 거예요. 그걸 이야기하면 물리학자는 해의 온도가 6000도고 그보다 빛나면 몇 도냐? 쓸데없이 그런 소리하는데 왜 그렇게 물리학자들의 그런 식으로 따지냐 하면 신체 때문이 아니고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자아가 플러스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면 나는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지식=진리’로 보고.

그러나 자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돼요? 거짓이죠. 자아는 없어야 된다. 거짓된 영, 악마가 만든 게 자아인데 인간은 출발점을 거짓됨부터 시작해요. 주님의 시작은 예수님부터 시작해요. 그래서 성도의 관심은 나의 시작점,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부터 나로 하여금 갓난아기로 태어나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갈수록 더 젊어지죠. 뭐가 젊어지느냐? 영광된 신체로 가니까 젊어지지요. 젊어진다고 피부가 탱탱하고 그런 건 아니고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죽어도 살겠고가 되는 거예요. 살려면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죽는 것에 대해서 박수치는 거예요. 죽는 것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겁니다. 참 코로나가 얼마나 좋은 기횐데 성도라 하면서도 걸려서 죽을까 싶어서 환장을 해.

코로나 이야기할게요. 여기 코로나가 범람하지요. 창궐하지요. 그러면 내 신체가 코로나와 해야 여기서 하나님이 이야기한 의미가 생기는데 인간은 의미를 보지 않고 자아부터 출발하지요. 그럼 우리가 공부한 대로 해봅시다. 자아는 어떤 자아다? 선과 악을 판정할 수 있는 최후의 판단자가 자아지요. 그러면 자아가 코로나에 걸리면 내가 죽잖아요. 죽으면 뭐가 없어져요? 선과 악의 최후가 판단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은 신에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영원해야 돼요. 신을 죽으면 더 센 신이 날 죽인 게 되기 때문에 신의 자존심에 스크래치 납니다. 하나님 네가 뭔데 날 죽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서 유명한 영어 있지요. Why me? 왜 나를? 하나님이여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이게 뭔 뜻이에요? 모든 의미의 출처를 왜 박살내려 하십니까? 나는 내가 있음으로서 내가 시작됐는데 내가 없다면 하나님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예수도 의미 없는 거예요.

나를 살려줄 때만 하나님도 의미 있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데 모든 출처는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고 십자가도 아니고 그 시작점은 뭡니까? 나에요. 내가 시작점이에요. 이게 우상숭배 아닙니까. 내 자신이 우상숭배인데 뭐. 난 우상 외에는 믿을 방법이......

자아가 있는 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고 자아가 있는 우리는 어떤 신도 예수든 성령이든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자아는 무엇을 가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립니다. 신약 때 오는 형상은 예수님이죠.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모든 만물은 그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함으로써 다 이루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더 이상 남은 일이 없어요. 다 이루었어요.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면 끝난 거예요. 예수님한테는 이미 통일됐으니까 주님께서 손 털어도 괜찮아요. 주님은 자기가 선택한 사람 뽑아내면 되고.

그런데 자아세계에 예수님이 와버렸을 때에 결국은 성도의 특징은 의미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무의미로 바뀌는 그러한 즐거움을 줍니다. 의미가 소실되는 과정이 성도의 인생이 되는 거예요. 의미가 소실되는 것을 시편 22편에 보면 9절에,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모태에서 나오는 의미가, 이미 의미가 있고 의미를 의미되기 위해서 내가 모태에서 태어났지요. 태어난 내가 의미 있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지요.

주께서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은 의미의 시작점인 내가 아니고 주님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나를 태어나게 한 거예요. 마그마가 터지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 다윗이란 왕의 자리에 그냥 흘러넘쳐버리면 다윗 왕은 어릴 때까지 소급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내 신체를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고 이 세상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를 하나님의 의미를 내 신체를 통해서 발현시킨다, 전달되게 한다, 알려준다.

이게 바로 그 당시의 이스라엘입니다. 그 당시에 다윗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이스라엘 돼요. 이스라엘은 우르르 모인다고 이스라엘 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심점부터 핵이 되는 구심점부터 먼저 만들어놓고 거기서부터 터져 나오는 이질적인 의미의 세계가 기존의 의미의 세계를 전부 다 공격하지요. 공격한다는 것은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대놓고 싸울까, 이런 인간 없어요. 항상 좋게, 좋게 지나갔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요. 여기까지 들어오지 마라. 여기까지 들어오면 화낸다. 특히 부부사이에 그런 것 많지요. 니 돈 벌었으니까 널 위해서 밥 해줄게, 빨래해줄게. 기본적으로 해줄게. 물론 나이 육십 전까진 해줄게.

그랬는데 어느 날 남편이 내 휴대폰을 본다. 이건 너무 들어왔어. 들어와도 너무 들어온 거예요. 니가 뭔데 내 의미의 중심체계를 나, 신이야. 모든 의미는 내가 알아서 내가 해. 선과 악의 판단은 내가 한다고. 이 정도까지만 와. 더 이상 밀고 들어오면 안 돼요. 난리나지요.

처음에 어릴 때 애들 키우면 우리 애는 내 말 잘 들어요. 그게 세 살까지. 그 다음부터는 괴물을 하나 낳았는지 마귀를 낳았는지 분간도 안 돼요. 이건 원수가 따로 없어.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부부가 신이 둘이었는데 갑자기 신이 세 명이 되어서 서로 맨 날 리그전이라. 어느 신이 최고의 신이 됐는지.

다시 말씀드립니다. 의미가 소실되는 과정, 성도는 의미가 소실돼요. 점점 더 자아가 사는 의미가 시들시들해야 돼요. 별 중요하지도 않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안 중요해야 돼요. 관심사가 주님께 있기 때문에 안 중요해요. 안 중요해도 주께서 살릴 때까지 살려주십니다. 나에게 날 위한 의미가 자꾸 희석되고 증발되고 날아가 버려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것 뭐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왜 그러냐 하면 자아가 거짓된 것을 말씀으로 여기서 계속해서 질문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이 안 들어오면 자기가 거짓된 것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는데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겠습니다. <형상싸움>

예수님에게 형상이란 자기의 신체지요. 인간에게서 자기의 형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신체가 아니고 자아입니다. 나의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래야 의미가 생기니까. 여기에 신체가 결합됐다고 보는 거예요. 자아라 하는 것은 나지요. 나를 나답게 되기 위해서 신체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신체가 아프다, 가난하다 또는 욕 얻어먹는다 하면 내가 짜증을 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에 속옷을 가위바위보 해서 나눴던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발가벗긴 거예요. 로마군인들은 그걸 감정이입해볼 때에 내가 만약에 발가벗긴 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있으면 얼마나 부끄럽겠는지 생각하겠지요. 그러니까 내 신체가 발가벗겨져서 부끄럽다, 라는 것을 예수님에게 되돌려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신체가 있다는 그것을 반영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같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 있지요. 보통 작게 그리지만 실제론 같은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인데 예수님은 중앙에 놓였고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강도가 뻔뻔스럽게 이야기해요.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저를 생각해 달라 했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때 자아는 나는 강도다, 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까, 치욕스럽게 여깁니까 아니면 자기한테 아예 의미가 없는 거예요?

강도진, 공무원인지, 내가 판사인지 내가 가난한지 부자인지 그것을 의미체계 안에서 탈락이 된 거예요. 정말 날아가 버렸어요. 내 형편에 대해서 내가 이제는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겁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형편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해요. 그런데 이 구원받은 강도가 얼마나 불가능한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뭐로 판정이 되느냐 하면 옆에 있는 강도가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옆에 있는 강도를 보세요. 오늘 한 강의가 다 나와요.

공식으로 하면 자아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신체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옆에 있는 강도, 구원받지 않은 강도가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당신의 능력을 베풀어서, 자 능력을 베푼다는 말은 내 신체에 어떤 힘이 가해져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사면 받아서 멀쩡하게 돌아다니게 해준다면 나는 당신을 믿을 용의가 돼있다.

결국 이것은 내가 자아의 의미를 내가 버리기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고백이 오늘날 모든 교인들의 되었어요. 교회 교인들, 목사, 장로들의 고백이에요. 이 코로나만 없다면 언제든지 교회 나올 용의가 돼있습니다. 왜 그런 소릴 하느냐 하면 나 아직도 믿음이 있다는 내 판정을 내가 인정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지금 정당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코로나가 없으면 나는 교회 나올 용의가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 나와서 내가 걸려 죽는다든지 그것보다 더 못 돼먹은 사고방식이 뭐냐? 나는 죽어도 괜찮은데 나 때문에 내 가족이 걸린다면 얼마나 사회에서 나쁜 소리 듣고 피해를 입히겠나. 되도 않은 지 걱정부터 안 하고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 언제부터 남 걱정했다고. 나는 죽어도 괜찮은데 나 때문에 식구들이 내 가족이 내 아들이 걸리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지 아들 떠받들고 아들 궁둥이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 자아에요. 자아의 연속성이 자기 아들이라고요.

놀라운 사실은 이 십자가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가 바로 인간의 한계 바깥에서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자아가 있는 한 절대로 십자가로 건너오지 못하게 만드는 십자가였어요. 그 십자가를 들이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런데 건너갈 수 없는데 옆에 있는 구원받은 강도를 보세요. 건너갔잖아요. 오늘 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으니까.

건너가면서 구원받은 강도가 보여준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직업이 강도냐, 아니냐, 내가 십자가 달렸다, 안 달렸다는 게 아무런 의미가 소실된 거예요. 의미소실입니다. 의미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래야 그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를 버리시나이까. 자아를 버리게 하신 하나님의 뜻의 일관성이 동일하게 자아를 버릴 집단을 만드는데 그게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그게 오늘날 교회고.

그럼 목사님 우리가 언제 그런 기쁨을 누립니까, 라고 하신다면 주님께서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 뜻대로 안 해줘요. 우리가 자꾸 자아가 자기가 신으로 선과 악의 판정의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예수님과 비교해볼 때 거짓이란 걸 드러내게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위인들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강도 둘이 필요한 것이 강도 둘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시작점은 발악하고 반항하는 강도로부터 시작해서 구원받은 강도로 넘어오면서 여기에 누가 개입하느냐? 십자가의 효과, 성령의 역사가 이걸 개입하면 우리 안이 십자가 현장이 되게 하는 겁니다. 반복하면서 계속 매일같이 십자가 현장되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에서 또 주님의 은혜로 개입으로 구원받은 강도로, 그 사이에서 기쁨을 갖고 감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아무 외부적인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에 미쳐 있다가 주님이 다루시는 신체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신체가 형상이 되지요. 그래서 악마가 만든 자아가 하나님이 만든 형상 자체로 들어오면서 구원이 이뤄지는 겁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형상이에요. 신체가 있더라도 형상이에요. 누구의 이미지? 주님의 이미지, 주님의 그림자,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는 주님의 신부. 신부는 독자적으로 신부가 있을 수 없어요. 창세기 2장에 여자란 독자적인 여자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1~4절)

여기서 개성대로 음식을 먹은 게 아니고 다 같이 짬뽕이면 짬뽕으로 통일했고 자장면이면 자장면으로 통일한 거예요. 똑같은 음료를 마신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로 왔던 그 신체 하나하나가. 모든 신체는 하나하나인데 신체가 하나하나를 이스라엘로 묶는 것은 그 신체들이 동일한 음료와 동일한 물을 마셨다는 조건 하에 그들은 하나의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걸 연합했다, 세례라 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모세도 마셨겠지요. 모세가 지도자지요. 지도자가 먹는 그 만나와 백성들이 먹었고 지도자가 당했던 아말렉 전쟁을 백성들이 당했고 지도자 모세가 먹던 반석의 물을 백성들이 먹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먹은 떡과 예수님의 피를 누가 먹어요? 제자들의 먹고 마심으로서 세례를 받은 거예요. 전부 다 한 덩어리 한 몸이 된 겁니다. 내 신체를 먹는 의미를 이제는 네가 먹을 차례라고 줘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서열이 나와요. 3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자, 서열이 하나님이 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남자고 그 다음에 여자지요.

서열이 있다는 말은 서열 바깥으로 안 나간다는 뜻이에요. 굴비 꿴 것 같아. 잡아당기면 한 줄에 꿰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에게 전달되고 예수님의 뜻이 누구한테 전달되고? 남자한테 전달되고 남자의 뜻이 여자한테 전달되는 것. 그러면 여자가 만약에 자아를 생각한다면 되게 기분 더럽지요. 네가 뭔데. 내가 니 시다바리가.

그런데 그걸 남자를 탓하면 안 되고, 남자도 자기 게 아니에요. 자기가 행한 열매를 여자에게 주는 아니고 예수님께 행한 것을 주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남자에게 와야 될 복이 덤으로 남자와 함께 있다는 점에서 여자에게 준 겁니다. 그래서 원래 뜻으로 돌려야 돼요. 여자란 뜻은 남자의 일부로서 여자에요.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인데 지금은 자아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남자 자아 따로 있고 여자 자아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이 본문이 기분 더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했지 남자에게 속한 게 아니에요. 그게 그 뒤에 계속 나옵니다.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는 말은 전부 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일관된 복음 내용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냥 여자들아, 너는 얻어먹은 걸로 감사하라 이 말이에요. 얻어걸린 걸로 감사하란 말이죠. 네 자아가 솜씨를 발휘해서 구원을 따낸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고 여자도 마찬가지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지가 노력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서 의미를 삭제하세요. 매일같이 삭제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주어지는 일상의 삶이 오게 되면 우리는 마중을 나갑니다.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 있거든요. 아침에 눈만 뜨면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를 버티기 위해서 자기가 신적인 행세를 하면서 이것은 나한테 해로운 것, 이로운 것 지가 판단해서 이익된 것만 하고 해로운 건 버린다는 식으로 나가다가 주님이 주신 상황과 부딪치게 돼있지요.

그 부딪침을 통해서,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강도로 출발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하나님 앞에 Why me? 왜 하필이면 나를, 하고 항의를 해대는 거예요. 항의를 해대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님의 은혜가, 찾아왔다는 자체가 은혜니까, 부딪침을 통해서 내가 주신 것을 생각해보니까 모든 걸 거저 받았는데 내가 왜 또 발광을 하고 있지? 마귀가 또 희한하게 나의 정당성을 뒤에서 부추기고 있구나. 그걸 또 깨닫게 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와 자아가 마음이 똑같은 거예요. 나르시시즘이란 원뜻이 어떤 사람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잖아요. 자기 얼굴에 자기가 매혹당한 겁니다. 그게 뭐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매혹당해요. 내 잘남과 내 신적인 판단력에 자기가 도취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울산강의에서 그걸 사람들은 자기에게 미쳐있다. 이게 오늘날 인류의 삶입니다. 자기한테 미쳐있어요.

코로나가 들어오니까 자기한테 미쳐서 굉장히 예민하게 구는 겁니다. 자기가 자길 안 지키면 누가 지켜요. 내가 날 지켜야지요. 코로나를 신체에 보내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죠. 왜? 자아란 자체가 의미의 시작점이 아니란 겁니다. 그럼 코로나 걸렸을 땐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를 버리는 거예요. 나는 누구한테 해당돼? 예수님께만 해당되지 다른 사람은 해당되면 안 되지요.

주님이 들어오셔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걸 완성하는 조건 하에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되는 거예요. 주님으로서. 아버지의 뜻이 그거니까.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피조물의 역할이란 것은 버림받도록 된, 이 우주는 버리도록 만들어졌어요. 버리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만의 세계만이 제대로 된 정통 세계란 것을 필요해서 마귀가 필요하고 거짓이 필요한 거예요. 뱀이 악마가 필요한 거예요. 악마를 만드신 하나님께 찬미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중심으로 자아중심으로 세상을 본 것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안목으로 다시 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것이 주님한테 예스가 되고 선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됨을 추후에 우리가 늘 고마워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