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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누가복음 5:35 / 부재의 온전함 / 210302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누가복음

누가복음 5:35 / 부재의 온전함 / 210302

정인순 2021. 3. 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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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홍민희

강남-누가복음 5장 35절 (부재의 온전함) 2103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5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렇게 시작이 되지요. 그 다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불러냈어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왜 계속 이어가지 않느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그 부름 받은 12제자와 함께 있고 그 12제자도 예수님이 자기들을 부를 때는 생각을 했지요. 이대로 쭉 간다. 이 상태, 이 관계 변함없을 것이다. 예수님 12제자와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13명이죠. 이 충족된 숫자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모자람이 더 없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 이게 그 뒤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의 강의의 핵심이 뭐가 핵심이 되느냐 하면은 35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제자들과 함께 즐겁게 있으니까 바리새인들이 너희들 금식 안하고 왜 자꾸 먹고 마시느냐 이렇게 할 때에 34절에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같이 기뻐하고 금식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다. 같이 기뻐한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여기서 바리새인들도 오해를 하지만 제자들도 오해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예수님 쪽으로 불러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예수님께서 불러내서 예수님 제자 되었다. 이걸로 오케이 싸인 나고 아무 문제 없는 거죠. 왜? 예수님이 계시고 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35절에 신랑이 어떻게 된다고요? 신랑이 빼앗긴다. 신랑이 빼앗긴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렇게 보면 되겠지요. 신랑의 부재, 신랑이 없다 이 말이죠. 왜 신랑이 없는 이 사태가 왜 벌어져야 되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 계시고 제자 있는데 사람들 보기에는 이 관계가 대단히 온전하게 보는 거에요. 완벽하게 보는 겁니다.


주님이 부재한다는 생각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없을뿐더러 제자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애초에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고집합니다. 신랑이 반드시 부재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이게 안 맞아요. 그럼 먼저 사람들의 생각이 뭔지 알아야 되겠지요.


사람들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은 자기가 상상한 것=현실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상상한 것과 현실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은 현실을 볼 때 그냥 보지 않고 자기가 상상한 것과 맞춘 그 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맞춘 현실이라고.


여기 이 상상에서는 현실이 일치됐기 때문에 이거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결핍이 없지요. 결핍이 없는데 이 현실이 가만히 있는 현실이 아니고 요동을 친다 이 말이죠. 요동을 치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은 이 상상이 깨지겠지요. ‘어?! 아니네. 세상을 내 뜻대로 안 움직이네.’


그 때 내가 상상한 것이 현실이 아니고 이건 현실을 반영하는 일종의 임시적 상징이었다라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의 욕망은 그 임시적이지만 한시적으로도 완벽과 완전의 맛을 보는 재미로 살고 싶은 거에요. 인간은.


내가 상상한 것과 현실이 일시적이지만 완벽하다고 여길 때 이것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은 나의 완벽, 나의 완전으로 내가 자족, 만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신이기 때문에. 절대자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세상이든 그 세상을 상상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내가 해석한다는 거에요.


내가 해석을 할 때 그 해석의 의도가 뭐냐? 나는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이고 싶다는 인간의 그 근원적인 욕망을 뿌리칠 수 없어요. 인간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불러주니까 예수님이 부른다는 이 현실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뻐하느냐 하면은 나는 이제 됐다. 나는 온전하게 되었다.


아주 교회에서 좋게 생각하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하는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런데 그게 나의 일방적인 상상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주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네가 현실을 알아? 네가 내일을 알아? 모레를 알아? 한 달 뒤를 아느냐 이 말이죠.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마스크를 안 썼지요. 마스크를 안 쓴 그 상태가 뭐냐? 그걸 당연할 걸로 보고 살았죠. 환자도 아닌데 왜 마스크를 쓰고 다녀. 코로나 이전에 길에서 마스크 쓰고 다니면 사람들은 기피했지요. 감기 걸렸구나. 몸살이구나. 피해가자. 그때 “아 나도 저 사람처럼 마스크 쓰고 싶어요.” 이런 사람 없어요.


왜? 내가 상상하기에는 마스크 안 쓰는 그것이 그 당시의 나의 온전함을 충분하게 반영해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 당시 마스크 안 쓸 때 마스크를 썼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결핍된 존재로 비치는 거에요. 아프구나. 사람이 좀 모자라는구나. 빨리 나처럼 건강했으면 좋겠네. 쓴 만큼 비정상 뭐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이죠.


그러나 현실은 요동을 치거든요. 마스크 쓰라고 할 때 마스크 안 쓰고 처음에 많이 버텼지요. 왜? 옛날에 얼마 전까지 안 쓰는 것이 나 다우니까. 그게 내가 상상한 완전한 내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마스크 안 쓰면 10만원. 그놈의 10만원이 쎄요. 1인당 10만원. 교인들 마스크 안 쓰면 10만원 때립니다. 교회는 300만원. 10만원 딱 때리니까 아이고 더럽지만 써주자 이게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10만원.


그렇게 함으로써 뭐라고 자기가 상상으로 해석합니까?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은 마스크 썼기 때문에 아직 나는 안 걸리고 있다는 역시 나는 안 걸려야 마땅해. 왜? 나의 완전은 내가 조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우기는 거에요. 그래서 신랑 되신 예수님이 부재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과연 우리의 만남이 어떤 만남인가? 다시 보게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부재함으로써 인간 쪽에서 예수님께 기대한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어 버려요. 이제 예수님 만나서 나는 구원됐다 땡 잡았다 그 모든 기대가 정작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은근히 노렸던 거에요. 절대자, 절대적인 존재.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내 힘으로 갈수 없는 천국을 누가 나를 위하여 천국에 좀 넣어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은근히 노린 게 있어요.


그럼 주님이 묻지요. “네가 왜 천국 왜 가야되는데?” “저는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는 가야 됩니다. 지옥에서 불구덩이에서 뜨거워서 못 사는 것은 내게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복을 받아야 마땅하고 나는 영생을 누려야 합당한 그런 권리와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럼 주님이 “어딜 봐서?” “그런 거 묻지 마시고요. 그런 거 묻지 마시고요.”


참 이게 오늘 본문에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다는데 이 병이 보통 병이 아니에요. 이 병이. 네가 왜 천국가야 되는데? 물으면 그런 거 묻지 마시고요 이게 보통 인간의 힘으로 못 고쳐요. 못 고친다고요. 이게. 서머싯 몸이라는 유명한 영국의 작가가 있어요. 노벨상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라는 책이 있어요. 1000페이지가 넘는 소설책인데.


거기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성장을 기록한 거에요. 스물 몇 살 때가지 쭉 기록한 건데. 그 소설에서 어릴 때 자기가 어떤 누구의 양자로 들어갔어요. 영국의 성공회 목사 부부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양자로 들어가가지고 있는데 자기 부모님은 상당히 훌륭하게 자기를 키워가지고 자기 다리는 하나는 절고 그렇지만 마음씨 착한 백부 아저씨죠.


큰삼촌이 데려다가 자기를 키워놨는데 주인공 빌립이 아주 총기가 총명해요. 총명해서 철저하게 그 아저씨는 자기를 양자로 들이면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킨 거에요. 그럴 때 신앙교육을 받게 된 잘 들어보세요. 신앙교육을 받게 된 인간이 자기를 키우신 그 백부, 백모 그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면서 정신적 성장기를 겪는지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자, 아버지 어머니는 신앙을 원해요. 하나님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 살아계시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그럼 자기 정신 내부에 그게 그득하니 흡수가 되겠지요. 흡수가 되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딴 건 다 괜찮은데 공부도 잘하고 다 좋은데 다리가 하나 저니까 성경말씀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어떤 말씀이냐 하면은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소설책에 보면 주인공 빌립이 아버지한테 물어요. 아버지한테 아버지 이게 무슨 뜻입니까? 과연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정말 산이 옮겨집니까? 라고 하니까 그 성공회 목사 그 사람은 인간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해요.


그러면 산을 옮기는 그 놀라운 힘이 필요한 기적보다도 약간 모자란 것을 기도하면 되겠다 싶어서 자기가 믿음 있다고 치고 방학 동안에 방학 끝날 때까지 자기가 기한을 정해가지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 앞에 제물이 되겠습니다. 기도제물이 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일부러 힘들게 기도하는 거에요.


힘들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불쌍히 여겨줄까 싶어서 이 불구의 다리 저는 이것이 내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니까 이 기도 방학 끝날 때까지 걷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해요. 일부러 악조건을 만들어가지고. 시간도 자기가 정했어요. 방학 끝날 때까지.


그런데 방학 끝날 때도 다리가 안 나았거든요. 자기가 시간을 또 정해요. 그럼 다음 부활절 때까지. 그래도 기도가 안 되니까 소설 주인공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는 믿음 없다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자기가 믿음이 없다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고. 지금 이 주인공의 잘못은 소설 쓴 사람도 모르고 거기 등장한 목사도 몰라요.


우리가 지금 이 본문을 보면서 뭐를 우리가 놓치고 있느냐 하면은 주님의 부재가 주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온전함을 부족함으로 전부 다 전환시킨다는 거에요. 주님의 부재가 모든 온전함을 불완전한 것으로 이것을 불완전함을 공급하는 겁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그냥 있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태어난 어린애처럼 자동적으로 우리는 완전을 추구합니다. 나의 완전을 추구해요.


완전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도 우리는 마다하지 않습니다. 십일조하라면 십일조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하고 모든 악조건을 하더라도 목표가 아주 거룩한 목표가 있어요. 내가 정할 수 없는 목표, 내가 존재하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 목표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리를 이 현실 속에서 뽑아낼려는 시도를 하는 거에요. 이렇게 이렇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아 마땅함을 뽑아낼려고 하는 거에요.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이미 완전을 추구한다는 그것을 인간은 어느 인간도 스스로 그걸 거역할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인간에게는.


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제자들. 제자들 집단 어떤 무리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내가 완전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추잡하고 더러운 구원 값도 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그걸.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이 그동안 살아가면서 모든 시도한 것은 노력한 것은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 없는 행동이나 생각이 없어요. 전부 다 뭔가 뒤에 담아놓는 게 실려놓는 게 있다고요. 나의 행동 속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는 상상하고 상상이 멈출 수가 없습니다. 상상. 인간이 상상하면서 발생 되는 게 자아입니다. 상상하면서 발생되는 게 자아에요. 자아의 특징은 뭐냐? 동일시한다는 거에요. 동일시. 뭔가 괜찮은 게 있으면 그걸 자기 것이라고 자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석을 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동일시’.


사춘기 소녀가 꽃을 보면서 왜 너는 나를 닮았어? 이 꽃은 꼭 나를 닮은 것 같애. 자기가 꽃이다 이 말이거든요. 그리고 꽃이 시들게 되면 그 꽃잎을 탁 다림질해가지고 펴가지고 교과서 725페이지에다가 그냥 넣으면 부서지기 때문에 문방구가면 해줘요. 100원주면 코팅해주거든요. 해가지고 특히 네잎 크로바. 그래 나는 행운아야. 왜? 세상에 3잎밖에 없는데 4잎 나왔으니까. 요즘 4잎 생산하고 있거든요. 공장에서.


네잎 클로바 옛날에는 생산 안 됐으니까 소풍가서 그것만 찾고 있어요. 소풍가서. 토끼 먹을 거 자기가 다 찾고 있어. 해가지고 자기의 완전성을 자기가 증명하는 것에 모든 것에 매진하는 겁니다. 대기업 한 열대번 떨어지니까 한 백번 떨어지니까 중소기업 가면서 절대로 그 중소기업에 거기에 몸 담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대기업에 가고 말거야. 가면 6개월도 못가서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사업합니다. 아버지 밑천 좀 주세요 이런 식으로 뛰쳐나오겠지만.


인간의 모든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시에요. 내 마음에 드는 것과 동일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드는 것과 동일시.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걸 아시고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실컷 기뻐해라. 금식같은 거 하지 말고 실컷 좋아해라. 그런데 그 기쁨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좋아할 때 이거는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 기쁨의 소지가 여지가 있어요.


뭔가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오해해서 좋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인간이란 존재는 모든 것이 오해로부터 시작해서 오해로 끝나기 때문에. 특히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것을 하나님이 나한테 주는 어떤 보상이라고 보는 거에요. 사는 것이 보상이 되기 때문에 죽으면 벌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사는 것이 보상이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연장되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하루를 살면 살수록 그게 다 죄가 돼요. 무슨 보상이 죄 지으란 보상이 어디 있습니까? 안 살았으면 안 질 죄를 하루 더 살았기 때문에 죄를 더 확대, 확산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함께 있다고 주님 때문에 저는 사는 보람이 있어요 주님 때문에 삽니다 할 때 그럼 내가 너희들 허락도 없이 오히려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너 자신에 대해서 내가 배척을 받거나 잃어버림을 당할 때, 신랑을 빼앗긴다고 되어 있거든요. 신랑이 빼앗기게 될 때 너희들은 신랑이 없는 그 상태를 가지고도 너희들은 너 자신의 완전을 추구할 그런 위인들이다 라는 겁니다. 신랑이 없을 때에도 야 고기 잡으러 가자. 신랑이 없어도 야 고기 잡으러 가자.


뭔가 결국 예수님께서 그냥 처음부터 같이 쭉 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같이 있어가지고 잃어버림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 내가 표준이 되어서 나 잘해주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께서 내 생각이 같이 때문에 주님은 나와 함께 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오해, 그 오해가 진실인 줄 알고 계속 붙잡게 되는 거에요 그게.


예수님께서 부재, 안 계심으로써 무엇이 온전인가 무엇이 완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이 온전함인가. 무엇이 온전함인가. 어떤 사태를 온전한 사태라고 너희들은 이야기를 하느냐 묻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뭐 코로나 물러나고요 날씨는 봄이 되고 벚꽃피고요 그런걸 염두해두겠지요. 그런 것은 네가 그걸 원했던 거고 네가 원하는 현실이 되어버리면 내가 당최 문제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걸 밝혀낼 수가 없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지금 원하는 목표가 뭐냐 하면은 신랑 붙들고 좋다고 잔치하는 네가 죄인이야 라는 것을 그걸 네 능력으로 그걸 알아낼 재주가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만 사랑해요. 예수님만 믿어요. 예수님만 좋아해요 그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네 실력으로 그걸 알아낼 수가 있어? 못 알아내지요. 인간은 다 끌어 모으니까. 아는 지식 다 끌어 모으니까. 많이 아는 것이 많이 나를 발전시키고 많이 발전하는 것이 온전함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기거든요. 더욱 더 온전하고 더욱 더 온전하고.


왜 그러느냐 하면은 왜 인간은 왜 주님께 방해되느냐 하면은 인간은 뭐하고 있느냐 하면은 지금 자기 존재를 알고 있거든요.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나는 존재한다 다른 말로 지금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고 보는 거에요. 살아있다고 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살아있는 것은 기본으로 먹어주잖아. 기본으로.


다만 살아있는데 좋게 살아있느냐 좀 모자라게 살아있느냐. 모자라면 채우면 되니까. 살아있는 것은 이것은 기본으로 있고 피자판에 밀가루는 있고 토핑을 뭐로 하느냐에 따라 어떤 피자가 되느냐. 어떤 피자가 되느냐 그런 것처럼 일단은 나는 무조건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여기에다가 어떤 정보를 여기에다가 지식을 담는 것에 따라 살아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부재, 부재정도가 아니고 아예 죽어버립니다. 죽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꾸 살아있는 자들과 교류를 합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가 계속 친구 바꾸고 애인 바꾸고 사람 바꾸고 다 바꿔요. 진짜 못 바꾸는 것은 아버지 엄마 형제. 마누라는 바꿀 수 있으니까. 남자도 바꾸고. 타고난 건 못 바꿔서 속이 천불나지요. 호적판다해도 안 파져요 이게.


계속 살아있는 것과 계속 바꾸거든요. 그런데 그 본인은 안 바꿔요. 기본은 넣어주니까 내가 일단 살아있는 이것은 변경 대상이 안돼요 이것은. 이렇든 저렇든 가난하든 힘들든 무조건 나는 살아있어야 돼요. 살아있는 내가 다만 좀 다리가 절룩거린다. 그럴 땐 방학 끝날 때까지 뭐해야 돼요? 힘들게 악바리 기도할 때 아버지한테 들은 거 있잖아요. 신앙적인 것. 겨자씨만한 믿음 있으면 산도 옮긴다. 산 옮기는 것까지 욕심 안내겠습니다. 그냥 다리만 좀 펴게 해달라 그걸 요구했지만 결국은 방학 끝날 때까지 안 고쳐졌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는 믿음이 없다고 한 거에요.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은 여기에 피자판에 토핑을 한 거에요. 믿음을. 믿음, 소망, 사랑 좋은 거 다 토핑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판단은 누가해요? 피자판이 판단한 거에요. 내가 판단한 거에요. 내가. 판단하고 다른 걸로 다른 지식으로 교체해요. 인간의 굴레라는 책을 보면 다른 걸로 미술도 하다가 어떤 여자도 사귀다가 계속 다른 길로 살아있는 인간들은 살아있는 것만 붙드는 겁니다.


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경우를 가진 사람과 사귄다든지 돈이 있다든지 멋있게 보인다든지 40대 되가지고 뱃살이 나온다. 필라테스 가가지고 보면 전부 다 필라테스 보면 모델 나오잖아요. 6개월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폼 잡고 해가지고. 허리 개미허리처럼 되는 것 보고 자기가 자기를 노력해서 바꾸는 거에요. 토핑하는 거에요. 피자판에다가 계속 토마토소스 하다가 다른 거 하다가 계속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너는 죽은 자와 바꿔야 된다. 너는 죽은 자와 바꿔야 된다. 산 자와 상대하지 말고 죽어버린 자와 상대하라.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고 너 때문에 죽은 자와 너 때문에 너의 고집 센 절대성 때문에 죽어버린 자와 바꿔치기 해야 돼요.


이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 앞에서 산 자나 죽은 자나 마찬가지에요. 산 자나 죽은 자나 둘 다 죽은 자에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나이 들면 죽을 거니까. 주님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살아 있다가 아니라 죽어 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관심사는 저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을 어떻게 자기의 바닥, 나는 죽었다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느냐. 인간이 죽게 되면 인간의 뭐가 죽어요? 상상력이 죽게 되지요. 인간이 죽으면 상상을 할 수 없잖아요. 상상력이 죽게 되게 되면 동일시할게 없잖아요. 동일시. 나 저 사람처럼 될래. 저 부자처럼 될래. 동일시할 게 없지요. 할 게 없으면 이 현실 자체가 일방적으로 나를 위한 현실의 관계가 다 끊어지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죽음이란 인간이 되는 조건이 붕괴되는 것. 이게 죽음이에요. 내가 산 인간이 되는 조건. 산 인간이 되는 조건이 붕괴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자살은 그 결과죠. 내가 나로 사는 거에요.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지장이 되가지고 더 살 이유가 없는 것,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럼 살아있는 사람은 다 기쁘게 살지 않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다 기쁘게 산다고요? 그것은 현실이 자기 상상력과 아직은 일치된다고 착각할 수 있는 여건들이 있기 때문에 골라 골라 아이스크림 31가지 골라 골라. 만약에 베스킨라빈스에 31가지 있잖아요. 만약에 31가지만 내놓고 32번째 33번째 안내놓으면 그 가게 안 갑니다. 왜? 맛을 한 번씩 다 봤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아직 골라 먹을 게 남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에요. 토핑할 게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조건으로 바꿀게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 있는 내 조건 다시 말해서 나는 미남이다 몸이 건강하다 이렇게 하는데 갑자기 사고나가지고 갑자기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식물인간인데 의식이 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식물인간이 골치 아픈 거죠. 정신도 나갔으면 좋았을텐데. 정신은 멀쩡한데 자기 신체 보니까 자기가 상상한 신체가 아니잖아요. 나이 들면 다 그래요. 나이 들면 생각도 단어도 안 떠오르고요. 말도 요한복음인데 나는 로마서 이야기하고 그런 실수.


그러니까 이게 기력이 쇠하고 하게 되면 엉망진창 사는 게 엉망진창이에요. 아침에 오이비누로 세수하고 나와도 할아버지 냄새나. 할아버지 냄새난다고 손자, 손녀가 밀어낼 때 내가 왜 사나 싶은데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상상해본 거에요. 할머니 냄새나는 거 같애요. 미나리에 나오는 윤여정 대사 그런 게 있어요. 밀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인네들은 뭐냐? 뭐와 동일시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과거와 동일시해요. 내가 소녀 때 잘 나갔고 내가 젊을 때 잘 나갔다고. 맨날 과거 이야기해요. 노래도 흘러간 노래. 틀어놓고 팝송. 창이 넓은 카페에 앉아가지고. 겨울의 찻집. 조용필 노래 들으면서 지금 노래는 하나도 몰라. 옛날의 내가 나로서 행복했던 그 시절을 계속 우려먹는 겁니다. 우려먹어요.


CD도 아니고 LP판 틀어놓고. 치칙 그 소리가 좋다는 겁니다. 그 때 대학로에서 잘 나가다 데모하다가 맞고 계속해서 되새기는 것은 붕괴되기 싫어서예요. 붕괴. 나의 나 다움이 싫은 거에요. 그런데 구약 율법에 뭡니까? 율법에서 나로 하여금 모든 인간 조건은 나를 버티게 하는 인간 조건이 저주에요. 이래서 너는 저주 받아야 돼. 죽는 정도가 아니고 저주받아야 돼요. 곱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율법에는 뭐가 있다? 저주가 있어요. 심판이 있다고요. 징벌이 있어요. 너는 그 징벌 대상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죽음은 곧 부정함이다. 부정한 것. 더럽다는 거에요. 너는 더럽다. 구약입니다. 구약의 율법이기 때문에 너는 더럽다. 신약의 오늘 본문에서는 너는 병 들었다. 너는 병 들었다에요. 네가 병 안 들었다면 그럼 내가 필요 없겠네. 그런 뜻이에요. 나는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그런데 네가 병이 안 들었다고? 그럼 나는 필요 없겠네. 네가 병 들었다는 증거를 대볼까? 네가 나를 배신할거다. 네가 나를 싫어할거다.


그게 인간은 하늘의 태양이 둘이 없듯이 나야? 너야?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인간은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그 지시대명사를 잘못 사용한 거에요. 인간은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이 너라고 하는 것은 뭐냐? 저기 누가 있다고 너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관계가 무관한 관계가 될 수 있거든요. 저기 있는 사람이 나와 관계있을려면 관계있는 너가 될려면 내말을 들을 수 있는 관계가 너라고 하는 겁니다. ‘너’.


‘너’라는 것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 너에요.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다 ‘너’가 아니에요. 내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너’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내 말빨이 성립이 돼요. 내 말빨이. 만약에 내 말 안 들을 거 같으면 갈라서 헤어지는 겁니다. 더 이상 ‘너’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이 ‘너’라고 하는 것은 누가 생산한다? 나의 절대성이 생산하는 겁니다. 나의 절대성이.


그러니까 이것은 ‘너’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쏘아댄 내 말에 대해서 그걸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너이기 때문에 사실은 나1이라면 너는 뭐냐? 나2가 되는 거에요. 집안에 4식구가 있으면 4식구가 모두 다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나의 아버지로 봐요. 이게 오해 아닙니까? 이게 오해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내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그림에 그런 거 있잖아요. 아버지가 내 뜻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어린애가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지옥가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거. 이 말은 지옥 보내달라는 거에요. 내말 듣지 않는 아버지 같으면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와 너의 경계 바깥에 있는 것을 경멸이라고 합니다. ‘경멸’. 아주 얕잡아 보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경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의 세계에 포함된 너 빼놓고는 항상 경멸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저쪽을 경멸해야 상대적으로 내 기분이 up 돼요. 기분이 좋아진다고요.


그래서 연예계에 있는 어떤 유명인사들은 꼭 이렇게 집구석 망해야 돼. 그래야 기분이 좋아. 기분이 좋아요. 기성용 망해야 돼. 그래야 기분이 좋아. 기성용 초등학교 학폭해야 돼.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으면 안돼요.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절대 있으면 안돼요.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송이 나와야 돼요. 이 찬송이.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야 돼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이건 못 고칩니다. 고칠 수 없어요. 어떤 노력을 해도 못 고칩니다.


그 고치는 방법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내가 죽을게. 이 방법 외에는 없어요. 네가 그렇게 존재 붙들고 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으마. 내가 꺼져줄게. 그냥 꺼져주는 게 아니고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꺼지라고 할 거에요. 죽으라고 할 거에요. 그게 신랑이 스스로 은퇴하는 게 아닙니다. 빼앗기는 거에요. 지금 이 사태를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순서를 이야기하지요. 신랑 있을 때 좋다. 왜 좋으냐 하면 지금 세리 레위가 기분 좋았어요. 기분 좋아서 잔치를 벌렸거든요. 예수님이란 유명한 분이 자기를 알아줬다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 잔치를 벌리니까 예수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와 함께 있는 혼인식이라고 이야기해놓고 빠지는 게 있다. 결정적이죠.


지금 기분 좋지? 그런데 기분이 왜 좋을까? 기분 좋은 네가 이유를 알아? 신랑과 함께 있는 사태가 제대로 된 사태냐? 아니면 신랑이 빼앗기는 없는 부재하는 사태가 제대로 된 현실인가? 이 현실은 어떤 사태로 중심으로 돌아가는지를 이제 너희들은 지켜봐야 되는 거에요. 그걸. 너희들은 뭘 하느냐? 상실의 일반화를 그들은 겪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구약 때문에 그래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네가 너답게 되는 조건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내가 전한다. 뭘로? 그 조건이 뭐냐? 율법이에요. 네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그냥 죽는 정도가 아니고 너는 더럽다는 겁니다. 더러운 자에게는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아요. 더러운 자에게는 더러운 값을 해요.


그게 뭐냐? 저주에요. 저주를 퍼붓는 거에요. 반면에 네가 율법대로 살면 율법의 너의 존재의 조건이 된다면 너 존재는 그냥 산다가 아니라 복 받는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이 제시한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뭐냐? 나 하나 있고 율법이 주어진 거죠. 그러면 그 찾아온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요청한 거에요? 아니면 하나님이 알아서 이스라엘에게 율법 가지고 앞장 세워서 덮친 거에요? 덮쳤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누가 ‘나’가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가 될 수 없지요. 누가 ‘나’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지요. 그게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이름이에요. 너 말고 여호와의 이름이 주인이 되지요. 그럼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뭐냐? 우상을 누가 선택했느냐? 우상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택했지요? 우상을 선택했다는 말은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고 그럼 우상을 믿는다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우상 앞에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섬기잖아요.


그럼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 자기를 위해서 삼위일체 하는 것 이게 다 뭐에요? 그게 바로 우상 아닙니까? 그게 저주받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저주를 받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환자 위해 왔는데 본인은 환자 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에요. 환자 될 생각이.


이 모든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은 상상과 상징을 이게 동일시해서 그래요. 이 현실을. 이게 잘못된, 어긋난 만남이에요. 어긋난 만남이에요. 인간의 자아 뒤엔 악마가 있고 악마가 손을 내밀 때 악마가 만들어낸 인간이 손을 내밀 때 주님이 손잡는 게 아니고 악마와 손잡았는데 자기들은 나를 위해줬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내가 나를 위한 ‘너’가 할 때 ‘너’가 반응을 보였다는 이유 때문에 그 자기 손을 잡아준 걸 예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의 구세주라 생각하는 거에요.


실은 내가 내 방식대로 나를 구원했는데. 성경 핑계대면서 성경에 어느 아는 지식 있어 가지고 주께서 창세전부터 택해서 예정해서 온갖 들은 풍월 다 이야기해가지고 주께서 나를 구원했다는 거에요. 자기는 멀쩡하게 있으면서. 자기는 내가 되는 조건을 붕괴당하지 않고 있으면서 무슨 엉터리같은, 그게 예수가 되겠어요?


예수님은 좁은 길을 언급했지요. 좁은 길. 좁은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좁은 길이 파멸의 길이에요. 파멸. 파멸의 길입니다. 아무도 고대하거나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않는 길이 좁은 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좁은 길이 있다? 없다? 아예 없어요. 아예 좁은 길이라는 아예 없어요. 좁은 길로 가면 영생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좁은 길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까 빌립이 맨땅에 차가운 바닥에서 기도하면서 그 순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보고 하나님 이제부터 내가 부르는 ‘너’가 되세요 라고 제 기도를 받아주고 제 믿음을 받아달라고 내 쪽에서 부탁하는 거에요.


참 이게 구약 이야기 다시 합니다. 구약에서 시체는 부정하다. 시체는 부정한 거에요. 시체는 왜 부정하느냐 하면은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죽을만해서 죽은 거에요. 더럽기 때문에 죽은 거에요. 하나님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체 양보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에요. 더럽기 때문에 죽은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늙어 죽지요. 평생 살아온 게 무슨 짓했다? 죽을 짓을 했다는 거에요. 더러운 짓만 했다는 거에요. 여기 토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인간들은 한술 더 떠서 죽으면 되는데 더러우면 되는데 자기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하니까 더러운데다 더 더러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곱게 죽으세요. 이게 안돼. 우리는 이게 안 된다고요. 그럼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죽은 자니까 그냥 죽으세요 해서 돌아가라는 사태가 현실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5장 35절 (부재의 온전함) 210302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처음부터 혼자 십자가 지고 나 십자가 졌다. 내 피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하지 않고 함께 있는 거에요. 처음에 함께 있어요, 함께 있을 때 함께 있는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죽게 된 그 사태 안에 그들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가 십자가를 통해 다 까발립니다.


십자가 지셨다 하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의 사적인 개인적인 일로 보이지만 십자가가 터짐으로서 세상 모든 일이 모든 인간들이 하나같이 무관한 인간들이 아무도 없었다를 계속 십자가가 전하는 현장에서 계속 터져 나오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그냥 자살한 게 아니고 맞아죽었다고 했잖아요. 맞아죽었다고. 그냥 맞아죽은 게 아니에요. 경멸당하죠. 모욕을 당한 거에요. 조롱을 당한 거에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 자신이 영적 세계를 모욕한다고요. 돈도 안 되는거 내가 왜 믿었나 미쳤지 이런 식으로요. 끊임없이 올라와요. 끊임없이. 돈도 안 되는 것.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 그 복음 알아서 내가 그거 괜히 알았어 왜 알았지 라고 남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수시로 쉬지도 않고 올라오고 있어요. 쉬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뭐가 구성되느냐 하면은 내가 아는 나와 십자가의 분란한 사태를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나. 이 ‘나’가 두 종류의 ‘나’로 이게 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에 성경해석은 분류다. 내가 만약에 성경해석을 분류하게 되면 나는 필히 천국 가는 사람으로 기정사실화시켜서 분류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성경해석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분류를 시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를 시켜버려요.


여기에 인간은 어떤 인간도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또는 내 뜻을 반영해주세요라고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그 사전에 철저하게 나에 의해서 예수님이 경멸당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에 의해서. 내가 조금도 원하지 않는 인물상. 조금도 원하지 않는 분. 내가 너라고 지목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에요. 예수님은.


그걸 성령 받아서 예수님한테 지목당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아요. 나는 주님을 지목한 적이 없다는 사실. 나는 주님을 원한 적도 없어요. 그걸 쉽게 말해서 내 타입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내 타입이 아니다.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다. 나 같으면 당신 지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을 지목하는 것은 내가 구상하고 있던 나의 절대성에 당신은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 잔치에 같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좀 나아보이지요. 바리새인보다 좀 나아 보이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나 둘 다 부재의 사태가 현실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없는 세상이 바로 현실을 설명하고 현실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 잡지 못하고 있어요. 예수님 없는 세상이.


베드로가 인간됐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없이 그들끼리 모였을 때 그 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올 때.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 이야기를 안 해요. 베드로 네가 날 사랑하잖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요로 해봐라.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했잖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했잖아요. 주님이 나를 필요로 했잖아요.


주님이 ‘나’가 되고 나는 주님 앞에 ‘너’가 됐잖아요. 그전까지는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저주했잖아요. 저주했지요.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수제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나는 저주하기를 원한다는 하는 그 발언이 꼭 필요한 거에요. 그게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리의 본성상, 우리의 본성상이라고 하면 에베소서 2장에 진노의 자식, 본성상 우리는 진노의 자녀죠. 우리의 본성상 파멸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제일 겁나는 게 있다면 우리의 몰락이에요. 우리의 몰락. 나의 몰락. 달의 몰락이 아닙니다. 나의 몰락이에요. 내가 몰락되는 것.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손들고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기쁨은 뭐냐 하면은 자기 몰락한 것을 잊어볼라고 아니야 아니야 나는 절대 몰락한 게 아니야 라는 방법 중에 하나가 타인을 나에게 ‘너’가 될 수 없는 그 대상자를 경멸함으로서 상대적인 기쁨을 얻고자 하는 거에요. 상대적인 기쁨을. 지금 그런 심보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세리라는 것은 지옥 갈 인간들이거든요. 돈만 챙긴다고.


돈만 챙긴 그 세리, 레위를 주께서 자기 사람으로 삼을 때 뽑았을 때 제자 삼았을 때 이것은 제자나 바리새인이나 양쪽 다 오해의 소지가 진짜 새롭게 시작되는 거에요. 오해가 시작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주님이 나를 알아준다는 것과 주님은 우리로부터 경멸받을 지금 그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바리새인들이 지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완전무장 했거든요. 율법으로 왜 완전무장했느냐. 율법으로 사람의 말씀으로 율법으로 특히 그 네비게이토 맨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자기가 몰락했다는 것을 증명해 내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라고요. 성경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바리새인 되는 거에요. 분류를 할 때 자기는 먼저 챙기고 천국으로 챙겨놓고 하는 거에요. 천국부터 먼저 챙기고.


여러분들이 애 있는 아주머니들 화투칠 때 보세요. 화투칠 때 여러분들은 신자니까 화투 못 치잖아요. 화투칠 때 보세요. 아주머니들끼리 화투치고 있으면 아이가 와가지고 엄마 돈 하면 자기 판돈 먼저 챙기고 애 주고 이 판돈으로 치죠. 일단 판돈부터 챙기고 보는 거에요. 내 것부터 먼저 챙기는 겁니다. 손해 보는 장사 안 하잖아요 인간은.


교회 나가는 노동만큼 예배드리는 노동만큼 그러한 보상으로 내 인생이 더 길어지기를 그것도 윤택해지기를 건강하기를 은근히 고대한다고요. 이것은 결코 자신의 몰락이나 자신의 파멸이나 자신의 부재를 고려하지 않는 인생 태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가 아직도 왜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십자가 안 지시고 신랑 죽었다 이렇게 죽은 신랑 믿어라 하지 않고 왜 같이 기뻐한다고 해 놓고는 잘 기뻐하면 되는데 계속 모여서 기뻐하면 되잖아요. 왜 신랑 빼앗기는 사태가 왜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도 이야기한 것 같아요. 이 자리에서도. 그게 뭐냐 하면은 수건돌리기 게임입니다.


나의 자리가 술래가 된 내 자리가 빙 둘러서 수건돌리기 할 때 수건 돌리고 난 뒤에 내 자리가 어디가 되겠습니까? 내가 수건을 던져놓은 그 사람의 자리. 이 빈자리잖아요. 내 자리는 없어요. 천국에 내 자리는 없습니다. 주께서 자기 자리를 빼주는 거에요. 빼줘 가지고 자기는 저주의 자리로 와버려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자꾸 산 사람은 그 인간이에요 그 인간. 똑같은 인간을 바꿔치기하는 거에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남자를 7인가 바꿨다고 해요. 계속. 계속 바꿔치기 하지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죽은 자와 바꿔치기하는 게 없어요. 왜? 죽음은 내가 없어지잖아요. 내가. 내가 없어진다면 내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없는데.


모든 인간의 활동은 의미를 나의 잘남을 증명해줄 의미를 얻기 위해서 돈을 번다든지 무슨 돈을 안 벌면 봉사를 한다든지 희생을 한다든지 예수 믿는다든지 이 모든 것은 그 주체가 되는 나에게 의미가 되기 때문에 하거든요. 그런데 나한테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그 짓을 할 위인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를 부른 거에요. 세리를.


역시 세리도 기존의 인간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지요. 세리를 불러놓고 그 12제자, 12제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그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사랑을 받고 결국은 어떻게 망해버리느냐. 그 절차를 구약 이스라엘이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신명기 26장 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자, 오늘 강의 들은 것을 여기에다가 대입하고 적용시켜 봅시다.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학대하며 히브리인들이죠. 히브리인들 학대했죠. 학대할 이유는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제시한 게 없어요. 그냥 학대당했어요 그냥. 그냥 학대한 것은 너는 죽어도 싸다 이런 겁니다. 실제로 애굽 히브리인들의 아들들은 다 죽었고요. 딸 낳으면 살려주고 아들 낳으면 죽였잖아요. 학대당했다 이 말이죠.


일 시킬 때 살라고 일 시키는 게 아니고 죽으라고 일 시키는 거죠. 마치 러시아혁명 이후에 중국의 대문화혁명 때 부르주아들은 일 시키는 것이 개 같은 사람 일 시키는 게 아니고 죽일 때 그냥 죽여 버리면 노동력이 아까워서 일시키고 죽이겠다고 노동시키는 거에요. 그 당시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의 소위 여호와의 백성 히브리인들이 당한 수모가 어떻게 좋게 해보겠다는게 아니에요. 소모시키기 위해서 학대를 당한 겁니다.

 

그럴 때 그 히브리인들은 교체할 인간이 없어요. 교체할 인간 같으면 인간한테 부탁하지요. 청와대에 부탁한다든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한다든지. 아무 부탁할게 없어요.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너’라고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한테 이야기했는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르짖었지요.


이제 어렵습니다. 이게 어려운 거에요. 히브리인이 있는데 히브리인들이 멀쩡할 때 여호와 불렀습니까? 안 불렀습니까? 안 부르지요. 뭔가 쪼아대는 게 있는 거에요. 쪼아대는 게. 압박이 있는 거에요. 압박이. 억압이. 억압을 한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억압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에요.


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중개매체 아니면 일을 안 해요. 언약적 이야기를 안 한다고요.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기 때문에 약속을 주고 그 약속을 이루는 방법으로 일체 인간의 공로가 여기 스며들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귀찮더라도 한군데 보고 넘어가봅시다. 신명기 9장 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의로움이 아니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줌은 너의 의로움이다? 아니다? 분명히 너의 의로움이 아니죠. 그럼 의로움 빠져야겠죠. 주께서 이끄는 과정 속에서 뭐가 빠져야 돼요? 자기 의로움이 빠져야 되겠지요. 나는 노렸다 이런 게 빠져야 된다고요. 네 의로움이 아니요. 너의 마음의 정직함도 아니요.


그러니까 정직함이 아니라는 증거를 광야 40년 동안 충분하게 충실하게 이게 드러나야 되는 거에요. 이런 게 어렵다니까요. 이게. 하나님이 구원했기에 나는 하나님께 반항한다는 이 모순적인 멘트가 문장이 성립되야 돼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했기에 나는 하나님의 발 정강이를 찼다 이런 거. 앙탈부렸다. 땡깡부렸다 이게 돼야 된다고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죽어야 돼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죽지요. 어린아이가 죽어야 됩니까? 어린아이라는 단지 그 특권상 안 죽어야 되는 겁니까? 죽지요. 문제는 인간들이 어린아이 죽는 이유를 그들의 살아온 사고방식에 의해서는 찾아낼 수가 없어요. 왜?


죽는다는 것은 죄를 지은 벌에 의해서 죽어야 되는데 어린아이가 죽으니까 어린아이는 죄 지을 시간이 없어요. 그 말은 어린아이의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은 평소에 그들은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지금 인정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뭐 인간에게 어린아이 따로 어른 따로 어디 있습니까. 다 죽을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자기가 죽어야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죽을 때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의로움이 없어서 죽고요 맘이 정직 안해서 죽어요. 아까 살아있는 게 보상이라고 했지요. 살아있는 만큼 죄를 지으니까.


그러니까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생 사는 것이고요, 내가 이래서 의롭지 않고 의롭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살려줄 하등의 천국 보내줄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증명한다는 그 마음 자세가 하나님의 언약이 된다니까. 그게 언약 안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리고 5절 끝에 보면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다시 신명기 26장 봅시다. 보세요. 얼마나 신기합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학대를 당하게 했다는 말은 누가 쪼아댔다는 말이에요? 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밀어부친 거에요. 학대당하라고.


학대가 없으면 그들은 자기 잘남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거에요. 그러나 그게 아니고 학대당할 때에 그들은 이 세상의 같은 인간들에 의해서 주변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일체 기대를 안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은 날 학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의지할 곳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궁지로 몰아넣지요. 이게 뭐냐? 나의 파멸이고 나의 붕괴에요.


다시 죽음이라는 것은 뭐라고요? 내가 나답게 되는 모든 조건이 다 붕괴되는 것이 죽음이에요.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닌 인간이 뭐 살 재미도 없고 뭐 살 목적도 모르겠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미 그건 죽은 거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되고 싶은 모델을 자기 주변에서 못 찾아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애들은 그러잖아요. 나 엄마한테 실망했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터 친구 만나겠다 이런 뜻이죠. 가족에서 존경대상이 없어 질 때는 서서히 이제는 친구 찾아다닙니다. 친구도 모자라면 이제 채팅하는 거에요. 인터넷에서 채팅하는 겁니다. 엄마하고는 단절, 문 잠궈 버려요. 안에서 게임하고 있어요.


왜?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승리잖아요. 빈체로~~~승리하리라. 내가 기어이 승리하리라. 펜트하우스인가? 기어이 승리하리라. 승리하는 거에요. 얼마나 승리할게 내세울게 없으면 게임에서 성취감을 얻겠습니까? 사는 보람을 이유를 찾겠습니까. 얼마나 다른 면으로 성취감이 경쟁성이 있는 것, 생산성은 승리가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도박하고 나중에 마약하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기 주셨다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그 땅은 히브리인들에게서의 존재하는 것을 아는 땅일까요. 부재한 땅입니까? 없는 땅입니까? 없는 땅이죠. 그래서 천국은 인간에게는, 인간 세계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와 동일시되는 천국은 그걸 조작해낸 거에요. 교회가 조작해냈지요. 교회가. 잘난 나를 들어갈 나라를 인간들은 성경말씀을 구절들을 동원해가지고 상상한 거에요. 상상한 겁니다.


뭐 이리와 소가 함께 있고 그게 전부 다 상상한 거지요. 이사야에 그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모든 언어는 해석자에 의해서 조작이 되어버려요. 해석한 순간 조작이 되어버린다고요.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조작이 된다니까요. 동일한 언어, 천국이라는 언어를 인간이 그걸 채용하느냐 바리새인이 채용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그 천국을 이해하느냐 완전히 다르지요.

 

세례 요한은 이 천국을 어떻게 봤습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뭐로 현실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 현실에 없는 세계가 다가온다는 뜻이에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자, 현실은 뭡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현실은 내가 내 절대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구상한 그 세계가 현실세계에요.


나는 북한 김정은 안 좋아. 그건 재끼고. 나는 서울 시장 누구가 좋아.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미 서울시장 후보감 누가 있다는 것이 그 사람한테는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싫어하는 김정은도 현실의 일부에요. 왜? 본인이 분류를 하니까. 내가 맘에 드는 사람과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분류체제 내가 아는 현실체제에요.


아빠 엄마가 서울시장 후보감 나는 누구 좋다 누구 좋다 할 때 그 어린애들도 너는 이번에 투표권 없지만 서울시장 나오면 누가 좋겠어? 물으면 애들은 엄마 나 몰라 아빠 나 몰라 나 관심 없어 이렇게 하잖아요. 아주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는 지구의 공전을 생각하는 애 같으면 모르지만. 보통 애들은 그거 생각안하지요.


쟤는 뭐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고 자기 현실이 뭔지도 모르겠어 하면서 우연히 가다가 강아지를 툭 발로 찼어요. 엄마 뭔데 왜 내 강아지 차!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그 강아지가 아이들의 범주 내에 그 지평 내에 지형적인 자기 영역이었어. 그 애가. 서울시장이 누구냐가 아니라 나는 어느 개가 좋아. 어느 강아지가 좋아. 그게 자기 영역이에요. 그게 자기 현실이에요.


왜? 내 개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해. 그 분류에요. 그 분류. 그 개한테 그 아이는 너라고 불러. 너라고 부를래. 누나라 부르지 않고 너라고 부를래. 이제는 누나가 아니고 너라고 부를래. 이승기가 그랬나. 그게 자기 아는 세계 전부에요. 자기 아는 세계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공부한 만큼 영역은 넓어지고 좁아지고 있지만 그 지평은 뭐냐? 다 어디서 일궈낸 거에요? 주님이 자기의 부재를 증명하면서 일궈낸 그러한 일거리들을 가지고 인간들은 자기 것, 이건 네 것, 이건 내 것이라고 긁어 모아놓고 현실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에요.


주님이 나는 제자로 받았어. 아~ 신나. 나는 주님 있으면 최고야. 나 같은 죄인을 세리를 자기 제자로 받겠다는 주님은 나한테 최고. 이게 바로 레위, 제자들의 한계지요. 그 기쁨이 수상한 기쁨이다 이 말이죠. 뭔가 이상해. 아까 수건돌리기 이야기했지요. 수건돌리기 이렇게 할 때 자리가 꽉 찼어요. 꽉 찼는데 예수님께서 이 자리를 없애줬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 아무도 안 앉지요. 자리만 있을 뿐이지 아무도 앉아있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를 빼고 이 자리에다가 성령을 주셔서 자기 제자를 여기 꽂아놓습니다. 꽂아놓으면 이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요. 부재하는 자리에요. 없는 자리란 말이죠. 없는 자리니까 소위 살았다는 사람이 볼 때에 이 인간은 뭐냐?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 자리를 없는 자리라고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그 없는 자리를 없는 자리라고 하지 않고 사도 바울은 이 없는 자리를 없다고 하지 않고 이게 십자가 자리라고 보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내가 예수님을 믿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요.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그런데 성령 받고난 뒤에는 십자가가 내 자아가 있던 그 자리에 십자가가 대체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안이라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내가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하는 거에요. ‘십자가 안’.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 안에 있다는 거에요. 왜 사건이냐?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건이죠.


인간들이 인간 세계에서 가장 큰 오해가 뭐냐? 내가 존재한다는 게 오해입니다. 존재라는 말을 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살아있을려면 존재할려면 한결같이 있어야 돼요. 우리 자신은요 현실에 요동침에 따라서 우리가 그때그때 달라져요.


왜냐하면 현실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은 그 다음부터는 내가 골라잡는 내가 동일시하는 대상들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바뀐 내가 어제 내가 내가 아니라 오늘 내가 붙잡지만 오늘 내가 시효가 오늘까지 내일 되면 또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게 또 바뀌기 때문에.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술 먹은 거 같애.


개라고 욕하지 말라고 해놓고 술 먹어보세요. 개처럼 길에다 오줌 싸지요. 그래놓고 그때는 술김에 했다. 술김에 했다는 거에요. 잠시 정신 돌았어 그때는. 너는 정신 멀쩡한 적이 없었어. 무슨 정신 온전한 게 어디 있어요. 왜냐하면 온전한 정신이 될려면 한결같은 ‘나’가 구축될 때 온전한 부사가 붙어야 되는데 수시로 달라지는데요. 이게 무슨 온전합니까. 수시로 달라지는데.


사람이 50이 되면 뭐 인간이 안정적이 된다고요? 북한에 김정은한테 비벼대는 인간 전부 50 다 넘었어요. 아이고 뭐 사람이 사회생활할려면 환경에 따라 적응해야지. 적응해야 된다는 거에요. 적응하는 자가 누군데요? 적응하는 자가 누굽니까? ‘나’가 아니에요. 현실의 압박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만드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악마의 자식들 너는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어야 한다고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거고 제자들은 너는 이들과 같지 않고 여기서 네 자리가 죽은 자리로 내 자리를 대체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죽게 된 그 사건의 반복성에 의해서 사건의 무한루프, 되풀이됨으로서 그 사건이 되풀이됨으로서 내가 자아가 아니라 십자가가 내 자리를 꿰차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는 어떤 존재가 아니고 어떤 기능이에요. ‘십자가 기능’.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음을 십자가라는 형태로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육신을 사용하시고 그걸 활용하고 있는 거에요. 내 육체를. 그래서 늙어 죽어가면서도 기뻐요. 왜? 마땅한 일이니까. 아니 뭘 해도 마땅해요. 뭘 해도. 뭘 해도 마땅하고 뭘 해도 당연해요.


늦게 와도 마땅하고 당연하고. 뭘 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두 살 먹은 애가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죽은 애 보고 곧 숨넘어가는 애 붙잡고 너는 네 죄를 알렸다. 네 죄가 죽을 죄인 것을 자고해라 하면 그럼 애가 나 죽는 것이 마땅해요 이러면 뭐 그게 정답이죠. 왜 우리는 그 애처럼 왜 순수하지 못하냐 말이죠. 뭐 순수하다고 천당가는 건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본인이 그 사람을 자기 제자를 선택해 놓고 그 뒤에 일어나는 모든 줄거리는 뭐냐 하면은 오히려 우리의 조치로 대체시킵니다. 네가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어떤 선택을 해도 다 봐줄게. 기억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이 처음에는 역시 우리가 예수 잘 믿었어 이렇게 되잖아요. 나중에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내가 잘 믿은 게 아니고 내 자리가 주님의 자기 고백이 터져 나오는 자리로 우리를 기능화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신은 누가 선택한 겁니까? 주께서 아까 봤지요. 주께서 압박한다는 신명기 26장에 압박했잖아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압박하는 그 압박이 구약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압박하고 나중에 신약되면 예수님의 압박으로 아버지가 나를 압박하는 것으로 보지만 우리는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주님이 압박당하고 그 다음에 구약하고 동일하게 주님이 압박당한 것을 내가 압박당한 것으로 대체해서 주님 자신을 증인으로 증거자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죠. 따라서 우리의 삶이란 것은 예수님이 부재하면서 당했던 그 슬픔을 공유하는 겁니다. 슬픔이란 공유지요.


자, 오늘 본문에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결혼식을 보면서 신랑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이 뭘 느꼈습니까? 보통 신랑에 대해서 신부가 몇 명이에요? 결혼식 때? 신부가 이렇게 5명 나오면 4명은 들러리 아니야? 오해할 정도로 신부 5명 그런 거 없지요? 나중에 부주낼려고 하면 5명 중에 어디에 낼지 복잡해져버려요. 오늘 보면 신랑은 하나라고 부각을 하는데 신부가 한명이 아닌 거 같아요. 신부가 한명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공동체험을 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이 부재한 그 슬픔, 아픔을 그리스도가 십자가달릴 때 그 때 그 당시의 그 슬픈 체험, 신랑을 잃어버린 그 체험을 공유할 때 이것이 바로 제자군이 되는 겁니다. ‘제자군’. 이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도들이 되는 거에요.


성도와 성도 만나면은 예수님의 부재했던 그 슬픔과 아픔이 기반이 된 채 성도가 만나야 되고 성도가 교제가 되야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게 뭐냐 하면은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 9명 낳았다고 그게 식구가 아니거든요. 애 9명 낳았다고. 생판 몰랐던 사람들도 복음가지고 이렇게 하게 되면 혈육의 가족은 족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 그리스도가 교류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혈육을 능가한 성령의 본드, 성령의 이음새가 교통하고 있어요. 특징은 뭐냐 하면은 바로 나의 절대성 때문에 주님께서 당했다는 것. 인간의 본능상 내가 안 뭉개질려고 붕괴되지 않고 내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신을 찾다보니까 주님은 내가 찾는 대상에서 누락이 되는 거에요. 자꾸만 누락이 되는 거에요.


나의 동일시할 수 없는 잘못된 만남, 어긋난 그걸 전문용어로 ‘삑사리’. 모든 언어가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어요. 지적하는 내가 다른 ‘나’가 되니까. 매일같이 흔들리니까. 우리는 그때그때 변명과 핑계만 있을 뿐이지 진리는 없어요. 다 나를 잘난 체하기 위한 그러한 핑계들만 구실들만 모아 모아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보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자리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빠져버린 그 자리, 이 세상에 없는 자리에 같이 한 식구가 되는 거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리. 나를 위한 현실화가 될 수 없는 현실화 대상이 되지 않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에요. 따라서 나는 이 세상에 있지만 천국에 나는 없어요. 그러나 천국에서 나는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옥 갈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천국에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이 말은 나를 위한 공간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 허용해 주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주께서 자꾸 어떻게 조용히 살 수 없게 만들어요. 내 잘난 맛에 내 기쁨으로 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어떤 변화같은 게 자꾸 일어나요. 아까 그 이스라엘이 될 때 학대받는다고 했지요. 사람이 나를 잊지 못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원인이 세상이 그렇게 각박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니고 없어야 될 내가 주께서 치워버린 내 자리를 내가 꾸역꾸역 나 다움의 내 자리를 억지로 만들려고 하니까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게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또 뜻대로 됐다고 좋다고 까불다가. 좋다고 까불다고 그 좋다고 까부는 그 기쁨 그 행복 그거 지킬려고 하니까 또 공포와 불안이 또 찾아오네요. 내가 어제만큼 참 좋았던 시절이 어디 있어나 하는 순간 점점 불행해지는 거에요. 어제만큼 기쁨이 채워지지 않을까봐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자,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의 부재’, 주님이 안 계신 그 자리가 결국 나중에 누구의 자리? 제자들의 자리가 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서 나는 세상에서 버린 자가 되었다. 따라서 너희가 정말 나를 기뻐한다면 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그냥 세리로서 부름 받았다는 이 현장에서 자책할 게 아니고 내가 사라진 그 나라에서 같이 만나자. 거기서 기뻐하자.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는 게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겠다는 그걸 소망이라고 여겼잖아요. 주님이 빠져나가서 만들어진 그 나라, 주의 나라. 성령이 와서 나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 나라 사람 되게 하는 거에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그렇다면 목사님 거울에 내 모습이 왜 비칩니까? 머리가 자꾸 빠지는 모습이 왜 비칩니까?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왔으되 이 세상에 자기 거처가 없는 것처럼 똑같은 운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거울 봐도 내 모습 보이고 오늘 무슨 옷 입을까? 긴 거 입을까? 짧은 거 입을까? 온갖 신경 다 쓰지만 결국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결정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그것이 너의 정직함도 아니요 목이 곧은 거에요 그게. 우리가 살면 살수록 점점 내가 목이 곧고 정직함이 없고 나는 의로움이 없다는 것을 그걸 확인해주는 기쁨을 우리에게 제공하지요. 성도에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내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거에요. 모든 일을 다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나는 의로움이 아니고 정직함도 아니고 선함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골라잡아 일을 안 하고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어떤 일도 오라. 내가 죄져줄게. 죄로 만들어 줄게. 그런 자신감. 어떤 일. 기도를 해도 뭐 고아원 방문하고 어떤 일을 해도 이게 죄가 되거든요.


뭘 해도 무슨 일을 맡겨도 그건 언약을 위해서 맡겨진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맡겨도 내 손에 거쳤다하면 그것이 정직함이 아니요 의로움이 아니요 선함이 아님을 언약이 와서 우리에게 그걸 확인시켜 주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이게 얼마나 복된 삶인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걸 우리보고 시도하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재함, 예수님의 없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냥 없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하늘에 계신 아예 없는 거 말고 이 땅에 오셨다가 없는 것, 오셨다가 없음으로서 없음이 유일하게 있는 현실이고요. 현실이라는 것은 전부 다 결국은 이 땅에 저주받을 없어져야 될 세상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된 성령 받은 성도 그걸 무슨 체험? 공동 체험.


공동 체험 한 사람한테는 없는 이유를 대야 돼요. 내가 없는 이유는 내가 정직하지 의롭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있어도 없는 살아도 사는 인생이 아니에요. 의미가 없다니까 의미가. 소용없다 정도가 아닙니다. 나는 못하다 그 정도가 아니고 의미가 없어요. 뭘 해도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있을려면 거기 반드시 선과 악이란 윤리 도덕이 결합이 됩니다.


이건 마귀가 그런 짓 하지요. 너 잘못했어? 잘했어? 자꾸 따지는데 이미 우리는 언약에 의해서 규정되었어요. 의로움도 아니요 선함도 아니요. 네가 아무리 선해도 그건 선이 아니야. 정직이 아니야. 그건 네가 너 해석한 거야. 네가 너 위주로 해석한 거야. 언약 위주로 해석해버리면 이미 결정난 겁니다. 확정된 겁니다. 그게 누구냐? 확정난 그 관계가 바로 제자들이에요.


끝으로 이제 오늘 이야기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이상스럽게도 본인도 몰라요. 이상스럽게도 분명히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신체로. 홀로 태어납니다. 신체상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자아성은 홀로 태어나요. 왜냐하면 5살 먹은 아기 ‘나’가 엄마 ‘나’하고 같지를 않아요. 안 같애요. 자아가. 얼굴은 닮았지만 자아는 같은 구석이 없습니다. 성격은 닮았지만 성격을 통일하는 자아의 최종적인 자아 지점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아요. 지문처럼.


악마가 악마새끼를 계속 까는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네 애비는 악마다. 악마가 새끼쳐가지고 악마 새끼들이 쫙 깔린 거에요. 이 악마는 홀로 태어나는 거에요. 홀로 태어났으니까 모든 의미는 뭐냐 하면은 어떤 의미 같이 같이 결합해서 뭐 의논하고 마음과 뜻을 합하여 뭘 해도 항상 그 의미는 최종적으로 이 성격 본래적인 성격 있잖아요. 홀로 태어남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좋아요? 대구강의 같다. 실컷해놓고 어쩌면 좋아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이 사태를. 예수 믿고 백날 해도 전부 다 돌아온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고맙게도 홀로가 아니고 관계로 왔어요. ‘관계’. 홀로가 아니고 관계. 관계가 될려면 하나 있어야 되고 둘이 있어야 돼요. 아령처럼. 두 개 있어야 중간에 관계성이 연결됩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성도를 ‘하나님의 전선’이라고 했지요. 전선이 까불락대면 안돼요. 전선은 가만히 있어야 되고 그래야 전선은 죽어 있어야 되고 죽어 있는 곳에 전류가 살아 있어야 되지요. 전기가. 전자의 흐름이 살아있어야 되죠. 관계가 될려면 양쪽 다 예수님의 한쪽이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고 자기가 부활하면 끝이 아니고 자기가 죽고 자기가 살아난 그것을 관계를 통해서 이 주님의 자리에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줬어요.


새로운 자아인데 이 자아는 내 자아가 아니고 주님의 자아를 집어넣어요. 그럼 우리는 뭐만 빌려줬어요? 우리의 신체만 빌려준 거에요. 신체만. 육신을 빌려준 거에요. 육신을 빌려주고 주님의 자아가 들어왔단 말이죠. 그러면 이 방법은 우리가 언제 육신을 빌려줬느냐? 그거는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늘에서 일하시지 않았어요. 말씀이 뭐 됐습니까? 육신이 된 거죠.


예수님이 육신이 될 때 이미 예수님이라는 조건 자체 속에 뭐가 필요하느냐? 육신이 필요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몸 없던 시절이 아니고 영광된 육체에요. ‘영광된 육체’. 부활의 영광이 있던 육신이란 말이죠. 육체 없는 예수님은 없어요. 그건 영지주의가 주장하는데 영지주의라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냈는지 하여튼 예수님은 육신을 갖고 있어요.


요한일서에서 육신이 없는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라고 했잖아요. 육신이 있는데 그 육신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예수님의 육신을 부활의 육신으로 만들었잖아요. 그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성령을 통해서 성령은 예수님의 하는 일밖에 몰라요. 예수님이 하는 성과를 우리의 그 지저분한 육신에다가 이걸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으면 우리가 산다가 아니라 이 관계가 살아요. 이 관계가.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요. 이 관계가 살아요. 이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천국을 가야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인간이지만 오늘 본문에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왜? 죄인 없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의사가 의사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이 관계, 이 의로운 관계, 그 관계가 피조물로서의 최고의 영광의 상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전부 다 내가 잘났다로 일관된 우리지만 주께서 성령 주셔서 너 그 못난 그것조차도 천국의 가치 있는 주님에게 가치 있는 주님의 몸이 됨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