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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누가복음 5:23 / 선과 악의 비례 / 210215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누가복음

누가복음 5:23 / 선과 악의 비례 / 210215

정인순 2021. 2. 1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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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홍민희

강남-누가복음 5장 23절 (선과 악의 비례) 210215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5장 17절부터 봅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 대목이죠. 등장인물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 계시고 그 맞은편에 바리새인과 율법사 있고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중풍병자와 그 일행 등장합니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뭐를 첨가해야 되느냐 하면은 병 고치는 주의 능력,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을 여기에다가 첨가를 해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눈에 보이고 바리새인도 눈에 보이고 중풍병자도 눈에 보이는데 이 중에서 병 고치는 주의 능력만은 이것은 인간들 선에서 보이지 않는 외부적 능력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부적 능력에서 뭐가 도출되느냐 하면은 죄사함의 능력으로 이어졌지요.


분명히 병 고치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라고 되어있지요. 능력이 주와 함께 있지요. 주님과 함께 있는데, 주님과 함께 있는데 이 외부적 능력인데 병 고치는 능력이 뭐로 변했다고요? 죄사함의 능력으로 변했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께는 이 현장에서 예수님의 자기 자신의 변신, 예수님의 자신의 변신, 변화를 시도하셨다 이렇게 보시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변신을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야 될 그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내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하는 그것을 드러내는 마당놀이 또는 한마당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필요조건 요소가 무엇이 있느냐 하면은 마법사와 율법사가 있지요. 일종의 이것은 ‘재판하는 자’ 또는 ‘판단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보면 재판하는 자, 판단하는 자, 바리새인 모두 다 이걸 한 묶음해서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걸 이렇게 설명하면 오늘 중풍병자 병 고치는 내용이 확실하게 다 드러나요. 그래서 좀 시작이 중요한 거에요. 이 시작한 게 중요하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있음 또는 있다 또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 뭔가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병 고치는 주의 능력같은 것은 예수님은 뭐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주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능력이죠. 주님의 능력이 첨가될 때 예수님은 자기의 이 땅에 오신 자신의 일을 시도가 가능해요. 변신이 가능해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의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없음이 됩니다. 없음이 되고 또 없음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 중풍병자 그 일행, 그 중풍병자를 그 일행의 대표로 보고 중풍병자가 없음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지금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중풍병이 들어 있지요? 중풍병이 들어 있는데 이 중풍병을 본인이 갖고 싶어 합니까? 내보내고 싶어 하는 거에요? 병들은 것을. 극구 내보내고 싶어 하지요? 나한테 없어져야 좋겠다 내가 이런 것 원치 않아요. 원치 않습니다라는 게 이게 들어왔잖아요. 적극적으로 중풍병 있음을 없이하고 싶은 거에요. 내보내고 싶은 거에요. 중풍병자는 이걸 병고침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지금 중풍병자가 그 일행과 여기에 바리새인과 율법사의 차이가 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은 판단하고 재판하니까 이것은 자기의 이성이라든지 율법이라는 지식이라든지 이것은 본인이 내보내고 싶어 합니까? 확보하고 싶어 해요? 확보하고 싶죠. 확보를 해야 제대로 된 재판과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나 누구든 눈에 띄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들은 항상 판단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요. 판단할 때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면 내가 현재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노련미와 인생 경륜과 경험 이런 것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만반의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만반의 자세가 되어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판단해야 되는데 여기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은 21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 실컷 보고 있으면서 갑자기 누구냐? 도대체 저 사람의 정체가 뭐냐? 쉽게 말해서 너 뭐야? 왜 시건방져? 이런 뜻이죠. 참담이란 정도는 시건방 정도가 아니고 신을 모독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체를 모독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의 율법사들이니까 서기관들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재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준이 있어요. 재판이기 때문에 재판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잖아요. 그럼 그르다의 쪽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죄사함은 인간이 못한다. 어떤 인간도 죄사함을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면 저주받게 되어있죠.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경계를 넘어서서 했기 때문에 뭔가 있음,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우리들이 해야 될 사명같은 것 그리고 책무같은 게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해야 될 거리에 머무는 것과 그걸 넘어서는 것과 그걸 판단해서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정죄하는 것, 판단하는 일을 그들은 사명감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중에 있어요.


그걸 지금 이야기한 이것을 재판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뭐라고 했습니까? 뭐가 있는 거에요. 뭐가 있어요. 그들은 절대로 이러한 자신의 해야 될 일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걸 굳게 꽉 잡고 있어요. 굳게 잡고 있다고요. 그러면 이번에는 중풍병자 봅시다. 중풍병자가 그 일행이 왔을 때에 이 중풍병자 일행은 지금 바리새인과 율법사 이쪽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은 뭐냐 하면은 병이 있는 사람이에요.


병이 있는 사람이죠. 병이 있는 사람. 있음, 병이 있죠. 병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이 중풍병 들린 것을 지금 자랑스러워합니까? 후딱 내보내고 싶지요. 후딱. 몸이 아파서도 그렇지만 나는 병을 갖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잘 살고 있고 의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주장 할 자신감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중풍병자 일행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 재판하고 있음의 세계, 현재 재판받고 판단하는 이 바리새인의 율법의 이 권세 안에 이들이 놓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놓여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병이 들어온 거에요. 그래서 이 중풍병자 일행의 그 한계가 뭐냐 하면은 병 낫고 싶어요 또는 병을 내보내고 싶어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강렬한지요. 엄청나게 강렬했어요. 강렬해가지고 여기에 예수님이 병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해 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까? 그거는 있을 수 없지요. 현재 이 중풍병은 어디 소속이에요? 지금 바리새인 율법사가 가르친 그 체제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딴 생각 못해요. 체제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리새인 유대 사회에서는 모든 체제는 이들이 꽉 잡고 있어요. 왜? 재판하는 거니까. 최종적인 안목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그들은 율법이 있어요. 율법이 있다는 말은 판단할 수 있는 율법을 그들이 갖고 있고 그 왜 갖고 있겠어요? 판단할려고 재판할려고 있는 거에요. 재판장에서 중풍병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졸지에 중풍병자가 나아야 이 동네에서 이 바리새인 동네에서 제대로 정상인 취급받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압니다.


그래서 소원은 딱 한가지에요. 이 중풍병을 어떻게 내보낼 것인가? 소위 병 나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소문이 예수님이 병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왔는데 여기 장애가 일어났어요. 순서표가 너무 번호가 뒷번호라 들어갈 수가 없어요. 했는데 길을 얻지 못한지라.


길을 얻지 못했을 때에 남의 집의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 내려놓았습니다. 새치기한 거에요. 싸가지 없지요. 상당히 과격하지요. 과격합니다. 아무리 아파도 지킬 건 지켜야 되는데 굉장히 과격해요. 과격하다는 이 말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이질적이다 할 수 있어요.


평소에 보지 못한 평소에 이 사람이 지붕 뚫는 것이 주특기가 된 건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탈하고 있는 거에요.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식이 과격하고 이질적이고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평을 해줬어요. 어떤 평을 해줬느냐 하면은 “저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보시고.


자,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쉬운 겁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라 의외로 쉬워요. 믿음을 보신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행위의 방향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가? 어디와 어디에 꽂혀 있는가? 방향이. 최종 방향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걸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본거에요.


자, 여기서 이제 어려운거 해 봅시다. 평을 누가 했어요? 믿음 있다는 평을 누가 했습니까? 이들이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안했지요. 예수님이 했지요. 믿음이 있다고 예수님이 평했지요. 이 믿음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먼저 생각해야 돼요.


이 두 개의 차이를 한번 보세요. 내가 말한다와 보통 인간에서 인간들이 내가 말한다. 말이 나에게 말을 시킨다. 인간들은 주로 말을 할 때에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인간들은 말하는 주체를 본인으로 설정하고 말을 할 때 내가 말한다고 되어 있지요. ‘내가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인간들이 말하는 그 모든 언어 내용은 자기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이미 자기를 둘러싼 타자 또는 타인들이 공감하고 타인들이 유통하고 있는 소통되고 있는 그 사회의 통하는 말 중에 자기가 골라잡은 거죠. 어떤 말을 할 때는 자기가 세종대왕도 아닌 게 자기가 말을 지어냈습니까? 세종대왕도 말을 지어낸 게 아니고 글을 지어냈지.


하여튼 말을 누가 지어냅니까? 말을 본인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필요한 적절한 그 용어를 뽑아서 자기 의사를 담아서 남한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하는 내가 하는 그 말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은 남이 뭐라 하더라. ‘남이 뭐라 하더라’가 들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점을 이러한 점을 제가 언급하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가 남한테 이야기할 때 내가 이야기한다고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을 지금 남들이 사는 말 중에서 단어 용어 중에서 내 감정과 어떤 것이 적절한가를 내가 임의로 골라내는 거에요.


골라내서 나는 네가 미워라고 할 때 상대방이 상대방도 내가 쓰는 단어가 무슨 뜻인가를 미리 다 알게 되어서 저 사람이 나한테 미워라고 하는 말이 벌써 아 안 좋은 거구나 하는 것을 감을 잡아야 말한 사람이 보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미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그 내 감정조차도 내가 너를 미워하는 그것도 남들이 나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 원인이 너한테 있기 때문에 미워해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말과 말이 내 감정을 부추기고요. 의도적으로 없는 감정을 유발시켜내요. 이 세상은 말들이 나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형성시키고 요동치게 만들고 밤잠 못 자게 만들고 또는 기뻐서 신나게 만들고.


이 세상은 고요한 세상이 아니고 끊임없이 으쌰으쌰 하는 그런 세상 속에 우리가 이 세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일개의 표현자로 이 땅에 여기 있는 거에요. 자리 잡고 있다 이 말이죠. 이 사회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상식적으로 용납이 된다는 전제 하에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우쭈쭈쭈쭈. 이게 무슨 말인데? 이건 용납이 안돼요. 이건. 우쭈쭈쭈는 무슨 말인가 아프리카 말이에요 뭐에요? 쭈쭈바 달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 언어가 말하지 내가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언어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네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에요. 너는 언어에 놀아나고 있는 거에요.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사소한 감정 작은 감정 하나도. 말에 놀아나는 겁니다.


그 말의 세계가 뭐냐? ‘타자의 세계’. 이미 내가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그 존재하는 세계가 나를 키워냈어. 지금까지. 나를 그 세계에 부합되도록 합당하도록 키워낸 겁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우리의 두뇌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개한테 음식줄 때 마다 종소리를 딸랑딸랑 치는 실험이 있어요. 파블로프의 실험인가. 그 심리의 실험에 의하면 개의 청각 있잖아요. 그 다음에 음식을 준다 후각 있잖아요. 후각과 청각이 서로 다른 감각이지만 개의 그 두뇌 안에서는 같이 association, 연합되어 있어요. 그 다음부터는 냄새나는 음식 치우고 종소리만 들어도 입에서 침이 나는 겁니다.


그걸 조건반사 실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두뇌적으로 두뇌에서 association, 연합되어 있는 모든 두뇌세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발로 있다고요 다발로. 다발로 있어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게 되어있어가지고 후각과 청각이 그런 기관에서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의 감각으로 서로 소통하게 되어있도록 훈련이 되어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의미나 용어 선정 이것은 인간 두뇌 안에 언어가 하나가 아니고 association, 전부다 연합되어있는 겁니다 전부 다. 말의 글자뿐만 아니고 말한 사람의 톤이라든지. 같은 말인데 기분 나쁘다 이상하게. 톤이라든지 음성이라든지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하나의 대뇌피질 속에서 다발 속에서 판단을 하게 되어있어요.


스스로 판단을 해서 지금까지는 이것은 나보고 칭찬하는 일이라고 일단 저장을 해놔요. 해마라는 곳에 저장한다든지 저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저장해 놓고 그 다음에 비슷한 어떤 말을 할 때는 전에 저장했던 그 기억과 대조를 해가지고 이거이거 전에 보니까 기분 나쁜데 그때는 화를 내는 거에요. 자동적으로.


누가 시키는냐? 누가 시키는 사람 없어요. 인간은 기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포는 기계입니다. 분자적 기계거든요. 기계의 특징은 주인이 없어요. 우리는 알지요. 주인이 마귀라는 것을 알지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과학에서는 관찰자가 한계에요. 내가 보고 내가 분류한 게 한계이기 때문에 본인 말고는 판단자가 없어요. 이제 판단자 나왔지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사두개인 또는 율법사들 이들의 한계 속에서 이 싸가지 없는 이 행동이 그들의 믿음이라는 이야기할 때 그들에게 있는 대뇌피질 속에 있는 그 기억 속에는 옳고 그른 지혜가 판단할 수 있는 사전 자료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도서관에 이게 어째서 믿음인지 이게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믿음으로 봤다는 것은 뭘로 봤습니까? 그 행위 또는 언어, 말, 행위의 방향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뭘 봤다고 합니까? 이게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나의 존재 예수님 존재를 향하여 연결되도록 했던 행위라고 누가 판단해버려요? 예수님이 판단해버리는 거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중풍병자의 모든 행위는 그 사적인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이게 누구의 행위가 되느냐 하면은 장차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예수님의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중풍병자의 행위가. 이게 성경에서 놀라운 사실이에요. 이게 어느 정도 놀라우냐 하면은 여러분들 제가 말할 테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를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 약간 놀랍지요? 그 정도로 나를 좋아했었어? 이렇게 되지요. 이것도 약간 놀랍지요? 더 세게 놀래볼까요? 네가 나다. 이거는 미친, 그게 말이 돼? 키하고 몸무게도 차이 나고 모든 게 다 다른데 어떻게 네가 나고 내가 너가 돼?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요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 되기 위해서 온 거에요. 나는 날라가 버리고. 내가 예수라고 하면 안 되고 그건 이상한 사람이고. 주님이 와서 ‘나’라는 것을 없애는 이유가 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없애는 거에요.


값을 주고 사는 이유가 평소에 내가 내 몸이 내 거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디서 온 능력이냐 하면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사 저 영역에서 속하는 거에요. 저 영역 어떤 식이냐 하면은 처음에 이 세계를 뭐라고 했습니까? 있음이죠 있음. 있음의 세계죠.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있음의 세계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진작에 없애야 될 세계로 보는 거에요. 없애야 될 세계를 예수님이 투입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새로운 있음의 세계를 만드는 거에요. 그중에 하나 누가 걸렸느냐 하면은 중풍병자가 걸린 겁니다. 중풍병자가 자기한테 중풍병을 내보내겠다는 말은 전에 중풍병 걸리지 않은 그 상태에 있음을 그냥 나의 있음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이게.


아까 놀라는 이야기했지요. 다시 물어봅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 우리는 그냥 나 있음을 근거로 한다면 아 나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주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내가 없다면 내가 굳이 너한테 올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보면 이건 내가 좋아할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아예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놀라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나는 이 예수는 너 보기에 남이다. 그럼 우리는 남이지만 좋게 지내겠습니다. 우리는 흔쾌히 그 관계를 수긍하지요. 그러나 주님이 이제부터 너를 ‘나’라고 지칭하겠다. 이거는 뭐 우리가 감당이 안돼요. 그럼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여긴 것은 뭐가 돼요? 허구에요? 허상이에요? 이렇게 되겠지요. 그리스 나라 사환들에게 옛날에 어떻게 했느냐 왕이 누구한테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려면 그 사환의 이마에다가 메시지를 써버린답니다. 물론 거울은 안주고. 거울에 못 비치고 만들고. 이마에 메시지를 써가지고 자기가 꼭 전해야 할 사람에게 보내버리면 그 메시지는 언제쯤 공개되고 노출됩니까? 메시지가. 언제 나옵니까? 언제 나와요?


자기 전령이죠 이마에 메시지를 써서 보내버리면 그 메시지는 본인이 알아요? 몰라요? 안보이잖아요. 그럼 누가 봐요? 메시지 받을 사람이 해석이 가능하지요. 지금 주님은 주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에요.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너희를 경유해서 예수님 자신이 자기가 성취할 내용이에요.


성취한다는 말은 그 메시지는 누구를 겨냥한다? 예수님 자신을 겨냥해서 보낸 메시지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중풍병자나 주님의 백성은 허구는 아니에요. 허구는 아니고 사환이고 종이죠.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자기의 고집이 있고 자기의 자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잘해줄 생각은 하지만 잘해주더라도 나는 나고 예수님은 나는 이미 나이기 때문에 나 외에는 들어올 사람 없고 그럼 예수님은 뭐냐? 내가 그냥 좋아하고 믿는 타인, 남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뭐냐? 계속 있음이 되어버리죠. 있음인데 내가 만약에 중풍병에 걸렸다.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요? 예수님한테 부탁해가지고 뭘 요청합니까? 어쨌든 간에 이 중풍병을 내보내가지고 지붕을 뚫던 무슨 수를 쓰던 낼 테니까 제발 병 고친다는 분이여 이 병을 내 있음에는 무관한 엉뚱한 게 들어왔으니까 내쫓아달라고 요청하겠지요.


만약에 이 중풍병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서 죄 지어서 있는 거라면 병 쫓아내는 그걸로 인하여 내 죄도 없고 나는 착한 사람이다 이러고 싶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뭐냐? 병 고쳐진 사람이 돼요. ‘병 고쳐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 자기 고유의 것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오실 이유 없지요.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마에 붙일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 사람은.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고 예수님에게 좋게 보이면 나 천당 보내주겠지 이런 식이란 말이죠.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처럼. “내가 너다” 하는 이야기는 그것은 여러분도 처음 들어보시죠? 지금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여기서.


외형은 내용물이 밀어낸 밖의 형체다. 밖의 형체물이 외형물이 밖에서 밀어낸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안에 있는 것이 밀어내서 바깥에 굳어진 게 외형물이다 이 말이죠. 인간은 왜 있느냐? 우리 성도는 왜 있습니까? 목자가 양을 찾아옵니까? 양이 목자를 찾아갑니까? 요한복음 10장에서 어떻게 되어있어요? 목자는 양을 알지요.


그럼 양이 구원받을 양 될려면 그 안에 뭐 들어야 됩니까? 자꾸 묻는 것이 여러분에게 실례되기 때문에 그냥 내가 나한테 묻는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들 답변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양을 구원할 때 나는 목자다 나한테 와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목자가 하는 무슨 행위가 있어요.


그 행위가 뭐냐 하면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다시 버림이라.” 여기에 보면 14절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뭐를 버려요. 목숨을 버리죠. 그러면 그 내용물이죠. 목숨을 버리는 내용물이죠.


그 사건이 유발한 바깥의 결과물이 뭐냐? 이게 성도가 되는 거에요. 지금 중풍병하고 예수님은 그냥 스쳐 지나가면 영 못 만날 사람이에요. 그런데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계기가 중풍병을 걸렸기 때문이에요. 서로 모르는 사이거든요. 인간의 입장에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사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중풍병이 들었고 예수님이 잘 고친다는 소문 듣고 이거는 아주 객기를 부려서 지붕 뚫고 들어왔다 이 말이죠. 예수님 알고 온 거에요? 자기 병 고치러 온 거에요? 자기 병 고치러 온 거에요. 지금 중풍병자가 잘한 짓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지금. 남의 멀쩡한 지붕 다 뜯어놨지요. 새치기했지요.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중풍병의 특징은 경직된 정신구조. 경직된 정신구조를 갖고 있다는 게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죄인이면 죽어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왜 중풍병을 낫겠다고 친구들까지 그렇게 부추겨 가지고 사람들 많으니까 안 되니까 지붕 뚫어라. 이게 다 누구 좋아라고? 자기 병 고치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잖아요.


이 사고방식 이 정신구조가 굉장히 경직된 거에요. 그래서 중풍병자의 특징은 이쪽 세계, 바리새인과 서기관 세계에 그 세계의 인물이란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나를 지켜주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재판한다고 하지만 개인도 인간도 본인이 재판, 늘 재판해요.


내가 중풍병 갖고 있으면 그건 나한테 내 자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이거 쫓아내야 돼. 상당히 경직되거든요. 인간 내부는 늘 계엄령입니다. 인간 내부는. 늘 바짝 긴장 완전히 미얀마에요. 우리 내부는. 철저하게 자기 방어 체제가 완고하고 견고하게 항상 어떤 경우라도 나의 의로움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 하나 주의하고 행동 하나 주의하는 거에요.


주의해야 될 행동을 과하게 하는 것은 비록 내가 과격하게 행동하더라도 더 얻을 것이 있다고 기대를 하기 때문에 과격한 행동을 한 겁니다. 주님 믿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주님 제 믿음 어때요 이 거 할려고 온 게 아니고 자기 병을 고치러 왔다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네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해버린 거에요.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란 또는 어떤 행동이란, 말이란 어디와 연결된다고 했지요? 믿음이란? 행동이란? 묻는 실례를 자제하겠습니다. 그 방향이 예수님 나로 겨냥한다고 했을 경우에는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거에요. 그러나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겨냥한 것은 예수님을 죄 사함을 얻고자 믿은 게 아니고 자기 살고자 예수님 이용할려고 덤벼든 거에요. 자기 살고자.


여전히 예수님의 없음을 이해 못하고 자신의 기존 인간세계의 있음에 그냥 눌려있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와 그 일행들이에요. 그런데 그걸 일방적으로 주께서 네가 하는 것은 나의 나 됨을 내가 해야 될 일을 겨냥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일방적으로 거두어들이신 거에요. 네가 중풍병 안 걸렸으면 언제 우리가 만났겠는가 이렇게 하면서 거두어들인 겁니다.


거두어들이면 결국은 예수님의 없음의 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중풍병 들린 환자가 들어오게 되지요. 그러면 이것은 없는 예수님 자리에 새로운 예수님의 있음이 되어버려요. 양이 되어버려요. 목자를 목자 되게 만드는 양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중풍병자는 자신의 자존심이고 뭐고 상황들 전부 다 과격하게 헤치고 그저 병 낫겠다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잖아요. 그렇지요?


그 모습이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라면 결국은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 자기 양에게 죄 사함을 주기 위해서 이러한 중풍병자가 보여준 그 과격한 행동보다 더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일부를 중풍병자가 보여 줬으니까 중풍병자 너하고 나하고 통하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게 믿음이 아니고 뭐냐 이 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예수님 일방적인 해석이에요. 중풍병자는 “뭐야? 행동 내가 해놓고 해석은 주님이 왜 해석하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질 것은 성도의 있음은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나’ 있음은 ‘나’ 없음으로 바뀌고 있음은 없음으로 바뀌고 성도의 주어질 것은 뭐냐 하면은 성도의 개인적인 여망이나 희망이 아니고 어떤 자기 개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뭐가 주어지냐 하면은 주님의 일방적인 해석이 주어져야 이게 성도의 내용물이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해석,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그게 성도의 유일한 내용물이여야 돼요. 원형질이에요 ‘원형질’. 세포핵이 되야 돼요. 요새 생물공부 좀 한다고 단어가 좀 그쪽 단어가. 이걸 주일 낮 설교 때 이야기했고 대구 공부하면서 이야기했고 이제 지금까지 하면 세 번 한다고 이제 지루하게 느낄까 봐 말을 아끼겠습니다만은 이게 주님의 기억이에요. ‘주님의 기억’.


나의 기억이 아니고. 나의 기억은 이 세상 사람과 닮아가지고 어쨌든 간에 근사한 내 모습을 갖고 싶지만 그 근사한 내 모습은 어디서 주느냐 하면은 이 있음의 세계에서 이야기한 언어의 세계에서 온 거에요. 언어의 세계. 언어의 세계 그걸 다른 말로 뭐냐? 나의 세계가 아니고 타인이 나에게 욕망으로 강요하는 세계, 그게 언어의 세계에요.


그들의 비위 맞춰줄 때 나는 ‘나’ 다움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내가 지어낸 언어가 아니라 남들이 쓰고 있는 언어를 사용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오셔가지고 없음의 세계에서 오신 예수님이 있음의 내용을 다 뜯어내어버린 겁니다. “예수님 병고치고 싶습니다. 지붕 뜯습니다.” “아니야 너는 죄사함을 받아야 돼.” “아이고 주님 그런 건 애초에 생각도 안했습니다.” “네가 생각한걸 내가 왜 줘야 되느냐? 그럼 내가 너한테 온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 땅에 양은 없어요. 목자가 와서 양 자리에 가서 양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 할 때 비로소 그 양의 기능을 했던 예수님의 그 내용이 들어오면 그게 양이 되는 거에요. 목자가 목자, 양 다 되는 거에요. 왜? 양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양과 목자는 어떤 경우에 발생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었을 때 양쪽에 다 발생되는 게 목자와 양이 되는 거에요. 십자가 죽을 때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목자가 되고 십자가 죽으심의 혜택을 입은 것이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양이다 이 말이죠. 그 현장에. 없는 양이 있는 양으로 새로 생긴 거죠.


이러한 점을 우리가 어디서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했잖아요. 고쳐달라고 기도했지요. 사탄의 가시 있다고.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됐네~~됐어 그만. 네 병 나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병이 있어 줘야 주님의 은혜됨이 너를 통해서 주께서 하실 내용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성도라면 내가 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자꾸 나를 집어넣는 그 버릇이 그게 병적이다. 내 있음의 세계에서 들었던 아직도 잠재되어 있는 쓰레기 같은 흔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만약에 여러분들 주님께서 차에 태워서 운전할려고 하시는데 운전해가지고 나 있는 곳에 오라 하면 예 가겠습니다 하고 브레이크를 밟는데 브레이크가 안 되네. 엑셀을 밟았는데 엑셀이 먹혔네. 운전대가 돌아가지고 않아. 뭐 어쩌라고. 운전해서 오라 해놓고 운전대도 안 돌아가고 브레이크도 안 밟히고 엑셀도 그것도 안 되고 뭐 어쩌라고.


주여 못합니다. 주여 못합니다. 차가 있을 뿐이지 나는 이 차가 있음에 대해서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마치 없음과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네가 그래야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 차를 몰고 가지 않기 때문에 온전하게 주께서 온전하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끌 수가 있어요. 날마다 우리를 중풍병자로 만들어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애시당초 없어야 마땅한 존재로 바꾸어주는 겁니다.


지금 중풍병자 보세요. 중풍병자가 자기는 여기에 있는데 뭐가 잘못된 게 들어왔죠? 무슨 병이 들어왔어요? 중풍병이 들어왔지요. 그럼 온전한 있음이 될려면 뭐만 나으면 된다? 중풍병만 주님의 뜻으로 나가버리면 다시 온전한 ‘나’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다가 중풍병이란 말도 안 꺼내고 뭘 집어넣습니까? 죄사함을 집어넣었지요. 그러면 중풍병에서 낫겠다 하는 병에서 낫겠다 하는 이 시도가 뭐가 된단 말입니까?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에요 이게. 비록 죄가 되지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인 해석으로 항상 해석은 주님의 일방적인 해석이에요.


일방적인 해석으로 그깟 병 낫겠다고 나를 겨냥한 자체를 뭐로 본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진 믿음의 하나의 모델로 보겠다는 거에요. 나를 바라볼 때에 아무것도 못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를 바라볼 때. 나를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하세요.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 죄인 주제에 말이 많구나. 죄인이 되었으면 아무것도 안한 정도가 아니고 마땅히 저주받아 어디가야 돼요? 지옥 가야지요.


지옥 갈 마음 준비 안하고 네가 뭘 하겠다고. 병이 나가나? 뭐 병 고쳐주세요? 너는 너를 정녕 모르는구나. 내가 너 될게. 나는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너 될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안에 죄에 들어와버립니다. 합류를 해버렸어요.


합류를 함으로써 그저 서로 인사하고 믿습니다 하는 이런 사이가 아니고 아예 나 있음을 없는 존재, 주님의 자신의 방식으로 없는 존재를 만들어버려요. 없는 존재로 만들어놓고 예수님 자신의 하는 일을 이 없는 나에게 만들어버리면 거기서 붕어빵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게 뭐냐 하면은 ‘성도’라는 겁니다.


주님의 종, 그리스도의 사환. 뭔가 이마에 뭐 쓰였는데 이거는 주님의 하신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봐도 안 보이죠. 이마에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가 적혀있는 거에요. 십자가의 문신이 그어져있는 그러면 그 내용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기뻐하는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5장 23절 (선과 악의 비례) 210215b-이근호 목사



인간이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 내가 나를 판단한다는 것은 전제가 내가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 중풍병자가 자기 병 고치려는 것도 현재 있는 내가 나 관리 안하면 누가 관리하겠느냐. 굉장히 너무나 인간적이죠. 너무나 자연스럽고 상식에 부합되지요.


지금이라도 만약에 우리 귀에 예수님 병 고친다고 소문나게 되면 우리는 내 죄 사할려고 하는게 아니고 내 병 고치러 가는 거에요. 내 죄를 사할 거 같으면 그것은 성령 받고 난 뒤의 현상이에요. 왜냐하면은 정말 죄를 안다면 심판받는 것만 남아있지 죄 사해달라 지옥 안가게 해달라 그런 소리는 정말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아는 사람 입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은 뭐냐? 중풍병자가 요청했습니까? 요청 안했지요. 그럼 뭐냐? 일방적인 주님의 자기 해석이에요. 중풍병자가 바리새인 앞에서 당하는 것, 서기관 앞에서 당하는 그 당함을 이제는 중풍병자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예수님 자신이 지금 겪어야 될 뛰어들어야 될 자기 일이 된 거에요. 그게. 중풍병자.


다만 중풍병자는 자기가 병 들었다고 생각했지 죄인이라는 생각 안하잖아요. 주님 보시기에 모든 인류가 환자에요. 내가 병든 자를 위해 왔다는 다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병든 자 중에서 스스로 병 고칠 수 없는 자 중에서 내가 그 사람 된다 하는 조건하에 그 사람은 구원받는 거에요. 예수님의 내용이 들어있을 때 그 사람은 외형적으로 성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손 들고 구원해달라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목사님 복음 아시잖아요. 제가 질문할 테니까 제가 복음 모른다 치고 복음 아시니까 제가 질문 하나 던져볼게요. 내가 복음 모르는 목사인데 그냥 시비 걸라고 하는 거에요. 목소리도 변조해야 돼요. 목사님 말라기에 십일조 하라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만 답변하세요.


그러면 목사님이 말라기에 십일조 있지요?! 십일조 있습니다. 그럼 십일조 있으니까 십일조 해야지요? 왜 딴소리가 많습니까? 제가 성경에 없는 소리했습니까? 십일조 있으면 십일조 하라 하면 해라 창고에 넘치도록 채워준다 하면 십일조 해야지요.


그런데 십일조의 의미가 뭐냐? 해석이 뭐냐? 왜 그게 필요합니까? 하라면 하면 되지. 목사님 답변해보세요.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십일조 하라고요. 하나님이 도와주나 안 도와주나 시험해보라고 했잖아요.


자, 여러분 같으면 꽤나 복음 안다는데 답변해보세요. 거기에 뭐라고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첫째시간 강의 듣고 난 뒤에. 강의 백날 들으면 뭐하나? 응용이 하나도 안 되는데. 적용이 하나도 안 되는데. 이래서 수학책에 연습문제 필요합니다.


십일조 하라. 누구보고 이야기했느냐. 예수님 자신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누가? 예수님 자신이. 아까 나왔던 이야기에요. 그리스도 사환 이야기 아닙니까. 성경말씀은 누가 누구보고 명령하는 거에요?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 본인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언약한 그것을 예수님 본인 너가 실천하라고 하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 다 이루었잖아요.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그걸 누가 한다고 봤어요? 성경말씀을 내가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내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은 성령 받은 성도들한테 이야기한 거에요.


그러면 성도 안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성도 안에 내용물이 누구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잖아요. 그럼 성도한테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성과를 남기는 결과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말씀을 준거에요. 고함 안 질러도 여러분 다 알아듣지요?


이게 어려운 일입니까? 낯선 이야기에요? 낯설지요? 병 고치는 사람에게 만약 제가 흰 가운 입고 떡 앉아있는데 선생님 제가 속이 쓰린데 어떻게 병 낫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띵~~할 거에요. 그러면 환자가 내가 전적으로 내 죄도 관리 못하는 내 죄도 내가 처리할 수 없는 전적인 남이 와야 죄 씻어줘야 처리하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이는 영 희망이 없고 감흥이 없는 그런 저주받을 인간입니까? 그래.


결국 그 이야기잖아요. 네 죄 사함을 받아라. 병 고치는 것도 병 고쳐놓고 지옥 간다 이 이야기와 똑같은 거거든요. 근원적인 거에요. 근원적인 것 같으면 네가 너 해석 말고 네가 너를 재판하는 것 말고 내가 너에게 해석을 유의미적 해석을 내리는 그것이 너로 하여금 새 사함을 받는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창조하시는 일.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오직 아버지께서만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하시는 일을 아들이 하시는 거에요. 이 땅에 창조하는 거에요. 창조라는 것은 반드시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창조가 되는 겁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성경보고 내가 지켜서 천당 가야 되는지 알고 했는데 지킬만한 말씀은 하나도 없고 내가 믿을 수 있는 말도 하나도 없고 맨날 믿고 지킨다 해봐야 이건 뭐냐?


나의 과거에 내 기억 속에 있는 있음을 내 잘남을 잘남으로 참기름 치듯이 맨날 나의 존재할 이유와 내 정당함과 의로움을 우리는 매일같이 짜내고 있어요. 매일같이 짜내고 있다고요. 오늘 늦게 온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늘 이렇게 자기 정당함과 변명거리를 짜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은 그것밖에 없어요.


코로나 걸린 사람이 저는 코로나 걸려도 마땅합니다 이런 사람이 없어요. 아이고 저 나보다 못난 나쁜 사람도 있는데 왜 나한테 재수 없이. 맨날 재수 없대. 맨날 재수 없대. 이미 자기 있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믿음이라는 것도 예수님 나을 줄 믿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그건 자기 해석이에요. 그건 자기 열성이죠.


이정도로 열성 보였는데 주께서는 다 보는 눈 있으면 열성 있는 나부터 먼저 고치겠지 해서 지붕 뚫은 거에요. 이거는 자기가 자기 재판하는 겁니다. 자기 잘남을 그런 식으로 지금 과시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믿음이라는 말은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주께서 사도 바울에 나오는 십자가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믿음을 이미 예수님 십자가 지기 이전부터 그 자기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 관계성을 그렇게 놓은 거에요. 다리를 놓은 거에요.


네가 하는 모든 것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누굴 위함이다? 그 겨냥이? 나의 해야 될 이 땅에 왔어야 될 십자가를 위해서 너는 필요한 존재로서 했을 뿐이다 그 관계를 믿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십자가 성령을 받은 우리는 오늘날도 우리도 중풍병자와 똑같은 입장이에요.


내가 어떤 공부를 한다 밥을 먹는다 조차도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위하여? 주의 복음을 위해서 이것은 주님의 기억 속에 있는 스케줄 속에 있는 일을 그냥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럼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결과적으로서는 뭐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전부 다 뭐다? 욕망 덩어리에요. ‘욕망 덩어리’.


자, 욕망덩어리에서 조금 더 진도 나가 봅시다. 23절 봅시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예수께서 그걸 보고 바리새인 보는데서 그렇게 하니까 발칵 했지요.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사하겠느냐. 누가 능히 사하겠느냐 할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쉽다의 반대말은 어렵다죠. 어렵다. 그렇죠? 쉽다라는 말이 나올려면 뭐가 나와야 되느냐 하면은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노림수를 띈 행동을 하는 게 전제가 되겠지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죠. 의도를 가진 행동이죠. 이 행동을 할 때 쉽게 하고 싶은 거에요. 어렵게 하고 싶지 않은 거죠.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과 그리고 서기관과 그리고 중풍병자와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야기하는데 어느 것이 쉬우냐? 죄 사하는 것과 어느 것이 쉬우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바리새인들 말이 하나님이 죄를 사할 수 있다 권한이 있다 이 자체가 너희들 보기에 순순한 믿음으로 보이지만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걸 노림수로 보는 거에요.


의도를 보고 나의 있음을 더욱더 있음 하게 가져가게 한 하나의 욕망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의 욕망으로. 왜? 이 바리새인들은 인간들은 모든 게 선과 악 사이에 재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과 악 사이를 분별하는 그러한 체제 속에 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의 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아까 했잖아요. 모든 인간은 환자라고. 모든 인간은 환자입니다. 죄 사함이 중풍병자의 소원이었다? 아니였다? 중풍병자의 욕망 가운데서는 죄 사함이라는 욕망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중풍병자는 알고 있어요. 죄 사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왜? 죄 사함은 누구의 몫이다? 하나님 하시는 몫이기 때문에. 이것은 엄두도 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병만 나았어도 대충 건질 건 건졌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죄 사함은 하나님께 있고 병 고치겠다는 그 의도가 이게 선악체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오르고 있는데 100m를 올랐어요. 100m 올랐는데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에 100m 올라가 놓고 뭐가 궁금하냐 하면은 지금 자기가 헉헉 거리면서 친히 노동했지요. 일 했잖아요. 인간의 행위를 했잖아요.


선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노동과 일과 행위. 중풍병 같으면 지붕 뚫는 것. 어떤 행위에 있어서 어떤 대가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기를 요청할 때 이 사람은 뭔가 선악체제 속에 있어요. 포도원비유 알지요. 아침 9시부터 해가지고 오후 5시에 온 사람들. 그때 누가 화를 냈습니까?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이 화를 냈지요. 우리 상식으로서는 화낼 만 하잖아요. 한 시간 일하고 10만원 받고 자기는 9시간 일하고 10만원 받고 이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요.


주님께서 천국을 설명하면서 무엇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천국을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선악체계, 인간의 행함이나 노동 이 사이에서 인간이 노리고 있는 게 있어요. 이 정도 노력했으면 나는 악한 쪽이 아니고 선한 결과를 내가 했다 하는 체제가 선악체제입니다.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인간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평소에 어떤 공식에 따라서 살아가는지 그걸 제가 한번 설명할게요. 선악체계에 있는 인간이 어떤 공식으로 살아가는지.


선악체계 아니고 복음 알아도 우리는 평생토록 이렇게 살아가요.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100m 올라갔다. 그럼 뭐가 궁금 하느냐 하면은 100m 걸어서 올라가는데 이 높이는 얼마쯤 올라갔을까? 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각도가 30도 각도라면 이 높이가 50m가 되는 겁니다.


이게 왜냐하면 S자가 이렇게 된다고요. 직각상태에 있어서 빗변분의 30도 각도라면 sine 30도는 2분의 1이다. 갑자기 수학시간 됐네. 2분의 1이다 따라서 밑의 빗변의 100m 올라갔으면 높이는 얼마 나옵니까? 딱 50 나와요. 딱 50m 올라간 거에요. 왜 이렇게 이게 딱 나오느냐 하면은요 이게 비율이기 때문에. ‘비율’.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에요.


인간들은 선악체계 안에서 악마가 심어놓은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은 선과 악 사이에 비율로 자기의 욕망을 조절하고 있는 식으로 살아간다 그걸 말씀드리고 싶은 거에요. 지붕 뚫는 열성은 나에게 내 소원을 쉽게 달성한다고 생각하겠지요. 쉽게.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서 걸어라 하는 그것은 자기가 그만큼 성과를 지붕 뚫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도 그만한 내 쪽에서 보탬이 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중풍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인식이 이 체제, 중풍병에서 인간체제 모두에게 이미 그게 확 지배적으로 퍼져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병 고치는 것 불가능하죠.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들어간 정성이 있잖아요. 지붕 뚫는 것. 뭔가 노력하게 되면 가상히 여겨서 봐주는 거 있잖아요. 인간은 인간이 할 도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도리 하면 된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둘 다를 다 가져옵니다. 일어나서 걸어가는 게 쉬우냐? 그냥 그것만 물으면 되는데 일어나서 걸어가는 게 쉬우냐?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한 만큼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하고 싶지요.


그렇다면 범주를 한번 정해보자. 일어나서 병 나아서 걸어가는 것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죄 사함과 어느 것이 쉬우냐? 답변해보라. 그렇게 할 때 일부러 주님께서 범주의 오류를 범해버려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고 우리는 손대면 안 되고 인간이 할 도리는 열심히 해야 된다. 이렇게 되야 되는데 주님께서 이 범주를 섞어버렸어요. 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인간은 뭐로 오해합니까? 자꾸 인간의 일로 자꾸 오해하는 거에요. 주님 저 중풍병 낫게 해 달라. 중풍병자가 그렇게 요청했지 주님이여 죄 사함 해달라 이렇게 요청했겠습니까?


왜 중풍병자는 자기 죄 용서해 달라고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범주에 의하면요 어려운 정도가 아니에요 이거는.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거에요 이거는. 있을 수도 없는 거에요. 지금 주님께서 병자한테 환자한테 한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준겁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한테 해준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거에요.


내가 뭘 요구한다는 것은요 내가 어떤 요구를 하고 기대를 하고 욕망을 한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뿜어낼 수 있는 나의 내용물이에요.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한 거에요. 우리를 완전히. ‘나’라는 오류 범주, ‘나’라는 범주를 박살 찢어버린 거에요. 거기서 유명한 사자성어 나오지요. ‘영구 없다’.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내가 있으나마나. 주님, 주님 이거 하는 거 어렵겠지요. 이 따위 소리하는 나를 없애버리는 거에요. 내가 예상도 못한걸 주시는 겁니다. 죄 사함이. 그게 죄 사함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죄 사함을 얻겠다는 것은 나의 욕망이에요. 죄 사함을 원해서 주는 죄 사함은 없어요. 그것은 나의 있음의 범주 안에서 주님이 놀아나는 것 밖에 안돼요. 그건 우상입니다.


삼각함수 그래프를 그리라고 할 때는 1을 반점으로 해서 원을 그려버립니다. 어떤 모든 지점은 전부 다 1이 돼요. 길이가 1이 돼요. 1이 된다고요. 그러면 sine이라고 하는 것은 삼각형에 세변. 빗변, 높이, 밑변 이 세가지 직각 삼각형에 있어서의 이 비율을 구해요. ‘비율’. 비율입니다. 절대값 아닙니다. 비율이에요. 비율이니까 인간은 항상 절대값을 찾는다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구원받는 게 나한테 욕망적으로 나한테 원하고 낫고 내가 병 낫는 것이 내가 선하다는 욕망인거에요. 따라서 그 비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헉헉 거리면서 달려가야 되는 겁니다. 내가 달려간 그 양만큼 그만한 성과가 비율적으로 주어진다고 보는 거에요. 이게 sine이거든요. cosine은 뭐냐? 빗변에다가 밑변을 보탠 거에요. cosine.


탄젠트가 있는데 탄젠트 이게 재미있어요. 탄젠트는 뭐냐 하면은 밑에다가 밑변분의 높이가 되는 겁니다. 밑변분의 높이가 되니까 이게 자기가 인간이 비율로 따져서 내가 노력한 만큼 어떤 성과를 얻겠다는 것은 이것은 sine이나 cosine이 되어 버려요. cosine, sine 되는 겁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올라간 것도 없고 밑에서 올라가지도 않아. 나는 출세하고 싶다. 이재용 같은 삼성그룹 되고 싶다.


바라볼 때 욕망의 그래프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무한대로 시작해요. 무한대. 무한대로 가요. 무한대로 이어져요. 무한대로 간다고요. 이게 1이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내가 노력한 그 한계 내에서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노력한 만큼 어떤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수능 할 때 기도제목이 뭡니까? ‘하나님이여 아는 것만 나오게 하옵소서’. 이게 뭐냐 하면은 공부 안했으면 틀려도 좋은데 공부한 것은 다 기억나게 하옵소서.


되게 자기가 선한 존재라고 자부하지요. 내가 선한 존재니까 선한 존재는 뭘 받아야 마땅하다? 상을 받아야 돼요. 내가 만약에 농땡이라면 벌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농땡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상으로 어떻게? 회개하니까 반성하니까 좀 주옵소서 이런 식이다. 모든 것이 나하기 나름에 내 미래가 결정되는 거에요.


내가 한다는 것은 선을 행하면 뭘 받고? 선을 행할 때 상을 받는다는 것은 상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내가 내 행동을 내가 일방적으로 재단해서 판단해서 선하다고 내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 해석을 나에게 가미해버리는 거에요. 지붕을 뚫어서라도 성의를 보인다면 주님께서 병 고치는 당사자께서 얼마나 나를 이뻐하겠느냐? 당장 걷는 것까지는 기대 안하지만 약간 호전되어서 간다면 그것도 내 노력에 헛되지 않는다. 100m 올라가는 것 헛되지 않다 이런 식이에요.


왜? 모든 것은 이 세상 선과 악의 비율 구조니까. 선과 악의 비율 구조에요. 이거 못 고칩니다. 욕망의 구조에요. 욕망의 구조. 선악 욕망을 상 받고 악한 욕망은 벌 받는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노력한 만큼 대가 주는 것은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원칙과 우리의 원칙이 공통점이라고 본거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다. 선한만큼 상 받고 악한 놈은 벌 받는다. 알고 있다는 거에요. 이게 우리의 예상입니다. 있음의 예상입니다. 그 있음을 주께서 없애버립니다. 중풍병자를 죄 사해주는 게 아니고 아예 중풍병자를 없애버리고 거기에다가 죄 용서받지 못할 자에게 죄를 사해주는 예수님의 자기 기능을 중풍병자에다가 담아버리는 거에요.


아까 그리스도 사환 이야기 있잖아요. 그걸 여러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았으니까 기분 좋다고 집에 가겠지요. 기분 좋다고 집에 가서 소고기 사먹겠지. 그런게 아니고 중풍병자는 이질적인 것이 자기 속에 박혀버린 거죠.


네게 속하지 않은 것이 내게 있다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나’가 된 거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십자가가 산다는 이게 애시 당초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소망이 아니에요. 이것은 내가 원했던 게 아니에요. 이건 나의 기억도 아니고 주님의 기억이고 나의 추억이 주님의 추억이에요.


여러분들이 늦은 겨울이나 봄 되면 어릴 때 시골 철로길에 보면 그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성 차가운 그 물질 사이사이에 파릇파릇 쑥 같은 것 피지요. 쑥갓이라던지 봄나물.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어릴 때 보면 세상에 그 딱딱한 뗏목 냄새 있잖아요. 그 냄새 가운데서도 생명은 살아있다. 쑥갓. 그래서 내가 나중에 크면 철도에 아무도 안 뜯은 쑥갓 뜯어서 먹어야지. 쑥갓 해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여자들은. 얼마나 그게 순박하고 아름다운 시절입니까.


그런데 그 아는 지식이 뭔지. 그 아름다운 소박한 꿈마저 앗아가요. 왜냐하면 그 쑥갓에 중금속이 그렇게 많데요. 아는게 병이라. 아름다운 소녀 때 꿈 다 날라 가버리고 중금속. 크롬이 어떠니 암 발생물질 이런 거 연구한다고요. 우리가 결국 그렇게 자연을 보고 아름답다할 때는 그 순간 누구를 잊어버려요? 자연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잊어버리잖아요. 그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었습니까?


그러나 중금속 생각하고 몸에 우리한테 해로운 것 멀리하고 좋은 것만 찾는 이것 자체가 결국 가면 갈수록 무엇에 굳어집니까? 나를 더욱더 굳어지게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자기가 자기를 재단하고 판단하고 재판하는 그러한 흉한 모습이에요. 분명히 아는 게 행복해야 할 텐데 아는 게 나를 더욱더 잊어버리게 하는 게 아니고 나를 더욱 더 붙잡는 그런 무거운 쇳덩이를 만드는 그런 일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안다는 게.


옛날처럼 옛날에 남녀들은 20대에 뭣 모르고 결혼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그저 숟가락만 하나 있어도 그냥 붙어있으면 이게 어떤 방인지 불 땐 방인지 그런 거 관계하지 않고 붙어있으면 이미 그걸로 결혼은 시작된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집 사줘야 되지 집도 전세할 데도 없지 뭐 또 조건해야 되지. 시아버지는 결혼부터 할 때부터 시아버지는 입 다물고 아무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괜히 시아버지 입 벌리면 고기하고 깻잎하고 이혼한다고 해요. 우리 이혼했어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시아버지 때문에 삐져가지고 시아버지 때문에 이혼하는 수가 있어요.


조건이 그렇게 많아요 조건이. 너무 깔끔 떨어도 안되고 너무 어지럽혀도 안되고 개 두 마리는 기본으로 키워야 되고 아이고. 제가 한 예를 들 테니까 예수님의 이질성이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아까 제가 놀라운 이야기했지요? 뭐 했습니까? ‘너 없이 나 없다’ 그것도 놀라운 것이지만 ‘네가 나다’ 라는 것은 더 놀라운 사실이죠. 그게 왜 놀라운 사실인지를 제가 어디에서 예를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사극을 한다. 사극. 예를 들면 천인왕후 사극을 한다. 사극을 할 때 거기 철종이 나오고 철종 부인이 나오잖아요. 중전마마. 대왕대비마마 나오고 간신배 나와요. 그런데 이 출연하는 사람들이 전부다 마스크를 쓰고 출연했다면 보는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마스크를 쓰고 출연했다면? 이게 만약 휴대폰을 들고 나온다면 코미디에요. 그건 우리 이해돼요.


사극을 빙자해서 완전히 퓨젼 만들었구나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마스크를 쓰고 촬영을 임해가지고 철종이라는 사람이 여봐라 거기 누구 있느냐 하고 마스크 닫는다면 그걸 여러분 현실감이 더 날까요? 현실감이 더 떨어질까요? 보세요. 지금의 촬영하는 기사나 감독이나 배우들이나 코로나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대사할 때 침 튀기면 안 되니까 마스크를 쓰는 것이 계산적으로 실제적으로 진짜 현실감 있지요? 그런데 만약에 마스크를 써버리면 극중에 뭐가 떨어집니까? 그 극중에서 그 극 자체 안에 고유의 현실감이 다 떨어져 버리잖아요. 그렇죠? 마스크 쓰고 사극하는 사람 없지요. 옥의 티처럼 뭔가 나온 경우는 있어요. 옥의 티처럼. 여봐라 앞으로 전진 공격하라 하는데 막 시계 차고 있고. 그건 감독이 소홀해가지고 시계 찬 거 모르고 촬영하는 그런 건 있지만.


현실이라는 것 우리가 보는 현실과 밖에 있는 현실이 완전 다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완전히 다른데 주님께서 완전히 통합했다고 보세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우리는 상식대로 살아갑니다. 코로나면 마스크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는 게 아니고 현재 있다면 코로나19의 그 창궐함은 결국 누구의 일이에요? 누가 벌린 일입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이 벌린 일 맞지요? 벌린 일 맞지요?


그러면 그 코로나의 걸린 사람은 불교신자만 걸립니까? 믿음 없는 사람만 걸립니까? 아니지요? 믿음 있다는 사람들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들도 걸릴 수가 있지요. 성령 받은 사람이 걸린 거 나 아직 못 봤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이 걸렸지만 성령 받은 사람이 걸린 사람은 모르겠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 걸렸다 칩시다.


그러면 그 일이 결국은 오늘 강의에 의하면 누가 걸린 게 돼요? 주님 자신이 자신에게 병 걸리게 한 일이 되지요. 그 일이 오늘 중풍병 이야기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요 이게. 그러니까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화낼 만하다니까요 이게. 우리가 예수님 알고 예수님은 그럴 일 없다 이렇게 쉽게 가지 마세요.


인간은 상식이다가 아니라 인간은 욕망의 경사로로 올라가고 있어요. 경사로.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농땡이 부리다가 출세하기만 기다리는 이런 탄젠트같은 인간 있고 보통 그런 인간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뭐냐? 코사인이나 사인 곡선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어느 정도 욕망 올라가면 아이고 욕망 올라가면 안돼. 주의해야 돼.


그런데 탄젠트는 뭡니까? 무한대로 욕망이 무한대로. 집에서 할 짓이 없으니까 이거나 무한대로. 무한대로 하는데 그 무한대 중에 하나가 욕망의 경사로 중 하나가 뭐냐 하면은 자기의 성화론이에요.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왔나? 천로역정 보면 계단 나오지요? 천로역정. 나오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자 이 말입니다. 바닥에서 신앙생활 한 5년 했습니다. 부릉부릉 시동 걸어서 올라갑니다. 10년 했습니다. 20년 했습니다. 30년 했습니다. 40년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 매달려있지요. 처음에 바닥에 있을 때는요 쉽게 바닥에 떨어져도 대단한 충격이 아니에요. 두 달만에 한 번씩 갔다가 여섯 달만에 갔다가 가는데 꼬박꼬박 다녔는데 여기 코로나 걸렸다. 그러면 삐졌다.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이 지점 가서 뒤를 한번 돌아보세요. 아주 현기증 날정도로 높은 자리라니까 높은 자리. 이게 성화로 가는 사람은 이게 겁나는 거에요. 올라온 공로가 있잖아요. 아까 100m 이야기 한 번 더 할까요? 100m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자기는 완만하지만 이미 높이는 몇 미터 올라갔다? 사인30도 올라갔으면 이미 50m는 올라온 거에요. 여기서 떨어지나 빗면에서 떨어지나 높이에서 떨어지나 50m에서 떨어지나 떨어지는 겁니다. 참을 수가 없지요. 지금 여기서.


그러면 여기서 참을 수 없으면 뭐라고 욕 합니까. why me. 주여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이런 소리가 왜 나오는 거에요? 왜 하필이면 접니까 이런 소리 왜 하는 거에요. 지금 떨어질려고 하니까 바닥까지 가려고 하니까 너무 무서운 거에요 지금. 지금까지 올라온 공로가 어딘데. 이게 평신도 같으면 괜찮아 그런데 이게 만약에 목사다. 목사인데 바닥 떨어져 보세요. 이거 사인 한번 그려볼까 몇 미터인지? 이렇게 떨어져도 마찬가지거든요.


이것 보세요. 이게 얼마나 가면 갈수록 성화하면 성화할수록 예수님이 하는 세상 모든 조치를 뭐로 봅니까? 나의 적으로 보는 거에요. 그럼 누가 적이 된다? 예수님이 적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의 의해서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신 이유를 알겠지요. 선악구조,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그들은 이미 그 당시 유대계층이 일곱 계층이었어요.


그럼 제일 밑의 계층이 뭐냐 하면은 바닥이 세리와 창기입니다. 강도입니다. 그들은 뭐냐 하면은 최고가 사두개인, 그 밑이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 오늘 말씀대로 하면 교법사들.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 이만큼 올라가 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바닥이 있는 인간이지만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고 뭐를 자청합니까?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나는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이만큼 했다는 거에요.


이게 오늘날 제가 교인들에게만 하는 게 아니고 오늘날 모든 사람보고 하는 거에요. 모든 사람보고. 자기의 과거를 알잖아요. 이만큼 본다는 게. 지금까지 파출소 한 번 안가고 경찰소 부름 한번 안 받은 게 그게 얼마나 조심스럽고 자기 절제와 자제를 총 동원했던 소중한 결과가 뭐냐? 이 정도까지 남한테 칭송받는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된 거에요.


그런 식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가지고 또 교회 와서 성경 펴고 예배드리고 찬송가 부르고 앉아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중풍병 이야기가 그 현장에 단순히 중풍병 환자만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교법사 있다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한테 잘 배울 생각하지 말고 출발점을 어디서 해야 됩니까? 소위 잘났다고 여기는 자기 의를 짜내는 일에 모든 일을 몰두하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우리는 뭐로 봐야 돼요? 우리 자신으로 봐야죠. 왜? 주님께서 그 현장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그 중풍병자 그 바리새인 전부다 우리가 그쪽에 서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중풍병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20절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누가 누구 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주님이 자기가 한 성과에 결과물 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목자가 양보고 이야기한 거라니까요. 목자가 양 될 때 앞에 연결된 통로가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너를 위해서 네 자리에서 죽었다. 죄인의 자리에서 죽었어요. 이 자리가 내 자리인줄 아시죠? 아니에요.


주님이 들어와서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은 그 자리에 우리가 그 살던 자리가 주님의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이질적이냐 이게 놀라운 이야기란 말이죠 이게. 대구강의할 때 초반에 이야기했습니다. 로마서 4장 2절 “아브라함이 행위로 할 거 같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자기 행위로 할 것 같으면 있으려니와”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데는 무엇이 의도적으로 주께서 배제했다? 아브라함에게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해버린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 바깥에 뭐가 있느냐? 없는 아기가 생긴 거죠. 없는 아기가 있는 아브라함을 대신 차고 들어오는 거에요. 아브라함의 인생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마치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었다가 살아난 그것이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에요. 우리를 새롭게 우리를 해석할려는 주님의 토대고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 있다면 내 행동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봐야지요.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게 우리의 삶 아닙니까. 우리는 바리새인으로 죽고 우리는 서기관으로 죽고 중풍병자로 죽고 죽게 하시는 그분의 해석이 나를 살리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은 목자가 되고 우리는 양이 되고 한통속이 된 거에요.


양이라는 것은 없어요. 목자도 없어요. 다만 주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일을 벌려버리면 성경에 나오는 개념 있잖아요. 용어. 양, 목자, 이스라엘 그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에요. 새롭게. 오늘 이야기는 중풍병 이야기지만 결국 선행된 십자가입니다. 선행된.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 안에 내가 예상 못한 다른 게 들어와야 돼요.


그게 바로 지난 낮 설교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 내 안에 그리스도 일하고 있다는 것. 이거는 슥 들어온 거에요. 사도 바울 허락도 없이. 마구 들어온 거에요. 주님이 내 허락도 없이 주님이 내 것이라 여기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버린 거에요. 완전히 무당 귀신 들어온 거랑 똑같아요. 그냥 들어와버린 거에요. 무당은 원래 그 안에 귀신이 들어있지만. 이질적인 분이 슥 들어와버린 거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아까 그 욕망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뭐냐? 내게 속하지 않은 것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게 되면 그 분이 바로 나로 하여금 네가 욕망 따라 선악과 따라 살았던 인간인 것을 지적질하시면서 나에 대한 의미와 자랑거리와 가치는 깡그리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없애버립니다. 나를 없애요.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월이라는 것은 세월은 내가 왜 나는 부정당해야 되는 그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락한 시간들이에요. 주께서 허락한 시간들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아침에 눈뜨면 운전대 고장 났고 아무것도 안되고 그냥 아무것도 안되니까 우리가 할 말은 뭡니까? 주여 오늘 또 뭘 해야 내 죄가 또 드러나십니까. 이미 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까 했잖아요.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을 받았잖아요. 다시 한번 정리할까요? 죄 사함을 받았죠? 죄 사함은 나의 욕망 속에 없는 거죠? 없는 거였다. 나는 사인 곡선이에요. 내 행함만큼 이익을 얻는 행한 만큼 선한 열매를 얻는 게 내 방식이에요. 죄 사함은 없는 거에요. 없는 게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간다?


나는 내 행한 대로 상을 받겠다는 시도가 얼마나 이게 사함을 받아야 될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걸 드러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환이 되는 겁니다. 이게 내가 볼 수 없는 볼 수 없는데 이미 메시지의 운반체가 되어있는 거에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에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루어지는 몸이에요. 십자가를 위해서.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것. 그러면 성도는 대외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했던 오해 있잖아요. 오해와 비난을 이제는 누구 몫이냐 하면은 우리에요. 중풍병자 된 성도의 몫입니다.


성도가 그 고난을 똑같이 받게 되는 체험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 감축드리옵나이다. 축하합니다. 예수님을 해임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축합니다. 축하할 일이에요. 네가 내 사람이기 때문에 고난 받지 세상은 너를 미워해서 미워하는 게 아니고 나를 미워해서 네 속에 내가 있기 때문에 너는 미움 받도록 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미움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러면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질문 자체가. 미움 받기 위해서 뭘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어요? 본인이 주도권 본인이. 내가 미움 받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면 주께서는 선악체제에 의해서 상 줄 거죠? 그것은 사인 곡선이에요. 사인 곡선. 코사인 탄젠트에서 사인 곡선 탄젠트에요 탄젠트 또 욕망이에요.


내가 하는 것이고 가만있어버리면 “그 나이에 아픈데 없습니까?” “아픈데 없는데요.” “아이고 시건방지네. 뭐야 싸가지 없는 거야 저거 뭐야 자랑질이야 뭐야. 남편이 애를 먹입니까?” “남편 말 잘 들어요.” “뭐야 그럼. 나만 엉터리야. 은근히 약 올리네. 은근히 질투 나네.” 그냥 평소대로 살아가시는 것이 주께서 고장 난 차를 직접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알아서 가는 거에요. 왜? 우리 몸이 주님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자신의 양이기 때문에 목자가 우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 한번 봅시다. 10잘 28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 보세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 영생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양에게 영생을 빼앗지 않게 지켜준다 이 말이죠. 내가 아니고 자기 양에게.


그러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영생을 안 뺏게 해줘요. 왜? 어느 인간도 전적인 죄인이 될 수 없거든요. 왜? 선악체계가 남아 있으니까. 내가 나쁜 짓을 했지만 아주 나쁜지는 않다고요. 선한 게 있으니까 바리새인처럼. 그런데 죄사함을 받아버리면 이미 우리는 뭘로 규정되어 있습니까? 네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지옥 갈 짓거리라고 이미 규정을 받았잖아요. 그렇지요?


병 고치러 갔다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병 고치러 왔다는 자체도 지붕 뚫는 자체도 뭐다? 이게 그 지붕 뚫는 것으로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다? 없다? 내 행동으로 죄사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잖아요. 그 분이 나를 죄 사해주게 되면 이것은 그 누구도 처리되지 않아. 이미 용서받은 용서가 처리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기대하지 않는 죄 사함이 올 때에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죄 사함을 줘버리면 내가 예상하거나 기대한 죄 사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악마가 와도 빼앗기지 않는다 이 말이죠.


이런 고백이 될려면 우리는 나 자신을 볼 때 뭐로 봅니까? 그냥 죄 덩어리로 보고 살면 돼요. “니가 그래 옷 하나 해 입었나?” “죄인도 옷 해 입지 뭐. 죄인도 옷 해 입지 뭐.” “그 옷 입고 어디 갈려고?” “지옥가면 지옥가는 거지 뭐.” 내 형제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그리스도와 끊어질지라”. 로마서 9장. 왜 이런 자신감 어디서 나옵니까?


주께서 지시하는 게 네가 바로 중풍병자고 네가 정신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네가 바리새인이고 너만 잘났다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은 안 보이지만 나는 비로소 주님에 의해서 보여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위에 있는 메시지 믿고 우리는 죄 사함 믿고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살던 그 모습처럼 죄인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가는 그것이 예수님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깜짝 놀랄만한 소식으로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상도 못한 정말로 예상도 못한 생각도 못한 죄 사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죄 사함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