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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친구 210221 본문

주일학교 설교(이근호)/주일학교 설교

친구 210221

정인순 2021. 2. 21. 13:43

친구 210221

 

음성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지난 시간 이어서 다윗과 계속 연결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왕이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라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왕을 세우는 게 아니에요.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우지 않은 왕이 먼저 등장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이스라엘을 다윗을 통해서 새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기존의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새 나라를 만들려고 새 왕을 뽑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만약에 메시아를 만들라고 하면 아주 고상하고 점잖고 인자한 그런 메시아일 거예요. 여러분들이 큰 교회 목사들 한번 보세요. 인물 되지 풍채 되지 성격 되지 걸음걸이 점잖게 되지 촐랑대지 않지 영발 있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것은 인간들이 그걸 그렇게 골라서 그래요. 사도 바울 같으면 초반에 땡이에요. 절대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당회장으로 안 세웁니다. 두루두루 인품이 니 나 할 것 없이 그냥 후덕한 인품 모든 걸 수용하는 인품 그런 사람 원하겠지요.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줬고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 자리가 굉장히 안정적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울만한 위인이 없다 이 말이지요. 심지어 사울을 통해서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이겼으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통해서 일하는 줄 알았지요. 백성들이 그렇게 안 것은 백성들이 그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주신 것은 그 왕이 잘릴 때 이스라엘도 같이 잘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세운 왕에 대해서 믿지를 못 하고 저 사람은 왕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그 순간 이스라엘 본인들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그 나라가 아니라 이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신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믿지 아니 하면 아버지께서 갈 자가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게 유대인이잖아요. 그리고 소위 신을 인정하는 철학자들이고 과학자들이고. 예수는 인정 안 해요. 예수는 인정 안 하지만 두리둥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는 어떤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망상이 어디 있습니까? 실제적인데.

 

그래서 이 다윗이 딱 등장 했을 때 사울 집안은 이제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 집안이 망함으로서 다윗의 등장은 이 세상의 모든 족보에 대한 부정이다, 모든 족보를 족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울 집안이 망해야 되는데 딱 한 사람, 사울의 요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 친구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해요. 친구라 하는 것은 서로 동등된 레벨이 수준이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 게 없이 되는 관계를 친구라 하는 겁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야! 집에 가서 아빠 카드 갖고 와. 나 담배 사줘라.” 이건 친구 아니지요.

 

이건 학폭이죠. 이건 배우 돼도 소용없습니다. 국가 대표도 잘려요. 그건 깡패지요. 친구라 하는 것은 내가 더 높고 니가 더 낮다가 아니고 니가 더 높고 내가 더 낮다가 아니라 친구는 그러한 사이 말고 제 3의 관계에서 둘 다 동등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과 친구가 되었어요. 친구가 되면서 요나단이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 니가 훌륭한 게 아니고 니가 대단한 것이 아니고 너를 너 되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믿는다.” 요나단의 이런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예요. 당신의 조건과 인품이나 성격에 내가 반해가지고 당신을 친구로 삼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성격과 그 인품은 나중에 돈 좀 있고 권력 있으면요 언제든지 배신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배신하지요. TV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전부 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 “당신은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았습니까?” 하면 전부 다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아빠 엄마가 보증 잘못 서서 망했다는 거예요. 보증을 왜 잘못 섰는데? 친구라고 믿었다는 거예요. 이건 상대방이 친구가 아니고 친구를 이용하려고 했지요.

 

처음부터 다시, 오늘 친구 이야기입니다. 친구 이야기인데, 오늘 제목이 다윗의 친구예요. 요나단이에요.

 

친구는 뭐냐 하면 나 잘났으니까 나한테 굴복하라. 또는 나는 니보다 못났으니까 니한테 한수 배울래. 이건 친구가 아니에요. 친구는 너 나 나와 너 있기 전에 다른 게 있어서 같이 그 다른 걸 보는 게 친구예요. 다른 걸 보는 걸 친구라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우리나라에 살면서 가보지 못한 곳이 있어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뭐냐? 나이트클럽이었어요. 지금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나이트클럽을 알려고 갈 수도 없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아는데. 나이트클럽에 갈 때 사람들이 거리두기도 안 하고 복짝복짝 해가지고 부비부비 하고 있더라 이 말이죠.

 

그런데 내가 상상해 봤어요. 나이트클럽에 한창 춤추고 있을 때 음악이 싹 정전 되가지고 끊어졌다, 부비부비 하는데 음악이 그쳤을 때도 정숙 가운데 이러고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나이트클럽에서 친구 사귄다는 것은 이건 사람 보고 사귀는 것이 아니고 음악 보고 사귀는 것이구나. 음악의 통제 아래 음악의 지배 아래 정신이 완전히 음악에 휩쓸려서 그 음파 에너지 해가지고 둘 다 정신이 없어가지고 남의 여자인지 남의 남자인지 구별도 안 되고 부비부비 하는 거예요. 안 가봤지만 지금 상상하는 거예요. 안 가봤다는 것에 줄을 쫙 그어 놔야 돼.

 

그처럼 요나단과 다윗은 뭐를 둘 다 알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결코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대한민국은 결코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대한민국이. 이건 뭐 대단한 신앙이에요. 둘 다.

 

심지어 요나단은 전쟁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자기하고 달랑 두 사람이 갔거든요. 저쪽은 수천 명이라. 두 사람이 수천 명을 어떻게 이깁니까? 요나단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숫자와 상관없다. 저 할례 받지 않은 인간 같은 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도 된다.” 이런 식으로 자신만만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빠져버리면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유사품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으면 그건 교회도 아니고 그건 신앙인도 아니에요. 자기 안에 허풍만 들어있는 겁니다. 허풍만. 그래서 친구라 해가지고 사람 좋다, 인품 좋다 그래서 친구 사귀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왜 친구가 안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오지요. 13장부터 쭉 나오는데 거기 보면 예수님이 자진해서 나는 너희, 자기 제자들 보고, 나는 너희 친구라 해놓고 뭐라고 단서를 하느냐 하면 왜 친구냐 하면 친구는 자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게 친구 사랑이에요. 친구가 되었으면 그냥 말로만 친구가 아니라 목숨을 바치는 이것보다 더 큰 친구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 나라에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말로만 친구다, 니가 원하는 것 도와줄게.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너의 죄를 위해서 용서하기 위해서 내가 아버지 앞에 대신 내가 벌 받을 게. 내가 벌 받을 게. 그렇다면 벌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 예수님이 희생했다는 조건 하에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로 통하는 게 있어요. 말이 통해요. 주님은 날 위해 죽으셨고 나는 주님의 희생 덕을 봅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오늘 친구입니다. 오늘 친구인데 친구는 뭐냐 하면 서로의 조건 보고 친구 하자. 친구 먹자. 이게 친구가 아니에요. 친구는 제 3의 것, 제 3의 것, 다른 쪽 내가 원치 않았는데 뭔가 제공 되는 그 무엇, 나는 원치 않았는데 엄마가 이렇게 짧게 깍아주세요. 확 쳐주세요. 이렇게 할 때 이건 나 너를 안 보고 제 3의 요소, 나의 나 됨을 따로 챙기시는 그 분을 쳐다볼 때 둘 사이는 친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보고 또 우리도 아버지를 볼 때 아버지가 하는 일은 자기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이게 친구의 유일한 조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서슴없이 “내가 너희와 친구가 되겠다. 단 조건이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죽어주마. 따라서 나 말고 절대로 다른 친구는 너한테 두면 안 된다. 너를 이용할 자들이다.”

 

오직 성도끼리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 둘 다 못난 죄인인 것을 인정할 때 이게 형제 이상으로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서 같이 친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희생 그것만이 우리 죄사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하나님의 친구라 하셨는데 조건이 있었음을 저희들이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마. 이것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이 없고 이것보다 더 행운이 없음을 저희들 마음속까지 그 십자가를 마음속에 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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