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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욥기 16:1-5 / 구원을 낳는 차이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16:1-5 / 구원을 낳는 차이

정인순 2020. 11. 15. 16:40

음성 동영상 Youtube

 

구원을 낳는 차이

 

이근호
2020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욥기 16:1-5

(16: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16:3)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16: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16: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상호 대조가 되는 풍경이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은 악의 편에 해당됩니다. 문제는 본인들이 그것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선과 악은 본인들이 결정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기준은 하나님의 관여로만 성립합니다. 욥의 친구쪽과 욥쪽, 어느 쪽에 주님이 관여했는지 보면 됩니다.

당연히 욥쪽에 주님이 관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은 절대로 욥을 비난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을 비난합니다. 어디가 문제일까요? 그들은 자신이 악에 속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내 자식을 목사로 헌신하도록 조치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경우,

악쪽에 속한 사람은 그것이 의로운 일인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은, “나는 내 자식을 목사로서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한 그 일이 나는 죄인 것을 안다”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던 상관없이 본인이 속해있는 그 세계 자체가 악한 겁니다.

그 질서체 자체가 악한 겁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까요? 그것은 새로운 질서체와 와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12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나타나는 새로운 질서판은 기존의 질서판을 폭격하게 될 것입니다.

개개인의 자질문제가 아닙니다. 특별한 인물의 등장으로 야기된 결과적 상황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됩니다.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왔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는 상상도 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대자연의 안정된 질서체제는 그 안에서 인간의 정신적 안정성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한결같이 질서 있게 운행하는 대자연은, 그 자연을 보고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안정성이 신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다고 여깁니다. 즉 안정적인 대자연 안에서 갖추어진 질서는 인간들 자기들 속에 맡겨져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헤롯왕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안정적으로 꾸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헤롯은 이러한 자신의 세계의 안정성만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자신의 질서체계에 구멍을 뚫린 것을 알고 크게 노했습니다. 마태복음 2:16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동방박사에게 속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동방박사 입장에서는 헤롯왕이 굳이 상대할 대상도 아닙니다. 다른 질서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친절을 베풀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동방박사가 따로 복종할 권세자는 있습니다. 별들조차 굴복해야 될 인물, 그분은 아기예수입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서 악과 의의 영역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악의 질서체에서 하나님의 관여를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들겁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2:37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12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도 하나님의 관여자인 메시야를 인간의 능력으로 찾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와서도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 정도로 알았습니다.(마 13:55) 이는 본인들이 치명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관점이 없어 그러합니다. 즉 자신은 늘 안정적인 본질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차이나는 다른 질서판이 와서 들이받아버리면 인간의 자기 정당성은 위협받고 헤롯왕처럼 모든 인간들은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관여하게 되자 욥의 친구들은 결국 발악하듯이 자신의 일관성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해 욥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결코 정당한 ‘한결같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31-32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 근원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지 않는 것으로 질서잡혀 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염려로 그들의 마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위에 무슨 말씀을 덮고 있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평을 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여란 바로 위선적으로 덮고 있는 그 층을 벗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의로운 쪽으로 옮겨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로마서 3:9-12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와 의’라는 것은 딴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이끄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성도를 앞에서 이끄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마치 루돌프 사람에 이끌려가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말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본인을 안정되게 시도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서 이미 완료성을 가지고 이끄는 십자가의 질서판을 보면서 살면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신경쓰지 말라는 겁니다.

자꾸만 자신의 행동에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 마시고 원없이 살면됩니다. 자기를 지키고 방어하는 식으로 살지 마시고 주님이 이미 해놓으신 그 업적과 공로만 바라보면서 따라가는 식으로 살면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곁눈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관여가 최종 어떤 식으로 확정난 것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저하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핑계대로 자기 의로움을 따로 계산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57강-욥기 16장 1~5절(구원을 낳는 차이)2020111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6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욥의 친구는 이 성경 욥에 의하면 악이 되고 욥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은 뭐가 되느냐면 악의 자리에서 의의 자리로 옮겨가는 거죠. 우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구원될 자는 궁극적으로 어느 자리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에 대조가 되는 두 가지의 공간을 통해서 둘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이 아팠을 때 원 없이 저주를 퍼붓던 그 자리, 그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또 욥이 보기에 그건 악의 자리입니다. 그건 구원되지 못한 형편에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아프고 하나님에 의해서 고통스럽고 하나님 때문에 인생이 와장창 망가졌는데 그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욥 네가 잘못했다고 이렇게 억울함을 당하는 그 모습에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 자리가 구원의 자리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확연하게 여기서 다 나오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우리 희망 사항이나 우리가 바라는 것을 덜렁 주는 것이 아니고 먼저 네 실상 네 자리부터 분명히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욥 친구 자리를 분명히 규정하게 하십니다. 여기 16장에 1~5절까지 보게 되면 특히 3절에 보게 되면 “허망한 말”이라고 나오는데 아무 결과를 낳지 못하는 백날 해봐야 소망이 없는 허망한 말이 어느 정도냐면 끝이 없다는 겁니다.

끝없이 계속 내뱉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전혀 구원에 도움이 안 되는 그런 허망한 말만 내뱉고 있습니다. 이걸 오늘날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문학 강좌입니다. 인문학 강좌. 방송에서 나와서 구원이 전혀 안 되는 인간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세상을 선동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욥이 말하기를 너 정도 수준은 나도 된다는 겁니다. 너 정도 수준은. 내가 너희들 하는 말을 몰라서 지금 너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왜 너희들 허망함에는 새로움이 안 나오느냐는 겁니다. 새로움이. 새롭다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본인이 악의 자리에서 의의 자리로 옮겨 가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손길이 있어야 새로움이 나오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내가 얻어터져야, 얻어맞아야, ‘아, 내가 맞을 만했구나’라고 했을 때 새로움이에요. 인간은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자신의 형편을 긍정적으로 자꾸 방어하려는 의도가 강해요. 지키고 방어하고 유지하고. 그 방어 중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가, 그 방어를 하는 다큐멘터리 실화 영화가 곧 나옵니다.

제목이 ‘봉쇄수도원’. 제목부터 벌써 방어적이잖아요. 봉쇄수도원. 전에 KBS에서 특별히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해줬어요. 자진해서 갇혀서 오직 하나님만 찬미하는 천주교 수사들의 단체. 친목 모임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마음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선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선악을 알기 때문에 추구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자기가 악하다는 것은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봉쇄수도원은, 그것 말고도 많은 수도원이 있지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겁니다. ‘내 아들 신부 되게 하겠다’라는 거 할 수 있어요. ‘내 아들 목사 되게 하겠다’라는 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 목사 만드는 것이 죄라는 것은 이건 못하죠. 내 아들 신부 만드는 그것조차도 악마의 죄라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하는 짓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짓거리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과 어떤 판단을 해도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 것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 이야기했듯이 나는 날마다 내 속에서 배설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나를 통로로 해서 계속 배출하고 있다. 썩은 오물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은 거죠. 그래서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와 욥 두 사이에 차이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걸 구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단독으로 너 천당 갈래 지옥 갈래를 묻는 것이 아니고 너와 대비되는 사람 또는 너와 유사한 사람을 두고 난 뒤에 네가 저 사람과 같은가 안 같은가를 네가 판단하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22장 37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이 되셔서 오셨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불법자와 동류가 된다는 그 말씀을 성취시켜야 해요. 이사야 53:12에 나오죠.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불법자와 동류가 된다는 것은 섞인다는 거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특별함을 알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목수의 아들이고 평범하고. 평범하니까 어떤 안 섞일 분이 섞였다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특별한 분이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는 거죠. 그것은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과 우리와의 차이점을 알지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인간과 다른 차이점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섞였느냐면 불법자의 동류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속했던 속하기 전에 세계는 불법자고 그 불법자 속에 예수님이 섞여 버리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불법자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 섞이게 해놓고 특별히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부활시키니까, 예수님만 부활 되니까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불법자가 되는 거예요.

오늘 욥 같은 경우에는 반대로 욥에게만 병이 들게 하고 다른 친구들은 멀쩡하니까 다른 친구들은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겁니다. 우리 여기 교회 있는데 여기 밑에 가면 미장원이 갑자기 하나에서 두 개가 되었어요. 1층에 미장원 있지요. 계단 타고 더 내려가면 아래쪽에 미장원 있지요. 저쪽 맞은 편에 미장원 있지요. 전에 작은 수퍼 하는 곳인데 그 가게 주인이 이쪽 미장원보고 이야기했어요.

“당신 이쪽으로 갈래?” 했는데 설마 미장원 있는데 또 미장원 들어올까 싶어서 안 간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미장원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미장원이 세 개가 됐는데 모든 차에 다 꽂아 놓았어요. 개업 이벤트로 20프로 할인해 준다고. 갑자기 여기도 저기도 손님이 없으니까. 정말 이 세상에는 불법자들이 가득 하구나를 느꼈을 거예요.

이처럼 나를 아는 것은 다른 20프로 할인하는 미장원이 있을 때 우리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위치가 같은 동업 같은 직장인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수입은 얼마 되겠는지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남자아이 세 명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한 아이가 “너 나이 몇 살이야?”라고 하니까 일곱 살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몇월 달을 물어보고 협박하려고 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까 한 아이가 화가 나니까 “우리 엄마 되게 예쁘고 장윤정이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듣는 아이들이 장윤정을 모르는 거예요. 그 이쁜 가수를 모르는 거예요. 다만 아이들에게는 우리 엄마 되게 예쁘고 가수인데 장윤정이라는 말에 이쁘다는 말에 꽂혀서 한 아이가 “우리 엄마 예쁜데 의사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 한 아이가 “우리 엄마는 더더 이쁘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이 “너희 엄마 직업이 뭔데?”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미스코리아 출신인데 직장이 없어. 기가 팍 죽어서 “집에 가자...”

아이들도 보세요. 자기 엄마 직장 없으면 아무리 이뻐도 소용이 없어요. 그게 구조적 차이남 이거든요. 내가 정작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은 ‘이쁘다’이고 만약 자기 엄마 이쁘지 않으면 거기 끼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처럼 모든 이 세상에 사람은 자기를 나를 파악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구조가 어떤 구조적이냐면 바로 불법자의 동류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네가 재주 있거든 한번 찾아봐라. 이것 중에서 재주 있거든 한 번 찾아내 봐”라고 던진 거예요.

사람들은 못 찾아내요. 제자들도 예수님이 왜 메시아 되는지를 몰랐어요. 욥과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의 더러운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분이 특별한 분입니다. 인간의 더러운 속성. 속성입니다. 겉모습 말고 인간의 더러운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 그것이 진짜 메시아입니다. 그 더러운 속성은 가만히 있으면 내가 더럽다 안 더럽다를 토론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두 질서 판이 서로 충돌해야 하죠.

그런 예가 신약에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동방박사가 등장하죠. 동방박사가 인간입니다. 당연히 인간이죠. 거기에서 만나는 예루살렘 헤롯왕도 인간입니다. 당연히 인간인데 그냥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어느 질서가 더 세냐로 만나는 겁니다. 헤롯왕은 자신감이 있었어요. ‘나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내 권세의 질서 판은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는 같잖아서 웃고 있어요.

왜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고정된 자리에 박힌 별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결코 고정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별이 움직이는 거예요. 별이. 그런데 이 세상을 사람들이 안정되게 보는 이유가 본인이 안정된 존재라는 것을 자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미국 가나 소련 가나 어디를 가나 나는 나다’라고 자기 자신을 안정되게 보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은 자기를 안정되게 보는 겁니다. 내가 5년 전이나 10년 후나 지금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내가 다른 인간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에게만 종속되지 타인에게는 종속될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남은 이용대상이지 내가 그 사람에게 굴복할 이유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동방박사는 보게 되면 별이 움직였고 동방박사는 군소리 없이 움직이는 별 따라 다녔습니다.

미국 신병훈련소 조교들 보게 되면 제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알아듣는 건 신병들이 막 바닥을 길 때 조교 하는 말이 “Move! Move! Move!”라고 해요. 움직여라. 움직여라. 그런 뜻이죠. 이걸 우리 말로 하면 “빨리빨리” 빨리 움직이라는 거죠. 욥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고정된 자리가 없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야 해요. 아플 땐 아파야 해요. 힘들 땐 힘들어야 하고.

본인도 주체를 못 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보장을 못 하겠어요. 나는 내일 되면 이렇게 될 거라는 스스로 자기가 내세울 것이 없어요. 남에게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어요. 자기 자신에게 어떤 안정감을 본인이 갖지를 못합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나를 믿지 않는 거.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있는 세상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1945년 8월 지나서 이미 미국과 일본 태평양 전쟁은 끝났습니다. 끝났는데 그 남태평양 섬에 팬티 바람으로 경상도 말로 빤쓰 바람으로 총들고 있어요. 전쟁 끝났어요. 전쟁 다 끝났는데 그 전쟁 끝난 소식을 못 듣고 일본 패잔병들이 남태평양 숲속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총 들고 미군들과 싸우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무려 수십 년 지나서도 아직도 몰랐어요.

시대를 읽을 줄을 몰랐던 거예요. 뭐 인터넷이 되겠어요? 라디오가 있겠습니까? 전쟁 끝났는데 자기 조국이 졌는데 그냥 항복하고 나오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천국이 이 땅을 공습했다고 침노했다고 했어요. 폭격했다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걸로 이미 확정 났어요. 스스로 내가 의 쪽에 속하겠다고 싸댈 필요 없어요. 가만있어도 그냥 지옥 가요. 죄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 해석을 가지고 고정된 해석을 가지고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를 착하다고 자기를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갖 말씀을 갖다가 들이대는 거예요. 덕지덕지. 꼭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처럼. 모든 말씀을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 쓰일 그 말씀을 아직도 나에게는 선한 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계속 들이대는 겁니다.

왜 그런 사람들이 마태복음 6장 31~32절을 그냥 넘어가는지 미스터리예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못 들었어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게 지금 여윳돈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지만 이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일 다급한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런 것을 바운더리(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그 후에 아무리 율법으로 자기를 위장하고 조작하고 해도 밑에 있는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은 이건 없어지지 않아요.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대로 있으면서 그냥 내숭 떨듯이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구조적 차이점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떤 질서 판을 끌고 왔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다시 동방박사 이야기하게 되면 동방박사가 헤롯왕에 대해서 자기는 이 권세자 이고 나에게 보고하라고 이렇게 할 때 동방박사가 속였어요.

동방박사가 왕을 속였습니다. “네. 보고해 드려야지요”라고 해놓고는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고 안 했어요. 그러니까 헤롯왕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동방박사에게 속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속여서 속은 것이 아니고 말이 통해야 말을 하죠. 서로 소속된 질서 판이 다릅니다. 한쪽은 이 우주마저도 아기 예수에게 종속된 채 움직입니다. 왜? 별의 존재 이유가 아기 예수에게 별이 엎드려 경배하는 그것이 이 별의 이유이고 그 별 따라가는 우리의 존재 이유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에게 고개 숙이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성도가 사는 것은 딴 거 없다. 십자가 진리가 이끌면 그걸로 이미 성도의 삶은 온전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무엇이 내 앞에 이끌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진리가 이끌면 그 진리에 증거대로 끌려가면 돼요. 내 앞에 가는 것이 동방박사 별이라면 그것이 십자가라면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살면 되지 내 형편이 어떤지를 왜 신경 씁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루돌프 사슴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면 돼요. 그게 산인지 강인지 바다인지 관계없어요. 산 넘고 바다 건너서 가잖아요. 어떤 곳으로 가든지 무엇이 이끄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어떠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별로가 아니고 아예 중요하지 않아요. 동방박사는 기존에 헤롯 질서에 구멍이 뚫린 겁니다. 이것에 헤롯이 약오른 거예요. 내 권세로 꽉 차 있어야 해요. 빈틈없이 내 권세로 꽉 차 있어야 한다고요.

목사설교 엿 먹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설교시간에 앉아서 휴대폰 꺼내고 통화하면 돼요. “네~오랜만입니다. 30분 남았는데 그때 갈게요”라고 나가서 하지 말고 앉아서 하면 돼요. 너의 말은 이 휴대폰의 말과 질서 판이 다르다는 거죠.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거죠.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면 자기 아이에게 막 나무라는 거예요. “야, 좀 조!용!히!하라고 했잖아!”라고 자기가 더 시끄럽게 하면서 그러면 목사에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는 뜻이죠.

주님은 욥을 보내서 욥이 아픈 것 그 자체가 무언, 침묵의 함성으로 들리게 만들었어요. 왜냐 하면 서로의 질서 판이 다르니까. 소속이 다르니까. 그래서 내 쪽 말이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그리고 욥은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너라면 그 정도는 다 알아. 내가 너 같으면 차라리 너희를 위로해 줬을 거야. 너처럼 이렇게 달려들지 않고”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너희들 하는 것을 다 안다는 뜻이에요. 갇힌 공간이 찢어진 거예요.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독, 모욕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헤롯이 두 살 아래 아이들 다 죽인 것처럼 결국 그 화가 예수님에게 미쳐서 예수님도 돌아가시게 된 겁니다. 우리는 그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구멍으로 보는 거죠. 유일한 통로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뚫어낸 희생당한 그 통로.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욥의 이 말은, 오늘 본문에 욥이 쭉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너희들 자리에 있으면 차라리 나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끝도 없이 허망한 말만 계속 하는구나. 이것은 바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의 삶이 무용하고 의미 없다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살게 되는가. 주님에 의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에게 무용성을 아무 의미 없음을 말씀이 와서 계속해서 이렇게 전달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내 삶을 요령 있게 꾸미려고 하다가 내 삶을 손에서 놔버리고 무엇이 나를 이끄느냐, 이 썰매를 누가 이끄느냐만 바라보면 되거든요.

비록 우리 삶이 다 찢어져서 남은 것이 쪼가리, 손톱만큼만 남았더라도 원래 초콜릿은 쪼가리가 더 맛있어요. 그 강렬한 맛이 쪼가리에 있다고요. 쪼가리라도 진리가 이끌면 그건 진리의 소속입니다. 진리의 부분이에요. 우리 자신은 그냥 있으면 무용합니다. 아무 쓸데 없어요. 이러다가 40, 50, 60, 그러다가 90, 100살 되어도 결국 우리는 100살 되어 이 자리에 앉아도 아무 소용없어요. 누가 끌어줘야지, 끌어주는 게 없으면.

날마다 우리가 끌어주게 되면 안정한 것은 끌어주시는 그 진리가 안정된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 짓고 그 증거로써 우리를 자기 설명에다가 우리를 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 믿음이 없는 우리가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자꾸 성경에서는 죄인이라고 하니까 죄 있는 것을 본인이 자꾸 찾으려고 하는데 그거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움직이려고 스스로 엔진을 다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 엔진 떼 내버리세요. 떼 내버리고 그냥 막사세요. 오랜만에 이야기한다. 정말. 막사시고 부담 없이 사세요.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이라는 사실을 늘 바라보는 즐거움과 거기에서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저하지 않고 살게 해주시고 머뭇거리지 않고 살게 해주시고 한번 당했다고 겁내지 말고 살게 해주시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주님 살아계심이 증거되기를 원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