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30강, 331강) 시공간, 노래 201103 본문
녹취:이하림
330강-YouTube강의(시공간 마태복음 26:30-33)20201103-이 근호 목사
제330강, 제목은 ‘시공간’. 시공간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모른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태어나서 눈 뜨면서 만나는 게 시간과 공간입니다.
시간의식은 좀 더 있어야 되지만 공간의식은 애들한테는 세계적인, 지리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엄마와 가깝냐, 머냐 하는 건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있어요. 엄마가 있는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니까. 시간도 엄마와 몇 시간 있느냐, 얼마나 함께 있느냐가 자기의 시간 의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공간이라 하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면 상당히 객관적이다. 이렇게 되지만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객관이라는 게 없습니다. 다 주관에서 만들어낸 객관입니다, 시공간도.
그래서 크면서 사람들이 뇌리에 기억되는 것은 본인이 다녀간 공간, 본인이 살았던 그 공간, 그 동네는 잘 알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도 어려울 때는 시간이 더디 가고 태평스러울 때는 시간이 기억나지 않아요. 언제 후딱 가버렸는지 실감나지 않아요.
이것이 어릴 때뿐만이 아니라 커서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입니다. 한 평생 살아놓고 뭐 살만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너무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공간 안에 어릴 때는 엄마의 몸이 있지만 커서는 누구의 몸이 있느냐. 본인의 몸이 있어요.
본인의 몸이 아프게 되면 세상의 시공간도 다 나를 힘들게 한 나쁜 시공간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성공을 하게 되면 자기가 놀던, 살던 시공간은 아름다운 것이고 정말 보탬이 되는, 도움이 되는 좋은 시공간으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시공간을 제가 언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생각할 때도 자기 몸이 기억하는 주관적인 시공간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 그대로 연장해서 옆 동네에 지옥과 천국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힘들게 산 사람은 천국 가서 보상받으려 할 것이고 동시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지옥불에 처넣어라.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겠다. 하는 식으로 천국과 지옥을 분류하죠.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고 힘들게 했고 못살게 굴었던 사람을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준다. 이렇게 하게 되면 갑자기 그 천국 가기 싫죠. 왜?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진짜 천국 가서 멱살 쥐고 또 한바탕 싸울 준비가 되어 있죠.
그래서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극단적으로 저주한다는 게 “너 같은 인간들은 지옥 간다.” 그런 말을 해야 약간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은 뭐냐. 나를 힘들게 한 그 이유로 인하여 내 몸이 만약에 천국 간다면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 그런 판정을 내리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천국과 지옥마저도 주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겠죠. 마태복음 26장 30절에서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오늘밤. 감람산으로 갔는데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밤, 시간 나옵니다, ‘오늘밤’이라는 시간.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이냐 하면 제자들은 아직까지 그날 밤을 몰라요. 인간의 몸은 미래를 예측 못하고 예상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들한테 그 이야기하면 좀 생뚱맞죠. 그럴 리가. 현재 내 주관적 몸은 주님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목숨 걸고 따라가겠다는 내 주관이 내 주관적인 몸을 알기 때문에 “오늘밤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버릴,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라고 장담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보게 되면 32절에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갈릴리. 공간 나오죠. 시간과 공간 모두다 인간의 주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 예수님이 하신 일을 위하여 엮여져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점을 알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자들이 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너무 자기 몸에 묶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몸이 자기 예상대로 행복하게 잘 될 것이라는 그런 기대에 차서, 그런 주관적인 기대 때문에 시간과 공간도 의당 그렇게 될 것이라고 강렬하게 시간과 공간에게 자기가 자신의 뜻을 어필하는 거예요.
되어라 되어라 되어라 내 뜻대로 되어라. 내 뜻이라 함은 자기 몸이 갖고 있던 주관이잖아요. 내 뜻대로 내 주관대로 되어져라. 부탁이다, 미래야. 부탁이다, 내가 어딜 가든지 그 장소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안 그런다고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저도 마찬가지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면, 내가 여기 왔다. 30초 내에 나 가는 방향으로 버스 앞에 대령해. 대령하란 말이야. 이거 누구보고 윽박지르는 거예요? 물론 명령조는 아니지만 please, 제발. 30초 만에 오길 바란다. 그런데 딱 보니까 내가 타는 차는 방금 떠났어. 30초 전에 떠났어. 앞으로 10분을 더 기다려야 돼. 그래도 난 복음을 믿으니까 아주 기분 좋고 그런 생각 들던가요? 뭐 천국이 있으니까 참을 수 있다. 그렇게 되던가요?
평소에 우리 생활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런 식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어떤 일을 보여주느냐 하면 어쨌든 저쨌든 간에 인간의 네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이렇게 틀어진다. 같지 아니하다. 그래서 너희들의 뜻 때문에 내가 십자가라는 힘든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나를 순수하게 믿고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너희 자신을 너희가 몰라서 그래. 나를 힘들게 한 요소만 폭발하고 있어. 나를 괴롭게 하는 요소만 튀어나온다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의 뜻을 간단하게 말하면 “절대로 난 네 뜻대로 해주지 않으리라.” 이런 뜻이에요. 이 시간과 공간은 누구 말 듣느냐 하면 예수님 말 들어요. 우리 말은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행여 여러분들이 아, 이거 내 소원대로 내 기대대로 딱딱 맞아떨어져가네. 내가 원하는 대로 딱 됐잖아. 할 때는 여러분의 소원을 시공간이 들어준 게 아니고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선물을 주신 겁니다. 뭐하라고? 주제 파악하라고.
이것을 네 뜻대로 생각한다면 선물 받고도 너는 건방지다. 아직까지 네 주관에 문제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르고 있으니까 네가 건방지다. 네가 어떤 것이 네 뜻대로 되거든 “주여, 이것은 뜻대로 되길 기대했던 그 자체가 미처 몰랐던 나의 죄였습니다.” 라는 것을 자백하라고, 그걸 내놓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뜻대로 해주시는 거예요.
기도해서 암 나았다 하지 말고 ‘기도해서 암 낫겠다는 자체가 주님을 힘들게 했고 내 주관이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내 소원을 기도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천국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이 돼요, 천국 자체가. 내가 행해서 가는, 따내는 세계가 아니라 천국 자체가 늘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로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31강-YouTube강의(노래 시편 150:1-3)20201103-이 근호 목사
제331강, 제목은 ‘노래’. 노래라는 것이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말 따로 있고 노래 따로 있어요. 그런데 래퍼가 랩 하면 그게 노래일까요, 말일까요, 하나의 대사일까요? 점점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노래든 말이든 공통점이 있다면 내 속에 들어있는 한(恨) 또는 표출하고 싶은 응어리진 내 감정 덩어리, 이런 것들을 입술을 통해서 소리라는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 내뱉을 때, 패턴이 있으면 노래고 패턴이 없으면 그것은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노래나 말이나 그 본질은 모두다 인간의 응어리진 것, 속에 가만히 담아두기 힘든 것, 혼자서 꾹 삼킬 수 없는 것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올 때 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말이라 해도 되는데 노래가 왜 특별하냐.
노래는 말이 발달된 것인데 사람들의 말에다가 인간의 감정 변화를 거기다 실어버렸어요. 감정변화를 실어버리면 그 말을 전달해서 사람들을 하나의 밴드, 하나로 묶는 것보다도 감정을 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강강술래 같은 옛날 전래 노래가 그렇게 되죠. 그런 노래들이 ‘강강수월래’ 그냥 말하는 것보다도 가락을 타는 거예요. 가락을 타고 리듬을 타게 되면 인간 감정이라는 그 에너지가 같이 동조현상이라 하는데, 누군가 이야기하게 되면 메아리치듯이 온 천지에 갑자기 다 파급되는 것처럼 새로운 감흥에 잠기는 분위기를 유발하는 데에는 딱딱한 말, 연설보다도 노래가 아주 직효죠. 거기다가 기타 쳐대고 드럼까지 쳐버리면 새로운 감흥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사람들은 소리예술이라 하는데 소리예술의 특징은 없는 기쁨과 또는 슬픔, 없는 감정을 그 현장에서 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그런 편리함 때문에 음악에 대해서 사람들은 즐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음악을 사람에게서 시작했다는 점을 유념해주시고 그 목적도 사람의 기분을 맞춘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150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보면 인간이 소리를 낼 수 있고, 그 소리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심, 감정을 담아서, 소리 에너지에 담아서 퍼뜨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에 허락했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면 구약 이스라엘이 찬양하는데 있어서 그 찬양의 원조라고 할까, 그게 누구냐 하면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입니다.
천군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사야 6장에 보면 날개 6개 달린 스랍이라는 천사가 나오죠. 가사도 있죠.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에 봐도 들판에서 양치는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죠. 천사가 나타나서 누가복음 2장 18절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천사의 찬양과 지상에서 인간이 하는 노래하고 그 차이점이 뭐냐. 이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죠.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인간의 억눌린 그 한, 억눌린 감정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모든 억울함, 뭐 억울한 것도 없지만, 억울함과 서러움과 삶의 아픔과 애환 이런 것들이 거기에 다 담아져 있고 녹아져 있죠, 인간의 노래 속에는.
사랑노래를 한다는 것은 사랑 없이 사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나의 힘든 것을 사랑으로 채워달라는 부탁의 하소연이죠. 그렇게 해서 사랑을 얻어놓고는 사랑 얻었다고 좋다고 또 기쁨으로 사랑노래를 부르잖아요. 없을 때는 사랑타령하고 사랑이 있으면 드디어 얻었다고 또 기쁨의 사랑노래를 부릅니다. 부르다가 또 둘이 깨어지면 이번에는 이별의 노래를 불러요, 이별의 노래를.
그러니 세상의 노래란 뭐냐 하면 자기 몸 위주이죠. 이 세상이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힘들어서 못 사니까 순간순간 나를 달콤하게 위로해주고 나로 하여금 힘든 것을 잊게 하는 그런 가락이 내 귀에 들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술을 왜 먹느냐 하면 술이라 하는 것을 먹는 순간 내가 초죽음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있어요. 죽음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든요.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거잖아요. 술을 먹는다는 것은 떠나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이 땅을 떠나서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이 세상에서마저 내가 실패자 되는 것을 내가 못 견디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술을 먹게 되면 죽음의 공포를 잠시 잊을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당기는 힘을 내가 잊을 수가 있어요. 기분 좋죠. 여러분들은 예수 믿기 때문에 술을 전혀 먹어본 적이 없잖아요, 단 한 방울도. 단 한 방울도 먹어본 적이 없죠. 고개 끄떡끄떡하고 있는데. 술이 뭐에요? 이 정도잖아요. 아침이슬이 뭐예요. 이런 거. 요새 소주 한 병이 얼만지 난 전혀 몰라요. 이렇잖아요. 술을 먹는 사람은 자살 대용으로 먹는 거예요. 자살 대신 술 먹겠다. 술 먹을래, 자살 할래? 그런 거예요. 나랑 사귈래, 술 먹을래, 죽을래? 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찬송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어요. 어떤 계획? 떠나버려라. 이 세상 미련두지 말고 훌쩍 떠나. 그것을 바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 취하는 것과 대비해놨어요. 5장 19절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했죠. 이 내용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한 현상은 술 취함과 반대에요. 술은 왜 먹는가. 이 땅에서 쫓겨난 이 세상 삶이 너무나 서글퍼서 먹어요. 기뻐서 먹는 것도 있지만. 기뻐서 먹는 것도 이 기쁨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 술로써 더 연장시켜보려고 술을 먹는 거예요. 그 기쁨은 얼마 안가서 시들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술로써 계속 이어보는 거예요. 결국 술이라 하는 것은 살기 괴롭다는 거예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지배하고 괴롭힌다는 겁니다. 그래서 술로 자기 마음을 달래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소위 찬양, 가스펠송, 찬양 집회를 술 대용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술 먹는 대신 찬양해서 이 세상 계속 살려고 하지 말아야 돼요. 시와 찬미는 그런 게 아니에요.
시와 찬미는 모든 것이 주님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일도 합력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된다고 생각해서 주신 일이기에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그대로 주어질 수 있도록 하신 것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주님 이런 은혜를 주셨네요. 진작 어제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으니까 찬미밖에 나올 게 없네요.’ 이래서 하나님께 감사, 감격해서 부르는 노래. ‘언제든지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도 상관없어요.’ 라는 기쁨에 잠겨서 부르는 노래. 이게 피조세계, 천사에게, 성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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