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28강, 329강) 속죄, 자유자 201020 본문
녹취:이하림
328강-YouTube강의(속죄 레위기 4:12)20201020-이 근호 목사
제328강, 제목은 ‘속죄’. 죄를 씻어준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올 때 얼마나 사람들이 반갑겠습니까. 죄가 있는데 인간의 방법은 의를 가지고 자기의 선행 가지고 죄하고 의를 맞바꾸기 또는 상쇄하기 또는 덮어씌우기라는 방식 외에 인간에게 나올 방식은 없어요.
내가 죄 지었기 때문에 책임을 내가 지겠다. 그러면 죄를 5개 지었다면 착한 일을 한 넉넉하게 10개 지으면 10빼기 5해서 5개는 남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면 나는 악한 일도 했지만 더 많은 선한 일을 통해서 내세가 있다면 또는 내세가 없더라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복 받을 만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거리낌 없이 자기 죄에 대한 가책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겠죠.
그러한 마음의 구조를 인간들이 거의 다 형성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형성에 대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게 참 신기해요. 사람은 네 마음하고 내 마음하고 서로 모르게 되어있거든요,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인간은 선과 악을 이야기하게 되면 안 통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 통해요. 이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증명되는 겁니다.
‘선한 자는 복 받고 악한 자는 벌 받아야 된다’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그것에 대해 동의하고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것은 평소에 본인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런 방법으로 자기 죄를 처리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전혀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죄를 처리합니다.
레위기 4장보면 거기에 속죄제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속죄제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죄를 씻는 데에 대해서 무엇을 동원하느냐 하면 불을 동원해요. fire, 불, 불을 동원한다고요. 죄를 씻는데, 죄를 용서받는데 우리 인간 같으면 선이 동원되어야 되는데 선이 아니고 불이 동원된다.
불은 보통 고기 구워먹을 때나 있고 음식 요리할 때나 불이 필요하지, 그 불과 내 죄와 무슨 관계를, 이렇게 아무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벌건 불과 내 죄와 관련 있다는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성경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할 때에는 우리의 기본 상식은 죄는 의로써 착함으로써 해결한다는 기본 바탕 위에 있는데, 그런 기본 바탕위에 있는 사람이 불과 그리고 죄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까지 받아들일 때에 그야말로 내 마음을 속이지 않고서는 선뜻 우리 마음속에 진리처럼 다가설 수가 없는 거예요.
‘뭐 하나님 말씀이니까 받아들여볼까’ 하는 이건 소용없어요. 이건 구색에 불과한 거고 그건 형식에 불과한 거고. 심중으로 “그래, 그렇지, 불이지.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역시 죄를 없애는 데에는 불만한 게 없어.” 라고 만약에 우리가 어떤 사람보고 물으면 그 사람이 의아해할 겁니다. “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몇이 있겠는가. 거의 없어. 다른 사람하고 생각이 통하지 않아, 그러면. 너는 이 세상에서 사회생활 못해.” 라고 핀잔을 받게 될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특별히 택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늘 감안해야 돼요. 모든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생각되어야 될 민족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그들 머릿속에서 나올 수 없는 방식을 그 이스라엘에다가 알려줘 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불과 그 죄를 연관시키겠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무서우니까 형식적으로 불과 죄를 연관시킬 거예요. 그러나 그 불과 죄를 형식적으로 제사라는 방법으로 연관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연관된 그 깊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형식이에요, 형식. 형식적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형식이 마음속까지 들어오려면 그들 자신이 그 형식 속에 말려들어가야 돼요.
사실 속죄하는 이 제사, 속죄 제사를 그냥 우리가 간단하게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라 봅시다. 사건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냥 사고 난 거예요. 이것은 이 세상에 사고 난 겁니다. 왜냐하면 예상을 못했으니까 생각도 못했으니까 대비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훅 들어오시는 것처럼. 뭐 고상하게 말해서 사건이지만 우리, 내 인생사에 사고 난 거예요.
아니 이걸 내 마음까지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입니까. 불이 어떻게 죄와 연관됩니까? 라고 우리는 납득이 안 되죠. 그럼 불을 지옥불로 바꿉시다, 지옥불로. 그러면 “죄를 씻으려면 지옥에 다녀오세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참 알기 쉽죠. 지옥 안 가려고 하지 말고 다녀오시라는 거예요, 다녀오시라.
어떤 사람은 군에 안가기 위해서 자기 손가락을 잘라요. 조금 잘라서는 안 되니까 많이 잘라요. 이 손가락 전체를 다 잘라요. 군에 안가기 위해서. 군에 안 가려고 손가락 자르지 마시고 그냥 군에 갔다 오세요. 지옥 안 가려고 착한 일 하지 마시고 그냥 다녀오세요. 다녀오시면 이미 심판을 받았거든요,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한 번 벌 받은 것에 대해 두 번 다시 묻지를 않습니다. 이 방식이 하나님 방식이에요.
‘네가 죄 안 지었다’가 아니라 지옥에 다녀와야 속죄가 된다는 것을 주께서 확정했다면 지옥에 안가기 위해서 갖은 노력하는 것은 속죄가 안 된 상태에요. 지옥 안가기 위해서 교회 다니기, 지옥 안가기 위해서 성경공부 하기, 지옥 안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 다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속죄가 안 된 상태라니까요.
왜? 지옥불이 무섭다는 거예요. 지옥불이 무섭다고 하지 말고 무서운 지옥불에 그냥 네 몸을 던져 넣어, 그냥. 속죄 안될래야 안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께서 ‘불심판’이라고 하는 거예요, 불심판.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죠.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심판을 하실 분이라고.
불심판은 지옥심판인데 지옥심판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의 심판이죠. 저주받는 거예요. 저주를 옴팍 받는 거예요. 그러면 저주의 세례에요. 그 저주의 세례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그냥 죽어. 그게 속죄야.
이게 말로는 굉장히 쉬워요. 레위기 4장 12절에 보면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라” 송아지에다가 안수를 한다고요. 안수를 하게 되면 그 송아지를 나라고 보면 돼요. 구약에서 속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죽는데 내 대신 다른 것이 죽은 걸로 내가 죽었다고 쳐주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의 언약에 이삭을 바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속죄?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데 주님이 대신 간 거죠. 그 지옥이라는 저주를 주님이 대신 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주님의 저주가 나한테 오게 되면 나는 이미 저주 안에 있고 동시에 속죄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두 번 다시 심판에 대해서 묻지 않으니까. 죄에 대해서 묻지 않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우리 식대로 죄를 씻으려고 하는 모든 짓거리들, 교회 다녀서 용서받으려고 하는, 성경구절 달달 외워서 용서받고자 하는 모든 짓거리는 뭐가 돼요? 그 자체가 속죄가 안 된 상태에요.
329강-YouTube강의(자유자 고린도전서 9:1)20201020-이 근호 목사
제329강, 제목은 ‘자유’. 아까 328강에서 ‘속죄’라고 했죠. 속죄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속에 우리가 합류되면 우리가 이미 저주받은 사람이 되버리죠. 저주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약의 법에 의해서 속죄제사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제사에 제물이 들어갈 거잖아요. 제물이 들어간다면 그 제물하고 구약에 있는 자기 이스라엘 백성,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속시킵니다. 하나로 만들어요. 이 말은 제사를 하나님께서 응답해버리면 그 효과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 효과가.
구약에서 나타난 그 효과란 뭐냐 하면 아주 단적으로 눈에 확 띄게 말한다면 바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이지만, 더 본격적으로 점점 발전되게 되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리고 약속의 땅에 있는 각 좋은 지역마다 기존의 본토박이들이 있죠. 그들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별로 한 게 없어요. 그냥 다 끝나고 난 뒤에 전리품 챙기듯이 그냥 챙겼을 뿐입니다. 이게 효과에요. 또 이런 효과가 있죠.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 다윗 덕분에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 군사들이 승리를 얻었잖아요, 다윗 덕분에. 자기들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 그냥 싸움 구경했죠.
그렇게 보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다윗이고 예수님이 희생제물이라면 우리가 예수님 보고서도 다른 데, 더 좋은 것에 눈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내가 살아있는 혜택, 교통사고 나서 그 순간 내 목숨이 없어져도 되는데 아직 목숨이 유지되는 것 보니까 어떤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입니까.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 할 때 사람들은 그 혜택을 입었다는 생각을 못하거든요. 그러나 성도는 누구 덕분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혜택을 입었는지 안다는 것. 안다는 게 뭐냐 하면 주님과 관련성, 관계성을 지으면서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9장 1절에 보면,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라고 했어요, 사도가. 자기보고 자유자라고 이야기해요, 자유자. 이 자유라는 말을 그 당시 사회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이것은 왕이 아니고서야 사용을 할 수 없어요. 세상 법에 저촉 받죠, 종교적으로 율법에 저촉 받죠.
자유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어떤 것에도 저촉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유라는 뜻이. 나를 질책할 게 이제는 없다는 거예요. 나보고 뭐시기 뭐시기 할 수 있는, 나무랄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나에게 도착하지 못한다. 네 행동 봐. 하고 우리 행동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는 거예요. 이게 자유입니다.
로마서 8장 같은 데에 아주 강조되고 있어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아 진짜 이거 배짱, 대단한 배짱 아닙니까. 누가 함부로 나를 정죄해. 나를 위해서 대신 처리하신 분이 주님이신데.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그걸 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마음으로 자유롭지를 못해요. 교인 누구 나갔다. 뭐 이런 거. 자유롭지를 못해요. 왜 자유롭지 못한가. 본인이 본인을 정죄해버리거든요. 내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돼. 내가 나를 나무래. 이 정도 되어야 되는데 얼마나 모든 게 어설프면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가.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책망을 한다고요. 내가 나를 발목 잡아요. 가정이 있는데 돈도 못 벌고 어딜 돌아다니느냐.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굉장히 꾸짖어.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본인을 본인이 뭐라고 합니까? 자유다. 나 구애받지 않는다.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일을 해요. 그러니까 여기 9장 3절에 보면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나는 누구로부터 “다오,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정도로 나는 자유롭다. 아무나 해서 집에 들어가 “먹을 것 내놓으세요” 하는 것처럼 그러한 자유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 보면 곡식을 밟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어요 (고린도전서 9장 9절, 신명기 25장 4절). 그러니 사도바울 자기는 복음을 전하는 소인데 소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소의 권리이다. 소의 권리인데 나는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그런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사용하지 않는 자유.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쉽습니다. 이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얻어진 자유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주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이 자유를 누리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사람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사람의 평가에. 나를 평가하고 나를 지켜보시는 것은 나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줬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는 말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이고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게 뭐냐 할 때 “자유입니다”해도 되고요. “예수님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다.” 이게 더 밀도 있는, 더 본질에 가까운 고백이라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자유를 우리한테 주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힘이 없어 십자가 달린 게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달리라 하니까 달린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남한테 생활비를 얻어도 되는데, 아버지의 뜻이 ‘생활비를 얻지 않는 것으로 네가 주님께 받은 그 자유를 보여라’ 하는 그 지시에 따른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자유라 하는 것은 철저하게 주님 말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주님 말도 안 듣고 자유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 말도 안 듣고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속죄해주신 주님의 말을, 듣지 말래도 나는 듣고 싶어요. 속죄를 해줬으니까.
내가 가야될 지옥을 누가 다녀갔어요? 주님이 다녀갔으니까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혼자 살기 싫어. 누구 말 듣고 살고 싶어. 주님 지금은 뭐할까요? 다음에는 뭐할까요? 이거 뭐할까요? 여기서는 뭐할까요? 2시간 뒤에는 뭐할까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늘 주님의 지시받는다면, 너는 자비량 해. 네, 자비량하겠습니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자유를 내 몸을 통해서 내 삶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아버지의 지시대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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