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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가인과 아벨 200906 본문

주일학교 설교(이근호)/주일학교 설교

가인과 아벨 200906

정인순 2020. 9. 6. 14:44

음성

 

가인과 아벨 200906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 이야기는 인간의 인간의 인간의 인간, 최초의 인간, 처음의 인간, 처음의 부부 가족은 어떻게 생겨났고 그 뒤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모세가 소설을 쓴 게 아니고 시내산이라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2100미터 쯤 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하고 단독으로 만났어요. 만나고 난 뒤에 모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 최초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며칠 만에 창조했고 처음에 아담이 있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지금 인간들이 늙으면 죽는지 그리고 인간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되었는지 그 내막에 대해서 모세가 다 이야기해준 거예요. 모세가 고마운 겁니까, 하나님이 고마우신 거예요? 모세는 그냥 자기가 받은 것을 그대로 다 성경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 받아서 다 적었지요.

여기에 대해서 나중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가 받아 적은 것은 모세의 뜻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그렇게 적었다, 그렇게 인정을 해줘요.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일찌감치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렇게 천지창조부터 다 알게 해줬었다.

그런데 그가 받은 것은 성령에,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짓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인간 류를 만드는 거예요. 새로운 인간, 인간 종을 만드는 거예요. 호모 그런 거 필요 없고 새로운 인간, 천국 가는 백성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임해서 그들에게만 알도록 성령을 열어줘서 마음을 열어줘서 알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내용은 인류 물리학이라든지 공학에서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알 수 없는 이야기, 인간의 물리학으로서는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처음에 인간은 아담이라는 처음 인간은 아담인데,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흙이에요. 흙.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이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니 출신은 흙이야. 잊으면 안 돼. 너는 흙이야. 분명히 흙이야. 흙이니까 아담 본인도 나는 흙인데 왜 살아있지? 하나님께서 관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관계하라고 흙인데 이렇게 말하는 흙, 숨 쉬는 흙, 밥 먹는 흙, 이런 흙이구나.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니가 흙인데 내 말을 지키면 니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할 수 있지만 만약에 내 명을 어기면 도로 흙이 된다, 이렇게 언급했지요. 죽는다, 라고 했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 했지요. 그래서 에덴동산에 그 이야기를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이걸 못 받아들여요.

그건 그렇게 처음에 인간은 만들어놨는데 왜 인간이 이렇게 고생스럽게 되었는가? 인간이 따먹지 말라는 것을 어겼기 때문에 쫓겨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그 열매가 중요한 것이에요. 인간보다 그 열매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가 더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가 더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아무리 인간을 만들어놔도 지시를 위반하면 하나님은 내 사람 아니다, 라고 처단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과 말씀, 그게 우선이지 꼴란, 대수롭지 않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흙이 될 뿐입니다. 대단한 체하면 안 돼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어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죽이지 않고 쫓겨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생을 한다는 것은 고생을 하다가 고생을 하다가 결국 흙에서 와서 흙으로 사라지는 겁니다.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마땅한 일입니다. 마땅한 일이에요. 알아들었냐? 이태야. 죽는 것은 인간은 마땅한 일이에요. 인간은 몸이 허물어지게 되어있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마땅한 거예요.

그러니 죽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아, 당연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금방 죽이지 왜 백 년 동안 살게 하느냐? 그것은 죽으면서 죽는 이유를 아는 사람만 다시 영광스럽게 살게 합니다. 다시 살 때는 다시 죽는 것이 없어요. 예수님처럼 살기 때문에 죽는 것, 저주 받는 것, 고생 하는 것 끝이에요.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에요. 이제는.

그래서 우리 안에 흙은 흙대로 돌아가고 흙으로 만들지 않고 예수님으로 만들어진 새 몸을 부여받는 그 사람만 영생, 영원히 사는 것, 영생을 얻는 겁니다. 그 영생의 나무는 뭐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나무가 두 개의 나무가 있었어요. 하나는 선악과나무가 있었는데 또 하나의 나무는 무슨 나무냐? 인간이 못 따먹게 한 나무가 뭐냐? 생명나무예요.

생명나무에는 영생이 있어요. 생명나무가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었고 예수님은 이 땅에 고정된 생명이, 움직이는 생명나무로 와가지고 직접 택배 기사가 되어가지고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해주십니다. 부여해 줄 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니 안에 내 산다, 해가지고 우리 허접한 우리 안에 주님이 들어와 살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의 성전처럼 몸처럼 들어와 살아버리면 내 안에 생명이 주님이 사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사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주님의 나라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와 그리고 사는 방법을 알고는 죽어야지, 하면서 그걸 어떻게 알게 하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아요. 큰 아들 이름은 가인, 둘째 아들 이름은 아벨. 아담과 하와도 오해했어요.

큰 아들이 전부인 줄 알고 이름을 찬란하게 지었습니다. 드디어 생명을 얻었다. 엄마 이름이 생명이거든요. 하와가 이름이 생명이에요. 생명이 생명을 얻었다 하고 좋다고 해서 이름을 얻었다고 지었는데 이게 틀렸어요. 이게 잘못 된 거예요. 그리고 둘째 아들은 허무하다고 지었어요. 그런데 둘째 허무한 아들이 생명이고 좋다고 했던 큰 아들은 진짜 허무하게 되어버립니다. 이건 탈락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아들을 둘을 만들어놓고 선택에 대해서 인간의 선택 자체가 엉터리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질이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이미 흘러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 선택을 잘 해야 돼요. 시험 칠 때 잘 찍으면 백점 맞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잘 찍어서 백점 맞고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잘못 찍어서 빵점 맞고 천국 가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일체 그 사람이 하는 행위와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사를 드리는데 동생 아벨이 제사를 드렸어요. 제사를 드릴 때 양을 치기 때문에 양을 바쳤고 큰 아들은 곡식을 했기 때문에 곡식을 바친 거예요. 바쳤다는 점에서는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뭘 바쳤느냐가 전혀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그들은 자기의 직업 가운데 일부를 바쳤을 뿐이에요. 둘 다 행동 가운데 잘못을 끄집어내려고 하면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없는데 문제는 받는 쪽이 가인 쪽은 안 받고 아벨 쪽을 받아버렸어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형의 것은 안 받고 동생 것은 받았다면 형은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동생 줄에 섰구나. 그렇다면 내가 너를 믿으마. 그래. 형이지만 이제는 너를 믿으마. 하나님께서 이쪽 니하고 통했으니까 나는 통하는 쪽에 내가 의지할 게. 이렇게 나오면 되는데, 이렇게 나오면 아무 문제 없었는데 형이 동생을 하나님께서 받으니까 하나님에게 항거하는 거예요. 삐져가지고 하나님께 대드는 겁니다. 니 하나님하고 한패지. 내 손에 한번 죽어봐라.

이건 아벨이 제물 바치는 거고요. 양을 바치니까 하나님께서 기쁘시고 흠양하는 그 대목이고. 형이 화가 나가지고 동생을 짱돌로 뒤에서 비겁하게 보이지 않는 데서 찍어서 죽여 버렸습니다. 동생을 죽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죽일 때 나서지 않았어요. 죽이도록 놔둬버렸어요. 왜냐? 동생이 죽어야 살아있는 형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종류라는 것을 드러내잖아요.

마찬가지로 아벨을 죽이듯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 나서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보고 예수님보고 죽을 땐 죽으라, 이거예요. 죽어줘야 예수님을 죽였던 모든 자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께서 안 받는 그러한 반대되는 엉터리 같은, 벌 받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들통이 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누워있는 것을 아벨로 보지 마시고 예수님으로 보세요. 예수님 죽으시고 돌 들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 자신으로 보자 이거예요. 우리는 죄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나와요. 이게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죽어야 되는데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용서하는 힘이 선악과 따먹고 죽어서 지옥 가야될 우리를 살리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이렇게 일하시는 것, 이게 바로 뭐냐?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책임을 묻는 거예요. 니가 죽이는 걸 몰랐지. 나는 다 알고 있어. 니는 이제 이 땅에서 쫓겨나가라. 그래서 가인은 딴 살림 차립니다. 이제는 약속이 있는 아버지 엄마를 떠나서 약속이 없는 자기 독자적인 자기만의 세계로 떠나버리죠. 이것은 오늘날 복음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을 후비고 우리 자신의 감추고 있는 것을 다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라는 복음을 주신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 다 잘난 체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이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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