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미아 대전-58강 사무엘상18장6-7절(무장의 힘) 20200428-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8장 6절부터 보겠습니다.
6절,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절,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7절까지 봤습니다. 여기 이질적인 것이 둘이 만나요. 사울과 다윗이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운행할 때에, 이 세상을 만들어나갈 때에, 이게 그 당시의 현실이거든요. 현실 만들기에는 반드시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이질적인 것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원수가 앞에 이사 온다고 이래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그걸 떼 내고 싶죠. 독단적으로 살고. 그게 나답고 생각하는데 정말 나다운 것은 내가 원치 않는, 나하고 섞일 수 없는, 영원히 평행되게 갈 수 없는 그런 요소가 둘이 마주침으로서, 여기 현실은 어떤 현실이냐 하면은 새로운 현실구성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현실.
사울이 없었으면 다윗이 속편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렇게 되면 다윗이 말한 현실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은 나 중심의 현실이 돼요. 나 중심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용납을 안 해줘요. 나 중심의 현실은. 이질적인 것을 만나지 못한다면 누굴 모르는가 하면은 내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만약에 나 중심의 현실이 되게 되면 우리는 쉽게 목적에 도달합니다. 그냥 목적이 아니고 최종목적. 최종목적이 어디냐 하면은 내가 최고가 되고 나 편안대로 사는 것이 최종목적이죠. 이걸로 좋사오니, 이래 되는 거예요. 최종목적.
그러면 내가 과연 이 세상의 중심입니까? 아니죠. 내가 온 세상의 주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는 목적입니까? 아니죠. 우리가 알기로는 이 세상의 주님은 나 말고 따로 계시죠. 어떤 미지의 분. 주님. 미지의 분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분이에요. 모르는 분이 따로 계시다 이 말이죠. 따로 계시고 이 분은 눈에 안 보이죠.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나를 최종목적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우리가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와서 싸운다 하지만, 사실은 다윗이 싸우려고 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다윗 내 중심의 현실과 주님의 구성하는 현실과의 싸움이에요. 나는 내가 최종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그 현실은 주님이 최종자가 되고 싶은 현실과 위배되는 겁니다. 마주쳐서 이거는 튕겨져 나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과정이라고 봅시다. 과정. 다윗은 본인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과정인데, 무슨 과정이냐 하면은 나 아니고 주님이 최종목적에 도달되어야 된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경로, 그 과정에 우리가 이 땅에서 쓰여 지는 겁니다. 뽑혀서 사용되는 거예요. 다윗이 형한테 도시락 전달하려고 왔지, 소년 다윗이 그 자리에 골리앗이 있는지 사전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모르죠. 그러니까 본인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도시락이 있었고 도시락을 형에게 전달한다. 이게 본인이 알고 있던, 본인의 한계치에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에, 누가 새로운 현실이 되면서 누가 개입을 하느냐 하면은 여기 골리앗이 개입했죠. 골리앗. 이거는 생뚱 맞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나 혼자 집에서 편안하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고 밥은 해도 되고 안 먹어도 되고 저녁에 늦게 와도 되는데, 장정 둘이 엉망진창을 만들어놨어요. 패턴이 다 깨져버렸어요. 내가 키운 개까지 시달릴 판이에요. 개까지 우울증 걸릴 판이에요. 벌써 개가 우울증이 좀..., 갑자기 웬 사람들이 쳐들어왔나? 내 나와바리에. 신경 바짝 써서 오늘 사료도 안 먹고. 짜증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외부에서 접붙여준 게 없으면 나는 그것으로 내 목적은 종료가 되고 종결이 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로 종결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나 중심의 현실이라는 것을 고집을 하게 되면 이것은 다윗이 보기에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싸웠지만, 우리가 다윗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사울 입장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이스라엘 왕이 누구냐 하면은 결코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에요. 지가 뭐 김정은도 아니고. 나이도 몇 살 먹지 않은 게 왜 갑자기 인기를 얻어요? 어디까지나 지금 누가 왕이냐 하면은 사울이 왕이라고요. 사울이 왕인데, 다윗이 지금 예상 밖으로 치고 들어온 겁니다. 거추장스럽죠.
바짝 사울 왕은 지금 화가 나있습니다. 긴장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성경을 볼 때에 내 중심으로 보지 말고 철로의 두 궤도처럼, 두 궤도가 나란히 있을 때에 상대방 편을 생각해보라. 바리새인으로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바리새인하고 우리하고 상관없다고 하지 말고, 바리새인 편에 서야 제대로 예수님을 발견하게 돼요. 바리새인 편에 서야. 왜냐하면 내가 바리새인 편에 설 때 바리새인이 남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의 삶은 뭐냐 하면은 기어이 자기 잘남을 포기 못하는 삶이 바리새인의 삶이에요. 자기 의로움을 포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실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정의로움, 선함이잖아요.
그러면 의로움과 선함이 있을 때에 나에게 뭘 주느냐, 복을 준다 이 말이죠. 나쁜 사람에게 복 준다, 나쁜 사람에게 복 주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나쁜 사람에게 복 주는 하나님, 상상이 안 되죠. 바로 나쁜 사람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세리와 창기를 부르러 왔기 때문에. 우리의 타고난 아담의 본성으로서는 하나님 자체가 진짜 하나님을 밀쳐버리고 악마가 만들어준 가짜 이미지의 신을 계속해서 붙들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서는 이걸 바알신이라고 하는데,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 우상의 특징은 반드시 앞에 붙는 게 있어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한 신을 내가 채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한 신. 늘 상투적으로 나오지만, 교회가 있다면 내 교회를 위한 하나님. 내 교회를 잘 되게 하기 위한 예수. 새벽기도에 가서 우리교회 망하라고 기도하는 교인 봤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그 자체가 바알신, 우상이라니까요. 우상입니다. 그러면 나를 위한 신이라는 말은 나라는 몸뚱아리만 가지고 나라고 하지 않아요. 내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나의 영역이 있어요. 나의 구역이 있다고요. 나의 구역. 당구알처럼 점점 더 단단해집니다. 자기 구역밖에 모르는 겁니다. 갈수록 점점 더 이게 응집된다고 하는데. 응집.
천문학자들이 별을 조사할 때 태양 정도의 별이 나중에 에너지가 다 소진되게 되면 수소원자(H2)가 헬륨원자(He)로 바뀌면서 에너지를 다 소비하게 되어있다 이래 되어 있어요. 더, 더 소비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중성자별이 된다는데, 태양만큼의 크기의 중성자별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몇 킬로 안에 수십조의 쇠의 무게가 다 포함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상상이 됩니까? 너무 무겁죠. 무거워도 너무 무거워요. 요만한 크기의 방에 한 1조 톤의 쇳덩어리를 다 집어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나죠. 무겁죠. 꿈쩍도 안 하겠죠.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디에 가는가, 요양병원에 가는 겁니다. 요양병원 안에 있는 그 노인네들을 보면 평소에 아무 할 일이 없으니까, 평소의 모든 생각이 할 일이 없는 순간 자기한테 다 집결이 돼요. 자기한테. 시간이 남아도는 그 빈 시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도 행함이라고 했거든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 모든 목적이 자기 의로움으로 똘똘 뭉치는데 온 정력을 거기다가 다 투자하고 다 소비를 해요. 내가 자식을 잘 키웠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잘난 엄마라는 뜻이에요. 그 말이에요. 나 자식 잘 키웠다. 그만하면 잘 키웠다. 내가 둘한테 해줄 대로 다 해줬다. 나가라! 뭐 이런 거.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 의를 자동적으로 자기가 점점 더 하는 거예요. 점점 더 강하고 강렬해지니까 건드렸다 하면 폭발해버리는 겁니다. 자기 분노에 자기가 미치는 거죠. 이게 자기보다 더 무거운 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뭐가 된다? 나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짐이 돼요. 그럴 때 해결책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라는 더 큰 짐이 와서 눌러버리면 이 나라는 것은 완전히 짜부라져야 되고 박살나야 돼요. 주님의 덩치 앞에서 네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자기를 아예 망하는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면 못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밖에 없느냐 하면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 순간에는 어떤 짓도 다 할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 옷 벗어달라고 하면 다 벗어줄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자기가 자기를 사수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아요. 주님 바라보기 바빠 가지고. 주님의 광채를 바라보는데 정신이 팔려가지고. 나한테 정신이 안 팔려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그 모습이 나오죠. 2장에. 들판에 목자들이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여기 묵직한 초월적인 세계가 덮쳐버려요.
그러면 지상에서, 대전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소소한 일이 돼버립니다.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평화로다. 니가 사는 현실은, 니가 음악 하는 것을 가꾸고 사수하고 지키고 하는 그게 니가 태어난 목적이 아니라 아기예수 만나러 가는 것이다. 니가 이 타이밍, 이 시간에 들판에서 양치는 것은 이거 해서 아르바이트해서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 시간의 만남, 일본말로 아다리라고 하죠. 천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타이밍에 밤새도록 양 치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뽑힌 사람을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 소유가 아니고 과정이에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경로에 차출된 겁니다. 뽑혀 나온 거예요. 내가 목적이 아니에요. 내가 양 쳐서 우리 가족들 먹여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살까? 내가 살까? 나의 생존, 이게 목적이 아니고, 주님의 존재 앞에서 나는 주님의 존재를 증거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갈뿐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에, 내 존재가 희석되고 과정으로 가려면 매일같이 수시로 내가 이질적으로 느끼는, 내가 역겨워하는, 내가 싫어하는 내가 귀찮아하는 그런 것과 억지스럽게 동반해야 될 상황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거예요. 자꾸만 동반해야 될 상황들이. 자식문제 처리하면 다른 문제가 들러붙고. 집에 개 키우는 것 귀찮았는데 개가 어떻게 죽었다. 해방이라고 했는데 고양이 두 마리 키우게 되고. 새로운 요소가 계속해서..., 내가 이쯤 숨 좀 돌릴 수 있겠지. 이제는 마음이 편하겠지. 홀로 편하겠지. 홀로. 나 홀로 사는 게 제일 편하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주께서는 사울과 나란히 붙여주는 겁니다.
사울 밉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울 입장에서 다윗이 미운 거예요. 내가 사울 미운 것만 생각하지 말고 사울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사울입장에서 다윗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눈에 티같이 느껴지겠습니까? 이런 경우가 고린도후서 12장에도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좀 마음대로 각색을 한다면.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다. 나는 삼층천의 천국을 봤다. 너희들 보기에 참 부럽지? 그지? 내가 그 정도야. 그 정도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는데 그 가시 이름이 무슨 가시냐 하면은 사단의 가시다. 악마의 가시가 꽂혔어요.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나한테 고통이 되는지, 물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가시를 빼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최종성, 나의 편안한 쪽으로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예단하고 예상한 그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게 된 그 원인 자체가 너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도 너는 감당해야 된다는 게 응답이에요. 니가 지금 고통스러워서 기도하는데, 제가 차마 남편자식보고 이런 말하기는 죄송합니다만.
내가 이 아픈 가시 좀 빼달라고 하는데, 그거는 니 소관이 아니고 내 소관이라는 거예요. 니가 존재도 아니고 과정에 불과하면서, 더 높은 곳에서 보는 과정의 그 의미와 취지를 개뿔도 모르면서 코앞에 있는 내가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하면서, 착오를 일으키면서 이것 빼주시면 주께 마음껏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 사도바울의 소원이 오늘날 우리의 소원과 다를 바가 뭐가 있어요. 똑같지요. 똑같아요.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앞으로 더욱더 헌신하고 복종하겠습니다. 이런 거래는요, 누구나 하는 거예요. 누구나.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다윗 좀 빼달라고. 우리가 다윗 입장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리고 가시가 사도바울이 표현하기를 무슨 가시냐 하면은 사단의 가시에요. 그냥 가시가 아니고, 에이 내가 실수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 이런 가시가 아니라니까요. 사단의 가시는 의도적이에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내가 죄 지어서 받는 벌이 아니에요. 징계수준이 아닙니다. 니가 정신 바짝 차리면 빼줄게. 이런 거 없어요. 끝까지 가요. 아니, 주님이 박아놨다니까요. 주님이. 주님이 박아놓은 거예요. 다리 아프니까 철심 박아놓은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사단의 가시가 빠지잖아요. 그러면 사도가 안 됩니다. 성도가 아니에요. 주님의 요소가 같이 합류되어야 성도라는 신분을 부여받지, 만약에 주님의 요소를 했다가 빼버리면 그거는 내가 돛대가 되고 내가 절대자가 돼요. 내가 나한테 우상이 돼버려요. 이거는 누구에게 복종한다는 그 요소가 빠지는 것은 도리어 사탄이 원하는 겁니다. 사탄이 원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이런 점을 고려를 하고 해석을 해주셔야 돼요. 이런 점을. 이런 점을 고려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사탄과 동행해서 살아야 해요. 남은 인생을.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은 “니 은혜가 족하다.”라는 것이, 사탄이 있는 이것 자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도바울의 삶이 계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에.
“주님만 좋으면 그만이에요.” 이게 참 말은 쉽게 합니다만, 주님만 좋으면 그만이에요. 나는 죽는다고 난리다. 못살겠다고. 스트레스 받아서 심장이 멈출 것 같아. 심정지 일어날 것 같아서 스탠트 수술해야 돼요. 중국 의사가 와서 수술해야 되는데. 나는 스트레스 받아서 죽을 지경인데 주님은 족하다는 겁니다. 니가 원산에서 죽든 말든 그걸로 족하대요. 김정은의 신세가 좋다고 할 게 아니고, 바로 우리가 그 모습이다. 김정은이나 우리나 아담에 속하잖아요. 김정은이의 속성이 지금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어요. 똑같습니다. 김정은이라는 그 청년이 원산 그 동네 산에서 감자나 캐고 감자나 먹으면서 그냥그냥 두 끼나 먹고 살게 된다면 스트레스 안 받을 거예요. 자기가 평민이니까. 위대한 태양이 아니고 평민이니까. 그렇게 스트레스 안 받을 거예요. ‘아이고, 살다가 감자 떨어지면 죽지. 배급 떨어지면 죽지.’ 뭐 이래 되겠죠.
그런데 김정은이는 자기를 뭐로 봅니까? 민족의 태양으로 보잖아요. 백두대간. 그러니까 이게 착오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지도자 그걸 보지 않는데. 그걸 빼고 보는데. 하나님은 그냥 죄인으로 보는데. 본인 옆에서 으쌰으쌰해주니까, 지가 백두대간의 뭐 민족의 지도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착오, 우리는 오늘날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라 이 말이죠. 우리도. 사도바울에게 사탄의 가시를 준 것은 마음을 낮추라 이 말이죠. 본인의 능력으로 못 낮춰요. 주께서 이걸, 그야말로 스탠트 수술을 하든지, 심줄을 심던지, 사탄의 가시를 박아서 사탄의 가시가 영원히 죽을 때까지 동행해줘야 비로소 주께서 규정한 사도가 됩니다. 사도에게는 성도다움이 돼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탄의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사도기 때문에 박아놓은 거예요. 사도기 때문에. 성경대로 하면 자고하지 말라고. 스스로 자기를 지도자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말 많은 사람은 말을 조심하고, 남을 가르치는 자는 혀를 조심하라. 뭐 이런 이야기가 야고보서에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일은 시키되, 일을 시킨다고 해서, 남이 나한테 배운다고 해서 니가 남보다 낫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여지없이 사탄의 가시를 거기다가 심어버린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의 흐름이에요. 흐름. 오늘 제목을 흐름이라고 할까? 흐름이라는 것, 흐름은 물방울들이 같이 통합돼서 그냥 하나님께서 쫙쫙 주의 주되심을 향하여 밀려나가거든요. 근데 그 물방울의 모양새가 다 다르고 크기가 다 달라서, 나는 니보다 더 낫다. 내 모양은 짜부라져서 인생 못 살겠다. 이러지 말라 이 말이죠. 어디를 가느냐 하는 이 방향이 중요합니다. 집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가신 곳이 우리 가는 곳이잖아요. 방향이. 주님 가신 곳으로 방향을 잡으면, 우리는 뭘 쳐다보느냐 하면은 주님 가신 곳을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주님 찾아 가는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주님 가시는 곳과 따로 본인만이 가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본인이 가고 싶은 곳. 그렇게 가게 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은 흐름이 아니고 동행입니다. 뭐, 이것도 정한 것이 아니지만. 동행이 없어요. 가룟 유다는 동행이 없고, 기껏 동행하는 것이 사탄하고 동행하는 것이고. 동행이 없고, 뭐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이해가 되시겠죠. 지금부터는 어렵습니다. 무척 어려워요. 어렵기 때문에 어느 대목에서 어려운지를 성경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아멘.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지 말라. 요한복음 20장 17절.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줬죠.
그런데 특징이 뭐냐, 다윗도 그 당시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죠. 사울도 눈에 보입니다. 다윗이 보기에 사울도 눈에 보이고 사울 보기에 다윗도 눈에 보이죠. 모두 다 가시적,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눈 뜬 사람은, 장님이 아닌 이상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사울 앞에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백성들이 어떻게 호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죠.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열배나 더 쳐주거든요. 주식 시가를. 이걸 다 알죠. 그래서 둘이 치열하게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만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만진다는 말은 눈에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네. 만져봅시다.” 눈에 보인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저게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러면 내가 손을 뻗는다든지 내가 눈으로 봤을 때 거기 계시네, 거기 존재하고 계시네, 거기 있네. 이게 성립이 되죠. 그 방식은 무슨 방식이냐 하면은 구약방식이죠. 구약방식. 뭐가 어려운가 하면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너와 동행하는 형식을 나는 취하지 않겠다.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 가버려요.
그러면 제자들은 누구하고 동행하느냐 하면은, 이미 한쪽은 아버지께로 가버린 사람이에요. 가버리면 제자들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동행이 된다는 것. 와! 이거 그야말로 불가능해요. 안 보이는데 동행이 되니까, 안 보이는 것이 동행이 된다는 이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뭐가 장애가 되느냐 하면은 보이는 것들이 다 장애가 돼요. 신종코로나, 대전, 아파트, 차, 자식들, 교회 가면 교인들, 헌금 내서 만든 교회 예배당, 신축 예배당. 이 모든 것들이 뭐를 가리느냐 하면은 주님의 복음과 십자가를 가리는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요양병원에 있는 우리 아버지. 모든 게.
그 장애물의 가장 장애물이 뭐냐 하면은 본인이라는 것. 본인이 본인의 장애물이 돼요. ‘나는 아무도 없어. 나 혼자 뿐이야.’ 이런 생각이 하루 스물 네 시간, 이 생각뿐이에요. ‘내 곁에 주님이 계신다. 그래. 믿어야 돼.’ 이게 억지스럽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개코, 기도에도 응답을 안 해주는데요. 냉철한 이성을 동원해서 생각해보자. 내가 50년을 예수 믿었다. 나는 직분이 장로다. 집사다. 그런데 52년 째, 개코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나는 그렇게 소망할 뿐이죠. 나는 그렇게 소망하죠. 소망하는데 현실은 홀로 태어나서 결국 죽을 때도 혼자밖에 없다. 자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식들은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유산가지고 싸움이나 하고. 짜장면으로 싸대기 날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더러워서 아버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요. 이게 kbs1 ‘기막힌 유산’이라는 드라마 내용이 아닙니까? 김치 싸대기에다 짜장면 싸대기까지 나오는데. 아버지가 참다 참다 못해서 다시 살아났어요. 드라마에서 진짜 살아났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서로 속이는 연기들을 하는 겁니다. 교회가. 왜냐하면 평소에 자존감이 있거든요. 자존감은 남들이, 그걸 타자라고 하는데, 타자가 인정을 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저 사람은 천천이고 나는 만만이라고. 나를 항상 오냐오냐 하는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고 내가 그렇게 오인하는 겁니다. “어머니 없이는 못 살겠어요. 어머니 정말 우리를 잘 키워줬어요.” “그래. 내가 니한테 그런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고생한 것을 다 잊어버린다.” 둘 다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포기를 못합니다. 자기 의로움. 홀로 최고 지점에 앉아야만 내 욕망이, 악마가 준 욕망이 만족해요. 최고지점에. 남은 나를 우러러봐야 되고 나는 남을 밑으로 봐야 되고. 이러한 요소가 다윗에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겠죠. 그 다윗 옆에 지금 누굴 동행하는 겁니까? 사울이죠. 사울의 그 이스라엘 왕 됨은 다윗의 내부마음입니다. 내부 본질이에요. 내부성이에요. 내면성. 나의 적이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죠. 내 안에. 내 안에 들어있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붙여줌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힘으로 사울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 비로소 사울을 이기는 겁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비로소 사울 집안은 거덜 나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하고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누구의 집이 되느냐 하면은 다윗의 왕국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왕국이 되고. 사울에게는 뭐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내부가 순전히 죄만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본인이 인정하는 그러한 혜택을 못 입었어요. 성신이 온 게 아니고 뭐가 왔느냐 하면은 악신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사울에게 뭘 내려줍니까? 악신을, 그것도 힘 있게 내리죠.
골리앗을 이긴 영웅, 소년 다윗이 이겼으니까 얼마나 영웅이 되겠습니까? 다윗은 그야말로 다영웅이에요. 다영웅. 다윗은 영웅이죠. 영웅인데, 다윗이 영웅이 되면 안 돼요. 누구의 공격을 받아야 돼요? 사울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돼요.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시를 한 번 보세요. 시편에 나오는 시는 신날 때 나오는 시가 아니고 전부 다 난데없이 억울함을 당할 때 튀어나왔던 고백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예수님의 모든 사역, 행하심과 기적과 모든 사역과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말씀들이에요. 십자가. 모든 예수님의 행하심과 병 고침,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병 고침에 눈독을 들여 버리면 십자가를 놓치고, 그 대신 인간들이 저 힘을 내 힘으로 가져서 나는 더 큰 영웅이 되겠다. 나라는 존재는 더 큰 내 목적에 부합이 되는, 내가 최고라는 목적에 부합이 되는 강한 나. 내가 원하는 나. 그 나에 대해서 예수님이 협조해주는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기도해서 복 받겠다는 시도가 전부 다 그런 시도거든요. 지금 힘이 모자라는데 하나님께 기도해가지고 더 큰 힘을 기르게 되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볼 거죠. 그러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보게 되면, 타인이 나를 좋게 보게 되면, 그것이 뭐다? 지금의 진짜 나다움이라고 그렇게 확정짓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의 심리가.
그거는 누구의 일이냐 하면은 사울이 그런 식이에요. 사울에게 뭐가 임했다고 했습니까? 악신이 임했죠. 악신이 임한 자들이 그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거예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 잘되기 위해서. 아까도 강의했지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등장하는 것을 예상 못했어요. 영웅 되고자 하는 그 어떤 시도는 없었습니다. 사울도 사실은 왕이 되기 전에 그랬었어요. 자기가 왕 된다는 것에 극구 사양한 겁니다. “나같이 이 작은 자가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그때 굉장히 겸손했었어요. 심지어 사울이라는 사람은 왕 되기 전에 뭐까지 했느냐 하면은, 사무엘을 만나 함께 있을 때 예언도 했어요. 성신에 의해서 예언을 막 했어요.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다. 예언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소문날 정도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게 사울이 예언한 것은 사울 덕분이 아니고 그게 사무엘과 함께 있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십자가마을에 영어로 번역한 것이 있잖아요. 거기에 댓글을 제가 달았잖아요. 그 댓글에 보면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가장 강한 복수는, 니 맘대로 살아라.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벌써 지옥이에요. 동행이 빠져있다 이 말이에요.
동행이 빠져있으니까, 지옥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본인 자체가 자기한테 짐이 되거든요. 짐이 되니까, 세상이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럼 누굴 지적하고 누굴 원망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본인을 계속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죽기 전에 벌써 지옥생활 시작한 거예요. 개시한 거예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남 탓 하거든요. 남 탓. 남 탓을 하지만 남 탓을 한다는 자체가 결국 누구한테 옵니까? 그 탓이 결국 누구 탓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내 욕망에 결핍이 일어났다. 내가 지금 불만족스럽다는 표시에요. 불만족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렇다고요?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사람. 자기한테 불만족스러우니까 그 불만족을 누구한테 터트립니까? 가까운 아내, 가족들한테 마구, 마구 분노를 퍼붓겠죠. 지금까지 다들 그런 생활을 했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고. 했었던 사람들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 중에도 있고. 어쩜 자기밖에 몰라. 자기가 제일 아파.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아픈 사람이 없어. 자기가 제일 고생 많이 하고, 팔자 제일 더럽고, 가장 불행스럽고, 가장 비극적이고, 인생 꼬일 대로 꼬인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 자기가 인생 제일 꼬였어.
겉으로는 남 탓을 하지만, 사실은 솔직하게 말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맘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이런 삶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그전까지는 주위에서 우쌰우쌰 나 잘한다, 나 칭찬하는 친구들이 있어가지고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자기인줄 알았어요. 내가 그리로 계속 가는 줄로 알았죠. 친구 하나 떨어지고 누구 하나 잘되면 내 곁에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별로 남아있지를 않아요. 나를 힘들게 할 때, 다시 말해서 사울 입장에서는 그나마 왕이었어요. 이 세상에 칭찬받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등장하고, 소년이 자기 말을 안 듣고, 갑옷도 그냥 안 입고, 아무 무장이 되지 않은 채로 이겼어요. 그 다음부터는 사울에게 있어서 자기가 받은 영광의 대부분을 누구한테 뺏겼습니까? 다윗에게 뺏긴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 생각했던 그 자아상이 완전히 황폐해져버렸죠. 파탄이 난 겁니다. 이걸 가지고 무장해제라고 해요. 무장해제. 이걸 제목으로 해야 되겠다. 이게 뭐냐 하면은 사울과 다윗이 만났을 때에 좋게 만난 게 아니고 지금 적으로 만났잖아요. 팬클럽이 천천인 사람과 만만인 사람과 적으로 만났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각자 둘러싼 무장된 힘이 있다는 거예요. 무장된 힘. 사울에게는 천명이 사울을 옹호하고 다윗은 만 명이 옹호한다. 만 명이 옹호한 거예요.
그러면 이 소리를 들을 때 사울의 무장된 힘은 천밖에 안 되고 다윗은 만이 될 때, 이런 식으로 인간 대 인간이 서로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무장된 힘, 무장의 힘, 무장이라는 것은 무기를 장착하는 거예요. 이 힘을 사울은 의도적으로 긁어모은 거죠. 왕이니까. 그걸 지키려고 하겠죠. 다윗에게 무장된 힘은 본인이 긁어모으려고 했습니까? 이거는 누가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신 거죠. 그러면 사울이 다윗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윗을 한번 빼버립시다.
다윗을 빼버리면 사울은 지금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은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신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 되니까, 사울을 뭐라고 규정하느냐 하면은, 사울의 모든 행동은 어디에 규정된다? 하나님의 반대말이 뭡니까? 악신이죠. 악신이 하는 행위가 되는 거예요. 다윗의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우리는 뭘 봐야 하느냐 하면은, 다윗만 보지 마시고 악신에 들린 자가 어떤 식으로 다윗을 무엇에 근거해서 공격하는가를 봐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가 자꾸 다윗 편에 서려고 하지 말고 사울 편에 서서, 우리는 또 어떤 식으로 남을 험담하고 공격하는가를 사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봐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점을 좀 더 쉽게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다윗을 신문지로 봅시다. 신문지. 여기에 가위를 하나 준비합니다. 가위를 준비했죠. 그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죠. 하나님과. 근데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점선으로 표시합니다. 그럼 가위가지고 이 하나님의 부분을 한번 오려봅시다. 오려봅니다. 오렸으니까 실선이 딱 되겠죠. 다윗에게는 여기가, 오린 하나님 부분이 비어있어요. 비어있다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을 소유합니까? 못합니까? 하나님이 빠져나왔으니까 소유되지를 못했죠. 소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려오면서 사울과 붙여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했잖아요. 성령이 임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자기 맘대로 소유할 수 있다, 없다? 자기 맘대로 부릴 수 있다, 없다? 안 되는 거예요. 왜? 비어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거든요. 죄인 중에 괴수. 그러면 이 죄인 중에 괴수를 주께서 사용한다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잖아요. 신약적으로 따져보면.
이 하나님의 은혜주심. 그러니까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그냥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 자체가 뭐냐 하면은, 바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장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냥 용서받은 거예요. “엄마는 나한테 그런 잔소리를 하지 마! 엄마는 왜 그렇게 하는데?”라고 했을 때, “왜? 주님 주신 은혜다.” 이 말은 뭐냐, 남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욕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그랬어요. 세리와 창기가. “얼레리 꼴레리 그 집안 망했대.” “그래, 망했다. 그래.” 왜? 죄인이니까 망한들, 긍휼 입은 것만 생각하고 은혜 입은 것만 생각할 때, 어떻게 망하든 간에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빠져나가고 남은 무장된 주님의 은혜. 이 빵꾸난 종이.
이걸 통해서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된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내 하루의 삶이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멍 난 빈종이로, 털레털레 구멍 난 종이로, 신문지로 가볍게 살아가는 거예요. 무장되지 않은 채. 주일 낮 설교와 결합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도 고귀하지 않다. 첫 번째에 고귀하다고 들어가면 안 되죠. 주께서 죽여 버리죠. 나는 고귀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존재하는 힘은 주께서 죄인을 용서하신, 그 용서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 용서가.
그러니까 이 빈 곳에 용서가 살아있죠. 왜 가위를 가지고 오리라고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아까 요한복음 20장 17절, 이제 외우시죠? 뭐라고 했습니까? 만지지 말라! 보인다? 안 보인다? 주님은 안 보이죠. 안 보이는 주님의 용서가 보이는 인간의 칭찬보다 더 나은 거예요. 청와대 삼촌보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 더 힘이 된다 이 말이죠. 1년이 가도 한 번도 안 찾아오는 자식하고 며느리보다, 나를 아프게 해가지고 이 마지막 노년을 요양병원에서 그야말로 썩어지게 만드는 주님이 더 좋아.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라는 것이 진정성이 있죠.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죠. 근데 다윗도 그렇게 안 돼요. 다윗도 자꾸 물어요. 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내가 주님에게 나쁜 짓도 한 것 없는데 왜 힘들게 합니까? 나쁜 짓해서 사울한테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울의 공격이 없으면 다윗이 다윗답지를 않아요. 다윗을 존재에서 과정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바로 다윗이 모르는 자기의 내면, 다윗이 아담의 죄에서 태어났잖아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사울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것이 나의 내면이 가시화되는 거죠. 바깥에.
나를 괴롭히는 그것이, 바로 그게 왜 있느냐, 지금 남이 나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심한 괴로움이 내가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아휴,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데. 나쁜 짓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고 나중에 벌을 내리면 그럼 교회 다닌 것 다 손해 보는데. 그럼 복을 못 받는데.’ 자꾸 내가 내 자신을 당구공처럼 응축하는데, 내가 나쁜 짓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그게 악신이 들린 건데. 선악이거든요. 악신이 뭡니까?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러니까 다윗이 생명나무라면 사울은 무슨 나무입니까? 선악과나무인 거예요. 선악적인 요소가 다윗 내부에 여전히 살아있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설교하면서 죄에 대해서 세모난 죄, 네모난 죄, 오각형 죄, 이야기를 했죠. 그 죄는 죄 같지도 않는 죄예요. 그게 죄라고 느껴지는 것은 평소에 남들한테 얼마나 욕 안 얻어먹고 살라고, 그게 사는 보람이고, 내가 사는 이유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죄는 뭡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 거예요. 전두환 아닙니까? 전두환이가 지금 뭐 5,18 사과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데, 그거 죄도 아니에요. 죄가 아니라니까요. 십자가를 부인하는 그게 죄라니까요. 왜 큰 죄를 놔두고 작은 죄를 가지고 그렇게 신경 쓰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의 과정이고 흐름이라면, “주여, 제가 몇 살까지 살겠습니까?”라는 그런 질문 자체가 나오면 안 돼요. 그렇죠. 그래서 오늘 걱정은 오늘 해질 때까지 마감하라. 해질 때까지. 내일 또 생이 보장되지 못해요. 제가 느끼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아까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것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앞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동행을 할 때 보이는 자들과 동행한다?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한다?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하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자기 세상적인 힘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사도들을 보고 얼마나 비-무장된 자들로 보겠어요? 니 재산 얼마야? 니 팬클럽 얼마야? 니 세상권세자야? 권세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무시하겠냐 이 말이죠. 니가 돈이 많아? 아니면 권력자야? 아니면 자식이 잘 돼? 그렇게 묻는 것은, 그렇게 묻는 세상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본인이 나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는 것을 사도 앞에 다 티내고 있는 겁니다. 티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보이는 게. 그럴 때 우리는 “흥!” 하죠. 근데 이게 이론상 그렇지만, 실상은 친구들 만나가지고 이번에 애 자랑하고 이번에 또 애가 아파트 바꾸라고 3억 주고 차 바꾸라고 1억 주고, 요새 차 새로 바꿔야 하는데 고민이라고 후딱 약 올리고 집에 간다면, 우리는 복음 안다 치고 이론을 동원하는 거예요. ‘흥! 나는 예수님 십자가만 있으면 돼!’라고 했는데, 보내놓고 나서는, 왜 그리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게 사는 거야? 거지지. 내 인생 돌아보면 도대체 남는 게 하나도 없고. 주여, 어찌합니까?” 또 주님한테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이 나오기 전에 10분 쉬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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