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미아 대전-57강 사무엘상18장1-5절(사랑의 불변함) 20200331-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8장 1절에서 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 하니라 2절,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3절,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절,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5절,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행한 것이, 다윗은 무슨 전쟁을 했느냐 하면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을 한 것이죠. 골리앗과의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이 하나님의 전쟁으로 인하여 야기되고 파기되고 파급된 새로운 현상은 이스라엘이라는, 골리앗을 만나기 이전의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에 서서히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 같으면, 그동안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블레셋이라는 이방민족과 구분되는 그러한 뜻에서 이스라엘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어요.
현재 이스라엘은 누가 이스라엘이냐고 물을 때, 블레셋을 적으로 보고 또 블레셋을 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러한 단합된 견해를 갖고 있는, 생각을 갖고 있는 집합,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같이 규정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것, 또는 내 것 외에 우리 것에 포함이 되지 않는 남의 것을 공통적으로,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집합, 집단. 남의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견해가 일치되는 그러한 집단. 그것이 바로 생각이 하나같이 같다고 볼 수 있는 그런 단일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다윗이 여기에 개입이 됨으로서, 다윗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개입됨으로서 얼른 겉으로 보게 되면 블레셋이 지고 이스라엘이 이겼다고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제대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돼요. 이스라엘 내부가 분열이 되면서 다윗이 생각하는,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기존의 사울 왕을 왕으로 삼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냐, 라고 여기서 갈라짐, 차이가 나는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원래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이렇게 돌덩어리가 있다면, 돌덩어리에 쐐기를 박는다고 하죠. 돌덩어리의 틈에 망치로 나무 조각을 박고 여기에 물을 붓게 되면 나무의 부피가 늘어나면서, 한두 개가 아니고 여러 개의 나무쐐기를 박아버리면 이 돌이 아주 날카롭게 갈라지겠죠.
이런 쐐기의 역할, 언약이 개입돼버리면 기존에 같다고 여겼던, 전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긴 그 성질 자체가 쪼개지게 됩니다. 갈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구분되죠. 이렇게 세 덩어리 네 덩어리로 구분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에 의해서 파생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가 서로 아는 일가친척, 친구들로 이렇게 모여 교회가 생겼다고 합시다.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사건,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이 교회가 성령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로 다 쪼가리가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는 자와 이해하지 못한 자로 쪼가리가 나겠죠.
그러면 이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다고 칩시다. 여기서 멈출까요? 턱도 없는 소리죠. 언약을 알고 십자가를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이 교회에다가 또 다시 하나님의 사건을 부여해버리면, 십자가 안다는 사람끼리 또 갈라지겠죠. 그렇게 갈라지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에 대해서 여기 사무엘상 18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건데요. “생명같이 사랑한다.” 자, 사랑이란 말이 나오는데, 앞에 사랑을 할 때 어느 정도 사랑을 하느냐, 만약에 사랑에 대해서 밋밋하게 되면 이거는 사랑이 아니고 이게 이용하겠다는 의지죠. 감추어진 의욕이 있어요.
근데 사랑을 이용하겠다고 이해한다면 “나 당신 좋아해. 나 당신 필요해. 당신이 나를 지켜줘야 해. 당신이 나를 보호해줘야 해.”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당신보다 내가 더 아깝다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이며 이용하기에 불과한 겁니다. 이걸 처음 강의로 돌아가면 나라는 이 덩어리, 이 덩치는 절대로 깨지거나 분열되지 않겠다는 비방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한테 필요한 것들을 따로 갖고 오겠다는 그런 노림수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뭐, 이걸 나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사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다 이렇잖아요.
소년 다윗은 사울 왕 입장에서는 어떤 입장이냐면 그냥 고맙죠. 고맙고, 왕의 체면을 세워줬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먹히지 않도록 해줬으니까 백성들도 그냥 고마운 거죠. 하지만 이것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내가 여기에 있는데, 이 덩치의 주인공이고 왕으로 있는데 소년 다윗이 와서 도와줬다는 거예요. 도와주었다. 단지 도와준 거예요. 나의 이 원래의 것이 안 깨지도록, 흠집이 나지 않도록 잘 되게 도와준 거죠. 좋은 예가 이런 거예요. 병든 환자가 병원에 갈 때 그 병원을 위해서 몸 바치러 간 게 아닙니다. 병원 의사한테 요구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나라는 이 덩치를 좋게 관리하고 싶은데, 간직하고 싶은데 몸이 아파서 지장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의사라는 당신한테 내가 돈을 줄 테니까 당신은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조건을 가지고 병원에 가는 겁니다. 나는 죽고 병원만 잘 되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안 갖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율법이 없고, 하나님의 사건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인간세계에서는 서로 도와주고 돌봐주고 하는 것을 굉장히 좋은 뜻으로, 좋은 관계, 좋은 사랑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서로서로 상생하라. 서로서로 도와주고 서로 돌보고. 서로 신경써줘라. 굉장히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 자체가. 예수님께서 서로 대접받는 대로 서로 대접하라고 그렇게 좋은 말씀을 하셨다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살해당할 하등의 이유가 되지 못하죠.
“여러분들, 서로 우리 한 가족이고 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한 택한 백성입니다. 택한 백성이니까 서로서로 남을 대접합시다. 혼자 이기주의로 자기만 살라고 하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줍시다.”라고 예수님께서 그런 취지로 이야기를 했다면, 예수님께서 구태여 사람들에게 그렇게 공격받을 이유는 전혀 없죠. ‘선한 분이구나. 저분은 우리한테 필요하다. 그래, 우리가 놓친 것을 이야기하는구나. 나 개인적인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을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자.’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냥 있겠죠. 그렇게만 한다면 여기에 제가 아까 이야기한 분열될 하등의 이유가 없겠죠. 분열. 분열될 이유가 없죠.
어떤 사람이 교회를 세워가지고 천국 보내주겠다는 것을 보통 상품으로 걸죠. “우리 교회 나오면 천당 갑니다. 죽어서 지옥갈래요? 천당 갈래요? 천당 가고 싶으면 우리 교회 나오세요.”라고 선전을 해서, 죽음 이후의 공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교회에 나왔다 이 말이죠. 나오면서 하나님이 구원해줬으니까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십일조를 비롯해서 돈 좀 내라고 하죠. 돈 좀 냈더니만 돈이 모여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더 확장하기 위해서 예배당이 필요하다고 해서 신축자금까지 다 줬다 이 말이죠. 예배당 세웠잖아요. 그럼 여기에 돈을 낸 사람들이나 장로들이나 오래 다닌 사람들 기대가 뭡니까? 이 교회가 깨어지기를 원합니까? 분열되기를 원해요? 아니죠. 처음에 자기가 했던 이 교회가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유지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뭐냐, 현재 이스라엘이나 사울 왕의 마음이다 이 말이죠.
또 예를 들면, 어떤 부모가 있는데 결혼해가지고 너무 사이가 좋다. 좋다보니까 자녀가 다섯 명이 생겼다. 이 부모의 연세가 점점 많고 이제 힘이 없을 때, 그럴 때 늙은 부모님의 소망이 뭡니까? 이 다섯 명의 자녀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겠죠. 형제들 간에 싸워서 뿔뿔이 흩어지고 하는 그것을 누가 원하겠어요? 어떤 가정이. 그 어떤 가정도 하나 되기를 원하고, 교회도 하나 되기를 원하고, 회사도 하나 되기를 원하고, 번창되기를 원하고. 교회도 부흥해서 번창되기를 원하듯이, 인간의 생각에는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의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분열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해외 여행지에 가게 되면 사랑의 자물쇠가 있잖아요. 딱 잠가놓고 두 번 다시 우리 사이는 영원토록 헤어지지 않으리라. 결혼하기 전에 약혼해서 가가지고 자물쇠 채우고. 남산에 가도 있고 일본에 가도 있고 외국에 가도 있고 프랑스 파리 다리에도 있고. 전부 다 자물쇠 채워가지고 우리의 결속을 다지리라고 하잖아요. 이 분열과 반대가 된다고요. 분열되는 것을 사람들은 다 싫어해요. 왜? 하나 되기 위해서 그동안 들인 밑천이 한두 푼이 아니라 이 말이죠. 정성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온갖 내 마음을 다 부었는데 이게 어느 날 한 순간에 말을 잘못해서 삐져가지고 싸워서 분열된다면 그동안 공들였던 것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오히려 분열 뒤에는 강력한 복수와 증오가 발생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하는 사무엘상은 구약입니다. 신약이 아니에요. 최종점이 아니다 이 말이죠. 마지막이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 나라에 소속된 사람은 어떤 식으로 관계 지어지고 결속되느냐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기존의 시작은 뭐로 시작을 하는가, 인간들의 요구사항으로 시작이 되죠. 여러분 바벨탑을 아시죠? 헤어지기 싫다고, 흩어지기 싫다고, 온 마음이 하나 되기 위한 기념물을 세운 것이 바벨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서서 그렇게 인간들이 결속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이 멸망되고 난 뒤에는 두 나라가 두 곳으로 바뀌죠. 하나는 천국이고 하나는 지옥으로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천국이고 하나는 지옥이고. 언약 자체가 복과, 복만 주는 언약이 아니잖아요. 복도 있고 그 다음에 저주도 있는 겁니다. 복과 저주가 있는 거예요. 처음에 에덴동산에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도 있고 죽음을 안겨주는 선악과나무도 있고. 나무가 두 개입니다. 두 개는 영원히 두 개로 이렇게 고정이 되어야 하니까. 하나가 아니고 둘로 고정이 되어야하니까, 언약에는 복도 주고 저주도 있는 거예요. 언약을 지키면 복이지만 못 지키면 저주가 일어납니다.
신명기 28장에 잘 나와 있죠.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고. 복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고. 인간들 보고 니 어느 것을 원할 거냐고 요구할 필요가 없죠. 언약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알아서 스스로 그것을 구성해나가는 그것이 언약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종교죠. 나의 구원이지만, 이런 것은 아예 망상에 해당이 되고. 실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획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해요. 내 중심이 아니고. 우리가 뭐라고 피조물 중심으로 돌아가겠어요. 창조주가 따로 있는데.
그래서 창조주는 천국과 지옥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남는데, 인간들은 하나로 뭉쳐가지고 자신들을 신으로 간주하고 자기들의 지상천국은 영원히 멸망되지 않고 계속 가고자 하는 본성이, 인간 대 인간으로 결속시킨 그 악마의 마음으로 하나로 뭉쳐져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바벨탑이 그런 겁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성을 쌓는 것도 그 마음이고요. 따라서 나무쐐기처럼 언약이 와서 이걸 쪼가리 내는 겁니다. 박아서 분열시키는 거예요. 분열이 좋다는 것이 아니고, 분열됨으로서 평소의 나의 요구와 기대와 하나님의 기대와는 이렇게 처음부터 맞지 않음이 확인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내 중심으로 뭐든지 덩치가 커지기를 원해요. 덩어리라고 했는데, 덩치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점점 더 커지기를 원한다. 내부적으로는 전혀 깨어지지 않고 외형적으로, 양적으로 커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 자신들 마음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 단체, 조직체의 생명이라고 저는 이렇게 부르고 싶어요. 생명.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음 자체지만. 인간들은 그걸 생명이라고 보는 겁니다. 가족이 다섯 식구, 일곱 식구가 잘 있는 그것이 어떻게 죽음으로 보이겠어요. 마치 생명이 넘치고, 활기가 넘치고, 웃음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볼 겁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서 항상 웃고 찬양하고 서로 나눠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교회가 될 거예요. 이 교회가 쪼가리 나고 또 쪼가리날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걸요.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 이렇게 괴로움이라는 것은 헤어짐이에요. 헤어짐. 이별하는 것. 이별하고 헤어지는 것. 하지만 결국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와가지고 헤어질 수밖에 없죠.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해봅시다. 왜 사울은 골리앗에게 달려들지 않았습니까? 왜 사울은, 그리고 사울의 신하들은 골리앗에게 달려들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뻔하죠. 자기가 죽는 것이 뻔하니까. 죽기 싫어서 달려들지 않았던 겁니다. 죽기 싫어서. 죽기 싫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생명을 아끼고 싶어서 달려들지 않았던 거예요.
근데 오늘 본문 사무엘상 18장 1절에서는 요나단이,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입니다. 사울의 아들이 다윗을 보고, 다윗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면은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이 자기가 생명의 주인이잖아요. 근데 타인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말은 그 사람을 위해서 내 생명도 아깝지 않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나는 마다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바로 이 요나단의 마음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대할 때 그 마음을 반영해주고 있는 겁니다. 언약이 블레셋에 포위되어 있는 그 이스라엘의 곤궁과 난처함의 환경에서 소년 다윗이 침투할 때, 소년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번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죠. 하나님의 전쟁에 개입되면서, 바로 여기서 인간들이 자기 생명이 어떻게 될까봐 무서워서 벌벌 떠는, 그것보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소년 다윗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귀하고 귀하다는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한 전쟁을 꾸준히 이스라엘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해왔던 거예요.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냐, 하나님의 언약으로 내용이 채워져야 될 나라에요. 그 언약으로 채워져야 될 내용의 나라에서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부들부들 떤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언약의 나라가 될 수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인 골리앗을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기죽게 만든 겁니다. “죽기 싫지? 그치? 니 생명이 제일 중요하지? 그치?”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쟁이 더 소중한 거예요. 더 우선되는 겁니다. 하나하나 살려주는 게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승리의 내용물로 채워지는 그 나라가 하나님이 원하는, 기대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바로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 이스라엘에 언약이 오게 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벌이신 전쟁이 오게 되면, 같은 말입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하기 위해서니까. 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분열되게 됩니다. 분열되어야 마땅하고요.
분열되면서, 분열된 한쪽 파트는 어떤 원리가 흐르는가 하면은, 누구누구를 사랑하되 내 목숨같이 또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분의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새로운 백성의 출현. 그 백성들의 생겨남.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제공하면서 원했던 바입니다. 다시 말씀을 이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결국 궁극적으로 두 파트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복 받은 민족과 저주받은 사람들. 복 받은 사람들과 저주받은 사람들의 구분.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원래 애굽에 있을 때는 다 같이 그냥 애굽 사람들이었어요. 애굽 왕의 통치 밑에 있는 그냥 한 족속, 히브리 종족이었죠.
근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애굽에 있는 신들과,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킨 것이 전쟁이거든요. 전쟁에서 애굽의 신들이 여호와한테는 못 당한다는 것을 그들로 자인하고,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내 백성을 보내라! 시내산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왜 붙잡고 있느냐, 빨리 보내라!”라는 그러한 언질을 바로 왕에게 모세가 전달합니다. 자, 애굽의 바로 왕 입장에서는 히브리인들을 보내기 싫은 이유가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로 결속된, 애굽 나라의 소속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일하는 기계 곧 노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기계가 빠져버리면 공장이 안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그 히브리인들을 저임금에다가 노예로 부려먹고 그들은 그걸 동력으로 해서 애굽 나라를 결속하고 더 키우고 확장하려고 시도한 겁니다. 이처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출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전제하는, 전제된 사항이, 사태가 먼저 있어요.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애굽 나라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오지만 애굽 나라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애굽 나라가 분열된 거죠. 애굽 나라의 일부로 있던 종족이 자기의 통제 하에서 바깥으로 벗어나니까, 그만큼 애굽 나라가 손해를 본 겁니다. 애굽 나라의 입장에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맏아들까지도 죽었으니까. 왕위 계승에도 문제가 생기고.
그러니 이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애굽이라는 기존에 있던 나라에서 나올 때에,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게 이름이 바뀌었어요. 애굽 나라의 일부였는데, 나오게 되면 애굽 나라라는 나라가 따로 생겨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또 따로 생겨버려요.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에, 언약으로 찾아왔을 때에 야곱은 자기기 한 몸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야곱 몸 따로 있고 그 안에, 내부에 있는 인생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야 될 것으로 둘로 구분이 됩니다. 이삭이라는 자식도 마찬가지고 에서와 야곱으로 구분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모든 것이 분열되고 갈라지게 하는 기능, 이게 바로 언약기능입니다.
소년 다윗이 찾아왔을 때 이스라엘에게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요나단 노선이죠. 요나단은 사울 왕의 나라, 이스라엘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요나단은 특히 사울의 아들이죠. 근데 요나단이 누구 편을 드느냐 하면은 다윗 편을 들므로 말미암아 다윗 계열과 사울 계열로 둘로 분열이 됩니다. 분열될 때, 여기 사울의 계열의 특징은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기존의 하나 됨에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자. 우리가 출발한 이것은 소중한 것이야.”라는 입장인 반면에. 왜 소중하냐 하면은 자기 목숨을 그동안 그런 식으로 유지해왔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요나단은 뭐냐 하면은 자기를 부인해요. 누굴 사랑하되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겁니다. 누구를? 소년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이 뭐냐 또는 구원이 뭐냐 그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신앙생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 질문 하나로 끝나버려요. 당신은 누굴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당신 보다 더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기존의 내 것 지키는 것과는 정반대 개념이라고 이렇게 아시면 되는 겁니다. 유명한 팝송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혼은 절대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Bette Midler - The Rose) 베트 미들러가 부른 더 로즈라는 옛날 오래된 미국 팝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혼은 절대로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 팝송 가사에 보면 이런 것도 있어요. “마음에 상처 입는 것이 두려우면 절대로 춤추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기존의 것을 붙들고 있으면 그 기존의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랑은 용기라는 겁니다. 사랑은 모험이라는 것이죠. 모험을 하려면 기존의 것에 연연하면 안 되고 기존의 것에서 박차고 나와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죠. 지금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할 때 이렇게 자기 생명같이 사랑합니다.
자,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그 뜻이 무엇인가, 그걸 행동으로 보여준 게 있는데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4절에 나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우리 사이의 불변함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전설에도 그런 게 있잖아요. 역사에도 그런 게 있는데. 멀리 떠나는, 헤어져야 될 그런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 헤어져도 다시 합치자는 뜻으로 거울을 이렇게 두 조각을 낸다든지, 안 그러면 액세서리를 두개로 쪼개가지고 서로 반쪽씩 나누어서 나중에 만날 때 반쪽씩 가진 것을 딱 맞추게 되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날을 기약하자고, 그런 정표 같은 것을 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고 자기가 입던, 자기를 보호했던, 내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내 선택에 의해서 내 의지에 의해서 입어야 했던 그 갑옷과 옷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는 내가 이것 가지고 버티려고 했던 생활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당신을 사랑하는 즐거움으로 살리라는 그런 마음으로 옷을 벗어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이게 바로 신앙이잖아요. 신앙은 뭐냐, 당신보다 지금 누구를 사랑합니까? 라는 질문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어떤 형편이 되고 어떤 처지가 돼도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신앙이고 사랑이고 언약의 결과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조각내서 새로운 노선을, 새로운 계열을 마련하면서 제시되어야 될 내용이, 삶의 원칙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신앙에서 사랑이란 주님 없이는 나도 없다. 주님 없이는 내가 살 이유도, 의미도 없다. 이겁니다. 주님 없이는.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는가, 주님의 자리에다가 자식을 집어넣고 또는 손자손녀를 집어넣으면 되겠죠. 내 자식이 없이는 나도 살아갈 이유도 없고 나도 없다. 자식이 없이는 나의 의미도 없다. 이거는 자식을 낳아본 부모들은 다 공감을 할 거예요.
나는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이기주의였지만, 내가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나는 이기주의에서 자식 때문에 벗어났다. 왜? 자식에 대한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나만을 사랑하겠다는 그 속된 마음에서 나를 벗어나게 했다. 뭐 이렇게 세상에서는 주장할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 그 남을 누구로 보느냐, 자식으로 보는 거예요. 왜 그렇게 자식이 사랑스럽습니까? 이거는 침팬지나 오랑우탄이나 짐승들에게 물어봐도 답변이 나올 거예요. 왜 사랑스러운가, 내 자식이거든. 자식을 돌보지 않는 것은 짐승보다도 더 못하다고 했으니까. 영장류에 해당하니까.
그 침팬지나 오랑우탄이나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자식을 키우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 정성보다 더해요. 어디가도 업고. 심지어 침팬지는 다섯 살 때까지 계속해서 자식만 업고 다니고 자식은 부모만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부부라 하지만, 부부는 외부에서, 서로 다른 몸에서 왔지만 자식은 내 몸에서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도 자기 자식이지만 사실은 자기 몸에서 태어난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본능은 더 강렬합니다. 이걸 과학자들은, 의사들은 돌봄과 양육과 관련된 호르몬을 찾아냈어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나옴으로서 이거는 본능적으로 자식은 부모를 양육하고 돌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옥시토신이라고 하는 것은 베풀어주는 것, 돌봐주는 것이니까. 옥시토신을 새로 생산해내가지고 이걸 뿌려버리면 그 사람의 성격도 변화가 되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정성과 애정을 쏟고 친절을 베푼다. 뭐,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논문도 쓰고 하는, 그런 결과들을 보면 나와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언약이 없을 경우에 이런 결과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자식을 사랑함으로서 무엇을 이룬다?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내 후손들,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국가 때문에 나는 국가를 사랑한다. 이게 다 조건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자식이 내 몸에서 난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 아니라면 이토록 지극정성이겠습니까? 아니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신앙을 측정할 때 뭘 가지고 측정했습니까? 기도를 뭐 두 시간하라든지, 헌금하라든지, 뭐 그런 것으로 신앙을 측정했던가요?
하나님은 정말, 인간의 능력으로 해내지 못할 것을 시험문제로 출제를 해버린 거예요. 사랑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과 인간이 할 수 없는 사랑으로 구분해버린 거예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그런 사랑의 관계로 엮여질 때만 천국 가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겁니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것을 앞두고 내가 사는 이유가 나 때문에 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죽음 앞에서. 그런데 내 목숨보다 자식 목숨이, 내 목숨이 자식 목숨한테 있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거든요. 자식을 위해서 죽겠다. 얼른 보면 죽음조차도 이겨낸 숭고한 사랑처럼 보이죠.
그런데 그 자식이 만약에 시름시름 아프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한테 죽음이 오는 것을 나는 용납을 하겠는데, 신이시여! 내 자식이 나보다 먼저 일찍 죽는 것은 나는 용납 못하겠습니다, 라고 고집부리는 그 고집은,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범주 내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의 개념에 불과해요.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줬어요. 아브라함은 뭡니까? 뒤에 붙는 것이? 언약이죠. 아브라함 언약. 언약이 옴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결국 죽음을 통해서 언젠가는 이별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요나단은 다윗을 만날 때에, 요나단이라는 자신과 이별 그 후에라도 이어질 수 있는 관계는 바로 다윗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요나단은 자기가 목숨 바쳐서 다윗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그 일에 자기가 결속되는 거예요. 이어지는 거예요. 링크되는 겁니다. 연결되려고 했던 겁니다. 내 목숨은 내가 죽는 이전까지만 유효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내 목숨을 내가 붙들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내 목숨보다, 내 생명보다 더 원래적인 생명,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느껴지는 그 다윗에게 요나단은 결속하기 위해서 사랑하고,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방식, 자기가 입고 있었던 옷까지 다윗에게 입혀줌으로서 여기에 불변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곧 사랑의 불변함이죠. 사랑하니까 불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 오게 되면 불변하지 말래도 저절로 이 불변함에 모든 것을 올인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 없을 정도로, 누구에게? 주님이죠. 주님 있으매 늘 감사하는 겁니다. 자기에게 관심 없을 정도로, 자기에게 신경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기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너무나 시시하고 사소한 일이고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주님 있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될 수가 없어요. 아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주님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는데, 이미 조건들과 조건들이 있죠. 내가 저 사람에게 저렇게 대접하게 되면 저 사람도 나를 대접할 것이다. 이미 조건들이 발생되거든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막상 하려고 하면 자기의 이기성이 폭로되는 말씀들을 산상설교에서 담아주신 거예요. 이것이 선지자고 율법이라는 이 말은 구약 전체가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기능으로 작용 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대접한다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언제 대접했나?’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진짜 죄진 오른팔을 잘라내도, “아이고, 잘 잘라냈습니다. 나 같은 것은 오른팔도 나한테는 없어도 괜찮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자기 목숨과 생명에 집착하지 않을 정도로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 등장해서 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언약의 개입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요나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다면, 외형적으로 볼 때 폭력 그 다음에 사랑이 등장한다는 것이 좀 의아하게 되죠. 폭력이죠.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극한적인 행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고함을 질러서 그냥 나무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골리앗 모가지를 베어버렸어요. 그것도 자기 칼로 한 게 아니고 골리앗 칼을 가지고. 골리앗을 쳐부수고 골리앗 장수의 칼을 가지고 골리앗의 모가지를 쳐버렸습니다. 어린 소년에게서 나올 수 없는 비상한, 아주 희한한 폭력이 행사가 되는 거죠.
그러면 폭력 다음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 안에는 무엇이 있다? 폭력성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은 과격하다는 거예요. 사랑은 극단적이다. 어설픈 협상이나 타협이 아니고 아주 극단적으로 과격하다. 이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조마조마하게 조심스럽게 살아가잖아요. 만약에 길이 이렇게 있는데, 길 양쪽이 다 절벽이라면 그 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슬아슬하게 좁은 길을 걸어가겠죠. 왜냐하면 양쪽이 다 절벽이라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니까? 죽으니까. 죽음의 압박을 느끼고 있는 인생은 항상 조심스럽게, 폭력적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최종적인 그 인생이라든지 세상의 마지막 단계를 미리 알았더라면, 미리 안다면, 진리를 미리 다 알게 된다면 행동이 과격하고 극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간 과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최종적인 것은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다음에 뭘 받습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하다? 사랑이 없더라. 누구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더라. 어느 정도로? 자기를 미워할 정도로, 주님 앞에서 자기를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는 그럴 정도로 사랑이 없으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폭력적이다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나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야.” 이게 얼마나 폭력적이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 이야기를 살아있는 부모 앞에서 자식이 그런 이야기를 해보세요. 부모가 깜짝 놀라죠. “니 어느 교회에 다니나? 니 교회 다니면서 이상한 거 배웠네.” 뭐 이래 나올 거라 이 말이죠. 부모들이 알고 있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게 남이 아니라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자식. 내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나의 이 가정의 결속, 단단함, 고정됨, 불변함, 이걸 지켜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빌고 아부하고 헌금 바치고 말씀공부하고. 어떠하든지 간에 조바심을 내면서, 이것만큼은 지켜주옵소서, 라는 그러한 나름대로의 단단한 요구사항과 기대감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주님을 사랑하라면 사랑하겠다고, 십자가 사랑을 언급하는데, 그 사랑은 이용하기죠. 아까 이야기한 그 사랑이 아니고요, 주님을 이용해먹는 겁니다. 더 로즈라는 팝송가사에 나오듯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혼은 절대로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소년 다윗이 철딱서니가 없음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니에요. 소년 다윗의 무모함, 너무 무모하기 때문에 용기로 바뀌어서, 용기처럼 보여서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전쟁을 사랑했기에, 자기기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기에 얼마든지 하나님의 쓰시는 대로 그는 쓰였던 겁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이스라엘 내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이것이 새로운 노선과 계열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과 요나단의 결속, 사랑의 관계입니다.
3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언약을 맺었더라. 약속을 맺었더라. 자,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주어지죠. 그러나 결과는 바로 사람의 관계로서 나타납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통해서 여기에 없던 관계가 새롭게 나타나죠. 이 말은 오늘날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신에 대해서 잘해보고 예수도 믿고 십자가 믿고 자꾸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지만, 그 잘 보이려 하는 자체가 수상해요. 이거는 신앙이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잘 보일 필요가 없어요. 잘 보인다고 하는 것은, ‘저 사람에게 잘해주면 나에게 떨어질 콩고물은 어느 정도일까? 내가 주님 앞에 이렇게 충성하면 주님은 나에게 뭘 해줄까?’ 이렇게 자꾸 계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아까 이용한다고 했죠. 이거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우선되고 주님보다도 내가 더 소중하다는 티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해서 내가 내 자리를 그냥 고수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고수해봐야 결국은 저주로 이어질 뻔한 실패작인데, 인생이 나만 사랑하다가 실패로 끝날 것이 뻔한데, 그냥 있을 수가 없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 나타났을 때, “바로 저거다. 하나님이 소년 다윗을 통해서 나타나셨구나!” 기꺼이 바치려고 했듯이.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저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 주님의 죽고 살리심의 일 앞에서, 주님의 기능 앞에서 나도 같이 거기에 불변함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주님의 죽고 살려주시는 그 작업이 저에게도 일어나게 하여주옵소서!”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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