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복
이근호 2020년 4월 1일
본문 말씀: 호세아 9:6-9
(9:6) 보라 저희가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저희를 모으고 놉은 저희를 장사하리니 저희의 은 보물은 찔레가 덮을 것이요 저희의 장막 안에는 가시 덩굴이 퍼지리라
(9:7)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9:8)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9:9)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사람들은 자신이 편하게 살고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누구나 이러한 개인적인 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를 못합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악마는 인간을 유혹해서 오로지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 갖게 했습니다.
즉 이 세상은 그 많고 많은 문제가 생기고 상황이 있다할지라도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의 절대성만큼은 일체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초점을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관심사가 오로지 자기에게 가 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놔두지 않고 매진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소관입니다. 인간이 개입하거나 관여할 사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사적으로 모아지는 관심사를 철회할 의사가 없습니다. 자기 편하고 자기 행복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타인과의 관계도 가져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이러한 인간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아예 환경을 의도적으로 조성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사적인 기대가 환경에 의해서 와해됩니다. 서로 친하고 서로 사이좋게 살고 싶어도 전세계적인 대규모 간염병이 돌아버리면 사람들 사이에 1.8m 간격을 띄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재난 지역을 피해서 청정한 지역으로 옮기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본인만큼은 정당하고 살아야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사람이 그 어디로 도피해도 그 지역에서 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심하게 나오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주장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의 옳음을 알아주고 선하게 받아달라”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의도적으로 조성한 불편한 환경이 생기지 않고 조치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품고 북이스라엘에 나타나 하나님을 뜻을 전한 자들에게 대해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보다!”, 혹은 “미쳤다!”고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에 대해서 이런 비난을 퍼붓는 것은 8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원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선지자를 향하여 “미쳤다”고 비난하는 것은 곧 자신들은 ‘안 미치고 정상이다’는 점을 전제로 나온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 의학에서도 ‘미쳤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생각들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고 오늘날의 정신의학을 보고 있습니다. 약 2000억대의 두뇌에 있는 신경세포가 쉴새없이 전기적 신호를 서로간에 교환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의 두뇌를 장악하는 힘은 전자기적 힘에 속한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들의 과학은 이 우주의 원리는 다음 네 가지 힘으로 설명합니다. 물체간에 서로 당기는 중력이 첫째요, 그 다음에는 소립자들 간에 형성되는 있는 강력이요, 원자핵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 간의 힘인 약력이요, 그리고 +전하와 – 전하로 이루어진 전자기적 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Na 양이온이 두뇌에 있는 신경세포에 관여해서 세포는 작용하게 되는데 하나의 신경세포와 다른 신경 세포 사이에는 전기를 통한 정보전달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경 세포의 끝단에 내놓은 게 있는데 그것은 신경전달물질입니다.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약물 투여를 통해서 이 세포토닌과 도파민 사이에 균형을 조절하면 더 이상 ‘미쳤다’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모르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런 물질이나 전기적 신호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인간의 자아가 그냥 객관적으로 외부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외부 현상에 대해서 자아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현상을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영향을 발휘하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질서를 유도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누가, 왜, 무슨 의도로 사적인 이런 자기만의 고유한 본성을 발휘하게 할까요? 이점에 대해서 과학은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불교에서는 ‘관자재보살’이라는 세상 모두를 관찰하고 있는 신(神)이 있어 인간의 자아란 그저 그 신의 지체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회란 예수님이 머리요 우리의 몸은 주님의 지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보입니다.(고전12장)
바로 이런 논리는 모두 인간을 앞장 세운 악마의 아이디어입니다. 즉 악마의 인간의 존재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그들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받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선악 논리체계’의 진수입니다. 자신을 선한 것으로 보기에 타인들은 모두 조금씩 자기보다 못한 악한 자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이 점잖고 훌륭하고 착한 나에게 타인이나 외부 그 어떤 것이 힘들게 한다면, 그것을 계기로 자극받아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 존재인지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행동과 태도가 악과의 만남에서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 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바로 이런 선악논리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구원 작업’에 있어 필수적인 절차인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기브아 지명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선하고 자부하는 자가 악과 만났을 때, 본인의 모든 선함도 와르르 무너져 악함으로 나타남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된 사건입니다. 사사기 19장에서부터 사사기 끝장까지 길게 이어지는 ‘기브아 사건’은, 자신을 선하다고 자부하는 한 레위인에게 일어난 일이 계기가 됩니다.
자신의 아내가 외지의 불량배에게 집단 강간당해 살해되었을 때에, 그 간음에 의해 벌어진 살인에 대해서 ‘정의로운 살인’으로 보상받기를 원했습니다. 즉 베냐민 지파가 죽인 살인의 피해자인 시체에다 자신의 살인의 의지를 담아 12지파에게 보냅니다. 이것은 진정 누구 정당한지를 전쟁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담판지겠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자칭 선하다고 자부한 11지파 연합군은 악하다고 규정된 베냐민 지파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께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그것은 ‘매복작전’입니다. 즉 전쟁의 승리를 자신들 하나님 앞에 정당한 집단임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간주하게 하는 그 ‘교만’에 대해 응징을 하는 전략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응징이 끝나고 그 누구도 의로운 자는 없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체로 궐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언약 성취에 독생자의 목숨까지 다 쏟아 붓습니다. 누구 중에 누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이토록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마땅한 선한 자로 간주하지 않게 해주시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35강-호 9장 6-9절(매복)2004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9장 6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4페이지입니다.
호세아 9:6-9
“보라 저희가 멸망을 피하여 갈찌라도 애굽은 저희를 모으고 놉은 저희를 장사하리니 저희의 은 보물은 찔레가 덮을 것이요 저희의 장막 안에는 가시 덩굴이 퍼지리라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찌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향이 나와 있어요. 그 방향은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문제가 우리 인간의 문제가 아니에요. 구원의 책임자, 구원을 기획하시고 그걸 마무리 지으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이 말 왜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에게 나의 구원을 빼달라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내 구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원하는 구원이기 때문에. 내 천국 물론 없습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이지요.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손 탈수 없어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문제입니다. 출발을 그것부터 해야 돼요.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왜 인간이 구원받아서는 안됩니까?”라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것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자기 구원문제에 대해서 관여할 권한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빠져야 그게 맞아요. 죄인이 나대고 자기 구원문제에서 설치면 안됩니다.
국가에서 사면문제에 대해서 교도소에 있는 죄인이 나서서 나 사면해 달라고 설쳐대면 안됩니다. 사면은 전적으로 통치자의 자비하심에 준해야 되지 죄지은 주제에 “나 언제 사면해줄 거요?”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네가 판사야? 죄지은 자는 입 다물라.” 그렇게 되겠지요. 죄지은 자는 입을 다물어야 돼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죄 지은 자의 입이 더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답지요. 자기 주제파악도 안되고 “언제 구원해 주실 거요?” 구원 맡겨 놨습니까? “언제 내 인생이 행복해지고 언제 내 인생 풀리게 됩니까?” 죄인인생은 인생이라고 쳐주지도 않아요. 죽을 때까지 아프고 죽을 때까지 처참하게 산다 할지라도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구원은 내 손에 있다. 내가 친히 구원하리라.” 따라서 이 구원이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의도된 환경을 조성해 나가는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 6절에 봅니다. “보라 저희가 멸망을 피하여 갈찌라도” 의도적으로 멸망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왜? 구원이니까. 구원의 절차니까. 구원의 과정이니까.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도적으로 초래해서 멸망케 합니다. 하나님의 자위권발동이지요 뭐.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멸망을 하니까 인간들의 본능적인 것이 나오는 것이 뭐냐? 멸망을 피하여 어디로 빠지는가? 애굽으로 가는 거예요. 놉이라고 나오는데 이곳은 멤피스라 해서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멤피스라 하면 피라미드가 있는 그곳입니다. 피라미드가 모여 있는 그곳이 멤피스인데 “그곳으로 갈지라도, 피할지라도 오히려 그곳이 너희를 죽이는 장례장소가 될 것이다. 오히려 그곳에서 죽음을 자처하게 될 것이다.” 아주 죽으라고 기어들어가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멸망을 피하여.” 오늘날 이 현상을 비유로 하면 적절하지요. “재난지역을 피하고 싶다. 대구 그만살고 싶다. 신종코로나 없는 곳으로, 잠시 아프리카나 키르키즈스탄, 환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곳으로.” 물론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 다 거짓말이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든지 단 한명도 감염된 사람이 없다고 우기는 북한. 사람들의 본능이 뭐냐?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막상 재난지역이 딱 되어버리면 피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서 피할 재주 있거든 피해보라는 거예요. 아마 남극에 가면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피할 수 있거든 한 번 해 봐라.” 하나님이 살 수 없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뭐가 있느냐? “나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우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환경을 바꿔 버립니다.
사적으로 내가 어떤 행복을 추구하든지간에 그 사적인 문제를 하나님께서 봐주지 않고 그걸 뭘 로 바꾸는가? 환경문제로 전환시켜 버려요. 그러면 “나는 행복하고 싶어요. 정말 나는 고요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환경이 나를 그냥두지 않습니다. 신종 코로나.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서시느냐 하면, 처음에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악마의 꾐에 빠져서 뭘 먹었는데 뭘 먹었느냐?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실을 먹었어요.
여기서 악마의 유혹은 딱 이겁니다. 선악과 먹지 말라, 하는 그것에 대해서 그냥 안 먹으면 되는데 악마는 그걸 문제시 한 거예요, 인간에게. 저걸 따먹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악마가 인간에게 유혹해서. 문제 삼지 말아야 될 것을 악마는 일부러 문제 삼아버린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저걸 따먹고 내가 신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간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공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그것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악마의 목표잖아요. 그래서 이 목표를 바꾸려면, 인간이 뭐 말을 안 들으니, 환경을 곱게 살지 못하는 환경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렇다면 그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멸망하면서 인간은 고분고분하겠는가? 천만의 말씀.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종코로나로 어려울 때 ‘야, 환경은 아무리 해도 우리 맘대로 안 되는구나.’라고 하고, 또 ‘세상이라 하는 것이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이렇게 하면 되는데 뭐라고 서로 격려를 하느냐 하면, “하늘을 보라. 거기에 천국이 있는가? 땅 아래를 보라. 거기에 지옥이 있는가? 우리 모든 인간은 종교라는 것이 필요 없다. 국가도 필요 없다. 우리는 서로 평화롭게 살자.”
이건 뭐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하는 거예요.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쉬운 일인가?” 존 레논이 불렀던 <이매진(Imagine)>이라는 노래에요.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시도하면 쉽다. 우리 밑에 지옥이 없다. 우리는 하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은 상상해 보세요. 오늘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은 어렵지 않아요.”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그러면 이 신종코로나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저 해와 달과 별은 누가 만들었어요? 아니 우리 자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환경을 압박해버리면 인간들의 자기 본성이 나오게 되는데 그 본성이 나오는 징조중 하나가 6절에 나옵니다. “놉(멤피스)은 저희를 장사하리니 저희의 은 보물은 찔레가 덮을 것이요.”
이 찔레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저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리 피해봤자 저주, 저주의 환경……, 개인적으로 얼마나 자신이 겸손하고, 성실하고, 얼마나 착하고, 예의바르고, 그런 것은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가시와 엉겅퀴, 이 모든 환경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성실한가, 내가 얼마나 착한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 어느 누구도, 사적인 품격, 품위, 인품으로서 구원받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다듬어요. 자기를 건전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아주 매진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해코지 아니하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거지요. 조폭들도 “차카게 살자.” 써놓잖아요. 바르게 살려고 하는 거예요. 뭐 좋은 일 있을까 싶어서.
그것은 사적인 거예요. 아직 숨 쉴 만 하니까 ‘착하게 사는데서 더 나아가서 행복해질 것이다. 나의 계획대로 될 것이다.’ 그 계획은 내가 문제 삼는 것,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매진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내가 신이 되는 것. 그것은 이미 악마로부터 배운 적이 있습니다. “네가 신이 되는 그것이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적인 모든 여망, 희망을, 환경을 완전히 일괄되게 해서 피할 곳이 없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면 이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언질이라도 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을 우리가 이미 죄인인데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서 불평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불평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7절에 나와요.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찌라.” 제가 이야기했지요. 의도적이라고요. 의도적으로 피할 곳이 없게 만듭니다. 사적인 기대, 사적인 목적과 인생의 목표는 아무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뭘 의지해야 되는가? 이스라엘은 알아야 된다. 뭐냐?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자기들의 소소한 이익이 달성되지 않고, 환경이 아주 독하게 되고 엉망이 되니까 인간들은 그 다음부터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선지자들을 공격하는 거예요. 뭐라고 공격하느냐? 선지자는 바보들이라고, 어리석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선지자는 미쳤다고 욕하는 거예요. 그래도 속이 좀 풀릴까 싶어서. 그런 식으로 해서 스스로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아직까지 자기 잘난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형벌의 날을 주시는지, 왜 멸망의 날을 주시는지 다 이유가 있거든요. 그 이유는 누가 아느냐? 선지자들이 알고, 신의 감동받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 보고 뭐라고 하느냐?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들의 여망, 소망과 전혀 안 맞으니까. 지금 교회에 대해서 국가가 완전히 깽판 놔버렸어요. 오늘 설교 제목은 ‘깽판’입니다. 깽판 놔버려요. 아까 존 레논의 <이매진>이라는 노래가사 그대로에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데 교회 왜 다니지? 놀기 삼아 다니잖아. 그렇다면 신종코로나 사태로 문 좀 닫아도 괜찮잖아. 어차피 천국은 없고 지옥도 없으니까.” 국가가 나서서 깽판 놔버리는 거예요. 종교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종교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는 것은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평화롭게 살고 싶지요. 하지만 신종코로나는 우리를 평화롭게 놔두지를 않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겁니까? 서로 평화롭게, 사이좋게 껴안고 살고 싶지요. 그런데 ‘1.8미터 거리두기’ 이건 뭐예요? 이건 뭡니까? 환경이라는 이 세상은요, 일괄적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 없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의도적인 조치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들, 하나님의 신에 감동받은 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것을 다른 이방민족이 아니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준 거예요. 특별하게. 이스라엘에게 이런 선지자를 준 것은, 너희들 평소의 속셈이 선지자를 만나야 발각이 되고 노출이 된다는 거예요. 선지자가 없으면 자기들은 멀쩡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신종코로나는 없어야 마땅하고, 인간끼리 평화롭게 종교도 없이, 천국도 없이 바르게 살고, 점잖게 살고, 서로 도와주고 이웃사랑하면 세상은 좋은 세상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형벌의 이유였던 거예요.
그들 나름대로의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관심사가 하나님이 뭘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도 관심이 없고 내가 뭘 원하느냐가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뭐냐?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라고 되어 있는데 현대정신의학에서 미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미친 사람은 없어요. 미친 사람은 없고요. 정신과에서 뭐라고 하느냐? 두뇌에 스크래치 난 사람이라고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귀신들린 사람 없고 어떤 사람이 있느냐? 정신분열증 환자나 신경증, 노이로제,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은 정신과에 가면 약물로 치료가 된다는 거예요. 다리 부러졌을 때 이 육체에 조치를 취하면 되듯이 육체와 연결된 두뇌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고 육체에 불과하니까 다리 다친 것이나 머리 다친 것이나 다 같이 다친 것이라는 거지요.
두뇌에 약 2천억 개의 ‘뉴런’이라는 신경세포가 있는데 그 세포가 신경전달물질을 너무 과도하게 분비하거나 혹은 메말라 버리면 우울증 걸린다는 거예요. ‘세로토닌’이라든지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오는데 그걸 조절하면 치료가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미친 사람은 없지요. 머리를 다친 사람, 뭔가 머리에 문제 일어난 사람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지혜인 과학시대에서는 인간의 종교 같은 것을 아예 배제해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이 생각하는 사랑, 신, 지옥, 지옥에 벌벌 떨고 천국이라면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 F(functional)-MRI라는 것이 있어요. 이 장비로 두뇌를 찍어버리면 두뇌의 혈류량을 보여줘요. 그게 표시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느냐? 이 두뇌 옆쪽에 신이 있는 거예요. 수녀들 모여서 기도할 때 F(functional)-MRI로 두뇌를 관찰해보면 바로 그 부분이 활성화 되어서 표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은 인간이 만드는 거예요. ‘불소 19’라는 것을 포도당에 집어넣으면 불소 19가 세포내에 스며들어서 그게 소멸되면서 양성자가 튀어나오고 그 양성자와 전자가 만나서 반응을 일으키게 되면 감마선이 나오는데 그 감마선을 이용하는 장비를 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라고 해요. 그 장비를 쓰면 두뇌를 단층으로 잘라내듯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나트륨 양이온이 두뇌의 축삭돌기에 투입이 되면 그것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따라서 전기신호(펄스)가 발생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모르스부호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은 이 두뇌에 있는 전기신호가 모르스부호처럼 전기신호를 보내서 사랑이 된다는 겁니다.
양이온은 뭐고 또 음이온은 뭐냐? 그것은 원소가 전자기장을 형성하고 제일 외곽에 있는 전자를 잃어버리거나 얻거나 하는데, 중성의 원자에서 한개 이상의 전자를 잃으면 원자는 양전하를 띠고, 한개 이상의 전자를 얻으면 음전하를 띠게 되는데 양전하를 띤 이온을 양이온(cation), 음전하를 띤 이온을 음이온(anion)이라 부른다는 거예요.
또 이 우주를 지탱하는 네 가지의 기본 힘이 있는데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있고, 그 에너지 속에 인간이 포함되어서 에너지가 파도처럼 물결치게 되면 그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그 말이지요. 과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제 말은 미쳤다는 것은 과학에서는 없다는 거예요. 신체라는 물질이 그냥 상한 거지요. 아래쪽이 상한 것은 다리가 부러진다든지 하는 것이고, 위쪽이 상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정신병이 되는데 약물 집어넣으면 치료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거예요. 과학의 그러한 이야기를 철학에서는 현상학이라 해서 이미 정리를 다 했어요. 인간은 뭘 관찰한다는 것이 단지 관찰이 아니고 의도를 가지고 관찰한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변화를 두고 본인만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질서를 잡아서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부처 믿는다고 각자 인생을 따로 정하는 거예요.
그 의도가 뭐냐? 그게 욕망인데 그 욕망은 뭐냐? 그건 뭐 괴물이지요. 인간도 뭘 지켜보고, 검출기도 써보고, 약물을 투입하고 할 때 그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나라는 것, 그 나라는 것은 검출이 안돼요. 결과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불교에서는 나를 뭐라고 하느냐? 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있다고 하면 내가 있다고 한 그 나를 관찰해야 될 나를 또 만들기 때문에, 그 나 때문에 불교에서는 자기의 마음이 지배를 받으니까 아예 나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나가 없다면 뭐가 있느냐? 관자재보살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신이에요. 신이 있고 우리는 뭐냐? 관자재보살이 신인데 그 관자재보살의 특징이 뭐냐? 눈이 많아요. 모든 것을 다 쳐다보니까.(觀自在菩薩) 눈이 많으니까 모든 것을 다 살핀다는 거예요. 에스겔에 나오는 천사를 보면 날개에 눈이 많아요. 촘촘히 눈이 굉장히 많아요. 관재재보살은 그렇게 눈이 많아서 자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관자재보살에 종속된 지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에베소서 4장이나 고린도전서 12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몸의 머리는 주님이고 우리는 그의 지체라 하는 것. 그 아이디어를 불교가 이야기하다니까요. 인간은 없고 관자재보살이라는 그 신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불교를 그저 돈 받고 사주팔자나 봐주고 갓바위에 가서 비는 것으로나 알고 있지만 불교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전에 이야기한 삼위일체같은 그 아이디어,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의 몸이 교회라는 그 논리를 그대로 이미 수천 년전에 다 만들어냈어요.
여러분,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아이디어가 괴물에서 나온 아이디어에요. 인간이 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의 그 아이디어를 악마가 인간에게 자아를 앞장세워서 다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미쳐도 미치지 않았어요. 인간의 정신은 똑바릅니다. 멀쩡합니다.
이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고, 어느 것이 엉터리며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단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미 주어진 지혜와 자질과 총기와 합리적인 것 가지고 인간이 자기의 운명, 죽고 난 뒤의 미래를 왜 우리가 구상해내지 못하겠는가? 구상해내는 겁니다.
“천국은 이런 곳이고 지옥은 이런 곳이다.” 종교도 만들어내는 거예요. 사적으로. 모든 종교가 기독교나 불교가 도 닦는데 나서는데 문제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도닦음이 아무짝도 소용없도록 환경으로 여기서 파멸의 날, 형벌의 날을 만들어버렸다는 겁니다.
나름대로의 노력을 안 할 때는 우리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 인간은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고요. 노력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노력하는 거예요. 노력해도 소용없다면 노력을 누가 하겠습니까?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는 거예요. 인간은 구원받을 어떤 희망이 있고 구원받을 어떤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교회 나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형벌 받을 이유가 되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이 꼼수를 써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구원받겠다는 시도는 성경전체 하나님에 의해서 다 거부당합니다. 거절당해요. 인간은 이미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이미 안 것을 버릴 수는 없고 활용하는 겁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면서.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면서 자기를 선하다고 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게 무조건 내가 선한 자리에 속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선한 인간이 두뇌에 대해 연구하고, 선한 인간이 두뇌의 진화에 대해서 연구하고, 선한 인간이 항우울제를 개발하고 병을 고치고. 왜? 선하니까 그런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예외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 선악가지고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이렇게 증명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소속된 곳, 내가 있는 자리가 선하다고 여기잖아요. 그러면 더 확실하게 해서 나 빼놓고는 다 악한 자에요. 나 빼놓고 다 흉악하다는 것이 아니고 나 빼놓고 약간은 다 악한데, 아주 나쁜 악한도 있지만 같이 살만한 약간은 봐줄 수 있는 악함도 있고, 그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선하고 나 빼놓고는 다 약간씩은 악한 사람이다.’라는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안에서 괴물이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착하다고 보고 내가 악하다고 봅시다. 그런 사람은 없지만 예를 들어서요. 내가 악하다고 보고 저 사람은 선하다고 봅시다. 그러면 여기에 어떤 사람이 맛있는 것을 가져와서 ‘자 맛있는 것 너 먹을래, 저 사람이 먹게 할까?’라고 물으면 그 착한 사람에게 양보하겠습니까?
또는 반대로 칼을 들고 서서 “나는 최후의 선한사람만 안죽이고 나머지는 죽인다. 그런데 저 사람이 너보다 더 선하다고 그랬지? 그러면 선한사람 남겨두고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데 네가 스스로 거기에 대해서 순순히 용인하나?” 라고 할 때 안되지요. 아무리 선하지만 나는 무조건 살고 싶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형벌이 오고 멸망의 날이 오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숨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신에 감동된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미쳤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이 미쳤다고 하는 것은 나만은 안 미쳤다는 거예요. 나만은 멀쩡하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러한 본색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끄집어냅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선한자가 자극받아서 뭘 공격하느냐 하면, 악한 자를 공격하게 만들어요. 선하다고 여기는 우리들이 악을 향해서 공격을 하지요. 정당성이 있으니까. 나는 선하고 저쪽이 악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같이 살고 싶은데 그 악한 쪽이 악한 생각을 가지고 선한 나를 공격을 해? 그렇다면 선한 내가 가만있지 못하지. 내가 선함의 본때를 보이리라.’ 하고 나서겠지요.
선한자가 내 지역에서 나서서 악함을 악하다고 보는 그 순간 선한 내 지역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내가 악하다고 여겼던 그 발을 딛는 순간 선하다고 여기는 그 지역은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선하지 않고, 선하다고 착각했던 나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서 ‘내가 공격하는 적도 악하지만 나도 같이 덩달아 악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까발리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합니다.
선한 것이 악이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것이 악이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오늘 본문 9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기 ‘기브아’라는 지명이 나오지요.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사건인데요. 호세아 9장 8절에 보면, 선지자를 보내봤자 선지자를 새잡듯이 잡아버리고 또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있어요.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그 원한을 품고 선지자를 공격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내 모든 결정과 선택이 선하기 때문에 나를 다치게 하고 이 선한 나를 힘들게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 선한 내가 이 선함의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 악함에 대해서 그냥 있지 않겠다’는 식으로 공격에 나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다는 것도 완전히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이미 있었으니 사사기 19장 27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사사기 19장에 보면 어떤 레위사람이 있는데 첩을 두었어요. 그 첩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레위사람은 기브아라는 곳에 사는 사람이에요. 기브아는 북쪽에 있고 베들레헴은 남쪽에 있어요.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부터 8킬로미터 아래쪽에 있습니다. 제가 가봤습니다. 기브아도 가본 것 같은데 그 거리가 예루살렘에서 길어봐야 한 30킬로쯤 되는 정도의 거리입니다.
레위인의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베들레헴으로 도망을 간 거예요.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데리러 간 겁니다.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내매” 베들레헴에서 넉 달을 지냈는데 그 남편 레위인이 행음한 첩을 용서해주겠다고 하면서 달래기 위해서 그 집에 간 겁니다.
그래서 빨리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자꾸 장인이 하루만 더 있다가라는 거예요. 자꾸 하루만 더 있다 가라는 통에 5일째 되는 날까지 계속 붙들려 있다가 도저히 못 참고 그날 첩을 데리고 떠난 거예요. ‘여부스’라는 것은 예루살렘인데요, 베들레헴에서 가는 길에 예루살렘이 있고요. 예루살렘을 지나서 기브아가 있습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지역에 속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다지역이고요. 나와바리가 달라요. 노는 지역이 다르다는 말이지요. 기브아에 외지 사람이 어슬렁거리니까 노인네가 봤어요. 그 노인이, “여기서 외지인이 어슬렁거리면 위험하니 우리 집에 가세.” 하고 그 부부를 자기집에 초대해서 잘 대접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동네 불량배들, 깡패들이 우르르 몰려왔어요. 레위인이 남자인데도 상당히 예쁘장하게 생겼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이 남자들이 여자는 안보고 그 남자하고 재미나게 놀아보자, 하는 식으로 그 남자를 내놓으라는 식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노인은 그 불량배들이 얼마나 악질인지 알기 때문에 손님을 내놓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삿 19:24)라고 한 거예요.
그 뒤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그 첩이 죽어버린 거예요. 레위사람이 화가 나서 자기 고향으로 가서 자기 첩의 시체를 마디마디 찍어서, 열 두 마디 시체택배사건인데요, 열 두 마디를 찍어서 그걸 열 두 지파에 택배로 다 보냈어요. 이 정도로 이 지역이 더럽고 정말 족하게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 언론에 다 까발리듯이, 다 불어버린 겁니다.
간음으로 받은 상처를 살인으로 보상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록한 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누가 선하냐 하는 겁니다. 누가 선한 자냐?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논리를 가지고 모든 것을 보면서 어떤 현상이 있느냐? 내가 하는 것은 무조건 옳고, 그리고 나 외의 모든 사람들은 정도에 따라서 악하고, 그것은 내가 평가한다는 식으로 구축되어 있는 거예요.
결국 나라는 이 괴물의 관심사가 ‘내가 얼마나 착해질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게 된 속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깔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자기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이 베냐민 자파의 기브아 사람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라고 결정을 내려서 “그 불량배들을 내놔라. 우리가 재판하겠다.” 하니까 베냐민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베냐민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쪽은 선하다. 선한 쪽을 네가 왜 관여하려고 하느냐? 우리 동네청년들 못 내놓겠다.” 이렇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가 선한지 한 번 붙어봐? 좋다. 붙자.” 해서 붙은 거예요. 한 지파를 놔두고 열 한지파가 연합하고 한 지파를 상대로 공격하는 겁니다.
그 열한지파의 특성은 뭐냐? ‘그 불량배들이 여자를 간음해서 죽게 만들어놓고 반성도 안하고 이런 악한 짓은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땅히 우리는 선하다. 이 악한 것은 우리 손으로 처단하겠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연합군이 베냐민지파를 공격했어요.
베냐민지파는 또 왼손잡이라. 옛날에 왼손잡이는 장애자로 봤어요. 왼손잡이 베냐민지파의 군대와 붙었는데 연합군쪽 에서 몇 명이 죽었나? 초반에 2만 2천명이 작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요. “하나님 우리가 싸우리이까?” 꼭 싸워야 되겠지요, 라는 뜻으로 물었지요. ‘하나님의 뜻이다. 또 붙자.’ 해서 두 번째 전쟁에서 1만 8천명이 죽었어요.
2만 2천에 1만 8천, 4만 명이 작살났습니다. 그 다음부터 연합군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흔들리기 때문에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여,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묻지요.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삿 20:28) “우리는 정당하지요. 그지요?”라는 말에서 “우리가 과연 정당합니까? 아니면 우리 쪽이 정당하지 않은 겁니까?”라는 식으로 물은 거예요.
세 번째, “올라가라. 단 매복하라.” 여기서 성경에서 매복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매복의 중요성은 뭐냐? 나는 선하고 내가 있는 곳도 선하고, 내 영역은 선하고 내 공간은 선하고, 따라서 내가 이동하게 되면 그것은 내 영역이 되는데, 선한 내가 이동할 때마다 그 공간은 선하다는 관점에서 그들은 전쟁을 하는 거예요.
바로 전쟁에서 매복이라는 것은, 내가 옳고 선하고 하나님의 일을 정당하게 행사한다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전쟁에서, 정당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교만한 것으로 전환시키고 교만한 그것을 처벌하는 그 방식이 전쟁의 매복방식입니다.
여호수아 8장에서 아이성 칠 때도 그렇게 한 겁니다. 첫 번째 승리에서 승리하니까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정당하다고 여겨서 승리했다’고 본 거예요. 신천지가 35만 교인이 되니까 숫자가 많다는 것이 뭐예요? 그들이 한국교회에서 배운 것이 뭡니까? 숫자가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셔서 숫자가 많은 거예요. 헌금이 5천억이에요. 헌금이 5천억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5천 억 헌금을 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이 땅에서 정당한 교회, 정당한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확실한 증거를 준 이 신천지교회에 오라. 제가 지금 신천지 PR하는 느낌이 들어요. 확실한 보혜사 이 만희 보혜사에게 오라. 이만큼 많은 숫자의 사람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장 진리답다는 이야기고, 헌금이 많다는 것은 복을 줬다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런 논리를 펴는 거예요. 이게 교만이라는 겁니다. 이게 자기정당성이지요.
자기가 선하다고 해서 이 베냐민지파가 두 번이나 이겼으니까 이번에도 이길 줄 알고 와르르 자기지역을 버리고 이동해서 적들에게 나가지요. 왜? 선한자가 이동했으니까, 그래서 자기가 있는 곳이 선한 지역이니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에 역으로 그들이 있던 본진에 불을 질러버리고 뒤에서 역습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베냐민 군사 2만 5천 백명이 죽는 것을 시작으로 달랑 6백 명만 광야로 쫓기면서 완전히 지파 하나가 다 날라 간 거예요. 지파 하나가 없어진 겁니다. 이것이 오늘 호세아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궤멸, 멸망, 형벌의 날이에요.
이 땅에서 누가 선합니까? 선한자가 누굽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선한자가 없음’ 이라는 절차가 필요해요. 구원에는 아무도 선한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선한 나를 천당 보내주세요.”라고 우길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역습, 그 매복, 바로 미친 소리 듣는 선지자의 계열을 따라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마귀 들렸다는,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 들었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한 겁니다. 왜? 품새 보니 아무것도 없거든요. 따르는 세력도 별로 없고 헌금도 5천억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 이야기는, 내가 그냥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자기 아들의 목숨까지 언약성취에다 다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너희는 뭘 집어넣었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그 약속에 예수님의 자기 목숨까지 다 부은 거예요.
그것이 그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저주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약속에 다 몰빵했는데 너희들은 뭘 했느냐? 너희는 깽판만 놨잖아. ‘왜 착한 나를 건드리느냐?’ 하는 식으로 반항했잖아. 반발했잖아.” 그 내용을 북쪽 이스라엘에 하나의 절차로서 보여주는 겁니다.
절차를 보여주고 북쪽 이스라엘은 완전히 소개(疏開)돼요. 모든 사람을 거기서 다 치워버리지요. 애굽으로 피한다? 피해봤자 거기서도 하나님이 다 멸망시켜 버립니다. 애굽사람을 통해서 멸망시켜 버려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 피할 곳이 없다는 것. 이게 축복입니다. 아, 내가 항상 나는 이 땅에서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궁지로 몰아세우는 거예요. 새를 몰아세워서 그물에 걸리게 하듯이.
그렇다면 나는 왜 있느냐? 예수님 십자가 눈에 들어오라고. ‘하나님의 언약 다 이루었다’가 눈에 들어오라고. 다 이루었다, 하심에 우리를 몰아세우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하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 누구냐? 바로 선지자에요.
그것이 바로 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가 바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가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실로 큰 기쁨으로, 자랑으로,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원치 않은 괴물이 담겨 있음을 사전에 몰랐습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나라는 것은 훌륭하고, 선하고, 착하고, 대단하고, 살아남아야 되고, 천국가야 된다고 우겼던 그 교만, 이것이 왜 교만인지 몰랐는데 십자가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진정 교만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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