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미아 대전-119강 마태복음26장63-68절(뒤바뀐 재판) 2020033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은 26장 63절부터 68절을 보겠습니다.
63절,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절,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 하니라 하고 67절,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절,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사람들이, 본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살아가는 그것이 제대로 살아가는지 아닌지는, 엉터리인지 아닌지는 예수님을 만나야 그걸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냥 사람들끼리 서로 의논하고 협상해봐야 그리고 생각을 모아봐야 여기서 옳고 그름이 나타나지 않아요. 왜냐 하면은 인간의 생각의 전제가, 인간의 생각에는 전제가 있는데, 그 전제가 뭐냐 하면은 “나는 옳아야 돼.”라는 전제가 있어요. “나는 필히 옳아야 돼. 내가 옳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이런 전제가 있어요. 저는 이걸 자기 정당성이라고 하는데, 자기 정당성이 기저, 바닥, 그라운드에 깔려있는 겁니다. “나는 항상 옳아야 돼. 남이 옳으면 안 돼요. 내가 옳아야 돼요. 내가. 그래서 나하고 남이 틀렸다면 그쪽이 틀린 거고 내가 옳은 거야.”라는 이런 바탕, 기저위에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지향성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쉬운 말로 인간의 의도성이다. 인간이 이렇게 의도하는 것. 인간이 이렇게 의도하게 되면 이 의도성을 표현하게 되어 있어요. 표현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자, 여기에 예수님 세워놓고 여기 대제사장들과 거기를 뒤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쭉 있어요. 쭉 있는데, 이들 생각에는 어떤 생각이 깔려있다고요? ‘무조건 내 생각은 옳아야 돼. 암 옳고말고.’라는 것이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이 무조건 나는 옳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 인간세계가. 옳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냥 있지 않고 뭐로 나온다고 했어요? 의도성을 가지고 나오죠. 그 의도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표현되죠.
자, 표현될 때, 뭐로 표현이 됩니까? 그들이 자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뭐로 표현합니까? 그냥 음음음~~하면서 주먹질해가지고 표현합니까? 여기에 뭐가 동원되죠. 언어가 동원됩니다. 언어는 뭐냐,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증상입니다. 증상.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은 인간의 생각, 인간이 의식하는 그 모든 것, 그 밑바닥, 이게 무의식이죠. 밑바닥에서 나와 있는 그 의도성, 밑바닥 무의식으로부터 이렇게 퍼져 나오는 그 의도성을 표현을 할 때는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는 겁니다.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개념이 나와요. 개념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이 개념은 본인이 이야기하는 자기 의도가 정당하다를 반영하기 위한 개념이 되는 거죠.
자, 그렇다면 본인의 의도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개념에 대해서 수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용할 수 없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그런 뜻으로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거기에 뭐, 동의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진짜 마음, 진짜 마음에 합세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두 사람이 있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을 계속해봅시다. 누가 정당하다고 해요? 나는 정당하다죠. 나는. 정당함에 있어서 나는 포기 못하거든요. 근데 어떤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개념을 이야기한다면 동의는 할 수 있어도, 일부 동의죠. 일부. 전적으로 동의는 안 해요. 왜냐 하면은 전적으로 동의하면 나는 정당하지 않는 게 돼버리니까. 이쪽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간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나를 놔두고 다른 사람이 정당하다는 것에 어떤 인간도 거기에 나설 위인은 없어요. 그냥 동의해주죠. “나도 당신하고 같아.” 사실은 다 같지가 않아요. 둘 다 정당하다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나만 정당해야 돼요. 나만. 그 사람이 이런 개념을 썼다면 나는 다른 개념을 쓰는 거예요. 다른 개념을 써야 그 사람의 노예가 안 되고 종이 안 되잖아요. 나는 내 나름대로의 개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쓰는 언어는 오직 나만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이라는 것도, 결국 언어의 개념이라는 것은, 개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의미죠.
의미라고 하는 이것은 그냥 하나의 규약,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규약에 불과하지 어떤 진리는 아닙니다. 필요한 것들을, 재료상에 가게 되면, 전기재료상이 있잖아요. 철물점, 전기 재료상에 가게 되면 전기에 필요한 재료들이 쫙 있다 이 말이죠. 약국에 가면 약들이 쫙 있죠. 보통 병원 1층에는 약국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2층 병원에 갔다와가지고 약국에 처방전을 내놓는다 이 말이죠. 처방전을 내놓을 때, 처방전에 기록된 것이 약 한 다섯 가지가 이렇게 처방되어 있다면 약사는 한 가지만 하는 것이 아니고 뽑아서 다섯 가지를 이렇게 처방해주죠.
이게 뭐냐 하면 멀리 있는 개념을 가까이 가지고 와서 갖다 붙이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유라고 해요. 비유.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언어는 비유 정도. 비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은유. 비유정도밖에 안 돼요. 정확하게 내 뜻을 전할 수 있는 단어는 이 재료상에 있는 이 재료의 한계 때문에, 진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아무리 많이 해도 내 생각은 무한이고 재료, 언어는 유한이기 때문에 그 유한이 무한을 마저 채울 수는 없는 겁니다. 비유라는 것은 멀리 있는 개념을 가까이 가져와서 갖다 붙인 것이 바로 비유가 되는 겁니다.
한약방에 보게 되면 약이 들어있는 서랍이 많아서 이것저것 뽑아내서 종이에 싸잖아요. 종이에 싸서 달여 먹으라고 주지 않습니까? 그처럼 그런 일을 인간들이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소위 실제적인 종교권력자들이 모여서 예수님하고 뭐하느냐 하면은 언어를 주고받는 거예요. 언어를 주고받는다.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서가지고 뭘 원하느냐 하면은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가 궁금한 거예요. 진리가 무엇인가? 성령을 받게 되면 뭐가 궁금한가 하면은, 왜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받아야 될 대상인가? 왜 주님은 유일하게 심판주인가? 거기에 대해서 궁금하겠죠.
성령을 받은 후라면 성경을 보면서 왜 예수님 십자가 복음이 진리인가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왜, 심판받아야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제가 굳이 하는 이유가 심판을 받게 되는, 제가 처음에 인간의 언어 사용이 자기의 무엇의 의도성, 기대성 때문에 나온다고 했습니까? 본인의 뭐라고 했습니까? 정당성이라고 했죠. 근데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 영을 받게 되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은 정당하다? 정당하지 않다? 전혀 정당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정당한 게 돼요. 인간은 정당하지 않고, 심판받아 죽어 마땅하고 지옥가야 한다는 그 자체가 정당해요. 이게 진리에요. 왜냐하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인간이 쓰는 이 언어라는 것, 개념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쓰는 거예요. 인간들이. 지금 인간들이 쓰는 언어를 예수님도 쓰고 하나님도 쓰고 있잖아요. 하나님 대신 예수님도 쓰고 있다 이 말이죠. 인간들의 언어 개념은 뭘 보여주는 증상이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정당성을 못 버리고 잘난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증거로서, 증상으로서 인간의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자, 인간의 정당성이 이만큼(◯)이라면, 인간이 골라 뽑아 쓰는 언어의 개수는 이거(ㅇ)밖에 안 되죠. 인간의 정당성에서 언어를 한 25가지를 사용한다면, 25가지에 다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기의 나 잘남이 얼마나 많이 무한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아무리 뽑아내도 무한대인 거예요.
인간은 의도를 갖고 있고 이 의도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온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인간의 통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은 통제 불가에요. 이 말은 인간의 무의식이 의식에서 나온 자아보다 더 세다 이 말입니다. 더 세다, 더 우선적이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자아도 나의 욕망과 욕구를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흥미롭게 봐야 될 것은 지금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두고서 계속 질문을 던진다는 겁니다. 계속 질문을. 질문을 던질 때 질문의 기저, 그라운드, 바탕에는 뭐가 있습니까? 질문을 던질 때의 언어가 우리의 의도, 표현하겠다는 그 욕구는 항상 뭐하다? 당연히 정당하다. 옳다. 진리다. 우리가 너한테 말할 때 우리는 진리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근데 이들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나 개념들이 성경에 나오는 개념을 사용했죠. 여기에 보게 되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63절에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살아 계신’이라는 단어가 나왔죠. 그 다음에 ‘하나님께’ 나왔죠. 그 다음에 ‘맹세’ 나왔죠. ‘하나님의 아들’ 나왔죠.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들이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특이 이런 예는 지난 본문에도 나오죠. 지난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61절에 보면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두 사람이 또 말을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62절, “이 사람의 말이” 예수라는 이 작자가 하는 말이, 성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헐어버린다는 개념을 사용했고, 그 다음에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는 개념을 사용했어요. 누가? 예수가. 예수라는 사람이 했는데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동의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에 동의를 못하는 그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보여주는 그런 표현이라고 이야기하고, 저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의식의 증상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증상이라는 말은 몸살 나고 감기 걸리면 열나잖아요. 기침하고. 그걸 증상이라고 하잖아요. 보통 증상에서. 증상이 곧 진리를 반영한다 이 말입니다. 진리를 인간들이 자꾸 조작하고 만들어내서 진리를 진리답게 애쓰고 꾸밀 필요가 없이 평소의 그 사람의 언어활동이나 태도를 통해서 증상이 자연스럽게 안 나오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의 행동이나 태도. 태도라고 하는 것은, 대표적인 태도로는 얼굴표정이죠. 같은 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어두운 체하는 것과 밝은 체로 하는 것이 달라요. “예ㅠ” “예~^^” ‘예’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는 표정 자체가 다 다르다 이 말이죠. 이게 바로 증상이라는 겁니다.
크게 넓혀서 말하면 언어표현이에요. 언어표현. 인간의 행동, 태도, 얼굴표정, 손놀림, 이런 것 전부 다 언어표현이에요. 이것은 본인이 통제할 수 없어요. 이것은 본인이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의식 가운데 저절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정당성 발휘는 항상 독자적이죠. 본인만이 할 수 있는, 본인만의 정당성 발휘는 각자 따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참된 내용이라는 뜻이 아니고 실제라는 겁니다. 실제. 실제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인간들이 무의식적인 증상들을 발산해내는 식으로 이 세상은 이렇게 표현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은유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왜 은유라는 단어를 제가 사용하느냐 하면은, 이 은유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멀리 있는 개념들, 내 것이 아닌, 평소에 무관심하고 보는 개념들이 누굴 만나든지, 뭐 꼭 자기 뜻의 의사를 표현해야 할 경우가 생겼으면 멀리 있는 단어를 애써서 힘들여서, 자기 정신을 바짝 하나로 모아가지고 적절한 단어를 자기 것으로 가져와서 그걸 짜깁기 하는 겁니다. 갓난아기가 배고프다. 어떤 언어표현을 하겠어요? 그냥 앙~~하고 울죠. 표정을 통해서 막 울면서 지금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젖 주세요.”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왜 아이가 젖을 달라고 합니까? 동요하는 이유가 뭐예요? 아직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애가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정당하다. 반드시 나는 존재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젖 달라고 하는 애한테는 어떤 양보라든지 윤리도덕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생물적이죠. 생물적. 본능적이죠. 젖 달라고 하는 게. 이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여전히 그 기저, 바탕에는 이러한 무조건적으로 나는 옳고, 나는 반드시 살아있어야 돼, 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주장을 통해서 나타내니까, 은유가 진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흐리멍덩한 은유에 불과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이 평생을 살아도 자기 잘났다는 그 주장 외에는 뭐 달리, 그 주장이 변동이 안 되니까. 인간은 자기가 왜 죽는지, 자기가 그렇게 살고자 하는데도 왜 죽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삶과 죽음을 같이 보시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 이 자체가 죽음의 증상이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면서 선과 악을 같이 봐요. 선이라고 우기는 것도 악의 다른 모습이에요. 인간 세계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를 문제 삼기 때문에 선도 악이에요. 근데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하고 삶과 죽음을 구분하니까, 인간의 기본적인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반대되는 것을, 삶과 죽음, 선과 악 중에서 자기가 여기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좋고 악보다 선이 좋으니까, 좋은 것을 선택하는 본능을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단어, 하나님의 율법에 나오는 단어, 말씀에서 나오는 단어, 그리고 평소에 하는 행동도 그런 쪽으로 개념을 일방적으로 가져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성전, 예수님을 고소한 그 두 사람이 성전을 나쁘게 봅니까? 좋게 봅니까? 성전을 좋게 본다는 거예요. 좋게 보는데, 우리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보는 거예요. 나는 사는 게 정당하다. 왜? 성전이 그걸 보장해준다는 겁니다. 왜? 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믿기 때문에. 이거보다 더 정당한 게 어디에 있느냐. 근본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개념조차도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용도로서 필요하다는 뜻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에, 하나님 자체도 어디에 포함이 되느냐, 이거는 모호한 은유에 불과한 겁니다. 제대로 다 내용을 채우지 못하고 얼기설기 그냥 대충 때우는 식의 은유에 불과한 거예요.
진실 된 것은 나는 정당하다, 나는 옳다, 이게 진실 되겠죠. 그 진실 된 것을 커버기 위해서 하나님 동원하고, 성전동원하고, 하나님께 맹세라는 말도 나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게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오시지 않았더라면 각자, 각자 자기의 정당성을 원하는 대로 헤쳐모여 하겠죠. 나는 이쪽에 설까, 저쪽에 설까, 헤쳐모여하게 되면 자기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그것을 채워줬다고 본인이 은유적으로 대충 생각하면서 그 조직에 소속이 될 겁니다. 그 조직에 소속이 되면 이게 정치적 힘이 되겠죠. 정치적 권세가 되겠습니다. 정치적인 힘과 권세. 여기에 있음으로서 내 정당성이 보다 더 낫게 보장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정치적 권세의 우두머리가 누구냐, 대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지금 대제사장이 누구한테 질문을 던졌다는 말은 현재 모든 인간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을 다시 한 번 해보겠어요. 질문을 던진다는 것, 누구에게 질문한다는 것, 질문한다는 말은 나는 이정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죠. 아니까 질문하는 거죠. 수업시간에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수업의 내용도 모르기 때문에 질문할 것도 나오지 않아요.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을 경우에만, 자기의 노선이 명확하기 위해서 선생님한테 질문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면 질문이 안 되죠.
그래서 대제사장이 질문을 한다는 말은 나 이정도 아니까, “예수야! 이 힘에, 정치적인 나의 힘에 굴복해라. 어지간히 하고 대충 나한테 굴복해라. 그러면 살려둘 수도 있다. 재판은 제사장인 우리가 재판하지 니가 나를 재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들은 선과 삶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재판과정, 재판인데, 오늘 제목이 예수님의 재판인데, 누가 재판하느냐? 에요. 누가. 예수님과 인간의 만남 자체가 재판이에요. 만남 자체가. 주님은 판단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판단 받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율법의 재판자라고 하는 말은 율법의 재판자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새삼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율법의 재판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구원자밖에 없어요. 그래서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래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 12절에서.
자,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다시 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여기에 서있습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이 자기를 재판장으로 여겼어요. 재판장으로 여겼는데, 권세죠.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니까. 재판장이니까. 옳게, 바르게, 참되게 재판하겠노라고 마음을 단단히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재판을 하려면, 옳은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하겠죠. 언어. 개념들을 들고 와야 되지 않습니까? 성전개념이나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나 하나님께 맹세개념이나 전부 다 동원을 한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 예수님을 향하여 쏘아댑니다. “나의 정당함의 맛을 봐라!” 뭐 이런 식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미 너희에게 잡히기 전에 이미 내가 3년 동안 다 이야기했다. 이미 이야기했잖아.”라고 이야기해버려요. 이걸 제대로 하면, 내가 이미 너희들이 질적으로 얼마나 죄인인 것을 평소에 내가 인간들 쪽에서 재판을 해왔다는 거예요. 판단자가 예수님이지 너희들이 나를 판단할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서 평소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평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당성 때문에, 정당성을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앞에 등장하는 예수가 됐던 하나님이 됐던 자꾸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그 버릇이 쉬지 않고 계속 품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은유라는 말을 했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냐, 하는 사실을 은유로 이야기했어요. 은유로. 비유로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피고와 그리고 판결하시는 주님 사이에 간격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간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간격이 이미 상주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개념의 간격 때문에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예수님이 처한 환경, 그 환경에 합당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사용해서 쏘아대는데, 결국 이것은 인간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은유가 될 수밖에 없고 비유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들에게는 평소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 자기는 정당하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의사소통이 될 수가 없죠. 자, 예수님의 의도는 뭡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죽는다는 겁니다.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서.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는 스스로 죽는다고 했어요. 죽어야 될 이유를 주님은 알고 있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겁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이에요. 이미 결론 난 거예요. 그만큼 의로운 주님을, 이 세상이 죄기 때문에 죄가 의를 그냥 두지 않고 죽임으로서 자기의 속내를, 무의식적인 증상을 드러낸 거예요.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그것은 예수님을, 예수님보고 너 죽으라는 거예요. 구차한 이유와 변명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낼 필요가 없어요. 평소에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꾸준히 해오셨어요. 62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님의 답변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간격을 유지하는 겁니다. 인자가, 곧 예수님 본인이, 64절에 보면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권능의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오른편이죠. 하나님의 오른편은 시편110편에 의하면 바로 원수를 온전히 제압하고 정복자로서, 심판주로서 온전히 앉아있는 자가 오른편의 자리입니다.
오른편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거기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원수를 발로 밟고 있는 그러한 구조가 마련되어 있어요. 시편 2편 7절을 보게 되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 아들이 하는 일이 뭐냐, 9절에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세상을 박살내는 기능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실 아들이 바로 원수를 박살내는 것으로 세상에 아들 됨을 드러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재판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재판할 당사자다.”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재판하기 위해서 권능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65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했다는 것은, ‘참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신을 모욕하는 말을 했다. 신을 모욕하는 말. 누가? 예수님께서 신을 모욕하는 말을 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제사장들과 그 수하들은 신을 모욕하는 말로 그렇게 들렸을까요? 왜 그렇게 들렸을까요? 왜 그들은 한번이라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그것을 평소에 그들이 생각하는 신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모욕을 해왔습니다. 모욕을 해왔다. 예수님께서 모욕을 받기 위해서, 인간이 평소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모욕했는가를, 그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걸 밝히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신을 믿는다든지 메시야를 반긴다든지 성전을 한다는 그 자체가 전부 다 신을 모욕하는 말이에요. 모욕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처벌은 간단하죠. 권능으로 구름타고 와가지고 천사를 보내서 완전히 싹쓸이 멸망시키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 할 때에 애굽 나라를 재앙으로 쳐버리듯. 그들은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게 되면, 지금까지 한 것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신을 모욕하는 그 주체자에 똘마니 또는 앞잡이로서 평소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다. 인간 본인이 주체자가 되어서 어떤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싶어 하는 세력, 어떤 주체, 그게 누구겠어요? 악마죠. 악마의 앞잡이로 살아가고 있음을, 예수님을 재판하는 그 현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 말입니다. 자, 이것을 구약의 성전과 관련시켜봅시다. 성전. 우리네 아는 상식으로는 성전은 건물만 있다는 것이 아니고, 성전의 핵심부분은 뭐냐 하면은 바로 제단과 성막이 있겠죠.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곳이다.
제단은 뭐하는 곳이죠? 제물을 잡는 곳이죠. 제물을 잡는다는 말은 뭐냐, 제물 안에 있는 피를 바깥으로 내게 만들죠. 그 근육부분 말고 피를 바깥으로 내는 거죠.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말씀한대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으니까. 피를 내는 거예요. 그럼 피를 이 제단에다가 뿌립니다. 뿌리고 붓고 바릅니다. 그러면 제단을 뭐로 보느냐, 이 제단은 피를 머금었다. 또는 피가 스며들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이 제단이. 레위기에 나오는 이 제단의 특징은 항상 피가 거기에 모이니까.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니까. 그 피, 제단에 있는 피가 성막에 있는 향단에 뿌리고 지성소에 뿌린다는 말은, 그래야 언약궤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피 바름으로, 7월10일 대속죄일에 숫염소나 숫양의 피를 바름으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완화가 되거든요. 화평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단은 항상 피를 머금어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제단에 머금고 있는 피, 인간의 증상, 인간이 신을 모독했다는 증상이 도로 뿜어져 나올 때, 뿜어져 나오면서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한 멸망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심판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인자가 권능으로 할 때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근거가 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정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 대 누구의 만남? 인간 대 예수님의 만남이 그런 거예요. 십자가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이 왜 십자가를 앞장세웠는가 하면은 십자가를 앞장세워야 우리의 평소의 모든 종교라는 것이 신을 모독하는 행위의 일부라는 사실이, 거기에 행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거든요.
‘밥 먹고 살겠다.’ ‘아이고,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 자체도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그 앞에서는 뭐냐 하면은 ‘그렇지.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라는 자기정당성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어떤 단어들을 사용해서 내뿜어내는 거예요. 내뿜어낼 때 우리는 막상 사람보고 했고 상상의 신에게 했다고 하지만, 막상 신 되신 예수님이 딱 오고 나니까 그 모든 것이 바로 신을 모독하는 행위자체로서 밝혀진 겁니다. 아까 했던 구분을 다시해보겠습니다. 이 땅에서는 소위 살겠다는 것, 삶도 이게 죽어 마땅함과 동일한 죽음의 일종이죠. 선이라는 것도 뭐다? 악하다. 악함의 일종이에요. 인간의 모든 의라는 것도 악함,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 바로 인간은 신을 모독하기로 작심한 그 주체의 조종을 받고 살기 때문에. 조종을 받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십자가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남의 이야기로 자꾸 돌리지 마세요. 십자가는 이제 안다고 자꾸 옛날이야기로 제쳐놓지 마세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남겨있는 이 지구의 모든 것은 왜 하나님의 세상 멸망이 정당한가를, 왜 필히 그래야만 되는가, 왜 인간은 필히 죽어야만 마땅한가를, 그 정당성을 계속 보장해주고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은 지속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이나 베드로가 설교할 때나 그들의 편지를 보면 그 모든 이야기가 이거에요. 십자가사건이 담긴 그 의미와 그 본질을 계속 펼쳐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꾸역꾸역 마지막 때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끝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뭘 기다리는가 하면은 끝을 고대해야죠. 고대하라. 끝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내가 정당하다는 그 자체가 끝장나야 될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증상이기 때문에. 인정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나의 세대는 끝나고, 내 인생은 끝나고, 주님의 세상이 펼쳐지기를. 내가 심판받고 주님의 세계가 개시되는 그날을 성도라면 고대해야죠. 그것도 죽기 전에 미리 앞당겨서 고대해야 됩니다. 당연한 거예요.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주께서 권능으로 심판하실 날을 고대해야 마땅하죠. 이 땅에 어떤 미련 같은 것을 두면 안 되죠.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라는 그 말이 의미 없는 말이에요.
이 세상이 이미 구성 자체가 되어 있고 우리는 그 세계에서 뭔가, 이 땅이 있고 내가 있으니까 뭔가 꾸역꾸역해보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그 안에 뭐가 합류되어 있느냐 하면은, 신에 대한 모독, 모욕을 계속 해보겠다는 의도가 있고. 그 의도는 “무조건 나는 정당하다. 나는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 난 선하고 나는 하나님 편에 섰다.”라는 그 태도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나 교회가 이 십자가복음을 왜 자꾸 싫어하는지 그 이유가 오늘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평소에 나의 정당성으로, 나의 정당함으로 나를 평가하고 주님도 평가하고 하나님도 평가하고 세상을 평가하는 그 무의식적인 그 본성, 그 욕망, 그걸 인간이 자기의 몸이 있는 이상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가,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이러한 악마의 앞잡이에 있음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게 돼요. 알려주게 되면 인간은 두 개의 이질적인 소식을 다 접하게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하여 된다는 말을 했죠. 요한복음 3장에서. 흥해야 된다, 쇠해야 된다는 그 자체가 벌써 이질적인 두 개의 것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두 개의 소식을 다 듣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목이 베여 쟁반에 담아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거는 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 주님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져야 마땅하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양쪽을 다 알고, 주님이 더 실제적이고 나는 그 실제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서서히 사라져가야 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이 바로 성도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한다고 했으니까. 요한복음 16장에서. 그게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이니까. 책망한다는 것은 책망 받을만하니까 책망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책망 받는데 이유를 몰라요. 나같이 이렇게 착실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마 좋게 보실 거라고 자꾸 자신을 위로하고 보호하는 그런 본능을 발휘하는데, 그 자체도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세요. 몸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멀쩡한 게 더 과분한 처분을 내리고 있다. 너무 잘 봐주는 게 아닌가. 잘 봐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 증거 하라고 기회를 주신 거예요.
예수님만 의롭고 예수님의 공로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을 베풀어줬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가 숨 쉬고 이 땅에서 나름대로의 어떤 행복감도 느끼고 하는 겁니다. 다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조건하에 주신 은혜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은 십자가 덕분으로 삽니다, 라는 이런 공식이 성립되는 겁니다. 십자가 덕분으로. 그래서 이 십자가덕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26장이 있어가지고 그때 십자가사건의 현장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 66절에 저는 사형에 해당 하니라 하고 67절,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절,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이야기했죠. 그들에게 선지자라는 이 개념조차도 마땅히 정당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을 구원해주고 격려해줘야 선지자답다는 선입감이 작용하고 있어요. 선입감이.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기 위한 선입감이 작용하고 있어요.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지 않습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는데 왜 저를 섭섭하게 합니까?” 섭섭하게 한다는 말 표현이나 뺨으로 친다든지 침을 뱉는 행위나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똑같죠. 예수님의 신체에 직접 폭력을 가하는 거나 예수님한테 이렇게 실망했다든지, 예수 믿은 지가 50년이나 됐는데 내 꼬라지 보니까 내가 봐도 실망스럽습니다, 라고 하는 불만 같은 것이나 똑같은 거예요.
도대체 예수님은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누가 재판장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예수님을 재판하고, 늘 평가하는 입장에 있다고, 그 정도로 자기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는 이 모습과 이 광경을 우리는 매일같이 잊어서도 안 되고 놓쳐서도 안 되는 겁니다.
끝으로 64절을 다시 보면서 생각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대제사장이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니가 그리스도냐?”라고 하니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니가 그리스도냐, 라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주님은 “그래. 니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다. 하지만 너는 이 개념에 대해서 모른다.” 그냥 주님은 실제인데 인간은 비유나 은유밖에 이용할 줄 모를 정도로 주님과의 이 간격이 이미 벌어져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 간격을 좁히는 것은 직접 심판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 됨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우리에게, 성도에게는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인간에게 모욕 받고, 그냥 인간이 아니죠. 신을 믿는다는 인간에게 모욕 받고 죽으심으로, 진짜 아들 됨과 그리스도 됨에서 우리가 죄인 노릇을 했다는 것을 결부시켜서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전제로 해서, 정당하지 않고 지옥가도 합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옛날이야기가 되게 하지 말고, 지금의 십자가로서 계속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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