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117강 / 마태복음 26:53 (기싸움) / 191231 본문
녹취:이미아 대전-117강 마태복음26장 53-55절(기싸움) 20191231-이 근호 목사
자, 마태복음 26장 53절을 봅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엘리사가 아람나라한테 포위가 되었을 때 게하시가 걱정을 했죠. 게하시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니까 달랑 자기하고 엘리사 선생님하고 두 명밖에 없으니까. 저쪽에는 자기 잡으러 엄청나게 왔거든요. 걱정 안 될 수가 없죠. 이런 성경 대목을 보면서 또 다시 우리는 엘리사 편을 들지 말고 게하시 편에 서서봐야 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늘 걱정하는 것이 하나님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걱정하는 겁니까? 내 걱정하는 거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으니까, 나는 아주 겸손해가지고 하나님을 다 차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나님에게 얻어낼 것은, 이 공통점 여부는 얻어내겠다고 생각하고 인간들은 교회를 가죠. 근데 하나님과 인간의 이 공통된 부분은 무슨 부분이냐 하면은 내가 미처 몰랐던, 감추어진 죄가 드러나는 대목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냥 인간과 공통점이 아니고, 뭐로 오셨는가 하면은 인간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의 몸이라고 규정하고 오신 거예요. 죄 있는 육신의 몸.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예수님은 인간의 몸의 일부가 아니고 인간의 전부를 자기 안에 두시는 겁니다. 인간의 전부를. 전부를 뭐로 보느냐, 죄인으로 보시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죄인으로 봤기 때문에 여기서 뭐가 투입이 되느냐, 예수님의 자기 결정과 자기 선택이 주어지죠.
이 결정과 자기 선택은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 이게 유명한 칼 바르트 신학자가 여기서 오해한 것인데,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고 예수님의 결정권이 있음을 위한, 이것을 주되심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을 해요.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누군 건지고 누군 버려도 찍소리하지 마라, 군소리하지 마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죄인 안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런데 칼 바르트 독일 신학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 죄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는다. 일단은 예수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 구원받는다고 했으니까 다 구원받을 게 아니냐.” 이래 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이거는 마치 모든 인간 안에는 다 부처의 마음, 불심이 있다는 불교의, 대승불교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자는 다 미륵이고 뭐. 미륵보살이라는 이런 주장하고. 상당히 극단적인 긍정을 하는 거예요.
칼 바르트나 석가모니의 이런 주장은 인간세계에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바로 철학과, 철학 속에는 과학이 있으니까,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요 근래 크게 주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인권이고, 인권이라는 내용이 뭐냐 하면은 다양성인정이에요. 다양성인정. 니가 동성애를 하든지, 니가 뭐 어떻게 손가락으로 밥을 먹든지 간섭하지 말자. 존중해주자. 다양성 인정. 다양성 존중. 장애자도 인간이다.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북한의 인민을 위해서 사상을 초월해서 용서해주자. 뭐 이런 거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그동안 돈 때문에 그랬으니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다 퍼줘 가지고 똑같이 동등하게 하자. 이게 인권주의에요. 인권주의.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고 환호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남한테 보상받고 위로받고 도움을 받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장애자기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날 도와줘도 그 도움을 받는 것이 하나 미안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왜? 나보다 더 못난 인간이 멀쩡하니까. 그게 괘씸하다 이래 돼요. 잘난 놈들이 어렵고 병든 사람을 도와주는 게 마땅히 할 일이지, 그게 뭐 생색낼 일이냐? 이런 식입니다. 이게 바로 악마적이에요.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이야기하면 한마디로 이거에요. 남에게 지기 싫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남한테 지기 싫다. 지기 싫다는 말은 패자가, 패자가 되기 싫고 승자가 되고 싶다. 이 심보에요. 승자가 되고 싶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한 것도 그거에요. 그리고 지금 여기 51절에 보면 베드로가 칼을 쥐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온 그 종의 귀를 베죠. 그러니까 52절에 네 검을 도로 집어넣어라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되어 있다고요.
한번 적어볼게요. 검을 가진 자는 결론적으로 어떻게 된다? 세자로. “망한다.” 검을 가진 자=망한다. 망하는 컨셉이에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망한 자를 규정할 때, 어떤 이유를 하나님께서 집어넣느냐 하면은, 검을 가져야 안심이다. 총을 가져야 안심이다. 자기가 총을 못 쏘고 검을 못가지면 내 주변에 검 가진 사람, 총 가진 사람을 포진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다는 이 심보. 이 사고방식. 이게 뭐라고요? 이게 주님께서 망할 자를 망하게 하는 이유를 추가해서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주변에 검 가진 사람, 돈 가진 사람을 끌려고 하면 여기에 뭐가 필요합니까? 결국에 돈이 필요하죠. 열심히 공부해서 돈 벌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안 망하려고 하는 거예요. 안 망하겠다는 말은, 망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은 주님 보시기에 이미 망한 사람의 공통적인 기질이라는 거예요. 망해야 될 사람의 공통적인 기질. 크리스마스 때 예배드려야 한다. 왜? 빠지면 교회가 망하니까. 크리스마스는 교회에 돈 들어오는 날이잖아요. 돈 안 들어오면 교회가 망하잖아요. 운영이 안 되니까. 크리스마스가 제일 목돈이 들어오는 날인데. 신년, 송구영신예배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런 걸 안 하겠다는 말은, 당신이 우리 교회를 망치려고 작정하는데 나는 용서 못하겠다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것이 그 사람한테는 뭐로 다가와요? 공포심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결국 누굴 믿어요? 본인은, 인간은 본인 외에는 믿는 사람이 없어요. 주일 낮 설교했죠. 인간은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고요. 끝까지 돌아가실 때에도 안 버리는 것을 봤죠. 끝까지 돌아가실 때까지 안 버리죠. 문장에서요, 나는 망한다. 누구는 망한다. 이렇게 주어, 서술어를 하지만 이 문장은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과 ‘누구는’을 빼야 되고, 그냥 망할 자가 망할 티를 낸다. 이래 보시면 됩니다.
말씀과 복음에 관심이 없을 때 망한 티를 내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물어보면 돼요.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짜장면을 좋아하십니까? 연주회를 좋아하십니까?” “아들을 좋아합니까? 개를 좋아합니까?” “지금 무엇을 좋아합니까?” 정답을 이야기해줄까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내 몸 편한 게 제일 좋아요. 내 몸 편한 게 제일이에요.
그래서 몸 편하려면 제발 사람하고 안 엮어야 돼요. 개는 괜찮은데 사람하고는. 개는 버리면 되지만 사람은 버릴 수가 없어요. 한번 엮어가지고 못 버려서 난리 나는 게 뭐냐 하면은 부모관계가 아닙니까? 그래서 주일 낮에 했죠. 가족은 무슨 가족이다? 식인종이다. 전부 다 죽을 때까지 뜯어먹어요. 장례식 때 영감~! 영감~! 영감을 왜 찾느냐 하면은 뜯어먹을 것을 놓쳐버려서 아까운거라. 계속 뜯어먹어야 하는데 가버렸으니까. 내 밥이 든 밥그릇이 날아간 거예요.
인간이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게 자기한테 귀속된다는 말을 해요. 귀속. 나는 어느 누구한테 포함되지 않아요. 나는. 나는 나에게만 포함이 되기 때문에. 딴 데도 포함되는 척을 하죠. 아까 공통성,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발을 담가놓고 빼는 겁니다. 항상 나에게 귀속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느냐, 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느냐, 나를 안 망하게 하기 위해서 체포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여호와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누가요? 예수님이요.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가 만든 하나님 때문에 그냥 성경만 봐도 밥벌이가 될 정도로 많은 후원과 팬들이 이미 확보되어 있다 이 말이죠. 말로 먹고 사는 거예요. 말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권위가 있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왜 말속에 권위가 있느냐 하면은 말속에, 잘 들으셔야 돼요. 말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말에 권위가 있는 이유는 뭘 제시하느냐 하면은 법, 명령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자기는 명령자고. 당회장이니까. 니는 명령을 받을 자고. 그 관계는 법의 관계에요.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관계. 여기에 협박공갈이 들어가죠. 이 법을 안 하면 니 생활비 없다가 되겠죠. 돈 안 준다. 안 그러면 우리 공동체에서 추방시킨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전부 다 말이 있어요. 말은 법을 만들고 법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힘이 있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이 물론 채찍가지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뭐 채찍은 들었지만 공격적으로 쿠데타를 시도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화나서 채찍으로 성전에서 내쫓은 적은 있지만 쿠데타 일으킨 적은 없죠.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점에서 주님 스스로 이 속에 들어간 거예요. 죄 속에. 죄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 본인이 죄의 극치, 죄의 극한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죄의 극한.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과 더불어 됐다면, 인간들이 스스로 알아낼 수 없는 죄를 예수님이 대표해서 그것을 밝혀야 될 책무가 있는 거예요. 날 때려라! 날 죽여라! 그러니까 너희 마음속에, 각자의 마음, 개인이 아니고 너희 공통적인 마음속에 한결같이 인간 대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 죄를 내가 너희들 앞에 채찍 맞고 죽음으로서 비로소 이 땅에 모든 것이 공개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전략이에요. 방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영광스런 주님은 그걸 나타내지 않습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에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들의 구원에 대한 모든 욕망은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들에게 악마가 준 마지막 유혹이 되는 거예요.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천국 가고자 하는 것이 유혹이 됐다는 것이 십자가로서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고자 하는 그 힘이, 그 의도가 누굴 자빠트립니까? 누굴 체포한 거예요? 구원자를, 구원의 욕망이 구원자를 밟아 죽인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그 일을 하잖아요. 구원받겠다는 열망들이 모인 단체가 뭐다? 교회죠. 모든 교회가 다 구원파니까, 교회잖아요. 구원을 위해서 십일조내고 하잖아요. 구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포기 안 하니까. 자기만 챙기기 때문에.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천국도 내가 들어가 줘야 좋은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수십 년, 50년, 60년 교회 다닌 본새에 뭔가 보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아무리 힘들고 교회생활 한다고 어렵지만 주께서 나하나 건진다면, 구원한다면 이런 고난은 참겠습니다.”라고 생각하죠.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뭐와 똑같은가 하면은, 이거는 고난이라는 말도 아까워요. 고난이 아니고 고행이에요. 고행. 어떤 분은 토요일에 교회 가서 죽도록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교회 청소한다고. 힘들어죽겠다는 거예요. 파김치 된다는 거예요.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도 그 교회를 못 나오는 겁니다. 왜? 직분을 맡겨줬기 때문에.
권위자, 명령자 목사가 좋은 게 아니에요. 일하는 게 좋은 게 아니에요. 지금 그 사람한테는 뭐가 좋은 거예요? 이렇게 고행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의 천국 가는 가능성의 확률은 더 높아진다는, 내가 내 사랑에 미쳐버려서 그래요. 내가 내 사랑에 미쳐버려서. 성경에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백날 이야기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기뻐서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즐거워서.”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자기로 인해서 기쁘죠. 자기 구원의 일에 기쁘지 주님 때문에 기뻐하지 않아요. 십자가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덕분에 내가 살았다는 나, 내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기뻐해요. 끝까지 나를 빼지를 못해요. 나는 안 빼요.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주님이 있음 그대로 좋습니다, 라는 말을 못한다니까요. 성령이 아니면 못하고. 나로 인하여 기쁜 거예요. 내가 챙길 것 챙겼다 이 말이거든요. 으쌰! 됐어! 성공했다 이 말이거든요. 성공했다고 기쁜 거예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요, 뭐냐 하면은 주님 생각할 때마다 뭐로 기쁜가 하면은, 나의 정체를, 나의 더러움을, 내 구원받고자 하는 욕심이 죄라고 하는 것을 까발려주니까 고맙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게 고마운 거예요. “내가 이런 고생을 해도 마땅합니다. 내 몸이 이렇게 아프고 내가 죽을 지경이 돼도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이게 기쁜 거예요.
주님은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하고는 거래를 안 합니다. 만약에 시장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콩나물을 팔고 있더라 이 말이죠. 콩나물을 팔고 있는 그 아주머니가 고개 푹 숙이고 있어 코에 손을 대보니 죽었어요. 죽은 사람한테 “아주머니 콩나물 오천 원 어치 해주세요.” 이미 죽은 사람하고는 거래가, 흥정이 안 되죠. 주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보기 때문에, 십일조 해! 주일성수 해! 크리스마스 예배드려! 성경공부 해! 이러지 않아요.
그러면 교회에 왜 나옵니까? 주께서 오게 해서 나온 거예요. 지금 수련회 가고 싶어서 마음들이 굴뚝같아도 주께서 허락이 안 되가지고 정말 마음 아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뭐 한둘만 되면 안 되겠지만. 가기로 꼭 했는데 주께서 허락을 안 하시네요. 1년 전부터 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1년 됐는데 또 못가네. 이거하고. 1년 전부터 안 가기로 작심한 거하고. 그거하고는 다르죠.
지금 베드로가 칼로 귀를 베었죠. 칼로 사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하지 말고 그냥 망한다. 칼을 의지하고~~망한다. 이 말은 망하는 본인을 안 망하려고 하는 행동 자체가 망하는 짓이다 이 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대는 그 자체가 점점 더 물에 빠져가는 그 이유가 돼요. 그래서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더욱더 지옥 보내는 방법이 돼요. 모든 노력이. 구원받은 사람은 이 모든 노력이 바로 주께서 내 죄를 까발리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한 코스라는 사실을 압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공개적으로 아무데 가서 설교하시고 마지막 인생의 끝자락에서, 암4기, 3개월밖에 못 산다고 판정받고 난 뒤에 열광적으로 그때부터 설교하신 분이 있어요. 허운석 선교사. 그분의 설교를 이렇게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그동안 헛짓했습니다. 제목도 전부 다 십자가로, 십자가로, 십자가에요. 나는 하나님이 축복해주는 하나님인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욥처럼 고난 받는 이게 축복인줄 알게 된 거예요. 그전까지는, 60평생 그걸 몰랐다는 거예요. 욥의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게 축복인데, 그동안 헛된 축복을 얼마나 남발해왔는지. 그 죄를 생각하게 되면 이 몸이 아픈 것도 나한테는 고맙다. 그 헛소리, 마귀 짓 한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지기 싫어한다고 했죠.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지는 자로 만들어줘야 내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이긴 자가 돼요. 이게 기싸움인데, 오늘 두 번째 제목은 ‘기싸움’입니다. 인간은 한시도 기싸움을 안 한 적이 없어요. 기라는 것은 동양철학에서 나오는 인간의 활동성, 속성, 뭐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몽골에 있는 의사가 아가페병원이라고 몽골에 세웠어요. 인간시대에 나오죠. 나이는 50이고. 자기가 마음에 결심한 것이 있어서, 물론 기독교신자에요. 그 집에 십자가를 걸어놨어요. 몽골에 가서 없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고 주님 앞에 그걸 서원했다는 겁니다. 근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해요. 사실은 나는 바리스타를 하는 것이 나한테 딱 맞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지금 뭐냐 하면은 혈관내과전공의니까, 내과 보죠. 온갖 것 다 보는 거예요. 자기 부인은 산부인과 전문의고. 그 다음에 거기에 정형외과 의사가 있기는 있는데. 하여튼 의사도 없어요. 몽골에는. 의사가 있기는 있지만 모든 기술을 이 사람들한테 가르쳐야 해요. 정형외과 하죠. 부인은 산부인과 하죠.
그런데 자기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 안 합니까? 인물 좋고 허우대 좋은 의사가 몽골에 가서 봉사하고 이러니까, 물론 아버지한테는 새로움이지만,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 새로움이 우리를 완전히 좌절케 하는 거죠. 아들로 인하여 자기가 보람을 느끼려고 했는데, 아들이 다윗이 돼버렸어요. 아버지는 졸지에 사울이 되고. 자기 명예를 완전히 박살내놨어요. 그런데 이거는 아버지뿐만 아니고 의사내부의 갈등과 싸움은 여전한 거예요. 자기는 바리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리스타가 뭐냐 하면은 커피 뽑아내는 사람이 바리스타잖아요. 커피 뽑아내는 것이 내 적성에 맞다는 거예요. 어떤 치과의사는 김밥 장사하는 것이 적성에 맞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까 제가 인간의 본성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몸이 편한 거죠. 공부할 때 힘 많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이 김밥 장사, 바리스타 하려고 10년 이상 공부 한 게 아니에요. 지금도 의사들은 계속 공부해야 돼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장치들이 있기 때문에. 바리스타하고 김밥을 왜 좋아하느냐, 이게 편하거든요. 이게 편해요. 사람의 몸은요, 본능적으로 편한 데로 가게 되어 있어요. 편한 데로. 내 몸이 뭘 요구하느냐, 간단해요. 편한 데로 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에요. 서있으면 앉고 싶고, 옆에 기대면 눕고 싶고. 이게 중력의, 지구하고 인간 사이에 서로가 중력을 갖고 있어요. 큰 쪽 중력에 이끌리거든요. 개 보세요. 지금 앉아 있잖아요. 중력의 법칙이에요. 노인네들 운동 안 하면 키가 작아지죠. 허리가 꼬부라지죠.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편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생활이 되고 싶은, 되고 싶어요. 이건 중력의 법칙이 아니고 무슨 법칙이냐 하면은 에덴동산의 법칙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은 겁니다.
놀라운 것은 에덴동산의 법칙이 안식일 계명 안에 이게 실리고 내려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마라. 공짜로 살아라. 내가 다 먹여줄게. 이 안식일의 완성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 내 안식,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도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자. 안식을 하려면, 안식이 되려면요, 나 자신이, 기존의 아담에서 나온 나 자신이 제거돼야 돼요. 왜냐 하면은 아담 자체가 안식의 자체에서 쫓겨난 그런 몸을 계속 유포하고 있거든요. 확산시키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몸 말고 다른 몸이 필요하죠. 다른 몸. 근데 아담의 몸은 안에 악마의 정신이 있기 때문에 지고는 못 살거든요. 이기고자 하는 본성을 발산하는 몸.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몸은 져야 하는 몸. 왜 예수님이 져야하느냐 하면은 인간 속에서 구출하려고 하다보니까, 인간들이 기존에 통용되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그 원리와 꼭 반대로 가셔야 해요. 져야 되는 몸. 맥없이 지는 몸. 남들이 가고자 하지 않는 그쪽으로 가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가는, 스스로 종이 되셔서 어디까지 복종했습니까? 죽기까지. 여기 복종을 하는데 뭘 복종합니까? 내 죽음을 복종해버려요. 이게 어려운데, 왜냐하면 뭐든지 그냥 복종해버리면 복종하고 난 뒤가 멀쩡하고 괜찮음을 내다보면서 복종할 의사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복종은 뭡니까? 죽은 척하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인간의 주체의식이에요. 인간은. 고생 뒤에 뭐가 있다? 낙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복종을 죽기까지 해버리면, 진짜 죽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한테 맡겨버려요? 더 이상 내가 나한테 맡기는 모든 절차는 그걸로 마감이 돼버려요. 이게 뭐냐, 벽이에요. 이게 벽이라고요. 벽. 진짜 약속을 믿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벽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벽. 내 모든 행함이, 내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이 소용없다는 벽이 올 거예요.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이 언제 믿음이 확인됐느냐 하면은 내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고 불임이 될 때, 그게 벽이에요. 약속은 있는데, 약속과 실제적인 자기 아내의 불임과 매치가 되지 않아요. 이 매치되지 않는 것을 맞닥뜨려야 돼요. 매치되지 않는 것. 옳은 소리를 해도 먹히지 않는 것. 뭔가 매치가 되지 않는 현실. 그 현실을 반겨야 됩니다. 아, 주님께서 고생하신 현실을 같이 경험하고 있구나! 이래 생각해야 돼요. 먹히지 않는 그러한 실증을, 실증 속에 우리가 놓여있어요.
그래서 이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가 없다고 그 예를 드신 거예요. 니가 아무리해도 니는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낙타가 바늘구멍을 어떻게 통과합니까? 인간이 천국 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들어가지를 못해요. 들어갈 수가 없는 세계에요. 상상들이야 오죽 상상을 많이 합니까? 그러나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갈 수 없는 데를 주께서 넣어주신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게 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 상상이 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상상한대로 애써봤자 그게 못 간다는 벽에 늘 부딪히게 되면, 이거는 그러면 안 할래. 안 할래가 아니라 안 해도 못가요. 그게. 아무것도 안 해도 못 간다니까요. 이게. 해도 못가고.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구원하는 그러한 세상이 천국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을 구원하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이 왔지, 내 구원 따로 챙기기 위해서, 캡슐 호텔이 있죠. 내 방 따로 있는 거. 일본에 있답니다. 내 방 하나 얻으러 가서는 그거는 잘못된 상상입니다. 내 방 없어요. 단톡방 그런 거 없어요.
주님께서는 세상에 집니다. 베드로보고 우리 지자. 어떻게 지냐? 죽기까지 져버리자. 이게 안 돼요. 베드로는 죽은 척은, 지는 척은 해요. 이 고행과 고생을 겪으면 무슨 괜찮은 날이 있겠지, 라고 3년 동안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곡해하면서 받아들였어요. 그들의 해석은 성령받기 전의 해석이잖아요. 그 해석이 오늘날 모든 교회의 해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힘들게 하면 낙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절에 가도 그런 소리를 해요. 고생 뒤에 낙이 있다는 말은 누구는 못해요. “당신 죽으면 하나님 만날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만나요?
새 창조의 시작은 예수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남자죠. 근데 혼인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혼인 안 했죠. 신부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신부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엄마는 있는데 아버지가 없죠. 그러니까 예수님 자체가 잉태지 못했는데 태어난 새로운 자식이에요. 기존의 사람, 육이 아니에요.
기존의 육을 따라 나신 분이 아니에요. 그냥 여자의 후손이에요. 남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이 땅에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다고요. 아버지가 없는데 맨날 하나님보고 아버지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천국 가는 백성은 이 땅에 남편도 없고 아내도 없고 아버지도 없어요. 그야말로 후레자식이죠. 니는, 니 애비도 어미도 없나? 아멘. 애비도 어미도 없고 자식도 없어요. 에베소서 5장에 가면 자식을 내보내라고 했거든요. 자식은 부모를 떠나서 나가야 돼요. 가족해체입니다. 육의 해체죠. 제거하는 거죠. 아담의 요소를 전부 다 제거하는 거예요. 그 제거작업을 거부하지 마세요.
만약 이런 이야기를, 이런 설교를 기존 교회에서 해버리면 그 사람들 난~감~하네! 할 거예요. 뻥할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동안 누구한테 속은 겁니까? 당신이 당신한테 속은 거죠. 이미 틀을, 이렇게 하면 천당 간다고 본인들이 각자 틀을 다 만들어놨어요. 각자. 누구 탓하면 안 돼요. 목사 탓하면 안 돼요. 본인의 구조가 있다니까요. 나는 이렇게 구원받겠다는 계획이 다 있어요. 계획이. 기생충에서 송강호 아들이 나아. 계획이 다 있구나! 아니, 계획을 왜 세워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계획을 왜 세워요? 계획을.
사람의 걱정근심은 계획에서 나와요. 기대에서 나온다고요. 오늘 연주회장 구멍 나라. 사서고생이에요. 사서고생. 자꾸 하나님을,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조몰락거리지 마세요. 자기 손에 갖고 놀지 마세요. 인형도 아니고. 맨날 코 붙이고 뽀뽀해주고. 그거는 오락이고 장난치는 거예요. 실제가 아니라고요.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조몰락거리죠. 아프다고 고함지르면, 주께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고 하시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빈 무덤, 부활의 그림자는 여기 뭐가 되어 있죠? 부활을 인간이 만날 수가 없잖아요. 사건을 인간이 다시 소집을 못해요. 그러니까 빈 무덤에 있죠. 이 빈 무덤을 통해서 누가 이기느냐, 결국은 예수님이 이겼죠. 예수님의 무덤을 군인들이 지켰잖아요. 꼭 오늘날 우리들 같아요. 예수님이 계신다고 지켰는데 보니까 예수님이 없어요.
뭐냐 하면은 우리가 알아서 예수님을 관리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을 조몰락거리고 관리하겠다 이 말이죠. 어떤 식으로? 이 집의 첫 번째 식구는 주님이시다. 주님이 계시지도 않는데 밥 놓고. 어디 제사지내듯이 밥 하나 딱 놓고. 주님은 보이지 않는 우리 집의 주인이시다. 그런 그림 보셨죠? 중국에서 눈 올 때 사진 찍어가지고 예수님이 보이잖아요. 주와 함께 공유하는 어떤 느낌을 갖는 거예요.
백날 느껴봤자 뭐가 안 나와요? 그런 짓하는 나는 죄인이다, 라는 본인을 못 느껴요. 내가 시도하는 모든 것은 나의 잘남으로 이어지지 나의 못남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내가 시도한 모든 것.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하고, 새벽기도하고, 크리스마스 예배, 송구영신예배, 하여튼 예배란 예배는 다 참석할수록 본인은 뿌듯해. 어떤 보람찬 일을 한 것 같아요. 보람찬 일을. 이만하면 됐습니까? 헌금 이만하면 됐어요? 이런 식 같아.
주님의 이렇게 죽으심은요, 사물체, 또는 사물에 대해서 뭐로 하느냐 하면은 흐름으로 전환시키게 하는 겁니다. 흐름. 어떤 사람이 있는데 문이 닫혔는데 그걸 통과할 때 우리는 뭐가 왔다고 하느냐 하면은 귀신이 왔다고 하죠. 귀신. 귀신은 문 닫아도 소용없고 우리 몸도 막 마음대로 들어오죠. 실제로 청년에 있던 귀신이 돼지 몸속에 들어왔잖아요. 돼지가 막 말렸습니까? 들어오지 마시라고 말렸습니까? 청년에게 귀신이 들어올 때 청년이 나가주세요, 라고 이랬습니까? 그래서 아이고, 안 들어올게. 이랬습니까? 아니죠. 물어보지도 않고 들어오죠. 청소해서, 소제가 되었으면, 갈 데가 없으면 귀신이 일곱 친구를 데리고 와서 들어가잖아요. 라면 먹고 갈래? 이래가지고. 다 들어온다 이 말이죠.
이 말은 인간은 이미 누구한테 패배했다? 악마한테 이미 패배한 상태에요. 인간 속에 악마가 들어있는 거예요. 귀신 든 거예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있는 말씀처럼, 너희 애비는 마귀니라. 어느 철학자 어느 과학자가 조사해보니까 인간 속에 악마가 들어있다는 것이 어디서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안 나와요. 진짜 멋도 모르는 것들이. 자기 속에 있는 악마도 그걸 찾아내지 못하면서. 뭐가 지혜자고 뭐가 도인이고. 지리산에 들어가서 도 닦고. 도 닦으면 뭐합니까? 그 자체가 마귀 짓인데요.
부활하신 주님은 인간한테 소환되거나 소급되지 않아요. 본인이 필요할 때만 오시고 나가버리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사건이에요. 사건. 사건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왔을 때에 결국 사건으로 주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성도를 주께서 뭐로 다루십니까? 사물로 다루지 않고 사건으로 다룬다. 우리 인간 속에, 성도의 몸이 있으니까 마귀 들어오듯이 누가 들어와요? 성령이 들어오죠. 성령이 들어오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산다는 것 하나하나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계속 이 땅에 있는 모든 관련성들은 사건에 다 모이게 된다는 거예요.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디 집회에 참석하고, 어떻게 하고, 하는 이것도 우리의 예상대로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관계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사랑은 뒤에서 등 떠미는 거예요. 등 떠미는 것. 사랑은 등 떠미는 거예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등 뒤에서 오는 거예요. 등 뒤에서. 우리를 확 밀어버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사랑으로 밀어버리는 겁니다. 어디로? 천국으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에게 믿음을 발생시키고 우리에게 소망을 발생시키지만 등 떠미는 것은 뭐다?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은 세상과 비교가 안 되니까, 사랑은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낼 것이 뭐가 있어요? 성내지 않고. 온유하고 화평하고 자비롭고. 인자하고. 남하고 비교를 안 하니까. 내가 나를 지킬 생각을 안 하니까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상대가 되어야죠. 허수아비하고 상견례해가지고 누구하고 이기고 지고 이런 게 어디에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왔다는 것은, 성령이 왔다는 것은, 사랑이 왔다는 것은 대조하거나 비교하거나 싸울 필요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냥 진자에요. 이 땅에서 그냥 지고 살면 돼요.
지고 사시면 되는데, 문제는 “요까지 지면됩니까?” 또 단계를 나누네. 지는 것이 무슨 단계가 있어요. 지는 것에는 끝이 없죠. 왜냐, 죽음 자체가 진거니까. 죽음이라는 것으로 질 때까지 계속 주님께서 몰아세우는 거예요. 어디가도 이기지 말고 져버려라! 어차피 빠져나올 자는 빠져나온다.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하죠. 거듭남. 거듭남은 다른 말로 출산이 되는 겁니다. 출산. 그런데 애가 열 달이 됐는데 바깥으로 나올 생각은 안 하고 엄마 뱃속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괴로워요? 엄마가 괴롭죠. 배 째고 나와야죠. 제왕절개 수술하잖아요. 강제로 나오게 하잖아요.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남으로 출산케 하는 겁니다. 새 아기로. 천국 가는 새 백성으로. 새 이스라엘로. 새로운 인종으로서. 새로운 사람으로서 출산을 시키게 되는데. 우리가 어디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어디에 충성합니까? 어디에 친숙합니까? 세상 짜장면에 친숙한 것도 친숙한 것이지만, 어디에 친숙한가 하면은, “이기고 싶습니다. 지기는 싫습니다. 이겨서 내 몸 편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방식. 뭐 좋은 게 좋고 뭐 은혜가 은혜지. 이런 식 있잖아요. 그냥 양보를 하되 양보를 하면서 내 몸 편한 게 결국은 나한테 이익입니다, 라는 그런 계산까지 해가면서 적당하게 져주고. 양보죠. 적당하게 이겨주는 거예요.
적당하게 져주고 적당하게 양보하는 가족을 무슨 가족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상에서 화목한 가족이라고 해요. 사실은 본심은 뭐냐 하면은 많이 양보해줬다는 거예요. 많이. 여자가 뭐 해달라고 하면 남편은 ‘그래, 그래 잘났다.’ 하고 입 다무는 것은 진짜 그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딴에 많이 참아주는 거예요. 양보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맏아들이 될 때까지 불편해요. 남편이 처신하는 방법은 아내의 맏아들이 되면 최고에요. “키워 도!” 이러면 가정이 화목하기가 그지없어요. 그지없이 화목해요. 집에 개 있고 남편 자리는 개 뒤쪽에 그냥 서면 돼요. 그래도 돈 좀 벌 때는 보약이라도 끓여주죠. 나중에 퇴직하고 나면 진짜 개 뒤에 서야 돼요.
예수님이 바로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과의 차이남을 보여줍니다. 너희들이 가는 길과 내가 가는 길이 이토록 달랐다. 베드로로 하여금 칼을 빼게 만들었고, 칼을 빼야 지적할 게 있을 게 아닙니까? 칼을 빼게 만들고 베드로는 자기 본심을 노출시켰죠. 말고의 귀를 벰으로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베드로야, 니 방식대로 하려면 지금 천사가 열 두 군단이 와야 된다. 한 군단이 8천명 같으면 열 두 군단은 얼마에요? 엄청나죠. 8000☓12=96000, 구만 육천 명이 오게 되면 그때에 니 마음이 안심할 거냐? 안심은 하겠죠. 천국은 못 가는데. 이게 지옥적 사고방식인데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54절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아, 정말 주님은 끝까지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손 털어요. 그게 끝이에요. 아버지를 위해서 말씀대로 살뿐이에요.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 받을 때 첫 번째 시험이 그거였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서 온 거예요. 마귀가. 걱정 내지는 유혹이죠. “예수야! 얼굴이 홀쭉하게 됐네. 당신이 메시야 같으면 기도 빨리 해가지고, 메시야 역할을 하려면 밥이나 먹고 힘내라. 그러면 더 잘되지 않느냐? 밥 먹고 하자. 기도하는 것을 내가 막는 것이 아니고 일단 밥 먹고 하자.”
그래, 성령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밥을 40일 동안 먹게 했습니까? 못 먹게 했습니까? 못 먹게 했죠. 왜? 마귀로 하여금 그 소리가 나오도록 유도한 거예요. 이 지상에 인간들만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인간 말고 대빵이 있어요. 대빵. 오야붕이 있어요. 오야붕이.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여요. 다른 사람은 바보, 병신이거든. 이미 영이 맛이 갔다니까요. 영은 영에 대해서 알아보는 거예요. 맛이 간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만 보여요. 거울 보면 자기만 보이죠.
아니,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뒤에 시커먼 것이 뒤에서 끌어안아보세요. 아마 거울이 다 깨질걸요. 귀신 나오는 거울이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거울을 볼 때 뒤에 마귀가 자기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빼고 거울을 보잖아요.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냐?” 이런 식으로. 지가 거울을 보고 명령한다고요. “이뻐져라! 이뻐지는 거울하지 않으면 나한테 깨지는 수가 있어.” 인간들은 자기가 명령자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악마로부터 패배자가 되기 싫고 승리자가 되고 싶다는 심보를 죽을 때까지 계속 발휘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거 못 고쳐요. 못 고칩니다.
결국 인간은 어디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어디에 관심이 없다? 성경에, 말씀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씀을 누가 다 가져갑니까? 예수님 자기 쪽으로 다 가져가기 때문에. 예수님이 피리 부는 소년이에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한테 농축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방향을 봐야 돼요. 내가 지켜야 될 말씀은 따로 남아있지 않아요. 모든 말씀은 나를 죄인으로 밟고, “니는 인간도 아니야” 짓밟고, “니는 쓰레기야” 짓밟고. 주님 쪽으로 질주하듯이 그쪽에 다 모이게 되어 있어요. 집합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율법을 다 이룬 것이다. 다 이루어놨죠. 그 사랑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없는 아내를 만들어놓고, 자기 아내한테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도 온전하라고 사랑으로 줘요. 사랑으로. 율법의 덩어리를,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가 아니라 그걸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가지고 옴팍 거기다가 사랑으로 하는데,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하면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서,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말하고 너라고 하는 것은 누구냐 하면 자기백성을 말해요. 자기백성에게 주님이 사랑을 해주니까, 이 사랑에 대해서 어떤 악마나, 어떤 양심이나, 어떤 도덕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있는 지적질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지적할 수 없어요. 주님의 사랑을. 내가 나를 지적할 수가 없어요. 나를 자책하면 안 돼요. “이것 했나?” 이러면 “주께서 기뻐하심을 입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주께서 기뻐하심을 입었다. 사람이 뭘 했느냐, 라는 말은요, 내가 스스로 이걸 했어, 라는 말은 이게 하나의 미끼가 되는 이유는요, ~했나 또는 너는 ~지켰나, 라는 것은 그 앞부분의 머리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 숨겨있는 뒤꼬리에, 지킨 그걸 잡아당기면 뒤에 줄줄이 수천 개, 수만 개, 많은 율법을 같이 지켜야 지킨 게 돼요. 달랑 그거만 지킨 게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예배 드렸나? 예배만 드린 게 아니에요. 준비했나? 예산 찾았나?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온다고요. 봉투 돌렸나? 이야기가 다 나온다고요. 그때, 크리스마스 때 안 온 애한테 심방 가봤어? 또 나온다고요. 줄줄이 사탕처럼 다 따라 나온다고요. 평생을 다 바쳐도 예배 한번 제대로 못 드려요. 인간은. 악마는 이걸 감추려고 해요. 이 사실을. 인간은 아무리 지켜도 죄인이 되지,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악마는 그것을 감춥니다. 감춰놓고, 악마는 인간들을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은 호미곶, 이 동네 어느 산에 갑니까? 높은 산에 가서 정월초하루에 빌게 만들어요.
악마가 뒤에서 그렇게 만들어요. 그거 안 하면 올 한해 사업을 접어야 할 것 같아. 마음속에. 내가 벌 받을 것 같아. 이거 해야 돼. 그리고 교인들은 송구영신예배에 가야돼. 봉투에 돈 넣어야 하고 뽑기 한번 해야 돼. 안 그러면 일 년 동안 집에 큰 재앙이 올 것 같아. 내가.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은 그 수밖에 없어. 왜? 그래야 내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기 싫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은 뭐냐 하면은 주께서 이미 천사가 보낼 그 대상자가 이 땅에서 승리의 길, 영생의 길은 스스로 죽음에다가 자기를 집어넣는 이 포기의 길, 죽음에서 지는 길이 죽음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출입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기 위해서 살지 말고, 제대로 죽기 위해서, 약속에 의해 죽기 위해서 오늘도 약속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원칙이 우리를 통해서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발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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