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부터 끝 날까지 주께서 저희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참 뜻이 어떤 뜻인지를 다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도행전 16장 16절부터 18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이 본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말한 이야기가 아니고 귀신이 말한 이야기인데 귀신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에 나오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귀신이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출이거든요. 탈출, 빼내가는 그런 건데 그러면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마귀 쪽에서 하는 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구출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못 된다는 이야기가 되죠. 살 수 없는, 살 필요도 없는, 살아서도 아무 가치 없는 세상에서 인간들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세상이 아무 가치 없다고 단정을 짓더라도 빼도 박도 못하는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들의 형편입니다. 유일하게 사도와 실라 이 사람들은 우리를 거뜬하게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빼낼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말은 마귀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이 말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귀신이 신경 쓰고 있는 인물을 인간들은 전혀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인간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경북 경산 지방의 최고 기온이 38.2도였습니다. 얼마나 덥습니까? 이거는 올해만 그런 게 아니고 내년되면 또 그래요. 2014년도 또 그럴걸요. 점점 온난화되어서 더 심해질 건데. 그러면 이 세상이 못 살겠다, 덥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세상을 버리고 나가긴 어딜 나가요? 나갈 데가 있어야지 나가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과 실라과 귀신은 말합니다. ‘구출 작업’에 관해서 말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갈 곳도 모르는데 상태에서 누구의 말만 듣고 따라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인가를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덥더라도, 춥더라도 익히 아는 이 세상에 죽치고 있는 게 안심되지 만약에 이 세상을 벗어나서 불확실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 없는 짓으로 보입니다. 이 세상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누가 본 사람이 있느냐 말이죠. 없는 거란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나 상상의 유토피아를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현실은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서 죽치고 살겠다는데 귀신이 앞장 서서 소개하는 이 사도들은 사람을 빼내서 다른 세계에 집어넣는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귀신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렇다면 과연 구원이 되어서 따로 살게 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할까요? 우리가 이 귀신 이야기가 거북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좋든 싫든 이 세상의 문제에만 몰두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편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이것밖에 없는 겁니다.
강의를 귀신이 말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들은 귀신만도 못한 영안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신이 국회의원 됐다고 좋다고 하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 국회의원입니까?”라고 묻는 게 아니고, “당신도 탈출됐어요?” 이렇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국회의원 되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공들인 것이 귀신의 안목에서 보면 전혀 무의미한 짓이 되는 겁니다. 목사의 교회일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네 교회가 얼마나 크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 구원되었습니까?”를 묻는 겁니다.
고르기아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과 절대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답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며, ‘세상은 신이 창조했다.’ 절대적이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분명치 않아요. 절대적이지만 확실치 않는 게 있는 반면에
“2+3=5다.” 이것은 확실하죠.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2+3을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이게 밥 먹여 줍니까? 배고픔을 해결해요? 사과장사하는 아줌마가 “사과 사세요!”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아줌마가 하는 말이, “2+3=5입니다. 2+3=5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과 팔립니까? 안 팔리죠. 분명히 2+3=5라는 게 사과 파는 아줌마가 틀렸다는 말은 아닌데 그게 별 도움이 안 되잖아요. 자기 생활에. 깨놓고 이야기해서 사람들은 진리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밥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는 거잖아요.
흔히 중학생들 늘 이야기하는 게 수학이 어려우니까 수학 안 해도 먹고 사는데 왜 이 수학을 해야 되느냐고 하지요.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하지요. 삼각함수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도움 안 되거든요. 농사짓는데 삼각함수 동원해서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돈이 안 되는데 쓸데없는 걸 많이 배워야 도리 필요가 뭐가 있느냐. 밥 먹여주면 배우겠는데 밥 먹여주는 것도 안 되는데 왜 그렇게 많이 배우느냐 이 말이죠.
심훈의 [상록수]나 이육사의 시 해서 사과 하나라도 팔립니까? 그런데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 시가 나온다 말이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런 시 외워서 농사가 잘 되는 게 아닌데 그 시를 왜 외우는데.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나한테 당장 이익이 없는데 왜 외우느냐. 머리 좋은 것 시합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뭔가 절대적이기도 하고 확실한 게 없을까? 확실히 계시면서 절대적인. 그걸 고르기아스는 ‘신’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걸 신이라고 이야기하든 뭘 하든 간에 그 주장은 귀신보다 더 못한 거예요. 귀신은 노골적으로 이 세상 접고 여기서 빠져나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더라는 그걸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들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면서 신을 이야기한다고요. 신을 이야기하면 신이 사는 세상도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이 있고 천국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세계마저 조작해 내어야 했답니다. 그럴사하게.
누메니우스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의 신은 하나로 되지 않고 세 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삼(3)신. 하나는 천지를 만든 신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이 세상 자체가 만들어진 자체도 그 안에 신이 작용해야 되고, 그 다음에 보이지 신이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똑같은 사람 만드는 게 아니고, 공장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요. 공장이 아니고 사람들에게는 얼굴 모습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에서 여러 가지 나왔으니까 여러 가지 솜씨를 부리는 신이 있어야 돼요. 데미우르고스라 해서 중재자란 뜻인데.
그러니까 신이 창조하시고 편안하게 모시는 신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만들어진 세상 속에 우리의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중간에 만들어진 신, 그래서 삼신이 있어줘야 그래야 세상은 모든 것을 적절하게 설명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귀신 말 듣기 전에 세상 사람의 아이디어에요.
지금 강의하는 방향이 뭐냐 하면, 신앙이니, 성령이니, 성경용어 안 따져도 사람이 갖고 있는 머리로, 아이디어로 얼마든지 삼위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거예요. 삼위일체도 만들어내고, 예수도 만들어내고, 성경도 만들어내고, 교회도 만들어내고. 이것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실력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제가 지금 언급해드리는 겁니다.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기를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 믿음을 아는 것으로 바뀌면 안 되겠습니까? 믿음으로 천국 간다 하게 되면 그 때부터 ‘믿고’ '아니 믿고‘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대 인간끼리 의사소통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아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교육 정도에 따라 ’더 잘 아는 것‘, 곧 ’더 잘 믿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겁니다.
“네가 믿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너, 여기에 대해서 알아?” “내가 거기에 대해서 공부를 적게 했어.” “그러면 공부를 하면 알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아는 것으로 가게 된다면 구태여 믿음으로 할 필요 없이 실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고, 없는 사람도 공부만 좀, 노력만 하고 시간만 주어지게 되면 실력 없는데서 있는 데로 발전하게 되니까 구태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상태에 돌입되게 되면 얼마나 편하냐 말이죠. 또한 전에 교육을 많이 받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라면 구태어 새삼스럽게 ‘믿음 여부’를 안 따져도 상관없이 되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중장년 되시는 여러분들이 만약에 중학교 때 배웠던 물리책에 나오는 내용이라든지, 지리책에 나오는 도시이름이나 나라이름 기억합니까? 잘 기억 못하죠. 다 각자 전문직에 종사하고 농사짓고, 사업한다고 잊어버렸단 말이죠.. 그런데 중학생이 하는 말이, “아버지, 현재 올림픽 열리는 나라의 수도이름을 압니까?” “몰라.”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 “애야 그건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잠간 잊어버린 거야.” “아니야.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 “아니야.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신문 보면 런던에서 하고 있네. 영국의 수도는 런던, 그러니까 다시 알 수 있는 기회만 부여받으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논리입니까.
교재, 3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봅시다. [5세기 말엽 교회는 다음과 같이 신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소위 ‘아타나시우스신조’다.] 여기 초반에 서론부분을 봅시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엇보다도 공교회의 신앙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 자는 의심할 것 없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곧 지옥에 갈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하는 것이 몇 개의 문장에 대한 동의로 결정지울 수 있다는 것이 서기 5세기 말엽에 로마교회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한 일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극장에 갈 때 여자직원이 앞에서 표를 받지요. 표 받으면 입장시켜주고 표 안 받으면 입장 안 시키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나온 직원이 나와서 묻기를 방금 보았던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보여주면서 “동의하시고 인정하십니까?”라고 묻고 동의한다면 천국가고, 동의 못하면 지옥 가는 겁니까? 정말 구원이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까? 악마도 귀신도 이 방식에 동의해서 사도 바울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신조를 외울 때 더듬거리면 구원도 불확실해지는 겁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공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한 하나님과 일체 안에 삼위를 경배한다. 격위들을 혼동하지 않고, 본질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는 성부의 한 격위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격위가 계시며, 성령의 또 다른 격위가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모두 하나이다. 그 영광이 동등이며 그 존귀가 함께 영원하다.]라는 글자를 외우시면 구원받습니다. 그 당시 공교회에서.
여러분 과연 천국, 지옥 보내는 그런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5세기경에 이것이 모든 교회라면 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실시를 했고 이 기준에 의해서 심사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어느 누구라도 “이건 아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나서고 있는 겁니다.
아는 것은 반복되는 심화학습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원숭이라도 한 문장 할 때마다 바나나 하나 주면 15년 만에 다 외워요. 아이큐 40밖에 안 되는 원숭이라도 다 외웁니다. 군에서 기합을 받으면 사병규칙 열 가지도 일주일 만에 다 외워요. 그렇게 외우기 싫어하는 농사짓다 온 사람도 다 외우게 돼있습니다. 군에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걸 외운다는 게 아니고 그 내용을 알고 고백해야 합격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겠지요. 여러분 인간이 ‘안다’는 것은 너무나도 주관적입니다. 내가 뭘 안다는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현대수학과 현대과학에서 밝혀냈습니다. 사실은 ‘내가 안다는 것’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제 말은 ‘안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환경 따라서 그 시대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옛날 조선시대 때 아는 것과 고려시대에 여진족이 쳐들어왔을 때 아는 것과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때 아는 것과 지금 아는 것이 다 다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뭘 압니까? 이순신 장군이 삼위일체 압니까? 모르죠. 이순신 장군에게 삼위일체 이야기하면 그분이 압니까? 머리 좋으니까 외우기는 잘 외우겠는데 삼위일체가 뭔지 알겠어요? 신학자도 삼위일체가 뭔지 모른다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해 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물고 있거나 결과적이 틀린 게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외운다,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도 그 의미와 ‘안다 것’은 본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에는 유령이 깔려있습니다. 그 유령은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아주체성을 수립할 때마다 그곳에 쏠려서 그 사람만이 은밀하게 간직하고 싶은 의미를 담는데 유용할 뿐입니다. 마치 금속 속의 자유전자의 이동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자유전자’는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어라는 것은 한 곳에 의미가 박혀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표현, 즉 기표에서 기표로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있을 때 의미와 둘이 모였을 때 의미가 달라지고, 세 개 모이면 또 달라지고, 위치 바꿔도 또 달라지고, 모든 게 다 달라져요.
예를 들면, 남자라는 게 뭔 뜻입니까? 남자란 여자가 아닌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팻말을 붙이면 졸지에 ‘남자화장실’이 됩니다. 빨강색이 파랑색을 만나 횡단보도에 나타나게 되면 교통 신호체계가 됩니다. 즉 “건너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언어라 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 사람이 자기만 갖고 있는 의미를 남한테 떠벌이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눈이 오네.”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내가 눈 오는 것이 기쁜 것처럼 내 말을 듣는 네도 나의 기쁨에 동참해다오”라는 뜻입니다. 곧 명령어가 되는 겁니다. 이 명령어의 기반에서 무슨 울림과 외침이 터져나올까? 그것은 바로 영어로 “Help me!"입니다. ”날 도와주오“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뭔가 말을 내뱉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해주고 내가 뭘 요구하든지 너는 내 요구를 들어줄 책임이 있다고 외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모든 언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들아, 내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다오!”라는 뜻입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돌보는데 갑자기 맞벌이 갔던 며느리가 들어왔다. “오늘 많이 덥지. 얼마나 더운데 애가 땀띠가 막 나려고 한다.” 이건 뭔 뜻일까요? “힘들어 못 키우겠다. 좀 데려가라.” 그런 뜻입니다. 언어에는 유령이 있어서 그 유령은 포착되지 않아요. 잡히지 않아요. 의미를 안다는 것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 이런 문장을 제출한 권력체에 복종하면 네 목숨은 내가 유용성 있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서 없어져라!“는 명령 같은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귀신은 탈출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사울 바울과 실라하는 말은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 줄 몰라요. “저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밥 먹고 사는구나”고 여깁니다. 진정 탈출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다면 떠나야 할 기존의 세계와 도착해야 될 이 두 세계를 보여주고서는 “너희들 어느 나라 갈래?”라는 식으로 신이 제안해야 옳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 나라를 보여주지 않은 입장에서 뭔가 탈출하라 하니까 기껏 나온 아이디어가 이 세상에 천정만 튀다가 내려오는 거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처럼 천장만 튕기다가 도로 내려와서 이 땅에 거룩을 모토로 해서 정치적인 단체를 만든 것이 곧 교회입니다. 아무도 탈출한 적도 없으면서 저희끼리 탈출하려고 시도해보겠다고 그냥 모여든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서 반복적으로 삼위일체를 비롯해서 온갖 교리를 배웁니다. 아타나시우스신앙교리를 배우고, 십자가 복음은 이런 것이다는 것도 배웁니다.
백날 배우면 뭐합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데 말입니다. 교회에서 식사당번 봉사하다가 누가 싫은 소리라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교회에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배우면 뭐합니까? 십자가 알고, 언약을 알아도 가장 인식과 행동이 나오는 근본적인 바탕은 “날 도와줘요”입니다. 그저 위로받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예수님 계시다’보다 더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로 느끼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 살려니까 외롭고 심심하니 교회에 나가서 정 나누고 재미있잖아요.
이러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은 이게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 역사를 통해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신앙 선배가 아니라 교회 선배들이 작성한 ‘아타나시우스 신조’ 같은 것들과 비슷한 것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단 자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교회입니다”가 통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부인을 하겠습니까? 자기부인을 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이 도로 자기 긍정을 세울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은 자기 부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자기 부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가 신학교 세워서 학생들에게 바른 교육시켜 말씀을 바로 가르쳐서 앞으로 전 세계에서 바른 교회가 세우도록 계획을 잡고 일을 추진했건만 신학생이 한 명도 없게 되자 가정적으로 부인과 논쟁이 격해지면서 부모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서 비-진리가 아닌 겁니다. 단 한 명의 신학생이 없더라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면 그만인 겁니다. 하지만 신학교 세우면서 은행에서 돈을 무리하게 빌린 것은 뭔가 노렸던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날 도와줘요”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겠다는 모든 교리와 말씀도 그 바탕에 ‘날 도와주세요’가 깔려 있다면, 다시 말해서 “날 도와주어야 돼”가 깔려있다면 그 목사는 그가 다르치는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신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그 목사의 부인은 노골적으로 “헬프 미”를 외친 겁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위주이기에 두 사람이 모였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신학과 철학에서 뭔가 빠져있어요. 하나님은 어떻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주님은 어떻게 일하시고. 좋은 건 신학과 철학에서 다 담겨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때문에 피해 입은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신학을 하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피해를 봤다는 소리를 신학자가 과연 하겠습니까? 내가 목사 노릇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피해를 본다고 소리를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신학박사와 철학박사가 예수님 목조르면서 얻어낸 학위라고 누가 감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은 삼위일체와 각가지 교리와 신조를 고백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피해보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피해자로 왔다는 말은, 피해자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가해자라도 등장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등장하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가해자를 추적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결국 전체 아담, 모든 인간이 다 연루돼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추적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죽이는데 전부다 가담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죽는데 제가 가해자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분이고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끝까지 자신을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라는 거예요. 엮여지지를 못했어요. 엮여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오직 최후로 남는 심보는 “세상이여 나를 도와주오”입니다. 곧 “예수여, 당신이 진정 메시아라면 당장 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 가도록 해다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구원자로 믿어줄게”라고 나오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사는 숱한 선배들을 행한 것들을 나열해보여주게 됩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언어와 교리와 신앙고백들을 제작해서 사람들을 그 속으로 통과 시켰어요. 이것 외우면 통과, 못 외우면 탈락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학습,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문장을 만들어낸 그 주최 측의 권력에 고개 숙이고 복종하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그 권력체가 외우라고 하는 것을 외우게 되면 “우리 모두는 이걸 고백했습니다. 이로서 우리들은 한 형제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소위 ‘교회 공동체’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했던 공동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와 의’입니다. 이 나라는 문장 외워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그 어떤 몸부림을 쳐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분류된 모든 구격이나 교단들의 경계선들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즉 우리 개개인에서 뭔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헬프 미”를 외치기 위해 달라붙은 그 언어와 단어들이 용납 받지 못하는 세계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쏠리는 나라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귀신이 알려준 대로 바울과 실라는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외치는 자입니다. ‘ 그 나라와 그 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될 나라임을 전제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나라와 이 의’는 떨어져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표 뒤에 풀처럼 뭔가 들어붙어있어 우리 힘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 떨어지지 않는 죄를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전략입니다.
죄인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 때는 개과천선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반성하고 회개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정 죄를 아는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죄인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죄가 떨어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더 이상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를 못하게 말입니다. 살만큼 가치있는 것은 본인이 아님을 확실히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구원하겠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은 어느새 바라새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자신을 죄인 만들기 위해 필히 인간은 그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는 의인으로 자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죄인 만들기’ 나설 만큼 의로운 자들은 구원받는다는 엉터리 원칙이 세워집니다. “교회에서 도 닦으라”라는 구호에 해당됩니다.
금식기도 일을 맞아서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죄인이다 할 때 예수님은 술 잡수러 가셨어요. 가시면서 하는 말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죄인입니다.”하면 주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곧 “나는 죄인이고 구원받고 싶어하니까 헬프 미”를 외치는 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 스스로 꾸며낸 주장입니다. 진정한 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야 지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즉 은혜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란 기껏 현재 짓고 있는 죄를 되풀이 지을 수 밖에 없는 수준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의 개입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능력이 개입되면 죄와 선의 판가름은 인간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죄를 짓더라도 언제든지 의인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짓는 죄는 참된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죄는 결코 의로움으로 돌아설 수 없는 죄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 제가 술 끊은 지 10년 됐지만 오늘 기분 나빠서 한 잔했습니다. 그래서 죄지었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건 죄지은 게 아니에요. 나는 술 안 먹을 수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술을 먹었다면 그것은 그 다음에 술 안 먹는 의로움도 가능하다는 소리 밖에 안됩니다. 참된 죄는 나 스스로 죄를 다룰 수 없고 죄가 나를 다루고 있음에서 나온 죄를 말합니다.
진짜 죄짓는 것은, 내가 전혀 의인 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다가올 때 나타나는 죄입니다. 자식이 시험에 합격해서 기분 좋아서 속으로 웃으면서 “아니야 교만한 것은 죄야. 참아야 돼.” 하면서도 자기 기분 정리하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자기를 상대로 장난치는 거예요.
진짜 죄짓는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건져주지 아니하면 전혀 구원이 안 되는 상태, 그게 죄짓는 상태에요. 쉽게 말해서 보통 우리 일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일상적으로 살면 되는데 갑자기 회개하고 반성하고, “주여 죄인입니다.” 그것 죄 아니거든요. 그거는 괜히 폼재보는 거거든요.
죄냐, 아니냐는 우리가 판정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판정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판정을 내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죄인이면서 의인 행세했구나.” 판정을 내리시면 그것이 예수님이 완성 때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서 발각당한 죄입니다. 발각시킬 뿐만 아니고 그 죄인은 주께서 100% 알아서 의인으로 바꿔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면류관까지 주 앞에 바칩니다. “미쳤어, 미쳤어. 이런 것 왜 쓰고 있어.” 하면서 하는 말이, “주여, 제가 쓰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디즈니 만화에 보면 있잖아요. 그냥 시커먼 쇠도끼가 있는데 산신령이 와서 손을 대니까 신비로운 음악이 들리면서 금으로 변하듯이 예수님께서 오시게 되면 전부다 의인으로 변하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손 안 대면 지가 여기서 착한 일해야 되고, 번짐처럼 자꾸 번져나가야 돼요. 그 선의 영역을 넓히는데 상당히 공들여야 되고 애먹죠. 새로운 아이디어도 필요하고요.
이런 것을 바리새인 선배들, 교회 선배들이 다 해왔어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언어를 어떤 문장이나 삼위일체나 성경의 어떤 구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구원 자체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데 영적인 존재인 귀신은 알고 있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빼내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과정을 이렇게 설교합니다. “어떻게 너희가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겠는가.”(갈 3:3)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게 되고, 십자가를 앞장세우면 우리는 하나님 안목에서 죄가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나면서 이거는 반성이나 그런 여유도 없이 그냥 죄인이에요. 그 죄인은 어떤 죄인이냐 하면, 의인되기 위한 재료로서 일단 만들어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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