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하림 286강-YouTube강의(표현) 20190917-이 근호 목사
제286강, 제목은 ‘표현’. 표현이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겠죠. 정지된 표현이 있겠고 움직이는 표현이 있겠죠. 표현이, 아마 가만히 있으면 그냥 표현으로 끝날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히 하루 종일 앉아있다. 그러면 뭐가 안되느냐 하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구분이 안되겠죠. 그러면 그 표현은 행위의 어떤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말을 바꿔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것은 산 것이 되겠죠. 쉬운 거예요. 살아 있죠. 그런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해를 만들었습니다. 해가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면 움직입니까? 움직이죠. 움직이는데 그러면 해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힘든 거예요. 왜? 해가 살아 있다고 한다면 사실상 죽은 게 없어요.
돌멩이도 바람 불면 움직이고 그러면 바람도 살아 있는 게 되어 버려요. 바람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다면 둘 다 살아 있는 것의 분류가 되어 버리고 죽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되어 버려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흔히 이런 말하죠. 예수 믿으면 예수 믿는 값을 하라는 이야기하죠.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중요해요. 그러면 예수 안 믿는 건 뭐냐? 예수 안 믿어도 밥먹고 움직이죠. 예수 안 믿어도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충분히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안 믿어도 ‘나는 죽어서도 아마 이렇게 착하니까 좋은데 갈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예수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의 차이점.
헌금한다? 그것은 할 수 있어요. 안 믿어도 할 수 있다고요. 자, 나 봐라. 이 정도 한다. 전도하는 것? 어떤 사람은 전도가 취미인 사람이 있어요. 사람한테 내 말 전해서 그 사람이 내 말에 혹하도록 혹은 동의되도록 하는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잘 이해가 안되지만 그런 사람들 있어요. 상당히 많아요. 기도한다? 그건 뭐 안 믿는 사람도 다 기도하니까, 다급할 때.
그러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점. 이걸 달리 이야기할께요.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는 뭐냐. 그것은 바로 이겁니다. 자기를 부정함을 통해서 고백이 나와야 되요. 나는 신자도 아니다. 누구 앞에서 나는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다.
‘내가 사는 것?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안 살고 싶어도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 살려지고 있다.’ 라고 해서, 신자는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쪽에다가 강조점을 둬버리고 자기는 개코도 아무 것도 아니래. 자꾸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물론 우리 주위에 그런 고백하는 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없더라도 그 사람들 신자라 해주지 마세요. 성경대로 가야 되요, 성경대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게 이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성경대로 가야죠. 숫자가 많다고 해서 정답 아니거든요. 또 숫자 적다고 외로워할 필요 없어요. 내가 미쳤나, 잘못 믿고 있나, 나는 다른 길로 가나. 자꾸 이렇게 의심하지 마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릴께요. 창세기 1장에서 달도 움직이고 별도 움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별의 운석보고 살아 있다고 하지 않고 바람보고 살아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전제 했지요. 왜 이것을 전제로 해야 되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을 때에 목숨 붙어 있다고 그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목숨 붙어 있다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곧장 혼수상태에 빠졌습니까? 아니죠. 움직였잖아요. 그러면 그 움직임은 달의 움직임이나 별의 움직임과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똑같아요. 주님께서 말합니다. “네가 흙인데 움직인다.” 흙인데 움직인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살았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뭐냐. 움직인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이 나로 하여금 이런 움직임과 이런 삶을 하도록 몰아 세웠다고 고백이 나와야 되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죠. 네가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네가 했다고 안하고 다른 사람한테 돌리느냐. 그 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한 것은 죽은 행동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말 산 자라면 산 분의 표현이 나와야 되는데 나는 나 혼자 열심히 싸대봤자 그것은 산 자의 표현이 아니고 죄짓고 죽은 자의 표현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열심히 전도해도 죽은 자요, 헌금해도 죽은 자요, 기도해도 죽은 자요, 예배 참석해도 죽은 자요, 성경공부해도 죽은 자요.
우리는 나올 때부터 나올 게 죽은 자밖에 없고 결국 그 결과로 우리는 늙어 죽습니다. 늙어 죽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죽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죽을 때 본인의 잘못입니까, 주의 뜻입니까? 제 질문 자체가 어리석죠. 주의 뜻입니다. 그 동안 표현 많이 했다. 처음부터 너는 죽은 자인데 내가 차를 마련해서 차에 받혀 죽게 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표현이라는 말은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표현이라는 것은 죽은 자의 표현이 있는 반면에 산 자의 표현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잘못해서 ‘움직이니까, 살아 숨쉬고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산 것 맞잖아’ 우기는데 그럴 것 같으면 창세기 1장에 별하고 달하고 해하고 차이점이 뭐가 있냐. 그들도 움직이는데... 차라리 그들이 더 낫죠. 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그들은 아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의미가 뭐냐. 모든 인간은 죽었다고 간주해 버려요. 움직여도 죽었고 공부해도 죽었고 서울대학 가도 죽었고 기타 쳐도 죽었고 다 죽은 거예요. 밥 먹어도 죽고 밥 안먹어도 죽고... 이 죽음, 죽음, 죽음의 균질성, 균등성 가운데서 유일하게 산 자가 있죠.
예수님하고 우리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는 살다가 죽지만 그 분은 죽었다가 살아난 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결국 그것은 뭐냐면 기존의 ‘살았다’하고 차별화되는 표현입니다. 차별화된 표현이죠.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외친 그 복음은 뭐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 받았다고 해서 돈 더 잘 벌고 몸 건강한 게 성령 받은 사람 아닙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한 것은 그냥 죽어 있는데 움직임이 죽어있는 움직임일 뿐이지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 부인을 경유해서 나온 고백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부자다, 나는 잘 생겼다, 나는 많이 안다. 이것은 자기 긍정이지 자기 부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위에 하나님 믿고 이렇게 잘 됐다 하는 사람들 보시거든 ‘아, 저게 바로 마귀한테 씌워진,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산 자라고 우기는 가짜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진짜 성도는, ‘나는 믿음 좋다’가 아니라 ‘나는 믿음 없습니다. 나는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와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난 그게 감사합니다.’
그러면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주의 힘으로 사는 것을 아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평소에 성경 보면서 내가 신자냐 자꾸 확인 되죠? 확인하고 싶죠? 그 때는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길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 하는 것, 살아가는 모습 보세요.
어디서 차이나야 되겠습니까? 자기 부정을 못하는 것, 못났다고 못하는 것,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지 못하는 것. 사실 우리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데 주께서,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놀라운 거예요.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냥 놀랍다는 말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이 땅에 예수님이 유일하게 산 자처럼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287강-YouTube강의(두 종류의 몸) 20190917-이 근호 목사
제287강, 제목은 ‘두 종류의 몸’.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몸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아담에 속한 몸을 이야기하고 또 하나는 예수님에 속한 몸. 예수님에 속한 몸을 지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돋보기나 현미경을 가지고 예수 믿기 전의 몸하고 예수 믿은 후의 몸하고 차이가 나는가 한 번 보세요. 전혀 차이가 안나죠. 누가 물어도 그 몸이 그 몸이에요. 성경에서는 두 가지 몸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거울 보면서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서 우리는 그 몸이 그 몸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가 두 가지 몸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되죠? 구약 성경 때 성경을 봤던, 율법을 들었던 이스라엘이 아무리 율법대로 흉내 내고 율법대로 사는데도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율법대로 하라 하니까 하기는 하는데 왜 이 제사가 다른 이방민족을 이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신기하게 출애굽기나 민수기 보면 이기거든요, 이상하게 이긴다고요. 그리고 지레 짐작해서 적들이 바들바들 떨어요. 뭐 대표적인 게 여리고성 함락이죠. 그러니까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납득을 해서 쟁취한 게 아니고 그냥 결과물이에요.
그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지금 우리 고민이 뭡니까? 내가 뭘 바르게 해야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올까, 그것 때문에 아침에 눈떠서 해질 때까지, 아니 해 떠서 꿈꿀 때까지 맨날 그것만 따지고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보다 좋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 뭐를 준비하면 되느냐, 주여.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주님이 하셨고 나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내 쪽에서 한 게 없다는 생각을 아무리 성경에서 이야기해도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인지 그것이 안 믿어져요. 차라리 편한 게 뭐냐면 내가 하는 게 편해. 내가 바르게 해서 바른 결과 나오는 그게 편해요. 주님이 하시고 우리는 이런 결과를 얻어 먹는 이게 불편해. 영 나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두 가지 몸도 마찬가집니다. 두 가지 몸을 왜 주느냐 하면 몸은 하나로 뭉쳐야지 왜 두 가지 몸이냐 하는 거죠. 두 가지 몸이면 아담의 몸하고 예수님의 몸이에요. 아무리 봐도 우리는 두 가지 몸이 아니고 단일 몸 가지고 산다고요. 그러면 어떤 때는 아담의 몸에서 나온 성질이 발현되고 어떤 때는 주님의 몸에서 나온 성질이 발현되는가?
고린도전서 12장 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 이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절에 다니는 사람이 예수를 저주한다. 절에 다닌다고 예수를 저주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치고는 참 훌륭하다. 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얼마나 내가 믿는 부처하고 막상막하다. 이게 저주입니까? 지금 저주가 아니고 돋보이는 거죠. 위하는 거잖아요. 훌륭하다고 지금 칭찬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리 하지 않고 ‘누구든지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를 같은 뜻으로 뭘 쓰느냐면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뭘 안하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를 주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몸은 하나라고 했어요. 그 하나의 몸에 누가 옵니까?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오는데 성령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예수님을 존경할 때 그 결과가 뭐냐? ‘내가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고 존경하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되는 거예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 몸이 바로 성령 없는 몸이에요. 주의 몸이 아닙니다.
결국 마지막에 끝이 뭐로 끝나요? 나는 점잖다. 나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다지 비난 받을 사람 아니다. 난 남한테 욕 들어먹을 짓은 안했다. 나는 돌 맞을 짓은 안했다. 실수는 하지만. 곧장 돌아서서 반성하고 회개할 정도로 나는 나의 잘남의 균형을, 밸런스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게 계속 지금 자아에 대한 우리의 자세잖아요. 자세이겠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냐.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지. 그렇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 없어도 하는데 성령께서 하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했거든요. 이 말은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지요. 그 다음부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된다면, 성령 받지 않고 예수님이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그 평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고 예수님을 저주하는 행위입니다. 아시겠지요?
예수님이 훌륭하다, 대단하다. 희생하다니 참 어지신 분이다. 그게 예수님을 욕보이는 일이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나? 교회가면 많이들 있어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생각 없이 좋은 게 좋다고 예수님을 존대해 주겠다는 거예요. 존경해 주게 되면 예수님을 존경해줬으니까 예수님한테 좋은 찬양 드리고 막 성가대하고 봉사했으니까 결국 나한테 떨어질 콩고물이 있겠죠.
그게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일반 사람이 예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예수님 욕해가지고 나한테 돌아올 이익 없잖아요. 왜 괜한 사람 욕해요. 혹시나 화근 되면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절에 가는 사람도 예수를 욕 안하는 거예요. 좋은 분을 좋은 분이라고 하면 누구만 가치를 높입니까? 자기 가치를 높이는데 자기 가치를 높일 것을 일부러 점수 깎을 일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일이라고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저주하는 일이라 이 말이죠.
예수님을 저주 안하려면 내가 저주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고백을 해야죠. 예수님을 욕 하든 안하든 간에 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합니다. 왜? 주님은 主시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예수를 주라 하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지옥가는 것을 저는 압니다.’ 라는 앎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더 쉽게 할까요? ‘예수님 아니면 나는 당연히 지옥 갑니다.’ 그런 자세로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이에요. 자,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본다면 내가 나를 보는 식으로 사람들은 누구를 보겠어요? 추석날 모였을 때 누굴 보겠어요? 내가 나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것처럼 부모님도 보고 형제들, 모인 일가친척 보겠죠? 그러면 보면 뭐가 남습니까? 저 사람은 송편 잘 굽는다, 저 사람은 나한테 용돈 준다, 좋으신 분이다, 저 사람은 교회는 안 가지만 핍박 안한다.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은 저주받을 사람이다. 저 사람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리 인간성 좋아도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저주 받는다. 답이 딱 나오잖아요. 답이 나오잖아요.
다시 할까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면 나는 당연히 뭐다? 저주 받았죠. 헌금해도 저주, 기도해도 저주, 선교해도 저주, 교회 나와도 저주. 그런 식으로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헌금해도 저주, 기도해도 저주, 저주입니다. 교회 충성해도 저주입니다. 사찰 집사되도 저주고, 장로 되도 목사 되도 저주입니다. 그렇게 합니까? 그러면 목사가 어떻게 해요?
그러면 예수님을, 나를 저주케 하시는 그 주님이 유일하게 만난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는 고백. 이것은 성령을 안 받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이것은 성령 받아서 구원받지 않으면 아무도 이 말을 이해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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