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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82강, 283강) 성령, 환란 190716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282강, 283강) 성령, 환란 190716

정인순 2019. 7. 17. 05:38



282강         음성        동영상


283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282강-YouTube강의(성령)20190716-이 근호 목사


제282강, 제목은 ‘성령’. 성령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이 성령이 등장하실 때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유가 있어요. 목적이 있어요. 할 일이 계신데, 그게 뭐냐 하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언약이 나타나기 전에는 성신께서 또는 성령께서 천지창조에 관여하셨어요. 성령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관여한다는 말은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의 주도권이 하나님한테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주도권이 하나님한테 있으면 인간은 그 언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언약이 완성되고 난 뒤에 일방적인 그 혜택을 누리는 대상이 인간입니다. 성령께서 관여하시고 혜택도 성령께서 주시고. 그러면 이제 인간이 할 게 뭐냐.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창조자의 솜씨에 대해서 감탄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면 되죠.

천지창조 할 때 하나님의 신이 관여했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 할 때,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그렇게 볼 때에 창세기 때, 천지창조 할 때 관여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도 만들어진 이 세상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또는 자기 신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는 그냥 우연히 일어난 걸로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성신 또는 성령이 개입한 결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얘기했던가요? 성신이 또는 성령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은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는 그 혜택을 입는다 했지요. 그러면 가정에 어머니가 아프다든지 배우자가 아프다 할 때는 그걸 뭐라고 보느냐. 혜택이라고 봐야 돼요, 혜택. 애가 차사고 났다든지 그것도 혜택이 되는 거고 내 몸이 다쳤다든지 그것도 하나님의 혜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혜택을 입으면 나올 것은 감사와 고마움밖에 없지요. 이게 정상인데, 자, 이게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 번 가상해서 예를 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인간을 혜택 주려고, 인간으로부터 찬미, 찬양 받기 위해서 만들어 놨는데 만약에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봅시다. 근원적인 죄, 일시적으로 죄 지은 것 말고 근본적으로 죄를 지었다. 죄 속에 있다. 라고 생각을 해봅시다.

방금 제가 가상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가상이 아니에요.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이것은 진짜입니다. 진짜 인간은 한두 번 실수한 게 아니고 한두 번 죄를 지은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죄 이외에는 나올 게 없어요.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했거든요, 시편 51편에 보면(시편 51편 3절,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어쨌든 간에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인간이 죄를 지었고 성신은 성신대로 이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고. 그렇다면 그 인간과 성신의 만남에서 뭐가 누락되겠어요?

성신께서는 혜택을 줘도 인간에게는 감사와 고마움이 나와야 되는데 뭐가 쑥 들어가 버립니까? 감사와 고마움이 쑥 들어가 버리죠. 그러면 성령께서 원래 하시고자 하는 것, 피조물에게 혜택을 주고 피조물은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러한 관계가 어지러워지겠죠, 그게 이루어지지 않겠죠.

그러면 성령께서 신약 때에 하실 목적은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틀어지게 된 온전한 감사와 온전한 기쁨을.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이게 막혀 버렸죠. 결국 성령께서 신약시대에 자기 성도에게 부어준다는 것은 바로 감사, 고마움, 그리고 누가복음 같은 경우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이야기해요. 누가복음도 누가가 썼지만 사도행전도 누가가 썼어요. 그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께서 역사할 때마다 거기 있는 공동체들, 성령 받은 모임들은 기쁨이 넘친다고 했어요.

기쁨이 넘친다... 참 요즘 같은 시대에, 일본이 수출 규제하는 시대에 기쁨이 넘치는 단체 찾아보기 힘들죠. 기쁨이 넘치는 가정 봤습니까? 저녁 때 모여가지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까? 치킨이라도 사들고 오면 갑자기 치킨 먹을 생각에 기쁨이 넘치는 것 외에 말이죠. 뭐 손에 사들고 오는 거 말고. 갑자기 목돈 들어오는 그런 거 말고. 늘 피곤에 찌들었잖아요.

인간의 몸이 왜 피곤합니까? 너무 원하는 게 많아서 그렇겠죠. 욕심이 많죠. 죄라는 게 욕심에서 나온다는데.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했잖아요. 인간은 욕심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죄를 짓고. 죄를 지으니까 성신이 또는 성령이 다스리는 이 세계에서 마땅히 하나님이 원하는 감사와 고마움은 날아가 버리고 짜증 지대로 부리면서. 자기가 짜증을 그냥 부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혼자 간직하지 않죠. 누가 앞에 눈에 띄게 되면 거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걸 네 자로 부부싸움이라고 해요. 가정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막혀서 온전한 기쁨과 감사를 얻지 못한다면 그럼 하나님이 안 되겠죠. 에스겔 36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에 성신, 새 영이 오기 전까지는 딱딱한 마음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나면 그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다고 해요. 에스겔 36장 방금 26절을 읽었지만 25절을 보면 물세례가 나와요.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렇다면 물로 정결케 한다는데 그러면 모든 더러운 것, 우상을 섬기는 원인과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마음이 딱딱해서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이 딱딱하다는 것은 여유가 없는 거예요. 경직되어 있다는 말 아시죠. 경직되어 있다 또는 긴장되어 있다. 내 것 안 빼앗기고 저쪽 것 더 얻기 위해서 정신이 빠짝 경직되어 있어야 되죠. 내 것 안 빼앗기고, 수비는 수비대로 잘하고 공격은 공격대로 해서 내 것 만드는 그 작업.

인간이 산다는 게 뭐 그런 일 외에는 다른 것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마음이 경직되어 있죠. 이건 혜택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굴려가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완전히 죽는다. 늘 자기 빼놓고 다 적이라고 경계하는 거예요. 누가 무슨 전화가 오면 깜짝깜짝 놀라죠. 누구 만나도 적일까 동지일까 염려되는,.전혀 부드럽지 않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뤄온 것이 소실되지 않기 위해서 바짝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혜택이 오죠.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얻고자 하는 것으로 내가 나한테 있으면 나는 찬양을 누구한테 해야 돼요? 나한테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쟁취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그냥 성령께서 주신다면 혜택을 입은 것이고 이 혜택은 신약에서 은혜라고 이야기하고 이건 선물이죠.

하나님께 감사와 고마움을 드리죠. 이게 뭐냐 하면 갑자기 긴장상태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져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그마한 일에 대해서도 감사하겠죠. 이게 성령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283강-YouTube강의(환란)20190716-이 근호 목사


제283강, 제목은 ‘환란’.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게 있어요. ‘공의로워야 된다’ 그리고 ‘의로워야 된다’ 이렇게 구분을 해놓고 있는데, 의롭다는 것은 자기 내면이 의로워지는 것, 깨끗한 것을 의롭다 하고, 공의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 자체에서 이웃에게 바르게 하는 것을 ‘공공의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너 자신뿐만 아니고 주변 사람들, 이스라엘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행사하라. 그것을 실천에 옮겨라, 적용하라. 구약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정의로움을 하나님의 성질, 성격, 속성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테 부탁하는 것과 남에게 법으로, 율법으로 통보하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부탁할 때는 애걸복걸 부탁합니다. ‘제발 좀 정의로와줘, 응? 내 부탁한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부탁 들어주면 고맙고 안 들어주면 할 수 없고 뭐 그런데 율법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안 들어주면 이건 작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라, 의로움을 행하라 하는 것은 반드시 무엇과 연계되어 있느냐면 안하게 될 경우에 단호한 저주와 징벌과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 6-8절에 보면,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직접 화내시고 벌 주시는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앞에 하나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할 게 뭐냐 하면, ‘우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된 사람을 일부러 이 땅에 남겨둬요. 남겨두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하나님 싫다, 하나님 저주받으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하나님 믿는 사람에 대해서 우습게보고 그 사람들을 환란케 하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심판받을 사람들이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성도를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의 미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이 세상에 던져주고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위에 대고 욕하는 것보다도 자기 옆에 있는 성도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지켜보시고 안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환란케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준해서 그것은 공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을 근거로 무시무시한 불심판을 내리시는 겁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6절을 다시 읽어보면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신다”고 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도가 되었으면 성도는 홀로 된 거예요, 아니면 하나님의 의도, 계획에 칭칭 감겨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성도가 있죠. 그렇다면 성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인생, 나만의 인생, 이것은 애초에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 뜻이 있어서 이 세상 속에 그냥 박혀 있는 거예요. 자꾸 혼자 있어서 외롭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의해서, 하나님의 직원이라고 하죠. 천국이 회사이고 하나님이 사장님이라면 하나님의 직원, 뭐 대리라도 괜찮고 차장이라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직원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파견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땅에 특별한 사명과 임무와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는 왜 존재하는가? 말씀이 말씀되게 실행되기 위해서 성도는 거기에 참여되어 있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하나님의 환난을 환난으로 갚으시는, 그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들추어내고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성도는 참여한 바 되는 거예요. 성도의 인생은 혼자 계획잡고 혼자 성취하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동업자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알기는요. 말씀을 보면 나오죠. 워낙 말씀을 안 보니까 외롭다, 서럽다,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고 혼자 자빠지고 혼자 좌절하고 혼자 우울증 걸리고 혼자 삐치고. 왜 교회에서 나를 주목 안 하냐 이런 식으로. 왜 교회는 같은 교인인데 왜 나를 위로 안 해. 왜 동조를, 격려를 안 해줘. 목사님 섭섭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받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격려받기 위해서 교회 와가지고 자기 마음에 드는 일 없다고 삐치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결부가 되어 있어야 되는데 그걸 자꾸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7절 다시 보게 되면,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불꽃과 더불어 천사들이 하늘에서 나타난다면 이것은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보다 더 큰 사건이에요. 북한의 핵무장보다 더 큰 사건입니다. 하늘에서 불꽃 중에 천사가 오는 그 사건에 비하면 인도네시아의 해일이나 지진, 캘리포니아 근처의 지진, 그것 뭐 아무것도 아니죠. 하늘 자체가 불꽃 중에 주님이 나타나는데.

나타나실 때에 그 다음 8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은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 한번 거리에 나가 봅시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복음 압니까, 그 사람들이? 뭐 복음을 들어본 일이 있어야 복음을 알지. 복음을 모르죠? 복음을 모르면 하나님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데 복음은 모른다 이렇게 나누지 마세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모르면 그건 하나님 모르는 겁니다. 복음이 빠진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복음 모르는 사람들이 어째 그렇게 살이 찌고 잘 먹고 좋은 차는 다 타고 다니고 맛있는 거는 다 먹고 돌아다니고. 아무 인생에 구김살이 없어. 얼굴이 활짝 폈어, 복음 모르면서. 이 자체가 환난이라고 보면 되요. 이 자체가 성도에게는 환난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모르고 마지막 때에 천사와 함께 불꽃으로 나타나는 것도 모르면서 잠만 잘 자더라. 행복하기 그지없더라. 친구들만 많더라. 한 달 수입만 계속해서 증가하더라. 해외 놀러는 자주 가더라. 친구도 많고 파티도 자주 열고. 세상 고민은 하나도 없어요. 만사형통. 그렇게 인생이 심각하지도 않아.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여기 8절 끝에 보면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에게는 형벌을 주시리라”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런 소리해도 그 사람들은 ‘하나도 안 무섭다,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오라고 해’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방금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소위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안 믿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요즘 믿는 사람들은 주께서 오심에 대해서 감격하고 고대하고 그렇게 삽니까? 세상이 환난을 줘도 그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고 주의 오심만 기다리고 있어요? 과연 우리 그렇게 살아갑니까?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구분이 안돼요. 그만큼 이 시대가 말씀을 떠난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