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자
이근호 2019년 8월 28일
본문 말씀: 호세아 2:5-7
(2: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2: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지난 번의 광야무대에서 오늘 본문은 ‘혼인무대’가 됩니다. 광야무대와 혼인무대는 관련성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인간의 본성은 바닥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유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이 ‘좋은 사람’일 거라고 여깁니다. 여기서 ‘좋다’는 말은 오직 자기에게만 최종적으로 적용한 개념이 됩니다.
풍요로울 때 사람들은 얼마든지 여유를 부립니다. 하지만 자신마저 생계가 위태롭게 된다면 더 이상의 배려란 없습니다. 차갑게 자기쪽으로 돌아서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광야란 인간에게 걸친 모든 가식들을 떨어내는 환경입니다. 이 광야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보다 자신들이 더 절대적이고 소중함을 절감합니다.
민수기 14:1-4에 보면, 인간들의 진심들이 나옵니다. 울 때 가장 진정성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이럴려고 애굽에서 나왔나’할 정도로 자괴감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은 자기 위주이지만 공포스러운 상황이 함께 덮여지게 되면 그 공포 앞에서 단단히 결속이 됩니다. 마음이 하나같이 되면서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진심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 살 때나 더 낫다’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를 음란한 아내로 삼은 것은, ‘음란’의 뜻을 위해 음란한 역할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음란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호새아의 아내의 뒤를 따라가 봅시다. 5절에 보면,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호세아의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난 것은 그쪽에서 호세아 아내가 원하는 생활여건을 일체 조성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음란’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즉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고 이 ‘주인공’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쪽으로 붙어사는 바로 이런 경우가 ‘음란한 경우’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적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있기에 더 살아남기 위해 산다고 우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본래 인간의 자리’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본래의 인간의 자리란, 자신들을 최종 주인공으로 여기지 않는 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만 만드신 것도 아니요 여자만 홀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 둘을 만드시고서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됨’의 자리가 인간이 돌아가야만 하는 자리에 원리의 자리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이 ‘하나’ 앞에 둘은 자신의 주인공됨을 포기해야 합니다. ‘혼인무대’로 옮겨와야 음란과 간음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여자가 떠난 빈 자리, 하지만 그 자리는 언제가는 떠난 아내가 되돌아와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예전만 같으면 다시 돌아온들 곧 떠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음란한 여자의 자리’는 그냥 ‘본래의 여자의 자리’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떠난 빈 자리를 남편인 호세아가 채웁니다.
‘여자의 자리’가 뭘까요? 인간의 육체에서는 성적인 쾌락이 가장 강렬합니다. 따라서 호세아 아내가 보여주는 역할은, 육체를 지닌 인간들의 한계를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성적인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쾌락은 영속성을 남기면서 간음이라는 선을 넘습니다.
넘고나서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의 자리는 이 성적인 기쁨을 대신할 만큼 더 큰 기쁨이 없었음을 경험상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호세아가 하게 되는 일은, 육체의 욕망보다 더 큰 기쁨이 있는 그런 ‘하나의 가정’을 만드는 겁니다.
이 가정에서는 아내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자신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아내의 위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수학에서 말하는 ‘연산자’입니다. 연산자란 본인에게 최종 의미가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은 빠지고 주변의 다른 이들의 관계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 -,×, ÷, ∫ 등등 같은 겁니다. 주변에 5가 있고 주변에 3이 있는데 어느새 8이 등장한다면 이 세 숫자의 관계를 모르지요. 여기에 +를 놓는 겁니다. 그러면 5+3=8이 됨을 압니다. 이 +가 연산자입니다. 여자는 음란한 행위를 통해서 두 상대를 마주하게 합니다. 한 쪽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고 따라간 사내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 남자는 원래의 남편입니다. 호세아의 계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호세아의 아내가 주저없이 따라가게 만든 그 남자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대비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내는 호세아 아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 쪽입니다.
반면에 호세아는, 스스로 주인공 행세하는 아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남편입니다. 아내가 떠난 자리에 들어서면서 호세아는 ‘고통받는 범죄한 여자’가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당해야 하는 징벌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해산하면서 ‘죽음’을 접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즉 생명을 낳기 위해서 죽음이 먼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 여자의 자리입니다. 아내가 연산자되어 한 여자에 두 남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돈을 준비해서 아내와 함께 있는 그 남자에게 값을 치룹니다. 그리고 다시 아내는 자기 곁에 둡니다.
북이스라엘에게 있어 이 간음한 사내는 신, 곧 바알신입니다. 생계를 두려워하고 돈에서 더 큰 만족을 누리고자 자들은 모두 이 시내와 간음을 하고 있는 간음한 여자입니다. 반면에 호세아 쪽에 계신 분은 신, 곧 여호와입니다. 원래 인간의 자리를 위해 자신이 대신 값을 치르는 역할을 맡은 자들이 신입니다. 과연 어느 신이 참된 신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간음한 여자 맞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참된 여호와 하나남이 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는 단지 주님을 보이는 역할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5강-호 2장 5-7절(연산자)1908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2장 5-7절입니다. 구약성경 125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2:5-7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음란한 여자가 계산을 하는 거예요. 나와 연애했던 그 사람이 나에게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제공해왔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계속해서 만날 것이고, 그 사람과 연애할 것이라고 음란한 아내가 주장을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6절에 나오지요. 가시로 담을 쌓아서 그 길을 가로막게 되면 그제야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그러니까 본남편과 있을 때가 지금보다 좋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허겁지겁 내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이 상태보다 원래 있던 남편이 지금 생각하니 좋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을 막았다면 왜 진즉 안 막았지요? 그 음란한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전에 애초부터 아예 못 만나도록 조치하면 되는데 만나게 해놓고, 왜 음행하게 해놓고 뒤늦게 가시로 담을 쌓아서 못 만나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호세아가정을 가정다운 정숙한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가시로 담을 만들어서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결한 가정을 키우시는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서 음란한 여자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이야기 됩니다만 여기서 음란한 여자는 주인공이 아니에요.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란한 여자가 자기가 주인공인양 여기는 것, 바로 그 주체적인 본성을 극대로 확장시키고 그걸 증폭시키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놓고 나중에 막을 때는 막아버립니다.
막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막히는 주제밖에는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내 뜻대로 하고 싶더라도 누가 외부에서 막아버리면 더 이상 일을 진행을 못하잖아요. 내 맘대로 할 때 과연 내가 주인공이냐, 라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 때 나는 홀로 살겠다. 왜? 나는 나에게 내가 주인공이니까.’라고 다들 주장하는데 그게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만들 때 그런 식으로 살라고 인간을 만들었습니까?
‘나는 내가 주인공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가 있고 권리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현실을 그렇게 만들어나갈 명분이 나에게 있다는 그러한 생각,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들 때 그런 식으로 살라고 인간을 만들었겠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음행한 여자를 막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호세아가정에 관여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인공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은 놀고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인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것이고 그 계획이 펼쳐지는 것이 이 현실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 중에 가시로 그리고 담으로 쌓아서 막았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주인공이 되는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 주인공을 잊어버리고 마치 내가 주인공인양 살아가는 경우들을 이 호세아를 통해서 발췌해 냄으로 거기다가 무슨 용어를 제공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음란이라 하는 거예요.
음란은 본인이 주인공인양 살아가는 그 모습이 음란이에요. 음행한 여자는 본인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일의 계획의 주인공이 아니고 어떤 역할을 맡는데 음란한 행위를 해야 될 역할, 배역을 맡은 사람에 불과해요. 그것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음란한 배역을 맡았는데 그 음란한 배역이 뭐냐 하면,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주인공으로 여겨서 내가 내 생존의 방식을 나 유리한대로 찾아다니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음란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는 음란을 행했기 때문에 음란한 여자가 아니고, 음란이라는 것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음란한 행위를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에요. 영화제목을 ‘음란’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여자배우에게 음란한 역할을 맡겨 준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음란한 역할, 역할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가 주인공인양 여기면서 자기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획한 이 영화의 제목을 음란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음란한 것을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한 무대가 있어요. 그 무대가 뭐냐? 가정이라는 겁니다. 선지자가정, 그게 무대에요. 선지자가정이라는 것을 무대삼기 위해서 2장 3절을 다시 보게 되면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가정이라는 이 무대, 이 무대라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된 무대가 있어요. 광야라는 무대를 먼저 설정한 겁니다. 그러면 이 광야라는 무대에 자기백성들을 보내게 되면 광야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자체적으로는 해결책이 없는 곳이에요. 광야는 자력으로 해결책이 없어요. 자기가 주인공이고 싶어 해요. 하지만 목마른데 물고 없고 양식도 없는데 광야 안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만족스런 대책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광야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해결책이 없을 때에 사람은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그 공포가 개인적공포가 아니에요. 집단공포입니다. 집단공포가 되면서 나는 주인공, 나는 개별로 나는 나만의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집단공포 안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라 하는 것은 개인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일괄적, 일률적으로 지적을 할 수 있는 단체 만들기에 광야라는 무대가 아주 적절한 거예요.
사람은 상식적으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자기 어려울 때, 자기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요청을 하지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해서 내가 주인공인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청을 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줄 마음이 없어요. 점점 더 불안해지지요. 또 다른 사람에게 요청을 했는데 그 사람도 안 도와줘요. 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적인 공포, 한꺼번에 다 공포에 잠기게 되어버려요.
자, 이렇게 되니 그 때부터는 운명공동체가 됩니다. 너, 나가 아니에요. “우리는 힘을 합치자.”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개인주인공이라는 의식은 여기서 탈락이 되지요. 없어요. 모두가 하나가 되니까. 하나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 음란을 개인의 잘못으로 보지 않고 북쪽 이스라엘 전체가 음란한 집단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광야 이야기를 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음란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은,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음란한 나라다. 음란한 나라가 되었고 음란한 그 모습의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는데, 바로 호세아의 부인이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행음을 하는데 행음하는 이유가 5절에 나와 있지요.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여기서 호세아의 여자가 행음한 이유가 뭐냐? 자기생존, 내가 주인공이니까, 이 주인공이 살아야 이야기가 되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는데 필요한, 생존에 필요하고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귀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호세아부인이 음란한 역할을 하는데 음란한 역할의 그 이유가 뭐냐? 내가 주인공답게 살 수 있는데 필요한 것들, 여러 가지 생존과 생계에 필요한 물자들을 공급해주는 사람을 찾을 때 그걸 두자로 음란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것은 인간의 육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가 음란이라는 이름으로 그 본성의 바닥을 내민 거예요.
호세아의 부인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뭘 감사해야 되느냐? 평소에 우리가 먹고 살려고 ‘돈, 돈, 돈이 최고고 중요하다. 돈이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다.’ 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음란이라고 규정받게 해준 사람이 호세아의 부인입니다. 바람피웠다고 음란이 아니에요. 바람을 안 피워도 내 몸뚱이 하나 살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는 그것이 음란이라 그 말입니다.
그게 왜 음란이냐? 돈이 신랑이기 때문에. 광야의 무대에서 이제 가정의 무대로 들어오면 가정에는 아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편도 있거든요. 남편과 아내가 공동으로 구성되는 무대가 가정입니다. 이 음란한 여인이 싸돌다가 이제 본남편으로 되돌아온다는데 이게 뭐냐? 인간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었다 하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생겼지요.
그 전에는 인간이 내가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없었어요. 너와 내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 본래의 자리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만나고 신부는 신랑을 만나서 서로가 주인공이라 하지 않고 둘이 있으나 그걸 하나라고 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본래의 자리에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있어야 될 그 자리, 떠나지 말아야 될 그 자리가 가정인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시로 나타내셔서 그 여자의 바람기를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 여자에게, 호세아 부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전체가 문제가 있다고 문제를 확장시키고 그 범주를 넓혀나가는 이유는, 그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지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호세아의 북쪽 이스라엘의 경향은 예전부터, 출애굽 할 때부터 있었어요. 민수기 14장 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들이 광야에 있으면서 그들은 크게 곡했어요. 그것도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들이 전부 다 집단화되었어요. 다 같은 마음이에요. 생존이 위협받으니까 집단멘붕에 빠진 거예요.
공포가 주어지게 되면 너 나가 하나로 결속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갑자기 커튼이 열리고 허연 귀신이 나타나면 갑자기 너, 나가 아니라 다 하나가 되어서 껴않고 대동단결하겠지요. 대처하려고. 귀신한테 안 밀리려고. 공포는 둘을 하나로 만들고, 셋도 하나로 만들고, 백도 하나로 만들어요.
일본이 수출 규제한다고 할 때 대한민국이 지금 하나가 되었잖아요.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면서. 무슨 공포냐 하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 공포에요. 개인, 개인, 하다가 광야에서 전부 다 집단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집단적 공포에 어쩔 줄 모르면서 반발을 하는데 그 반발을 누구에게 하느냐? 모세와 아론보고 해요.
하나님 쪽에서 파견근무하고 있는, 하나님이 파견한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이 이스라엘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대드는 겁니다. 호세아에 와서 이게 음란이에요. 이게 왜 음란이냐 하면, 본래의 신랑과 관계를 끊어버렸다는 그 말입니다.
진짜 신랑을 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으로 홀로 서기에 매진하기 위해서 누구든 기름 주고, 떡 주고, 빵 주고, 옷 주고, 그러면 나는 아무나 붙들겠다는 그 마음자세가 신랑과 살림을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내 몸만 밥 먹고 살면 그 만이라는 그 의식, 그것이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하고 나서 갖고 있던 본래의 악마성이라는 겁니다.
그걸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무대를 사용해서 이제는 가정의 무대로 해서 더욱더 그 깊이를, 하나님의 본래의 자리로 찾아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하나 더 놓는 거예요. 더 세밀화 시킨 겁니다. 자기본색이 본색대로 다 노출되어야 해결책이 가까이 있는 거예요. 3절에 보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는 것이 뭐냐? 지금 사는 것보다 애굽에서 살던 때가 내 생존에 유리했다는 그 말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이런 말씀이 나와요. “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사방에 보내서 죽은 사람이 많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인간은 사는 것이 마땅하고 정당한 권리라고 여기거든요. 잘 살기만 하면 착한 일도 할 용의가 되어있다고, 이런 식으로 협상에 나서는데 하나님께서는 홀로서기, 홀로 산다는 것은 원래 인간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짝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남자만 달랑 만들고 여자만 달랑 만들지 않았어요.
둘을 만들어놓고 그걸 하나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남자 여자 식으로 인간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지금 여자는 그냥 바람났다, 하지만 남자가 좋아서가 아니고 내가 나의 절대성을 부지하기 위해서 나의 절대성에 필요한 생계물자, 돈을 제공한다면 나는 아무나 남편감으로 삼을 용의가 있다는 그런 식이에요.
그게 호세아에서 지적하는 겁니다. 호세아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여기에 해결책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본남편으로 돌아오는 것이 낫다고 했고 여기서 해결책이 있어야 되는데 본남편은 여기서 호세아를 말하는데 본남편이 해야 될 일이 뭐냐? 지금 아내가 떠났어요. 바람나서 남편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아내의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는 그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 하면, 남편인 호세아가 그 여자의 자리를 채우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호세아가 하나님께 받았던 자기 사명이에요. 광야라 하는 것은 서서히 하나의 떼가 움직이잖아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움직임이 있지만 광야라는 무대를 계속 사용하지 않고 혼인제도로 가정이라는 무대를 만들어버리면 혼인제도는 정지화면이 돼요.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그 본성은 동일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이 결혼인 겁니다. 보통 여자들이 그런 생각하잖아요. 남자들이 결혼해서 좋아하는 것보다 여자들이 결혼하게 되면 더 좋아해요. 왜? ‘불행 끝 행복시작’이거든요. 자기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 가지고 쇼핑만 하면 되니까. 샵~핑! 이런 팔자가 어디 있어요.
남편은 돈 벌어다 줘. 자기는 쇼핑만 하면 돼. 그래서 결혼해서 애 낳으면 ‘요 예쁜 강아지.’ 하루 종일 애하고 같이 먹고, 자고, 살만 퉁퉁 찌고, 그러더라도 남편이 모든 생활비를 다 주니까 이런 영원한 취직, 죽을 때까지 취직이 보장되었으니까, 그리고 남편이 직장상사처럼 잔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갑질 할 것도 아니니 이런 회사가 어디 있어요? 자기가 사장되고 자기가 회장되어가지고, 돈은 남편이 벌지만 자기는 돈 쓰면서 큰소리칠 수 있는 이런 배부른 인생, 그것은 오직 결혼뿐이야.
결혼이라 하는 것은 정지화면, 하나의 스냅사진처럼 그 상태가 그대로 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아내가 호세아를 떠났기 때문에 지금 아내의 자리가 비어있어요. 그러면 집나간 아내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것이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까 자기가 안했는데 이미 다 마련되어 있어요. 그 불행 끝 행복시작이.
그걸 누가 하느냐? 아내가 없는 그 빈자리를 남편이 아내자리에 들어와서 아내가 겪어야 될 그 모든 것을 남편이 대신 채움으로서 해결 보는 겁니다. 그 아내를 간음이라고 했는데요. 인간의 육체로서 한계, 다시 말해서 쾌락을 정해놓은 그 한계, 선을 넘어버린 것이 바로 음란인 거예요. 성적인 문제에요. 선을 넘었다는 그 말이지요.
선을 넘었다는 것은 선을 넘은 상태에서 도로 이전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최고의 기쁨의 연속성, 기쁘다, 기쁘다, 기쁘다, 최고의 기쁨은 역시 바람피우는 것이다, 해서 넘어섰기 때문에 이제는 바람피우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준비되지 않는 한 다시 도로 옛날 자리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음란이라는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한 거예요. 인간은 육체고, 육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성적인 기쁨이다. 성적인 기쁨을 인간들은 계속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미 그 선을 넘은 사람은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 한 돌아올 이유가 없지요. 돌아와 봐야 ‘시시하게 이렇게 사나. 저게 더 낫다.’ 하고 또 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따라서 호세아라는 남편이 여자가 떠난 그 빈자리에 마련한 것은 뭐냐? 인간의 육체로서의 최고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 더 큰 기쁨을 제공해 줄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돌아와도 다시는 떠나가지 않을 최고의 기쁨. 그 기쁨은 뭐냐? 선악과 따먹기 전에 생명나무 있을 때의 그 기쁨이에요. 선악과 따먹기 전.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이 자기를 주인공으로 여겨서 주인공이니까 주인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쁨을 찾지만 그 모든 기쁨은……, 원래 내가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아닌데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나는 주인이어야 돼. 세상은 슬퍼도 나는 혼자 행복해야 돼.’ 이게 세상변화와 맞지를 않아요. 어떤 기쁨을 찾아도 내가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있는 한 그 기쁨은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난을 친다든지, 다도를 한다든지, 골프를 친다든지 꽃꽂이를 한다든지, 시간 남아도는 여자들 찜질방에 모여서 하루 종일 수다를 떨든지, 안 그러면 맛집 찾아 돌아다니든지, 안 그러면 배낭 짊어지고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잘 안 가더라마는, 베트남, 태국 온 천지 다녀와서 파김치, 젓갈이 되어서 돌아오자마자 ‘또 가고 싶다. 인천공항 그리워라.’ 해서 또 나가고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또 가고 싶다.’ 여행중독자 되어서 백날 돌아다녀 봤자 내가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육체의 쾌락일 뿐이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다움의 기쁨은 그런 식으로 제공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편은 그 여자, 나는 주인공이라는 의식으로 채울 수 없는 기쁨을 호세아남편이 여자의 빈자리에서 여자의 역할까지 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의 역할이 뭐냐? 여자의 역할은 죽음을 체험하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16절 후반부에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리고 16절 앞부분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잉태하는데, 자식을 낳는데 고통을 더한다는 말은, 원래 죄를 짓지 않았을 때는 자식 낳을 때 고통이 없었어요. ‘순풍순풍’입니다. 그런데 애 낳을 때 고통이 있다는 말은 ‘자식이 생겼으니 여자여 너는 죽어야 돼.’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여자로 하여금, 남자는 몰라요, 여자로 하여금 죽음에 가장 근접한 고통을 아기 낳을 때 겪게 하는 겁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이제 내 생존의 역할은 끝났어.’ 혹은 ‘나는 죽어 마땅해.’ 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죽음 없이는 그 안에서 어떤 생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여자이기 때문에 표현해야 될 임무를 부여받은 거예요. 죄짓고 난 뒤에는 그래요. 죄짓고 난 뒤에 여자는 아기 낳을 때 고통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여자를 통해서 그 고통, 죽음이라는 것을 자기 몸으로 체험해주고 발산해줌으로 말미암아 생명은 어디 있느냐? 바로 그 죽음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요.
그래서 여자 이름이 뭘로 바뀌느냐 하면, 하와, 생명으로 바뀌어요. 죽음의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기 낳을 때마다 죽음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호세아 같은 경우에는 집단화된 북쪽 이스라엘이 바람난 여자처럼 모든 것이 자기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민족들, 그 집단을 남자로 여기고 간 거예요.
그러면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그 본래의 자리로 찾아가서 죄 짓기 전에 주신 하나님의 원래의 인간으로서의 기쁨을 만끽하고 그러고 난 뒤에 여자가 왔을 때는 진짜 원래 남편이 최고야 라고 더 이상 개인적인 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면 거기에 필요한 모든 새로운 시스템을 남편 되는 호세아가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호세아는 여기서 뭘 느끼느냐? 죽음의 고통. 아내가 남긴 죄로 인하여 남편이 죽을 고생을 하고 마음고생을 해야 되는 그 역할을, 남자지만 여자의 아픔을 대신 남편이 겪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누구 생각납니까? 바로 예수님 생각나지요. 신부가 없는데 신부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신부를 위해서 대신 죽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뭐냐 하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 여자의 자리를 여자의 자리답게 하기 위한 유일한 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같은 역할을 호세아는 어떻게 했는가? 바람나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데 그 남자한테 자기 아내가 빚을 너무 졌어요. 다른 남자에게 가서 너무 많이 얻어먹어서 빚이 늘어났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남자가 지긋지긋해서 떠나려고 해도 남자가 하는 말이 “내가 너에게 준 돈 내놔라.” 하면 돈이 없어서 노예가 되어서 가지를 못해요. 그럴 때 그 소식을 듣고 남편 된 호세아가 돈을 마련해서 다른 남자의 돈의 포로가 되어 있는 자기 아내를, 돈을 지불하고, 값을 치르고 다시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이 역할을 해야 돼요.
고생은 자기가 했는데 값은 누구한테 치르는가? 여자 때문에 그 다른 남자에게 돈을 치르고 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가정무대에요. 하나의 무대, 연극무대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연극무대에서의 그 음란한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했지요. 주인공이 아니라면 역할은 뭐냐? 이걸 수학에서 어려운 용어로 ‘연산자’라고 해요.
연산자라 하는 것은 기호인데 나누기(÷), 곱하기(×), 더하기(+), 빼기(-), 인테그랄(∫), 시그마(∑), 델타(△) 펑션(F), 이런 것을 다 연산자라고 하는 거예요. 연산자는 숫자와 숫자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연산자 역할입니다. 5가 있고 3이 있는데 그게 8이라고 할 경우에는, 연산자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5가 있고 3이 있는데 8이 나왔지?’ 그 때는 연산자 더하기(+)를 집어넣으면 ‘아, 5+3을 해서 8이 나왔구나.’라고 그 관계가 비로소 정립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여자는 뭐냐?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호세아, 그리고 호세아가 왜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자기 아내를 데려오느냐? 여자가 연산자가 되어서 두 남자를 데려오는 거예요. 여자는 하나인데 두 남자에요. 한쪽은 호세아고, 한쪽은 바람나서 생계비준다고 좋다고 따라갔던 그 남자, 그 숨겨진 남자를 끄집어낼 때 호세아 쪽의 남자도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 북 이스라엘이 따랐던 그 남자, 물론 이방민족이지만, 호세아서는 그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해요. 우상인데 바알신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신이에요, 신. 연산자, 여자가 연산자가 되어서 사귀었던 남자를 끌어당겼는데 보니까 그게 신이에요. 그리고 여자가 그 신과 결별하고 본 남편에게 돌아오는 연산자역할을 하니까 이 쪽은 호세아가 아니고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신이잖아요. 두 개의 신이 음란한 여자의 역할로 인하여 동시에 딱 드러납니다. 둘 중에 어느 신을 믿을 것이냐? 그게 호세아의 주제에요. 호세아가 생각했던 무대입니다. 나한테 생계비대주는, 네가 나를 주인공으로, 영웅으로, 성공자로 만드는 그런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나는 원래의 자리를 떠나버린, 선악과를 따먹고 마귀에게 농락당하는, 그래서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죄고, 그것이 음란이라고 지적해주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 어느 쪽이냐?
그걸 말해주기 위해서 호세아가 있는 겁니다. 육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영적인 세계로 범주를 넓혀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들은 살아가는 것이 기회가 아니고 덫입니다. 주어진 덫. 그런데 그 덫에 빠져야 돼요. 덫에 빠져야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덫에 빠져서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 신명기 1장 36-38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은 광야에서 아주 특이한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고 또 한사람은 여호수아에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힘으로 약속의 땅에, 장대같이 건장한 원주민들이 버티는 나라에 아무리 애를 써도 못 갑니다.”라고 열 명의 정탐군이 이구동성으로 집단화되어서 공포에 떨면서 보고를 했지요.
그런데 똑같은 광경을 봤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래서 우리는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거예요. 이 특이성. 왜냐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를 하나님이 다루시는 연산자로 보았기 때문에. 자기역할은 내가 주인공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역할을 받은 연기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은 하나님, 주님이 주인공이에요.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짐 지고, 호세아같이 값을 치르시고, 우리 스스로 질수 없는 값을 대신 치르시고 진짜 본래의 기쁨, 천국의 기쁨, 이 세상 육적인 기쁨보다 말할 수 없이 월등한 천국의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제공하기 위해서 모든 고생고생을 다 하신 여자의 후손,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연산자, 역할로서 말도 안 되는 음란한 세상에 푹 젖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바라기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그런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인공인지 알았습니다. 나 잘되게 하는 것이 좋은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세상과 짝하는 그것이 음란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 죄 값을 대신 치르신 분의 소식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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