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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1:8-11 / 망해야 되는 자식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1:8-11 / 망해야 되는 자식

정인순 2019. 8. 14. 22: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망해야 되는 자식 


이근호
2019년 8월 14일                  



본문 말씀: 호세아 1:8-11

(1: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망해야 안 망할 수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인간들은 망하는 쪽에서 나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망하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아주’ 망해버리면 ‘아무 망해야 입장’에서는 ‘다시 안 망하는 나’가 된다는 희망 자체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안 망할 수 있다고 미리 예상하는 것은 ‘아주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척’ 꼼수를 부리는 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의 자식들의 이름은, ‘망하는 척’이 아니라 ‘아주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예, 일절 내 백성 아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단호하게 말하건데 내 백성이다’는 겁니다. 이처럼 ‘내 백성’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가정에 자식을 낳게 하신 겁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새로 아이가 태어나 그 북이스라엘 속하게 되는데 이 호세아의 아들은 전체 이스라엘이 ‘아예 내 백성아니다’를 분명히 하기 위해 태어나고 섞이는 아이입니다. 호세아의 딸의 이름은 “아예 나의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예 이방민족이라면 구태여 선지자의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질 리가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어떤 사명이 장착되기 위한 민족인데 그것은 그 어떤 경우이든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고 하나님 백성이 될 권한도 없는 존재들임을 대표적으로 알리기 위한 민족입니다. “아니다”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어질 이유를 지 민족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민족이지만 그들의 망함을 통해서 망하지 않는 약속된 민족이 그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는 사람의 고유 권한으로서 얻는 혜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자체에서 나오는 혜택입니다. 약속을 약속답게 되기 위해서는 필히 ‘인간의 망함’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자기가 망하지 않는 방도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아가 다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주의 일은 없습니다. 주님의 일은 이미 확정적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며 긍휼을 입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체 평가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긴긴 생애동안 자기 고생한 것이 주마등처럼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장하다 나여!”라는 칭송과 격려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격려해도 이미 ‘망해야 될 존재’로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바로 이점에 분노하는 겁니다.

평생을 통해서 힘들게 살아온 그 가치와 의미를 그 누구든 건들리면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성질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창세기 35:2에 보면,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야곱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으면서 우상 제단을 병행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런데 가난안 땅은 온 천지가 우상의 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점은 기존의 인간의 의미를 제거하느냐 제거하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우상은 항상 인간을 독보적 존재로 장려합니다. 인간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이 오직 자기에게 유일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개인의 유일무이성과 독보적인 가치가 다 우상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0-11)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의 혜택은 우상을 버리는 조건에서 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우상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진해서 자신을 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보적으로 결국 자기만 살아남고 자기만 잘 되기를 원하는 식으로 악마로부터 세뇌당하고 왔습니다. 악마의 일은 인간에게 의미부여를 부어지는 일을 합니다. “끝까지 네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가 속삭여 왔습니다.

달리 말해서 “망해서 잘 될 수 있다면 망하는 척을 하라”라는 요령같은 것으로 악마는 계속 인간 본유의 가치를 유지토록 부추겨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을 제대로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다윗왕의 경우, 그는 새로 생긴 자식이 다윗 자신의 죄로 대신 죽는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인간에게서의 살아있어도 죽는 것과 다름없는 경우란, 평소에 그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가 된 바로 대상이 상실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다윗을 계속 살게 하므로 서 ‘죄 용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죽음에 동참하는 일’임을 알려주십니다. 나 보다 더 소중한 것의 죽음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산 채로 심판과 저주를 맛보게 합니다.

“그동안 나는 단지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바로 이것이 죄인 것을 ‘나를 대신하여 죽은 그 죽음’ 앞에서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얼마든지 예수님의 활동이나 존재를 남들에게 말로 전달하고 알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나는 살 가치있고 아직 죽어서는 아니될 정도로 소중해”라는 정신이 계속 작용합니다.

그러나 진정 참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려면, 하나님의 죽음에 본의 아니게 참여된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리는 것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죽으심은, 자기가 이미 미 마땅히 죽어 있음을 인정한 자에게만 전달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래야 하나님 약속의 혜택이 전부 나타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의 의미가 없이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3강-호 1장 8-11절(망해야 되는 자식)

1908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25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8-11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우리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혼인케 했는데 그저 음란하지 않고 착실하고 순결한 여자하고 혼인하지 않게 했어요. 오히려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게 했습니다. 음란한 여인은 호세아를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는 그런 여자입니다. 여기서 여자가 욕망을 내었다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선지자를 버렸다는 것이 문제에요.

남편의 직업이 선지자인데 선지자를 버렸다는 겁니다. 선지자를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외면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를 외면한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이 현실을 어떻게 이끄는지에 대해서 나는 별로 관심 갖기 싫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 행복만 추구하면 되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고, 어떻게 마감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기 싫다는 쪽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음란한 여자에요.

그렇다면, 이 호세아 부인이 음란한 여자라면 그 기준으로서 모든 그 당시 북 이스라엘, 그걸 대표로 해서 ‘이스르엘’이라고 1장 4절에 나와 있는데, 그 북쪽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의 형편이 이 음란한 여인과 동일한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오늘날 현대를 두고 그대로 이야기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지요. 관심이 없는 줄로 아시고 의도적으로 선지자가 그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게 하셨습니다. 호세아의 주제가 뭐냐?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보통 인간세계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가 둘 다 서로를 향하여 애정을 갖고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사랑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추호도 없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사랑해 줄 때 비로소 사랑의 가치가 돋보인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는데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다는 결과를 나타내게 되면 그게 온전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먼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먼저 사랑했다. 사랑의 주도권이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버리면 인간은 자기의 결심과 자기의 각오를 잠시나마 유지할 수 있지만 환경 바뀌고, 상황 바뀌고, 나이 들고, 치매 걸리면 인간은 자기본색으로 돌아와요. ‘나는 그 누구도 한 때는 사랑했지만 지금은 나만 사랑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다섯 자로 뭐냐? ‘데이트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때는 사랑했던 자에게 주먹질 날리는 그것. 여자는 남자에게 약을 먹여 죽이는 것. 이런 것이 뭐냐 하면, 언젠가는 인간이 하는 사랑은 철회가 가능해요. 철수, 다시 자기 것으로 회수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한 남자,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인간사회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사랑의 스타트에요. 너희들이 나를 사랑할 가능성이 영 퍼센트, 전혀 없다. 그래서 사랑이다. 나의 온전한 백퍼센트 하나님의 사랑만이 너를 덮쳐서 구원한다는 겁니다. 그 음란한 여인과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 딸의 이름이 ‘로루하마’에요.

‘로’는 ‘아니다’ 하는 뜻이거든요. ‘……가 아니다.’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딸 이름이 ‘로루하마’고 막내아들 이름이 ‘로암미’ ‘암미’는 백성이라는 뜻인데 그 앞에 ‘로’니까 ‘내 백성이 아니다.’ 그것도 강조해요. ‘결코 내 백성이 아니다.’ 결코 긍휼을 입지 못한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하는 그 취지가 뭐냐? ‘아니다’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는 혼인하게 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자식을 순풍순풍, 셋이나 낳게 하는 것은 ‘아니다’를 강조하는 거예요. 왜 ‘아니다’를 강조하는가?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과 서로서로 사랑해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한쪽이 ‘아니다’를 향하여 일방적인 사랑을 퍼부어서 결국은 그 사랑이 성취가 되는 그런 방식이 하나님의 사랑방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아야 되겠네요.” 이렇게 논리적으로 나오시는 분이 있는데 ‘사랑 안해야 되느냐, 사랑해야 되느냐?’의 그것과 상관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요. ‘사랑을 해 볼까, 하지 말까?’ 하는 괜한 갈등 느끼지 마세요.

해도 사랑 아니고, 안 해도 사랑 아니에요. 이 말은, 누구한테 방금 이야기한 이런 격분을 유도하느냐 하면, ‘하나님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격분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도 그렇고 요즘도 마찬가지고, 나름 하나님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던 사람들을 분노하게, 대노하게, 화나게 만들지요.

“목사님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의 가치를 무가치하게 조지고 밟아버립니까?” 하고 나오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호세아를 통해서 결혼하게 하는 것은, 호세아가 결혼하기 전에는 총각이었다는 말이지요. 총각이라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없어요. 아내가 없고 자식이 없는 거예요. 아내가 없고 자식이 없다는 말은 비어있다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하나님이 호세아를 경유해서 뭔가 남기는데 그 남기는 것이 진솔한 그 당시 형편이고, 또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그 진솔한 모습 그대로라면 뭔가 ‘아직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는 그러한 주장들은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호세아는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아직도 네가 감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바닥까지 다 들춰낼 것이다.” 네 바닥까지 들춰내면 결국 ‘너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음.’ 이라는 결론에 도달되는 겁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그 말씀, 특히 율법을 들이대 버리면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을 다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그것도 항상……, 한 때 지켰다 하지만 돌아서면 마찬가지에요. 항상 모든 율법, 그것도 한 두 가지 지킬만한 것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율법을 빠짐없이 다 지킬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오른 눈이 멀쩡하고 오른 팔이 멀쩡하니까.

범죄하면 그걸 빼라고 했는데 안 뺀 채로 그저 박혀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에요. 진짜 오른 눈으로는 죄지은 적이 없는 것. 또 하나는 죄 지어놓고 안 지었다고 감추고 우기고 있는 것. 아직도 자기한테 어떤 가능성 같은 것, 그런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다 무효로 조치합니다. 왜냐하면, ‘아니다’에 먼저 놓여 있다는 거예요. 그 ‘아니다’에.

“내 백성 아니며, 네 식대로, 네가 하는 태도를 보니까 절대로 긍휼을 줘서는 안 된다.” 에 너희들이 모두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계시가 올 때 우리가 각오해야 될 것은 나의 건전함이 안 다치고 내가 심적으로, 가치적으로 나는 안 다치고 하나님 믿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내가 안 다치고, 내가 안 망가지고 되는 주의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엉망진창 될 때 우리는 뭘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그냥 팔짱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내 일에 깊숙이 지금도 관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것이 기적처럼 느껴지고 호들갑떨면서 놀라야 돼요. 감동받아야 돼요.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다.’가 아닙니다.

지금 일일이 세미하게 내 인생에 다 관여하셔서 내 발걸음을 세시고 내 머리카락을 헤아리면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장악하고 이끄시는 그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껴야 돼요. 어떻게 느끼는가? ‘아니다’를 강조하는 거예요. “너는 아니야. 내 백성 아니야. 너는 긍휼을 받지 못해.” 그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것을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다.’ 자기 지키고자 하는 그 모든 스트레스와 심적 부담에서부터 우리가 빠져나와야 돼요. ‘로암미’라 하는 것은 내 백성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이것을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 백성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아니다.’ 강조했으니까.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하거든요. 선지자가 이스라엘 자기백성의 얼굴을 딱 보고 하는 말이, ‘내 백성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내 백성 아닌 자가 너희 속에 새롭게 들어왔다’는 말은, 전체가 내 백성 아닌 거예요.

“내 백성 아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취지를 아셔야 되는데 그것은 뭐냐? 우리 보통 흔하게 이야기하기를, “나는 내 인생을 이렇게 착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들 하지요. ‘프랭크 시내트라’라고 젊은 분들은 모르지만 옛날 1960년대 가수가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가수의 노래 'My way'라는 것이 있어요.

한국의 트로트 가수가 부른 ‘마이 웨이’나 아이돌이 부른 ‘마이 웨이’ 말고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 가 있는데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끝이 다가왔다. 마지막 커튼을 내가 마주 대한다. 친구여, 내가 확실히 말해두지. 나는 일평생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 그런 내용인데요. ‘로암미’라는 것을 그 앞에 딱 연결시켜 보면, 마이 웨이라는 그것이 결국은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한평생 열심히 이 몸을 추스르고 인생을 추스르면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끝은 뭐냐? “망하기로 작정되었다. 그게 내 백성 아니다.”에요. 열심히 살아왔는데, 중간고사 시험치고, 기말시험치고, 남들 하는 대로 취직도 하고, 아파트도 사고, 애도 낳고, 온갖 것 다 했는데 그 마이 웨이, 내 인생, 내 방식, 그것이 마지막 커튼 앞에 마주보게 될 때에 “친구여, 확실히 말해주지. 내 하는 그 모든 일로 인하여 나는 지옥 간다.”

그게 진정한 하나님의 마이 웨이에요. 이 말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평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이것은 뭐냐? 평소에 ‘나에게 이것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갈등을 일으키는 그것도 무의미해요. 따라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완전히 불도우자 가지고 깔아뭉개버립니다.

“내 백성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희는 절대로 긍휼을 입을 수 없어.” 극단적으로 끝까지 가버립니다. 없음이지요. 그런데 본문 10절에 보면 “그러나” but,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방금 ‘내 백성 아니다. 긍휼 받지 못한다.’ 하고 작심해서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 같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하기를 “그러나”라고 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주신 아브라함의 축복,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이 많고 하늘의 별같이 많다는 그 축복은 너희들에게 유효하게 주어질 것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나님의 약속, 하늘의 복,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이 많고 별같이 많을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절차상 ‘너희들은 극단적으로 내 백성 아니어야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찾을 자격도 없어야 된다.’가 들어가는 거예요. 참 희한하지요.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에게 주면 되는데 완전히 없애놓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약속을 주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안 없어지면 우리가 오해하기를, ‘나 같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생,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자가 된다.’라고 우기고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천국에는 전부 다 자기 잘난 인간들만 나오는 겁니다. 열심히 살았다든지, 아이큐가 높다든지, 착한 일을 많이 했다든지, 그런 사람들만 천국에 모여 있어요. 그것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사람의 집합이 천국이 아니라, 긍휼을 받을 자격도 없고, 내 백성 아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추진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기가 낸 약속을 멈출 수가 없어서 백퍼센트 고스란히 그 혜택만 입은 사람들의 단체, 그 집합, 그 가족, 그것이 바로 천국이에요. 오직 주님의 공로만 감사하는 그 절차를 위해서 평소에 인간이 으스대면서 자기 자신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왜 이스라엘을 작살내지 않고 왜 호세아에 와서 작살내는가? 호세아는 문서선지자거든요. 이사야나, 호세아, 이 문서선지자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기정사실화 된 거예요. 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놓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에게 주느냐? 그것은 전에 너희들이 이스라엘 될 때 그냥 망하면 안 되고 망해야 될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이유를 인간들은 몰라요. 그래서 호세아를 통해서, 또는 그 전에 다른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필히 내 백성 아니라는 욕을 들어야 되고 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야 되는가? 그것은 우상숭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백성이 많아지게 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제거되고 난 뒤에 충족되는 조건이냐 하면, 우상숭배가 없어지고 난 뒤에 나오는 천국의 혜택인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법칙이 창세기 35장 2절에서 10절에 나와 있어요.

창세기 35장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벧엘에 올라가는데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단은 우상의 단과 겸할 수가 없다는 원칙이 언약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나안 우상이 넘치고 넘치는 그런 나라에 의도적으로 보내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섬기는 그 신, 진짜 신과 인간들이 본성으로 만들어낸 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상을 제거해야 되는 거예요.

십계명의 첫 번째 나오는 계명이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다른 신을 우리가 안 섬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인간의 본성상 반드시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왜 반드시 섬기느냐? 악마로부터 정신적으로 조종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계속 사기를 당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 섬기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느냐? 나중에 우상을 안 섬기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이 뭐냐? 이름을 바꿔주는 것이 복이에요. 특히 야곱에 있어서. 그래서 창세기 35장 9절에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야곱 너를 안 죽이고 살린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 이름, 그 이름을 창대케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이름을 창대케 하는 거예요. 상당히 어렵지요. 결국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짊어지고 가는 수레, 가마, 또는 1톤 트럭, 그렇게 보시면 돼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주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다른 이름은 안 됩니다.

그 다른 이름의 운반체, 그게 성도에요. 이름이 바뀌어야 돼요. 이름이 바뀐다는 말은, 전에 내가 갖고 있었던 내 이름은 우상과 결탁된 이름이라는 거예요. 우상과 결탁된 이름이라는 것은 뭐냐? 내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다른 쪽, 나에게 계속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부여하는 쪽이 있다는 뜻이지요.

우상을 섬기고 네 이름을 높이라는 거지요. 여기서 약간 난해하지만 빨리 지나가겠습니다. 사람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대상이라는 뜻이에요. 내 이름과 저쪽의 이름이 다르다는 말은 너는 너고 나는 나인데 둘 중 누가 중요하냐? 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 내 이름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게 이름이에요.

이름을 위해서 내가 산다는 것은, 내 몸을 내 이름에 바친다는 것은, ‘나는 너와 다르고, 그와 다르고, 저쪽과 다르고, 그것들과 다르고, 우리들과 다르고, 나는 나만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고 중요해.’라는 식으로 우리는 계속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부터 부추김을 계속해서 받는 거예요. 그게 ‘마이 웨이’ 아닙니까?

나는 내 방식대로 산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호세아 오늘 본문 이야기는 뭐냐? 망해봐야 안 망한다는 뜻이에요. 망해봐야 안 망한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되는 것이, 그것을 우리가 믿고 싶어도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망해봐야 안 망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당최 안 망하기 위해서 망해볼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뭐가 걱정되느냐 하면, ‘망하는데 진짜 계속 망해버리면 나는 손해잖아.’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통박, 계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네가 안 망하기 위해서 망해야 한다고 아무리 주님 쪽에서 설득을 해도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내 백성 없는 것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해도 소용없는데 아예 없애버리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해가지고 백퍼센트 주님의 사랑만으로 구원받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거예요. 안 망하려고 해도 망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 겁니다.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인데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그 당시에 다윗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암몬과 전쟁 중에 있었어요.

그런데 자신은 전쟁터에 안 나갔으니까 심심하던 차에 아랫집을 그저 봤어요. 한남동이나 이태원, 서울의 잘사는 집에서 아랫집을 보니까 어떤 여인네가 목욕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목욕을 하는데 그 여인이 이상하게 뚱뚱하지도 않고, 스타일이 뭉개진 만두도 아니고, 딱 보니까 뒤태가 너무 아름다웠던 거예요.

“여봐라! 저 여인이 누구냐?” 하니까 “남편은 지금 전쟁터에 있는 이스라엘 장교고 혼자 집에 있는 여인입니다.” 다윗이 그 여인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여인을 데리고 와서 동침을 하고 말았어요. 남편이 있는 여자인데 동침을 했다, 그 말이지요. 동침을 한 뒤에 하필 임신이 된 거예요. 아기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이 수작을 벌입니다.

어떤 수작을 벌이냐 하면, ‘내가 동침한 것이 아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내 아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하기 위해서 전쟁 중에 있는 남편에게 휴가를 주고 자기 아내와 동침을 하게 해서, 그 애가 누구 애인지 모르도록 희석시키는 작업에 들어간 거예요. 소위 물 타기라고 하는데요. 정치적인 용어지요. 그렇게 희석시키는 작업에 들어간 거예요.

그 때는 국립수사연구원이 없었고 dna 친자확인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남편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전쟁 중에 어떻게 나 혼자 호사를 누리겠습니까?” 해서 휴가는 나왔지만 아내와 동침하지도 않고 그냥 다시 전쟁터로 가버렸어요. 그러면 지금 우리야라는 장군은 이스라엘을 치는, 하나님 믿는 나라를 치는 그 원수를 치는데 급급한데 다윗은 자기 정당화시키는데 급급한 거예요.

그러면 자기 정당함을 나중에라도 노출시킬 수 있는 남자가 우리야기 때문에 고의가 아닌 척 하면서, 미필적 고의, 고의가 삽입된 전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피신해야 될 성 앞에까지 일부러 가까이 가도록 떠밀어서 살인을 했지요.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장군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아니까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단선지자를 보내서 “당신이 하나님의 종을 죽였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13절에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할 때 주어질 벌칙까지 죽 적어줘요.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더 잔인한 벌을 내린 거예요. 차라리 다윗을 죽여 버리면 괜찮은데 다윗을 안 죽여요. 다윗을 살려주면서 누굴 죽이느냐 하면, 다윗의 아들을 죽여요. 임신해서 태어난 그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인간은 자식이 없으면 자기밖에 모르지만 자식을 가진 사람 같으면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께서 왜 자식을 죽이고 다윗을 죽이지 않느냐 하면, 자식 죽는 것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런데 죄라는 것은 이미 고백했잖아요. 아니에요. 죄는 고통과 겸해서 느껴야 돼요. 고통과 겸해서. 아픈 것? 아픈 것 말고, 육체적으로 아픈 것 말고요.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참으면 되지만 더 아픈 것이 뭐냐?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기느냐 하면, ‘그 애는 살아도 나는 죽어야 돼.’ 할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빼앗아감으로서 근본적인 나의 사는 이유와 의미, 그 가치, 그런 자신이 몽땅 날라 가는 그 순간, 내가 살아도 죽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산채로 만끽하게 만드는 벌칙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겁니다.

그 방법이 언약의 원리인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칩니다. 그 이삭이 어떤 자식이냐 하면, 미운 자식이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 너무나 사랑하는, 자기보다 사랑하는 자식을 죽입니다. 결혼 안하고 애 없는 사람들은 그걸 잘 못 느껴요. 요새는 자식 낳아도 못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맞은편에서 한 40대중반의 여자가 오는데 한쪽 팔은 있는데 나머지 한쪽 팔이 이만큼이 끊어졌어요. 아, 그 순간 뭘 느꼈느냐 하면, ‘저 사람이 내 딸이었다면……’ 본인이야 뭐 팔 하나 없으면 없는 대로 ‘이것도 팔자다’ 해서 나머지 있는 팔 가지고 그럭저럭 살면 그만인데, 본인 말고 너무나 그 딸을 사랑하는 부모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여, 차라리 내 팔을 자르지, 이 늙어빠진 내 팔을 자르지.’

아직 40대밖에 안된 딸의 팔을 잘라서 저렇게 평생 팔 없이 살도록 해서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걸 보는 순간 야, 참 저 팔 없는 여인, 한쪽 팔이 이만큼 끊어져서 없어요. 저 팔 없는 여인. 본인은 견디지요. 자기 인생이니까 견디지만 그 부모가 자식을 볼 때 마다 가슴 속에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네가 벌을 받는구나.’ 하고 가슴을 치겠습니까?

그리고 팔이 한쪽이 없으면 다른 사람 보기에도 민망하니까 보조 팔을 차든지 해야 되는데 팔이 한쪽이 없으면서도 산책을 하면서 오더라는 말이지요. 가까이에서 보니 팔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뭐 하나, 꽃을 꺾었는지 그걸 뒤로 돌려서 잡고 있으니까 내 쪽에서 보기에 팔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호세아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의 팔자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버림을 받고 긍휼을 입지 못했어요. 그 아픔을 누가 느끼느냐? 아버지 호세아가 느끼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죽을걸.’ 내가 죽는다는 말은 그동안 마귀로부터 부여받은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최고야.’ 하는 그것,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든 예수를 믿든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십자가 아니에요.

십자가를 믿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 내가 아픔도 없이, 뭔가 내가 가장 귀한 것이 상실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도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저기 계시면서 일하신다는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를 증거 하는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것이 달라요. 예수님을 증거 할 때는 그냥 내가 살아 있는 채로 가능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를 증거 할 때는 내가 더 이상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일 경우에만 그것이 증거 돼요. 왜냐하면 가장 귀한 것, 내가 살아도 살 이유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상실한 그 상실의 아픔을 느낄 때 내 자식보다 더 귀한 분인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기서 마주치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나는 내 자식만 귀한 줄 알았지 귀하신 주님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큰둥하게 ‘그럴 수도 있겠지. 뭐 어쩌라고?’ 별로 감정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귀한 자식을 빼앗아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는 내 자식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라는 사실을 노출시키면서 “네 자식보다, 너보다 더 귀한 분이 주님인데 주님이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죽었다, 라는 사실을 네 귀한 것 죽어보니 이제 알겠어?”

그동안 너는 예수 전한다고 십자가 이야기했지만 너는 지금 살아있는, 너 안 다치고, 너 안 깨지고 살아 있으면서 ‘선교한다, 전도한다, 목사다.’ 했지만 전부 다 그것은 사기거든요. 왜냐하면 악마에게서 계속 부여받는 거예요, 의미를. ‘너는 살아 있어야 해. 남은 죽더라도 너는 의미 있어. 의미 있다고.’ 악마가 뭐냐 하면, 의미부여가 악마에요. 의미부여가!

특히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바칠 때의 그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을 버릴 때 그 아픔에 아브라함이 동참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네가 네 자식을 잃어보니까, 그것도 미운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보니까 벌써 “주여, 차라리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자식은 제발 살려주시고, 자식을 죽게 하는 그 죽음의 칼을, 자식에게 주어지는 모든 진노의 벌을 저에게 주옵소서. 자식은 용서하시고.”라는 그 아비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부러 버림받도록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창세기 3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자식을 낳는데 그냥 자식을 쑥 낳은 것이 아니에요. 고통이 포함되어서 자식을 낳게 합니다. 이 말은 그 고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 앞으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려야 될 그 죽음, 아픔을 자식 낳는데 섞어버리는 거예요. 여자가 자식을 낳는 거기에.

여자가, 자기 아내가 아파서 내 자식을 낳으면서 침상에서 울부짖고 아파할 때 거의 초죽음이지요. 죽음과 가까이, 아주 가까이, 그 근처에 왔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을 아기를 낳으면서, 하나의 생명을 낳으면서 모든 지옥과, 심판과, 저주의 고통을 여자는 만끽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생명을 위해서 여자가 망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망가지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 있을 때 그 애 아버지는 어디 갔습니까? 친구하고 놀러갔지요. 물론 요새 아빠는 안 그렇겠지만. 애 낳는다고 아내는 침상에 있는데 남편은 새벽 두시 되어서 ‘아이고, 나는 잠이나 자러 간다.’ 하겠지요.

어떻게 고통을 나누려 해도 이것이 말로 될 문제가 아니고 내 몸은 아니잖아요. 애 낳는 몸이 아버지 몸입니까? 아버지가 안 낳지요. 아파도 내가 아픕니까? 안 아프다, 그 말이지요. 옆에서 그러지요. “참아야 된다. 손 꼭 잡고 내가 기도해 줄게.” ‘그러면 역할 바꾸자. 내가 기도할게 네가 애 낳아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실제에요, 실제.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상해서 ‘얼마나 아프겠는가?’ 아프겠는가, 가 아니라 네가 아파봐야 아픔을 알아요. 네가!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견디지. 육체가 아픈 것은 아픔도 아니에요.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할 때의 그 아픔이에요. ‘내가 이걸 상실했으니까 나 그만 살래.’ 그게 바로 우리가 진즉 죽어야 될 그 죽음을 체험한 거예요.

우리는 ‘로암미’에요. 백성도 아니에요. 긍휼을 입을 필요도 없어요. 진즉 죽어야 될 인간이에요. 호세아 안에 주님, 그리스도 십자가 들어 있습니다. 호세아 자기가 남자인데 어떤 남자가 음란한 여자, 자기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가는 그런 여자를,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혼인하겠어요? 자기도 남자인데요.

남자가 여자 구할 때는 딱 세 가지 조건이에요. 첫째는 예쁜 것. 두 번째는 귀여운 것. 세 번째는 순종할 것. 이것은 학력이니 수입이니 그런 것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예뻐야 되고, 무조건 귀여워야 되고, 무조건 남편 말에 고분고분 순종해야 돼요. 토 달지 말고, 잔소리 하지 말고 순종해야 돼요.

전 세계 인구 중 남자가 35억이라면 35억 남자가 다 그래요. 그런데 호세아는 그 ‘아니다’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 ‘아니다’를 위해서 ‘그러니까 아니지. 그러니까 너는 이 십자가고통과 따로 노는 거야.’ 주께서는 선지자가정을 망하게 함으로서 망해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 그 고통 중에, 모든 것을 상실한 죽음 속에서 같이 죽었던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제상황이지 이것이 이론이거나 종교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호세아는 느끼게 되는 겁니다. 호세아의 아픔이지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결국은 그렇게 해서 11절 끝에 보면 이스르엘, 그 이스르엘은 누구냐 하면, 바로 호세아의 맏아들이에요. 이스르엘이 새로운 사랑, 백퍼센트 주님의 공로, 사랑만 담고 그 주님의 사랑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도 덩달아 확장되는 그런 혜택을 예언에서 보여줬어요.

따라서 이 껍데기 같은 내가, 키가 얼마냐, 인물이 잘났느냐,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백 프로 주님의 십자가의 아픔과, 십자가의 생명과, 주께서 용서했다는 그 긍휼만 담겨 있다면 사나 죽으나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복음 전한다 하면서도 실속은 내 잘남을 따로 챙겼던 저희들의 이중적인 그것, 주여, 첫 번째 다윗은 죽고 두 번째 다윗이 구원받은 것처럼, 망해야 비로소 사는 이 원리를 우리는 남들에게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