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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9년 4월 17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1-4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49: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앞으로 당할 일’(창 49;1)이 곧 축복(창 49:28)입니다. 이는 인간이 나름대로 기대하는 바가 총족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내심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은 전부 아담으로부터 물러받은 이 땅의 것입니다. 즉 자신을 이 땅의 존재로 붙들어 매어놓기 위한 것들을 찾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12 아들들은 마냥 이 땅의 백성이 될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을 떠나야 할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줄곧 이 지상의 삶에 매진했던 그들이 내심 원하는 바가 ‘복’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 땅에 미련두지 않기 위한 조치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이 다 사라져도 하늘에게 영원히 살아남을 민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12아들에게 복을 내리게 하신 겁니다. 이 과정에서 야곱의 아들들과 그 후손들은 하늘나라에 적합한 속성을 장착해야 합니다. 이는 곧 그동안 익숙한 땅의 원리를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땅이란 낙원에서 쫓겨났던 아담부부의 터전입니다. 이 아담과 그 후손들은 살기 위해서 땅에서 애쓰게 되지만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아담이기에 그 아담의 본질을 아담의 그 어느 후손이라도 탈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영원히 존속한다는 말은 곧 아담의 요소 대신 다른 요소가 찾아들어 온다는 말입니다.
바로 새로운 아담의 요소가 복의 내용으로서 이스라엘 12지파 속에 흘러 들어옵니다. 이 흘러들어오는 요소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다른 민족과는 달리 일찍감치 ‘죽은 자’들이 되는 겁니다. 즉 ‘아담으로서’는 죽고, ‘새 아담으로서는 사는 것’입니다. 이 교체 작업이 ‘복’이며 이 ‘복’은 각 지파의 기능으로 작용합니다.
각자 맡은 기능은 달라도 본질은 하나같습니다. 즉 ‘아담으로서는 죽고’, ‘주의 이름의 기능’을 행사한다는 요건 속에서는 살아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주님의 기능’이 우선입니다. 그들의 구원이 우선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 얻기 위해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리기 위한 복입니다.
이러한 교체 작업은 복을 주는 야곱의 개인적 인생 경험에 먼저 들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바로 그 상황들을 12지파 전체로 확대시키는 겁니다. 야곱은 개인적으로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밤의 활동자’를 만난 겁니다. 해가 떠오를 때, 그 천사는 자기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낮의 세계에서 밤의 세계로 떠나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낮은 인간들의 활동 시간입니다. 야곱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낮에 벌리는 자신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삶이 보장된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아담에게서 물러받은 악마적 마음입니다. 밤에 활동하신 분에 의해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인간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밤의 활동으로 인하여 모든 것은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게 마련인 인간들로서는 알 턱이 없습니다. 낮의 활동자는 밤의 활동자에 의해서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 바치면서,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바쳤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야곱이 겪은 경험에 의해서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한 것, 자신이 가진 것으로 신의 심판과 처벌에 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당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날 아담적인 시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아담적 요소를 대신할 요소가 ‘복’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에게 할당됩니다. 그 첫 째가 르우벤에 대한 예언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이입니다. 자식들 속에서 아버지의 대행자입니다. 아버지의 요소들이 맏이에게 우선적으로 이어집니다. 과연 맏이는 어떻게 살아야 맏이다운 것인가요? 르우벤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였다는 점에서 맏이답습니다. 즉 맏이가 될 수가 없는 요소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아버지 야곱이 당했던 경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창세기 25장에서 야곱은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형이 있었는데 쌍둥이입니다. 즉 누가 맏이될 것인지 최종 결정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육신적 관점, 아담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뭐래도 먼저 세상에 나온 에서가 맏이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야곱을 통해서 주어지는 복은 다른 변화도를 보여줍니다.
즉 이 세상에서의 맏이란 시간상 ‘먼저 세상에 나온 자’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인식과 상식을 하나님께서는 육이라고 쏘아붙이면서 뒤집기를 시도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육적인 인간 세계에서는 시간적으로 먼저 태어난 자가 맏이라고 간주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조시킬 언약의 세계에서는 ‘육과는 전혀 다른 요소’를 내용으로 해서 순서가 주어집니다.
즉 ‘먼저된 자가 나중 되는 원리’를 적용해서, ‘먼저 나온 자가 먼저 된 자’라는 인식을 공격하시고자 하십니다. 새로운 아담의 세계에서는 과거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주도권을 앞당겨 현재 속에서 행사하시는 겁니다. 야곱이 허기진 형 에서에게 팥죽을 내어놓았을 때, 형 에서는 자신의 장자의 명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의 세계에서 ‘먼저 태어남’이 어떻게 ‘나중 태어남’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바로 ‘이 없는 경우’를 이스라엘에게는 뒤집기 해서 모든 ‘있는 경우’를 심판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즉 르우벤이 보여준 장자답지 못한 모습은 실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 안에 다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아담의 요소요 육의 요소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를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할 줄도 모를 뿐더러 끝까지 자신에 대해서 가치를 못 버립니다. 이게 아담의 성질입니다. 이 아담의 성질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심판하고 죽이고 저주하십니다. 바로 이 작업이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각 지파 속에서 기능으로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르우벤의 신체는 고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 심성은 액체입니다. 고체가 액체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개다가 ‘물의 끓음’이라고 했습니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아담의 본성을 르우벤 본인의 이성이 자제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야곱의 ‘야곱적 본성’에입니다. 이 본성을 ‘오실 아담’의 본성으로 갈아치워 주시는데 이게 ‘복’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희망은 다 좌절됩니다.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함이 곧 복이요 행운이요 사랑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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